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를 보고1. 서론2. 시대적 배경3.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4. 아르테미시아와 5. 영화 를 통해 보는 팩션1. 서론영화 를 보고 난 뒤의 감상이 아직도 선명하다. 영화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 활동기 중에서도 초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아르테미시아와 타시의 관계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한편으로 아르테미시아가 완성하는 어딘지 영화 전반과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를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면 혐오했던 것일까. 사랑했다고 보기엔 타시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홀로페르네스와, 그녀의 아르테미시아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유디트의 그림이 너무나도 자극적이다. 자극적이다 못해 모순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감상평을 작성하기로 했다.첫 번째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시대적 배경이다. 한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거나 저항한다. 아르테미시아는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그는 그 요구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알고 싶었다.두 번째는 아르테미시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를 통해 그녀가 가진 생각을 알아보고 싶었다.마지막으로 영화 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픽션의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다. 우리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팩션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했다.2. 시대적 배경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활동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절대군주시대, 문화적으로는 바로크라고 불렸던 17세기였다. 이 시기의 종교와 예술은 절대군주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는데, 그 때문에 남성 중심의 예술 활동이 더욱 견고하게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특히 예술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정하여 아카데미가 등장하게 되었다. 예술적 이론과 실기를 지도하는 아카데미는 중세의 길드와 비견되는 것으로, 절대군주의 지원으로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되며 그 위상을 예술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 측면까지 넓혀나갔다.아카데미의 남성 중심주의는 절대왕권의 정치적 요청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아카데미는 당초 기술연마에만 목적이 있었던 중세 길드를 지양하고, 예술을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하고 실습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아카데미에서의 성차별은 여성의 예술계 진출에 절대적인 진입 장벽이 되었다. 아카데미 과정을 거친 남성 화가와 그렇지 못한 여성 화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가정교육에 의존했던 여성들은 특정 양식을 답습하는 기술적 훈련에 그쳤고,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고 주도할 수 있는 기회는 남성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일부의 예외적 조건으로 여성의 입회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는 남성 선생과의 사랑이나 성적 유린이 그들의 여성 예술가로서의 경력에서 커다란 오점으로 남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금 다루려고 하는 영화 의 주인공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이다.3.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rmisia Gentileschi, 1593~1652?]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이다. 그녀는 카라바조(Caravaggio)의 제자였던 아버지, 오라치오(Orazio Gentileschi)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전문적인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카라바조적 리얼리즘과 극적인 주제를 따랐으며, 이는 인물화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아르테미시아가 육체의 선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그녀가 자신의 벗은 몸의 굴곡을 표현하고, 바닷가에서 남녀의 정사 장면을 직접 재현해보려고 하는 움직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사실적이고 극적인 장면을 주로 묘사했다. 그녀의 그림에 묘사된 여성들은 대개 잔인하고, 동물적인데 그것은 일반적인 여성이 표현하는 우아하고, 연약한 이미지와 완전히 대비되는 것들이었다. 일부는 이 원인을 아르테미시아의 삶에 있었던 극적인 사건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기도 했는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가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한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르테미시아의 예술은 그녀만의 분명한 주관에 입각해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예술을 한 남성에게 강간당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리는 남성혐오증으로 읽기도 했다. 한편 영화에서는 아르테미시아와 타시가 진정 사랑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말미에서 그녀가 완성시키는 의 장면에서 타시와 아르테미시아가 번갈아 연상된다는 점이 굉장히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가 경력에서 타시와의 사건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애당초 그녀는 남성혐오증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유디트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드는 의문을 에서 찾아보기로 했다.4. 아르테미시아와 영화 말미에서 아르테미시아가 완성하는 는 카라바조와 그의 화풍을 따르던 사람들이 자주 그렸던 주제였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외전 「유디트서」에 등장하는 베투리아 마을의 과부이다. 