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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16연방과 문화기관에 대하여
    Deutschland순 서●독일 16개국연방주●독일의 문화기관○Berliner Philharmoniker○Hamburg Thalia Theater○Munchner Kammerspiele○Berliner Ensemble Theater■ 독일 16개주 연방 주와 주정부 소재지Land Baden-Wurttemberg(Stuttgart)Freistaat Bayern(Munchen)Berlin(Berlin)Land Brandenburg(Potsdam)Freie Hansestadt Bremen(Bremen)Freie und Hansestadt Hamburg(Hamburg)Land Hessen(Wiesbaden)Mecklenburg-Vorpommern(Schwerin)Niedersachsen(Hannover)Land Nordrhein-Westfalen(Dusseldorf)Rheinland-Pfalz(Mainz)Saarland(Saarbrucken)Freistaat Sachsen(Dresden)Land Sachsen-Anhalt(Magdeburg)Schleswig-Holstein(Kiel)Freistaat Thuringen(Erfurt)Schweiz에서 발원하여 Bodensee 를 통해, 부분적으로는 북서쪽의 높은지대의 프랑스의 경계선을 따라서,서쪽으로 Rhein은 흐른다. 거대한 산맥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Elbe는 지도에서 보면 중간왼쪽 아래서부터Hamburg바로 뒤에 Nordsee까지 독일전역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Oder는 1945년 이후로 독일과 폴란드를서로 분리되는 경계천을 이루고있다. 또한 거대한 유럽의 대하로서 흐르는 Donau는 남독과 동독을 가로지으며 거대한 물줄기로서 결국엔 Schwarze Meer로 흘러들어간다. Main은 이른바 'Weißworscht-적도"라일컬어지며 남과 북독일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중간산맥들을 통해 흐르는 많은 하천의 굽이들이 결국엔 Rhein으로흘러가기위해 소용돌이 친다. 또한Weser를 합치기 위해 중간산맥들에서 작은 하천인 F림- ~1887 Ludwig von Brenner,- 1887~1893 Hans Guido von Bulow (초대상임 지휘자)- 1895~1922 Arthur Nikisch- 1922~1945, 1952~1954 Wilhelm Furtwangler==> 1차대전 패전 이후 기존의 자주운영방식에 실패로 정부보조금 지원의 연주회 의무 개최- 1945 Leo Borchard 지휘☞ 전후 첫번째 콘서트(Titania-Palast에서 개최), 나찌군의 총기 오발 사고로 사망- 1945~1952 Sergiu Celibidache- 1954~1989 Herbert von Karajan☞ 전 후 최초의 미국공연☞ 새로운 건물을 건축(현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 1963년 개관), die Salzburger Osterfestspiele 개최※ Herbert von Karajan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생의 20C후반을 대표하는 지휘자이다. 1927년 독일의 울름오페라극장 지휘자가 된 것을 계기로, 아헨오페라극장 베를린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를 지냈고,2차대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나, 1947년 활동을 재개하여 명성을 쌓았다. 1955년 베를린필하모니의 제4대 상임지휘자, 1956년에는 종신 예술감독에 취임함으로써 음악계에 부동의위치를 굳혔다. 오케스트라의 합주능력 향상에 강한 의욕을 불태운 카라얀의 지도 아래 명문베를린필은 현지에서<카라얀 서커스>라는 별명을 얻었고, 세계 각지의 오페라극장오케스트라에 객연, 또는 예술감독을 겸임하는 등 <카라얀시대>를 방불케 하였다.1969년 카랴얀 지휘자 콩쿠르를 창시해서 후진 양성에도 주력하였고, 지나치게감각미에 의존한다는 비판과 함께 그 점에 많은 청중들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다.