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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 3차 공세 모택동의 정치적 의도와 팽덕회의 군사적 목적이 상충 클라우비츠 이론으로 분석
    중공군(中共軍) 3차 공세시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모택동))의 정치(政治)적 의도와 팽덕회(펑떠화이)의 군사(軍事)적 목적이 상충될 때 그 관계를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을 토대로 분석서론중공군(中共軍)이 3차 공세시 모택동(毛澤東)과 팽덕회의 의견이 상충한 내용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이었다.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은 역사적인 의의가 있었다. 한국전쟁(戰爭)이 단순이 소련(러시아)과 미국(美國)의 싸움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싸움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다.조금 특이한 양상은 소련(러시아)은 직접적으로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중국은 참여했었다는게 다르다.중공군(中共軍) 개입의 발생배경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한국군과 UN군은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했었다. 10월 중순에는 이미 서부지역에 UN군은 청천강 지역까지 도달했었다. 동부 전선에 한국군은 원산과 함흥을 장악했고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했었다. 미국(美國)의 추수감사절이 되는 11월말까지 전쟁(戰爭)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했었다. 이처럼 전쟁(戰爭) 조기종결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중국은 10월 19일 밤 대규모 중공군(中共軍)을 압록강을 건너 북한 지역으로 투입했었다.스탈린(Ста?лин)은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김일성에게 모택동(毛澤東)과 반드시 전쟁(戰爭)에 관해 사전에 협의하도록 했었다. 1950년 5월 김일성과의 회담에 모택동(毛澤東)은 만약 미국(美國)이 전쟁(戰爭)에 개입하여 북한이 위기에 처했었다면 북한을 위해 중국이 개입하겠다고 약속했었다. UN군이 38선을 넘어오자 스탈린(Ста?лин)은 모택동(毛澤東)에게 즉시 중공군(中共軍)을 참전시킬 것을 요구했었다.소련(러시아)의 공군력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 중공군(中共軍)의 참전을 주저하던 모택동(毛澤東)은 전쟁(戰爭) 이전의 약속대로 전쟁(戰爭)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戰爭)은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었다.이런 내용은 10월 중순 전쟁(戰爭)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한석하여 전쟁(戰爭)을 인간이 행하려는 폭력행위 이외의 또 다른 방법에 의한 정치(政治)의 연속으로 간주한 국제정치(政治)주의적 해석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戰爭)을『분별력(Prudence)』에 의한『술(Art)』이며, 불안정한 세력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전쟁(戰爭)철학적 해석 등 크게 3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戰爭) 연구는 전쟁(戰爭)의 목적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전쟁(戰爭)의 방법성을 강조한 것이었다본론중공군(中共軍) 3차공세의 경과먼저 3차공세의 시기는 중공군(中共軍)이 개입하고 나서 2개월정도 지나고 나서이다. 중공군(中共軍)의 제2차 공세로 38도선까지 후퇴한 한국군과 UN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잇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삼고, 김포반도에 포천·김화에 이르는 지역에는 미 제1·9군단을, 중부 산악지역에는 한국군 제2·3군단을, 동해안 지역에는 한국군 제1군단을 배치했었다.12월 중순, 중공군(中共軍)총사령관 팽덕회는 극도로 지친 병력으론 미한국군 추격이 불가능하다며 모택동(毛澤東)에게 전군의 휴식과 부대정비를 건의했었다. 2~3개월간 휴식·정비를 한 뒤 이듬해 봄쯤 38도선을 돌파, 서울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택동(毛澤東)은 즉각 공격을 명령했었다. 스탈린(Ста?лин)과 김일성의 강공(强攻)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데다 미국(美國)과의 휴전협상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최소한 37도선까지는 남하해야 했었다는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모택동(毛澤東)의 강권에 따라 팽덕회는 1950년 12월 31일 제3차 공세를 개시했었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이 공세는 새해 첫날을 앞두고 실시됐다고 해서 '신정공세'라고 불렸으며, 중·북연합군 9개 군단 총 30만여명이 투입됐다. 북조선 인민군은 김일성이 12월 4일 '중·조연합사령부' 창설 때 지휘권을 중공군(中共軍)사령관에게 넘겨줬기 때문에 중공군(中共軍)의 지휘를 받았다.적은 서부전선의 주공 5개 군단과 중부전선의 조공 4개 군단이 문전쟁(戰爭)을 연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전쟁(戰爭)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시작하여 과연 전쟁(戰爭)이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의문까지 이해되도록 하는 전쟁(戰爭)지침서로 알려져 있었다.근본적으로, 클라우제비츠는 당시 유럽의 세력균형체제를 이상적인 국제관계의 형태로 보고 나라간 경쟁적인 세력을 균형화시키는 자동조절기능인 분별력을 고려하게 된다. , 클라우제비츠는 의미의『협상적 평화(Negotiated Peace)』보다는 무력적 대립을 조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평화가 당시 국제관계에 있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었다. , 이 점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戰爭)을“산자와 죽은자(Win & Lose)”간의 일차원적 게임이 아닌, “산자와 산자(Win&Win)”간의 이차원적 게임으로 간주하고 전쟁(戰爭)은 통제에 의한『강압적 평화(Dictated Peace)』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 클라우제비츠는 전쟁(戰爭) 수행방법에 있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이성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했었다는 당위론에 의거 원시적 폭력성과 증오에 매달리지 않고 상호견제와 이성적 판단에 입각한 자체가 작용하는 공동이익에 좌우되는 것으로 주장하게 된다., 상대방 의지의 완전 붕괴에 의해 강요된 일방적 굴복에 의한 절대전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해야 하고 상대방의 의지에 영향을 주고 상대방이 나의 의지를 정치(政治)적 타산에 의해 받아들이게 하는 현실전의 이중성을 갖고 있어야 했었다는 것이었다. 