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지*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6
검색어 입력폼
  • 조선후기신분제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목차Ⅰ.서론Ⅱ.양반층의 증가와 분화Ⅲ.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Ⅳ.서민층의 성장Ⅴ.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Ⅵ.맺음말서론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란 간단히 조선 후기에 들어 봉건적 신분체제가 무너지면서 신분 사이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전통적인 신분구별이 약화되어가는 현상을 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조선후기 사회변화는 신분구조에 큰 영향을 주어 조선초기에 설정된 신분법제는 실제상에 있어서는 거의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18,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은 신분구조의 변동을 가속화시켰고, 호적과 양안을 자료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양상은 크게 양반층의 증가와 노비의 감소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신분변동의 전개양상을 양반과 중인, 서민, 노비계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양반층의 증가와 분화1) 양반 인구의 증가조선 후기 양반층의 급증현상은 유학(幼學)의 수적 급증에 의한 것이었다. 우선 유학은 양반지배층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직역이었으므로 양반사족층은 유학을 재생산함으로써 유학이 급증하였다. 다음으로 서얼 후손의 유학 호칭이 있다. 17세기 말 업유(業儒)?업무(業武)가 서얼의 문?무를 지칭하게 된 이후 서얼의 후손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왕명에 의하여 유학 호칭이 합법화되었다. 또한 유역 하층민의 모칭유학은 18세기를 거쳐 19세기로 오면서 유학층 증가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모칭유학이 증가하게 된 데는 신분직역제를 바탕으로 운영된 군역제의 동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조선 후기 양역화된 군역은 유역 하층민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가중하게 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천한 역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곧 유역 하층민이 군역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피역현상을 유발하게 하였고, 피역하는 최선의 방법은 신분을 변동시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학을 모칭하여 양반신분으로 변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양정(良丁) 확보와 관련하여 모칭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역 지도 사실상 군역에서 면제되는 존재로 합법화되었다. 상민들의 피역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먼저 각급 관청에 투속하여 유학?업유 등을 모칭함으로써 신분상승과 함께 피역을 도모하려 하였다. 18세기 초 민과 지방관청의 결탁으로 설치된 계방)이 있었는데, 18세기 중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촌락 전체가 사적으로 지방관청에 사속하는 계방촌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호적에서 빠져나가 한유하기도 하였고 신분을 격하시켜 사천이 됨으로써 피역하기도 하였다. 각종 재원확보를 위해 시행하였던 납속정책에 따라 납속품직을 취득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3) 양반계층의 분화임진왜란 이후 정부는 향촌사회 하부구조에까지 직접 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수령권에 대응하는 재향사족들의 자치기구였던 유향소는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이들 재향사족은 점차 유향사족을 떠나 서원과 향교를 근거로 결집하게 되고, 유향소는 수령에 의하여 그들이 차대하던 서얼?평민 출신의 양반과 일부 잔류 향반들로 메워지게 되었다. 이를 '유향분기'라 한다. 이는 서원?향교로 결집한 양반과 새로이 유향소를 근거로 결집한 양반 간의 차별화로 나타난다. 두 부류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구향(購鄕)-신향(新鄕), 원유(元儒)-별유(別儒), 사족(士族)-향족(鄕族)?향품(鄕品)이 있다. 그런데 구향이 서원과 향교 등을 바탕으로 향론을 주도하고 교화를 담당하면서 향촌사회의 운영권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데 대하여, 신향은 유향소를 근거로 부세를 관장하고 수령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의 권익과 지위를 한층 증대하려하였다. 따라서 이들간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이는 향전(鄕戰)의 이름으로 나타났다.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1) 중인층의 지위상승과 분화조선 전기에 간혹 의관 같은 중인들을 공로에 따라서 수령 등에 임명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오면 그 수가 증가하였고, 역관?화원 출신들의 수령도 나타나게 되었다. 화원의 경우 임금의 초상의 그린 공로로써 특별한 은총에서타난다.2) 중인의 통청운동중인들의 신분상승운동을 각 부류별로 보면, 서얼들은 주로 정치운동 성격의 통청운동, 이서층은 문화운동 측면인 위항문학운동, 전문직 중인들은 경제적 상승운동 측면이 강했다. 여기서는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을 살펴보면 기술직 참여자 1,670여명은 철종이 경릉)에 행차하는 길에 올리려 상소문을 만들었다. 이는 중인의 현관(顯官) 채용이 막힌 것은 제도가 아니고 관습에 의한 것으로, 그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 직업이 세습되면서 중인이라는 칭호를 얻고, 사부(士夫)와 다르게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저지되고나 묵살되었는데, 서얼의 통청운동이 성공한 것과 비교된다. 그 이유로는 기술적 중인은 특수신분층으로 구성되어 정부가 이를 저지할 구실과 안정을 이루고 있었고, 중인층 자체 내의 무사안일주의 때문이었다.3) 향리층의 지위상승과 분화(1) 향리층의 분화조선시대 향리는 아전(衙前)?