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이방원?신권과 왕권Ⅰ. 서 론Ⅱ. 여말선초의 사회적 배경Ⅲ. 정도전 · 이방원의 생애와 정치사상1. 정도전의 생애와 정치사상1) 정도전의 생애(~1392)2) 정도전의 정치사상 ? 재상중심적 신권론.2. 이방원의 생애와 정치사상1) 이방원의 생애2) 이방원의 정치사상Ⅳ. 정도전 vs 이방원Ⅴ. 결 론Ⅵ. 참고문헌Ⅰ. 서 론우리는 조선을 강력한 왕권국가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조선의 성리학은 중국의 남송 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권 세력을 옹호했다. 당초 정도전을 비롯한 세력들은 역성혁명을 일으킨 뒤 성리학의 왕도 이념을 좇아 조선을 왕권보다 신권이 우위에 있는 이른바 ‘신권 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나 이내 이방원에게 제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태종과 세종, 세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혈 정변이 일어났으나 대체로 강력한 ‘왕권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왕권이 강력했지만 연산군이 폐위된 이래 신권이 급속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보위를 마음대로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뒤이어 광해군 마저 폐위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군왕은 당쟁의 그늘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대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럼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가? 바로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과,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의 대립이었다. 이 둘의 만남은 어떠했고, 어디서 엇갈렸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제부터 알아보자.Ⅱ. 여말선초의 사회적 배경무신집권 이후 고려의 왕권은 이름뿐이었다. 무신집권시대에는 무신에 의해서 왕위의 폐립(廢立)이 이루어졌고 원 간섭하에서는 원에 의해서 왕위가 결정되었다. 공민왕 이후에도 신권에 의해서 왕위의 폐립이 좌우되었다. 국정의 운영은 구심점을 잃고 무궤도하게 이루어졌다. 국가경제의 기반인 토지는 권문세족·사원세력·권신에게 점유되어 국가재정은 고갈을 면할 수 없었으며 다수의 민은 가혹한 착취로 빈궁에 허덕였다. 더구나 몽고의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上王)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정몽주가 죽은 후 정도전·조준·남은 등이 유배에서 풀렸다. 이제는 유배당했던 자들이 돌아오고 유배시켰던 자들이 도리어 탄핵당해 유배지로 떠날 차례였다. 이숭인, 이종학 등이 귀양지로 떠났으며 이색은 고향으로 추방당했다. 역성혁명파들은 이번 기회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했다.남은(南誾)이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킨 때로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비밀히 태조를 추대하기로 의논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전하(殿下)에게 알리니, 전하가 말하기를,“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투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혹은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창왕 옹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 이색이었고, 따라서 공양왕 옹립은 곧 이색과 그 일파의 정치적 실세(失勢)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우왕 창왕의 폐위에 앞장 선 이성계, 정도전 일파로서는 우왕 창왕의 옹립에 앞장선 이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스스로 반역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됨에 따라, 이색을 비롯한 그 일파는 관직에서 축출되었고, 이어 공양왕 2년(1390) 5월에는 소위 윤이(尹?), 이초(李初)의 음모사건을 계기로 그들 대부분이 하옥되었다.한편 권력을 장악한 정도전 일파는 그들의 뜻에 따른 전제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성과는 공양왕 3년 5월의 과전법(科田法) 공포로 마무리 되었다. 과전법 실시는 커다란 사회개혁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권력투쟁의 면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전법의 시행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축소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즉 이를 통해 권문세족의 입지가 급격히 약화되었고 동시에 당시 집권세력과 뜻을 같이하는 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공양왕 3년 정월에는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여 삼군총제사에는 이성계, 좌군총제사에는 조준, 우군총제사에는 정도전이 됨으로써 고려의 병권도 그들이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군사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정도전 일파가 공양왕 3년 4월에 이미 권력을 상실한 이색 등을 창왕을 옹립하였다는 죄목으로 주살(誅殺)할 것을 상소 한 사건이 있었다. 이 상소를 계기로 당시 집권세력 내부의 역성혁명파와 온건보수파의 대립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당시 온건보수파의 대표는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공민왕조에는 성균관 교관으로 함께 재직하였고,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반대하다 같이 유배된 적도 있다. 그는 공양왕 옹립에도 정도전 일파와 뜻을 같이 하여 그 공으로 아홉 공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책훈(策勳)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도전 일파의 전제개혁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제정되었다.2) 이방원의 정치사상태종은 유가적 군주로서의 모습을 띄나,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어서 ‘한비자’에서 말하는 양권(揚權)을 위한 통치술을 사용했던 법가적 군주의 일면 또한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서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에서 출발한 태종이 어떻게 왕권을 강화시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술치’(術治)를 구사하는데 먼저 상벌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상대의 마음을 떠보면서 움직임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서 신하를 제어하는 정치적 ‘술(術)’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이거이 역모 사건’, ‘민씨 형제 사건’, 그리고 ‘심온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군신관계에서 군주와 신하는 상대를 살피면서 서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가 왕권을 유지하고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는 권신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하는지를 살펴야 하고, 이때 그가 실제로 모역(謀逆)을 꾀했는지 여부보다는 그의 세력이 왕권을 가리고 위협하고 있는가하는 ‘정치적 고려’가 더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객관적인 사실 못지않게 군주의 주관적인 인식과 판단이 크게 작용하며, 권신을 제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세력을 이루고 있는 당여를 색출하는 작업이 병행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시간을 두어 제거의 명분을 축적하고 적절히 술(術)을 구사함으로써 권신들을 제어하고 처벌하는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을 밟게 된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사건 중 태종의 ‘술치’가 잘 드러나는 민씨 형제의 사건을 통해서 태종의 ‘술치’를 알아보자.태종은 전위라는 함정을 놓고 기다리면서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그 과정에서 민씨 형제를 끌어들이고 처단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들의 세력이 큰 점을 인지하고, 그 근거를 뿌리 뽑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숨기며 누가 민씨에게 아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이 태종실록 7년 9월 25일 乙亥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춘추의 법대로 민무구 · 민무질 형제를 처단할 것을 대간들이 종용하나, 이에 “바쁠 된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교서(敎書)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정도전은 우현보(禹玄寶)와 오래 된 원한이 있었으므로, 무릇 우씨(禹氏)의 한집안을 모함하는 것은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실정(實情)에는 맞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10여 인으로써 원례(援例)로 삼아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여, 조목마다 자질구레하게 획책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안경공(安景恭)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고는 놀라면서 말하기를,“이 무리들이 어찌 극형(極刑)에 이르겠는가? 마땅히 모두 논죄(論罪)하지 말라.”하였다. 도전 등이 감등(減等)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한산군(韓山君)과 우현보와 설장수는 비록 감등하더라도 또한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결코 다시 말하지 말라.”도전 등이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곤장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를 강제로 말리지 아니하였다.이색, 이숭인, 우현보, 설장수 네 사람은 유배형을 받았으나 이성계가 감등해 주었다. 그러나 이숭인을 포함해 이들의 일부 후손 또는 추종자들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김로(金輅) 등은 조정에 돌아왔으나, 경상도에 귀양간 이종학(李種學)·최을의(崔乙義)와 전라도에 귀양간 우홍수(禹洪壽)·이숭인(李崇仁)·김진양(金震陽)·우홍명(禹洪命)과 양광도(楊廣道)에 귀양간 이확(李擴)과 강원도에 귀양간 우홍득(禹洪得) 등 8인은 죽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장(杖) 1백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인가.”정도전은 이해 8월에 배극렴과 조준 등의 공신들과 더불어 세자 책봉 문제를 태조에게 건의했다. 이성계는 계비인 강씨 소생의 큰아들 방번을 세자로 책봉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배극렴 등은 방번의 행실이 거칠다는 이유로 강씨의 둘째 아들인 방석을 거론했다. 태조가 이에 동의하면서 후사 문제까지 정도전이 원하는 대로 .
무신정권의 역사적 성격 고찰Ⅰ. 머리말Ⅱ.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1. 무신정변과 초기 무신정권2.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과 전개3. 무신정권의 붕괴Ⅲ. 무신정권의 역사적 의의1.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2. 전시과제도의 붕괴3. 신분제의 동요Ⅳ. 맺음말Ⅰ. 머리말시대의 특징에 따라 역사를 끊어서 보는 경향은 역사 연구에서 매우 보편적인 시각 중 하나이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고려사를 예로 들자면 호족과 6두품,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로 끊어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일반적인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끊어서 보면 각 시대의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앞, 뒤 시대와의 상관관계를 알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는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역사 연구에서는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본 글에서는 무신정권의 성립과 전개, 붕괴에 대해 살펴본 후 무신정권기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들이 뒤에 나타나는 원 간섭기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는 고려 후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Ⅱ.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1. 무신정변과 초기 무신정권고려는 전통적으로 우문정책에 따른 문반과 무반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어왔다. 제도적으로 무반은 정3품인 상장군을 최고직으로 하고 있어서 그 이상의 승진이 어려웠고 2품 이상의 재추직은 문반이 독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거기에다가 마땅히 무신들이 맡아야 했을 군대의 최고 지휘통솔권도 문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무신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일반 군인들 또한 공역과 군인전 미지급으로 인해 불만이 쌓여갔다.이러한 상황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김돈중(金敦中)이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도중에 문반 5품인 기거주(起居注) 한뢰(韓賴)가 무반 3품인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어는 자신의 동생 최충수마저도 시가전을 벌여 살해하였다.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국정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종을 몰아내고 평양공 왕민을 왕으로 세워 왕권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이렇게 되자 국가의 모든 권력이 최씨 집안에 집중되었다.