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Ⅰ. 서론Ⅱ. 본론1. 사회행동과 관련 개념의 이해1) 사회행동의 개념 이해2) 하위개념인 옹호2. 사회운동과 사회행동의 발달1) 사회운동 이론과 사회행동2) 사회행동의 발달3. 사회복지교육 과정에서의 소홀함4. 보수교육의 법제화 및 내용의 다양화Ⅲ. 결론Ⅳ. 참고문헌사회복지사의 사회행동 실천 과정에 관하여Ⅰ. 서론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사회복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실천 영역이 확대되고 실천방법도 다양해져 왔다. 사회복지실천을 위한 다양한 지식과 실천기술들 중에서도 최근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사회행동(social action)이다. 사회행동은 사회변화(social change)를 목적으로 사회복지사가 개입하는 실천방법으로서, 개인의 권리를 위한 옹호에서부터 서비스 프로그램 개선, 지역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연합, 사회복지예산 확보, 관련된 법의 제정 및 개정, 제도 개선 및 사회복지 정책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실천대상과 영역이 다양하다.사회복지실천의 모든 형태는 사회복지정책으로 구현되기에 사회복지정책은 사회복지실천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 있으며, 사회복지실천의 모든 노력은 궁극적으로 프로그램, 급여, 서비스 등 제도에 의존한다(Blau, 2004: 4). 그러므로 현장 문제들의 해결책이 정책으로 잘 연결되어야만 사회복지실천을 위한 올바른 사회복지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사회행동은 실천현장의 사회복지사가 대상자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여 제도변화를 이루려는 활동이다. 요컨대, 사회행동은 사회복지사가 현장에서 펼치는 다양한 방법 중 사회변화에 목적을 둔 개입방법으로서, 지금과 같은 사회복지 상황에서는 중요한 사회복지실천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사회행동은 정지된 현상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작동하는 조건과 기회구조에 응답하면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에서 사회행동은 사회변화를 추구해온 사회복지실천의 전통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작은 자선조직협회와 인조직가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주민들이 직접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조직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이러한 Rothman의 사회행동 모델을 Gamble과 Weil(1995)은 세분하여정치? 사회행동, 연대, 사회운동 모델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그들은 지역 사회복지실천모델에서 복지권, 장애인 복지,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과 관련하여 사회행동이 증가하고 있고 그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는데 기존의 단일한 사회행동 모델만으로는 이러한 추세를 반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존의 사회행동은 ‘정치?사회행동’으로 개념화하고, 효율적인 운동성과를 위해 조직 간의 연합전선이 활발해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연대’모델을 구분하고, 일반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거시적인 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차별화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운동 모델에서는 변화를 위한 표적체계가 일반대중과정치체계가 된다. 한편 Taylor와 Roberts(1985)는 후견인(sponsors)과 클라이언트(clients)가 가진 영향력에 초점을 두고 5가지 모델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정치적 행동 및 역량강화모델(political action and empowerment model)이 Rothman이 제시한 사회행동과 내용이 비슷하다. 이 모델은 배제된 집단의 의도적인 참여를 통해 권리를 찾고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둔다. 즉, 배제된 집단의역량강화를 통해 지역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모델로 실천방법, 대안적 전략고려, 의사결정등에 대한 영향력 측면에서 볼 때 클라이언트가 영향력을 완벽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강철희·정무성, 2006: 171). Fisher(1995: 327-331)는 사회행동은 정지된 현상이 아니며 넓게 확산되는 장기간의현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행동은 그것이 작용하는 조건과 기회구조에 응답하면서 변화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로 다원화된 사회를 반영하여 단순히 계급에 기반을 둔 투쟁이 아니라 문화조를 완전히 바꾸는변화) 또는 사회변형(social transformation: 존재하는 사회 구조들을 고치는 변화들)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개입방법이라고 하였다.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사회행동을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의 가치를실현하기 위해서 사회변화를 목적으로 개입하는 실천방법"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둘째, 한국의 현실에 맞는 사회행동 실천모델에 대한 논의와 개발이 필요하다. 실천모델은 다양한 시대적 상황 및 국가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기에 미국의 경험에 기초하여 분류하고 있는 기존의 모델은 조직화, 개발, 계획, 사회행동 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민간주도적인 지역사회복지실천을 중심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서 김종일(2006: 102-103)도 앞서 논의한 모델들은 미국이라는 특수한 현실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국처럼 이질적인 사회에 적용하는 데는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이상과 같이 모델은 사회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여 오는데, 문제는 사회행동 모델이 한국의 상황과 관련해서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에 맞는 사회행동 모델이 개발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행동이라는 개념이 정적이지 않고 특히 사회 환경의 변화와 그 요구에 응답해왔음을 볼 때, 그 필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복지주체와 욕구가 다양화되고 있는 시점에 사회행동을 소외계층에서부터 일반 시민들, 각 기관과 단체들, 그리고 정부(관)와의 협력이 중요한 실천 활동으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현실에 맞는 사회행동모델 개발이 더욱 요구된다. 