그녀는 아시리아 군 공격 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인하여 그 목을 잘라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 이전의 유디트를 표현한 그림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민 영웅이 아닌, 남성을 유혹하여 살해한 팜므파탈의 전형으로 그녀를 표현했다. 마치 이스라엘의 삼손을 파멸로 몰고 간 델릴라나 헤롯왕을 유혹해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살로메와 같은 요부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의 는 기존의 다른 와 전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단순한 비교를 위해 그녀의 스승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바조의 와 아르테미시아의 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고 싶다.1) 유디트카라바조의 유디트는 아름답고 여성스럽다. 그녀의 눈썹은 겁을 먹은 듯 아래로 쳐져 있고, 눈가가 어둡게 처리되어 두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듯한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한 채 칼을 쥐고 있다. 카라바조는 유디트가 굳은 의지로 적장의 목을 베는데 초점이 있지 않아 보인다. 그의 관점에서 유디트는 적장을 홀려 유인했을 뿐, 실제로는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한편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강인하다. 카라바조의 유디트와 달리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고, 홀로페르네스를 뚜렷이 바라보고 있는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의 의지를 상징한다.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를 강인하고 행동력 있는 여장부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카라바조의 아름답지만 나약하고 무능한 여성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2) 하녀카라바조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녀는 노파이다. 그는 아름다운 유디트와 대조적이며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는 유디트가 거사를 감행하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한편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녀는 젊으며 능동적이다. 그녀는 유디트가 적장의 목에 칼을 집어넣을 때, 적장이 움직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제압하고 있다. 반면 홀로페르네스는 하녀의 제지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다. 이 역시 수동적인 여성상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이 배치되고 있다.에서 나타나는 아르테미시아의 화풍은 확고하다. 수동적이고 연약한 여성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고 보다 능동적인 모습을 강조했다. 이것은 17세기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과 정치, 사회,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예술을 남성혐오증으로 쉽게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아르테미시아의 가 다른 들과 차이를 두는 지점은 여기서 나타난다. 그녀는 기존의 를 역전시켜 바로크 시대의 남성지배적인 풍토를 비판하고 저항했다.5. 영화 를 통해 보는 팩션
보고서플라톤의 철인통치론과 이데아론1. 철인통치론의 배경플라톤이 철인통치론을 주장하게 된 계기에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이전에도 플라톤의 초기 철학은 스승의 과업을 계승하며 독립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단위로서의 도시국가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의 국가 개념은 루소를 포함한 근대 자연법론자의 사회계약설과 배치되는 하나의 유기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이름이 ‘전쟁과 지혜의 여신’을 뜻하듯, 국가는 개인의 사적 이익추구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닌 개인을 품고 유기적 관계를 맺는 하나의 인격체로 볼 수 있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로는 이미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판결에 승복하며 그 논증(파괴설, 위약설, 불경설)을 폈던 바 있다. 제자 플라톤 역시 스승의 정의관이나 준법정신에 대해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자를 죽이도록 만든 우매한 민중에 의한 정치에는 극도의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써의 정치 개념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플라톤 철학의 목적은 우매한 민중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이의 대안으로써 철인통치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치철학적 문제로 귀결되는데,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정치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철인통치론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는 소피스테스들의 현실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절대적 선과 정의가 존재함을 증명하고 이데아로 비롯한 철인의 통치로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2. 철인통치론(1) 인식과 의견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철인왕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이다. 철인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서 진리(al?theia)를 추구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적 욕망 없이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동일시 여겨 추구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철인이 사랑하는 지혜란 과연 무엇인가. 참된 지혜, 참된 선을 사랑하는 철인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요컨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소피스테스들은 꽃이나 저녁노을과 같은, ‘아름다움’의 본질이 아닌 그 표상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온갖 걸 반길 뿐, 이들의 사고는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볼 수도 반길 수도 없다.”