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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제별로 본 구약신학 평가A+최고예요
    주제별로 본 구약신학 - 요약, 서평Ⅰ.요약1.하나님의 자기계시구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초점이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구약 안에 나타난 계시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창세기 2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허락 하셨다. 그러나 원래의 창조의 조화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지자 새로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시작하여 그 후 계속하여, 계시는 이러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야 할 특별한 성격을 띠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계시는 구속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록 이생애에서는 죄 때문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완전한 만남이 불가능하지만 때로는 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매개자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타나는 것은 실제적인 계시이다.하나님의 이름은 홀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맺는 주요 수단이요, “계속적인 예배의 방편이 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보여 질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 된 상태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보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완전한 형상을 보이기를 거절하셨다.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역시 신약성경에도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즉 인간의 죄를 덮는 구속 사역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보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기분 내키는 대로 주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 구약계시의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타락한 세상에서의 계시는 구속적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의 상태를 다루어서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으로 인간의 죄악 된 상태 속에 자신을 계시하심이 분명하다.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궁극적으로 동의를 요구하는 온 땅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 보이신다.거룩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의이다. 모든 의의 기초는 그의 백성을 언약 가운데 놓으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악을 사용하시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주 인간들의 배척을 사용하여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나가신다.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배반을 사용하셔서, 그것도 그들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격려하면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신다. 신약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던 배척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사역을 위해서 사용하셨다.구약의 하나님의 구속적인 관대하심의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계시된 놀라운 신약의 아가페 사랑의 개념을 기대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3.창조와 섭리창조의 교리 자체로 들어가면, 우리는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의 말씀과 직접적인 간섭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말씀에 의한 창조는 하나님의 초월성, 즉 하나님의 의지의 탁월성과 그의 노동의 용이성을 강조한다.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은 첫째, 수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드신 최초의 창조가 있다. 둘째, 수준에는 하나님은 최초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도 자신이 그 안에 세우신 생명의 과정을 통해 창조된 세계를 계속 돌보시는 일을 섭리라 한다. 세 번째, 수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보호하실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성취시키려고 일하신다.4.남자와 여자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면류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기 위해서 동물을 취하지 않고 흙을 취하셨음을 주목해 보라. 남자와 여자는 이 세상 안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일하도록 창조되었다.인간들은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 궁극적으로 다른 인간만이 인간 본성의 깊은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남자와 안에 있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온 것임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결과라는 것이다. 죄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심판은 항상 자비와 혼합되어 있다.죄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고 그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죄는 파멸에 이르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변화시켜 놓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들은 그들을 올바르게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원상으로 회복시킨다.6.언약구약에서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에 그 근거를 두며, 성경적 역사관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언약이라 하면 특별히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을 이야기하지만, 언약의 모든 범위는 창조로부터 선지자들의 시대에까지 빠짐없이 계속된다.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에 기초해 있다. 그 언약의 효력은 영원하다.1)노아와 맺은 언약우리는 언약이 단지 두 당사자 간의 협약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그들과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실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범위는 노아와 그의 자손에게만 한정 되는 것이 아니요 전 인류에 해당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들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 효력은 “모든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로서 무지개는 하나님과 땅 사이의 언약의 상징이 되었다.2)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 15장과 17장)이 언약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의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시고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시는 창세기 12:1-3에 이미 나타나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큰 민족의 아비, 즉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들 대대 후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보증하신다. 