한국 사회복지에 맞는 사회행동 모델을 개발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사회복지사의 사회행동 실천 과정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연구자는 앞서 살펴본 사회행동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 연구를 진행했으나, 현재 사회행동에 대한 개념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해서 사회복지사들의 생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캐나다 사회복지은 체계를 개인, 가족, 그리고 소집단에게 더욱 잘 응답하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두는 옹호와 더 넓은 구조적이고 사회적인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행동이 함께하는 연속체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즉, 사회행동을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사회문제를 해결하거나, 불평등을바로잡거나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제도적인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통합된 노력"으로 정의하고, 옹호는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고 방어하는 직접적인 활동, 즉 사회복지실천에서, 직접적인 개입이나 empowerment를 통해 개인 또는 지역사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사회행동은 사회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복지실천 개입방법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권익을 위한 활동인 옹호는 사회행동의 여러 가지 기술 중 하나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옹호는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사회행동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2. 사회운동과 사회행동의 발달사회복지 전문직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활동함으로써 공공 영역에 영향을 주고 그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믿는다. 이는 NASW의 윤리강령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윤리강령은 사회복지사들이 "특별히 취약하고 억압된 개인이나 집단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서 사회변화를 추구하도록" 강조하고, "빈곤, 실업, 차별, 그리고 그 밖의 사회부정의(social injustice)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이슈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두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은 개인, 가족, 지역사회의 복지에 대해서 정부의 책임을 요구하는 더 넓은 범위의 사회운동으로부터 사회복지 전문직이 유래되었음을 나타낸다(Abramovitz, 2004: 174-175).미국 사회복지사의 사회행동 역사를 통해서도 사회행동이 사회변화를 이끌었던 사회운동으로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듯이 사회운동과 사회행동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사회변화를 목적으로동이 없는 행위론자(actorswithout action)"에 대한 연구와 "행위자가 없는 행동(actions without actors)"의 연구에집중되어온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임희섭, 1999: 124). 그래서 사회운동 이론에서 미시적인 영역과 거시적 영역을 연계하는 연구의 중요성이 증가되고 있고(McAdam etal., 1988), 그러한 대안으로 구조와 과정 및 행위자와 행위가 모두 포함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성주의이론이 제안되었다. 구성주의이론에 따르면 거시적 관점에서 주장하는 사회체계 수준에서의 구조적 모순, 정치적 기회의 확대, 이용가능한 자원의 증가 등과 같은 구조적 조건들은 잠재적인 조건들일 뿐이며 이러한 조건들은 미시적 관점에서처럼 행위자들이 의미 있는 상황으로 해석하고 정의되는 주관적인 과정들을 거쳐야만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성주의 관점은 사회학에서의 상징적 상호작용이론(symbolicinteractionism)과 현상학적 사회학의 관점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임희섭, 1999: 174-175).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사회운동에서 만들어진 메시지들은 집합적 행동의 틀로 기능한다. 예컨대, Goffman은 집합적 행동 틀(frame)을 특정 운동이나 이슈화된 믿음과 의미들에 바탕을 둔 행동으로 정의했다. 존재하는 문화적인 이야기(해설) 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틀은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거나 윤색함으로써, 또는 원인을 강조함으로써 또는 교정적인 행동들을 제안함으로써 사건들에 의미를 준다. 틀은 "저편의 세계(world out there)"를 간단하게 하고 압축해주는 해석적 틀(schema)을 제공한다(Snowand Benford, 1992: 133-156; Ambramovitz, 2004: 214-215). 이것을 사회운동 조직들에 의한 설득적 의사소통을 강조한 틀 정렬분석이라고 한다. 즉, Snow와 Benford(1988)는 "현재 혹은 과거의 환경에서의 대상, 상황, 사건, 경험 및 일련
