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Ⅱ. 5?4신문화운동과 그 발전(1917-27)1. 5?4문학혁명의 역사적 조건2. 문학혁명의 발전과정3. 문학혁명의 성과 및 한계4. 주요단체5. 주요작품Ⅲ. 좌익문화운동(1927-37)1.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학 논쟁2.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성립3. 동북작가군과 두 가지 구호 논쟁4. 주요작품Ⅳ. 항전민주문학운동(1937-49)1. 문단의 상황2. 주요작품Ⅴ. 결론제 1장 서론19세기 후반 중국은 비단 문학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변화를 체험한다. 이러한 사회, 정치, 문화, 사상 등의 변혁 속에서 문학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고 상호간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가 본 논문의 핵심 주제이다.중국현대문학이란 명칭은 다른 모든 문학과 마찬가지로 시공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중국현대문학은 중국이라는 공간에서 현대(1917년에서 1949년까지)로 규정된 역사시기에 나타난 문학의 제반 현상들을 의미한다. 중국현대문학의 시기적 범위를 정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이 성립 이후 이전 시기와는 판이한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고, 그에 따라 대중의 의식구조가 달라졌으며, 그것의 반영인 문학현상 자체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시기까지를 중국현대문학사로 규정하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문학혁명의 선언서로 일컬어지며 그 시작을 알린 호적(胡適)의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가 발표된 1917년으로부터 1949년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중국현대문학사를 기술하고자 한다.본 논문에서는 중국현대문학사의 시기구분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었다.) 우선 1917년을 기점으로 1927년까지를 첫 시기로 잡았다. 1927년은 국공간의 합작이 깨지면서 사실상의 두 정부가 존재하게 되면서 문학적 흐름 역시 좌우로 나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시기는 문학운동의 중심내용이 5?4시기의 봉건 구문학(舊文學) 타파와 신문학의 다양한 발전으로 쟁과 적절하게 협력하여 대중의 선전과 교육에 효과적인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백화문의 적용과 신문학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백화문을 이용하여 시와 글을 지어 신사상을 선전하였고, 제국주의의 침략과 군벌의 매국적 죄행을 폭로하였다.둘째, 사상해방운동의 전개를 강력하게 촉진시킴으로써 유교를 위시한 구사상과 봉건 문화사상을 타도하였다. 문학혁명은 사상 계몽운동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였으며 과학과 민주를 통해 중국 인민의 ‘인간성 해방’을 실현하고 나아가 민족해방을 달성하고자 하였다.셋째, 5?4문학혁명은 중국문학사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근현대문학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문학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장기간에 걸친 봉건문학의 신성불가침한 지위를 훼멸시켰을 뿐 아니라 ‘평민문학’, ‘사실주의문학’, ‘인간의 문학’ 등을 창조하기 시작하였다.넷째, 5?4문학혁명이 제창한 민주주의 문예사상은 수많은 문학 동인들의 공통된 사상기초로, 그 출현은 중국문학 발전사와 문예이론 발전사의 중요한 성과이다. 민주주의 문예사상은 보통사람의 생활과 운명, 사상과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인생을 표현하고 개조하는 ‘유익한 도구’가 될 것을 요구하였다.이외에도 5?4문학혁명은 수많은 간행물을 통해 다수의 신문학 종사자를 훈련시켰고 수많은 문예청년들을 배양하였다.5?4문학혁명에는 역사의 제약으로 인하여 한계도 존재하였다. 우선 문학혁명 제창자와 참가자의 대부분은 아직 과학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을 획득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문학혁명의 이론문제의 연구 토론과 실제 문제의 해결에 종종 복잡한 사상 경향을 드러냈다. 또한 5?4문학혁명은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전개되었고 수많은 노동자, 농민 대중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5?4문학혁명은 확실히 “중국문학사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최초의 혁명으로,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이 문학혁명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중국의 인민문학예술운동도 없었을 것이라 할 수 있다.”)제 4절 주요단체(1)문학연구회(文學건예교에 반대하고 그에 맞서 저항하려는 혁명선구자의 형상을 묘사했고,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2)문제소설(問題小說)20년대 초반 문학연구회 창립을 전후하여 중국문단에는 ‘인생파’작가들을 중심으로 문제극과 문제소설의 창작열기가 중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여기서 문제소설이란 사회의 모순이나 봉건통치 하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회 문제들을 소설 창작에 중점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을 말한다.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는 엽성도의 『격막隔膜』, 『선하線下』와 왕통조(王統照)의 「일엽一葉」, 빙심(氷心)의 「초인超人」, 허지산(許地山)의 『공산영우空山靈雨』 등이 있다.3)향토소설(鄕土小說)1920년대 중반 중국문단에 새로운 작가군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농촌 출신 작가로서 고향을 떠나 도시나 타향에 거주하면서 향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는데, 이를 향토소설이라고 한다. 향토소설은 단지 농촌의 현실 문제를 제시하는 것만 아니라 농촌의 풍속이나 농민의 순박한 성품을 문학적으로 그려내어 농촌풍경화와 같은 미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작가와 작품으로 왕노언(王魯彦)의 『유자柚子』, 대정농(臺靜農)의 「지렁이들?