결국 그 언약은 그들 대대 후손 미에서 주권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이런 선택의 동기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이 후에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또한 하나님과 자식의 관계를 맺도록 양자로 입양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종주이실 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도 되셨던 것이다. 모세의 언약은 하나님의 결정에 기초해서 맺어졌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순종이라는 응답을 통해서 이런 실체를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사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이미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 약속의 축복 속에 계속 거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오직 그들의 복종의 결과에 달려있다. 이 책을 보면 그들이 한 국가로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의무들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4)다윗과 맺은 언약신명기적 역사 속에 이스라엘을 향한 위협과 나란히 병행해서 흐르고 있는 것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을 취하셔서 반복하실 때마다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포괄적인 구조로 반복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또다시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들을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약속들을 언급하실 때마다 상당한 부가적인 축복을 더하신다.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한 언약의 중보자가 될 것이라는 사상은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에서 이미 분명해졌다. 이사야가 그의 모든 백성을 위한 언약의 축복들을 실현시킬 충실한 다윗의 계승자를 약속하고 있는 반면에 나단은 영원한 축복의 약속을 다신 언급한다. 이 지점에서 조약 형태는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으나 다윗의 자손이요 메시아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실현될 더 광범위한 언약의 이상 속으로 흡수된다.7.율법율법은 언약의 표현이요, 항상 언약보다는 2차적인 것이다. 즉 율법은 언약 안에 있는 삶의 특성을 표현한다. 율법의 수여는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제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제사의 형식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올 피조된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의 일부였다.9.경건구약의 경건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마음의 응답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고 인자하신 분으로 계시하실 때에는 응답이 있어야만 한다. 이 계시에 대한응답은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느끼는 참된 것이라면,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깊은 간격이 고려되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하나님을 발견한 기쁨이 드러나야 한다.경건은 율법에 정의되어 있는 언약 관계로부터 함께 성장해 나온다. 그러나 경건은 홀로는 서지 못한다. 경건은 공동체의 도덕적 생활로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10.윤리구약의 윤리는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동일하게 거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 나름대로 인간으로서 거룩할 수는 있다.윤리의 참된 목표는 의지의 교제를 넘어서 본성의 교제로의 운동, 즉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했던 교제로의 회복이다.구약은 조직 내의 개인들의 도덕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동일하게 조직들의 조직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구약의 윤리는 “개입”의 윤리가 아니라 “참으심”의 윤리, 즉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윤리이다 이 참으심은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망을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참으심을 체험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임박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11.지혜근본적으로 지혜는 인생에서 숙련되고 또 성공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술을 말한다. 지혜는 삶을 살아가는 지식을 말한다. 지혜의 중심지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결정의 중추인 마음이다.예레미야 시대에는 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옆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각이다.
    인문/어학| 2012.12.28| 7페이지| 1,500원| 조회(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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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주의 종말론 `성도의 죽음`
    - 목 차 -Ⅰ. 서 론 ------------------------------------------------------ 2Ⅱ. 본 론 ------------------------------------------------------ 21.육체의 죽음 ----------------------------------------------- 21) 육체적 죽음의 성질 ------------------------------------- 22) 죄와 사망의 관련 --------------------------------------- 43) 신도의 죽음의 의의 ------------------------------------- 74) 신도의 죽음에 대한 태도 -------------------------------- 9Ⅲ. 결 론 ------------------------------------------------------ 11Ⅳ. 참고문헌 --------------------------------------------------- 12Ⅰ.서론필자는 박형룡박사 저작전집Ⅶ 교의신학 내세론을 배우면서 내세론 중, 제1장의 내용 중심으로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전개하고 벌코프를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주장과 차이점을 쓰고자 한다.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죽음을 직면하지만,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안타가운 현실이다.사람은 태어나서 신자나 불신자나 다 육체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며, 죽음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서 적어보려고 한다.Ⅱ.본론종말론을 내세론 이라고도 한다. 이는 종말이 이 세상의 종말과 개인의 종말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세계에 관한 사건들까지 포함해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 용어로는 종말론신비다. 물체들은 유기체이거나 화학적으로 복합된 것이거나 혹은 단순히 기계적인 집합체이거나를 물론하고 끊임없이 존재에로 오고 또 떠나가 버리되 도무지 그것들의 원소적 구성분들이나 구조 부분들의 멸절을 통하지 않고 단순히 이 부분들이 임시적으로 서로 유지한 관계의 해소에 의하는 것을 우리는 관찰한다. 물질은 결코 절멸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인 사람은 어찌하여 어떤 식물이나 동물보다도 더 짧은 생명을 누리고 중지 하는가? 황차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어찌 죽어 없어질 것인가?사망을 결코 멸절이 아니니 어떤 파에서 악인의 사망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물을 아무 것도 멸절하지 않으신다. 사망은 존재의 종지가 아니라, 생의 자연적 관계들의 분리이다.사망이 꼭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을 육체 생명의 중지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다음에는 생명이 꼭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일어나고 우리에게는 답변이 없다. 