최충헌은 이어서 내외 각처에서 일어난 농민과 천민의 봉기 역시 무사히 진압하여 권력을 확립하고 정치적 안정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데에는 도방과 같은 강력한 사병조직의 뒷받침이 큰 역할을 하였다. 사실 최충헌은 정변을 일으킬 때까지만 해도 사병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그는 쿠데타를 성공하고 나서 사병을 급속도로 확충시켜 나갔고 이러한 가병을 경대승 때의 도방을 본떠서 재조직하여 자기의 사적 무력기반으로 삼았다. 또한 권력기반으로서 새로이 교정도감도 설치하였다. 그는 집권한 후 상장군직 이외에 지주사(知奏事),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거쳐 단계적으로 승진, 희종원년에는 문하시중에 오른다. 이에 정치의 요직인 재추의 기본 관직에다가 문무 관리의 전주권(銓注權)을 가진 이부, 병부와 관리에 대한 감찰권을 지닌 어사대,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원직인 상장군 등 5개의 직책을 겸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국가의 공식적인 관직에 의해서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또 희종 2년(1205)에는 진강후에 봉함을 받고 흥녕사를 세움으로써 무인정치를 펼 수 있는 형식도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최충헌 집권기에는 1인 독재 권력의 확립과 함께 사병조직 및 독자적인 집정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 등이 특히 주목되는 점들이다.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최충헌이 집권 23년째가 되는 고종 6년(1219)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우가 그의 권력을 이을 수 있었다. 집정이 된 최우는 먼저 동생 향과 그 추종세력 등 반대파를 제거하여 자신의 지위를 굳히는 동시에 아버지가 축적한 금은과 진귀한 물건을 왕께 바치고 부패한 관리를 내쫓는 대신 현명한 관리를 많이 등용하여 인망을 얻기에도 권에서 소외시키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아갔다.임연은 김준을 아버지로, 그의 동생인 김승준을 숙부로까지 부르는 긴밀한 사이였다. 이러한 김준이 집권하자 임연의 지위 또한 상승했다. 하지만 김준의 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임연은 점차 소외되어갔다. 그러자 임연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를 본 낭장 강윤소(康允紹) 등은 마침 김준을 증오하고 있던 원종에게 김준을 제거할 수 있는 인물로서 임연을 추천하였고 이후 원종의 후원아래 환자(宦者)들과 결탁하여 왕명으로 김승준과 김준을 끌어들여 살해하였다.임연은 원종이 자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이유로 재추에게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였다. 비록 원종이 자신이 집권하게끔 도와주기는 하였으나 거북한 존재였고 친몽(親蒙)으로 기운 원종이 있는 한 자신의 장래가 불안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원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안경공 창(安慶公 昌)을 옹립하였고 이후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어 집권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는 몽고의 반발을 사, 폐위 5개월 만에 원종을 다시 복위시켰다. 몽고에 항전준비를 하던 임연은 등창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아들인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나 임연의 사위인 어사중승(御使中丞) 홍규(洪奎) 등이 원종의 명으로 임유무를 제거하며 무신정권이 종식되었다.Ⅲ. 고려 무신정권의 역사적 의의고려사회는 무신정변 이후에 크게 변화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의 주도세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문벌귀족의 사회에서 무신들의 사회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무신들의 집권이 영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신정변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변화가 단순히 문무 사이의 정권교체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무신들이 집권한 한 세기는 문벌귀족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에 충분한 기간이었으며 이 기간에 무신집권세력은 여러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며 후기사회의 커다란 변모에 영향을 주었다.1.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무신정변을 계기로 종래와는 달리 무을 제거했다. 그 이유로는 문신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정권을 위태롭게 할 소지가 적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하지만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문신들에 대한 회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문신을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신을 우대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처럼 문신이 우대를 받고 점차 중용됨에 따라 무신이 도리어 억압받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최씨 정권하에서 문신들은 고위 무반직을 겸임함으로서 최씨 정권과 밀착된 관계를 보여준다.……고종 3년에 추밀원부사 · 한림학사승지 · 상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문신이 상장군을 겸한 것은 문극겸(文克謙)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폐해졌다. 왕이 충의 재능이 문무를 겸하였으므로 특히 이를 제수하였다.……최충헌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문신들을 고위관직에 등용하였고, 이들은 최충헌 정권에 깊이 간여하여 신왕 옹립과 같은 일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최충헌은 비단 등용 문신들에게뿐 아니라 정권에서 외면당하고 있던 문인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 최씨 정권은 과거제를 운영함에 있어서 자기의 측근문신들을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하여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문인들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것의 바탕위에 최씨 정권은 천거제를 활용하여 자신에게 순종적인 문인들을 발탁함으로써 자신의 장기적 지배체제의 구축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천거제의 운영은 국왕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한편 무인집권자의 위치를 보다 고양시켰다. 