이서(吏胥)?인리(人吏) 등으로 불렸다. 지방 이서집단의 구성은 향리직의 최고위인 호장과 중앙의 6조조직을 모방하여 이?호?예?병?형?공방으로 직무를 분담관 기관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여기서도 이서집단은 삼공형(三公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삼공형 등의 중요한 직책은 특정한 향리집안이 독점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일부 집안이 향리직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향리직에서 벗어나 유학층으로의 상승을 꾀하는 경우가 많았다.(2) 향리층의 신분지위 상승운동향리들은 행정적인 실무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가운데 신분지위를 보장받으려 했다. 또한 향촌의 주도권이 구향에서 신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사회적 지위향상을 꾀하였다. 그들은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ㆍ경제적 성장을 토대로 소극적인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즉, 사적을 편찬하는 사업을 벌이거나 향손들을 과 상업적 농업의 발전, 경영방식의 변화 등을 통하여 농민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관장제 수공업체제가 무너지고 장인의 부역제가 점차 고용제로 바뀌게 되면서 공장들에게 사적 제조와 판매가 허락되었다. 자유수공업자로 전환하면서 이들은 사익을 축적해갔으며, 선대제적 수공업조직)이 성립하면서 장인은 사적 제조 및 판매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국가의 필요한 물품을 구매, 조달하는 ‘공인’은 서울의 시전과 지방의 장시에서 활발히 활동하였기 때문에 상품유통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달하게 되자 상업 활동을 하는 상인의 수가 증가하고 활동범위가 확대되었다. 또한 개경상인, 경강상인 등과 같은 활동의 규모와 범위가 큰 상인들은 중개무역, 밀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조선 후기는 농업·수공업·상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기였다.2) 서민의 신분상승 운동서민들의 신분상승 욕구와 더불어 당시 정부의 사회정책이 커다란 역할을 하여 서민들은 정부의 공인 또는 묵인 하에 신분상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16세기 이후가 되면 군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또는 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향교에 입학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향교의 생도인 ‘교생’이 되면 본인이 군역과 잡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손 또한 면역을 도모할 수 있었다. 국가는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한 재정궁핍을 보충할 목적으로 관직을 파는 납속제도를 실시하였다. 서민들은 납속책을 이용하여 국가권력구조 안에 포섭되어 사회적 지위향상을 꾀하였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호적의 개변이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서민들은 호적을 담당한 관리와 결탁하여 신분직역의 모록을 통하여 호적상의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또 몰락양반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족보에 끼어 들어가는 방법 등이 가능해져 재력 있는 서민층의 상당수가 신분상승을 이룩하였다.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1) 노비 존재양태의 변화조선시대의 노비는 그들의 사회경제적 존재양가운데 조선 전기에는 첫째와 둘째의 유형이 대종을 이루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셋째의 유형이 우세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경제적 변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노비들은 상전의 전답 이외에 자기 자신의 전답이나 제 3자의 전답을 경작하면서 점차 소유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점차 신분적으로만 예속되는 경향이 증가하였다.2) 노비정책의 전환공노비에 있어서 노비노동력의 동원이 선상)·입역에서 고립제(雇立制)로 이행되어 간 것은 대체로 인조 때를 전후하여 시작되어, 조선 후기에는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노비들은 선상·입역 자체가 고역이어서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이를 적극적으로 모면하려 하였고, 그것은 대립으로 나타났다. 선상·입역제는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많은 노비의 도망과 유산으로 유지가 힘들어졌으며, 17세기에는 사실상 전면 폐지되었다. 국가는 공노비에게 신공납부의 의무만을 지움으로써 생업에 전념케하여 농업생산력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이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신공을 비롯한 여러 재원을 동원하여 토지에서 유리된 무전농민들을 고용하여 노비의 일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했다. 공노비의 선상·입역이 폐지됨에 따라 이들은 이제 신공납부의 의무만을 지게 되는 납공노비로 바뀌었다. 신공은 1년에 奴는 면포 2필, 婢는 1필 반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영조 31년에 각각 반 필씩 감액된 뒤 영조 50년에는 비의 신공을 완전히 없앴다. 奴만이 良丁과 같이 1필의 신공을 바치게 되어 양인과 노비의 부담이 동일하게 되었다. 신공 감액조처는 공노비뿐만 아니라 사노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노비인구가 점차 격감하자 국가에서는 도망노비의 추쇄)를 실시하였다. 노비추쇄사업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 노력, 시간을 들여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경제적 변화에 수반하여 나타난 노비신분층의 동요현상은 법제적 장치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폭이 넓었던 것이다. 국가는 추쇄정책을 폐지하고 노비신분층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추인해 면천?속량의 길을 다.