우리는 생명이 그 본질에서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것의 관계들과 동작을 보아서 그것을 아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관계들과 동작들이 끊어지고 분리되는 곳에 죽음이 들어온다는 것은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죽음은 생명의 자연적 관계들의 파괴를 의미한다.사람은 천사와 같이 아니하여 영혼이 신체와 연합한 이중 성질로 창조되었다. 그는 감각의 가로들을 통해 보도를 받는다. 그의 신체는 그가 다른 인생들과 주위에 있는 세계로 더불어 접촉함에 이용하는 기관이다. 그가 죽는 때에 그 몸을 구성한 약 30의 화학적 원소들은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그는 그 접촉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죽은 자들의 영혼들은 생존자들과 또는 우리 주위의 세계로 더불어 다시 접촉을 가지지 못한다. 즉 죽은 자라도 영혼이 남아 있어 자기의 몸이 무덤에서 썩는 것을 아파하며 스스로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은 비록 무덤에서 썩으나 아주 없어질 것이 아니라, 장차 부활하여 영혼과 다시 연합하여 영원히 설명되고 처리되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순전히 자연적인 실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격에게 사망이 순전히 자연적인 사실이기는 불능하다.」 그러나 인생의 사망을 그의 자연적 본래적인 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교회의 한 모퉁이에 출몰하여 온 것은 기괴한 일이다. 펠라기우스파와 소시너스파는 주장하되 사람은 죽을 수 있게 창조되었으니 이는 단순히 그가 죽음의 밥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망하기로 정명되었다는 의미에서라 한다. 아담은 죽음의 가능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타락되기 전에라도 그것에 굴복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아담은 그가 죄를 범했든지 아니했든지 그의 본성의 소질에 의해 죽었을 것이요 그의 후손들도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다 본성의 필연에 의해 죽는다고 한다.1)과학의 응원은 확실한가?금일에 자연과학은 유기 물질은 부패와 해소의 종자를 지니는 고로 반드시 사망한다고 단언함에서 이 사람의 사망은 자연적이라는 신학적 교설에 응원의 부채질을 하는듯 하다. 자연 과학의 비위에 맞추려는 동기로 소위 조건적 영생설이 기독교 신학계에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초대 교부들과 후대 신학자들은 아담이 참말 죽을 수 있게 즉 해소의 법칙에 굴복하게 창조되었다는 것, 그러나 이 법칙이 그의 경우에 실제적 효력을 발생한 것은 오직 그가 범죄 한 때문이었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가 만일 순종하였다면 그는 영생의 상태에로 승진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죄는 그의 체질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죄 아래서 그는 사망의 법칙에 굴복하기로 버려두어진 것이며 사망을 경험하지 않고 얻을 뻔 한 영생의 은혜를 박탈당한 것이었다.그러나 자연 과학의 단언은 이 이론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가령 과학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사망이 동식물계를 제압하였다고 확실히 증명하더라도 이성적 도덕적 실제들의 세계도 역시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다고 필연적으로 결론하게 되지는 않는다.2) 성경의 지향성경은 이 자연적 사망설에 반대하여 지적하고 있다.(창 2:17; 3:19; 롬 5:12, 17: 6:23; 고전 15:21; 약 1:15)(4)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자연적인 것 혹은 단지 이상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분명 이질적이며 적대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즉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시 90:7, 11)으로, 심판(롬 1:32)으로, 정죄(롬 5:16)로, 저주(갈 3:13)로,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공포로 채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엄격한 정의를 시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즉시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의미의 죽음을 내리실 수 있었다.(창 2: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통 은혜를 통해 죄와 죽음의 작용을 제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특별 은혜를 통해 이 적대 세력을 정복하셨다.(롬 5:17; 고전 15:45; 딤후 1:10; 히 2:14; 계 1:18; 20:14) 이제 죽음이 그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하였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였으며, 영생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요 3:36; 6:40; 롬 5:17-21; 8:23; 고전 15:26, 51-57; 계 20:14; 21:3,4)김길성 교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 의, 거룩”으로 묘사한다(엡 4:23-24; 골 3:10;고후 5:17). 그리고 넓은 의미로는 범죄 한 후 아담을 낳았다(창 9:6).)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좋았더라”는 표현에는 죽음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한 형벌에 의해서 임을 말씀하신다.)제 3절 신도의 죽음의 의의)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형벌 즉 죄의 값으로 말한다는 것이 앞 절에서 길게 논술되었다. 그러나 신도는 이미 칭의 되어 형벌의 속상을 행할 의무 아래 있지 않는 고로 “왜 그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가?” 경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 성경에 죽 은자를 위한 기도의 실례나 그것을 권고하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경이 현세에 있는 인물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심지어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고하는 말은 그렇게 많이 포함하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해서는 전연 침묵하는 그것이 소용없는 일인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신자들의 죽음의 의의)신자들의 죽음에서 형별의 요소가 제거된 것은 분명하다. 행위 계약의 요구로서건, 정죄하는 세력으로서건,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직도 죽음이라는 쓰라린 고통을 통해 신자들을 인도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시는가?죽음은 종종 신자들 속에 있는 믿음의 힘에 대한 최고의 시험이며, 외관상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 승리를 의식하게 되는 눈부신 현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벧전 4:12,13) 신자들의 죽음은 영혼의 성화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즉시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된다.(히 12:23; 계 21:27)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종말이 아닌 완전한 생활의 시작이다. 또 그들은 이 죽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죽음으로 들어간다.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사죄와 칭의와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요 3:36, 6:40; 롬 5:17-21, 8:23; 고전 15:26 51-57; 계20:14, 21:3-4). 그러므로 신자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그 외형은 같으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불신자들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은 형벌과 저주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셨기 때문에 정죄와 형벌이 있을 수 없다.)김길성 교수님은 죽음은 교만을 겸손케 하는 역할을 하며, 육의 욕망을 억제하며, 세속화를 저지하며, 영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한다. 죽음은 신자의 성화를 완성하고, 종종 신자에게 있는 신앙의 최고의 시험이 되고, 때로는 패배 같이 보이는 그 시간에 승리의 의식을 누리게 한다(벧전 4:12,13).하다.