과거 합격자의 증대와 천거제의 실시로 인해 과거제는 등용고시의 성격보다는 관료후보자의 자격고시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과거 합격자의 증대는 그만큼 문인들의 현실 비판적 성향을 누그러뜨리며, 체제 순응적 인물의 양상을 가져다주었다. 그렇다고 문신의 정치적 지위가 무신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무신집권기였으므로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 문신은 무신보다 열세였다. 이에 따라 문신의 무반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무신정권지를 임자 없는 땅이라고 하고는 그 집 앞으로 기록을 올린다. 권세가 또한 자기 집의 토지라고 칭하며 공첩을 얻어 내려고 즉시 사환을 보내 서신을 통하여 청탁하니 그 고을의 관리들도 간청을 피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파견하여 전조(田租)를 징수하여 권세가에게 준다. 이에 한 토지에서 조세의 징수가 두세 번에 이른다.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렵고 나아가 호소할 곳도 없기 때문에 원통함과 분함이 하늘을 찌르니 재앙이 가끔 일어나는 것도 여기에 그 화의 근원이 있다.……명종 18년 3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각지의 부강한 양반들이 빈약한 백성들에게 긴 기간으로 꾸어 주고 그들이 아직 갚지 않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전해 오는 정전(丁田)을 강제로 빼앗으니 이로 인하여 빈민들이 생업을 잃고 더욱더 가난해진다.……위의 사료들은 수조권자의 사적권한이 당시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농민에 대한 수탈이 지방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신정권기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아 더욱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행해졌다. 무신정권기의 집권자들은 이러한 힘을 이용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토지를 겸병하거나 탈점하여 그 세를 끝없이 넓히기에 이른다. 이들은 각기 수천 명에 달하는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그것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많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조지나 그들에게 특별히 사여된 식읍(食邑)에서의 수입만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선왕의 제도에 의하면 공전을 제외한 토지는 신하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내려 주었는데, 이제 벼슬에 있는 자가 탐욕스럽고 행동이 깨끗하지 못해 공, 사전을 빼앗아 겸병하니 한 집안이 가진 비옥한 토지가 여러 주, 군에 걸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고 군사들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사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전과 사전을 구분하지 않고 빼앗아 그 토지가 여러 주와 군에 걸칠 정도에 이른다. 그것이 국가의 수입에 직결될 정도이니 그
조선 초기 대명 외교관계 연구Ⅰ. 서론Ⅱ. 조선의 건국과 표전문제1. 조선의 건국과 중화질서의 균열2. 표전문제의 대두와 경과Ⅲ. 요동공벌계획의 안과 밖1. 요동공벌계획의 대두2. 요동공벌계획의 이면Ⅳ. 결론Ⅰ. 서론중국이 200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우리는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한다. 여기서 ‘동북’은 우리 역사에서 ‘요동’이라고 불리던 바로 그 지역이다. 이곳에 대한 분쟁은 근세의 문제가 아니라 예부터 한반도 국가와 대륙국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환기되었던 곳이다. 특히 여말선초 시기에 일어났던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의 표전문제(表箋問題)와 그와 연관성이 있는 요동공벌계획(遼東攻伐計劃)도 요동을 두고 양국 간에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는 표전문제와 요동공벌계획만을 중요시하였을 뿐, 이 사건의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요동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대중서나 연구서 중에서도 요동을 조명한 책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가 이렇게 요동을 무관심하게 대하는 이 순간에도 중국의 동북공정은 요동을 점점 중국사만의 지역으로 편입시켜가고 있다.바로 이것 때문에 요동과 관련된 논의 중 하나로 표전문제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말선초의 예민한 시기의 문제를 우리가 재조명해보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만 또한 현실의 문제인 동북공정과도 연계되기 때문이다. 특히 요동이 한국사 문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표전문제와 요동공벌계획을 살펴보는 것은 더 의미가 크다 하겠다.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표전문제의 경과와 그것이 어떻게 요동공벌계획과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당시의 동아시아 세력지형도를 살피는 근간도 될 수 있을 것이다.Ⅱ. 조선의 건국과 표전문제1. 조선의 건국과 중화질서의 균열명(明)의 철령위 설치에 반대한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성계는 이를 반대하며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죽인 다음 창왕을 옹립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흔단(?端)을 일으킨 것의 한 가지요,1. 사람을 보내어 요동(遼東)에 이르러 포백(布帛)과 금은(金銀)의 종류를 가지고 거짓으로 행례(行禮)함으로써 사유(事由)로 삼았으나, 마음은 우리 변장(邊將)을 꾀는 데 있었으니, 이것이 흔단(?端)을 일으킨 것의 두 가지요,1.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꾀여 가권(家眷)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었소. 이것이 흔단(?端)을 일으킨 것의 세 가지요,1. 입으로는 신하라 일컫고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하면서도, 매양 말을 가져올 때마다 말 기르는 사람(?馬)로 하여금 길들여 보게 하니, 말은 모두 느리고, 또한 모두 타서 피로한 것들이니, 업신여김의 한 가지요,1. 국호(國號)를 고치는 일절(一節)은 사람을 보내어 조지(詔旨)를 청하므로, 그대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했는데, 조선(朝鮮)을 계승하여 그대가 후손이 되게 하였소. 사자(使者)가 이미 돌아간 후에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며, 도리어 흔단(?端)을 만드니 업신여김의 두 가지이다.……짐은 또 장차 상제(上帝)에게 밝게 고(告)하고,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하여 업신여기고 흔단을 일으킨 두 가지 일을 설욕(雪辱)할 것이오. 만약 군사가 삼한(三韓)에 이르지 않더라도 차 여진의 사람들을 꾀어 전가(全家)를 떠나오게 할 것이니, 이미 간 여진의 모든 사람을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국경(國境)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이 공문으로 판단해볼 때, 당시 조선은 중국 내정에 관한 정탐과 아울러 요동의 여진족에 대한 회유책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주원장은 조선의 기세를 꺾어놓기 위해 조선에서 바친 말의 질 문제나 외교 연락상의 지연문제까지 걸고넘어지면서 이성계를 압박해 나섰던 것이다.