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껏 받아온 국어교육은 주로 형식적이고 틀이 정해진 수업이 많았다. 물론 그 중에는 많진 않았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은 아주 멋진 수업들도 많이 있었지만, 대다수가 형식화된 틀 안에서 수업이 이루어졌고,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암기했던 수업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언제나 국어 수업은 예상된 범위 내에서 진행이 되었고, 지루하고 따분한 수업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그래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되는 인상 깊었던 국어 수업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 국어 수업은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형식화된 수업에서 벗어난 참신한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국어교과서’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응용하여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자주 보고 또 즐길 수 있는 ‘개그콘서트’나 ‘뉴스’ 혹은 ‘광고’ 등으로 변환하여 모둠별로 그것을 표현해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개그콘서트’에서 나오는 ‘대화가 필요해’라는 소재를 가지고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주제를 표현해보았는데, 그 때 조원들끼리 서로 웃겨서 수업을 하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또 다른 모둠은 ‘뉴스’를 통해 그 교과서에 있는 내용들을 표현하였는데, 우리보단 못하긴 했지만 소재나 적용 면에서 참신한 발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교과서 내용을 맛깔나게 표현하여 교과서 내용 자체는 딱딱하고 어려웠지만 그것을 보면서 한층 편하고 정감 있게 교과서 텍스트를 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얼마 되진 않지만 몇 몇 좋은 국어수업이 있어서 그래도 수업자체가 부담되거나 싫진 않았다.하지만 또 이와는 다르게 어떨 때는 국어수업 자체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훈민정음에 대한 부분이나 옛 시조 같은 국어 텍스트를 접할 때 다소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일단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부분을 수업을 통해 이해해야 하니 부담이 많았고, 또 그 당시 국어수업 자체도 형식과 틀에 맞춰 딱딱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부분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옛 시조나 고려가요 등을 교과서를 통해 다룰 때 교과서만 가지고 그것을 다루기보다 그와 관련된 일화라던지,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함께 다루었으면 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이렇게 그동안 내가 받아왔던 국어교육들은 한편으로는 틀에 맞춰진 수업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소재와 결합하여 참신하게 구성된 수업이 있었다. 물론 교사의 입장에서 항상 모든 수업을 참신하게 그리고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학생들의 기억 속에 기억되고, 좋은 혹은 안좋은 추억으로 남느냐는 교사의 판단과 행동 그리고 교사의 준비성에 달려있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예비교사로서 나는 국어교과만큼은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혹은 인상깊은 추억으로 남게 만들고 싶다. 또한 아이들이 국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좋은 국어수업을 실현하여 아이들이 스스로 국어수업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국어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국어에 관심을 갖게 하고, 아이들 스스로 국어수업에 있어 능동적인 참여자이자, 좋은 학습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국어 수업이다.내가 원하는 국어수업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먼저 교사와 학생 간 딱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그 안에서 배움이 이루어지는, 다시 말해 자연스럽고 부담 없는 분위기 속에서의 상호 간의 소통이 있는 수업이다. 예를 들어 김치에 대한 국어수업을 할 때에 있어서도, 단순히 김치의 특징 등을 단순하게 설명식으로 하는 수업이 아니라 김치에 대한 교사와 학생들의 각각의 에피소드를 서로 이야기해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또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김치에 대한 내용을 학생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 위주의 수업, 혹은 대화만 가지고 수업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고, 결국 궁극적으로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또 내가 원하는 국어수업은 학생들이 부담 없이 교사에게 수업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교사가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답변을 해주며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오가는 가운데 수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이루어지는 그러한 수업이다. 물론 이것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학생입장에서도, 아무 소재거리나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 생각을 다시 해보고, 교과서와 관련된 범위 내에서 의미 있는 질문을 해야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교과서에 대해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제대로 보지 않은 학생은 질문을 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힘든 부분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이 교사가 학생들의 발문을 적절하게 이끌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국어수업을 할 경우, 학생들 입장에서도 질문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사 자신도 깊이 있는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그러한 발문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국어수업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닌, 깊이 있는 이해를 유도할 수 있는 발문을 이끌어내는 수업이다.