    인문/어학| 2012.12.28| 12페이지| 2,000원| 조회(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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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천년에 근거한 신천지교리 비판
    제 목 : 무천년론에 근거하여 신천지의 교리를 비판하라- 목 차 -Ⅰ. 서론 ------------------------------------------------------------------ 2Ⅱ. 정통과 이단의 정의 ---------------------------------------------------- 21. 정통기독교의 정의 ---------------------------------------------------- 22. 이단의 정의 ---------------------------------------------------------- 23. 이단의 특성 ---------------------------------------------------------- 3Ⅲ.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 -------------------------------------------------- 41. 무천년설 ------------------------------------------------------------- 42. 역사적 전천년설 ------------------------------------------------------ 43. 후천년설 ------------------------------------------------------------- 4Ⅳ. 신천지 교리 ----------------------------------------------------------- 41. 신천지 교리의 뿌리 --------------------------------------------------- 42. 이만희 신격화 교리 --------------------------------------------------- 53. 직통계시의 교리 ------------------------------------------------------ 54. 재림주 교리 ------------------------------------------------------ 위에 조직신학적인 신앙관이 확고하게 세워져야 한다.2. 이단의 정의이단은 문자 그대로 다르거나 틀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거짓교리를 주장하는 무리들이다. 이단이란 단어는 희랍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고전 희랍어에서 사용된 하이레시스(hairesis)라는 이단에 해당되는 말은 초기에는 ‘선택’, 또는 ‘선택된 것’, ‘선택하는 행위’ 등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특정한 ‘교의’나 ‘주의’를 주장하는 무리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헬라철학에서 어떤 특정한 이론을 주장하여 학파나 당파가 생겨나면 이들을 지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그러나 최근에는 이단을 지칭하는 말로 영어에서 이단, 종파, 분파 등이 구분 없이 사용 되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장로교 합동측의 견해는 성경의 정확무오를 부인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 이신칭의에 근거한 구원론을 부정,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이적을 부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신조 개요를 믿지 않는 것 등을 이단으로 규정함, ‘사이비’라는 개념대신에 ‘이단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서양교회사에서 이단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된 ‘헤러시’라는 용어는 원래 그 자체는 좋고 나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중성적인 의미로 종파나 무리를 가르킬 때 성경에서 사용되었다(행 5:17; 15:5). 그러나 교회 내부의 분파나 분열을 조장하는 편당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고전 11:19). 또 부정한 죄를 범한 자들을 지적할 때(갈 5:20)와 스스로 선택하여 다양한 형태의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는 이단적인 성격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딛 3:10). 바울은 이단이라는 이 용어를 주로 교회를 해하는 무리들을 칭할 때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 후로 초대교회의 교부시대에서도 이단을 규정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교부들 가운데서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였다.)3.이단의 특성)이단들은 말씀중심의 정위해 회개하지 않는 땅에 오실 때이다. 따라서 양과 염소의 심판과 흰 보좌심판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며, 그 뒤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이 따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하늘과 땅에서 모두 ‘지금’이다. 이처럼 무천년설은 문자적인 천년설을 부정하고 ‘천년’을 우화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해석한다.2. 역사적 전천년설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의인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이며, 유대인을 회심케 하여 성지로 돌아오게 하고, 또한 유대인의 국가를 전례 없는 영광과 권능으로 재건하여 그의 성도들과 함께 천년 동안 이 왕국을 통치하신다는 학설이다. 특히 이 학설은 초대 교회에서 정설로 받아 들여졌고, ‘저스틴’(Justine)은 이를 정통교리라 하였다.3. 후천년설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있다는 학설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현재 성도들이 살아가는 복음시대에 나타나며, 그리스도는 그 종말에 오실 것이다. 즉 현세대의 종국에 가서 재림이 있기 전 천년 동안은 복음이 크게 전파될 것이고 교회가 왕성해진 후에 재림이 실현 된다고 보는 견해이다.Ⅳ. 신천지 교리)1. 