目 次Ⅰ. 갑오경장1. 개화파의 재등장2. 근대적 국가제도의 도입3. 광범한 사회· 경제개혁Ⅱ. 대한제국의 성립1. 3국간섭과 을미사변2. 아관파천과 개화파 정권의 붕괴3.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의 성립4.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Ⅲ. 참고문헌근대국가의 모색 (갑오경장과 대한제국의 성립)Ⅰ. 갑오경장1. 개화파의 재등장갑신정변 이후 개화파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들이 다시 집권한 것은 동학농민봉기로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의 지원에 의해서였다. 정권 탈취를 주도한 인물은 유길준, 조희연, 안경수 등의 소장 관료로서 대개 갑신정변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온건 개화파였다.일본군의 지원으로 집권했지만, 개화파 정부가 일본의 뜻대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 개혁을 주도한 군국기무처는 1894년 7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약 210건의 개혁안을 처리했는데, 이 기간에 일본의 개입은 소극적이었다. 일본의 개입은 1894년 10월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부임한 후 적극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노우에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개화파 정부의 개혁 활동에 깊이 간섭하였다. 개화파 정부는 40여 명의 일본인 고문관을 통해 일본의 개혁 경험을 참작하였다.2. 근대적 국가제도의 도입개화파 정부는 청으로부터 독립과 혁신 의지를 표현하고자 청의 연호 사용을 폐지하고 1894년을 ‘개국503년’으로 정했으며, 국호도 ‘대조선국’으로 칭하였다.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사용하기로 하고, 연호를 건양으로 제정하였다.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를 신설하여 불분명했던 왕실과 정부 간의 경계를 나누었다. 여기에는 왕실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개화파 정부의 의도도 있었다. 또한, 개화파 정부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쳐 권한을 강화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6조를 폐지하고 8개 아문을 설치하였다. 그 중 탁지아문은 정부의 모든 재정 수입과지출을 관장하고 매년 예산을 편성하여 재정을 운영하였다. 공무아문과 농상아문은 식산흥업정책을 담당하였다. 중앙재정과 별도로 운영되던 지방재정을 정부예산에 통합하였다. 지방 수령의 권한을 제한하여 수령으로부터 사법권을 분리했으며, 전임재판관을 임명하고 2심제를 도입하였다. 지방제도를 크게 고쳐 8도를 23부로 개편했으며, 향회를 설치하여 지방자치를 시도하였다.3. 광범한 사회· 경제개혁개화파 정부는 사농공상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인재의 등용에 문벌이나 지역에 따른 차별을 철례하는 한편,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하였다.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고,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였다.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과거제도를 폐지함과 더불어 근대적 학교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서울에 사범학교와 소학교가 개설되고 일어학교, 영어학교 등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도 설립되었다. 개화파 정부는 사범학교에서 교사를 급히 양성하여 지방에도 소학교를 개설하려고 계획하였다.1895년에는 약 200명의 관비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어 개화정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개화파 정부는 공문서와 관보에서 국한문을 혼용하거나 순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경제의 개혁은 시장경제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정책이 주조를 이루었다. 물가를 폭등시키고 혼란을 초래한 당오전을 폐지하고, 은본위제에 기초한 근대적 화폐제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모든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정부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권리를 독점한 공인 제도를 폐지했으며, 마찬가지로 시전상인이 보유했던 상업적 특권도 철폐하였다. 상회사에 부여되었던 각종 특권도 모두 환수되었다. 이렇게 개화파 정부는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 영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을 촉구했지만 외국 상인의 침투로부터 자국 상인을 보호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갑오경장을 통해 개화파는 광범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동학농민봉기와 청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의 지지도 사회 세력의 뒷받침도 없었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지방 수령과 향리 계층의 반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거나, 개화파 정부가 붕괴하자 곧바로 옛날로 돌아가는 사례가 드물지 않았다. 궁내부처럼 왕권이 강화되자 설립 취지가 변질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갑오경장은 근대국가의 수립을 위한 불가결한 제도개혁으로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국가체제에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왔다.Ⅱ. 대한제국의 성립1. 3국간섭과 을미사변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랴오둥반도를 차지하자 1895년 4월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유인하여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일본에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여 동아시아 진출을 꾀하고 있었기에 만주와 한국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 배후가 위협받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3국간섭에 굴복하여 최대의 전리품을 반환해야 했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 확장에 매진하였다. 러시아는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랴오둥반도를 조차하는 특권을 차지하였다.3국간섭은 한국의 정국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목격하자 민왕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은 3국간섭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던 책동이 좌절되고, 나아가 친러파가 정권을 잡는 사태가 벌어지자 1895년 10월 민왕후를 시해하였다. 이후 김홍집과 유길준 등의 내각이 조직되어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시행했는데, 특히 단발령은 극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위정척사파 계열의 농촌 양반을 중심으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개화파 정부에 반대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2. 