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2.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교.?공통점?차이점3.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전환.4.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들.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모더니즘(Modernism)?모더니즘의 개념- 넓은 의미로는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을 비판하며 과학이나 합리성을 중시하고 널리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여 현대풍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모더니즘의 특징-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에 의한 사상탄압과 세뇌, 정치적으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긋지긋한 독재정치가 바로 모더니즘의 발생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자 "해방"을 생각하였다. 관념적으로는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인간이 스스로에게 주인이 되는 것, 즉 주체가 되는 것, 그리고 정치적으로 왕권으로부터 풀려나서 자유로운 시민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을 바래왔다. 바로 이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즘이 "모더니즘"입니다.- 모더니즘적 사관의 대표적 인물로는 헤겔과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중앙집권적, 권위적 태도를 취하며, 진보적 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모더니즘의 문제점- 모더니즘은 인간중심주의이며, 그 인간 중에서도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이다. 모더니즘은 ‘구체제로부터 인간을 독립시켰지만, 독립된 인간이 한정되어 있다’ 라고 생각한다.?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 1960년대 이후 모더니즘의 경향이 사회 문화적으로 크게 확대된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시작된 새로운 문화조류를 모두 포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의 지적인 진지함을 버리고 보다 절충 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접근 방식을 창조성으로 여기기 위해 1960년경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 현상의 특징을 지칭하며 넓고 다양한 의미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 포스트모더니즘은 외견상 모더니즘의 변형 또는 모더니즘의 경향에 대한 반발의 의미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주체적인 존재이며, 왕의 통치를 받지 않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오만함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간의 우월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차이를 인정할 뿐입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확인하고, 그래서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환경주의가 등장하며, 남성중심주의를 뛰어넘어 양성평등의 시대가 도래하는 이 모든 현상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현상이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우열을 논하는 태도를 없애고자 한다.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는 반대로 탈권위, 분화등을 통한 권력의 분산을 강조했습니다.?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적 특성① 불확실성(Indeterminacy)② 단편화(Fragmentation)③ 탈경전화(Decanonization)④ 재현 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⑤ 혼성모방(Hybridization)⑥ 대중주의(Populism)⑦ 행위(Performance)와 참여(Participation)⑧ 보편내재성(Immensity)2.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교.?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공통점 - 기성적 권위와 전통에 대한 단절, 반리얼리즘 경향과 전위적 실험성, 개인주의에 입각한 비정치적 성향이 일치한다.- '자본주의‘라는 공통적인 기반을 깔고 있다.?차이점 - 모더니즘이 현대문명의 기능주의와 결부되어 있었던 점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산 업 사회로의 변화, 소비사회의 확대, 다원주의사회의 등장 등을 배경으로 기성적 가치와 이 념을 해체하면서 변화하는 삶의 지평을 성찰하는 과정과 결합한다.- 모더니즘은 중앙 집권적, 권위적 태도를 취한반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 권위, 분화를 통한 권력이양을 강조했다.- 모더니즘은 거대담론에 의한 사회, 즉 특정 사상이나 가치관에 입각해 국가와 인간전체가 굴러가는 형태의 사회였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미시담론을 추구하고 다양한 생각이 존중되 는 사회를 추구했다.?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공통점기성적 권위와 전통에 대한 단절반리얼리즘 경향과 전위적 실험성개인주의에 입각한 비정치적 성향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함차이점현대문명의 기능주의와 결부후기산업사회로 기성적 가치와 이념을 해체, 변화하는 삶의 과정과 결합중앙 집권적, 권위적 태도탈권위, 분화거대담론미시담론비교정리 표3.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전환.?계몽주의의 모더니티 이념 이래 인간의 실체적 이성과 그에 따른 합리주의는 과학, 도덕, 예술의 세 영역으로 분화되었고 각기 고유영역의 내적 논리에 따라 자율성을 획득했다.?1970년대 초반에 최후의 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에 이르러 더 이상 추구 할 수 없는 관념론의 완성을 보았다.