- 1990~2002 Claudio Abbado☞ 젊은 연주자들이 눈에 띄게 많이 가입(현 단원의 절반정도가 이 때 들어온 연주자- 2002~ 현재 Sir Simon Rattle 취임☞ 2002년에 취임하여 이때까지 두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던 조직을 개편※ Berhard Pollini은 극장을 취득, 후계자들이 유한회사로 등록-1912 : Leopold Jessner은 Pferdemarkt에 1300좌석의 새 건물을 건축 (현재 Gerhart-Hauptmann-Platz에 위치)1945-1927 : Peter Lorre가 이곳에서 배우로 활약-1934~42 : Paul Mundorf 극장 인수 -1942~1945 : Robert Meyn가 극장소유 관리-1945 : 폭격으로 건물의 파괴-1946 : 임시 재개장(극장장 Willy Matens)은 Shakespeares의 'Was ihr wollt"으로 성공2008-1960 : Shaw의 'Die heilige Johanna"을 복원 건물의 개장식에서 개시-1964~69 : 5년동안 극장장 Kurt Rack-1969~80 : Boy Gobert의 관리하에 현대의 연출-연극으로 성장☞ Peter Zadek, Hans Neuenfels, Jurgen Flimm과 같은 연출가 고용.☞ Paula wassely, Melmut Lohner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앙상블에 속함-1972 : ‘Tik-Thaila in der Kunsthalle’란 두번째 공연장소가 개장-1980~2000 : 극장장 Peter Striebeck(1980~1985), Jurgen Flimm(1985~2000)- 2000 : Ulrich Khoun이 극장장 임명Thaila극단은 유럽,뉴욕,홍콩, Bogota 그리고 Rio de Janeiro에 초청공연 한다. Robert Wilson과 같은 연출진들이 Thaila극장에 있고Lou Reed외에 많은 인물들과 만든 ‘The Black Rider und Alice’란 뮤지컬에서 Robert Wilson은 세계적인 성공을 둬들인다.슬로바키아 감독인 Toma? Pandur은 2000/01, 2001/02 공연시즌에 Dante의 La Divina Commedia에서 3부작을콜롬비아에서 한국까지 모든 나라들이 관중하도록 기획했다. 2003년 Thaila극장은 3개의 해 건축된 청년파양식 건축은 오늘날 뮌헨 소극장의 모체이다-1933 : 시립화로 전환-1944 : 폭발물 공격(관객건물은 보존할 수 있었지만 무대쪽은 완전히 소각) ☞ 전쟁이 끝난후 재 건축- 1971 : Reinhard Riemerschmid의 지휘하에 처음으로 Schauspielhaus의 철저한 재시공- 2003 : 재차 중요수리가 시작되었고, 3월 연극상연이 개시뮌헨 소극장은 세 곳의 연극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Schauspielhaus 의 큰 무대, 'Neues Haus"라고 불리우는 무대와 같은직업공간극장인 두개의 작은 무대를 말한다. 뮌헨 카머소극장 법적형식은 자가경영으로 극장을 운영해 온 이후로 2004년 초에 바뀌었다.자가경영은 뮌헨 카머소극장은 연극경영 이외에도 두가지 경영적인 부분을 포함하였는데 이것은 Otto Flakenberg학교와Elisabethmarkt 에 있는 극장(뮌헨)이다? 극장장-1944 이후 : Erich Engel 등 극장장으로서 역임.-2001~02 이후 : Frank Baumbauer-2010~11 년 시즌의 출발은 Johan Simons 가 극장을 관리하게 될 예정.? 연출가-1920 : Bertolt Brecht 와 같은 인물들이 이곳에서 작품을 기획☞ 당시 베를린 이외에 독일어를 쓰는 무대로 매우 중요한 가치로 평가-1945 : 망명갔다 돌아온 Fritz Kortner가 감독 겸 배우-1960 : Peter Stein 은 자기 책임하에 첫 기획-1970 : Franz Xaner Krotz 와 Robert Wilson 부터 연극환상곡의 작업- 1980 : George Tabori 는탁월한 연출에 성공- 2002 : 처음으로 Nestroy의 Alkestis 작품을 공천- 2005 : Andreas Kriegenburg는 ‘Die Niebelunen’으로 최고 연출상 수상.- 2007 : Andreas Kriegenburg의 "Drei Schwestern’이 초대- 2008 : 독일 비평상 획득▷ Berliner Ens연출한 "Dreigroschenoper"를첫 자신의 기획으로 상영연극은 그들에게 이곳에서 파괴감 느끼게한다. 심심풀이로 뿐만이 아니라 멋진 극장에서 지금 표현 할수 있다.너희들과 우리들 속에서 평화로운 우리들을 일깨워낸다. 그것으로 인해 이 극장과 다른 것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을수 있도록!- Bertolt Brecht -- 1932 : 극단체 "1931 부대"로 성공, 좌파코메디를 연출한Gustav von Wangenheim 이 지휘.Adam Kuckhoff 는 동성애에 관한 작품을 공연- 1933~36 : 연출가 Fritz Wendel는 Helmut Kautner 와 Ursula Herking을 채용☞ NSDAP의 구성원이기도 선택의 가치가 있다 판단하여 채용"참된예술"의 비정부적인 특징을 주장하는 이들은 전설로 퍼져나간다. 