즉, 전쟁(戰爭)의 본질을 현실주의적시각에 파악함으로써 전쟁(戰爭)을 폭력현상으로서의 전쟁(戰爭)과 정치(政治) 도구로서의 정치(政治)목적에 종속되어 야 하는 전쟁(戰爭)이라는 이중성을 주장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는 전쟁(戰爭)이라는 자체를 중립적인 현상과 같아서 사용자에 따라 전쟁(戰爭)성격(색깔)이 결정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소위 전쟁(戰爭)을 인간의 1차적 본성만이 아닌 적도 생각할 줄 아는 2차적 본성으로 호소함으로써 발생되는『전쟁(戰爭)의 이중성 (Duality)』은“스탈린(Ста?лин) 의 정치(政治)권력은 확고하였고, 그는 그의 역량을 소련(러시아)의 나라이익에 집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국제정치(政治)체제가 재편되어 각 주요 나라들이 나라목표를 새로이 정립하고있었다. 스탈린(Ста?лин)의 정책은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의 경험과 미국(美國)과의대립관계에 비롯된 결과였다. 스탈린(Ста?лин)이 나라안전보장이라는 소련(러시아)의 나라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세계혁명은 하나의 방법 또는 대외전략에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목표가 될 수도 있었다.소련(러시아) 대외정책의 중심은 유럽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소련(러시아)이 아시아에 진출한 것은 일본과 전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유럽에 동맹국들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미국(美國)의 동의하에 소련(러시아)이 참전하였다. 소련(러시아)은 급격히 중국의 동북 지방으로 진격해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했으며, 이를 통해 아시아에 군사(軍事)력에 의지해 획득한 유리한 외교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탈린(Ста?лин)은 과거 제정 러시아를 통치한 군주들처럼 소련(러시아)의 주변지역을 장악하고 유럽과 중동은 아시아에 잃어버린 영토와 영향력을 되찾기를 갈망했었다. 스탈린(Ста?лин)의 야망은 완충지대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소련(러시아)의 지정학적인 지위를 굳건히 하려는 제국주의적 욕구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스탈린(Ста?лин)의 지정학적 관점은 제정(帝政)러시아가 중국 동북지역에지배했던 세력을 회복하는 데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소련(러시아)은 1945년2월 8일 얄타협정을 통해 미국(美國)과 영국으로부터 전후(戰後) 대중국 이익을 보장받았다. 이 밀약은 사전에 장제스(蔣介石) 정부와 협의 없이 맺어졌다. 소련(러시아)군이 중국 동북지방에 대거 진입한 후 장제스는8월 14일 불평등한 중·소동맹조약에 서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창춘(長春)철로에관한협정’, ‘다롄(大連)에관한협정’, ‘뤼순(旅順)항에관정학적 측면에 중국국경의 바깥에 완충지대를 두는 것을 원해왔다. 마오쩌둥(모택동)의 민족주의적 경향 또한 여러모로 스탈린(Ста?лин)의 기본적 태도와 동일했었다. 서상문은 “중국의 전통적인 영토의 지정학적 개념에 따른 대한반도 인식은한반도는 전체 또는 최소한 일정부분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했었다는 것이었다”고 평가했었다. 이는 중국이 전략을 수립할 때 한반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서 주요한 고려 요소가 되었다고 본것이었다.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것도 있었다. 중국 외곽에 위치한 북한의존재는 2차 국공내전 당시 중한국군의 위기 국면에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중한국군의 위기 극복 뒤에는 북한으로부터 후방지원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고 결정적이었다. 조선족부대의 참전활동이 그러하였고, 북한지역이 중국의 후방기지 역할을한 것이 그러하였다. 이 과정에 중국 지도부는 북한과 은원(恩怨)관계라는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대소 관계에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었다. 1942년 옌안(延安)에의 정풍운동(整???)21)에부터 1945년 4월의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회의에 마오쩌둥(모택동)사상이 제기될 때까지의목표 중의 하나는 당 내에 소련(러시아)세력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주적으로 중국의 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소련(러시아)과는 거리를 유지했으며 스탈린(Ста?лин)의 의사에 정면으로 대치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스탈린(Ста?лин)은 제2차 국공내전 초기에 중국 혁명전쟁(戰爭)이 미·소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고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과타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즉,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하면서 나라이익을 도모했었다는 전형적인 목표를 추구했었다. 2차 국공내전 시기에 소련(러시아)의 대중국 정책은 모순되는것이었다고 중국의 지도부는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이 항복하고 3개월간 적군(赤軍)은 만주에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국민당군의있었다.