아관파천과 개화파 정권의 붕괴3국간섭과 을미사변의 여파 속에서 1896년 2월에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친러파 인사들이 러시아 공사와 공모하여 고종과 세자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한 것이다. 을미사변으로 개화파 정부에 극도의 반감을 품게 된 고종은 아관파천 직후 개화파 정부의 인물들을 역적으로 단정하여 개화파 정권을 붕괴시켰다. 깅홍집, 어윤중, 정병하 등 개화파 정부의 주요 인사는 고종의 지시를 받은 경무청의 순검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이후 친러파 정권이 성립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은 급속히 강해졌다. 일본인 고문과 군사교관이 파면되면 러시아인이 초청되었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은 외국인의 이권 사냥터가 되었다.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등을 획득했으며, 러시아는 함경도의 경원·경성의 광산 채굴권, 두만강·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의 산림 채벌권 등을 얻었다. 고종은 여러 열강에 이권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열강의 불간섭 정책을 변화시킬 수 는 없었다.
目 次Ⅰ. 개화정책의 전개1. 개화파의 형성2. 개화정책의 전개Ⅱ. 갑신정변1. 급진 개화파의 등장2. 정변의 실패와 개혁정강Ⅲ. 동요하는 왕조체제1. 경제 위기와 재정악화2. 민란의 물결Ⅳ. 동학농민봉기1. 동학의 전파와 농민봉기2. 농민봉기의 성격Ⅴ. 청일전쟁과 국제질서의 변화1. 청일전쟁의 배경2. 청일전쟁의 진행Ⅵ. 참고문헌한국 사회의 대응과 동요Ⅰ. 개화정책의 전개1. 개화파의 형성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이하여 개항 이전부터 조선왕조의 지배층에는 두 갈래의 대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서양을 야만의 오랑캐로 간주하여 그 문명을 배척함으로써 성리학에 기초를 둔 전통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파이다. 위정척사파는 주로 농촌의 양반 계층에 뿌리를 내렸다. 다른 하나는 나라를 보존하려면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여 낡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개화파이다. 개화파는 국제정세에 밝은 서울의 집권세력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18세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1861년 청에 사신으로 가서 중국의 곤경을 목도한 후 자주적인 개항을 주장하였다. 오경석은 8대를 계속하여 역관을 지낸 중인출신으로 중국에 갈 때마다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는 서적과 가물을 국내에 반입하였다. 한의사 유흥기는 오경석이 반입한 서적과 기물을 공부하여 당대 누구보다도 서양 문명에 해박하였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는 서울 명문 양반가의 자제들에게 서양 문명을 가르쳤다. 1880년경에는 이들에게 교육을 받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서광법, 홍영식 등 개화당으로 불리는 혁신 세력이 형성되었다.2. 개화정책의 전개초기의 개화정책은 개화파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그해에 조선왕조는 일본에 김기수를 수신사로 파견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상을 직접 견문하게 하였다. 조선왕조는 청에서 진행되는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아 개화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1880년 김흥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중국 외교관 황쭌센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1880년에는 개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기존의 6조와는 별도로 청의 총리아문을 본받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그 아래 12사를 두어 부국강병을 위한 체제를 갖추었다. 군제를 5군영에서 2군영 체제로 개편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여 일본군 교관으로 하여금 교습하도록 하였다. 1881년에는 조준영,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의 조사시찰단을 일본으로 보내어 근대 문물을 견문하게 하였다. 이때 유길준, 윤치호 등이 일본에 남아 최초의 유학생이 되었다. 또한, 청의 권고를 받아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톈진의 기기국으로 유학생을 보내어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같은 서양 문물을 배워 오게 하였다.Ⅱ. 갑신정변1. 급진 개화파의 등장조선왕조의 개화정책에 대해 위정척사를 신봉하는 농촌의 양반 계층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특히 정부가 을 배포하자 오랑캐로 인식되던 서양과 외교 관계를 맺으라는 내용은 큰 반발을 야기하였다. 이와 함께 개화정책을 좌절시킨 것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었다. 청의 개입으로 청에 의지하여 집권하고 있던 민왕후 중심의 정치 세력과 청으로부터 독립을 지향하는 정파 간의 갈등이 불가피해졌다. 청의 개입을 계기로 개화파는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청의 힘을 이용하여 점진적인 개화정책을 시행하려고 하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의 온건 개화파와, 청과의 사대 관계를 완전히 폐지하려고 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로 분화하였다. 민왕후 중심의 집권세력은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온건 개화파를 지지하였다. 온건 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았다.급진 개화파에 속하는 박영효는 1883년에 한성판윤에 임명되자 치도국과 순경국을 설치하여 도시행정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또한, 1883년에는 박문국을 설치하여 를 발행하였다.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는 국제정세와 서양의 제도를 소개하는 논설을 게재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계몽하교통과 통신 시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2. 