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현설아Ⅰ 서론Ⅱ 본론ⅰ 훈민정음 창제목적ⅱ 상형의 원리ⅲ 최만리의 반대상소ⅳ 훈민정음의 특징Ⅲ 결론 - 글자의 올바른 사용Ⅰ‘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1443년 12원에 창제된 우리나라 글이다. 그러나 최만리 등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노력으로 3년이라는 시간을 걸쳐 결국 1446년 9월 이라는 책과 함께 발표되었다.'훈민정음'이란 말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이다. '훈민정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글이 창제되었을 때 그 문자의 이름이며, 다른 하나는 창제된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의 이름을 이르는 것이다.훈민정음은 현재에도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그럼 이제 훈민정음의 창제목적과 어떠한 상형의 원리로 생성되었는지, 이렇게 생성된 우리나라의 글자를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Ⅱ-ⅰ세계인이 인정한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의 창제목적은 무엇일까?그 이유는 훈민정음의 어제서문에 잘 나타나있다.나랏 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로 ?맛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들 시러 펴디 몯?노미 하니라. 내 이? 爲?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물 여듧 字? ??노니 사?마다 ?? 수?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 ??미니라‘文字와로 서로 ?맛디 아니??’는 한자를 빌려서 국어를 표기하는 모순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자는 본래 중국어를 표기하기에 알맞게 만들어진 문자이다. 이 문자는 수가 많고 복잡하여 익히기에 힘들고, 문장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우리나라 말과 중국어가 달라 표기하는데 힘이 든다. 그리하여 한자가 들어오고 난 후 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서기체를 만들기도 하고, 이두를 고안하기도 하고, 나아가 향찰을 만들어보기도 했으나 우리나라말을 정확히 표기하가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말에 적합한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이 우리 문자의 올바른 길이라고 본 것이다.‘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들 시러 펴디 몯?노미 하니라’는 한자의 어려움에 대한 강조이다. 우리말을 쓰고 있는 우리백성이 말과 다른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생각하길 참된 문자는 이러한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여야 한다는 것이다.훈민정음이 모든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은 ‘내 이? 爲?야 어엿비 너겨’하는 구절에서 드러나 있다. 한자는 수가 많고 복잡하고 한 글자가 가진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을 배워 익숙해질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한자는 일부 특권층 즉, 양반계층만을 위한 폐쇄적인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은 양반들은 한자를 익히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겠지만 백성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훈민정음은 누구든지 쉽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다.‘날로 ?메 便安킈 홈’이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하고자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자는 소수 특권층의 점유물처럼 되어 왔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한자가 수입된 지 수 천 년이 되어도 무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문자의 의미는 누구든지 일상생활에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만 그 문자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ⅱ이렇게 백성들을 위했던 세종대왕은 어떠한 방식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자음은 입모양과 목구멍의 모양을 통해 만들어 졌다고 하고 모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떠 만들어 졌다.자음은 기본 5글자인 ㄱ, ㄴ, ㅁ, ㅅ, ㅇ 을 중심으로 생겨났다고 한다.‘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다. ㄱ의 가획자에는 ‘ㅋ’이 있고 이체자에는 ㅇ가 있다.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이다. 가획자는 ‘ㄷ’과 ‘ㅌ’이고 이체자는 ‘ㄹ’이다. ‘ㅁ’은 입술의 모양을 본떴다. 가획자는 ‘ㅂ’과 ‘ㅍ’이다. ‘ㅅ’은 이의 모양을 본떴다. 가획자는 ‘ㅈ’, ‘ㅊ’이고 이체자는 ‘ㅿ’이다.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떴다. 가획자는 ‘ㆆ’, ‘ㅎ’이 있다.이렇게 해서 ㄱ, ㅋ, ㅇ, ㄴ, ㄷ, ㅌ, ㄹ, ㅁ, ㅂ, ㅍ, ㅅ, ㅈ, ㅊ, ㅿ, ㅇ, ㆆ, ㅎ 17개의 자음이 생겨났다. 자음은 초성과 종성에서 쓰이는데 종성에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만 쓰인다. 이를 팔종성가족용법 이라한다.모음은 천(하늘) 지(땅) 인(사람)을 기본으로 하여 생겨났다. ? ㅡ ㅣ를 중심으로 초출자는 ‘ㅏ’ ‘ㅓ’ ‘ㅗ’ ‘ㅜ’이고 재출자는 ‘ㅑ’ ‘ㅕ’ ‘ㅛ’ ‘ㅠ’ 이다.ⅲ이렇게 백성들을 위한 창제 목적과 상형의 원리를 갖고 만들어진 우리의 훈민정음을 반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였을까?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의 주된 내용은 6가지로 축약 될 수 있다.첫 번째로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서를 본떴다고 하더라도 소리에 글을 결합하는 것은 옛것에 어긋나니, 이것이 만약 중국에 흘러 들어가 만약 이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중국을 섬기는 나라로서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중국을 섬기고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첫 번째 내용을 상소문에 올린 것이다.두 번째 내용은 오랑캐라 여기고 있던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만이 자신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풍습과 문물이 중국과 견줄 만 하다고 여겨왔는데 새로 문자를 만들어 오랑캐와 같아지려고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세 번째 내용은 훈민정음은 마치 신라 설총의 이두와 같이 소리에 문자를 맞추어 놓은 것이므로 이는 학문을 하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 언문만을 익히고 학문은 돌아보지 않아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스물일곱자만 익히면 되니 학문을 익혀야할 유생들이 나태해질 것이다 라는 것이다.네 번째 내용은 세종은 훈민정음으로 하여 예전에 문자를 몰라서 억울하게 죄를 받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상소하기를 중국의 경우에는 죄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나 소송하는 일 가운데 억울하게 잘 못되는 일이 많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글의 뜻을 몰라서 억울함을 당하는 일 보다 매를 이기지 못하여 자백하는 경우가 많아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하게 당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다섯 번째 내용은 나라의 글을 만드는 것은 이 나라의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과 논의하고 아래로 백관들과 논의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다시 세 번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고, 옛날의 제왕들에게 맞추어 보아도 틀리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의 성인을 기다려 의심이 없어진 연후에야 시행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문은 나라의 긴급하며 부득이하게 기한 내에 마쳐야 되는 것이 아닌데 이에 급급하여 서두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내용은 훈민정음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전혀 유익함을 주지 못하며 하나의 글재주에 불과하다고 하며 정신을 쏟고 생각을 허비하는 날에 시간을 보내어 학문을 닦는 데 손실이 있을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이러한 6가지 내용의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반응은 우선 이두를 만든 본뜻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고 그것이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이라면 훈민정음 또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만리는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을 달리하였다고 하나, 음에 의지하고 해석에 의지한 어조사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훈민정음은 여러 글자를 합하고 나란히 써서 그 음과 새김이 변하여 글자의 형상이라 할 수 없다고 하고 또한 이 일은 급하지 않은 일이기에 섣불리 결정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였다. 결국 세종은 이러한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이튿날 석방하게 하였고 정창손은 파직 당하였다.6가지 상소문의 내용에 대한 전체적으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사고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한 나라의 왕에게 이러한 글을 올린다는 것은 자신이 그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용기가 있었기에 이러한 글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일 세종의 자리에 있고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보았더라면 과연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만큼 세종과 최만리는 자신들의 주관을 내세웠고 거기에 합당한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하였다.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세종의 진보주의적 사고와, 이것에 대립하여 그 시대적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밝혀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보수주의적 사고와의 대립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