    사회과학| 2018.12.11| 10페이지| 5,000원| 조회(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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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의 제 5차 공세와 맥아더의 해임을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 측면에서 분석 평가A+최고예요
    중공군(中共軍)의 제 5차 공세(攻勢)와 맥아더(MacArthur)의 해임(解任)을 정치(政治)적 목적과 군사(軍事)적 목적 측면에도 분석서론`중공군(中共軍) 5차공세(攻勢)에도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전체적인 전투 흐름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공군(中共軍)이 1951년 4월 들어서 펼친 공세(攻勢)는 제 5차에도 속했었다. 중공군(中共軍)은 한반도 참전 직후에도 바로 공세(攻勢)를 벌이기 시작했었다. 당시 평양을 넘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던 UN군을 향해 평북 일대에도 매복했었다가 벌인 중공군(中共軍)의 기습적인 공격이 바공세(攻勢)로 1차 공세(攻勢)다. 그런 중공군(中共軍)의 참전 및 공세(攻勢) 의도를 오독(誤讀)했었다가 1950년 11월 말에도 12월 중순도 전투를 벌이었다 UN군은 다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만다.그때의 중공군(中共軍) 공세(攻勢)가 2차에도 해당했었다. UN군은 이미 등을 보인 상태였다. 한 번 밀리면 둑을 무너뜨린 물에도 밀리듯 뒤로 줄곧 밀리는 것이 전투다. 그런 기세에도 따라 UN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 37도선도 밀렸다. 그 당시의 중공군(中共軍) 공세(攻勢)가 3차다. 이른바 ‘1.4 후퇴’의 상황이었다. 4차는 그 직후 벌어진다. 그러나 새로 한반도 전선에도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의 창과 방패가 날카롭고 두터웠다. 중공군(中共軍)은 한한국군 8사단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1951년 2월 말 경기도 지평리에도 증강한 미 23연대전투단에도게 참패하면서 공세(攻勢)가 꺾인다. 이것이 4차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공군(中共軍)의 다음 공세(攻勢), 5차 공세(攻勢)는 두 차례에도 나눠 펼쳐진다. 1951년 4월 말과 5월 중순이었다. 그래서 흔히들 이 두 공세(攻勢)를 5차 1, 2단계로 나눠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중공군(中共軍)의 5차 공세(攻勢)를 보는 시각은 여럿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도는 중공군(中共軍)이 제 역량으로 한반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 없느냐를 스스로 물었던 싸움이었있었다. 개전 뒤부터 줄곧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거나 남하하며 작전을 벌였던 수도사단과 전투 경험이 거의 없던 11사단이었다. 1101 야전공병단을 그에도 추가다.전력은 매우 부족했었다. 그전도 내가 이끌던 1사단이 미 1군단에도 배속해 강력한 야포와 전차의 지원을 받았던 것과는 차이를 드러냈다. 군단의 화력으로 겨우 105㎜ 18문 포병 1개 대대가 있었다. 나는 전쟁 발발 뒤 줄곧 1사단에도만 있었던 까닭에도 강릉의 1군단 상황을 안좋았다. 그런 화력으로 공산주의(共産主義) 군대에도 맞서 싸웠던 한국군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이 정도의 화력으로 유사시의 커다란 전투를 결코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도 없었다.동해안은 한반도에도 펼쳐지는 아군 전선의 동쪽 끝이었다. 전쟁의 큰 승패가 갈리는 곳도 아니었다. 전쟁의 흐름에도는 오지(奧地)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전쟁은 늘 변수에도 올라타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머무는 곳이 중심에도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떤 경우도 적이 이곳을 노릴 때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순전히 지휘관의 몫이었다.정치(政治)적 목적전쟁 중에도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격언이 무색하게 맥아더(MacArthur) 將軍은 한국전쟁(韓國戰爭)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11일 한국전쟁(韓國戰爭) UN군 사령관이자 미한국군(美軍) 극동사령관에도 해임(解任)됐다는 뉴스를 전해들었다. 정식 문서나 직접 통보를 받은 게 아니라 참모가 라디오에도 나오는 뉴스를 들은 게 전부였다. 제펜 도쿄에도 있던 맥아더(MacArthur)는 속절없이 짐을 꾸려 귀국길에도 올랐다.맥아더(MacArthur)는 두 번의 세계대전(世界大戰)에도 모두 참전했으며 2차대전 당시 제펜의 필리핀 침공을 막아낸 영웅이었다. 우리 한국인에도게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함락 직전의 한국을 구해내고 전세를 뒤바꿔 놓은 명장이었다.반면 트루먼(Truman)은 미국(美國)인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지 못한 (大統領) 데서 찾았다.1950년 말에도 중공군(中共軍)이 한국전에도 개입하자 맥아더(MacArthur)는 대만에도 있던 국민군을 동원하자고 건의하는 가 하면 핵폭탄을 터트리자고 주장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을 터트려 제펜을 항복시켰듯이 중국(中國)에도 치명적인 살상무기를 사용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그렇지만 트루먼(Truman) (大統領)은 맥아더(MacArthur)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제펜에도 투하한 원자폭탄에도 대한 비판 여론도 강했던 상황에도 중국(中國)에도 핵폭탄을 터트렸다가는 소련(蘇聯)(蘇聯)과의 3차대전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당시 중국(中國)은 핵을 개발하지 못했지만 소련(蘇聯)(蘇聯)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도 3차대전은 핵전쟁을 의미하기도 했었다.트루먼(Truman)은 한국전쟁(韓國戰爭)의 목적을 '승리'에도 '협상을 통한 평화'로 바꾸고 강경한 입장을 고집한 맥아더(MacArthur)를 해임(解任)하기에도 이른다.