제 1차 국공합작과 제 2차 국공합작을 비교설명제 1차 국공합작과 제 2차 국공합작은 서로 다른 시대적 상황과 목적 하에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통일전선을 결성한 사건이다. 총 2회에 걸쳐 일어난 이 두 번의 국공합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는데, 시대적 배경, 전개과정 및 성립과정, 의의로 나누어 살펴보자.먼저 시대적 배경에 있어서, 제 1차 국공합작의 시대적 상황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의 국내적 상황은 신해혁명, 신문화운동, 5.4운동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국민혁명의 과제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신해혁명과 신문화운동, 5.4운동과 같은 국민혁명을 세 차례나 경험했지만 봉건적 군벌통치의 암흑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오히려 1916년 위안스카이의 사망과 더불어 군벌정치의 병폐는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다음으로 국외적 상황을 살펴보면 1차 대전으로 잠시 이완되었던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침략이 제기되면서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는 더욱 악화된 상황이었다. 1921년 11월에 개최된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중국에서 영국이나 일본의 독점적 지배가 견제를 받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서구열강의 공동 관리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관세자 주권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았고, 만주와 몽고에서 일본의 특수권익을 비롯하여 서구열강이 향유하고 있던 각종 특권은 계속되었다. 즉, 중국은 서구열강에 대하여 여전히 반식민지 예속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와 같이 1920년대의 중국은 봉건적 군벌정치와 제국주의적 지배가 더욱 심화되는 경향도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같은 혼돈과 암흑을 극복하고 신중국을 건설하려는 국민적 자각과 열망도 그만큼 더욱 확산됨으로써, 국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1차대전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민족산업을 바탕으로 성장한 대도시지역 상인과 부르주아계급 그리고 노동자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들 사이에 반군벌 반제운동이 확산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당이나 신생공산당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국민혁명을 실천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역사적인 계급연합을 모색함으로써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생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이 같은 계급연합의 원칙을 수용하고, 마침내 국공합작에 합의하기까지 소련과 코민테른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국공합작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정치공작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당시 소련과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오가며 계급연합과 국공합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구체적인 합작의 형식에 대해서도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종의 흡수통합형식의 굴욕적인 합작에 대한 중국공산당 내부의 격렬한 반대를 억제하고 국공합작을 수용하도록 한 데에는 코민테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당이나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계급연합원칙과 국공합작에 대한 정책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민당 내부에서도 국공합작의 원칙과 형식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국내·외적 상황으로 인해 제 1차 국공합작은 이루어졌다. 이처럼 제 1차 국공합작은 결국 군벌세력과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국민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 노선을 결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이와는 달리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중국침략 과정 속에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중국의 1930년대 상황을 보면 그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일찍이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여 조선인 독립운동의 배후지이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막대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할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 또는 ‘특수이익’으로 중시하였다. 그래서 만주사변을 계기로 청조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친일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하여 중국의 남경국민정부로부터 만1934년 10월 장정(장정)에 나서게 된다. 북으로 도망가는 중공으로 인해 남경정부는 위협요소를 제거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고, 북상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오지의 잔여군벌을 거세시켜 중앙집권화를 실현시킬 호기를 제공받았다. 그래서 남경정부는 일본과의 친선정책을 가속화 시켰다. 이것이 바로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적을 몰아낸다는 ‘선안내후양외’정책이다. 일본 또한 국제연맹 탈퇴이후 국제적 고립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인해 남경정부와의 ‘화협외교’를 맺는 친선모드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군의 중국진출을 움츠러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북부중국 분리공작을 펴서 ’일만화 블록‘을 만들려는 새로운 침략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일본군의 만주점령 즉 만주사변에 대한 국민정부의 ‘부저항’정책은 중국인에게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상해 등 도시를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나, 항일시위와 일본상품배척운동이 전개되었고, 곧이어 대일경제절교운동으로 발생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인 항일운동의 고양은 대일선전의 실행을 요구하며 남경정부에 대한 청원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학생운동단속령’을 내세워 학생의 시위를 금지시켰으나. 