이에 대한 이성계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政刑)이 엄준(嚴峻)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元勳)과 석보()이 절차(節次)에 의하여 잡아 온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 5명이 공술(供述)하기를, 「고려 각처의 수파관(守把官)이 보내어 연해(沿海)지방을 겁략(劫掠)하고 소식을 듣게 하였습니다.」 하므로, 이와 같이 좌군(左軍) 문서(文書) 속에 공출(供出)해 온 사람과 전일에 간 사람의 성명(姓名)까지 써서 가지고 가서, 이성계(李成桂)의 장남(長男)이나 혹은 차남(次男)을 시켜서 친히 잡아 가지고 오게 하라.’ 하였습니다.……”조선이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명(明)이 원하는 대로 장남이나 차남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맏이인 진안군 이방우는 이미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고,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학식을 갖춘 아들이 없었다. 게다가 이방원은 이미 6년 전 이색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태조 3년(1394) 6월 1일 실록의 기사를 보자.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정안군이 대답하였다.“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 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정안군이 만 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이렇게 해서 정안군 이방원과 남재 그리고 중추원 지사 조반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금릉에 들어갔다.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황제를 여러 차례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조선에 대한 주원장의 의구심을 말끔히 풀어주고 돌아왔다. ‘1년 3사’의 외교관계도 회복되었다.조 ? 명간의 긴장관계는 이방원이 명(明)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극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로부터 상당 기간 명나라로부터의 전쟁위협도 중단됐다.‘1년 3사’의 외교관계가 회복된 지 약 1년 후인 태조 5년(1396) 런 요청을 한 것이었다.같은 해 7월 명사(明使) 송패라(宋?羅)가 먼저 귀국할 때 조선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이을수(李乙修)로 관압사(管押使)를 삼아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지은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權近)과 우승지 정탁(鄭擢)과 그것을 계품(啓稟) 교정(校正)한 사람인 경흥부 사인(敬興府舍人) 노인도(盧仁度)를 명에 관송하게 하고, 정도전은 관송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한성윤(漢城尹) 하륜(河崙)으로 계품사(啓稟使)를 삼아서 주원장에게 아뢰기를,…… 신이 경사(經史)에 밝지 못하옵고, 글을 지은 자가 모두 해외(海外)의 사람이므로 어음(語音)이 다르고, 학문이 정미하고 해박하지 못해서 표문과 전문의 체제를 알지 못하여, 문자가 어긋나고 틀리게 된 것이요, 어찌 감히 고의로 희롱하고 모멸했겠습니까? 삼가 분부하신 대로 표문을 지은 정탁과 교정한 권근이며, 교정을 계품한 노인도는 판사역원사 이을수를 시켜서 경사(京師)로 압송해 가 폐하의 결재를 청하는 외에, 정도전은 정탁이 지은 표문에 일찍이 지우거나 고치지 않았으므로 일에 관계없으며, 또 본인은 복창(腹脹)과 각기병(脚氣病)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조선에서는 명의 위압적인 태도에 저항하였다. 조선을 떠난 계품사 하륜 일행은 같은 해 9월에 남경에 이르러 명태조를 뵈었다. 그 해 11월 4일 하륜, 정탁, 유구, 정신의는 귀국하였고, 권근과 노인도 2인은 명(明)에 억류되었다. 아래 글은 하륜과 정탁 일행이 조선에 돌아오면서 가져온 명(明)의 예부자문이다.지난번의 조선국 표문 속에 표문을 지은 자가 고의로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자를 썼으므로, 특히 사신(使臣) 유구(柳?) 등 6명을 경사(京師)에 머물러 두고 그 표문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찾아내어 경사로 보내라 했더니, 지금 사신이 돌아왔는데, 조선 국왕이「정도전은 병이 침중(沈重)해서 조리를 하지 못하고 올 수 없다.」하고, 단지 표문을 함께 지은 정탁 등 3명만이 경사에 왔기에, 그 연유를 신문하였는데, 각 관원이 수재(秀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띈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朝鮮王朝實錄』의 두 기사를 보았을 때, 정도전이 요동 공벌(攻伐)을 계획한 동기가 당시 표전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명에 붙잡혀가지 않기 위한 방책에서 시작하였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이 기사들은 모두 정도전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를 비추고 있는데, 이는 후에 권력을 잡은 태종이 정도전(鄭道傳)의 정치적 반대세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은 되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신석호(申奭鎬)는 「조선왕조 개국 당시의 대명관계」에서 정도전이 요동공벌을 계획한 이유가 명(明) 태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허나 필자는 신석호(申奭鎬)의 이런 주장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들어서 설명하겠다.『朝鮮王朝實錄』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정도전(鄭道傳)이 제작한 진도(陳圖)인 「四時蒐狩圖」가 태조에게 바쳐진 것이 태조 2년(1393) 8월이고, 여러 절제사들의 거느린 군사 중에서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뽑아 진도(陣圖)를 가르치자고 태조에게 말한 것이 같은 해 11월의 일이다. 이때부터 정도전(鄭道傳)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 힘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1차 표전사건이 일어난 시점보다 약 3년이나 앞선 시기임을 생각해 보면 답은 바로 나온다.또 다른 근거는 명(明)의 태도이다. 명(明)은 3차에 걸친 표전사건에서 모두 찬문자의 관송을 요구하였지만 정도전(鄭道傳 보자.