蚓們」, 폐명(廢名)의 『죽림이야기竹林的故事』 등이 있다.4)자전소설(自傳小說)20년대 문제소설과 향토소설이 인생파의 실천적 성과라고 한다면 자전소설은 예술파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자전소설은 ‘내면의 자아를 자연스럽게 표출한다.’는 예술파의 서정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으며 창조사의 문예관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예술파의 작품은 사회현실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인생파와 동일한 것 같지만, 예술파 작가들의 창작목적은 사회현실을 빌어서 자신의 내면심리나 서정세계를 묘사하는데 있기 때문에 자전소설은 문제소설에 비해 강한 주관적 색채를 띄고 있다. 자전소설의 대표적 작가인 욱달부(郁達夫)는 1921년 첫 번째 소설집 『침륜沈淪』을 출판하였고, 이밖에도 「망망야茫茫夜」, 「풍령風鈴」, 「박전薄奠」 등을 창작하였다.(3)산문1)수감문학 진영 내부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마무리되자 공산당은 창조사와 태양사의 구성원을 기초로 삼고, 노신 등의 작가와 연합하여 혁명작가의 통일조직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이에 1930년 3월 중국좌익작가연맹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좌련의 서기는 공산주의자 조직가인 주양(周揚)이 맡았으며, 모순, 곽말약, 욱달부, 전한 등이 참여하였다. 좌련은 국민당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민중과 유관한 문학을 표방하였다. 좌련은 ‘좌익작가의 전투선언’이라는 이론강령을 통해 신문학운동의 경험을 결산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문예이론을 중국 혁명문학의 실제적 상황과 구체적으로 결합시켰다.좌련의 주요 간행물로는 『척황자拓荒者』, 『전초前哨』, 『문학도보文學導報』, 『북두北斗』 등이 있다. 좌련은 1930년대에 그 규모와 영향력이 가장 큰 문학단체로서 중국과 일본에 소조를 조직하여 좌익 문예청년을 대량으로 흡수하고 단결시켰다.문예투쟁이 날로 격화되어가던 1930년대에 좌련에서는 일련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국민당 정부의 문화포위토벌 공격에 맞서 승리하여 오히려 진보문학의 발전을 촉진했다. 다음은 민족주의 문예운동과의 투쟁이다. 국민당 정부에서도 좌익문예운동에 맞서 민족주의 문예운동을 일으키지만 체계적인 이론의 부족과 예술성 있는 작품의 부재로 실패한다. 세 번째는 신월파와의 논쟁이다. 구미 유학생 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신월파 작가들은 인성론을 옹호하고 문학의 계급성을 반대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며 좌련 작가들과 대립한다. 마지막으로 문예자유논쟁이다. 논쟁의 초점은 문예와 정치의 관계로 다른 논쟁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좌련은 이와 같은 각종 문예와의 논쟁과정에서 끊임없이 이론 학습을 강화하였고, 자신의 이론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좌련의 성립으로 중국현대문학은 새로운 역사 단계에 진입하였다, 즉 문학을 통해 인민의 반제?반봉건 정신을 고양시키고, 5?4문학의 전통을 계승?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 프로문학운동을 더욱 전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 해파문학)의 상업화에 반대하면서 문학의 독립성과 이상을 추구한다. 이는 현대소설의 서정 수법과 전원풍격 방면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공헌을 하였다. 경파소설의 대표작으로는 심종문의 『변성邊城』, 『장하長河』 와 폐명의 「도원桃園」, 노분의 「이문습기里們拾記」 등이 있다.3)노사(老舍)의 「낙타상자駱駝祥子」1936년 봄에 발표된 노사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 소설은 사회 최하층의 노동자가 비참한 운명 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상황을 동정적 시각에서 묘사하였다. 「낙타상자」는 자세한 세부 묘사로 북경의 시민사회를 생동적으로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구성이 긴밀하면서도 간결한 특성을 나타낸다. 또한 소박한 서술과 세밀한 심리묘사로 인물의 내면세계와 성격을 중점적으로 나타내어 인물형상을 생동적으로 부각하였다. 「낙타상자」는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한 중국현대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4)파금(巴金)의 「집家」파금은 아나키즘을 자신의 인생철학으로 삼아 이를 문학 창작에 반영하는 동시에 다양한 내용의 창작을 시도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집」은 고전문학의 「홍루몽紅樓夢」에 비견될 만큼 우수한 장편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은 5?4를 전후로 한 사천 성도를 배경으로 하여 번영을 구가하던 봉건 대가족이 쇠락의 길을 걷는 과정을 묘사하고, 구중국 사회의 죄악을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형식으로 고발했다. 또한 봉건세력의 필연적 붕괴와 민주주의 역량의 필연적 성장이라는 역사적 추세를 보여준 작품이다. 그 외에 「멸망滅亡」,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3)산문서로 다른 사상적 경향과 예술적 견해를 가진 작가들이 서로 다른 풍격의 산문 작품을 경쟁적으로 쏟아냄으로써 1930년대 산문은 현대 산문 발전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산문 발전의 시기적 원인으로는 산문의 장르 의식 강화, 급변하는 시대상황의 변화로 인한 잡문의 수요 증폭, 외국의 우수한 산문의 보급 등이 있다.1)노신의 후기 잡문노신은 이 시기 부녀자 문제로부터 청년, 가정, 교육, 풍습, 현실과 었다.
