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쟁사[2차 세계대전 - 진주만 공격]□ 전쟁발발 배경1. 진주만에 대한 국제적 시각1941년 가을까지 중?일 전쟁은 고립된 상황에서 4년 이상 장기화된 상태였고, 양국은 각각 다양한 방법으로 외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유럽 대부분을 정복한 독일은 영국과 소련까지 굴복시키려고 시도 중이었다. 당시 미?일 관계의 악화는 다른 국가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로서 작용하였고, 각 국가 간에 얽힌 이해관계는 미?일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2. 미?일의 대립진주만 기습의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게 된 미?일 양국가간의 대아시아 정책, 특히 중국정책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아?태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에 대한 후유증이 국내적 고립주의 성향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에 관심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대아시아 정책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함과 더불어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기회를 제공하여 미?일 대결의 잠재적 요인이 되었다.□ 작전계획 및 경과1. 일본의 선택1941년 가을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18개월 아니면 기껏해야 2년 밖에 지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 정부가 모험을 걸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기울게 된 것은 단순히 경제조치 뿐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시 유럽에서 독일군의 전격전이 대승을 거둔데서 고무되었다고 할 수 있다.1941년 9월 일본 해군은 도쿄 해군대학에서 도상기동연습을 실시했다.11월 7일 야마모토는 진주만 공격부대에 대한 전 책임을 나구모 중장에게 일임하고, 11월 25일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이미 쿠릴열도 남단에 집결해 있던 나구모의 부대는 11월 26일 06:00경을 기해 3,000마일의 먼 길을 극도의 기밀유지와 경계망을 편 가운데 전진하였다.)12월 1일 일본정부는 전 각료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의했고, 이튿날 야마모토는 기동함대 사령관인 나구모 제독에게 “니이다까야마 노보레(신고산을 오르라)”) 라는 암호 전문을 통해 진주만 작전개시를 명령했다.□ 작전계획 및 경과(계속)2. 전쟁의 시작11월 22일 일본 특수기동함대는 3개 집단으로 편성되어 쿠릴 열도를 출발, 잠수함 경호를 받으며 오아후 섬으로 향했다. 미?일 협상이 결렬되자, 11월 29일 일해군은 외무대신에게 예정된 공격개시 시간을 통보했다.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워싱턴주재 일본대사관에는 통보하지 않았다. 12월 1일 일본정부는 드디어 전각료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의했다. 도조 수상은 “대일본 제국은 바야흐로 흥패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이튿날 야마모토는 기동함대사령관 나구모 제독에게 진주만 작전개시를 명령했다. 공격명령이 하달되는 순간 어떤 해군병사는 “하와이 공습! 드디어 내 꿈을 실현할 때가 왔다”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일본군은 전의에 불탔고 사기가 드높았다.3. 미국의 허술한 방어태세11월 27일 ‘전쟁경고’를 상부로부터 하달받았을 때 킴멜 제독이 취한 조치는 가벼운 경계태세였다.하와이에 주둔한 미군병력은 쇼트 장군 휘하에 5만 9천명의 지상군이 있었다. 킴멜 제독 휘하 태평양함대는 전함 9척,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8척, 구축함 54척, 잠수함 2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항공기는 육?해군 합해 450대였다. 항공모함과 중순양함은 멀리 떠나 있었다.□ 전쟁 결과나구모 함대가 오아후 섬 북방 230마일 해상에 도달한 것은 12월 7일 06시였다. 183대의 항공기가 제1차 공습을 위해 발진하여 3천 25야드 고도의 구름 위에서 1시간 50분동안 비행했다.07시 49분 후지다는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4분후 그는 나구모가 위치한 항공모함에 무전을 보냈다. 07시 55분 일본군 폭격기는 히컴 및 휠러 비행장과 포드섬의 해군공장을 맹폭하기 시작했다. 8척의 전함 가운데 2척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침몰하거나 크게 파손되었다. 순양함 ‘헬레나’도 대파되었다. 공중어뢰 폭격 55%, 수평폭격 25%, 급강하폭격 50%의 명중률을 과시했다.08시 54분에 167대의 제2차폭격이 시작되었다. 1시간동안 계속된 이번 폭격에서 일폭격기들은 1차 때 완파되지 않은 목표물들을 찾아 집중폭격했다.미 태평양함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전함 7척을 포함한 18척의 함선이 쏟아진 기름을 제거하는데 무려 3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으며, 침몰된 전함 ‘애리조나’의 경우에는 그 후 10년 이상이나 기름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항공기는 폭파 188대, 파손 159대였다. 인명손실은 전사 3천 303명을 포함, 총 4천 575명이었다. 반면에 일본군의 손실은 항공기 19대, 소형잠수함 5척, 대형잠수함 1척 뿐이었다.