朝鮮 初期 對明 外交關係 硏究 - 表箋問題와 遼東攻伐計劃을 中心으로.Ⅰ. 머리말Ⅱ. 표전문제(表箋問題)의 대두와 경과.1. 표전문제(表箋問題)의 대두.2. 표전문제(表箋問題)의 경과.Ⅲ. 표전사건(表箋事件)과 요동공벌계획(遼東攻伐計劃)의 연관성.Ⅳ. 맺음말.Ⅰ. 머리말.명(明)의 철령위 설치에 반대한 친원파인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성계는 이를 반대하며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죽인 다음 창왕을 옹립하였다. 하지만 그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으며, 공양왕이 즉위한 지 3년 후엔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라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성계가 세운 조선(朝鮮)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처음부터 대명사대(對明事大)의 외교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외교정책을 취하던 조선에 일대 위기가 닥쳤으니 그것은 바로 표전문제(表箋問題)였다. 이 표전문제(表箋問題), 그리고 이것과 연관성이 있는 요동공벌계획(遼東攻伐計劃)은 조선 초 명(明)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하지만 요동공벌계획(遼東攻伐計劃)에 대한 사료(史料)가 많지 않은 탓에 여러 한국사 연구자들의 추측이 난무했고, 그들 중에서는 정도전(鄭道傳)이 요동공벌을 계획한 시점이 명(明)의 압박이 시작된 이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朝鮮王朝實錄』을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틀린 주장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먼저 표전문제의 대두와 경과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통해 표전문사건과 요동공벌계획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순서로 글을 전개하면서 요동공벌의 계획시점이 표전사건 이전이라는 것을 입증하여 보고자 한다.Ⅱ. 표전문제(表箋問題)의 대두와 경과.1. 표전문제(表箋問題)의 대두.태조 2년(1393) 5월 23일에 명(明)사신 황영기(黃永奇) · 최연(崔淵) 등이 와서 명 태조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내용은 다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또한 말씀을 낮추어 조심스럽게 섬길 뿐이다.”주원장의 경고서한을 받은 이성계는 그날로 조선에 나와 있는 여진족들을 찾아 신속히 돌려보내라고 지시내리는 한편, 6월 1일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남재(南在)를 파견하여 이를 해명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이성계는 5월 26일 각 도에 군사등록대장을 바치게 했는데, 이는 외적으로는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내적으로는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나가는 정책을 취한 것이었다.태조 2년(1393) 7월 28일 하성절사(賀聖節使) 김입견(金立堅)을 따라갔던 통사(通事) 곽해룡(郭海龍)이 와서 아뢰었다.“입견(立堅)이 백탑(白塔)에 이르니,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이 지금부터 고려 사람은 통과해 오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였습니다.”처음에 조선은 그 이유를 몰랐으나, 8월 15일 명(明)에 사신으로 가 있던 이염(李恬)이 돌아옴으로써 이유를 알게 되었다.사은사(謝恩使) 이염(李恬)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이염이 들어가서 황제를 뵈오니, 황제가 그의 꿇어앉음이 바르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또 머리를 숙이게 하고 이염을 몽둥이로 쳐서 거의 죽게 되었었는데, 약을 마시고 살게 되었다. 그가 돌아와 요동(遼東)에 이르니, 역마(驛馬)를 주지 않으므로 걸어서 왔다. 황제가 요동(遼東)에 명령하였다.“조선의 사신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조선이 아무리 명과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는 상식 밖의 처사였다. 게다가 조선 사신의 통행까지 막았으니 조선 측에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이 조선 사신에게 몽둥이찜질을 가하고 왕래를 금지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393년 7월의『명실록』을 보면 그 배경이 나온다. 당시 주원장은 사람을 요동에 보내 명이 확보하고 있던 거점들인 금주, 복주 등의 관방(關防)을 증설하고 성벽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요동도지휘사에게는 조선 사신의 입국을 엄금하고 변방을 잘 방어하라고 일렀다. 이런 세상을 떠난 뒤였고,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학식을 갖춘 아들이 없었다. 게다가 이방원은 이미 6년 전 이색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태조 3년(1394) 6월 1일 실록의 기사를 보자.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정안군이 대답하였다.“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 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정안군이 만 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이렇게 해서 이방원과 남재 그리고 중추원 지사 조반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금릉에 들어갔다.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황제를 여러 차례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조선에 대한 주원장의 의구심을 말끔히 풀어주고 돌아왔다. ‘1년 3사’의 외교관계도 회복되었다.조 ? 명간의 긴장관계는 이방원이 명(明)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극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로부터 상당 기간 명나라로부터의 전쟁위협도 중단됐다.2. 표전문제(表箋問題)의 경과.‘1년 3사’의 외교관계가 회복된 지 약 1년 후인 태조 5년(1396) 2월에 표전문제가 발생하여 두 나라 사이에 또 다시 갈등이 생기고 말았다. 그 첫째 표전사건은 태조 4년(1395) 10월 조선 하정사(賀正使)인 대학사(大學士) 유구(柳?), 한성부윤(漢城府尹) 정신의(鄭臣義)가 가지고 간 하정표문(賀正表文)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태조 5년(1396) 2월 9일 조선 하정사(賀正使) 일행의 타각부(打角夫) 김을진(金乙珍)과 압물(押物) 고인백(高仁伯) 등이 예부(禮部)의 자문을 가지고 옴으로써 조선에 알려지게 되었다.‘전자에 조선 국왕이 여러 번 흔단(?端)을 내었다고 해서, 악진(岳鎭)과것이 매우 무례하다 하여 정총을 억류하고 동시에 찬문자 및 교정자의 관송을 요구해 온 것이다. 하지만 『朝鮮太祖實錄』에 수록되어 있는 해당 주청문(奏請文)을 아무리 검토해 보아도 주(紂)의 일을 인용한 것이 보이지 않으니 명(明)에서 주장하는 것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朝鮮太祖實錄』은 모두 4차에 걸쳐 개수(改修)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므로, 이 개수(改修)도중에 문구가 빠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태조 5년(1396) 6월에 명(明)은 상보사 승(尙寶司丞) 우우(牛牛)와 환자 송패라(宋?羅) 등을 조선에 보내 1차 표전사건의 하정표전 표문을 지은 정도전과 정탁을 명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이미 찬문자(撰文者) 김약항을 보낸 바가 있으나, 명은 억류시키고 있는 하정사(賀正使) 유구의 공술(供述)에 의하여 하정표문을 찬문(撰文)한 책임자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정도전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을 한 것이었다.같은 해 7월 명사(明使) 송패라(宋?