(476b) 플라톤은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 즉 본질에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그들(소피스테스)에게 있어서 존재에 대한 고찰이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소피스테스들의 언변이나 정치술은 단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논의가 아닌 의견(doxa)에 불과한 것이다. 의견은 인식(앎)과 무지 사이의 어떤 것으로 항상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 존재 자체로서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의 표상으로서의 사물은 추한 반대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의견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소피스테스와 정반대로 올바름(dikaiosyn?)이 무엇인지, 그 존재 자체에 다가선 사람은 그 스스로가 올바름의 표상과 같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의견처럼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 알고 있는 상태, 곧 만족할 수 있는 상태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화가의 예를 든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본을 떠올린 화가가 실제로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그 본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472d-e) 마찬가지로 올바름에 있어서의 표상으로서 사람이 올바름과 같다면, ‘훌륭한 나라’로서의 표상으로서 나라 역시 훌륭함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와 같은 시도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과 정치권력이 이상적으로 합일되는 한에서의 철인통치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철학자가 왕이 되어 통치를 하거나, 왕이 철학을 배워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2) 배와 조타수의 비유철인은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면, 그 철학자에 대한 정의(定義)가 필요함을 인정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일부만이 아닌 전부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74d) 또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욕구한다는 것은 그 전부를 욕구하는 것이다.(475a) 따라서 철학자도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지혜는 욕구하되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475b) 이 철학자(참된 철학자)는 진리(al?theia)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분명히 진리의 표면에도 다가가지 못한 채 맴돌며 좋아할 뿐에 그치는 다른 사람들과 엄연히 다르다. 그들이 진리에 대한 의견으로써 단지 꿈을 꾸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면, 철인은 진리에 대한 앎으로써 꿈에서 깨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인식(epist?m?)은 존재의 앎에 의함이라면, 의견은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중간에 위치한 판단임을 알 수 있다.아테네에서 철학은 유용한 능력을 무능하게 만들거나 그 자체로는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풍조가 만연해지기 이르렀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배와 조타수의 비유를 든다. 선주는 배를 소유하는데, 항해지식이 없다. 반면 조타수는 항해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선원은 조종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서도 선주를 졸라 키를 잡으려고 한다. 이는 국가의 전망이 어두운 국민들이 현실정치가들의 화술에 넘어가 철학자들을 내팽개치는 현실을 비유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두고 대중이 철학자를 쓸모없게 여긴다면, 그것은 철학자의 훌륭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대중이 그를 두어 쓰지 않음에 있다고 말한다.(489b) 그러한 원인에는 훌륭한 철학자가 애당초 등장할 수 없게 만드는 양성 교육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훌륭한 자질을 타고 난 사람도 부적절한 양육 상태에서 길러지기 때문에 곧잘 타락한 형태로 변질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질을 그나마 유지하는 부류는 망명자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국사를 깔보는 자, 몸이 허약한 자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3) 양성 교육의 필요성선원에 의해 아무렇게나 이동하고 있는 배를 돌려 세우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양성 과정을 도입해야만 한다. 『국가』 6권의 후반부에서는 철학을 경시하는 풍조의 바탕에 깔린 교육의 부재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명시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양성 교육의 필요성 주장은 모든 국민이 조타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플라톤에게 있어 교육의 중요성은 국가가 기강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구두를 만들 때 각 부위의 재료의 질이 좋아야 하고, 장인의 배열과 그 마무리가 하나의 질서 잡힌 체계를 만들 듯 국가의 경영에 있어 질서의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곧 그의 교육은 국민들이 각각 부여받은 덕에 의한 올바른 질서 체계의 실현에 있으며, 나아가 진정한 철인의 등장을 국가의 책무로서 부여하는 것이다. 곧 이상(理想)의 ‘본’을 이용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철학자)가 나라의 성격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정체(政體)의 윤곽을 바로잡음으로 철인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3. 철인통치론과 이데아론‘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철학자가 그 본질적인 부분까지 인식(epist?m?)에 다다른다면, 그 앎은 전체적이며 불변적이다. 사실상 이는 감각을 넘어서는 관념의 세계이므로 인간이 다가갈 수 없지만, 플라톤에 있어서 인식은 추구해야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데아는 감각이 아닌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세계로 영원하고 불변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가시계에 존재하는 개체들은 이데아의 그림자이며, 최상의 상태가 곧 선이데아(to Agathon)이다.