    인문/어학| 2013.03.29| 6페이지| 1,500원| 조회(378)
    미리보기
  • 송대이치법
    송대 이치법 개혁 논의960년,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건국한 송나라는 전대 왕조인 당나라와는 다른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 중국역사에서는 이 총체적인 사회 문화의 변화기를 ‘당송 변혁기(唐宋 變革期)라고 한다. 그 중 정치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이전시대의 관리등용이 신분에 따른 음서제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과거제도가 관리 자격시험을 위한 제도였다면 송대의 과거제도는 관리 선발시험이었다. 과거제도의 정형화를 통해 사대부계층을 중심으로 한 문신관료제 사회를 형성해 세족과 서족의 구분을 완화하고 관리임명권을 황제가 장악해 황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그 부작용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형화된 과거제도에 따라 지속적으로 관리들이 늘어나게 되지만, 관직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면서 필요 이상의 관리들이 넘쳐나게 된다.(용관: 冗官)그리고 황권강화를 추진하기 위해 표방한 문치주의 정책은 국방력의 약화를 초래했고 또한 송나라는 기본적으로 모병제에,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모병하기도 했으니 이런 군대의 사기와 실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넘쳐나지만 무능한 병사들은 송나라가 북방 왕조들에 의해 굴복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제 서하, 거란, 여진, 몽골 등의 북방 왕조와 한족 왕조의 관계가 한족 왕조 중심의 군신관계에서 상호 대등관계로, 그리고 대등관계를 넘어 북방 왕조로의 종속 관계로 변화된 것이다.(용병: 冗兵)마지막으로는 용관과 용병의 문제에 기인한 재정소모이다. 송나라는 대외적으로는 북방 왕조들에게 세폐(歲幣)를 바치며 화친을 추구하면서 재정의 위기를 겪게 되고, 모병한 군인들의 식량과 물자를 국가에서 부담하면서 그 재정의 소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며, 넘쳐나는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의 액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러한 재정의 소모는 국가에 위기를 가져온다. (용비: 冗費)이러한 삼용(三冗)의 폐단은 북송사회 약화의 근본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인종(仁宗: 1010~1063)때 사회의 모순으로 격화되었다. 현실 정책을 책임지는 사대부들은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대해 스스로의 책임과 반성 및 각성을 촉구하게 된다. 이것은 관리등용법과 그 운용에 대한 개혁으로 나타났다. 북송시기 과거제도에 대한 개혁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고시방법의 개혁을 통해 공평한 경쟁원칙을 제창하였다. 둘째 단계는 과거 고시 내용과 취사과목의 개혁이다. 이는 송대 현실 정치 문제와 결부되어 필요한 인재육성과 선발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 등장이 배경이 되었다. 즉 송대는 사대부계층의 정치의식이 고취되어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어 현실정치의 참여와 누적된 사회폐단에 대한 개혁논의가 제창되었다. 특히 관리등용법과 이치법 운용에 대한 개혁이 당시 관료계층의 공통된 관심이었다. 이러한 개혁론에는 대표적으로 인종 대의 범중엄과 신종대의 왕안석, 소식, 사마광, 구양수 등과 같은 관료계층의 이치법 개혁이었다.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이치법 개혁1067년 신종이 즉위하자 왕안석은 1068년에 수도 개봉부에 돌아와 한림학사(翰林學士: 조칙 기초관)로 임명된다. 이 때 그는 신종과 대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논하며 신종의 존경을 받게 되고, 마침내 개혁에 대한 신종의 지지를 이끌어낸다.신종 희령(熙寧) 2년인 1069년 신종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 현재의 재정 계획 심의 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를 왕안석으로 삼아, 이곳을 개혁의 핵심 기관으로 삼았다. 왕안석은 변법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 문교개혁안과 함께 과거고시제도 개혁안을 제창하였다. 그는 이미 인종 가우(嘉祐) 4년(1059)에 개혁 방안을 제기 하였는데 당시 과거가 문학능력 위주로 시행되는 것으로부터 학교교육을 통해 현실 정치에 필요한 인재양성과 등용을 주장하였다. 그 중 태학삼사법은 희령 4년인 1071년 10월에 실시된 문교 개혁안이다. 태학의 과정을 셋으로 나누고자 하는 이 제도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인재양성의 목적, 이차적으로는 관리선발과 관리 양성의 제도적 통일을 위한 것이다.태학(太學)이란 오늘날의 중앙 국립대를 일컫는 말이고, 삼사(三舍)란 태학의 과정을 외사(外舍: 교양 과정), 내사(內舍: 전문 과정), 상사(上舍: 대학원)의 3단계로 나누는 것이다.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기시험의 성적과 덕행이 그 기준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과거를 통과하지 않고도 곧바로 관리로 나아갈 수 있게 했다.이러한 학교 제도의 개혁은 일차적으로 인재양성의 목적, 이차적으로 관리의 선발과 관리 양성의 제도적 통일을, 최종적으로는 과거를 폐지하고 학교교육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왕안석 교육개혁안의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태학삼사법은 이를 위한 과도기였다.왕안석도 범중엄의 개혁방안과 마찬가지로 학문과 덕행을 동시에 중요시하며 관리등용법의 구체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첫째, 과거는 진사과만 설치해 명경, 제과의 인원을 진사과에 증원하자고 하여 진사과 중시풍조를 가져왔다. 진사과 외의 명경과와 제과의 폐지는 ‘현실’을 중시하는 왕안석의 시각이 담겨있었다. 