예술은 항상 정치와 연결되어있다"- Fritz Wisten -- 1944 : 극장이 문을 닫을 때 까지 “처음이 다시 가까이 돌아온다”라는 구호와 나치선전활동이 대중적인 소재로 상영- 1945 : 극장 재개막. 연출가 Rudolf Platte는 Horst Lommer의 "지옥낙원"☞ 직접적인 나치에 관한 첫 연극시도였던 풍자적인 레뷰로 과거청산을 위해 기획- 1946-1954 : 1933~1941년에 감독과 유대인의 문화동맹의 대표자였던 배우이자 감독 Fritz Wisten는전쟁전의 전성기였던 그 시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앙상블에 다시 최고의 배우가 탄생하였다.우리가 극장장을 찾고 있었을 때, Brecht 는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할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 Helene Weigel --1949 : Bertolt Brecht와 그의 부인 Helene Weigel 이 베를린 앙상블을 창립.☞ 맨처음으로 독일연극이 상영-1954 : 베를린 앙상블의 Schiffbauerdamm극장으로 이주☞ 이 "독자적인" 건물은 Molieres Don Juan와 감독인 Benno Besson로 오픈☞ Brecht는 자신만의 작품을 한가지 연출하 역임
    인문/어학| 2011.11.30| 6페이지| 1,500원| 조회(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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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_poor_singing_dame
    The Poor Singing Dame낡은 성 둘러싼 낡은 벽 아래서,오랫동안 갈색의 담쟁이 덩굴이 전체에 흩뿌려져 있고낮은 지붕을 받들고 있는 깔끔하고 작은 오두막집은거친 바람으로 그의 오두막을 울부짖게 한다.그의 가난하고 소박한 집에 눈살을 찌푸린 작은 탑은폭풍우가 쿠르릉 거릴 때 이리저리 요동시키고,그리고 풍요로운 계곡을 휘몰아 치는 강은그의 문의 녹색 계단 옆에서 빠르게 흘러 내린다.여름의 햇살은 골풀로 엮은 기울어진 지붕을 금빛으로 물들이고영롱한 이슬은 담쟁이 덩굴로 묶인 울타리에 반짝거리고그위, 성벽위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야생의 싹들이 깨끗한 강가 곳곳에 피어났다.성의 수많은 방들이 귀신이 출몰하고 황량할 때가난하고 작은 오두막은 고요하고 평온했다.그리고 도둑이나 악귀나 요정이 들어오지 않았다.꿋꿋함의 빛으로 유혹할 만한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오만하고 무례한 통치자인 성 주인은종종 달콤한 음악 울림을 듣고작은 오두막에 명랑하게 살고 있는 늙은 부인은물레를 하며 유쾌하게 노래를 한다.성의 커다란 홀은 연회소리가 울려퍼지고늙은 귀부인은 잠이들고 무서운 꿈은 꾸지 않는다.그리고 산 너머에서 사냥꾼이 뛰어 다닐 때그녀는 그녀의 창을 열고 아우성을 듣는다.그녀는 문 앞에서 경쾌한 톤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춘다.그리고 크게 더 크게 그녀의 옛날 노래를 반복한다.서리의 망토를 펼칠때(겨울) 그녀는 굴하지 않고그녀는 헐 벗은 나무들 속에서 기쁜 노래를 불렀다.그녀는 푸른 잎(나물)을 캐 모으고그녀의 갈색 빵 케이크를 가지고 갈색 맥주를 들고 여전히 행복하게 노래하고연회로 초대하는 성의 종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웃는다.그녀는 항상 인내하고 만족하면서 마침내 시기심이 성의 주인을 사로잡았을 때성의 주인은 가난한 사람이 즐겁게 사는 것을 못 마땅해 했고 그들의 행복을 방해했다.그는 힘쎈 자작농을 그녀를 방해하고 위협하러 보냈고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결국 성 주인은 떨고 있는 그녀를 감옥에 감금했다.3주동안 그녀는 약해지고 마음이 상해 죽었다.불쌍한 부인! 죽음의 벨이 어쩌면 저렇게 애처롭게 울릴까그리고 푸른길을 따라서 여섯명의 젋은이들이 그녀를 관에 실어차가운 땅바닥 밑에 그녀를 눕혀 놓기 까지 했다.그리고 앵초는 긴 잔디 위에 자라고황혼의 빛나는 이슬은 그녀의 무덤에 반짝이며 흩날리고아침은 여름의 부드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듣고신선한 작은 꽃이 연민으로 흔들린다.