특히 플라톤의 중기 철학에서의 『국가』는 상승과 하강으로 이데아를 직관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출발점은 제1원리의 선이데아의 정의이다. 선이데아는 모든 것의 이데아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출발점이자 보편적 실체이다. 상승과 하강의 방법은 개별적 개체로부터 보편을 추론해가는 과정이다. 요컨대 인간은 소크라테스보다 보편적이고, 동물은 인간보다 더 보편적이고, 생물은 동물보다 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관계는 상대적이며 상승과 하강의 방법을 통해 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칸트의 12범주에 대하여1) 칸트 철학의 배경비판 철학의 창시자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 모두에 관심이 있었다.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합리론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이에 회의를 품고 흄에게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또한 뉴튼의 자연철학과 물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이후 양대 사상의 종합을 시도하였으며 이것은 칸트만의 독자적인 비판 철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순수이성비판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한다. 이는 합리론의 형이상학적 독단론과 경험론의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사고의 전환은 마치 천동설이 지배하던 시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획기적이었던 것처럼 혁명적으로 다루어졌다. 그의 혁명적 사고는 대상 위주의 관점인 경험론의 회의주의와 경험 없이 명석판명한 실체와 인식을 추구하려 했던 합리론의 문제점을 뒤집었다.3)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그리고 선천적 종합판단『순수이성비판』에서는 ‘보편타당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 여기서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개념을 구분한다.분석판단은 ‘S이면 P이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P(술어)의 개념이 S(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원은 둥글다’라는 명제를 들 수 있다. 이는 그 명제 자체만으로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비경험적이고 선험적이다.반면 종합판단은 P(술어)의 개념과 S(주어)의 개념이 포함관계에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예컨대 ‘물체는 무게를 갖는다’라는 명제를 들 수 있다. 이는 명제 이외에 경험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하므로 경험적이고 비선험적이다.칸트는 선험적인 분석판단과 경험적인 종합판단을 묶어 ‘선험적 종합판단’을 주장한다. 이는 인식이 보편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그 예로써 수학적인 판단을 제시한다. ‘2+5’는 ‘7’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며, ‘2+5’라는 개념에는 ‘7’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경험적이다.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인식 능력이 있다. 감성과 오성이 그것이다. 감성은 시공간의 형식을 띠는데 외적 형식을 공간, 내적 형식을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감성에는 물자체가 아닌 현상만 주어지므로 우리는 물자체나 본체계를 알 수 없다. 단지 감성은 공간과 시간적 현상으로써의 수용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라는 순수직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대상은 오성에 의해 개념화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오성이 사유하고 판단한다.인식은 언제나 감성과 오성의 종합을 통해서만 획득된다. 오성의 주된 작용은 판단과 추론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성의 범주이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범주를 경험적인 것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선험적인 12가지 범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수학적인 것과 관계하는 범주분량성질단일성
원인과 책임의 문제여기 빵을 훔쳐 붙잡힌 장발장이 있다. 나는 재판관이고, 판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가 빵을 훔치게 된 원인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연이 얽혀, 마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빵을 훔친 사실은 분명 죄를 범한 것이니 처벌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는 원인과 책임의 문제에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어떤 나쁜 사람도 그가 나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모조리 들어본다면, 대개가 수긍하고 말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수긍은 하면서도 왜 그는 나쁜 사람일까. 원인과 책임의 문제는 왜 모순적일까. 그런데 칸트의 윤리학에서는 왜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모든 현상에는 인과성이 작용한다. 도식화 하여 A → B이다. B라는 결과는 반드시 A에 의해서 나타난다. 요컨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라는 명제도 인과성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빵을 훔친 결과는 배가 고픈 원인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훔치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일지라도, 이 명제에서 원인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원인은 항상 결과에 대한 근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과 똑같이, 배가 고픈 원인이 제공되었지만 빵을 훔치지 않을 수도 있다. 원인은 결과에 대한 근거로써의 사실일 뿐, 원인을 인식했다고 해서 그것에 귀책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렸는데, 전날 밤 차가운 방바닥에서 잔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닥에 잤다”는 사실은 단지 그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써 제시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일 뿐이다.