Ⅰ. 조경사조1. 현대 예술사조의 사적 고찰현대에 있어 예술사조는 다양한 장르를 띄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다양함속에서 작품을 가지고 하나의 사조로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예술의 범주가 다양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론들을 정리하고 이것을 자기분야에 수용, 발전시켜 나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조경에 있어서 모더니즘에서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사조를 고찰해보고 조경에서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열거함으로써, 미래에 다가올 조경의 발전을 긍정적, 합리적으로 이끌고 가기위한 조경사조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1) Pre Modernism 시대에서 모더니즘시대로 전환된 배경Pre Modern시대의 대표적 이념인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적 사상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기능적이고, 기계중심적인 모더니즘 시대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과정에 아방가르드적 사상이 예술분야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이때 정치적으로는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하고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의 사회에서 대량 생산 소비시대로 변화하였으며, 귀족중심의 문화에서 민주주의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기업의 발달, 상업주의의 대두 등 여러 가지 사회현상의 변화가 있었다.Pre Modern→낭만주의사실주의에 대한 반항 →모더니즘(아방가르드의 역할)자연주의(자연의 완전성과 고결성 중시)그림1 < Pre Modern시대에서 모더니즘시대로의 전환>2) 모더니즘시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시대로 전환된 배경모더니즘 시대가 기계 중심적이며, 반자연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기능주의에 머문다는 비판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이 예고되었다. 이때 아방가르드는 모든 사조의 변화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들은 각 국가 간의 문화교류의 증대, 전자기술의 발달 등 문화, 경제 부분의 변화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기계중심주의 에 대한 반항인본주의형식주의 (아방가르드의 역할)반형식국제주의 양식지역(토착)주의, 역사주의상징주의결과보다 과정중시Elite적 사고대중주의실용주의소비주의, 유희적사고반자연주의자연으로의 복귀이성주의정신분열적 사고, 파괴적 사고그림2 3) 모더니즘시대에서 해체주의시대로 전환된 배경미국에서는 Post Modernism한 상태라는 전제조건을 걸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를 당연시하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그러한 개념을 생각하지 않은 채, 해체주의를 얘기하는데, 사회이데올로기의 비판에 의한 언어학적 차원에서 출발한 해체적 사고를 이야기한다.그러나 이것은 해체주의가 미국의 Post Modernism과 마찬가지로 배경은 다르나 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때, 해체주의는 모더니즘의 비판에서 출발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먼저 모더니즘 이전의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등의 사고는 모더니즘 시대로 오면서 건축가인 르 꼬 르뷔제 라든가 미스 반 델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이들이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축조하게 된다.이러한 건축들은 너무나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휴머니즘이 대두 되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사조가 포스트 모던한 상태로 이미 돌입했다고 주장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예고했다.우리나라의 경우 한일합방으로 인해 서구의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모더니즘이 생겨났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정책아래서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낳으며 발달하게 되었다.그러나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6,25사변이후 본격적인 예술발달을 가져왔다고 보면 이때 벌써 서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우리에게는 사조가 발달된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 여러 사고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 로버트 벤츄리의 저서가 들어오면서 건축에서, 1982년 이합 핫산의 來韓으로 문학에서, 1980년대 중반 미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때, 이러한 배경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건축이나 미술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나 문학에서는 같은 범주로서 복합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2. 모더니즘의 일반적 경향과 조경에의 영향1) 모더니즘의 일반적 내용모더니즘이 가지는 일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 일의적 형태 : 박스형의 기능주의로 의미 부여가 힘들다.