□ 전훈도출기습이 성공하는 경우를 보면 통상 상대방의 실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진주만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의 공격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방어태세를 소홀히 했다. 또한 미육군과 해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루지도 못했다. 11월 27일의 전쟁경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서 미군들은 방심했다. 일본이 감히 미국의 인후부를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고가 만연되어 있었던 것이다.한편 일본은 전술적으로 크게 성공했으나, 전략적으로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첫째, 일본군은 두 차례의 파상폭격에 만족한 나머지 너무 서둘러 철수해버렸다. 나구모의 기동함대는 공습을 개시한 7시간뒤에 철수길에 올랐다. 야마모토와 그의 참모들은 미태평양함대를 완전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이튿날 아침까지 공습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나구모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사[낙동강 방어 작전]□ 전쟁발발 배경북한군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수도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북한군의 소련제 T-34 전차 앞에는 속수무책이었고 이로 인해 전 장병들은 전차 공포증으로 사기가 지극히 저하되어 있었다.더욱이 6월 28일 새벽에 한강교가 폭파됨으로써 미처 철수하지 못한 병력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주요 전투 장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서울시민은 물론 온 국민들에게 끼친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인 타격은 실로 지대했다.유엔군의 일원으로 주일 미 제24사단의 선발대가 적의 전진을 지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적의 대부대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7월 5일 성환-천안 선으로 철수, 7월 11일에는 천안-조치원선을 포기하고 금강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의 전투력이 예상외로 강력하고 미 제 24사단의 방어 작전이 기대에 어긋나자 미 제 25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을 전선에 투입하였다.그러나 미 제24사간이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에 의하여 사단장이 포로로 잡혔고 7월 20일 대전이 실함되자 영동-문경-영덕 선으로 철수, 25일에는 하동, 거창, 김천, 함창, 안동, 영덕 선에서 일단 적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 선에서도 병력부족과 방어진지를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여 상황은 불리하게 전개되었다.당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공간을 내어주고 소수병력을 희생시켜 시간을 획득함으로써 주일 미군은 한국에 배치하였고, 낙동강 선에서 강력한 방어준비를 할 수 있도록 지휘조치 하였다.□ 작전계획 및 경과낙동강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부산교두보”라고 하며 또 미 제8사령관인 워커장군이 설정한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의미에서 “워커라인”이라고도 한다. 이 방어선은 전반적으로 낙동강에 연하여 설정되었으며, 남쪽의 마산으로부터 남지-왜관-낙정리-영덕을 잇는 동서간 약 80km, 남북 간 약 160km 총 240km의 방어선이다.최초 낙동강방어선의 구상은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이 무너진 직후인 7월 17일부터 검토되었다. 이때 워커 장군과 참모들은 국군과 주한미군 및 증원부대의 상황, 해·공군의 지원, 적의 상태, 지형과 부산항의 여건, 보급품의 양륙상태 등에 관한 각종 자료를 다각적으로 분석한 후 낙동강 선을 최후의 교두보선으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 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워커 장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적을 지연시키고 있는 동안, 7월 26일 전군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준비 명령을 하달,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지도지침에 따라 7월 29일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이른바 전선 사수명령을 하달하여 전의를 다졌다. 8월 1일 전국에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방어선으로 도하철수를 명령하였다.낙동강 연변과 남해안까지는 미군 3개 사단이, 왜관 북쪽-낙정리-영덕까지는 국군 5개 사단이 각각 낙동강전선을 분담하여 방어하였다. 함창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2군단 예하 제1사단은 8월 1일 밤 적과 접촉을 끊고 당시 상주의 미 제25사간의 엄호 하에 낙동리 나루터에서 선박으로 낙동강을 도하하여 8월 3일 저녁까지 낙동강 연안의 신진지를 점령하였다.낙동강방어선가지 지연전을 전개하는 동안 국군의 피해는 7만여 명이었고, 각 사단의 화력은 약했고, 보급도 부진하여 사기가 낮았다. 