그런데 일상에서는 원인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얼마 전 고등학생이 대학생을 잔인하게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오컬트 문화가 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그 대처라는 게, 오컬트 인터넷 카페의 운영을 감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대처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설령 오컬트 문화가 그 고등학생에게 영향을 미쳐 살해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을지언정, 오컬트 문화 자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일수록 특정 주체의 책임의 문제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남는 것은 책임 소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원인에 대한 일방적인 제제뿐이다. 더 깊숙이 살펴보면 원인을 책임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원인도 최종적인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되는 원인을 원인A라고 할 때, 그 원인의 원인이 되는 원인B도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소급하다보면 무수한 원인이 줄지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들을 일일이 분석해낼 수 없을뿐더러, 따라서 어떤 하나의 원인X에게 결과의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원인은 어디까지나 결과가 야기되도록 한 하나의 사실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지,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것이다.원인을 캐물어 들어가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모 뿐 아니라 친구, 사회구조 등 셀 수 없는 원인이 개입되어 있다. 결국 ‘책임’은 없어지고 만다. 아무데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여러 원인에 의해서 인과적으로 이루어진 일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만다.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원인을 소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결과에 대한 원인을 따지다보면 무수히 많은 원인에 의해 책임도 없어진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앞서 보았다시피 원인은 단지 인식되어야 할 것이지 책임 추궁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책임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책임을 물으려면 주체가 있어야 하고, 주체가 있으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과성에 의해서 움직였다고 하면 자유가 없기 때문에 역시 주체도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나는 어떤 시점에서도 여전히 (자연)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며 내 자유가 아닌 것에 의해 행위를 규정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이성비판』책임과 자유가 없는 인간, 단지 인과성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인과성과 자유는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회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우선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떤 결과의 원인을 어디까지 소급하는가의 문제이다. 결과는 시간적, 공간적 흐름의 정지 상태이다. 영화로 따지면 필름을 돌리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곳을 결과로 지목하는 것이다. 결과가 지목되었을 때, 비로소 그 멈춘 시점보다 선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원인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결과의 원인을 어디까지 소급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인과성에 의해 단단히 묶여 있고 이를 단번에 재단하여 특정 결과에 대한 최종 원인으로 제시할 수 없다. 요컨대 법정에서 판결을 할 때에도 정상참작의 요소로써 피고인의 과거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범행 시점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사실들과 달리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다른 사실을 해당 사건의 인과 관계에 편입시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원인은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재단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이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을 때, 그들 사이의 인력은 거리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피고인이 범행 당시에 품었던 증오와 그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시간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결과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추적할 때 일정한 거리 내로 한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 원인들 사이에는 어떤 영향력의 차이도 구분 지을 수 없다. 법정에서는 반드시 판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각 원인들의 경중을 따져야만 한다. 하지만 판결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것을 단지 나타난 하나의 사실로만 바라본다면 그 원인들은 단지 원인으로 취급되는 과거의 사실로써 존재할 뿐 그들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없다.그럼에도 우리는 장발장이 빵을 훔치는 사건을 바라볼 때, “장발장이 빵을 훔쳤구나.”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장발장이 빵을 훔쳤군. 그는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구나.”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만을 보고서 왜 이처럼 두 가지 판단이 나타날까. 칸트는 인식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을 구분하여 자유의 가능 근거를 검토한다.