정변의 실패와 개혁정강급진 개화파는 민왕후 중심의 집권세력이 1883년 당오전을 발행할 때 그에 반대하였다. 집권세력은 김옥균이 개화정책을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하여 좌절시켰다. 두 세력은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개화정책이 좌절되고 한성판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당하자 급진 개화파는 정권에서 제거될 위기감을 느꼈다. 급진개화파는 청과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절반이 베트남으로 이동한 것을 정권 탈취의 호기로 판단하였다. 이들은 1884년 12월 우정국의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민영익을 비롯한 집권 세력의 중심인물들을 살해하고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에 대한 영향력의 상실을 우려한 청의 군사적 개입으로 개화파 정부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등 남은 인물들은 대거 처형되었다. 정변의 실패에는 공사관의 병력을 지원하여 궁궐을 호위하기로 했던 일본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호응할 사회 세력의 미성숙이 근본 원인이었다.개화파 정부는 3일간 수많은 개혁 정책을 발표했지만. 정변이 실패한 후 관련 자료들은 철저히 소각되었다. 김옥균이 망명 중에 집필한 에 14개 정책이 전해질 뿐이다. 그에 의하면 급진 개화파는 청에 끌려가 있던 대원군을 데려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하고자 하였다.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함으로써 신분제도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전국에 지조법을 실시한다고 한 것은 일본의 토지조사 사업인 지조개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 모든 국가재정을 호조로 집중하며, 그 밖의 재무관청은 폐지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대신들이 의정부에 모여서 정무를 의결하도록 하여 왕권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갑신정변은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같은 갑신정변의 지향을 이 감소하고 시장이 위축되었으며, 그에 따라 물가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중앙정부의 재정은 정부에 각종 재화를 조달한 상인들에게 제때에 대가를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더욱이 개항 이후는 해외사절단과 유학생의 파견, 개항장 설치, 무기 구입과 신식 군대 신설, 외국인 고용, 배상금 지불 등으로 지출이 늘어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재정을 확충하려면 세원을 철저히 파악하고 징세과정의 중간 수탈을 배제하고 정부와 왕실의 낭비적 지출을 줄이는 등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지만, 1880년대 민왕후 중심의 집권 세력은 어떠한 개혁도 시도하지 않았다. 김옥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권 세력은 재정고문 묄렌도르프의 건의에 따라 1883년부터 당오전을 발행하여 주조 이익으로 재정수입을 보충하였다. 주조 이익의 일부분은 민씨 집권 세력에 의해 착복되기도 하였다. 악화인당오전이 대량으로 발행되자 물가가 더욱 치솟아 식량과 생활재료의 대부분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하층민의 생활을 크게 압박하였다.2. 민란의 물결경제사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정부재정의 궁핍은 농민들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한 국가의 기강이 와해됨으로써 지방행정을 담당한 수령과 향리 계층의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1840년대부터 민란이 간헐적으로 발생하였는데, 1862년에는 삼남 지방의 70여 군현에서 동시 다발로 일어났다. 이에 대응하여 주앙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은 임시방편에 그쳤으며, 이후에도 민란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그중 1871년 경상도의 영해·문경에서 일어난 이필제의 난은 군사를 모아 중앙정부에 대항하려는 양상까지 보였다. 민란은 개항 무렵에 다소 진정되는 듯했으나, 1880년경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민란의 물결은 조선왕조의 지배 체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민란은 수령과 향리 계층의 부패와 수탈이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1840년대부터 진행된 경제의 전반적인 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생산의 부진으로 물가가 오르자 생계를요구하는 일이 횡행하였다. 세력이 커진 도적 떼는 관군도 제압하기 어려웠다. 도적의 횡행으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자 농촌경제는 더욱 궁핍해졌다.Ⅳ. 동학농민봉기1. 동학의 전파와 농민봉기1860년에 창시된 동학은 교주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사형당한 후 교세가 위축되었으나 1882년에 이르러 최시형이 을 지어 교리를 정리하고 포와 접으로 된 조직망을 갖추면서 교세가 크게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동학은 1892년의 삼례집회에서 정부에 교주의 명예회복을 요구할 정도록 하층 농민을 중심으로 광범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1894년 2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계기가 되어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로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가 일단 해산하였다. 마침내 4월 무장에서 보국아민의 가치를 내걸고 대규모로 봉기한 농민군은 고창, 영광, 함평, 나주, 장성, 정읍, 태인 등지를 함락하고, 5월31일에 전주성에 입성하여 정부군과 휴전하였다. 농민군의 세력은 한때 수령이 농민군의 협조 없이는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였다,농민군은 1894년 10월에 다시 봉기하였다. 농민군은 정부군과 휴전했으나 그해 6월 일본군이 한국에 상륙하여 7월23일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부적을 지니면 총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농민군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해 12월에 일본군 방어진지가 있는 공주를 점령하려고 벌인 우금치전투를 끝으로 동학농민봉기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2. 농민봉기의 성격종래 동학농민봉기는 급진적인 사회혁명으로 평가되어 왔다. 농민군이 요구했다는 이른바 에는 탐관오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처벌할 것, 횡포한 부호와 양반을 징벌할 것,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천인의 대우를 개선할 것, 관리의 등용에 가문이나 출신지역에 따른 차별을 철폐할 것, 과부의 재혼을 허용할 것, 법에 없는 잡세를 철폐하고 채무를 탕감할 것, 토지를 고.