그러나 낙동강방어선에 도달한 후부터는 병력도 보충되고, 기관총, 3.5인치 대전차 로켓포 등 신장비도 지급되었으며 보급지원도 점차 호전되어갔다.전투력을 상실한 3개 사단(제2, 제5, 제7사단)을 해체하는 대신 나머지 5개 사단을 보강하였다.한편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하여 8월 1일 경에는 대체로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제1군단은 김천에서 제2군단은 안동에서 각각 점령하고 있었다.제1사단은 낙동강선 외곽에 1개 전차사단으로 증강된 10개 사단을 배치하고 예비사단이 제10사단을 낙동강전선을 목표로 남하시키고 있었으며, 제7사단과 제9사단을 서울에 집결시켜 전선 투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 결과 왜관 북방에서 영덕까지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은 제15사단과 제13사단이 왜관 북방 국군 제1사단 정면에서 도하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으로 제13사단 일부와 제1사단이 국군 제6사단 정명에 대치하고 있었고, 안동을 점령한 적 제8사단 국군 제 8사단 정면에, 그리고 제12사단이 국군 수도 사단 정면에, 각각 대치하였으며 동해안 방면에서는 적 제5사단과 766부대가 국군 제3사단과 대치하였다.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한 이래 낙동강전선에 이르는 동안 58,000여 명의 병력손실이 있었으며 이는 개전 초 병력의 32%에 해당되며, 그 대부분은 국군에 의하여 살상되거나 포로가 된 것이다. 또한 전차는 약 805, 야포 및 박격포는 70%가 파괴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작전계획 및 경과(계속)낙동강 선에 도달한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전선 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8월 초에도 계속적인 공세를 감행하여 낙동강을 단숨에 도하하려고 성급하게 작전을 전개하였다.당시 대구는 임시 수도인 동시에 부산교두보의 전략적인 요충지이므로 적은 공격부대의 절반인 보병 5개 사단을 전차로 증강시켜 대구에 투입, 그들의 공격축선은 다음과 같다.북한군 제1군단 : 보병 4개 사단 중 2개 사단을 대구전선에 투입제10사단 : 고령-용포-대구(미 제1기병사단 정면으로 공격)제3사단: 성주-왜관-대구(미 제1기병사단 정면으로 공격)제3사단은 8월 13일을 전후하여 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공격방향 전환북한군 제2군단 : 보병 6개 사단 중 3개 사단을 대구전선에 투입제15사단 : 선산-구미-다부동-대구(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공격)제13사단 : 상주-낙정리-다부동-대구(국군 제1사단 정면으로 공격)제1사단 : 군위-효령-대구(국군 제6사단 정면으로 공격)이러한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아군은 다음과 같이 3개 사단을 대구 외곽에 배치하였다.대구 서쪽지역 : 미 제1기병사단 : 현풍 북쪽-왜관(303고지)대구 서북쪽지역 : 국군 제1사단 : 왜관(303고지 북쪽)-낙정리8월 13일 이후 왜관-효령 서쪽(석우동)대구 북쪽지역 : 국군 제6사단 : 낙정리-의성 서쪽8월 13일 이후 효령-동평이와 같이 낙동강 방어전투중 전략요충지인 대구를 탈취하기 위한 북한군의 필사적인 공격과 이에 맞서 유엔군과 국군의 혈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에서 대해서 알아본다.제1사단이 맡은 다부동지구 지역은 왼쪽으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오른쪽으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는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로 통하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제1사단은 8월 13일에 집결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제15연대가 328고지 일대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했다. 이에 북조선군도 8월 13일 제3사단 일부 병력을 투입해 328고지를 공격하고 제15사단도 국군 제1사단보다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고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북조선군은 8월 15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빼앗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기는 쟁탈전을 벌였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했고 제11연대도 탱크 7대를 앞세운 연대 규모의 공격으로 복곡 일대로 물러났다.대구 방면에서 공격이 한창일 때 8월 16일 11시 58분~12시 24분에 UN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왔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 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이와 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8월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 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 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8월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 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을 통한 리더십 연구□서문일본 전국시대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들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일 것이다.