철학과 과학과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1. 왜 철학을 과학과 종교와 비교하려 하는가?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철학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을 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과학과 종교다.2. 철학은 질문이다.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인간은 도구를 다룰 줄 알고, 높은 지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능은 다른 동물들보다 나을 뿐이지 완벽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지능은 오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철학적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된다. 완벽하지 않기에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철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philosophy는 sophia(사랑)과 philos(지혜)가 결합되어 생긴 단어다. 곧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앎을 즐기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음에 대해 인정하고,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나가는 데에 철학의 근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그럼 철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철학은 문제를 계속 궁리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찾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97년의 렉서스는 그 당시 파격적인 기술력을 지닌 차였다. 그럼에도 2013년 렉서스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97년의 렉서스가 지니고 있었던 완벽해 보이는 기술에도 허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의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은 과거의 답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의심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2013년의 렉서스가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철학적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진리를 파악하고 깨뜨리는 작업을 의미하게 된다.3. 철학과 과학3-1. 철학과 과학의 공통점첫째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물병 하나가 있다. 분명히 물명은 하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물병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한, 물병은 하나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각 따르고 있는 진리와 가치관이 다르다. 결국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대로 내가 살 수 없으며, 오직 자기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이 가진 진리와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아야 나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은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한다. ‘모든 것’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물론이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다.둘째는 의심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 보면 황당한 말이지만, 탈레스의 철학적 시도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탈레스는 보이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근본과 원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의심은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셋째는 반증 가능성이다. 과학과 철학은 지식을 완벽하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주장에도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그것을 버틸 때 주장은 더욱 강력해지고, 버티지 못할 때 새로운 주장이 탄력을 받게 된다. 따라서 반증 가능성을 지니지 않는 것은 지식이 될 수 없으며 신념이자 믿음일 뿐이다.넷째는 합리적인 체계이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는 수많은 천체 관측 자료를 남겼다. 하지만 그의 제자 케플러가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해서 더 유명해졌다. 기록과 자료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지만, 그 바탕에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낼 때 가치가 생긴다. 철학과 과학은 합리적인 체계를 만든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3-2.철학과 과학의 차이점첫째는 표현 방식의 차이다. 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야구에는 도루라는 규칙이 있다. 주자가 수비 팀의 허점을 이용해 다음 베이스로 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수비 팀이 도루를 막으려면 투수가 포수에게 더 재빠르게 공을 던져야 한다. 결국 도루의 성공 여부는 누가 얼마만큼 더 빠르냐에 달려있다. 과학에서는 이를 정확한 수치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0.3초 안에 공이 포수의 미트에 들어와야지 도루 저지율이 높거나, 주자가 다음 베이스까지 4초 안에 뛰어야 도루 성공률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과학은 수와 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철학은 언어를 가지고 논리에 맞게 구성해야 한다.둘째는 묻는 것의 차이다. 어떤 일에 대해 과학은 ‘어떻게’를 묻는다. 한편 철학은 ‘왜’를 묻는다. 과학은 과정을 중시하고, 철학은 이유를 중시하는 차이다.셋째는 추구하는 것의 차이다. 과학은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함으로써 결과물을 추구한다. 한편 철학은 자료에서 의미를 찾는다.4. 철학과 종교4-1. 철학과 종교의 차이점(1) 이슬람 신자는 오른손을 신성한 일에 사용한다. 반대로 왼손을 신성하지 않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에 사용한다. 신자는 교리에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리를 자세히 보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지침을 알려주고 있다. 화장실을 들어갈 때는 왼발부터 들어가야 한다든지 말이다. 이처럼 종교는 우리의 행위 지침을 미리 결정하고, 따르게끔 한다. 하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 지침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따르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