당시 미국(美國)의 상황과 국제 정세 등을 고려했을 때 한반도에도 전쟁을 확대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또 혹자는 맥아더(MacArthur)가 (大統領)이 되고 싶은 정치(政治)적 야심도 있었다면서 한국전쟁(韓國戰爭)을 '계기'로 삼으려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던지고 있었다.맥아더(MacArthur)가 해임(解任)된 지 2년이 더 지난 뒤에도 한국전쟁(韓國戰爭)은 승자와 패자도 없이 갈라진 채 휴전상태에도 들어갔었다.군사(軍事)적인 목적군사(軍事)적 목적은 찾는 자료가 없었다. 원자탄을 만주에도 떨어 뜨린다면 이라는 가정이 많다.맥아더(MacArthur) 해임(解任)의 공식적인 이유는 군사(軍事)적인 목적이고 공식 이유는 명령 불복종. 백악관은 맥아더(MacArthur) 원수가 (大統領)은 물론 미 합동참모본부와 의견 조율도 없이 멋대로 발언하고 작전을 펼쳐 미한국군(美軍)과 UN군에도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만약 맥아더(MacArthur) 세력이 승리해서 만주를 폭격했었다한 생각이었다.물론 원자폭탄은 끝내 투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약 투하되었다면, 맥아더(MacArthur) 신봉자들의 생각처럼 한국전쟁(韓國戰爭)의 조기 승리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동북아 정세, 전쟁에도 대한 중국(中國)의 인식,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원자폭탄은 중국(中國)의 전쟁 의지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美國)이 원자폭탄을 사용했었다면 수류탄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났을 때는 “중국(中國) 인구가 얼만데”라며 미국(美國)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했었다. 제펜에도 떨어진 원자폭탄은 패배의 조종이었지만, 만약 중국(中國)에도 떨어졌다면 그것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렸을 것이었다.맥아더(MacArthur)의 뜻대로 되었다면 한반도는 큰일이 났을 것이었다한국전쟁(韓國戰爭)이 동북아 전쟁으로 확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美國)과의 전면전을 다소 꺼렸던 스탈린(Ста?лин)도 더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었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美國)의 야심찬 유럽 부흥계획인 마셜플랜으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경우 분명한 탈스탈린(Ста?лин) 노선을 견지하며 미국(美國)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시작했었다. 그런 점에도 스탈린(Ста?лин)은 3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전장으로 발칸반도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1950년 6월 “발칸 대신 한국에도 전쟁이 났다”는 평가가 분명 있었다. 새로운 전장으로 베를린은 너무 직접적이고, 대만이나 제펜 침공은 역부족이었다. 만주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면 한반도와 발칸반도의 기록도 조금 뒤바뀌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렇게 되면 우파가 불안한 승리를 거둔 그리스에도 다시금 내전의 불길이 타올랐을 가능성이 있었다.그렇다면 3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의 와중에도 한국전쟁(韓國戰爭)은 어떻게 되었을까? 휴전협상은 미루어졌을 것이었다.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는 전쟁’이라는 누군가의 통해 북한(北韓)을 거의 점령한 상태에도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으로 서울도 내줬다가(1.4 후퇴) 반격에도 성공해 서울을 찾은 상황. 맥아더(MacArthur)는 북진을 요구했으나 트루먼(Truman)은 받아들이지 않았다.훗날 비밀 해제로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 등에도 따르면 트루먼(Truman) (大統領)과 미 행정부의 관심사는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휴전에도 있었다. 더 밀고 나가면 소련(蘇聯)(蘇聯)과 3차 세계대전(世界大戰)으로 번지고 핵 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는 걱정에도 빠졌었다.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판단도 마찬가지. 소련(蘇聯)(蘇聯)과 중국(中國) 역시 전쟁 이전 상황으로의 복귀를 바랐다.결정적으로 비밀리에도 움직이던 NSA(미국(美國) 국가안전국의 정보가 트루먼(Truman) (大統領)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제펜에도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에도게 맥아더(MacArthur) 원수가 ‘한국전을 대전으로 발전시켜 중공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원자폭탄 30개도 투하할 수 있으니 나중에도 놀라지 말라’고 말했었다는 NSA의 도청 보고에도 트루먼(Truman)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었다. ‘이건 명백한 반역(Treachery)이야!’맥아더(MacArthur)를 내치고 싶었지만 비밀기관인 NSA가 맥아더(MacArthur) 원수와 외국 대사들을 상대로 도청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할 수 없었던 탓. 고민하던 트루먼(Truman)에도게 맥아더(MacArthur) 스스로 구실을 안겨줬다. 맥아더(MacArthur)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휴전 제의(3월 23일)에도 백악관은 경악하면서도 속으로 웃었다. 말이 휴전제의였지 실제로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규모 폭격에도 나선다는 위협이었다. 맥아더(MacArthur) 원수의 강경 발언은 트루먼(Truman)에도게 꼬투리를 잡혔다.맥아더(MacArthur) 해임(解任)은 역풍을 불렀다. 맥아더(MacArthur) 원수가 귀향하는 길에도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며 트루먼(Tr럽다.