따라서 예술행위의 표현성만을 강조하게 된다.(2) 상징주의 : 대가의 작품에 대한 신봉으로 자기 자신의 과시욕에 사로잡혀 자기 표현의 상징성을 강조한다.(3) 일의적 내용 : 기능중심의 사고로 인하여 내면적 내용과 외형적 형태간의 Communication이 잘 되지 않는 건물이나 조경을 창출한다.(4) 국제주의양식 : 같은 형태의 건축, 조경양식이 속출하면서 표준화되어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양식이 나타난다.(5) 공학적 위엄 :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적, 공학적인 것은 최고 이성의 산물이라는 사고로 인하여 인간의 감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6)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개념 :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표준화되어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다.2) 조경에서의 모더니즘적 경향건축에서의 영향을 중심으로 조경에서의 경향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실용성과 장식① 반장식 :장식은 반기능적이라는 사고를 가져 미적가치를 중요시 하지 않았다.② 기능주의와 미 : 기능적 양식이 최고의 美라는 사고로 기능성의 결여는 미의 가치를 하락시킨다는 사고를 가진다.③형태와 기능 : ‘Form Follows Function' 의 개념으로 인하여 기능이 중요시되어 형태 는 이차적인 문제로 전락했다.④단순형태 : 단순미가 최고의 미적 가치로 인정되고 있다.(2) 권위적 정의감 팽배엔지니어적 사고를 가지며, 합리성을 강조하고, 격자형의 Grid를 많이 사용하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또한 기계는 고결하며 근본적이고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생각하며 똑같아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상업주의의 사고아래 모든 상품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결국 사회적 동질성을 강조하게 되어 개성의 무시를 초래했다.(3) 아방가르드적 낭만주의모더니스트들은 각자 자기의 작품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4) 진화론적 사고새로운 것들은 수용해야 하며 진부한 것들은 없어져야 한다는 진화론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조경에 있어서의 사고를 보면, “더 이상의 자연경관은 Elite에게 필요 없다.”라고 주장 한다. 결국 새로운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현재의 경관을 무작위적으로 파괴한다.(5) Elite적 사고Elite에게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멋이 있고, 모든 미적 판단은 Elite가 하며, 대중의 선호는 Elite가 결정한다는 카르스마적 사고를 가져 스스로 대중과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6) 반 자연주의자연과 같은 그림은 없어져야 하며, 그 그림은 우리(모더니스트)가 그린다는 생각이 팽배하였다. 따라서 Concrete는 맹목적인 추앙대상이 되어 어떠한 재료보다도 우수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연재료보다는 인공재료를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 서양철학 그 가능성의 중심,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푸코라는 현대철학자의 중요성은 그가 권력의 지배라는 문제가 개체의 육체 혹은 내면까지 집요하게 관철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는데 있다. 권력은 가족, 학교, 대중매체, 감옥, 병원 등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집요하게 인간이란 생명체를 훈육시켜 왔다. 그렇다면 한 생명체로서 개체의 차원에서 볼 때 어떻게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푸코는 권력으로부터 구성된 주체가 아니라 구성하는 주체를 꿈꾸면서, 스토아학파가 강조했던 자기 수양의 논리가 가진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게 된다. 스토아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상징되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사유 전통에 이어서 등장했던 철학 학파였는데, 그리스·로마 시기에 에피쿠로스학파와 함께 당시 철학계를 양분하고 있었다.알튀세르와 들뢰즈의 사유도 결국은 그리스·로마 철학과 싶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알튀세르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주발생론으로부터 중요한 철학적 영감을 수용하게 되면서, 마침내 ‘우발성의 유물론’을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들뢰즈의 사유도 그리스·로마 철학, 특히 스토아학파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특히 들뢰즈가 가장 깊이 영향을 받은 부분은 “세계는 물체들의 집합체이고 의미는 물체들의 마주침으로부터 발생한다”라는 스토아학파의 발상이었다.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이 가진 혁명성 혹은 새로움의 기원은 그들이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무시되었던 그리스·로마 철학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굴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영미권에서도 그리스·로마 철학을 새롭게 부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던 것은 인간 정신을 물질적으로 독해하려는 그리스·로마 철학의 전통이었다. 주류 서양철학 전통이 인간 정신을 물질과는 무관한 정신적 실체로 이해했다면,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정신을 철저하게 물질적인 것으로 사유했다.