目 次Ⅰ. 개항기의 국제정세1. 서양의 충격2. 조공체제의 동요Ⅱ. 쇄국에서 개항으로1. 대원군의 쇄국정책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3. 강화도조약의 체결Ⅲ.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1. 자주외교의 모색2. 임오군란과 청의 개입3. 불평등조약 체제의 확립Ⅳ. 참고문헌근대사회의 태동과 국권의 상실 (개항)Ⅰ. 개항기의 국제정세1. 서양의 충격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서유럽과 북미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동아시아에까지 충격이 미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전 서양과 동아시아의 경제적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서양은 경제, 정치, 군사의 모든 면에서 동아시아보다 강력해졌다. 서양이 동아시아에 준 서세동점의 충격은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해체와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과 결과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나라마다 크게 달랐다.동아시아와 서양이 최초로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1840년 영국과 청조의 중국 간에 벌어진 아편전쟁이었다. 영국은 청에 난징조약을 강요하여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방하게 하고 홍콩을 할양받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다시 청을 공격하여 텐진조약을 맺고 10개 항구와 양쯔강을 개방하게 하였다. 뒤이어 1860년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을 점령한 다음, 주요 항구를 모두 개방하고 내륙의 하천을 통행하는 권리를 허용하는 베이징 조약을 강요하였다.러시아는 이 조약의 체결을 주선한 대가로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으며 이로 인해 한국은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은 1853년에 페리 제독의 함대를 일본에 파견하여 1858년 통상조약을 강요함으로써 일본의 쇄국정책을 종식시켰다.2. 조공체제의 동요청과 일본이 서양의 열강과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선왕조가 곧바로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조약 체제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배하기까지 전통적인 조공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청은 조선왕조를 지배하기 위하여 기존의 의례적인 조공 관계를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대외적책에서 볼 수 있는 실질적인 지배 관계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청은 조선왕조의 외교와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와 대륙에 야심을 품고 있던 일본은 조선왕조를 청의 세력권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하였다. 청과 일본의 대립에 더하여 한반도에는 연해주로부터 남하해 오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의 대립이 중첩되었다.Ⅱ. 쇄국에서 개항으로1. 대원군의 쇄국정책1864년 12세의 고종이 즉위하였다. 이후 10년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장악하였다. 1830년대부터 한반도 연안에 이양선이 출몰하여 관민을 동요시켰다. 그러나 1860년대까지 한반도에 대한 서양의 직접적인 충격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열강은 차, 비단, 도자기 등이 많이 생산되지 않는 한국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청의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황제가 피신했다는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국제정세의 급변에 대응하여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 군제를 개편하는 한편,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도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그에 소요되는 군비를 마련하고자 포량미를 징수하였다.대원군은 농촌 사회를 지배한 양반세력의 근거지인 서원을 폐지하고 양반에게도 호포를 부과하여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에서 보듯이 집권적인 왕조체제를 복구하고자 하였을 뿐, 서세동점의 시대에 요구되는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질서에 저촉되는 다른 사상을 용인하지 않았다. 1864년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했으며, 1866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가 처형당한 것을 알게 된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보복하고자 하였다. 1866년 10월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였지만 정족산성전투에서 기습을 당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외규장각을 약탈한 후 함대를 철수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주민의 공격을 받아 불타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두 차례나 한국 원정 계획을 세웠던 미국은 1871년에 군함을 파견하여 통상조약을 강요하였다. 미국군은 강화 해협에 대한 측량 항해를 강행하다가 한국군의 공격을 받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왕조가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초지진을 함포사격으로 초토화하고 덕진진을 점령한 다음, 광성보에서 한국군과 격렬히 교전한 뒤 철수하였다.