羅)가 먼저 귀국할 때 조선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이을수(李乙修)로 관압사(管押使)를 삼아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지은 예문춘추관 학사 권근(權近)과 우승지 정탁(鄭擢)과 그것을 계품(啓稟) 교정(校正)한 사람인 경흥부 사인(敬興府舍人) 노인도(盧仁度)를 명에 관송하게 하고, 정도전은 관송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한성윤(漢城尹) 하륜(河崙)으로 계품사(啓稟使)를 삼아서 주원장에게 아뢰기를,…… 신이 경사(經史)에 밝지 못하옵고, 글을 지은 자가 모두 해외(海外)의 사람이므로 어음(語音)이 다르고, 학문이 정미하고 해박하지 못해서 표문과 전문의 체제를 알지 못하여, 문자가 어긋나고 틀리게 된 것이요, 어찌 감히 고의로 희롱하고 모멸했겠습니까? 삼가 분부하신 대로 표문을 지은 정탁과 교정한 권근이며, 교정을 계품한 노인도는 판사역원사 이을수를 시켜서 경사(京師)로 압송해 가 폐하의 결재를 청하는 외에, 정도전은 정탁이 지은 표문에 일찍이 지우거나 고치지 않았으明)에 파견한 바가 있었는데, 그 계본(啓本)이 또 다시 문제화된 것이다. 조선에는 같은 해 12월 천추사(千秋使)의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가 명(明) 예부(禮部)의 글을 가지고 귀환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명은 예부의 글을 통해 조선이 천추계본(千秋啓本) 속에서 사용한 문자가 부당하다고 질책하며 찬문자를 보내오면 억류된 사신을 귀환시키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계본을 짓고 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회답하게 하면 사신을 환국하게 할 것이다. 금후로는 조공을 3년마다 한 번씩 보내고, 또한 주본(奏本)·계본(啓本)을 반드시 쓸 것 없으니, 왕은 마땅히 살피라.이에 조선에서는 통사 곽해룡으로 하여금 계본(啓本)의 저자 예조전서(禮曹典書) 조서(曹庶)를 관송하게 하였다. 그러나 명(明)은 다시 조서와 곽해룡을 구류시키는 한편 조서의 종인(從人)을 조선에 귀환시키면서 계본(啓本)저작에 관여했던 인물인 공부(孔俯) 등 3인을 추가로 관송해 올 것을 요구하였다. 태조 7년(1397) 6월 조선은 공부(孔俯)등 3인을 관송하게 하고 명 예부시랑(禮部侍郞)에게 회답하였다. 그러나 공부(孔俯)등 조선사신 일행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명태조가 이미 사망하고 황태손(皇太孫)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대사면을 얻어 조선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로서 명과 조선 간의 3차에 걸친 표전사건은 모두 종결되었다.Ⅲ. 표전사건(表箋事件)과 요동공벌계획(遼東攻伐計劃)의 연관성.태조 5년(1395)에서 6년(1396) 사이에 조선에서는 요동을 공벌(攻伐)하고자 하는 계획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주도자는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었다. 이들이 요동을 공벌하고자 하는 계획의 이유에 대해 『朝鮮王朝實錄』에는 대략 두 곳에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朝鮮太祖實錄』 7년 윤5월 갑진(甲辰)일의 기사를 보자.또 진도(陣圖)를 연습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표사(表辭)로써 기모(欺侮)했다고 하여 공사(供辭)가 정도전에게 관련되어 칙지(勅旨)로써 입조(入朝)하게 하니, 도전이 병이 났
『홍루몽』을 통해 본 청대 귀족사회의 음식문화Ⅰ. 서 론Ⅱ. 청대 귀족의 음식문화1. 만주족 고유의 영향을 받은 음식들2. 남방의 음식들3. 차(茶) 문화Ⅲ. 결 론Ⅰ. 서 론명대에는 남방의 음식문화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청대에는 여기에 북방민족의 식습관까지 더해지면서 음식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졌다. 이에 귀족들의 식문화는 더욱 고급스러워졌다.『홍루몽』에서 대관원의 구성원들이 먹던 음식들을 보면 당시 귀족사회의 식문화를 알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예술기교의 화려함을 추구하기 위해 근거 없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대관원의 사람들이 즐기고 향유하였던 음식들과 그 생활상을 섬세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홍루몽』은 청대 귀족사회의 풍속과 생활을 연구하는 사료로서 지니는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먹는 것’은 의·식·주 3대 요소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사는 데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옛날 화려한 삶을 영위하였던 사람들은 어떠한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생활했는지 이제부터 그 내면을 한 번 들여다보기로 하자.Ⅱ. 청대 귀족의 음식문화1. 만리장성 이북의 영향을 받은 음식들보옥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궁중의 귀비로부터 치즈에 설탕을 넣고 만든 타락죽이 보내져왔다. 제 19회 「화습인의 충고」.희봉은 곧 보옥의 방으로 건너와 이노파의 손을 잡으며 웃어보였다. “유모가 또 화를 내시네요. [중략] 내 방에 먹음직하게 구워 놓은 꿩 한 마리를 갖다놨어요. 가서 나하고 술이나 한잔 마셔요.” 제 20회 「왕희봉의 질책」.“어서 나가 바깥사람들한테 메추리 고기를 튀기도록 하고 몇 가지 요리를 더 만들어 저녁상을 잘 준비하라고 일러두고 넌 다른 곳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너라.” 제 46회 「청혼을 거절한 원앙」.겨우 아침 밥상이 차려졌는데 처음 나온 요리는 우유를 넣어 찐 양의 태반이었다.가모가 말했다.“이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먹는 약이란다. 미처 해를 보지 못한 새끼 양으적 습성과 생활방식, 문화는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중에서도 특히 만주족이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음식문화였다. 만주족은 중국 동북 지역의 장백산 일대에 살았던 민족으로, 중원을 점령한 뒤에도 여전히 들짐승을 주재료로 한 요리를 즐겼고 매년 동북 지역의 들짐승들이 공물로 바쳐졌다. 황실의 식사에서부터 세시, 제의 등에 사용되었던 음식에 이르기까지 청대 황실의 요리는 대부분 노루, 고라니, 꿩, 멧돼지, 산양 등의 들짐승을 주재료로 하였는데 들짐승요리를 즐기는 이러한 식습관은 만주족의 습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관원의 구성원들은 일반 백성들은 구경하기조차 힘든 음식들을 즐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음식들은 독특한 별미를 찾았던 청대 귀족의 음식 취향을 보여주는 예들이라 하겠다. 남방의 음식문화가 주를 이루었던 명대에 이어 북방민족의 식습관이 중원으로 유입된 청대는 중국의 음식문화사에서 커다란 지각변동을 몰고 온 시기라 할 수 있다.북방민족의 음식생활을 보여주는 특징 중 또 하나는 양고기와 유제품을 먹는 습성을 지적해 볼 수 있다. 양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시며 털 가죽옷을 입는 생활습관은 유목민족의 문화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홍루몽』에는 양고기와 우유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종종 등장한다. 초원의 유목민족에게 우유는 순결, 평안, 행복,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청대 황실은 북경으로 들어온 이후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우유를 바치기도 하였고 우유로 만든 음식을 매우 귀한 요리로 여겼다. 