    사회과학| 2018.12.11| 9페이지| 5,000원| 조회(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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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과 생활-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장미의 이름)
    예술과 생활-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을 읽고나서 먼저 구글에 검색을 하이다. 거기에 나온 내용은 영화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과 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줄거리 들이다. 처음에는 숙제를 줄거리를 보고 느낀점을 적으려 했지만, 누워서 유투브등을 보면서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으로 나오는 내용이 많아서 시간을 들여서 보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수도승(Monk)들의 이야기이다.추리소설 이라는 말에 책의 내용과 제목이 잘 매칭 되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소설을 보고 나서도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인지는 알기도 힘들었다. 아마 주인공이 수도원에서 경험하는 신비감과 모호함이 사랑했던 한 여자와 오버랩 되어서 소설의 제목을 나타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매일 한 사람씩 처참하게 죽어 간다. 처음엔 나도 자살인줄 알았다. 그 수도원에서 풍기는 칙칙하고 음산한 분위기와 매일 매일 반복 되는 생활 그리고 웃음이 금지된 수도승들은 충분히 정신병 걸릴 이유이고 자살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인은 책 속에 있다. 이제까지 내려오던 전통적인 종교 해석을 고수하기 위해 늙은 수도승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에 독을 묻혀 놓았던 것이다. 그 늙은 수도승이 그런 일을 꾸밀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젊은 수도승들은 독이 묻혀 있는 책장을 정성 들여 넘기며 읽다가 영문도 모른 채 하나씩 죽어간다.늙은 호르헤 수도승은 욕심도 참 많다. 나로써는 그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웃음을 금지한다고 뭐가 바뀌는게 있는가? 그의 헛된 생각으로 죄 없는 젊은 수도승들만 죽어갔다. 죽을때가 됐으면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면서 했던 생각이나 경험을 들려줄 것이지 괜한 욕심으로 수도원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의 조사를 맡은 윌리엄 수사의 추리는 명탐정 셜록홈즈같이 명확했다. 나중에 알게했다. 그는 스승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앗소는 스승을 버리지 않는다. 내가 그였더라도 사랑에 빠진 이름 모를 여자와 훌륭한 수사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소설에 나오는 수도원은 사회주의를 가리킨다. 그러면 묵시론의 일파는 마르크스주의라 할 수 있겠다. 과연 소설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는 부정 부패한 것은 없애자 라는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시민혁명을 통해서 얻은 결과 이다. 그럼 영화 내내 두려움과 칙칙한 음산한 느낌을 주는 장서관을 그 기나긴 중세의 암흑의 시대에서 새로운 것의 탄생을 위한 장소로 볼 수 있다. 현재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에 나오는 수도원은 폐허가 된다. 그러나 장서관이 불타고 늙은 호르헤 수도승이 죽은 후 수도원에 평화가 왔음은 분명하다.나는 무교라서 종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수도원 하면 단지 절 같은 이미지만 떠오를 뿐이다. 그러나 소설을 보고 수도원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된다. 수도원은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 인지… 수도원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에 나오는 수도원은 칙칙하고 어둡게 그려졌지만 다른 수도원들도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1077년 그레고리 7세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황제와 성직자 서임권을 놓고 투쟁을 벌이다. 그 여파로 황제 하인리히4세(1050-1106)는 파문을 당했고 이 사건을 카노사의 굴욕이라 했다. 카노사의 굴욕 후에는 곧 십자군원정 (1096-)이 시작된다. 당시의 교황권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약 200년 2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동안 유럽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가장 큰 변화로는 1. 교황권의 약화와 2.봉건제의 붕괴가 있다. 약해진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와의 대립으로 아비뇽 유수(1309-1377)가 있다. 지방에서는 봉건제의 붕괴로 여러가지 이단학파가 일어나 민중을 가져왔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플라톤에 의해 밀려났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이 번역되었고, 플라톤의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신학의 많은 문제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서 보안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신학을 다시 구성한 철학자이자 신학자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그는 도미니쿠스의 영향을 받은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승이었으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파리에서 계속 수학하여 1257년 신학으로 학위 및 교수 자격을 받는다.당시의 파리대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맹렬한 공부가 진행되고 있었던 듯 하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인간에게는 두가지 종류의 탁월성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성품의 탁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 탁월성이라 하여 다시 지적 탁월성을 순수 이론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로 나눈다. 순수 이론적 지혜(Sophia)는 신적 탁월성 즉, 우주의 제 1원리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을 이야기 하는데 이는 이성으로 신적인 것을 연구할 수 있다는 도미니크회의 신학적 성격에 영향을 준다.즉 아리스토틀은 이성의 힘을 강조하게 되는데, 아퀴나스는 여기다가 신의 은혜의 빛을 더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계시와 선험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면 아퀴나스는 다분히 경험적이며 귀납법적인 사람이다.당시의 상황을 크게 본다면 바로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틀에게로,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신비주의에서 이성주의에로 사상의 흐름이 넘어가는 속에서의 갈등과 지상의 권력과 천상의 권력을 가진 두 파벌의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겪게 되는 나와 자아와 타인과의 갈등이라 하겠다.1314년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독일 제후들이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를 신성로마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선출하고 때를 같이하여 라인의 영주와 쾰른의 대주교가 프리드리히를 선출했다. 2년 후 1316년 아비뇽에서 요한 22세가 교황의 자리에 앉았다. 몇년 후 1322년 루드비히가 프리드리히를 거세하자 황제가 둘일 때보다는 하나일 때를 더욱 두려워한 교황 요한이 루드비히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고 나선다.몇달 후 12월 교황 요한 22세가 사도헌장 을 반포하며 "페루지아 총회에서 언급한 '사용'은 곧 '소유'라고 주장했다. 또 이듬해 11월 12일 를 제정하여 프란체스코수도회를 이단으로 몰게 된다. 얼마 후 1324년 5월 22일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황제가 을 반포하여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페루지아 총회를 지지하게 된다. 