1933년에는 국민어모자구회가 발기되어 무장자위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중국 전역이 식민지화될지 모른다는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확산되자, 1935년 12월 9일 북경대학생을 비롯한 북평의 학생 수천 명이 “일본제국주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여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12?9운동’이다.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에서는 12?9학생운동에 호응하여 구국회운동이 전개되었고, 1936년에는 전국학생구국연합회(전국학생구국연합회: 전구련)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 국민당 내의 여론은 이미 항일구국투쟁 쪽으로 이미 굳혀진 상황이었다.중국 공산당 또한 1935년 8.1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통하여 만주사변 후 극심해진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항일전선을 제창하였다. 또 중국공산당은 하기 위해서 사회혁명을 추진하는 것이므로 국민당을 포함한 기존의 모든 정치세력과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코민테른의 계급연합과 국공합작방침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코민테른의 설득으로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 민주혁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당을 포함한 모든 진보적인 정당 및 사회단체와 ‘민주주의적 연합전선’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은 현 단계의 중국혁명을 반제·반봉건 민주혁명이라고 규정하였고, 국민당을 포함한 모든 민주세력들과 연합전선을 결성하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의 종속물이 되어선 안되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양보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1922년 8월의 시후호 특별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을 거쳐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제안을 마지못해 수락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국공합작의 방식에는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이미 그 대중성과 혁명성을 상실한 명망가의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군벌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정당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들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한 기대가 컸으므로, 흡수통합방식의 국공합작에는 소극적인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은 5.4 운동이후 어느 정도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고 ‘상하이, 광저우’ 등 대도시에서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22년 1월부터 1923년 3월 사이에 중국의 노동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조직적인 개입에 힘입어 이른바 노동운동의 제 2차 고양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동운동도 1923년 2월 7일에 발생한 2.7대참사를 계기로 급격히 냉각되고 있었다. 2.7대참사란, 1923년 2월에 징한철도 노동자들이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하여 정주에 집결, 군벌정권에 대하여 노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차 국공합작은 중국 국민당 세력과 공산당 세력이 군벌을 타도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부족하다는 인식 하에 결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이와는 달리, 제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임시적인 대응책으로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대중들의 항일여론의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만주사변 이후, 본격적인 항일체제로 전환하려면 구체적으로 경제건설, 권력구축, 정치운동과 교육문화의 조직화 등을 추진해야 했다. 따라서 남경정부는 서구열강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공채를 발행하였다. 또한 기간산업과 농촌에서의 경제 건설에 힘을 쏟고, 교육문화운동에도 조직하였다.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대일항전을 소련과의 협력 속에서 치르기를 기대했고, 소련이 국?공간의 갈등 해소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소련과의 협상과정을 통해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가 성숙되는 가운데 중공과의 비밀 접촉도 진행하였다. 만주라는 근거지를 잃은 동북군의 실력자 장학량은 12?9운동 직후인 1936년 1월말 자신이 경영하는 동북대 학생들이 서안에 찾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은 이후, 항일여론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북안에서는 여전히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강해져가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관계도 긴밀해져 항일에의 의지를 굳히고 있던 차에, 마침 내몽고 독립공작의 일환으로 관동군이 일으킨 수원사건이 터졌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가 수원성을 지키던 중국군을 돕게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개석이 이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공산당토벌을 요구했다. 중공과 협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소탕의 기회를 노린 장개석은 총공격준비를 갖추고 12월 4일 서안에 도착해, 공산군토벌 명령을 따르든가 아니면 동북군?서북군을 각각 복건성?안휘성으로 이동시키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일치항일여론이 동북군?서북군 전체에 스며든 상황에서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결국 장학량은 장개석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