양안(兩岸)관계와 비교한 남북한의 통일방안Ⅰ.서론Ⅱ.본론1. 양안관계의 역사적 배경2. 남북한 분단의 역사적 배경3. 중국, 대만, 한국, 북한의 통일정책 비교Ⅲ.결론Ⅰ.서론분단국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흔히 남북한을 세계에 유일한 분단국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중국과 대만의 관계(兩岸)가 한국과 북한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남북한의 통일을 위한 사례분석에 있어 독일, 베트남, 예멘 등의 예를 들 수도 있지만 중국과 대만역시 분단이 된 지 50년이 지났고 내전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다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례분석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안관계가 남북한과는 다른 역사적, 국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남북한 간의 비교에 있어서 차이점을 명확히 구별하여 분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대만은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주석이 총통이 됨으로써 중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2008년 11월 59년 만에 처음으로 대만에서 장관급 회담이 열려 항공, 해운, 우편, 식품안전 협력을 전면화하는 4개협의서에 서명했다.) 이는 곧 인적, 물적 교류의 급속한 확산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된다. 남북한의 현재 관계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화해무드의 결과물들이 중국과 대만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양안관계와 남북한 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각 국의 통일정책의 변화를 비교하여 한국이 북한과의 통일을 위해 어떤 자세에서 대처해 나가야하는지 알아보자.1.양안관계의 역사적 배경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이념적 분단의 계기는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중국혁명 과정에서 치른 치열한 내전의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대만은 중국 본토에서의 승리를 위해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지만 북방의 군벌과 그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1차 국공합작(1924.1~27.7),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대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간회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연해주·상해·한성에서 각각 수립되어 있던 3개의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정부이며, 또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수립되었고 이후의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단일정부라는 점에서 정통성을 갖고 있지만 전 민족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가지 못하였고, 내부에서의 분열로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벌이지 못하였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신간회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항일투쟁이라는 공통분모를 두고 성립된 것이지만 각 계열의 세력 확장과 이념의 차이로 큰 성과를 맺지 못하고 내분만 초래한다. 한편 국외적 요인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다툼에 한반도가 희생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중 오키나와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았다. 더군다나 일본정부는 결사적으로 본토사수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소련에 지속적으로 극동참전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은 군사행동에 대한 약속을 했음에도 직접적인 참전을 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일본 본토에 핵무기를 투하하고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다. 소련은 그때서야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했고 다급해진 미국은 한반도의 38선을 기준으로 분할통치 하자는 제의를 한다. 소련이 이를 받아들여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각각 미소에 의한 신탁통치가 이뤄지고 이승만 정부와 김일성 정부가 세워진다. 이후 6.25가 발생하고 휴전으로 끝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고착화 된다.3.중국, 대만, 한국, 북한의 통일정책(1) 중국의 통일에 대한 기본인식과 통일정책중국정권은 정부 수립 이래로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많은 난제를 “대만 문제의 해결”이라는 국내문제 차원으로 인식해왔다. 현재의 중국지도부가 가지는 인식은 모택동 시기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 실례로 대만문제의 해결이 민족의 자주성 회복이라는 점은 에 대하여 무력적인 통일 방식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평화적인 통일 방안, 즉 ‘일국양제’의 통일 방침을 제사하면서 대만의 자본주의체제의 유지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법률로도 제정 되었는데 그것은 1984년 영국과 중국의 ‘홍콩문제에 대한 공동성명’에 적절히 적용되었다. 그것은 중국이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이양 받아 주권을 행사할 경우에도 홍콩에 대해서 같은 권리를 허용한다고 함으로써 중국 통일 정책의 근간을 유지한다는 원칙을 주장하는 내용이 된다. 이와 같이 중국대륙의 통일 정책은 개혁 개방정책의 추진과 함께 지속적으로 원칙을 준수하면서 대만과의 협상이나 회담을 지속하려고 노력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대만의 기업이나 화교들의 자본을 중국의 경제개발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중국의 1997년과 1999년 홍콩과 마카오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동일한 양식을 동원하여 1국2체제의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2)대만의 통일에 대한 기본인식과 통일정책1949년 내전에서 패배한 대만의 기본인식은 대륙의 회복이며 이는 어떠한 대의명분보다 중시된 국가의 기본목표이며 체제의 이념지표이다. 