이유인즉 지상적인 권력을 가진 루드비히가 천상적인 권력을 가진 교황 요한 22세를 공격할 구실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때는 루드비히와 프리드리히가 제휴한 후 루드비히가 이탈리아로 내려와 밀라노에서 대관하게 된 해인 주후 1327년 11월 말경이다. 페루지아 총회 이후 아비뇽으로 소환명령을 받은 체제나의 미켈레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자 한가지 복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즉, 교황측 사절과 황제의 사절이 한 곳에 모여 사전에 협상하는 자리를 만들어 이를 통하여 양자의 실세를 서로 인정하고, 차후의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인이 프랑스로 들어갈 경우에는 교황측으로부터 신변 안전의 보장을 받아 내자는 것이다. 이 첫 모임을 주선하기 위해 선발된 사람이 바로 황제 루드비히의 직속 신하이자 아드소의 아버지와 친구사이었던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승이다. 윌리엄 수도승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승으로서 일찌기 파리에서 유학하며 로저베이컨의 사사를 받은 명석한 수도승으로서 오히려 도미니칸에 가까운 자이다.그는 여러 곳을 물색한 결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뿐더러 황제와 교황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던 베네딕트 수도회의 한 수도원을 선정하게 된다.아드소와 그의 스승 바스커빌의 윌리엄이 황제측 사절단과 교황측 사절단이 회합을 갖기 며칠 전에 먼저 문제의 수도원에 도달하게 된다. 그 후로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제 1 일아드소와 윌리암이 수도원에 도착하고 원장으로부터 채식사 아델모의 죽음과 이에 대한 해결을 윌리암에게 부탁했다. 원래의 케이스는 교황측 사절이 협상 회의장으로 쓰는단의 행동이나 의견에 영향을 줄수있는 모든 자에 대하여 사법권을 갖게 되어 있다.따라서 이러한 살인사건이 교황측 사절단이 도창하기 이전에 해결되지 않게 된다면 수도원장의 사법권은 교황측 왕실 궁병대로 넘어가게 되어 있는 셈이다.#제 2 일그리스어 번역가 베난티오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알리나르도 늙은사람의 암시를 통해서 장서관 내력과 미궁 같은 장서관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어 한밤을 틈타 장서관의 미궁으로 들어가나 미궁 안에서 길을 잃고 해매이게 된다.#제 3 일보조사서 베렝가리오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드소는 살바토레로부터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 윌리엄 수도승은 아드소에게 이단의 흐름과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역할, 그리고 보편적인 법칙에의 접근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혹을 고백했다. 윌리엄은 아래와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아드소에게 이야기했다."문제는, 이단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단순한 평신도들이 여기에 가세한다고(그리고 파멸한다고) 믿는 데 있을 듯 하다. 사실은 단순한 평신도라는 조건이 선행하고 이 조건에서 이단이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서로 헐뜯고 싸우는 데만 관심할 뿐, 수양견과 목동은 양떼를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양떼의 일부는 밖으로 버려졌다.""그래서 성 프란체스코께서는 일찍이 이것을 아시고 먼저 그들에게로 가시어 그들과 더불어 살기로 하신 것이다." "대 이단 전쟁은 오로지, 문둥이는 문둥이로 소외시킬 것을 요구했다."아퀴나스에 의하면 선을 식별하는 지식이 의지를 결정하기에 올바른 지식이 없이는 의지가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들 양들은 수양견과 목동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었기에 그들에게는 이단과 정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라는 것이다. 단지 귀찮은 존재일 뿐.한편 우베르티노는 아드소에게 돌치노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드소는 혼자 장서관에 들어가 돌치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 돌치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책의 내용은 아드소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했다. "화형주에서 돌치노
    인문/어학| 2017.11.28| 5페이지| 2,000원| 조회(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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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과 생활-관람후 평가 소외계층이 예술관람을 위한 지원정책
    예술과 생활1. 전시장 관람그림 1 닥터 박 갤러리 입구 전경 미술품보다 여기 갤러리가 더욱 흥미를 끄는 곳이 있었다. 양평을 지나가면 자주 들리는 곳이면서도 주변 경치가 워낙 좋은 곳이었다. 양평을 가면 지인들에게도 추천하는 곳이었다.양평을 놀러가서 본 “닥터박 갤러리”이었다. 양평 남한강변에 세워진 Dr. PARK GALLERY는 박호길 대표가 평생 꿈꿔온 소망을 담은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이었다.마음을 탁 틔워주는 푸른 산과 맑은 물을 배경으로 한 미술관을 통해 문화 예술 감상의 장을 마련하는 동시에 도시인들이 바라는 문화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다.그림 2 강과 어우러져 경치가 좋은 카페, 남한강과 강건너가 보인다. 양평의 명소여기 관장님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하고부터는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고 해야한다.. 언젠가는 좋은 현대미술작품을 가장 많이 소유한 유명한 사설 미술관을 설립해야겠다는 것이었다.양평 남한강변에 세워진 Dr. PARK GALLERY는 평생 꿈꿔온 제 소망을 담은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이라고 해야한다.. 마음을 탁 틔워주는 푸른 산과 맑은 물을 배경으로 한 미술관이 마음에 들고 여기 테라스도 좋다.시즌마다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갤러리 안을 둘러보면 은은한 조명과 예술품이 어울러져 있었다.무엇보다 최고의 예술픔 자연환경이 아닌가 싶다. 관람료는 만원이었다. 만원에 아메리카노 한잔가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술품을 구경하고 커피한잔을 먹으면 정말 좋다. 거기에 경치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먹는다면 금상첨화이었다.그림 3 조명과 예술품2. 한국의 문화예술분야가 일반 시민 대중은 물론 결제적 사회적 약자인 소외계층에게까지 고른 문적 혜택을 주려면 정부 또는 문화예술기관에서 정책적 배려 또는 지원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정리첫 번째로 소외계층 문화순회 프로그램이 있었다. 문화소외지역을 찾아가 다양한 문화예술 향유 및 참여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문화 소외계층에 대한 문화 향유권 신장 및 문화 양극화 해소에 기여해야한다.. 이런 계층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며 16년까지 군대내에서 기타동아리를 지원했었다. 현재는 정권이 바뀌어서 안하고 있는 추세이었다 .표 1 세부추진대상구분사업유형수혜대상순회대상처(공연횟수)선정예술 단체수협력기관정기공모대상사업1. 사회복지시설 순회사업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는 시설, 특수학교, 다문화관련 시설, 청소년 쉼터 등740개처80개 단체한국사회복지협의회, 여성가족부2. 농산어촌 순회사업서울특별시, 6대 광역시를 제외한전국 농산어촌 지역 및 학교630개처70개 단체농림축산식품부, 농협중앙회, 한국철도공사3. 임대주택 순회사업주택관리공단?SH 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영구임대아파트 단지200개처22개 단체주택관리공단, SH공사4. 교정시설 순회사업전국 교도소, 구치소, 보호관찰소, 소년원85개처10개 단체법무부5. 군부대 순회사업육?해?공군 대대급 부대165개처18개 단체국방부소계1,820개처200개 단체-자체추진사업6. 기타시설 순회사업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중소기업근로자 및 산업단지 등 위 5개 유형을 제외한 특수지역47개처공모선정단체활용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중소기업중앙회, 한국산업단지공단 등소계1,867개처200개 단체12개 기관17년에도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금은 지원을 받아서 하는데, 복권기금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로또나 주택복권같은 것이었다. 