왕안석은 단순히 경전의 암기를 중시하는 명경과나 기타 제과를 통해 선발된 인재들은 현실정책을 취급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를 못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현실 정책에 중점을 두는 ‘진사과’ 하나를 남겨두게 되는데, 과거시험에서 진사과 하나만 남겨두는 방식은 명, 청대에 까지 이어지게 된다. 둘째, 시험방법에 대한 개혁으로 문학적 재능 위주의 시험인 시부와 첩경위주의 시험에서 경의와 논책 위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셋째, [삼경신의]와 [자설]을 통해 학교교육과 과거를 통제하였다.왕안석의 개혁은 신종의 옹호 하에 계속되었지만 결국 거센 반발에 부딪혔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과거 인종 대에 개혁을 지지하던 구양수와 소식, 사마광 등이다. 계속되는 반대와 천재지변으로 인해 왕안석은 1073년 일시 사퇴한다. 이후 1075년에 일시적으로 재상직에 복귀하게 되지만 다음 해인 1076년, 그의 장남인 방(?)이 33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 해 10월에 사퇴, 고향에서 생애를 보낸다.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이치법 개혁범중엄은 송 인종 경력(慶歷)3년 (1043) 누적된 폐단에 대해 사대부의 각성론과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과거제도와 이치법 개혁을 제창하였다. 그는「답수조조진십사」의 상소를 통해 정치·경제·사회 등 전 분야에 대한 개혁을 건의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정공거, 명출척, 억요행, 택장관에서 관리선발 방법과 이치법 개혁이 잘 나타나 있다.정공거는 문교개혁안으로 과거고시의 개혁이다. 시험방법에서 책론을 위주로 한「선책론후시부」를 제창한 것으로 취사의 기준을 품행과 이력을 조사한 후 학문과 재주를 시험치루도록 하는 등 실무능력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 주현에 학교 설립을 제창하고 과거 응시자들은 3백일 이상 수학하도록 하여 학교교육 강화를 주장했다. 그는 관리의 기본 조건으로 덕행과 학문을 동시에 중시해 부패한 관료로 인한 폐단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명출척은 관리에 대한 인사고과제도인 마감제도에 대한 개혁이다. 당시 시행되었던 송의 마감제도는 직무의 능률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자와 우자가 함께 존재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관리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계획과 추진에 소홀하고 사회의 폐단에 대한 개혁도 시도하지 않는 등 관리기강의 폐단이 속출하게 되었다. 범중엄은 이에 관리의 엄격한 평가를 통해 상과 벌을 명확히 하고 뛰어난 관리에 대해 관례에 의하지 않고 특진하도록 해 관리의 업무의욕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업적에 대한 평가를 위해 이부에서 실시하고 황제가 최후 결정하도록 하는 관리에 대한 추천보증제도를 실시 제창하였다. 즉 폭넓은 인재 확보를 위해 국자감과 지방장관들에게 능력 있는 인재를 추천하도록 한 제도였다.억요행은 마감제도의 폐단과 은음제도의 남발에 대한 개혁이다. 은음제도는 고위 관직의 자제들이 은음으로 관리에 진출한 결과 현자와 우자가 함께 존재하고 이에 따라 용관의 문제점과 함께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이에 범중엄은 은음혜택의 방법과 범위를 제한하고 일정한 시험을 치루도록 하였다. 이는 권문세가들의 관리 독점을 개혁해 실무정치능력을 가진 인재들을 등용하고자 한 것이다.택장관은 범중엄의 정치개혁에서 중요한 관건이 되는 문제로 백성의 실제생활과 관계 있는 지방장관에 대한 이치정돈이다.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고자 지방정치의 부패가 백성들의 원성과 반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지적하며 지방장관의 선발을 엄격히 하였다. 이에 능력 있는 관리를 선발하고 기강을 확립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첫째 지방장관에 대한 안찰을 강화하는 엄격한 상벌제도를 시행하자. 둘째 중서성과 추밀원에서 공동으로 현임 지방관원들에 대해 인사고과를 시행해 탐욕스럽고 재주 없는 자를 파면시키고 지주와 통판이 추천된 사람들도 엄격한 심사를 통해 실무능력을 가진 인재를 보증 추천해 반란의 원인을 제거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하게 하도록 하였다.
    인문/어학| 2013.03.29| 4페이지| 1,000원| 조회(223)
    미리보기
  • 송대과거제도
    송대 과거제도의 변천과정과 그 특징과거제도란, 관리 임용을 위하여 국가에서 실시하던 시험이다. '과거'란 과목에 따라 선비를 등용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과목이라 함은 시험 과목이 아니라 시험의 종류를 의미한다.과거제 이전의 선거제도는 주의 세경세록, 진의 인공수관, 양한시대의 대표적 선거제도인 향거리선제와 삼국 魏에서 남북조를 거쳐 수 초까지 행해진 구품관인법이 있다.과거제 이전의 제도인 구품중정법는 재야의 현명한 사람들을 지방 장관에게 추천시켜 그 내신에 기초하여 조정의 시험을 거쳐서 선발하는 방침이었지만 사실상 지방의 강한 호족들이 중앙정부에 미치는 권한이 강력하여 정?관계에 있어 마치 호족들의 자위제도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한 호족들 중심의 임용제도에서 시험을 통한 선발을 이루게 된 것은 호족에 대한 천자의 실권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신분과 가문에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을 취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 대응해 응시도 자발적이고 자유로웠으며, 호족 등 유력자의 중개가 없이도 가능했다. 이는 호족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하려는, 보다 개별적인 세력, 즉 과거를 통해 권력을 얻게 된 사대부 세력이 대두해 온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수당의 과거도 과거제 이전의 제도이던 구품중정법과 마찬가지로 방침과 현실이 다르다. 방침은 천자 권력의 절대성과 인민의 권력참여의 기회균등에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귀족적 호족의 강한 견제가 있었다. 