프랑스나 영미권에서의 그리스·로마 철학에 대한 관심은 사실 전문 철학자들을 넘어서 평범한 일반 사람 실천철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계 전체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영위하라는 스토아주의의 실천철학을 따를 것인가? 그들이 남긴 실천철학적 전망이 우리에게 심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로마 시대나 지금의 시대가 모두 제국의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은 ‘팍스 로마나’속에서, 현대 서양 사람들은 ‘팍스 아메리카나’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또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그리스·로마 철학이 동양의 사유 전통이 가진 철학적 전제들을 많은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에피쿠로스학파: “현재 이루어지는 단독적인 삶을 향유하라!”에피쿠로스학파는 ‘아타락시아(ataraxia)’를 강조한다. 아파테이아와 비교되기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종종 ‘평정심’으로 번역이 되는 말인데 ‘마음에 불안이 없고 몸에 고통이 없는 평안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가끔 지문 속에서 에피쿠로스 학파를 스토아학파로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사실 독해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 때문이다.에피쿠로스 학파는 ‘현실세계에서의 행복’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아무래도 영국의 경험론이라던지, 공리주의에 가까운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소피스트가 경험론에 선구적 영역을 개척했다면 에피쿠로스에 와서야 비로소 경험론적 전통의 기틀이 만들어진다고 보면 된다.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로 대표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흔히 쾌락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에피쿠로스학파는 개체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헤도네’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은 오늘날 성급하게 (개인적) ‘쾌락’이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이 기쁨이나 유쾌함을 느끼는 모든 체험을 가리키는 포괄적 표현이었다. 만약 타자와의 관계가 기쁨과 유쾌함을 낳는다면, 에피쿠로스학파는 그들과 더불어 공동체적 삶을 지향했을 것이다.역사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교외에 정원을 사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유명했다자들이나 노예들도 동등한 구성원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심과 주변, 혹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위 구조를 가진 기존 공동체들이 에피쿠로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저주했던 것도 사실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독립된 자유로운 개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관계에 대해 혐오감 내지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전체의 권위를 중시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것이다.사실 에피쿠로스학파가 당대의 지식인들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저주를 받았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플라톤으로 상징되는 주류 서양철학 전통의 근본 전제들을 강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여기 루크레티우스가 지은 에 들어있는 한 대목을 살펴보도록 하자.마음이 신체와 더불어 생겨나며 신체와 함께 성장하고 신체와 함께 늙어 감을 우리는 지각한다. 부드럽고 연약한 신체를 가진 어린아이가 걷듯이, 그들의 판단력도 미약하다. 성숙해져서 힘이 강해질 때, 그들의 판단도 나아지고 그들의 마음의 힘도 강해진다. 나중에 거친 세월의 힘이 그들의 신체를 공격하고, 수족이 무디어져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후에, 지력이 떨어지고 혀가 헛돌아가며,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이 약해지고 스러진다. 그래서 생명력이 있는 실체는 모두 연기처럼 공기 중의 미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방금 읽은 구절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루크레티우스가 마음과 육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 즉 평행론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육체의 역량과 마음의 역량은 반비례 관계가 아니라 비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이나 기독교에서는 마음과 신체가 대립적인 것으로, 동시에 마음은 신체와는 달리 불멸성을 갖는 것으로 사유되었다. 이런 주류 전통의 입장에서 볼 때 영혼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입장은 이단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에피쿠로스학파의 평행론을 살펴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이 학파가 왜 에픽테토스 같은 스토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그의 눈에는 쾌락을 중시했던 에피쿠로스학파가 기본적으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다음구절은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라는 젊은이에게 바람직한 삶에 대해 조언하면서 보낸 서신가운데 일부분이다.