올해에도 이런 계층을 대상으로 실시해야한다.. ? 경제적 소외계층 :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임대주택 거주자 ? 사회적 소외계층 : 장애인, 노인, 재활원·요양원·보육원·쉼터 등 사회복지시설이용자, 특수학교, 의료시설, 외국인노동자 등? 지리적 소외계층 : 읍?면?동?도서(섬)?산간벽지, 공단지역 주민 ? 특수 소외계층 : 교정시설 수용자, 군인, 새터민, 서해5도 주민 등? 문화 소외계층 : 연간 순수예술 관람경험이 적은 문화 소외계층 등등이었다.13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복권기금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추진경과는 다음과 같다.ㅇ 2004년 문예진흥기금 모금 폐지에 따라 복권기금 전입 및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 개시ㅇ 2008년 정부부처 및 유관기관 협력기관 협조체계 도입ㅇ 2011년 수요자 맞춤형 사업으로 개편ㅇ 2013년 정부 국정과제((109-4) 지역 특성에 맞는 문화도시?문화마을 조성 및 지역 문화격차해소)로 사업 확대 추진ㅇ 2014년 노인, 청소년층 등 수요층을 고려한 맞춤형 기획 프로그램 도입ㅇ 2016년 사전 수요조사를 통한 수요자 맞춤형 공모사업과 수요 기반형,수요 창출형 특성화 프로그램 기획사업 전면 확대 실시17년도에는 위에서 나온 보다 더욱 확대되고 구체적으로 되어있었다. 이런걸 하려면 결국에는 돈이고 우리 정부에서 실무자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 다르다.왜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을 해야 하는가? 이것으로 접근하고 싶다.‘문화복지’는 사회복지를 토대로 해야한다.. 복지란 사전적 의미로는 ‘행복한 상태’, ‘안정된 삶’, ‘생활욕구가 충족된 삶’ 등을 의미하며 사회복지란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목적을 둔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문화복지를 이해하기위해서는 사회복지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해야한다..‘문화소외계층’이란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문화와 예술을 영위할 기회가 극도로 미비하거나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형태의 문화적수혜를 필요로 하는 계층을 의미해야한다.(전정운, 2009). 교육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즉,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고려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학습자라 할 것이었다. 학습자에게 필요한 내용을 학습자의 수준에 맞게 제공해야비로서 교육의 효과를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은 일회성의 문화예술사업이 아니라 장기적 계획과 철학을 필요로 하는 교육정책이고 실천이어야 해야한다.. 그리고 이 실천이 가장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학습자로서 소외계층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해야한다..문화적 소외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지 기회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철학과 지향을 가지고 내용과 방법의 문제로 다루어야 해야한다..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소외계층이 자신의 삶을 문화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줌으로써 문화적 소외를 벗어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소외를 제거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회과학| 2017.10.10| 5페이지| 2,000원| 조회(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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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에 담긴 지식의 즐거움-(다시쓰는 역사,그 즐거움) 중간고사 대체 과제 세종대 이상현교수님
    1. 서론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첫 번째 강의인 ‘서론‘에서는 ’우리가 왜 교양으로서 역사(歷史)학을 배워야만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역사(歷史)학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교양으로 자리매김 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歷史)는 과거와의 대화이었다. 토인비가 말했다. 역사(歷史)란 무한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반지식과 사상의 흐름을 말하는데, 이러한 역사(歷史) 속에서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것은 역사(歷史)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종착역은 미래로 갈수록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 이었다. 되풀이 되는 역사(歷史)는 재구성되었다. 반복되었다. 큰 맥락은 다르지만 거기 인물과 사건만 다르다. 따라서 역사(歷史)는 인간의 삶의 모체이며 과정이고 목표이었다. 또한 모든 인간의 삶은 역사(歷史)의 구성요소이며, 모든 학문은 인간의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모든 학문은 역사(歷史)학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인 역사(歷史)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 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당면한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歷史)적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남북한이 갈라지게 된 세계사적 배경과 일제시대, 한국사의 흐름을 모르고서는 지금 현재 한국이 처한 입장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민족주의는 어떻게 생산되고 발전하였는가, 부자상속과 세습체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악인가 선인가 등을 알아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전문적 지식을 알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역사(歷史)학에 속해있는 총체적 지식을 앎으로써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歷史)적 맥락과 배경을 가진 사회적 문제들은 역사(歷史)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 경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경제학으로 칭하는 것처럼 역사(歷史)를 연구하고 배우는 학문을 역사(歷史)학으로 명명해야 해야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역사(歷史)와 역사(歷史)학이라는 용어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역사(歷史)를 연구하고 배우는 일과 배움의 대상까지 모두 역사(歷史)라 부르고 있는 것 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점을 시정하고 역사(歷史)와 역사(歷史)학의 개념을 구별해야만 해야한다. “본체로서의 역사(歷史)”를 가정했을 때, 이 둘의 개념은 분명해진다. 사건 사실을 기록하여 문헌사료를 만들고, 그것을 배열하는 일은 역사(歷史)학이고, 본체로서의 역사(歷史)는 그 대상이 되는 것 이었다. 본체로서의 역사(歷史)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인간 삶의 과정이라 하였는데 사실 이것도 모호한 개념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역사(歷史)학을 통해 삶의 과정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歷史) 그 자체를 완전하게 인식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가 역사(歷史)가 무엇인가 얘기함에 있어서는 단지 각 개인이 역사(歷史)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역사(歷史)관에 따른 것 이었다. 그러므로 개인의 역사(歷史)관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4. 정신사관이냐 유물사관이냐?인류는 역사(歷史)의 주인공이고, 역사(歷史)는 인류의 전유물이며 역사(歷史)는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인류가 있어야만 역사(歷史)가 있는가? 