물론 과거에 비해 많이 황제권이 강화되었긴 하였으나 아직 호족 세력을 억제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현종 개원24년까지는 시험과 임관 모두, 이후에는 시험이 예부로 이관되어 임관을 맡은 이부는 당대 호족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이에 의해 과거제의 방침은 왜곡되고 천자의 권력은 다시 호족 관료군에 의해 좌우되는 점이 늘어났다. 그러나 빈번한 士가 시험에 대한 청탁이나 부정행위에 광분하여 폐해가 생기고 여러 종류의 금지령도 발표되었다는 것은 중간적 권력이 되는 호족 계층을 무너뜨리려는 아래로부터의 힘이 증대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과거제의 방침에 담겨있는 황제의 중앙 집중 지향적인 권력의 하부계층에 대한 침투에 있어서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은 근본적 한계로 이들 새로운 士계층이 실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초기부터 세력 있는 호족의 자제에게는 가문에 따라 임관의 자격이 부여되는 임자의 제도가 있었으며 이는 유력한 출세길로 작용했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세력은 점차 성장하게 되어 광범위한 인민반란에 의해 호족의 지배권이 상실?붕괴되고 당말 오대의 군벌, 할거 하극상의 만연 등의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의 과거제 종류에는 수도에서 시험을 보는 생도, 지방에서 시험 보는 향공, 그리고 황제가 직접 시험을 치르는 제거가 있었다. 생도는 시험을 통하여 관리로 등용된 관립 졸업생을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중기 이후 생도가 차츰 줄어들게 되면서 향공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향공은 독학하거나 민간서당에서 공부한 각 지역의 사인이었다. 과거의 시험 과목은 정책적 안목과 책론을 보는 수재과, 시문 능력을 보는 진사과, 경서의 지식과 이의 암송을 보는 명경과 등이 있었고 수재과나 명경과보다는 진사과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과거 시험 과정은 1차는 생도와 향공, 즉 예부를 보았고 이는 매년 정월에 시행되었다. 또한 불규칙적으로 제거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예부를 통과하면 신, 언, 서, 판을 보는 이부를 보았는데, 이는 가문의 덕이 있어야 통과가능해서 귀족 중심적이 되었다. 따라서 당의 과거제도는 귀족 자제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구조였고, 더불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부의 은음 및 기타 경로로 임관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과거 시험 자체도 관리 후보 자격 시험에 지나지 않아, 의미뿐인 경우도 많았다.송대에 와서 송 태조는 신진관료를 중용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집권적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였다. 태조의 이러한 작업은 과거제도에도 드러나, 스스로 관료의 선발에 직접 간학하려 했던 결과 그는 전시제를 만들었다. 당대의 이부시가 송대에 와서 전시로 바뀌면서 과거시험은 황제가 직접 통제하는 국가기관시험으로 그 위상이 강화되었다. 전시는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로서, 황제가 응시생의 등급을 친히 결정하는 것이다. 황제는 전시에서 과거합격자를 시험하여 이들의 석차를 친히 결정하였다. 여기에서 불합격자는 없었다. 전시의 성적은 관료의 초임과 승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전시는 신임 관료가 황제에게 충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전시를 통해서 귀족자제의 승진을 억제할 수도 있었다.북송시대의 과거제도는 당대 과거에 비해 많은 진보를 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전체적인 환경과 조건은 당대 과거제도의 심각한 소극성을 탈피할 수 없게 하였다. 송대는 文을 중시하고 武를 경시하였으며 과거를 확대하여 사인들은 經?史를 골고루 읽었고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육경?孔?盟을 지칭하였다.한편 송대의 과거에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제도적 장치가 도입되었다. 전시는 물론 해시에 이르기까지 봉미법과 호명법, 등록법이 정착되었다. 호명법은 답안지 상단에 적힌 응시생의 이름과 관적, 가문 등의 기록을 가려서 시험관이 이것을 볼 수 없게 한 것이다. 따라서 시험관은 응시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 답안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등록법은 등록원을 설치하여 전담자가 모든 답안지를 옮겨 적어 채점하게 한 것이다. 이로써 필체의 차이가 사라져 필적에 의한 부정을 막을 수 있었다. 시험관의 문제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쇄원 제도, 또한 별두시라는 특별시험 역시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준다. 별두시는 시험관과 고시생에 혈연적 관계가 있을 경우 이들을 분리시키는 제도이다.이러한 제도들은 과거제 시행의 본래의 목적을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으며, 이러한 공정성의 확보로 인해 신분?지위에 관계없이 과거에 의한 계층 이동이 매우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또한 과거 응시자들의 증가는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관료가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특히 과거합격자는 최상의 영광과 함께 승진에서 우대를 보장받았다. 더구나 이러한 과거제도는 처음에는 소수의 관료만 선출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어왔으나, 송대부터는 보다 많은 관료를 채용하는 중요한 절차로 자리매김하였고, 관리선발방법 중 가장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송나라 때에는 3년에 한 번 과거시험을 치르는 삼년일공제를 실시했다. 이 시험은 3단계로 실시되었다. 해시는 1차 시험으로서, 지방이나 국자감에서 실시하는 시험이다. 해시는 2차 시험으로서, 중앙의 예부에서 해시에 합격한 응시생을 시험하는 것이다. 전시는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로서, 황제가 응시생의 등급을 친히 결정하는 것이다.