제 49회에는 우유에다 양고기를 넣고 찐 우유증양고가 등장한다. 당시 우유는 구하기 쉽지 않은 귀한 보양식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흥미로운 부분은『홍루몽』에서 해산물 요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식습관은 청대 황실의 식문화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현상이었다. 황제의 식사에는 매번 사슴이나 양, 오리, 제비집 요리가 들어있는 반면 상어지느러미 요리를 비롯하여 해산물 요리는 거의 들어있지 않다. 상당히 한족화퍼붓더래요. [중략] 오늘은 조반도 먹지 않았다고 하기에 그 애가 연와탕을 조금 마시는 걸 보고 이제 막 돌아오는 길이랍니다. 제 10회 「진가경의 와병」 .“게다리를 손에 들고 계수나무 그늘에서초를 치고 생강 바르니 흥에 겨워 미칠 듯욕심쟁이 왕손에겐 응당 술이 있으련만옆으로 기는 공자에겐 창자마저 없는 거냐?배꼽 속 냉적을 삼갈 것을 잊었구나비린 손 씻어내도 게 향기는 여전하다세상사람 입과 배를 채워주는 너를 두고한평생 번거롭다 소동파도 웃었더라. 제 38회「국화시 뽑힌 대옥」.”일동은 유노파에게 눈길을 모으며 왁자하게 웃었다. 이때 한 어멈이 찬합을 들고 가운데로 나와 서더니 시녀 하나가 다가가 찬합 뚜껑을 열었다. 찬합 안에는 반찬 두 그릇이 담겨 있었다. 이환이 그 중 하나를 집어서 대부인의 탁자에 놓아 드리자 희봉은 얼른 비둘기 알이 담긴 나머지 그릇을 집어 유노파의 식탁에 놓아주었다. 제 40회「대관원의 주령놀이」.대옥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벌써 몇 차례나 기침을 해댔다. 보차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어제 대옥의 처방을 잠깐 보았더니 인삼과 육계가 좀 많이 들었던 것 같더라고. 비록 기혈을 보충하는 약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더우면 좋지가 않거든. 내 생각에는 말이야 우선 간을 잘 다스리고 위장을 튼튼하게 하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아. 간의 열기가 식으면 위장이 잘 다스려져 위에 병이 없어지고 식욕이 당겨 몸이 좋아질 거란 말이야. 매일 아침 일찍 연와탕 한 냥에 얼을 설탕 닷 돈을 작은 솥에 죽으로 끓여 장복하면 약보다 훨씬 나은 원기회복제가 될 꺼야.” 제 45회 「도롱이를 쓴 보옥」.“어린 시녀가 작은 소반에다 복건산 연밥과 붉은 대추를 넣어 끓인 연밥대추탕을 받쳐 들고 왔다. 보옥은 탕을 두어 모금 마셨다. 이어서 사월이 작은 접시에 전통방법으로 만든 연한 자색 생강절임을 들고 들어왔다.” 제 52회「공작털 짜깁기한 청문」.“지난번 보낸 매괴로 장미꽃잎을 설탕에 절인 것. 매괴는 한약재로 쓰이며 당뇨병이나 피로 회복에 좋음.는 언니가 먹어 보았어을 시켜 주방에서 아가씨께 드릴 화육배추탕 화퇴는 돼지다리의 살을 소금에 절여 햇빛에 말린 것을 가리킨다. 금군에 대항했던 장수 중 한명인 종택의 동경유수사군(종택이 패배한 제군의 병사, 금군에 무장 저항을 시작한 팔자군 등의 민중 등을 모아 재편한 부대로, 동경(개봉 : 북송의 수도)을 그야말로 격전과 격전을 거듭해 가며 탈환해 그를 거점으로 삼아 최전선에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택이 죽고 무능한 두충이 지휘를 맡자 곧 개봉을 포기했고, 종국에서는 금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명장 악비가 이 계통에 있던 사람이다.)에는 절강성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전투식량으로 화퇴를 가지고 다니며 먹었다고 한다. 종택이 이를 먹어보고 맛이 매우 좋아 고종에게 바쳤는데, 고종은 이를 금화화퇴(金華火腿)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절강성은 조설근이 자랐던 강소성 바로 아래 지역으로, 강소성에서도 이 음식이 유행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을 가져오게 했어요. 거기다가 마른 새우를 조금 넣고 죽순과 김을 약간 섞으라고 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제 87회「마귀가 씐 묘옥」.그때 어린 시녀가 차 쟁반에 사발 하나와 상아 젓가락 한 쌍을 들고 들어와서 사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이건 방금 습인 언니가 주문한 거라며 주방의 할멈이 가지고 왔어요.”사월이 받아보니 연와탕이었으므로 습인에게 물었다.“언니가 해오라고 한 거예요?”“어제 도련님께서 저녁 진지도 안 드신 데다가 밤새 잠까지 못 주무셨잖아.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 틀림없이 시장하실 것 같아서 어린 시녀더러 주방에다 연와탕을 준비하게 하라고 일러두었지.” 제 89회「의심병이 생긴 대옥」.청대 초기 강희제는 식생활이 소박하여서 한꺼번에 여러 요리를 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시기에 이르면 식생활이 사치스럽고 한족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따라 황실의 음식 취향도 야미를 즐겼던 것에서 점차 오리, 제비집, 새우, 게 등 다양한 요리를 즐기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청대 음식m에 이르는 운하. 6개의 성과 도시를 지나고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 등 5개의 강을 연결하여 남북 물류의 대동맥 역할을 한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중국 동남부의 관문이자 남북의 물자가 운송되고 문화가 교류되는 요지였다. 게다가 당시 양주에서 활동하였던 소금 상인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음식을 즐기게 되면서 양주요리의 독특한 풍격은 점점 더 유명해졌다. 제 8회에서 나온 조아장압신(糟鵝掌鴨信), 제 62회에서 나온 하환계피탕, 제 75회에서 나온 계수순 등은 모두 양주요리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취향과 맛을 보여주는 예들이다.조설근이 양주에서 성장기를 보낸 것은 익히 알려진 바 조설근은 남경의 강녕직조에서 귀공자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홍루몽』에서는 남방 지역의 음식들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홍루몽』에서 양주 요리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화퇴를 활용한 요리를 들 수 있다. 화퇴는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햇볕에 말린 것을 가리킨다. 날씨가 온난하여 육류의 저장기간이 길지 않았던 남방의 기후조건이 만들어낸 식재료이다. 또한 대관원의 사람들이 자주 먹었던 제비집 요리는 명대의 궁중요리였던 노채(菜) 산둥 요리(山東料理 또는 菜)는 중국의 산둥 성에 태어난 요리로 중국 팔대요리의 하나이다. 북경 요리의 원형이며 ‘노채’(魯菜)로 불린다. 그 역사는 북송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명·청 때에는 궁중 요리로서 베이징의 황궁에서 요리 되었다. 산둥성은 춘추시대 이래 노나라나 제나라 등 많은 제후국이 성립되었고, 중원의 농촌 지대와 황해의 어촌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식재도 풍부하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적 배경으로 산둥 요리도 춘추전국시대 이래 끊임없는 발전을 이루어 왔다. 또 산둥성의 취푸에는 공자묘가 있어, 공자 신앙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취푸에서는 공자에게 바치는 요리를 만들기 위한 독창적인 조리법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산둥 요리의 특징은 맛은 향기가 좋고, 짜고, 씹는 맛은 부드럽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