이처럼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왕조를 군사력으로 위협했지만 개항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주된 관심은 인도차이나 지배에 있었으며 미국도 남북전쟁 이후 산적한 국내 문제 때문에 한국의 개항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왕조의 의외로 강인한 저항에 부딪히자 더 이상의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이를 서양 열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여겨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3. 강화도조약의 체결한국을 개항시킨 것은 구미 열강이 아니라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이었다.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아 일본은 19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도쿠가와막부를 폐지하고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를 추구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일본은 1811년 이래 단절되었던 한국과 이교 관계를 재개하고자 하였으나 한국은 일본이 보낸 외교문서가 전통적인 교린외교의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에서는 한국을 침공하자는 정한론이 일어나 신정부 내에서 큰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마침내 1875일본은 부산과 강화도 연안에 군함을 보내어 무력시위를 하였으며,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의 영종진을 포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강화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수교를 요구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소 개방적인 자세로 전환되어 있던 조선왕조는 협상에 응하여 1876년 2월에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조약은 제1조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하였다. 일본은 이 조항을 통해 한국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한국은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대등한 교린 관계가 복구되는 정도로 생각하였다. 한국은 이 조약과 추가 협약을 통해 일본에 많은 권리를 양보하였다. 관세에 관한 아무런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산품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부산을 개항장으로 개방하고 사방 10리의 범위에서 차외법권을 인정하였다.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은 토지와 가옥을 임차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강화도조약은 서양 열강이 일본에 강요했던 불평등조약의 재판이었다.Ⅲ.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1. 자주외교의 모색조선왕조가 일본과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근대적 국제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전통적인 교린 관계의 회복 정도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곧바로 강화도조약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1880년 제2차 수신사가 일본에서 귀국한 뒤 일본에 조약 개정을 요구하였다. 가와도조약에서 누락된 관세주권의 확보가 협상의 주된 내용이었다. 청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사대 관계의 폐지를 시도하였다. 이에 1881년 이후 조선왕조는 청에 조공의 폐지, 통상조약의 체결, 외교관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였다.조선왕조의 자주외교를 위한 노력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다소의 결실을 거두었다. 조약 체결을 주선했던 청이 한국은 자국의 속방이라는 규정을 조약에 삽입하려고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조약에서 조선왕조의 관세주권이 인정되어 수입품에 대해 10~30%, 수출품에 대해 5% 상한의 관세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조선왕조와 미국 간의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그때까지 조선왕조와 조약 개정에 냉담했던 일본도 자세를 달리하여 조약 개정의 교섭에 임하였다.
目 次Ⅰ. 17~19세기의 경제와 사회Ⅱ. 소농사회의 정치와 국가Ⅲ. 조선왕조를 둘러싼 국제질서근·현대사를 보는 시각 (전통 사회의 구조와 유산)Ⅰ. 17~19세기의 경제와 사회한국 근·현대사는 오랫동안 닫혀 있던 전통 사회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의 개항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후 1945년까지 제국주의가 한국을 지배하고 한민족이 그에 저항한 역사를 ‘근대사’라고 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 체제도 해체되었으며 1948년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현대사’라고 부른다.한국 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개항 이후 한국에 들어온 외래문명과 원래부터 존재한 전통 문명이 충돌하고 갈등하면서도 상호 융합하여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 이른바 문명과 문명 간의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었다. 도전에 대한 응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한국의 전통 문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에 근·현대사 서술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의 전통 문명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17~19세기 조선왕조 시대는 농업이 산업의 중심을 이룬 농업사회였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직업 조사는 1909년에 이루어졌다. 직업 조사 결과 전국적으로 174만여 호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압도적 다수인 236만여 호가 농민이었다. 그 농업사회는 오늘날 발달한 공업사회와 별로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역사에서 단절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깊은 단절이 있는 것 같아도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문화의 수준까지 깊숙이 내려가면, 두 시대를 잇는 의외로 강한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17~19세기 전통 사회는 그 시대를 빼놓고는 오늘날 한국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대다수 농민은 소가족으로서 1정보미만의 소규모 경지를 경작하는 소농이었다. 