이러한 인식이 1988년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의 사망으로 대만의 내부 정치적인 상황이 국민당의 위상전환과 함께 야기되면서 대만주민의 대륙 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1980년대의 아시아각국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열풍이 대만의 정치적인 구조개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만정부의 통일정책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다원적인 의사표현을 수렴한다고 하여 통일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변한 것은 아니다. 대륙의 중국통일을 위한 무력사용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중국이 제기하는 통일협상에 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대만은 자신들이 통일이념으로 표방하는 민주, 자유가 실현될 수 없는 중국의 통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대만정부는 대륙정권이 대만에 대한 무력의 영토며 국가의 통일을 촉진하는 것은 중국인의 공통된 책임이다.둘째 중국의 통일은 전 국민의 복지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당파간의 정쟁에 의해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셋째 중국의 통일은 인간의 존엄성 수호, 기본적 인권의 보장, 민주법치의 실천을 기본이념으로 해야 한다.넷째 중국의 통일은 그 시기와 방법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대만지역 주민의 인권, 안전, 복지를 존중하는 원칙하에 단계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이상과 같은 대만의 통일 정책은 현재적 의미에서 중국이 대만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는 일국양제에 대한 대응논리다. 이러한 대만의 대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은 대만 또한 기존의 원칙(쌍방의 대등한 정치지위 및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견지하면서 발전적인 측면과 신축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대만 정계의 양축인 국민당과 민진당은 대 중국 정책에 있어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들어온 국민당에게 중국 본토는 그들의 고향이며 언젠가는 회복해야할 고토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은 공산당을 이겨내고 중국본토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 목표이며 그 뿌리에서부터 중국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대만 원주민이 주축인 민진당은 대만은 중국과는 상관없는 그들만의 국가이며 따라서 중국에게 독립을 인정받고 또는 중국에 병합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3)한국의 대북 통일정책의 변화한국의 통일정책을 각 정권별로 요약하겠다.제 1공화국의 통일정책한국의 통일정책은 이승만 대통령하의 제 1공화국이 그 정책적 기조를 다져 놓았다. 통일정책의 기저에는 UN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과 그 후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호적대와 불신이 깔려 있었다. 한국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전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데 통일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이 주장에 따라 이승만 정권은 한국 정부의 법통성과 당위성에 기초하여 북한과의 일체의 접촉이나 협상을 거부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력사용을 주장하고, 이를 정당이 처음으로 합의하였던 7.4공동성명의 '평화통일3대 원칙')은 획기적인 관계개선의 전기로 보였으나, 곧 양측의 합의에 대한 해석의 차이점과 감정대립으로 불신이나 적대관계의 청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제4공화국의 통일정책박정희는 1972년 말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유신체제는 한국의 정치 체제를 재구성하여 통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지만 유신헌법의 내용과 그 실체는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을 도모하기 위한 독재체제로 규정될 수 있다. 이것은 남한의 내정문제가 외교정책과 통일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북정책이 독재체제를 비호하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대북정책은 반공과 안보우선 정책으로 집약될 수 있다. 힘은 힘으로 대항한다는 군사적 논리가 지배적이었던 유신 독재 체제에서는 야당의 탄압은 물론, 정부의 대북정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어떠한 통일의 논리나 주장도 허용되지 않았다.제 5,6 공화국의 통일정책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계승한 또 다른 쿠데타 정권인 전두환 독재체제는 통일논의를 봉쇄하고, 이를 독점하는 면에서는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없었다. 한국은 북한의 연방제에 자극받아 1982년에 처음으로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보다 포괄적이고 상세한 한국의 통일안은 노태우하의 제 6공화국의 '민족공동체'와 '남북한 체제연합'의 개념이다. '체제연합'은 '공동체'로 향하는 중간다리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1민족 2체제의 과정을 거쳐 1민족 1국가 체제라는 종착역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는 곧 '민족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남북연합'은 '민족내부관계면'에서 보면 국제법상의 '국가연합'이 아닌 민족 내부의 통일 지향적 특수 관계이며, 그렇다고 북한이 제기하고 있는 통일의 상태로서의 '연방'도 아니다.문민정부의 통일정책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은 제 6공 정부의 통일정책을 변형, 수정하였다. 새 문민정부의 통일정책은 3단계 구도와 3대 기조의 상호보완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된다.