먼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역사상 최고경영자 유형 1위로 뽑혔다. 낡은 권위와 가치관을 과감히 파괴하고 천하 통일의 비전을 제시했으며, 자기변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부하는 가차 없이 추방하고 망언이나 배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정보력을 갖춘 자를 등용하고, 부하들의 출세욕을 자극하고 활용했으며, 직접 생각하고, 직접 조사하고, 직접 실행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할 정도로 높은 지적 수준과, 경제 부흥이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열쇠라는 점을 인식할 정도로 근대 적이었으며, 정보가 곧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는 점을 간파했을 정도로 현대적이었던 것도 한몫했다.두 번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최고경영자들이 뽑은 변혁의 시대 리더상 1위를 차지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의 군문에 들어 파죽지세의 출세가도를 달려 일본 최고의 출세인으로 손꼽힐 정도로 자수성가한 리더였으며, 인심을 꿰뚫고 장악하는 능력, 과감한 행동력, 다가온 강운과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절차탁마의 처신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난세의 전국시대를 움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적의 성곽의 식량보급로를 차단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굴복시켰던 치밀함, 상인들을 군수물자의 보급통로로 활용할 줄 알았던 기민함, 다도 모임을 정치 교섭의 장으로 삼는 처세술과 함께 난관을 거침없이 돌파해내는 실행력과 배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기 극복과 불황 타개의 초석이 될 역발상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하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보여준 대담한 공격적 전략들 또한 현재 일본 굴지의 기업들의 핵심 역량을 결집시키는 성장모델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마지막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최고경영자들이 가장 선호배한 전투에서 교훈을 얻어 다음 전투에 이용할 정도의 인내와 냉정함. 조직의 수성을 위해 펼친 전략들(모든 면에 분단법을 활용, 한 사람에게 꽃과 열매를 함께 주지 않음, 늘 민심의 동향을 파악함, 상인의 검소, 계산능력, 재능의 세 가지 원칙을 기본 전략으로 삼음)은 에도 막부가 260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기초가 되었다. 평생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철학으로 지키려고 애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습은 현재 일본 최고경영자들의 역할모델이 되고 있다.□본문0. 역사 속 전국시대 인물의 리더십 사례. 오다 노부나가겐키 2년(1571년) 9월 11일 밤, 히와 호수, 히에이 산기슭에 위치한 진영. 8월부터 본거지인 기후를 나와 오우미를 전전하고 있었다. 적은 기타오우미의 아시이 나가마사와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비롯한 그 일당들이었다. 지난해 아네가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를 둘러싼 정세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이시야마 혼간지, 이세의 나가시마에서 폭동을 일으킨 승려와 신자들,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승병들이 모두 아사이와 아사쿠라 편을 들고 있었다.이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사쿠마 노부모리를 불러 9월 12일 내일자로 히에이산을 토벌하라고 명한다. 승려는 물론이고 신자들도 남녀노소불문하고 모조리 죽인 다음 엔랴쿠지까지 태우라는 명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살생이 금지된 산이라는 이유로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반문하자, 지난해 9월 히에이산 연합군에 목숨을 잃은 모리 요시나리와 자신의 동생 오다 노부나오의 복수라는 명분을 거론하고, 엔랴쿠지의 타락한 모습을 언급하며 빨리 출정하라고 명한다. 히에이산은 야마시로와 오우미의 국경에 남북으로 걸려 있는 히라 산지의 남부에 있다. 지금의 교토 시와 오츠 시의 경계다. 동서 양쪽은 경사가 급한데 가장 높은 곳은 해발 848미터로 본격적으로 방어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였다. 이러한 연유로 히에이산의 폭도들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중립을 지킨다 못하는 차에 한낱 촌뜨기 다이묘에 불과하였던 노부나가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방심하고 있었다. 이를 파고든 노부나가는 히에이산에 엄청난 대군을 보냈다. 그리고 불상을 비록하여 경전까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승려는 물론 신자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목을 베었다. 