그런 점에서 소농은 농업생산과 사회생활의 기초 단위를 이루었다. 따라서 17~19세기는 소농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논과 밭의 경지도 소농이 개별적으로 소유하였다. 친족과 촌락이 공동으로 소유한 농지는 아주 작은 양에 불과하였다. 친족공동체나 촌락공동체의 경제적 역할을 그리 크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개별 소농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 점에서 17~19세기 한국의 소농사회는 공동체가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수행한 여타 후진사회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에 속하였다. 실제로 17~19세기 세계사에서 소농사회ㅏ 제대로 성립한 지역은 서유럽의 여러 나라와 동아시아의 한국·일본·중국 남부에 국한되었다.소농사회의 구성원은 양만과 상민으로 신분이 나뉘었다. 상민 가운데는 양반인 주이에게 인격이 예속된 노비가 있었다. 17세기만 하더라도 노비는 전체 인구의 4할이라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노비 인구는 18세기 이후 급속히 감소하였다. 19세기가 되자 노비는, 지방별로 차이가 있지만 전체 인구의 1할 미만에 불과하였다. 노비가 사라지면서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도 점차 약화되었다. 이처럼 17~19세기 한국의 소농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전근대적인 신분제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 있었다.양반과 상민의 신분에 따라서, 그리고 상민 사이에서도 보유한 토지의 규모는 고르지 못하였다. 토지가 적거나 없는 하층 상민은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과 상층 상민으로부터 토지가 적거나 없는 하층 상민은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과 상층 상민으로부터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였다. 이를 병작이라 하였다. 병작을 하는 농민은 토지소유자에게 수확의 절반을 지대로 냈다. 그렇다고 병작농민이 토지소유자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된 것은 아니었다. 병작은 토지의 임대차를 둘러싼 경제적인 계약관계였다. 토지는 사실상 개인의 사유재산과 같았다.그러나 17~19세기 전통 사회에서 사유재산권의 성립 정도는 제한적이었다. 토지가 사유재산이긴 했지만 그것의 법적, 제도적 보장은 불충분하였다. 그 밖에 산림, 공업시설, 지하자원, 상표, 기술 등의 경제적 자원에서는 사유재산권의 발전이 미숙하였다.17세기부터 초보적이나마 시장경제가 전체 경제체제의 일부로 등장하였다. 상평통보라는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농촌 사회의 말단에까지 5일마다 열리는 장시가 촘촘하게 들어섰다. 농민들은 대개 한 달에 1~2회 장시에 나가 가정의 잉여물자를 팔고 필요한 생활품을 구입하였다. 전체 경제에서 시장은 부차적인 범부였지만, 시장에 잘 대응하는 것은 가정경제의 안정에 매우 중요하였다. 변화무쌍한 시장과의 접촉을 통해 소농은 초보적이긴 하나 합리적 선택의 능력을 키웠다. 요컨대 17~19세기의 경제와 사회는 예속 신분의 해체, 토지에서 사유재산의 성립, 시장경제의 초보적 성립이라는 토대위에서 소농이 경제주체로 자리 잡은 소농사회였다. 이러한 문명 요소는 이후 한반도에 서양의 근대 문명이 들어올 때 그것의 순조로운 이식을 가능하게 한 내재적 토양을 제공하였다.Ⅱ. 소농사회의 정치와 국가소농사회를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은 조선왕조의 관료제적 행정체제였다. 전국은 8도와 332군현으로 행정구혁이 나뉘었다. 군현 아래에는 면과 리가 있었으며, 리 아래에는 5가를 1통으로 묶은 말단 행정 단위가 있었다. 조선왕조가 이러한 관료제적 행정체제를 정비한 시기는 17세기 후반이다. 그 이전에는 군현 아래에 관료제적 행정체제가 미숙했으며 양반과 상민의 신분질서가 관료제를 대신하였다. 일반적으로 근대의 관료제는 행정의 주체와 신분질서가 관료제를 대신하였다. 일반적으로 근대의 관료제는 행정의 주체와 대상에 따라 행정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고, 관료의 업무를 전문화하고, 관료의 권한을 법률로 보호하고, 모든 행정이 문서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게 하는 통치형태를 말한다.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그에 준할 만한 관료제적 질서가 18세기 조선왕조에서 성숙하였다.조선왕조는 이 관료제를 지배기구로 하여 농민들로부터 토지생산물의 1할정도를 결세로 수취하였다. 또한 만15세 이상 상민 신분의 남정은 군인으로 지정되어 연간 면포 1필의 군포를 내었다. 양반 신분에게는 군포가 면제되었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향교에 나가 학문을 닦아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 복무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되었는데, 실은 의무라기보다 특권이었다. 그렇게 조선왕조는 양반과 상민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리를 차별하였다. 그 점에서 조선왕조는 차별적인 신분에 기초한 전근대적 국가였다.조선왕조가 백성을 수탈한 것은 아니다. 18세기의 조선왕조는 전국의 군현에 약1,000만 석의 곡물을 저장하였다. 이 곡물로 조선왕조는 기근이 발생했을 때 백성을 구제하였다. 평년에는 봄에 농가의 양식과 종자를 위해 이 곡물의 6할가량을 전체 농가에 대부했다가 가을 수확 후에 1할의 이자를 붙여 거두어들였다. 이를 환곡이라 하였다. 환곡은 소농의 살림살이를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조선왕조의 경제정책은 백성의 살림살이를 고르고 평안하게 함을 기본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기초하여 백성을 통치하였다.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따라 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누렸다. 하늘이 내린 인간사회의 기본질서는 삼강오륜의 도덕이었다. 왕은 이 도덕 질서를 대변하고 수호하는 자였다. 백성이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내가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면, 하늘도 부응하여 세상만사가 평화롭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 성리학이 가르친 정치의 기본 원리였다. 이 성리학의 정치이념에서 백성은 왕의 발가벗은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였다. 왕은 백성의 부모로서 백성을 자애롭게 보살펴야 했고, 백성은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