    사회과학| 2013.03.29| 3페이지| 1,000원| 조회(217)
    미리보기
  • 경제학개론 거시
    y: 국민소득p: 물가 (price level)N: 고용, 노동시장R: 이자율 (interest rate)e: 환율 (exchange rate)23.국민소득의 측정 (거기 경제 개관)?23.1 경제전체의 소득과 지출?23.2 국내총생산의 계산?23.3 GDP 의 구성항목?23.4 실질 GDP 와 명목 GDP?23.5 GDP 는 경제적 후생의 좋은 지표인가?23장 학습목표?국민경제의 및 거시경제의 전반적 흐름을 파악한다.?국내 총생산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산하는지 배운다.?GDP의 구성요소를 이해한다.?실질GDP와 명목GDP의 구분을 배운다.?GDP는 경제적 복지의 좋은 잣대인지 생각해 본다.?거시경제 분야에 관한 이론의 줄기를 파악한다.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로 크게 나뉨두 개의 학파 전통이 이어져 통화주의 신케인즈안 신고전파 합리적 기대 학파 등 이론의 줄기가 존재함미시경제학의 일관된 이론과는 달리 거시경제학은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경제현상 분석이 상당히 차이가 남학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제현상과 정책처방에 대해서 확실히 구분을 지을줄 알아야함학파관에 이론적인 구성과 이론적인 대비를 정리를 해야함거시경제학의 정의와 주요질문?정의: 국가 경제의 관점에서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이론 체계. 국민소득, 물가, 고용, 이자율, 환율, 투자(investment), 저축(saving), 소비(consuption) 등 국민경제 전반의 통계량을 토대로 하여 경제순환의 동태를 포착함으로써 경기변동이나 경제성장의 규칙성을 분석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거시경제학의 주요 질문?왜 어떤 나라는 부유하게 살고 있으며, 어떤 나라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왜 어떤 나라에서는 높은 인플레이션 현상이 계속되는데 비해, 어떤 나라의 물가는 안정되고 있는가??왜 모든 나라들은 경기후퇴와 불황을 경험하게 되는가??주요 변수: y, p, N, r, e(국민소득,물가,고용,이자율,환율).정부 (government expenditure) : tax(세금)을 받아서 지출을 함.해외이 악화되면 실질GDI는 하락수출가격이 상승하거나 수입가격이 하락하여 교역 조건이 개선되면 실질GDI는 상승국민소득계정과항등식Ø국민소득계정상의 항등식생산국민소득≡지출국민소득※ C : 소비, I : 투자, G : 정부지출, X : 수출, Q : 수입국민소득계정과 항등식Ø가처분소득의 정의식※YD : 가처분소득(disposable income: DI)?? T : 조세, TR : 이전지출Ø가처분소득의 처분?가처분소득은 소비(C)와 저축(S)의 형태로만 처분됨국민소득계정과 항등식Ø?저축과 투자?국내투자의 재원은 가계, 기업, 정부 등에 의한 국민저축이나 해외부문에 의한 해외저축으로부터 충당되어야 함국민소득계정과 항등식수요측면에서 살펴보면 Y(국민소득은)1. Y = C + I + G + X - Q2. Y = YD + T - TR3. Y = C + S + T - TR (YD = C + S)미시경제학은 200여년 이상 세월을 거듭하면서 매우 정교한 형태로 발전된 반면에, 거시경제학은 어떠한 정책을 보는 그리고 경제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상당한 학파간의 차이를 가지면서 발전을 해오고 있고, 또한 거시경제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930년대 이후가 된다. 그 이전까지는 고전학파의 경제학의 시각에서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커다른 분할을 경험하지 않았다. 사실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케인즈라는 경제학자가 1929년에 세계대공황을 경험하면서 과연 이 공황의 원인이 무엇이며 이 공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중요한 이론을 체계화해서 발표하게 된다. 그것이 1936년에 나온 케인즈의 일반이론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이전, 즉 1936년 일반이론이 나오게 된 이전의 모든 이론은 고전이론이다 라고 표현하고 고전학파의 이론이라고 칭하였다. 그래서 고전학파의 이야기가 경제학에서 널리 회자되게 된다. 이때부터 케인즈 학파의 시각과 기존의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소위 고전학파는 장바아티스트 Say?????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인“공급은 스스로 그 수요를 창출한다”..그림 24.2 두 가지 인플레이션 지표인플레이션 효과의 조정?경제 전체의 전반적인 물가수준을 측정하는 목적은 서로 다른 시점의 화폐가치를 비교할 수 있게 하려는데 있다.?Babe Ruth가 1931년 받았던 연봉 8만 달러는 2005년 기준으로 얼마나 될까??T년의 달러금액을 오늘날의 달러금액으로 환산하는 공식은,서로 다른 시점의 금액비교? Babe Ruth’의 1931년 임금을 2005년? 임금으로 환산해보면,Table 24.2 물가상승을 감안한 역대인기순위 영화10걸물가연동제(indexation)? 물가연동제: 법률이나 계약에 의해 자동적으로 인플레이션 효과를 조정하는 것.? 대표적 사례- COLA (cost-of-living allowance): 노동조합의 장기고용계약에서 임금을 소비자물가에 100%, 혹은 부분적으로 연동시키는 제도. 소비자물가가 상승할 때 임금이 자동적으로 인상됨.- 노인에게 지급되는 사회보장급여에 대한 물가연동.* COLA : 생계 보조금* (w/p) p가 상승하면 실질임금이 하락 -> 노동자들은 노동의 공급을 명목임금 기준으로 하게 된다(화폐환상) -> 단기적으로 볼 때는 기업에게 유리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노동의 수요가 높아진다 하더라도 결국 실질임금의 하락으로 구매력의 하락 -> 결국 경기 후퇴 ->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기업가에게 돌아감.임금의 하락이나 고정시켜서 국민경제를 향상 시키겠다는 아이디어는 위험한 사고이다. 구매력의 하락, 경기 후퇴로 인에 부메랑이 되어 국민경제에 타격을 입힌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가계라는 것은 노동공급의 주체이자 소비의 주체라는 이중성을 가지기 때문이다.명목이자율과 실질이자율? 이자율: 금전거래에 대한 미래의 보상이므로, 항상 서로 다른 시점의 금액을 비교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가상승률이 높을수록 개인의 구매력증가율은 하락한다.?? 명목이자율(nominal interest rate) :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여 조정하지 않은(not corrected for inflation)이자율Y = C + I + G국민계정에서 소득과 저축Y = C + I + G 라는 항등식이 금융시장에 관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기 위해 양변에서 C와 G를 빼면 다음과 같다.Y - C - G = I여기서 Y - C - G 는? 경제의 총소득 중에서 소비와 정부구입에 지출하고 남은 금액,즉 국민저축(national saving)이다.국민저축을 S로 표시하면, S = I 가 성립된다.위에서 S= Y - C - G 이고, 이는 다시S = (Y - T - C) + (T - G)로 나타낼 수 있다(여기서, T = 조세 ? 이전지출, 즉 純租稅 순조세)S = (Y - T - C) + (T - G)에서국민저축(S)는? 민간저축 (Y - T - C)과 정부저축 (T - G) 의 두 항목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민간저축과 정부저축? 민간저축(private saving, Y - T- C): 가계소득에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소비에 지출한 다음에 남은 금액? 정부저축(public saving, T - G): 정부의 조세수입 중에서?정부지출을 빼고 남은 금액.? 재정흑자(budget surplus):정부수입이 정부지출을 초과하는 금액 (Fiscal surplus)? 재정적자(budget deficit):정부수입이 정부지출에 미달하는 금액 (Fiscal deficit)S = I 항등식과 금융시장의 역할? S = I? 항등식: 경제전체로 보아, 저축은 반드시 투자와 같아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사람들이 얼마나 저축하고, 얼마나 투자 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을 조정해주는 것이 바로 금융시장 이다.? S = I 항등식의 배후에는 채권시장, 주식시장, 은행, mutual fund, 기타 금융시장 및 금융 중개기관이 있어서 국민경제의 저축을 투자로 연결해준다.