세속 권세: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우선적으로 루터가 이 글을 쓴 이유는 타락한 위정자들이 힘없는 자를 괴롭히고 기독교 신앙을 억압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서다. 루터는 이 책을 세속적인 권세가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과 그것이 기독교적이고 이로운 방식으로 어떻게 채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한 내용, 세속적인 권세의 범위가 너무 확장되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적 세계의 통치를 방해하지 않도록 권세의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쳐야 되는지와 그 한계를 서술한 내용, 마지막으로 제후가 그 세속권세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탐구한 내용으로 나누었다.그럼 각각의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루터는 가장 먼저 세상에 존재한 모든 권세는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신보다 위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의 이론의 대 전제 이다. 이것은 황제, 제후 등의 세속통치자를 정당화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루터는 세상을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영적 세계와 세속 세계로 나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세속의 칼이나 법이 필요하지 않은 영적 정부와 비그리스도인과 악한 자들을 세속의 칼과 법으로 억제하여 평온을 지키는 세속 정부를 만들었다. 루터는 이런 두 정부가 모두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권세에 대한 복종. 자신의 직분에 대한 충실을 하나님을 섬기는 경천의 수단이라 주장하였다.루터는 세속권세의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인지 그 영향력은 어디까지 미치는가에 대해 말하였다. 그는 앞서 말했던 두 나라에는 각각 자신의 법과 규율을 가지고 있으며 세속 정부는 생명, 재산, 외적인 것에만 미치는 법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귀족 제후들을 비판하였다. 루터는 세속 권세와 복종은 단지 사람들의 삶에서 외적인 것에 한계를 규정하였고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은 사람들의 영혼과 믿음에는 강제로 구속하려 하면 안 될뿐더러 강제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또한 이단에 관해서도 믿음은 칼이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만 가능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마지막으로 루터는 제후들이 세속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는데 우선적으로 법을 엄격하게 때론 온건하게 적용하며 이성이 모든 법을 통제하며 이런 법이 최상위의 통치가 되어야 된다고 했다. 다음으론 자신의 신민들 속에서 그들의 이익을 구함으로써 제후의 권세와 권한을 스스로 비우고 그들의 필요와 관심을 자신의 것인 것처럼 처리해야 한다 했다. 또한 자신의 참모를 경계하고 자신의 신임과 권세를 부여하지 말며 통치권의 핵심을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제후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공정하게 다루며 지혜롭고 현명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줌이 없이 벌을 할당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0년대 조선외교 환경과2000년대 한국외교 환경 비교목차Ⅰ.서론Ⅱ.본론1.1880년대 조선의 외교환경2.2000년대 한국의 외교환경Ⅲ.결론Ⅰ.서론1880년대 조선의 외교환경과 2000년대 한국의 외교환경을 비교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시 조선과 한국의 국내외적 상황과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력이다. 외교 교섭의 주체인 외교관의 능력이나 자질도 외교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외교가 국가와 국가의 교섭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교섭국들 간의 국력의 차이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외교주체인 국가의 국력뿐만 아니라 외교적 활동을 펼치는 그 당시의 국제적 정세와 흐름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전의 조선은 중국, 일본 등의 두 국가에 국한된 소극적인 외교적 관계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서양 국가들과 생존을 위한 외교적 교섭행위를 시작했다. 따라서 조선의 실질적인 외교의 시작은 강화도 조약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880년대 조선의 외교적 환경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이해함과 동시에 당시 주변국들과 서양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입장과 대 조선 정책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1880년대를 전후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 등을 소개하여 조선의 외교적 환경을 이해한 후 광복이후 한국의 상황과 변화를 바탕으로 하여 2000년대 한국의 국내외적 상황을 토대로 외교환경을 설명하겠다.Ⅱ.본론1.1880년대 조선의 외교환경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조선의 정권을 잡는다. 그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서양을 배척하고 쇄국정책을 펼친다. 그 후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줄곧 쇄국정책을 지속한다.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은 그 후 미국, 영국,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영국은 청과 인도의 식민지경영에도 힘에 붙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또한 영국의 관심사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을 지지한다. 