쾌락이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자 끝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락이 원초적이고 타고날 때부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거나 회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하며, 우리의 쾌락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의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쾌락으로 되돌아간다. …중략…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이것 때문에 마음의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인간은 쾌락의 존재였다.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이 기쁨을 지키려고 하고 슬픔을 제거하려고 하는 코나투스에 놓여 있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또한 프로이트도 인간의 행동이 쾌락을 지향하고 불쾌를 피하는 쾌락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이야기했다. 바로 이들의 관점에 앞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제 1원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죽음마저도 쾌락원리에 의해 선택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에 따르면 “죽음은 근심 걱정에 빠진 사람을 제거해서, 더 많은 불행을 더 겪을 수도 있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이 아니었고,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일 수들”을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제거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혼란된 생각은 우리 삶에 진정한 쾌락을 주는 것들에 대해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에피쿠로스학파가 육체적 향락에만 빠져 있다는 당시 세간의 오해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에피쿠로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발생하는 쓸데없는 욕망을 부정하려고 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치적 활동을 멀리하면서 자신만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동체는 명예나 부 혹은 권력을 대가로 인간들로 하여금 상호파괴 혹은 상호 갈등관계에 빠지도록 유인하곤 한다. 바로 이 대목이 에피쿠로스학파가 중국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양주의 쾌락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 ‘진심’ 상편을 읽어 보면, “양주는 ‘위아’를 주장하면서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았던” 철학자였지 때문이다. 양주는 각자가 자신의 삶을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간주할 때에만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스토아학파: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영위하라!”스토아학파는 ‘아파테이아(apatheia)’를 강조한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부동심(不動心)’, 즉 변치 않는 굳은 마음 자세 정도를 의미하는데 아무래도 이성으로 우주의 원리를 깨닫기 우해 욕망과 감정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담진 말이라고 볼 수 있다.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로마제국까지 전달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법 사상에 주요한 영향을 주게 되는데요 로마 만민법이라던지 근대 자연법 같은 것들이 스토아학파의 영향권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성을 소유한 이상 모두가 평등하다. 올바른 이성이 곧 법이다 식의 생각들이다.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이성중심주의의 계보 속에서 칸트나 스피노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스피노자의 사상과는 너무나 유사한 측면이 많기 때문다.
불교의 자연관불교의 자연 개념을 논하기에 앞서, 자연이라는 표현이 한역불교에서 실제로 사용된 경우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원래 자연이라는 말 자체는 중국 도가 사상에서 도의 본성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로서 ‘제 스스로 그러함’을 뜻하는데, 이것은 “억지로 만들거나 일부러 하지않으면서 만물이 스스로 서로를 다스려 질서를 잡는 것”을 의미했었다.그런데 불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제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이런 자연을 ‘저절로 그렇게 됨’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항상 장로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네 가지 복이 저절로 자라난다.” 인위적 노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생기는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거나, 불국정토에서는 온갖 좋은 것들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고” “저절로 앞에 나타난다”하는 것들이 좋은 예이다.그런데 이때의 자연은 팔리어 sayam.이나 산스크리트 svayam.에 대한 번역어로서 단순히 ‘저절로’라는 수식어에 불과할 뿐, 소위 자연관을 논할 때의 그 자연 개념은 아닌 것이다.따라서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온전한 자연 개념을 불교적인 사유 속에서 검토해 보기 위해서는, 그 단서를 단순 역어로서의 자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곳이 바로 다르마이다. 