* 저축과 투자를 연결시켜주는 매개고리이다. 현재와 미래의 시장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다른 시장과는 달리 금융시장만의 특색이다.저축과 투자의 의미? (질문) 어떤 사람이 벌어들인 소득이 지출보다 많아서, 쓰고 남은 유는 경기가 침체되기 때문에 실업이 존재한다.경기침체 -> 노동 수요가 하락 -> 노동시장에 있어서 초과노동공급 발생 -> 실업 ->* 실업을 없애기 위해 경기를 진작(자극)시켜야 한다. 2가지 방법이 있는데,1. 확대적 재정.금융정책을 사용해야 한다.예를 들면 화폐량을 늘려서 화폐의 공급(Ms)을 늘리면 -> 물가상승 -> 생산을 늘리려고 함 -> 노동의 수요를 자극해서 -> 실업이 감소된다.2. 정부지출 증가 -> 경기자극 -> 고용증가* 그런데 경기를 자극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물가의 상승현상이 생긴다. 그래서 실업을 낮추려면 물가를 어느정도 높일 수 밖에 없다. 실업을 낮추려면 경기의 자극정책을 써야 되고, 자극 정책을 쓰려다 보니 물가가 높아진다.그래서 실업과 물가의 관계는 상충관계에 있다고 한다. 실업과 물가라는 토끼를 동시에 잡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가지게 되는 상충관계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필립스라는 사람이 최초로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론을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관한 상충관계, 실업과 인플레이션에 관한 필립스의 곡선이론이라고 얘기한다.제 10부. 화폐와 물가의 장기적 관계(Money and Prices in the Long Run)* 거시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어떠한 현상이 장기적인지 단기적인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경기 주체가 장기적인 흐름에 따라 실제와 맞아 떨어져간다. 즉, 기대가 적응적 기대를 통해서 실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습득해가면서 현실경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해 가는 과정을 장기라 보고, 단기에서는 경제의 주체들은 경제의 정보에 상대적으로 둔감하기 때문에 정확한 경제적 대처를 못하게 된다. 그래서 장기적인 이론은 주로 고전학파의 이론을 틀을 이용해서 분석하고, 단기적인 문제는 케인즈 학파가 개발한 이론의 틀에 의해서 분석을 한다. 10부에서는 장기적, 12부에서는 단기적인 관계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금번 장은 화폐와 물가의 장기적인 관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화폐제도에 대해서 된다.
    경영/경제| 2013.03.29| 65페이지| 3,500원| 조회(353)
    미리보기
  • 고려시대 최영
    최 영최영의 출생최영은 고려시대의 명문집안인 철원최씨) 집안 출신으로 충숙왕 3년(1316)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직계선조들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최영의 나이 16세 때 일찍 죽었다. 이때 아버지가 남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는 유훈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한다. 이후 최영은 본래 대표적인 문신집안이면서도 과거 등을 통하여 입신하지 않고 남보다 뛰어난 완력을 바탕으로 무장의 길을 걸었다.무장이 출세하는 사회고려후기는 몽골과 오랜 전쟁 끝에 강화를 맺고 이후 원의 간섭을 받았다. 따라 고려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고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몽고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의 반란으로 중국대륙이 혼란해지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공민왕 3년(1354) 원나라의 군사지원 요청에 의한 무장들의 중국에서의 활약은 자연스럽게 무장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 뒤 공민왕 5년(1356)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몰아낼 때에도 이들 무장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무엇보다 홍건적의 침입과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은 무장의 정치적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 최영은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하였고, 최고 지휘자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무장으로서 최영의 활약최영은 처음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 있으면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공민왕 원년(1352)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호군(護軍))으로 출세하였고, 공민왕 3년에는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357년에는 4백 여척의 왜선을 궤멸시키고 토벌했다.당시 원나라에는 한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중 한족반란의 선봉이 되었던 홍건적 한 무리가 원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고 고려 쪽으로 들어와 노략질을 자행하였는데 이것을 홍건적의 침입이라고 한다. 홍건적은 두 번에 걸쳐 침입했는데 머리에 붉은 수건을 동여매서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때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인물이 최영이다. 최영은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적을 무찔렀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개경까지 함락당하여, 공민왕이 복주(福州:현재의 안동)까지 피난 갈 정도로 피해가 컸다. 최영은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경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어 공민왕으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전리판서에 올랐다.1363년에는 공민왕을 시해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이듬해에는 그동안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에 반기를 들어온 최유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그는 이 공으로 진충분의좌명공신이 되었고, 뒤이어 판밀직사사 평리를 거쳐 찬성사에 올랐다. 이처럼 국외 세력의 외침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최영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것을 포함하여 몇 차례 중요한 공을 세워 공민왕 14년(1365)경에 이미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고,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그 때문에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재개할 때에 6년여 동안 좌천)되기도 했다. 그 후 1371년, 신돈이 공민왕의 총애를 잃고 반역을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후에야 최영은 문하찬성사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어 1373년 육도순찰사에 임명된 최영은 장수와 수령의 승진과 퇴직은 물론 군적을 작성하고 전함을 건조하며 죄인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때 최영은 70세 이상된 사람에게 품계에 따라 쌀을 거두어 군수에 보충하게 했는데, 이에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이를 빌미로 1374년 최영이 경상도, 전라도, 양광도 도순문사에 임명되자 사헌부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최영은 "소신이 성심을 다해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왔는데, 이제 이와 같이 비방을 듣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소신의 관직을 파면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며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공민왕은 최영을 정직하게 여겼으나 대간과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최영을 대신할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최영을 논박한 대사헌 김속명을 파면시키고 지평 최원유를 연안부사로 좌천시켰으며, 최영에게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칭호를 내렸다.