신천지 교리의 뿌리이만희 씨는 잠시 장로교 신앙을 하다가 자칭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당시 생수로 신유의 능력을 베푼다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던 한국 교회 이단의 대부 격인 박태선 씨의 전도관에 입교하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전도관 탈퇴자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집단 취락을 형성한 과천의 세칭 어린 종 유재열씨의 장막성전을 거쳐 장막성전의 일곱 천사 중 하나였던 자칭 하나님 백만봉 씨의 제자로 들어갔다가, 1980년 3월 14일 백만봉 씨의 시한부 종말설의 불발과 함께 신천지역사를 시작하게 된다.1960년대 이단이었던 과천의 장막성전이 정통교회로 개혁되는 과정의 일련의 사건들이 요한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된 실상이고, 이만희 씨와 홍 종효 씨 둘이 두 증인이라 주장한다. 그 후 소위 실상이라는 허황된 교리 위에 통일교와 그 아류인 진진화씨의 생령교회 출신이었던 김건남, 김병희씨에 의해특히 최근에는 교회에 ‘추수꾼’자들을 파송하여 한국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혼란하게 하고 있다. 신천지를 추종하는 자들은 전국의 원생과 교인을 합쳐 약 3만 5천 정도의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들은 각 지역별로 12사도의 이름대로 12지파를 만들어 부르고 있다. 이만희는 자신의 전력 때문에 유재열과 홍종효를 비판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교리의 뿌리를 저들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3. 직통계시의 교리이단 교주들의 공통점은 직통계시자들이다. 이만희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이 세상에는 성경을 풀이한 수많은 책들과 그 책의 저명한 저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필자가 증거 한 이 책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지식과 권위로 연구하여 해설한 것보다 주님의 성령과 천사들로부터 직접 보고 듣고 지시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과 실상을 동시에 증거 한 것이기 때문이다"(이만희, 계시록의 실상, 도서출판 신천지 p.3)."필자는 주 재림 시 등 예비할 말씀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각종 신학 세계를 찾아 다녔으나 가는 곳마다 필자가 찾는 주님의 말씀은 찾지 못했고 모든 모임마다 사람의 모임이요 하는 말마다 사람의 말, 세속의 말뿐이었으며 그 누구 한사람 성경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암 8:11). 그리하여 필자가 하늘의 하나님을 찾아 나선 배움의 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보고 듣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요 6:45)을 본 책 '성도와 천국'에 실어 모든 형제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것이니 보고 깨달아 그토록 원하는 소망의 나라 천국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이만희, 성도와 천국, 도서출판 신천지 p1).“이 책은 직통계시를 받은 것을 기록한 것이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 일이요, 천국의 비밀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상 제일의 책이요, 만국을 다스릴 철장 권세이다. 천국에 소망을 둔 자라면 한번은 꼭 읽고 깨달을 영원한 복음이다”(위의 책 p.22)4. 재림주 교리모든 교리는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기 위한 . 이씨는 이 시대에는 교주 자신을 믿어야 구원이며 교주 이씨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주장이다."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심과 같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한 목자를 빛으로 택하시고(마 24:45~47; 요 16:14) 그와 함께하여 성경의 예언대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과 구원의 일을(창 1:6~7, 마 13:24~26) 초림 때와 같이 하신다"(위의 책 p.95).이 시대에는 교주 이만희를 택하여 심판과 구원의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교주 이만희를 믿는 것이 구원이며 그를 따르지 않는 것이 심판이라는 주장이다.한 세대가 끝나고 또 한 세대가 올 때 그때가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즉 시대마다 여러 번의 종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만희의 이러한 주장은 지구의 종말을 부인하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때 그 인물에 의하여 그 시대의 종말이 온다는 주장이다.이만희의 말세 심판 교리는 자신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로서, 자신이 나왔으니 종말이라고 한다.7. 보혜사 교리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에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이만희 씨는 자신이 저술한 책 표지에 ‘보혜사 이만희 저’라고 기재해 놓기도 했다. 즉 이 씨는 자신을 삼위 중 하나라고 신격화한다는 얘기다."그러므로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사람은 사도 요한 격인 야곱(보혜사: 이스라엘) 곧 승리자를 만나야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받게 되고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이만희, 도서출판 신천지, 계시록의 진상2 p52)."오늘날 이 사람은 예수님이 보내시는 보혜사로 오셔서 사도요한의 입장에서 성경을 가지고 너희인 우리에게 예수님의 뜻과 일을 알려주는 것이다"(위의 책 p.50)."그러면 이 보혜사는 어느 위치에 있는 사명자인가 알아보자 성령이신 성부(아브라함)는 성자 예수(이삭)을 낳았고, 성령이신 예수(이삭)는 성자 보혜사(야곱)을 낳으셨으니 이것이 삼위이다(눅 13:28)"(위의 책 p.37)Ⅴ. 무했다.