    인문/어학| 2011.11.30| 2페이지| 1,000원| 조회(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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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uritanism_과_Quakerism의_특징
    【 Puritanism 과 Quakerism의 특징 】Puritanism청교도주의는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후에 미국으로 퍼져 나간 특정의 역사적 운동이다. 청교도주의는 초기의 미국 문화 형성과 미국 식민지 시대의 전반인 17세기를 '신앙의 시대'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Puritanism의 특징 >Puritanism은 흔히 근면, 인내, 독실한 신앙 등 개인적 미덕과 개인주의의 존중, 그리고 물질적 번영을 곧 신의 표시로 받아들임으로서 물질적 성공을 중시하는 점을 특징으로 드는데, 청교도는 본래 교파상으로는 장로교, 침례교 등으로 형성되었고 교의적으로는 대부분이 칼뱅주의를 신봉하였다.1. 교리상의 특징첫째, 성서적 근거인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믿었다. 성경은 그들에게 신앙생활의 표본이며 지침이었는데, 그것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조직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교회 질서의 바탕이 되었다.둘째, 체험적 예정설을 들 수 있다. 신은 자연과 인간, 역사와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운명을 예정으로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청교도들에게 있어 신은 자애의 신이 아니라 의지의 신이었다. 종교의 임무는 가혹한 심판과 지옥의 고통을 강조하는 엄격한 교리를 지키며 지상에다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이었다.셋째, 하나님께서 항상 인간사를 주관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사업의 번창은 하나님의 은혜와 만족함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넷째, 성령은 사실상 인생의 모든 측면에 대한 지침이라고 보았다. 이렇듯 청교도적 신권 정치는 구약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성약을 본뜬 것이며 이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성서적인 예에 의해 정당화되었다.이처럼 Puritanism은 오로지 선교상의 입장에서 생긴 운동이지만 점차 세력을 쌓게 되어 정치적?경제적 방면, 즉 일반 생활상의 현상으로서도 관찰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노동은 신성하고 노동에 의한 소득과 재산의 축척은 신의 은총이라고 믿은 Puritan들은 노동의 신성, 근면, 검소를 실천신조로 삼음으로서 개척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한 실례인데 청교도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사업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일부였다. 누구든지 신과 그의 은총의 길로 향하기 시작한 이상 정당한 소명과 직업을 찾을 때까지는 결코 쉬어서는 안되며 설사 그것이 날품팔이라 할 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또 17세기말 코튼 매써는 사람은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자기를 이롭게 하여 신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소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등 이와 같이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인주의에 사회적 양심을 결합시킴으로써 그것이 단순한 경제적 착취의 옹호이론으로 타락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한편 청교도는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을 달성하기 위해 보통 사람보다 더 자기 자신 과 동료들과 분투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의 일기장이나 자서전에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영적 시험과 내면적 탐구로 충만해 있었다.대부분의 독실한 청교도들은 자기들 자신, 자신의 도덕성,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명감의 확신이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해서 청교도주의는 17세기에 지적 사회적인 다이너마이트의 역할을 하였고 결국, 청교도주의의 힘은 타락한 교회를 무너뜨리고 폭군에 도전하고 정부를 전복하기까지 했다.3. Puritanism의 문학 특징17세기의 미국에 있어 문학의 목적은 실리적인 것에 있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설교집, 문답, 토론, 신학적인 논술, 전기, 역사 등이 가장 인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교훈적인 목적에 가장 접합했기 때문이다.청교도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작품의 예술성보단 도덕성을 중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술은 일종의 예배형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체는 간결하도록 단순성을 지향했다. 그들은 장식적인 문체는 싫어했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것처럼,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을 빌어 우화적이거나 상징적인 비유나 은유로 간단히 표현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신대륙 청교도들이 남긴 문학적 유산은 개신교 신학과 고대 고전 문학의 결합이 이루어낸 종교적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상상 문학으로 나뉠 수 있는데 전자가 대부분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수가 극히 드물다.