인도 철학 사상에서 다르마만큼 복합적이고도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도 없을 것이다. 대충 열거해 보아도 법령·판결·관례·규범·질서·법칙·이법·의무·권리·정의·도리·도덕·선행·진상·진리·교리·교설·본성·본질·요소·사물·사건·존재 등 20여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떠받치다’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다르마는 크게 보면 ‘어떤 것을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 또는 ‘어떤 것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이며, 이를 좀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은 네 부류로 나뉜다.첫째, 인간 사회를 떠받쳐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사회의 ‘질서’와 ‘규범’과 ‘법령’, 카스트 제도상의 ‘의무’, 인생의 네 가지 주기에 관한 ‘관례’ 등을 뜻한다. 이의 다르마가 카스트적 규제를 포함하는 지극히 인디아적인 법임에 반해, 이런 불교의 다르마는 카스트 제도를 넘어선 만유 보편의 법이다. 전자가 신들의 계시로서 영원 불변한 부동법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무수한 조건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인연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 만물의 원리 내지 본성으로서의 다르마란 내용적으로는 바로 ‘연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셋째, 이런 만물의 법칙에 의해 지탱되어 유지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그런 이법에 의해 형성된 ‘사물’이나 ‘존재자’ 혹은 그 존재자의 구성 ‘요소’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연기’라는 본성적 원리에 따라 ‘연기한 것’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일체법이나 제법이라는 말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존재자들이다.넷째, 그런 만물의 법칙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에서는 ‘교설’ ‘교리’ ‘경전’ 등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불법이라 하고, 그런 가르침을 삼보의 하나로서 법보라고 할 때가 여기에 해당된다.이상과 같은 다르마의 여러 의미들 중 두번째와 세번째 의미가 불교적 자연 개념의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의 이법이나 본성을 ‘연기’로 보는 것은 ‘본성으로서의 자연’에 해당하며, 연기를 본성적 원리로 하여 ‘연기한’ 일체의 존재자들은 ‘전체로서의 자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은 각각 법성과 법계로 표현될 수도 있다. 법성이란 법의 본성을 말하는데, 이 때의 법은 실제로는 제법, 즉 모든 ‘연기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법의 본성으로서의 법성이란, 연기한 제법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성격, 또는 연기한 모든 존재자를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이 연기라는 원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연기한 것’들을 추상화한 하나의 이법이기 때문에, ‘연기한 것’을 추상명사로 만들어, 연생성을 법성인과성[근대]이고, 도가에서는 무위자연성인데 비해, 불교에서는 이처럼 무상성과 무아성과 공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호의존성, 즉 연생성이 자연의 본성(법성)인 것이다.이러한 연생성으로서의 법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자의 있는 그대로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제법실상이라고도 한다. 또한 상호의존적 발생이라는 이러한 ‘현상의 규칙성’은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간에 이미 있어 온 일종의 법주성으로서, 그러한 법을 깨달은 자가 곧 붓다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성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근본적 가능성인 불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법계라고 할 때, 그 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야기하다’ ‘놓다’는 뜻의 유래는 ‘야기하는 근원’과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놓여진 것(分齊, 가지런히 나누어 가짐)’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생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법성과 같은 의미가 된다. 하지만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연기라는 원리 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며 모여 있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법계는 곧 ‘연기한 제법’, 즉 일체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불교에서 ‘전체로서의 자연’이란 이처럼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관통되어 있는 세계, 상호의존하여 이루어진 모든 존재자, 곧 일체법으로서의 법계이다. 