    인문/어학| 2012.12.28| 10페이지| 3,000원| 조회(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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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신학
    예배신학 (요약 및 서평)Ⅰ.서론필자는 “예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중 하나”라고 생각 한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없어져도 예배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사역보다도 더 철저하게 교회의 기초이며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예배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Ⅱ.본론: 요약1장 구약에 나오는 예배예배를 신학적으로 바로 이해하려면, 계시, 속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는 소명 같은 핵심적인 성경의 주제와 예배가 어떻게 연결되며, 더 나가서 신약 전체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때, 예배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예배에 대한 구약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 나서서 먼저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나중에는 출애굽 사건과 시내 산 경험을 통해 민족 전체에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다.2장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숭배함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보면, 예배는 ‘초월적 존재나 힘, 혹은 거룩한 존재에 대하여 그를 높이며, 존경으로 다가가는 것, 적절한 행위나 의식으로 경배하는 것’이라고 정의 한다.구약 성경이 말하는 합당한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을 의미했다. 하나님에 대한 섬김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종과 신실함을 요구한다. 또한 제의 활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복종한다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해되며,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3장 예수와 새 성전성전은 이스라엘의 삶의 기준이었다. 이 거룩한 도성에서 이루어지는 의식들은 하나님께서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접 세우신 방법이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 함께하는 자리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며, 여기에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또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신다. 이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가 최후의 성전이기 때문이다(요 2:19-22).4장 예수와 새 언약성전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으로 대체되었고, 메시아를 통한 구원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복음은 가르친다. 그 의미는 이제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 가서야 이 말을 공개적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잔은 ‘내 피로 이루어진 새 언약’ 으로 선포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성전과 제사 제도를 대체하는 데에만 쓰이지 않았다.5장 사도행전에서의 성전과 공동체사도행전에 따르면 성전은 초대 교회를 위한 계시와 기도의 장으로 계속 기능을 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었고, 이들이 증언을 통해 마지막 시대에 약속된 복이 만방에 나누어질 수 있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마지막 시대의 언약의 완전 장소로, 예언된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지, 그리고 특정 장소에 매여 있지 않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열어 갔는지 보여 주고 있다.6장 바울과 복음적 예배바울의 예배 신학은 인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기길 거부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롬 1:18-3:20). 예수의 죽음은 속죄를 위한 온전한 제물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시키고 대체했다. ‘복음 사역’이란 단순히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시작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은 신자들이 교회와 세상 속에서 서로를 섬기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무장 시키신다.7장 하나님 백성의 모임 안에서의 예배하나님의 ‘성전’으로 같이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을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예배의 많은 부분은 삶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정의되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성령 안에서 나눌 수 있다.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 것이다.8장 히브리서와 예수를 향한 예배히브리서는 신약 전체에서 가장 잘 짜여진 예배신학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의 초점은 예수가 자신의 삶, 죽음, 승천을 통해 아버지께 드린 예수의 온전한 예배에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 덕분에, 신자들도 새 언약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초로, 관계를 유지한다.9장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예배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예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환상 속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올리는 경배와 찬양의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참 예배와 우상 숭배의 구별이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거부하고 거짓 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에게 떨어질 끔직한 심판이 예언 되면서, 다양하게 우상 숭배가 묘사된다.10장 예배와 복음: 총정리하나님은 합당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죄의 오염과 무지의 어두움에서 구원하고, 그 분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스라엘에 다른 종교와 타협하고 예배를 타락시킨 죄는, 결국 성전과 민족을 심판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마지막 때에’ 성전이 회복되고, 이스라엘의 예배도 갱신될 것이라고 예언했다.Ⅲ.결론: 서평최근에 서점에 쏟아지는 예배 관련 책들을 보면,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은 성경적 계시가 가르치는 대로 신학과 실천을 통해 예배를 정립하기 보다는 관습과 개인 취향에 맞추어서 예배를 드리는 잘못된 예배에 빠져있어서 필자는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필자는 평소에 예배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데이비드 피터슨’의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본 예배신학을 읽으면서 필자가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저자는 예배의 실제적 대안을 성경신학적으로 잘 제시해 주었다. 바라기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예배에 대한 관점이 신학적으로 바로 세워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많은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찾지만, 성도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예배를 통해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직접 느낄 수 있는 감동, 도전, 위로와 격려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철새처럼 교회를 전전하며, 더 감동적인 사역을 하는 곳을 찾아다닌다. 한국교회가 예배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회복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전체 계획과 그 백성을 향한 목적을 바로 볼 수 있을 때, 예배의 역동성과 진정한 의미도 회복 될 것이다.