비상상 문학 계열의 책들은 주로 청교도 사상을 다뤘으며, 그 당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신의 예정대로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는 것을 이러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버지니아 식민지 문학이 주로 신대륙 풍경 묘사인 ‘보고 문학‘이라면, 뉴잉글랜드 식민지 청교도 문학은 청교도 식민지 형성과 그 전개 과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역사적 기록 문학‘이다.4. Puritanism이 끼친 영향17세기의 미국의 식민지 시대를 신앙의 시대라고 칭할 정도로 종교는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은 종교를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Puritanism은 이 신앙의 토대가 되었고 아직까지 다음의 4가지 청교도들의 신앙과 관습이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첫째, 노동을 신성시하는 그들에게는 게으름은 하느님에 대한 죄악이며 일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으로 개인이나 사회의 실패나 성공을 결말짓는 개척시대의 사회에서는 이것은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사상이었다.둘째, 청교도들은 지방자치 단체를 중시했다. 청교도 마을은 교회에서 시작됐고 주민들은 자치법을 만들었다. 이것은 뉴잉글랜드 타운 미팅에서 시발되었는데 아마도 당시 아메리카에서 가장 민주적인 기관이었을 것이다.셋째,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지의 청교도적 개념이다. 교회와 학교, 법률을 통해 이들은 인간들의 도덕적 규범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넷째, 자녀들의 충분한 종교 교육을 위해 청교도들은 모든 어린이들에게 개방된 학교를 시작했다.이렇게 Puritanism은 미국의 정치?경제?교육?윤리적인 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아직도 청교도주의는 미국인들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다.Quakerism1. Quakerism의 배경퀘이커 사상은 찰스 1세 치하의 1650년 경 영국에서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를 중심이 된 Seeker들이직접전인 영교를 주장했다. 청교도들의 영국교회가 주장하는 교회의 권위를 버리고 그대신 성경의 권위를 앞세웠다면, 퀘이커 교도들은 성경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그 보다도 인간의 영혼에 직접 말씀하시는 신의 음성을 더 중시했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신앙 때문에 퀘이커 교도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을 서로 “친구(Friends)"라고 불렀다. 그들은 전쟁을 싫어하고, 실상을 금했단 평화주의자들이었다.2. Quakerism의 가르침애초에 친우회(Friends)는 단순한 언어 그리고 의복 그리고 십일조, 맹새 및 세속적 예절을 거부하였다. 이들 중에,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전쟁 참여에 대한 명백한 거부가 추가되었다. 다음 세기 동안, 파산, 모임을 벗어난 결혼, 밀수, 그리고 노예 거래 또는 소유 또한 회개하지 않는 친우가 퇴출되는 관행이 되었다. 이들 중의 후자는, 특히 노예 제도에 대한 것들은, 비교적 소수인 친우들이 친우회의 원리들에 따르지 않은 나머지들을 설득하였으므로, 교리에 관한 문제로 되었다.그러나 모든 사회적 문제들이 이런 의미로 귀결되거나, 구속력 있게 강제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친우회의 구호 활동은 주로 고통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으로 일어났으며, 주로 전쟁이 원인이었다. 미국 혁명시기부터 퀘이커교도들은 난민들이나 기아의 희생자들을 보살핌에 적극적이었다.3. Quakerism의 주요 믿음과 영향청교도들이 성경을 절대시하여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면, 퀘이커 교도들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성스러운 “내적인 빛( Inner Light, Christ Within)," 곧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퀘이커 교도들은 캘빈이 주장한 인간의 원죄를 믿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적인 빛이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가 모두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황이나 주교 등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마틴 루터처럼, 개개인은 누구나 다 사제라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뉴잉글랜드 청교도 정신과 함께 미국의 정치, 사회, 철학 사상의 양대 지주가 되었다.< 내적인 빛 (Inner Light) >내적인 빛에 대한 믿음은 퀘이커교의 두드러진 주제이다. 빛은 양심이나 이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실재와 의지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이 빛은 양심을 깨우고 이성으로 전환된다. 이 내적인 이끌림을 듣는 경험은 신비하지만, 단체적이며 실천적이다.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의 말씀을 기다리기 위한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임들은 퀘이커의 신앙과 행위에 필수적이다. 비록 내적인 씨앗이 혼자만의 사람에게 작용할 수 있지만, 친우들은 수도사들처럼 외딴 방에서 명상하지 않는다. 영(Spirit)이 말함은 진정한 대기자들과 숭배자들의 모임의 충만한 침묵에서 비롯된다. 때때로 모임은 어떤 메시지가 들리기에는 너무 답답하거나 세속적이며, 때로는 끝까지 침묵하는 모임이 된다. 비록 이런 내용이 참석자들에게 영적으로 이로움이 있지만, 이상적인 상태로는 누군가가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고 이를 발표한다. 그 또는 그녀가 - 친우회는 여성에게도 숭배에 있어서도 평등권을 부여하였으므로 - 말을 하거나 기도를 하고 그리하여 모임을 이끌어가며, 하나님에 대한 모임에서의 경험들이 이로써 고백되는 무게를 지닌다. 친우회는 역사적으로 정규 또는 유급 성직자를 "돈으로 고용된 목자"로서 거부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살아있는 증언을 주실 수 있다면, 성서와 이를 읽음에 필요한 배움은 부차적인 위치에 있으며, 교리나 외적인 성례들은 전적으로 없어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의 기다림과 "피조물적인" 활동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친우회는 고하거나 수동적인 명상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가끔 내적인 빛의 "열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들에 대한 "관심"이며, 양심으로 하여금 그런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행동을 취하도록 내리는 명령이다. 그하였다.