조선 내부적으로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쇄국정책을 고수하자는 수구파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이 잠시 실권을 잡지만 청의 신속한 개입으로 대원군은 중국으로 끌려간다. 일본 역시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한다. 임오군란의 여파로 청(淸)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상주하게 된다. 임오군란 후 조선에는 개화파가 정국의 주도적 세력으로 떠오른다.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지만 청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갑신정변 후 청은 조선에 약 3000여명의 군사를 주둔시키며 조선을 획책하려하고 민씨 정권은 청의 힘을 빌려 정권 유지를 꾀하며 일본을 견제하려 한다. 1894년 3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다. 조선은 자신의 군사력만으로 동학농민운동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에 파병을 요청한다. 이에 청은 곧 조선에 군사를 파병하였고 일본 역시 텐진(天津)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사를 보낸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 더 이상 조선에 군사를 주둔시킬 명분이 없자 청은 일본에 공동으로 군사를 철군시키자고 하지만 일본은 철병을 거부하고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일본은 곧 조선 내 개혁(갑오개혁)을 강요하고 조청(朝淸)간에 맺은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며 내정을 간섭하는 등 지배권확보를 도모하였다. 조선은 이에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한다고 발표하고 조,청간의 국교가 단절하게 된다. 청과의 전쟁을 미리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은 아산만에 주둔중인 청군을 공격한다. 이어 성환에서 양국의 군대가 충돌하여 일본이 압승한다. 조선 내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1894년 8월 1일 양국은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전에 돌입한다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실행한다. 1904년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1907년 한일신협약)등을 체결하여 외교, 군사, 내치 등 국정의 대부분을 일본에 빼앗긴다. 이 과정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던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일본의 방해와 국제사회의 무관심으로 인해 실패하게 되고 결국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킨다. 결국 1910년 한일병합이 됨으로써 조선은 멸망한다. 이처럼 1880년을 전후한 국내외적 상황은 조선에 매우 불리했다. 오랫동안 유교적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던 청과 일본은 모두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삼으려 했고 제국주의에 한창이던 서양열강들 역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자 하거나 또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았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교관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매우 부족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외교환경 속에서 조선의 외교활동이란 극히 제한적이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개국이 되면서부터 끊임없이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하여 내부적 혼란을 일으켰고 이는 조속한 서구화를 방해했다. 또한 부국강병 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강해보이는 국가에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조선의 외교 환경에 악 영항을 끼쳤다. 다만 이러한 조선 나름대로의 외교 활동을 약소국으로서 강대국에 도움을 청해 살아남으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당시 조선은 신속하게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 한다 하더라도 이미 일본, 러시아 등과는 큰 국력의 차이를 보였고 또한 인구나 자원 등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외교가 제한된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2.2000년대 한국의 외교환경200년대 한국의 외교환경을 조사하기에 앞서 대한민국의 수립과 정치, 경제적 발전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1945년 구적인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제3공화국 기간 동안 군사정부는 내부적 도전을 극복하는 여러 방편들 중의 하나로 외교적 수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사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제 3공화국의 외교정책은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문제로써 풀어나가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제 3공화국은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 그 예로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총 8억 2천만불을 조달했고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여 약 5억불,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하여 약 10억불, 중동에 건설인원을 파견하여 약 205억불을 벌어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수출 산업을 일으켜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다. 1972년 박정희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 투표로 ‘유신헌법’)을 확정하고 제 8대 대통령에 박정희대통령이 재취입하면서 제 4공화국이 출범한다. 