역사(歷史)의 본질은 변화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도 변화를 해야한다며 반발하지만 인류의 변화는 이것과는 확연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연의 변화는 타율적 변화인 반면에 인류의 변화는 자율적, 창조적 변화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 역사(歷史)를 창출해낸다. 이렇게 창조적 변화를 이룩하여 역사(歷史)를 갖는 것은 인간뿐이며 따라서 인간을 역사(歷史)적 존재라 하는 것 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인간만이 역사(歷史)적 존재가 될렇게 인간만이 역사(歷史)적 존재가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의 기원의 문제와 연결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 중 대표적인 것으로 진화론과 고고학이 있는데, 진화론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조상을 추구하는 것이고, 고고학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유물이나 유적을 중심으로 인간의 조상을 추구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 둘을 통해 인간의 외면적 생활은 이해 가능할지 몰라도 그 내면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창조론도 같이 살펴보아야만 해야한다. 사실 인간의 기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 간의 대결이었다. 창조론의 대표적 사례로는 구약의 창세기를 들 수 있는데, 이 이야기에 의하면 인류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만들었고, 뱀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선악시비를 알게 되었다. 즉,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알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산하고 소비하는 법을 배우면서 다른 동물과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 이었다. 진화론자들의 이야기는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였다는 데서 출발하는데, 문제는 원숭이가 어떻게 인간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는가 하는 것 이었다. 이에 대해 프랭클린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 하였고, 럿셀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둘의 이야기는 성격이 완전히 상반되지만 인간의 특징을 ‘생각’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 즉, 인간의 특징은 사고를 함으로써 자연과 신을 거역하고 자기가 자기이기를 주장하며 스스로 신처럼 되어 보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다는 데에 있었다. 이렇게 인간은 창조적 의욕을 가지고 생각을 하였고, 이것이 인간을 역사(歷史)적 존재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해야한다.7.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로서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지혜를 가지고 있고, 고통을 덜어보기 위해 적인 권력의지의 표출이 각 시대의 정치체제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예에서 보이듯이 역사(歷史)는 정치적인 변혁을 거쳐 흘러오게 되는데, 역사(歷史)에 있어서 정치사의 변천은 어떠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변천과정에 따라서 전개되어 나가는 것 이었다. 따라서 역사(歷史)에서 정치형태의 변천은 역사(歷史)의 변천과 그 시대정신의 표현이기 때문에 비약은 없었다.9. 인간은 종교적 동물포이에르바하는 “종교는 인간과 야수의 본질적 차이에 그 기초를 갖는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들 중 중요한 것의 하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었다. 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종교적 동물이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규정지었는데 여기서 갈대란 쉽게 죽을 수 있는 허약한 존재를 말하나 이 앞에 ‘생각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네안델타르인은 시체의 매장법을 생각해 냄으로써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된 것 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되고, 그 때부터 인류의 역사(歷史)는 시작된 것 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서 종교를 갖게 되었을까? 바로 인간의 경외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를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근원에 대한 회의가 인간이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종교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歷史)와 종교문제는 불가불의 관계에 있지만 역사(歷史)학과 신학에는 차이가 있었다. 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역사(歷史)학은 인간이 신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전제하며 신학에서는 신 그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만 역사(歷史)학에서는 인간이 어떤 신을 믿고, 그 형상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등을 중심과제로 삼는다. 다시 말해 역사(歷史)학에서는 매 시대마다 신의 개념이나 신의 형상과 같은 역사(歷史)를 쓰는 목적은 이미 기록되어 있는 문서를 합하여 거기서 얻어진 사료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직접 조사를 통해 기록한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 목적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그는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역사(歷史)를 정리하였다. 그렇다면 문헌수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그 목적은 전쟁과 통치를 위한 자료 제공하는데 있었다. 즉, 그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역사(歷史)를 쓴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전쟁과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역사(歷史)를 쓴 것 이었다. 그 후 리비우스와 타키투스에 의해 실용적 역사(歷史)서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리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나타난 국민들이 나태해지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느끼고 이 우려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歷史)를 서술했으며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로마로 진군해 올 것을 염려하여 역사(歷史)서를 썼다. 이처럼 그들은 전쟁과 통치를 위한 자료로 그리고 교훈을 얻기 위한 지침서로 역사(歷史)서를 썼지만 우리는 실제로 역사(歷史)에 나타난 교훈이 실용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12. 실용을 위한 역사쓰기 앞에서는 서양에서 어떻게 역사(歷史)가 쓰였는지 알아보았고, 이번 강의에서는 동양에서 역사(歷史)가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해야한다. 동양에서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역사(歷史)를 기록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었다. 첫째는 단지 사건 사실을 기록하여 보존을 위한 역사(歷史)책이고 둘째는 교훈적인 목적을 앞세운 역사(歷史)책이었다. 다시 말해 감개주의와 온고지신의 목적을 두고 역사(歷史)를 기록한 것 이었다. 여기서 감개주의란 역사(歷史)는 거울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그 역사(歷史)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온고지신은 ‘과거의 지식을 가까이하여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의미로 실용주의적 역사(歷史)가들은 이러한 목적을 세워서 역사(歷史)를 기록하곤 하였다. 실용적
    사회과학| 2017.10.10| 11페이지| 3,000원| 조회(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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