그 후 노부나가의 별명은 오와리의 멍청이에서 잔인한 악마, 추악한 마귀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겉으로는 충동적으로 히에이산을 토벌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 싸움에서는 세 가지 의의를 두고 있었다. 첫째는 요충지 확보, 두 번째 의의는 낡은 권위의 파괴다. 중세에는 정치가 종교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형국이었다. 노부나가는 어떤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행한 것이다. 모든 이의 원망을 한몸에 받으며 낡은 중세를 파괴하고 새로운 근세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세 번째 의의는 소제에서 알 수 있듯 카리스마적 리더 이미지를 확립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등을 돌리는 자를 그대로 방치하면 부하들은 리더를 얕잡아 보고 한두 명씩 떠나버린다. 하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국시대의 전장에서 적에게 모욕을 당하고 그대로 있을 경우, 안팎으로 경멸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노부나가는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미천한 신분에서 어렵게 출발하여 성공적으로 조직을 장악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릴 적 별명은 생김새가 원숭이와 비슷하다 하여 ‘사루(원숭이)’였으나, ‘무슨 일이든 윗사람이 명령한 기한보다 빠른 시일 내에 마친다’, ‘항상 윗사람이 기대한 이상의 성과를 낸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구도 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일을 완성한다’는 3가지 업무원칙을 세우고 지켜 나감으로써 조직 내에서 발군의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개방적이고 밝은 성격이었으며, 아무리 볼품없고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다. 히데요시는 부하를 칭찬할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칭찬했는데, 부하직원의 의욕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바로 바로 칭찬해주고 가능한 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가 항상 부하를 대할 때는, 첫째, 어떤 사람에게나 나름대로의 훌륭한 재능이 있다. 둘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셋째, 사람은 관심을 가져주면 자기가 못하는 일도 잘 하려고 하는 의욕을 갖는다.라는 3가지 기본시각을 가지고 부하의 말에 경청하고 임파워먼트를 실시하였다. 그것은 부하직원들은 같이 일하기 편하고 자기를 알아주는 상사를 좋아한다는 점과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하들에게 신망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는 부하직원의 눈에서 볼 때 좋게 생각되는 상사의 조건이 바로 첫째, 같이 일하기 편하며, 둘째, 상사로서 책임을 질 줄 알며, 셋째, 부하의 경력을 관리해 주고, 넷째, 부하의 아이디어를 잘 수렴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실행했고, 마침내 이를 통해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는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섬멸하고 독립한다. 그 뿐 아니라 천하까지 손에 넣는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기초는 대부분 이마가와 가의 인질 시절에 다이겐 세쓰사이라는 고승에게서 배운 것이었다.청년이 된 이후에는 전쟁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책 따위는 읽을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부분의 책을 이 시절에 읽은 것이다. 일반적인 교양서적 이외에 모략, 정보, 첩보 활동 등을 다룬 『육도』나 『삼략』등을 애독했는데 이는 전쟁광이었던 세쓰사이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세쓰사이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사軍師 였다.) 나중에 '너구리 영감'이라고 불리게 되는 도쿠가와의 모략성도 이 시절에 배양되었다.모략을 구사하려면 상당한 끈기가 필요한데 그 끈기도 이 시절에 배웠을 것이다.「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길을 걸어가는 것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자칫하면 초조해지기 쉬운 소년 도쿠가와에게 세쓰사이는 이렇게 가르쳤다.「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면 '시기'라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의 네게는 아직 그런 시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참고 기다려라. 참고 기다리면서 시기가 찾아왔을 때에 당황하지 않도록 학문을 익혀두어야 한다.」도쿠가와가 이런 '인내'를 익힌 것도 세쓰사이에게서 배운 커다란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다.도쿠가와는 시나 와카(和歌)를 싫어했는데 그런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는 것일 뿐, 이 세상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사례를 통한 인물과 리더십 향상 계획의 연계성. 