    인문/어학| 2011.11.30| 5페이지| 1,000원| 조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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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벨스
    JosephGoebbels한 인물이나 그 인물의 사상에 대해 평가하고 비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러한 어려움은 괴벨스에 대한 평가의 경우 더욱 확연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악의 세력으로 인식되는 나치의 군국주의 대표자의 오른팔이자, 대중선동과 조작 언론의 창시자인 괴벨스에 대한 평전을 선택했을때 그에 대한 열정에 대한 ‘애정’과 현실적 결과에 대한 비판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괴벨스는 도대체 어떠한 사람인가?당시 히틀러와 나치당은 단순히 폭력에 의해서만 통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학자는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만 하지 않았더라도 독일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깊은 고통의 나락에 빠졌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운 국부로 기억할지 모른다고 한다. 그들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잃었던 수데텐란트를 비롯해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통해 영토를 회복했으며 독일을 중서부 유럽의 패권국으로 성장시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인플레를 잡았으며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보다 먼저 뉴딜 정책과 흡사한 국책 사업들을 일으켜 실업자 문제를 해결했고, 그 결과 독일은 현대식 고속도로의 선구인 '아우토반'을 건설할 수 있었다. 또한, 게르만 민족 운동을 부르짖어 패전의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 젊은이들에게 국민 체조와 유스호스텔 운동을 장려해 건강한 육체와 민족 정신을 함양토록 했으며, 이런 기반 아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하여 패전 후 완전히 달라진 독일의 면모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그들은 당대의 뉴미디어인 라디오를 전국민에게 보급토록 했고, 패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천년제국의 수도이자 전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도시로 건설해냈다. 이 모든 성과 앞에 어떤 독일인도 나치와 히틀러를 독재자로 부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이 모든 성과가 누구의 힘에 의한 것이었던가?바로 이제부터 말하려고 하는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 박사.그를 말하고자 나치 정권은 총통의 최종학력과 나치당 출생의 한계 덕에 당 고위층에 엘리트라 부를만한 인재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거기에는 히틀러 개인의 지식인 혐오증도 적지 않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치당에서도 군계일학격으로 뛰어난 엘리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괴벨스였다. 그는 또한 최후의 순간까지도 히틀러와 함께 한 거의 유일한 나치당 고위 관료였다.‘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아버지가 공장 사무원이었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다섯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괴벨스는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었으나 다리가 굽었기 때문에 병역에서 면제되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에 대해 전투 중의 부상이라는 소문을 퍼뜨릴 정도로 다리의 장애는 큰 마음의 상처였다. 이런 장애는 어린 그에게 강렬한 보상심리를 유발함으로써 불운한 인생의 불씨가 되었을 것이다.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괴벨스는 문학·연극·언론계에서 거의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렇다 할 정치적 활동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패전으로 인해 더욱 뜨겁게 달궈진 시대의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시 나치의 악명높은 반유대 정책이 있었지만 괴벨스의 경우엔 처음부터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고, 그 자신이 사실상 유대인이었던 반 유대계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어쩌면 괴벨스가 이때쯤 정계에 입문했더라면 그의 정치행로는 크게 달라졌을 지도 모르지만 전혀 우연한 일로 나치스에 입당하게 된다. 그는 불구였기 때문에 군 문턱에도 가보지 못해서 나치 지도부에 진입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었던 경력조차 없었다. 단지 괴벨스는 박사 출신이었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문학과 역사, 철학을 공부한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문사철을 두루 갖춘 인텔리 중의 인텔리였다. 괴벨스는 문장에 능했고 그의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여러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번번이 미끄러졌다의 처지를 일기장에 기록하는데 그것은 그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다른 일기에서는 스스로를 위대한 제로라며 신체적 콤플렉스와 사회적 편견에 의해 염증과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행운처럼 히틀러를 만나게 되고 곧 그에게 매료되며 빠져들었지만 처음에는 히틀러에 대한 반감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는 나치당이 반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당과 히틀러는 반자본주의 정책 같은 걸 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괴벨스는 히틀러 당수를 '쁘띠 부르주아와 히틀러'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히틀러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히틀러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정확히 구현해낼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서 발견한 것이고, 천부적으로 달변이었던 그는 이내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의 국가사회주의 잡지의 편집장이 된다. 