    인문/어학| 2012.12.28| 3페이지| 1,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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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영성
    바울의 영성: 떨림(십자가). 울림(윤리). 어울림(공동체)Ⅰ.서론고린도전서를 통해 필자가 다룬 바울의 영성에 대한 연구는 현재의 한국 교회의 영성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본서를 접하면서 깊이 깨닫게 되었다.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는다. 여러 가지 문제와 원인을 분석해 내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교회를 살릴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단어라고 하면 첫째도“영성”둘째도 “영성”일 것이다. 세속주의에 물든 한국교회의 문제를 푸는 키워드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지만 그 뜻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영성이라는 단어만을 표현함으로 인해서 영성의 의미를 쉽게 정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구체적인 의미와 적용을 가지고 생각할 때 그 의미를 조금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영성을 말할 때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운 순간을 경험할 때 인생의 많은 시험과 유혹에서 그 사람의 영성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바울 당시 고린도는 로마제국에 의해 재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로마 지배하의 헬라의 활기찬 국제 무역 도시였다. 수많은 신전들이 있어 도시 전체가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고린도는 동성연애의 본산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대 종교를 통한 부도덕한 성적인 활동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방탕한 자들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도시 전체는 성적으로 부패하게 되었으며, 특히 종교적으로는 혼합주의가 번성하였다.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들 속에서 바울의 영성은 그에 대비되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또한 자신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고린도전서 주해를 책으로 내면서 저자의 영성을 바울의 영성에 비춰 깊고 풍성하게 표현하고 있다.본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상황과 교회의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바울의 영성을영성을 떨림, 울림, 어울림의 영성으로 표현한다. 평소 저자는 이런 수사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언어의 유희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데 능통하다. 본서의 제목에서 저자의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의 영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에 사회적,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당시 상황 속에서 고린도전서를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이러한 고린도적인 영성에 비하여 바울의 영성 곧 성경적인 영성은 성숙한 영성으로서 십자가 중심의 영성, 성령 충만한 신령한 영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필자는 이 책에서 떨림, 울림, 어울림의 영성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떨림의 영성’이란 십자가의 복음과 정신으로 살아가는 십자가 중심의 영성 특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을 말하며, ‘울림의 영성’이란 떨림(십자가)의 영성이 삶에 울림(윤리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영성으로서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강조하는 거룩함과 섬김과 절제와 희생으로 표현된 윤리적인 영성을 의미하며. ‘어울림의 영성’이란 ‘몸’으로 표현된 공동체적인 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덕)세움과 질서와 화평으로 나타난 영성을 말한다.Ⅱ.본론1. 떨림(고전1:1-4:21)본서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바울이 떨림으로 말할 수 밖 에 없는 이유를 말한다. 교회는 세상에 거주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논쟁의 서론에서 감사와 기원으로 시작한다. 교회의 문제를 푸는 가장 우선적인 일이 이것이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원망과 불평과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기다림과 미쁘심을 바라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십자가의 떨림으로 말한다.본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교회의 세속화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랑과 능력이 평가 절하되거나 무시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의 기초인 십자가의 복음과 성도의 사랑의 교제와 세움이 무너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십자가의 영성, 떨림의 영성을 강조한다.실제로 바울은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며 사도로써 그의 사명을 다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약한 것으로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방법으로, 미련한 방법을 통해, 그래서 약하고 두려워하며 떨림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며 전파할 수 밖 에 없었고 그때에 하나님의 참된 지혜와 능력이 드러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복음 전파는 오직 사랑의 종으로 섬기며 살아야 하는 십자가의 도를 쫒는 떨림의 영성을 저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2. 울림(고전5:1-11:1)십자가의 도를 알고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윤리적 울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음행, 법정시비, 결혼과 신분, 우상제물의 문제는 교회의 참된 본질인 순결과 연합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를 넘어서 교회의 연합을 깨는 것이다. 