제 4공화국의 출범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부정되고, 정치는 파행의 길로 들어선다. 반면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적 달성과 새마을운동의 확산으로 경제는 꾸준히 성장한다. 하지만 수출 지향적 정책으로 대외의존도가 심화되고, 성장제일주의 정책으로 빈부의 격차가 커진 단점이 있다. 외교적으로는 반공을 국시로 삼아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면서도 1973년 6 ·23선언)을 통해 외교 ·통일정책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다.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후 12.12사태)가 일어난다. 1980년 전두환이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 5공화국이 출범한다. 제 5공화국은 과거 성장제일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저물가, 저금리, 저환율의 삼저(三底)정책과 부동산 투기억제 등 안정 우선정책을 추진한다. 외교적으로는 1983년 1월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방한하고,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방한하는 등 정상외교를 벌이는 한편, 소련·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1987년 6.29민주화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와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남북경제협력의 확대를 통해 화해, 협력 체제를 구축한다. 하지만 불법 대북송금과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점, 북한에게 일방적으로 퍼주기를 했다는 점 등의 비판도 있다. 한국은 1948년 수립이후 계속된 정치적 갈등을 이겨내고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뤄낸다. 한국은 발전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적 위상을 높인다.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다.)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이에 대한 미국의 반격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베트남 파병이후 18년 만에 해외 파병을 결정한다. 유엔에 가입한 후 한국군은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에 참가, 국제평화에 기여한다. 93년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상록수 부대(공병대대)를 파견하고 94년 서부사하라 의료지원단 파견, 그루지야 정전감시단 참가, 인도, 파키스탄 정전감시단 참가, 95년 앙골라 공병대대 파견, 99년 동티모르에 육군 특수전사령부 병력을 주축으로 한 상록수부대 파병 등 세계각지에서 활발히 PKO에 참가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파병은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상당한 국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Ⅲ.결론1980년대 조선은 현재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내외적인 혼란을 겪었다. 국내적으로는 국론이 양분되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설 대책을 세우지 못했고 시기를 놓쳤다. 국외적으로도 확실한 동맹국도 없이 주변강대국들과 서양열강들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정상적인 외교활동이란 제한적이고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다. 이에 반해 2000년대 한국은 정치적 혼란기를 극복하고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며 꾸준한 군사력 증가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또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적극적으로 국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1880년대 조선의 외교환경과 2000년대 한국의 외교환경을 비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훌륭한 외교관을 키우는 것도 외교환경의 질적 상승 면에서 매우 중요한 주장,
양안(兩岸)관계의 변화가 동북아 지역에 미치는 영향Ⅰ.서론Ⅱ.본론1.양안관계의 성립배경2.대만의 對 중국 정책 변화3.중국의 對 대만 정책 변화4.시기별 양안관계의 쇠퇴와 발전5.동북아 주변국들과 중국, 대만과의 관계 변화Ⅲ.결론Ⅰ.서론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분단국은 한국과 북한이 유일하다. 허나 양안(兩岸), 즉 중국과 대만역시 한반도의 남한, 북한과 많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북한이 만약 통일을 한다면 동북아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처럼 양안관계의 변화는 동북아 지역에 경제, 무역, 군사, 안보, 문화, 사회 등 모든 방면에 변화를 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2008년 5월 친 중국적 인물로 분류되는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당수가 대만 총통에 취임하면서 이전 8년간 대만을 이끈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총통과는 다른 대 중국 정책을 채택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시기적 정치적 변화 속에서 양안관계의 성립과 배경,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양국의 정책들과 관계의 쇠퇴와 발전, 동북아 주변국들과의 관계변화를 통해 앞으로 양안관계가 어떻게 발전, 또는 변화할지와 이것이 동북아 지역에 미칠 수 있는 긍정, 부정적 영향을 예측해 보고자 한다. 