그런데 일체법은 12처, 18계, 유위법과 무위법 등으로 표현된다. 12처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 등의 내적인 것과 형태(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사물(法) 등의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경험의 열두 가지 터전’을 말한다.18계는 이런 여섯 가지의 육체적 기관을 인으로 하고, 저 여섯 가지의 물질적 대상(六境)을 연으로 하여 여섯 가지의 정신적 작용이 일어남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일체를 12처 또는 18계라 함은, 육체계와 물질계와 정신계가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통합되어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법도 다 함께 일체법으로서 모두 연기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한다.첫째, 무위법도 ‘연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라 해서, 연기하는 이 현실의 세계와 무관한, 마치 신과도 같은 영원 불변한 절대자의 세계가 아니며, 그렇기에 출세간은 세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어리석음의 세계를 깨달음의 세계로 변혁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당위성이 확보된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무위가 유위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미계(迷界)를 오계화(悟界化)하는 중생제도가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둘째, 유위법도 무위법도 모두 ‘연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양자는 상호의존하여, 자기만의 존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므로, 유위법과 무위법, 세간과 출세간, 미계와 오계가 모두 무자성 공이라는 점에서 전혀 차별이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고, 번뇌가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자성 공으로서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특정한 입장’에 따라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이처럼 무자성 연기의 ‘법에 따라 그러한 것’은 ‘같고도 같은 것’이요, ‘진실로 같은 것’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따라서 ‘법과 같아 제 스스로 그러한 것’에서는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부분과 전체가 둘로 분열되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상즉(相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무책임한 신비주의적 동일화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것에 자리를 잡아 머물러 집착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여 봄으로써, 사태의 진상에 제대로 다가가기 위해서이다.그러므로 부분과 전체가 상호 침투한다는 것은, 협소한 분석의 시각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지만, 연기적 전일성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한없이 거듭 거듭해서 상호 관련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사물은 고립된 부분이 아니라 전 우주와의 관계망 속에서 그 우주체이기 때문에, 자연 내 요소들 간의 인과관계도, 일정한 원인의 부분이 제한된 범위에서 일정한 결과의 부분을 낳는 쪽으로만 진행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획일적이고도 단순한 선형적 인과관계가 된다.그러나 불교의 연기론에서 자연은 마치 인드라의 그물처럼 수많은 조건들이 서로를 반영하는 관계들의 연쇄이기 때문에, 자연 내 구성원들 간의 인과관계도, 원인과 결과가 ‘고정된 선후관계’나 실체성(自性)을 고집하지 않는 역동적이고도 공(空)한 관계가 된다. 이것은 현대의 생태학적 시스템 이론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그 이론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자기조직적 그물망이기 때문에, 자연 내 각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 역시, 되먹임 작용을 통해 결과가 원인에 재투입되기도 하는 환류적이고도 복잡한 비선형적 인과관계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의 일방성과 단순성을 주장하는 근대의 기계론과는 달리, 인과의 상호성과 복잡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과 시스템 생태학은 일맥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한편 인간과 자연이 둘로 분열되지 않는다는 것은 근대 서양인의 인간관과 자연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인에게서 인간은 비물질적 정신성을 본질로 하고 이와는 반대로 자연은 물질적 연장성을 본질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각각 독립된 실체로서 분립되는 것들이었다.그러나 불교에서 자연은 이런 것이 아니다. 법성을 본성의 원리로 하고 법계(法界)를 전체의 범위로 하는 불교적 자연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상의성과 연생성과 공성을 법으로 하여 통일된 한 생명의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 천지와 나는 한 뿌리이고,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며(色心不二),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 그러므로 땅의 인연을 받아 태어난 생명(身)과 그 땅(土) 자체는 언제나 하나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생태학의 입장이기도 하다. 생태계에서는 ‘생산자’인 녹색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통해 산소를 방출하고 자신의 유기물을 동물이나 미생물에게 제공하며, ‘소비자’인 인간과 동물은.