오다 노부나가와카리스마적 리더 이미지를 확립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등을 돌리는 자를 그대로 방치하면 부하들은 리더를 얕잡아 보고 한두 명씩 떠나버린다. 하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국시대의 전장에서 적에게 모욕을 당하고 그대로 있을 경우, 안팎으로 경멸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노부나가는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카리스마를 갖는 것은 리더로서의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리더로서 ‘나를 따르라’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과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는 것이 리더로서의 자질이라 생각한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그가 항상 부하를 대할 때는, 첫째, 어떤 사람에게나 나름대로의 훌륭한 재능이 있다. 둘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셋째, 사람은 관심을 가져주면 자기가 못하는 일도 잘 하려고 하는 의욕을 갖는다.이러한 철학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부하를 다루듯, 소대원의 리더인 소대장은 병력관리에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전투력을 보존하는 데에 힘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자신의 부하를 다루기 위해 소대장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보아야 하며, 자한다.
[군사학]육군 가치관 실천사례와 교훈□ 충성0. 사례오수개(獒樹-)는 불이 난 것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했다는 개이다. 고려 시대의 문인 최자(崔滋)가 1230년에 쓴 《보한집》(補閑集)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고려시대 거령현(오늘날의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살던 김개인(金蓋仁)은 충직하고 총명한 개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날 동네 잔치를 다녀오던 김개인이 술에 취해 오늘날 상리(上里)부근의 풀밭에 잠들었는데, 때마침 들불이 일어나 김개인이 누워있는 곳까지 불이 번졌다. 불이 계속 번져오는데도 김개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그가 기르던 개가 근처 개울에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들불위를 뒹굴어 불을 끄려 했다. 들불이 주인에게 닿지 않도록 여러차례 이런 짓을 반복한 끝에, 개는 죽고 말았으나 김개인을 살렸다고 한다. 김개인은 잠에서 깨어나 개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개의 주검을 묻어주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한다. 나중에 이 지팡이가 실제 나무로 자라났다고 한다. 훗날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를 합하여 이 고장의 이름을 '오수'(獒樹)라고 부르게 되었다.1. 교훈도출자신의 주인의 위험을 알리고자 노력하였고, 주인이 알아차리지 못하자 희생을 마다 않고 주인을 지켜내려 했다. 이처럼 국민이 우리나라의 주인으로 섬기는 군인으로서 위험을 알리고, 이 위험에 대해 막아낼 충성스러운 자세가 필요하다.국민을 위한 충직한 ‘개’라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군인이 되어야한다. 그러기위해서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 대한 충성을 중요시해야 한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여 국민에게 위험을 알리고, 위험에 처한 국민들을 위하여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한다.□ 용기0. 사례이수현(李秀賢, 1974년 7월 13일 ~ 2001년 1월 26일)은 2001년 1월 26일에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 일본 도쿄 도 신주쿠 구의 신오쿠보 역에서 취객이 반대편 선로상에 추락한 것을 보고 철로에 뛰어들어 구조를 하다 희생된 한국인이다.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경,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 일본 도쿄 도 신주쿠 구의 신오쿠보 역에서 취객이 2번 플랫폼(신주쿠 역 방면) 선로위에 추락한 것을 보고 철로에 뛰어들어 구조하던 중 야마노테 선 열차가 들어오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취객 및 함께 구조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와 함께 전동차에 치여 사망했다.1. 교훈 도출故 이수현은 일본인조차 나서지 못한 행동을 용기를 가지고 나섰다. 비록 그는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게 하였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 머뭇거렸던 다른 사람과는 달리 타국에서 온 그가 용기내서 취객을 구하려 했던 용기는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울리게 하였다.국군은 어떠한 위험이나 위협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행동하여야 한다. 적의 위협에 용기를 가지고 대처할 수 있어야한다. 