우왕대에 들어와서 최영은 무장의 대표역할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당대 국가의 큰 골칫거리인 왜구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왜구라는 말은 일본해적을 가리키는 말로 특히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지속적이고 그 피해가 컸다. 그들은 고려의 수도까지 위협하여 정부에서는 계엄을 선포하기도 하였으며 수도인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최영은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최영이 왜구에게 거둔 승리중에서는 지금의 충남지역인 홍산에서의 전투가 유명하다. 최영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홍산에 이르러 보니 먼저 도착해 높은 고지를 선점한 왜구들은 험하고 좁은 곳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삼면이 모두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여러 장수들은 겁이 나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영이 61세의 노구를 이끌어 앞장서서 돌격하였다. 이때 왜구의 화살이 최영의 입술에 맞아 피가 흘렀지만 그는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적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화살을 뽑고 더욱 세차게 싸워서 적을 거의 섬멸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부터 왜구들은 최영을 '백발장군 최만호')라 부르며 크게 두려워했고, 고려군 진영에 최영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곧바로 물러갔다고 한다.이인임의 득세와 실각고려의 명실상부한 명장으로 우뚝 선 최영은 내정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1374년 우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우왕 옹립의 기수역을 자임했던 이인임은 공민왕대와 우왕대를 누빈 절대권력자였다. 우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데다 이인임의 강력한 비호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에 별로 뜻을 두지 않았다.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은 이인임은 충신들을 다 몰아내고 자기 일파를 중외의 요직에 고루 배치시키고 매관매작도 일삼았다. 이인임 일파는 자기들 마음껏 권세를 부리고 횡포를 일삼았다. 결국 이인임을 비롯한 그 일파들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최영은 1388년 문하시중에 올라 군사를 동원하여 이인임을 체포하여 경산부(성주)로 귀양 보내었다. 또한 우왕의 밀령을 받아 부정부패를 일삼던 염흥방과 임견미 일당을 숙청했다. 그 해 그의 딸이 우왕의 비가 되었다. 이처럼 우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최영은 내정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해 나갔다.이루지 못한 요동정벌의 꿈공민왕의 죽음을 전후로 고려와 북원· 명의 삼각관계는 매우 복잡 미묘하게 전개되었다. 1369년 명 태조가 칭제와 건국사실을 알려오자 고려는 사대의 예를 취하며 친명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몽고로 쫓겨간 북원이 여전히 그 명맥을 보존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고려는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적당히 양다리 외교를 펼치며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한편 이인임이 실각하자 이번에는 최영과 이성계가 대표하는 2대 군벌이 맞섰다. 명문거족의 후예인 최영은 구세력을 대표하였고, 이성계 또한 중앙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는 않으나 최영에 못지 않게 여러 번 전공을 세우면서 신흥 군벌로 부상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무렵 중국 본토를 차지한 명나라는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 땅이었으니 이를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조처가 날라들었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로, 명나라는 이 지역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이다. 명의 철령위와 역참 설치는 앞으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이후 명이 보낸 요동백호 왕득명(王得明)이 철령위 설치를 정식 통보했다.철령 이북은 고려 영토였는데 반란으로 인해 원나라 영토가 된 곳이고, 앞서도 공민왕 때 수복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려조정은 명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최영은 철령 이북의 영토를 결코 명나라에 내줄 수가 없다는 입장을 갖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요동 정벌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왕 14년(1388) 우왕은 최영과 함께 봉주(鳳州)에 가서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의 결심을 밝혔다. 그러자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면서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하지만 최영은 원정 강행을 고집했고 우왕도 마음을 굳혔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원정군을 총지휘하게 하고 그 아래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4만여명의 정벌군을 출정시켰다. 드디어 정벌군이 서경을 떠나 요동을 향하게 되었는데 우왕은 최영을 파견하지 않고 곁에 두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끄는 정벌군이 위화도에 닿았을 때 갑자기 큰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 사망자가 많아졌다. 결국 요동 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조정에 회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회군요청을 묵살하고 최영에게도 회군요청을 보냈으나 역시 진군 명령뿐이었다. 결국 1388년 5월 이성계와 조민수는 여러 장수들의 뜻을 모아 마침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진군하였다.최영의 죽음과 우왕의 폐위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하였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우왕과 함께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군심을 얻은 이성계에게 민심도 따라왔다. 오랜전란과 권신, 토호의 가렴주구에 지친 백성들에게는 최영의 정명론이 허황되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문/어학| 2013.03.29| 4페이지| 1,500원| 조회(391)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5:46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