또한 베를린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되면서 히틀러의 총애를 받게된다. 그는 29세 때 자기를 인정해준 사나이 앞에 섰던 마음을 이렇게 일기장에 고백했다.“그는 37세다. 아돌프 히틀러 …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제3제국의 건국자는 이런 모습일 것이다."(1)괴벨스는 상징조작의 명수였다.“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은 의심하나 계속하면 나중에는 믿게 된다”(2)NSDAP, 즉 나치당은 바이에른에서 창당되어 발전한 것으로, 수도 베를린에는 당조직이 없었다. 괴벨스가 베를린 지구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NSDAP의 반자본주의파 그레고르 슈트라서와 '우익'인 당총재 아돌프 히틀러 사이의 대결에서 정확한 선택을 한 덕분이었다. 괴벨스는 내면의 신념과는 반대로 히틀러를 지지했다. 괴벨스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할 때까지 베를린에서 나치 세력을 강화해갔다. 히틀러는 이 유능한 웅변가이자 뛰어난 선전원인 그를 독일 전역을 총괄하는 NSDAP 선전감독관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괴벨스는 이로서 새로운 악칭을 하나 더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디어 조작', '상징조작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정치가로서의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뜬 그는 미디어 조작을 통해 단 시간 내에 독일 국민의 정신을 지배했다.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나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가 있다”고 호언했다. 이를 두고 누군가 풀기를,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다면 괴벨스는 “그럼 조국은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만 사랑한다는 말인가”라며 그를 감옥에 보냈을 것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 이것이 그의 선전 방식이었다.당시 베를린의 각 신문사 편집자와 모든 지방신문 기자들은 선전부에 집합하여 괴벨스나 그의 조수들에게 지시를 받았다. 괴벨스는 편집자와 기자들에게 어떤 뉴스는 발표하고, 어떤 뉴스는 잘라버리고, 어떻게 써야하는지 일일이 그의 의도에 부합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이런 지시가 잘못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말로 명령하는 것 말고도 매일 한 편의 서면지시를 했다. 아주 작은 지방의 신문과 간행물에 대해서까지도 전보나 편지로 지시를 내려보냈다. 위의 증언은 히틀러 시대의 언론 통제에 대한 증언인데 80년대 대한민국의 보도지침에 대한 증언과 매우 흡사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시의 보도지침이 괴벨스의 언론통제와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은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들의 훌륭한 제자들인 셈이니까 말이다. 이런 언론통제는 독재정권에겐 필수적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은 가장 먼저 언론의 입을 막는 방법을 취하였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지 않고는 독재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비리와 비민주적인 실상을 언론에서 낱낱이 보도하기 시작하면 그걸로 독재자의 운명은 끝이다. 국민들이 그에 대한 저항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괴벨스는 선전 전략에는 영화보다는 라디오에 먼저 주목했다. 영화에 비해 라디오는 그 속보성으로 인해 당대 매스미디어의 총아로 부각하고 있었고, 선전 전문가로서 그의이면 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싼 라디오였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괴벨스는 국가선전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민계몽선전부'가 그를 위해 만들어졌고 신설된 제3제국의 '문화원' 원장도 겸임했다. 그의 취임 일성은 "국민 정신 함양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문화원 원장으로서 선전은 물론 언론·연극·문학 등 여러분야로 손을 뻗쳤다. 괴벨스의 문화정책은 상당히 개방적이었으나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선동은 청중의 귀를 마비시킬 따름이라는 논리 때문에 선전 메시지들조차 제약을 받았다.어쨋든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괴벨스의 영향력은 1937-38년 사이에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책임자가 할 일이 별로 없었던 이유에서인가 다소 약화되는 듯 하였다. 하지만 대전 초기 무적 독일군의 신화의 상당 부분은 괴벨스의 선전필름에 의한 것이 많았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상 실전에서 독일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당시 알려진 만큼 상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괴벨스에 의해 널리 유포된 선전 필름에 의해서 독일군의 전격전은 신격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여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비로소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일 수 있었다. 괴벨스는 직접 돌아다니면서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그것은 대중의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유력한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버린 한참 뒤에도 괴벨스는 대중 앞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용기를 보였다. 괴벨스의 활동은 특히 후방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바야흐로 총력전의 주창자가 되었고 베를린의 포위된 벙커안에서 초창기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심복으로 히틀러를 보좌하고 있었다. 이 재능있는 나치의 무대감독은 히틀러가 자살하자 아내와 6명의 아이다.