비록 적의 위협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위험에 닥쳐있다면 용기 내어 국민을 구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천안함 침몰로 인하여 단 1명의 생존자를 찾기 위해 故한주호 준위는 위험함을 알고서도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목표한 일을 달성하려는 용기가 우리 가치관 속에 물들어 있어야한다.□ 책임0. 사례버큰헤드(Birkenhead)호의 전통은 조난 시 어린이와 여성부터 구하는 전통을 말한다. 1852년 472면의 병사와 그 가족 162명을 태운 영국 전함 버큰헤드호가 남아프리카 희망봉 앞 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혔다. 3척의 구명선이 200여명의 부녀자들만 겨우 태우고 점점 멀어질 때 병사들은 함장인 시드니 세튼 대령의 '차렷'구령에 꼿꼿이 서서 버큰헤드호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이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조난 시 어린이와 여성부터 구하는 전통이 생겼다.1. 교훈 도출버큰헤드호의 전통은 국민을 위하는 군인정신을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전함에 자신의 가족이자 국민들을 태우고 가는 도중 뜻밖의 일로 인하여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이때 지위상하를 막론하고 국민들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모습이 버큰헤드호의 전통을 만들만큼 모름지기 군인들은 이들의 모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은 군인의 책임이자 본분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안전을 위해 믿음직스럽게 뒷모습을 지켜주는 버큰헤드호의 군인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위험이나 위협에도 책임을 완수하는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존중0. 사례제24회 스승의 날 기념 참스승 발굴장애우와 함께 사랑의 꽃을 가꾸는 학교충남 공주정명학교 김준환 교장장애우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주며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가꾸어 주어 제24회 대통령표창을 수상 받은 공주시 장기면 공주정명학교 김준환 교장서생님.〃인형이, 오늘은 웃으며 오니까 아주 예쁘구나. 기분 좋은 일 있었니?〃김준환 교장은 오늘도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하며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간다. 아침마다 큰 소리를 내며 울고 오는 인형이가 오늘은 살짝 웃으며 교장선생님의 손을 잡는다. 다른 학생들도 서로 먼저 교장선생님께 인사도 하고 손짓으로 반갑다는 표현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늘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름도 묻고 어떤 행동 특성이 있는지 교사들에게 물으며 관심을 갖고 바라보신다.점심시간이 되면 꼭 식사도 같이 하고 식당을 다 돌아보면서 밥을 잘 먹지 못하는 학생들을 안타까워하시며 교사들의 노고에 많은 격려를 하신다.김 교장은 교단에 선지 38년으로 학생들의 학력증진에 기여하고자 충청남도 중학교 학력검사 선제위원으로 5년간 활동하였으며, 교육방송을 학교현장교육에 접목시키고자 EBS교육방송 모니터 요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충청남도 교육과제 추진 특별연구교사로도 활동하였으며 안면중학교에 근무할 때에는 전국에서 아름다운 학교로 선정되어 수상도 받은 열정적인 교육자이다.김 교장은 지난 2년간 학생들의 안전과 교직원, 학부모의 화합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개교 이래 20여 년간 끊이지 않던 크고 작은 각종 질병 및 안전사고를 없애기 위해 교내외를 살피며 각종 안전시설 보강 공사를 하였다. 학생의 건강 및 안전생활 지도에 힘을 기울인 결과 2004년을 무사고 원년의 해로 삼았다. 또한 3년 전 대중매체를 통하여 보도된 것처럼 학교장과 교직원, 학부모등의 갈등으로 인하여 분열된 학교를 신뢰받는 학교로 세우고자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 학부모님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였고 학교 내에서도 모든 일을 협의를 거쳐 민주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다 보니 교사들 간에도 서로 친목도모도 잘 되었다.그 결과 학부모님들의 신뢰를 받아 자녀를 맡기고 싶은 학교로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중증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끊임없이 전입하고 있다.학생들에게 꿈을 갖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며 늘 “당당하게 살아가자”라고 강조하셨다. 학생들이 비록 장애는 있지만 자신의 재능을 찾아 기를 수 있도록 지도하여 큰 실적을 남겼다. 그 결과 정신지체 1급 장애와 뇌성마비의 중복 장애를 갖고 있는 김근일 학생이 2003년도에 전국장애인 체육대회에서 육상 100m, 200m 2관왕, 2004년도에는 400m를 추가하여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하여 제2의 말아톤으로 각종 대중매체를 통하여 소개한바 있다. 또한 사철 꽃피는 학교를 가꾸어 가며 장애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설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후략)출처 :우리일보 2005년 5월16일자 11면1. 교훈도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