양안관계는 대만의 어느 정당이 정권을 차지하는 가에 따라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국민당이 정권을 차지한다면 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합과 통일이 강조될 것이고 ‘대만의 독립’을 당의 목표로 하는 민진당이 대만정권을 획득한다면 중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쇠퇴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대만과 중국이 평화 공존, 더 나아가 통일에 이른다면 탈냉전시기의 독일), 예멘)의 통일이후에 새로운 통일 유형을 보여줄 것이며 한국과 북한의 통일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양안관계의 화합은 한반도 평화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예측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지만 국내법인 ‘대만관계법’을 근거로 군사적 지원을 하며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과 동북아 지역의 패권을 두고 중국과 경쟁하는 일본으로서는 양안관계의 급속한 발전을 경계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대로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요구한다면 중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만약 대만이 독립을 선포할 경우 이에 영향을 받은 티벳족, 위구르족 등의 소수민족들이 강력히 독립을 요구할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때문에 중국은 대내외에 대만과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만약 대만이 독립을 선포할 경우 무력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만약 대만에서 강력한 독립의 움직임이 보인다면 중국은 대만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한편 연안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하고 최후에는 무력침공도 불사할 것이다. 중국과 대만이 전쟁을 한다면 종국에는 중국의 승리로 끝나겠지만 중국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미국의 개입, 국내의 여론 악화 및 소수민족의 독립요구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Ⅱ.본론1.양안관계의 성립배경청일전쟁이 일본이 승리로 끝난 후 양국은 1895년 시모노세키(下關條約)조약)을 맺는다. 그 결과 일본은 남방과 대륙진출로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대만을 손에 넣어 그 후 50년간 식민통치를 하게 되었다. 일본은 그들이 의도하는 대만을 만들기 위해 본국과 식민지 당국과의 협조 하에 자본주의적 식민경제를 발전시켰다. 그 후 대륙에서는1911년 신해혁명에 의해 청조가 붕괴되고 정당 정치적 공화국이 됨으로써 중국국민당이 등장하게 된다. 잠시 군벌이 실세를 잡았으나 쑨원(孫文)의 사망)으로 장제스(蔣介石)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민국정부를 수립하고 군벌에 대한 평정을 단행함으로써 1928년 말에는 불완전하나마 중국 통일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며 소련의 주도하에 코민테른이 침투한다. 1943년 전후문제를 논한 '카이로선언'에서 중국은 대만의 복귀를 주장하고 1945년 '포츠담선언'으로 대만을 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게 되었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패주하였다.2.대만의 對 중국 정책 변화(1)장제스(蔣介石) 시대의 對 중국 정책(1949∼1978) -반공복국(反攻復國, 군사력을 통한 대륙 수복)(2)장징궈(蔣經國) 시대의 對 중국 정책(1979∼1988) -삼민주의에 의한 중국 통일 정책)(3)리덩후이(李登輝) 시대의 對중국 정책(1988~1999) -이전과 다른 대륙정책을 주도(4)국민당과 민진당의 對중국 정책의 차이(5)천수이볜(陳水扁) 시대의 對중국 정책(2000~2008)(6)마잉주(馬英九) 시대의 對중국 정책(2008~)3.중국의 對 대만 정책 변화(1)무력에 의한 대만해방정책(1949∼1955)(2) 무력자제 평화적 해방정책(1955 반둥회의)∼1978 중미수교)(3) 덩샤오핑(鄧小平) 이후의 통일정책(1979~)4.시기별 양안관계의 쇠퇴와 발전(1)군사적 충돌 단계(1949~1978)(2)평화 대치 단계(1979~1987)(3)민간 교류 단계(1987이후~)5.동북아 주변국들과 중국, 대만과의 관계 변화(1)한국(2)일본(3)미국Ⅲ.결론본론에서 언급했던 중국, 대만의 정책적 변화와 관계의 변화를 고려해본다면 중국의 평화적 일국이제(一國二制)정책의 지속적 추진은 대만의 독립 선포라는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지속될 듯하다. 하지만 대만의 여론은 ‘독립과 하나의 중국’으로 나뉜 상태로서 향후 두 가지 상황이 모두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친 중국적인 국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더욱더 친밀해질 것이라고 예측된다. 양국이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입장의 차이가 아직도 매우 크지만 민간, 경제적 교류는 더욱 확대될 것이고 이는 제도화될 것이 분명하다. 중국은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대만을 홍콩과 같이 특별자치구형식으로 흡수하려 노력할 것이고 대만은 중국과의 무역, 인적교류 등의 확대를 국가성장 동력으로 삼아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고자 할 것이다. 국외적으로는 양안관계의 발전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 없는 미국과 일본은 경계를 하며 중국과 대만사이를 견제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중립적 입장을 표방하거나 암묵적으로 미국에 동조할 것으로 예상한다. 반대로 민진당, 혹은 반 중국적인 정권이 수립된다면 대만은 미국, 일본 등 전통적 우방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중국과는 일정 수준의 거리를 둘 것이라 예상이 된다. 만약 대만이 국제적으로 독립을 선포한다면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될 것이며 중국의 무력침공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국제전 여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국이 자국의 국내법인 ‘대만 관계법’)에 따라 전쟁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개입할 것이 명백하다. 미국이 개입한다면 미국의 최우방국인 일본에 영향을 끼칠 것이며 한국도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따라서 대만과 중국의 관계악화 혹은 전쟁발발은 동북아 안보에 큰 변화와 위험을 동시에 수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