순결과 연합은 교회의 근본적인 자질로서 이 둘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순결과 연합이 부부 간의 결혼 생활을 지탱하는 두 기둥인 것처럼 교회를 세우는 두 기둥이 순결과 연합이라고 한다.바울은 철저히 사랑을 따라 행동한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이고 사도며, 먹고 마실 권리가 있고,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있고, 마땅히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자신은 복음과 영혼 구원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여기서 바울의 주된 관심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 주장 보다 복음 전파와 다른 사람을 얻는 것에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울의 관심이 십자가의 떨림에서 삶의 울림으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그것의 목적이 떨림의 은혜를 입었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바울은 영적 자유주의가 갖는 방종과 방탕한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권리까지도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여 희생하고 포기할 영성은 한마디로 ‘십자가의 영성’‘떨림의 영성’을 따르는 삶을 말한다. 울림은 떨림의 영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3. 어울림(고전11:2-16:24)은사나 체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은사나 체험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 내에 다양한 은사들을 허락 하셨다. 다양한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바울은 몸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소개한다. 이들은 상호 결속과 의존과 봉사를 통해서 자라가야 한다고 저자는 바울의 글을 설명한다.진리와 증거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는 교회는 존재할 수도 없고, 거룩한 성령의 교통하심의 역사 없이 이 놀라운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 어떻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룰 수 있겠는가? 결국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이 공동체성을 상실한 이기적이고 파당적이고 육적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신령하다고 하면서 교회 내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나 상호 돌봄 없이 그들이 서로 시기하고 비방하며 자랑하고 대적하며 멸시하는 모습을 바울은 보고 있다.고전 13장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파당을 막는 근본적인 처방으로서 고린도전서 전체 논쟁의 중심 역할을 한다. 사랑이 없는 종교적 행위는 빈 소리이며, 또한 그것이 종교적인 활동을 가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익한 종교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영성이 사랑 가운데 활성화 되어서 연기만 내뿜는 신자가 아니라 예쁜 불꽃처럼 타오르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어울림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데 이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 개개인의 윤리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의 떨림과 윤리적 울림은 공동체의 어울림으로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저자는 정의 한다.4. 삶으로의 적용본서를 읽으면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이 시대의 상황을 깊이 있게 비교하여 적용한다는 것이다. 어느대의 모습은 너무도 차이가 나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의 깊은 의미를 추적하여 해석하고 나면 고린도교회의 문제와 이시대의 문제가 매우 밀접하게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본서는 이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사, 그리고 개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적용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적용은 성경을 당시 상황에 맞게 분석하고 원리를 찾아낸 후 이 시대를 읽은 사람들만이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본서는 그런 차원에서 매우 좋은 표본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의 원리와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 의미를 적용할 때 그 해석을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오늘을 해석하고, 오늘에 적용하는 탁월한 해석 참고서라고 할 수 있다.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해석된 성경의 내용을 오늘날 상황에 맞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Ⅲ.결론21세기는 가히 영성의 시대라고 할 만큼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전 종교와 문화의 영역에서 영성이 대두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본서는 우리에게 영성의 경종을 울리는 따사로운 햇살처럼 우리의 심장에 부딪히는 책이라 사료된다. 영적인 필요가 갈급한 만큼이나 더 혼란스럽고 다원화된 영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신학도 들에게 도전이 되는 책으로 살며시 다가왔다.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은 지금 우리 한국 교회 현실에 너무나 적합한 말씀이다. 고린도 교회가 처했던 많은 문제들이 한국교회의 세속화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교회내의 분쟁과 복음의 변질, 사역자의 역할, 순결을 잃은 교회, 잘못된 크리스찬의 성윤리, 이혼문제 등 한국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고린도 교회야말로 영성의 무지와 남용을 경험한 대표적인 교회라 생각한다. 특히 요즘 한국교회는 너무 세속화되었다.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이다. 교회 안에 분쟁은 세상의 분쟁보다 더 심하다. 교회건축이라는 비전을 내래다.
    사회과학| 2012.03.23| 5페이지| 1,500원| 조회(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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