    인문/어학| 2011.11.30| 5페이지| 1,000원| 조회(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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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_song_for_simeon[1].hwp_완성본
    A song for simeon (시미온(시므온)의 노래)- 토머스 스턴즈 엘리어트 -주여, 로마의 히야신스는 주발에 꽃을 피우고겨울의 태양은 눈 덮인 언덕을 기어가건만,고집센 계절은 멈춰 서 있기만 합니다.나의 일생은 죽음의 바람을 기다리기에,손등의 깃털처럼 가볍습니다.햇빛 속의 먼지와 모퉁이에 몰린 추억은죽음의 나라로 불어가는 찬 바람을 기다립니다.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옵소서.나는 이 도시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아오며,믿음을 지키고 금식도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피차에 경의와 안위를 주고 받았습니다.이제껏 어떤 한 사람도 나의 집 문간에서 물리친 일도 없습니다.슬픔의 때가 닥쳐올 때나의 집을 누가 기억할 것이며,나의 자손들은 어디서 살게 되리이까?낯선 사람들의 얼굴과 검을 피해서그들은 염소의 길로 도주하고 여우의 굴에 숨으리이다.밧줄과 채찍으로 문책하는 슬픈 때가 오기 전에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옵소서.황폐한 산의 십자가의 수난이 있기 전에,어머니의 어떤 슬픔의 시간이 오기 전에,죽음이 지금 태어나는 이 계절에,영원히 말이 없는 무언의 말씀인 이 어린 아이가,이스라엘의 위로를내일이 없는 이 팔십 노인에게 내리게하옵소서.당신의 말씀대로,사람들은 대대로 당신을 찬미하며 고통을 받으리이다.영광과 조소를 받으며,그러나 마음의 빛을 갖고, 성도들의 계단을 오르리이다.나에겐 순교도 없고, 사색과 기도의 기쁨도 없습니다.또한 나에겐 궁극적인 환상도 없습니다.나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옵소서.(그러면 검은 당신의 심장을 꿰뚫을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을.)나는 내 자신의 삶과 내 후손들의 삶에 지쳤고,나는 지금 내 자신의 죽음과 내 후손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죽어갑니다.주여, 당신의 종을 떠나게 하소서,내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사오니.----------Notes:bowls:“주발”.stubborn: “고집센”.light: “가벼운”.chills: blows coldly.Grant: Give.fast: “금식하다”.provided for: looked after, took care of.Fleeing: “피해서”.scourges: “채찍”.stations: “십자가의 수난”.decease: death.Word: Christ.one: Simeon.derision: “조소”.martyrdom: “순교”.those after me: “내 후손들”.감상과 해설여기에 실린 이 시는 1928년에 쓴 것으로, 누가복음 2장 25-35절로부터 그 제목을 빌어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시므온이라는 인물을 동방박사들의 여행에 나오는 노인이나 게런쳔과 비슷한 인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늙은 노인의 독백은 “주여, 로마의 히야신스는 주발에 꽃을 피우고”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히야신스는 이교적 생활과 풍요를 상징하며, 그것이 로마의 풍요제와 관련되면서 특히 로마 제국의 번영과 박해 등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교적 생활과 문화는 꽃을 피우고 있는데, 고집센 계절(봄)은 왜 안 오느냐고 합니다. 엘리어트는 고집센 봄과 눈 덮인 언덕을 기어가는 고집센 겨울을 대조시켜, 죽음과 재생의 문제를 제시했습니다.왜 이 노인은 봄을 기다리는 것인가? 그것은 봄에만 영원히 말이 없는 무언의 말씀인 어린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 오면 새로운 빛이 나타나 이교적인 죽음을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고, 낡은 삶을 종식시켜 그것을 손등의 깃털처럼 가볍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죽음의 나라로 불어가는 찬 바람을 기다립니다. 이 찬 바람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호흡 즉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령의 바람을 의미합니다. 바람에 날리는 깃털은 신의 손으로 불리워갈 것입니다.그러나 어떤 변화든 변화란 인간의 영혼에 심한 시련을 부가하게 마련입니다. 시므온이 완전한 신생을 누리려면, 의당 새로운 믿음의 시련을 거쳐 그의 영적인 사람이 성장하여야 하는데, 그는 이런 시련을 거칠 만큼 오래 살 수 없으므로, 영원히 말이 없는 무언의 말씀을 통한 평화를 간구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므온은 게런쳔이나 동방박사들의 여행의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온한 죽음을 기원하면서, 그는 과거의 의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 자신의 믿음과 금식은 슬픔의 때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의 멸시를 받아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이사야 53:3) 그리스도처럼, 그의 후손들은, 기독교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 낯설은 사람들의 얼굴들과 검을 피해서 산양의 통로와 여우의 길로 쫓겨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였습니다. 이 심볼들은 예수의 수난과 질고의 길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상 시므온은 자신이 체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황폐하고 여우가 거니는 시온산” (예레미야 애가 5:18)이 아니라,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에로의 길과 갈보리에서 우는 성모 마리아의 울음소리입니다. 이런 미래의 파란곡절로부터 보존되려면 이스라엘의 평화와 위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탄생하는 이 계절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구합니다.
    인문/어학| 2011.11.30| 3페이지| 1,000원| 조회(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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