1. 게슈탈트게슈탈트는 무엇인가? 게슈탈트란 사물을 볼 때 부분과 부분을 하나의 의미있는 전체상(全體像)으로서 파악할 경우 그 전체상을 말한다. 이 뿐만 아니라 통합되어(합쳐져)있는 구조, 질서를 갖고 법칙에 따르는 체제나 전체라는 개념에 중점이라고도 말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것’이라고 하며 전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심적 발상이다. 혼돈된 무질서한 ‘집합체(集合體)’나 단순한 ‘총화(總和)’와는 구별된다. 그리고 형태(形態)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형태는 게슈탈트의 한 속성을 나타내는데 불과하다. 요소관(要素觀), 기계관(機械觀)을 비판하는 것이 게슈탈트 심리학의 중심개념이다.‘무의식의 의식화와 id 있는 곳에 ego가 있게 하라.’ 라는 한 문장을 읽었다. 여기서 id는 원초아이고, ego는 자아이다. 게슈탈트의 기본적 입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감정체험과 지각(awareness), 그리고 현재-경험-자각(의식)-현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게슈탈트라는 말은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 명사에서 유래했다. 영상 인식의 게슈탈트 이론은 독일의 심리학자 막스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가 1910년 여름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영감을 얻어서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기차의 불투명한 벽과 창문 프레임이 부분적으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도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이 단순하게 모든 영상 자극을 받아들이고 뇌는 이러한 감각을 일관된 이미지로 정리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베르트하이머에 의한 최초 연구를 더욱 심화 시켜서 영상 인식은 감각적 요소와 형태를 다양한 그룹으로 조직한 결과라고 결론지었다.2. 게슈탈트의 6가지 법칙게슈탈트 심리학에 따르면 "전체Gestalt는 부분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라는 믿음에 기초해서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지각의 조직화, 즉 어떻게 작은 요인이 더 큰 요인으로 분류되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 법칙을 개발했는데 우리가 게슈탈트를 지각하는 이 근본적인 법칙을 "게슈탈트 법칙 Gestalt Laws"이라고 한다.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조화롭고, 규칙적이고, 체계적이고, 단순한 방식에 따라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①유사성의 법칙 (Law of similarity) : 사람은 집중하기 위해서 가장 간단하고 안정적인 형태를 선택한다. 이 법칙이 정사각형, 원, 삼각형 등 가장 기본적인 모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뇌가 가능한 한 단순한 자극 형태를 유지해서 뇌가 즉시 인식할 수 있는 간단한 형태가 간단한 의미를 전달하기를 원한다.②근접성의 법칙 (Law of proximity) : 두뇌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물체보다는 서로 근접해 있는 물체들을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내용이다. 손을 잡고 가까이서 있는 두 친구는 20야드 떨어져 서 있는 세 번째 사람보다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③연속성의 법칙 (Law of comtinuance) : 뇌는 선의 갑작스럽거나 급격한 움직임의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뇌는 가능한 한 선의 부드러운 연속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선은 그림의 일반적인 선이거나 서너 개의 물체가 모여서 선을 형성하는 것일 수 있다. 연속적인 선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물체는 그 선의 일부가 아닌 다른 물체와는 정신적으로 분리된다.④공동 운명의 법칙 (Law of commom fate) : 보는 사람은 같은 방향의 하늘을 지향하는 다섯 개의 화살이나 모아진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므로 정신적으로 같이 분류한다.⑤간결성의 법칙 (Law of Pragnanz) : 이것은 우리가 특정 대상을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대한 가장 단순하고 간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을 보면 사실 수많은 복잡한 형태로 지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단순히 다섯 개의 원이 모여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이다.⑥폐합의 법칙 (Law of Closure) : 우리는 기존의 지식을 토대로 완성되지 않은 형태를 완성시켜 인지한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은 원도 삼각형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친숙한 형태와 이미지를 떠올리고 보이지 않는 선을 이어 삼각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3. 게슈탈트의 영향게슈탈트는 정신분석학적, 현상학적, 심리학적 등으로도 영향을 끼친다. 먼저, 정신분석학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알아보자.게슈탈트는 정신분석에서 성장·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생활태도에 있어서는 정신분석의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욕구(배경)를 깨닫고 (배경을 도형으로 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현실원칙(現實原則) 보다도 쾌락원칙(快樂原則)을 중요시하는 정신분석과 같은 패턴이다. 게슈탈트 치료의 관심사는 외계에 대한 게슈탈트의 재편성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내계에 대한 게슈탈트의 재편성에 있다. 따라서 외계(外界)의 객관적인 현실원칙에의 관심은 제2차적인 것으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