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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명 군주의 자질: 징기스칸과 진시황 비교 분석 평가A좋아요
    군주의 자질: 진시황과 징기스칸머리말리더(Leader)는 lead에서 나온 말로 ‘지도하는 사람’을 뜻한다. 세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리더들이 여럿 존재한다. 그 중에는 전 세상에 이름을 떨친 진시황과 징기스칸이 있다. 진시황과 징기스칸은 나폴레옹, 알렉산더 등과 함께 세계 10대 군주로 꼽히고 있다.두 군주는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진시황은 최초로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계획하고 실천한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그의 통일 대업은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강력한 진나라를 세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징기스칸은 금나라의 수탈대상인 유목부족에서 태어나 흩어진 부족을 하나로 끌어 모으고 몽골을 최초로 통일하였다. 그는 몽고 유목민의 영웅이 되었고 즉위한 후 대규모 군사정벌을 통해 영토를 넓혀갔다. 몽고족은 중원으로 이르는 길목에 위치했던 서하(西夏)를 제거하고 곧이어 북방을 장악했던 금을 점령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지역을 공략하여 거대한 몽고제국을 건설했다. 따라서 진시황과 징기스칸에게는 ‘넓은 국토의 지도자’라는 비슷한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두 군주는 과도한 정복욕으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방대하게 영토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오랜 기간 굳건히 이끌어 갔기에 세기의 군주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진시황과 징기스칸이 강력한 군주로서 이룬 공통적인 업적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두 군주가 갖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본문흥미롭게도 진시황과 징기스칸은 비슷한 업적들을 남겼다. 두 군주는 통일을 이루었고, 이후 체제, 문화, 종교 등에서 다양한 변화를 이루었다. 두 군주가 그러한 업적들을 세우고 지금까지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데에는 어떤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공통적으로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첫째, 진시황과 징기스칸의 뛰어난 ‘상황판단력’은 통일이라는 대업을 가능케 하였다. 두 군주의 가장 훌륭한 치적으로 평가 받는 통일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뛰어난 상황판단력으로 인해 가능했다. 진시황은 세상이 돌아가는 추세를 잘 파악하였다. 서주 왕실이 쇠퇴한 이후 열국들은 서로 패권을 다투는 약육강식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진시황은 이러한 정세의 흐름에 잘 적응하며 주변 국가들을 하나씩 병합해 감으로써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다.징기스칸도 상황을 잘 판단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는 몽고족과 몽고족을 위시한 주변의 유목민족들로 하여금 기마병으로서 언제든지 중원을 침략할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유목민족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열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징기스칸이 이끈 유목민족들은 군사적으로 결코 한족에 뒤지지 않았다. 몽골 군대의 모든 군사 제도와 군사 기술은 하나하나 칭기즈칸의 손으로 구축된 것이었다. 금나라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였고 성곽 방어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에 패배한 것은 칭기즈칸이 기마병을 육성하고 조직화하여 통일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였기 때문이다. 1211년 징기스칸의 판단과 준비는 빛을 발하였다. 그의 활약으로 금나라를 멸하면서 재통일된 중국제국은 멀리는 동유럽까지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거대한 다민족국가로 발전하게 된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이 진시황과 징기스칸은 상황을 미리 읽고 무엇을 조치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상황판단력은 두 군주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중요한 군주적 모습임을 알 수 있다.둘째, 진시황과 징기스칸은 ‘혁신력’을 토대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법치주의를 실현하였다. 통일 이후 넓어진 토지를 가진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서는 국가의 기본 틀이 되는 법률 제도를 재정비 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은 그 동안의 봉건제를 끝내고 군현제를 실시하며 중앙집권적인 황제지배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진시황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해 국가질서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였다. 징기스칸 역시 몽골통일 이후 구식의 제도 개선에 집중했다. 그는 '야사(Yesa or Yasaq)'라는 법률을 만들어 무법천지의 초원에 질서를 가져왔다. 칭기즈칸은 혈연이나 신분에 의해 지배됐던 몽골사회에 사람의 지배가 아닌 법치의 원리를 정착시켰다. 이 법의 특징은 최소 규율에 있었으며 법을 어길 경우의 처벌은 매우 가혹했다. 이처럼 진시황과 징기스칸은 엄격하고 통일된 법률제도를 새롭게 구축하여 진나라와 몽골제국을 유지하였다. 두 군주가 이룬 혁신적 개혁은 강력한 통치 체제 아래 국가의 번영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셋째, 진시황과 징기스칸이 이룬 업적들은 ‘자신감’이 기본 밑바탕이 되었다. 진시황의 자신감은 스스로를 위한 ‘황제’라는 호칭을 만들어 사용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진시황은 여섯 나라를 멸한 후 여러 왕 위에 군림하였다.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이세, 삼세는 물론 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했다. 시호를 폐지하는 진시황의 조치는 진나라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그의 자신감을 대변한다. 또한 진시황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며 스스로를 절대자로 신성화한 것이다. 이처럼 진시황이 호칭 문제에 신경을 쓴 것은 그가 군주로서의 야심과 자신감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징기스칸의 자신감도 대단했다. 그는 가난했고 글을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 없던 황무지와 같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최면을 걸듯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무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골몰하였다고 한다. 결국 징기스칸은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고 최강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만약 이 두 군주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자신이 믿는 바를 밀어 붙일 줄 아는 추진력 역시 부재했을 것이다. 자신감은 두 군주가 통일을 이루고, 통일 후 광활한 국가를 이끌어 가는 데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자질임을 알 수 있다.맺음말진시황과 징기스칸의 지도력은 현재까지도 많은 곳에서 회자되곤 한다. 진시황과 징기스칸이 많은 업적들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이 공통적으로 두 군주에게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질은 바로 상황판단력, 혁신력, 그리고 자신감이다. 진시황은 열국의 패권다툼과 약육강식을 보며 조만간 천하가 하나로 합쳐질 것을 일찍이 느끼고 정세의 흐름에 적응해 결국 중국 최초의 통일을 이루었다. 징기스칸은 유목민족으로서 농경민족과의 교역에서 피할 수 없을 전쟁을 대비해 기마병의 전쟁 태세를 갖추었고 마침내 거대한 몽골제국을 세웠다. 즉 두 군주는 천하대세를 읽는 뛰어난 상황판단력을 갖고 있었기에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통일을 이룬 후 그들은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혁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진시황은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켰고, 징기스칸은 ‘야사’라는 법률을 새롭게 만들어 무법천지였던 몽골제국에 엄격한 질서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두 군주는 각각 절대자로서 자신의 국가가 영원히 존속 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계정복을 이루겠다는 야심 찬 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처럼 진시황과 징기스칸이 대업을 이루어 오늘날 세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유명한 군주로 꼽힐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지도자의 자질들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저서∙제정관. 『리더십 포커스』, 교보문고, 2006번역서∙리카이위엔. 『진시황의 비밀』, 하병준 역. 서울: 시공사, 2010∙쓰루마 가즈유키. 『중국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진시황제』, 김경호 역. 서울: 청어람 미디어, 2004∙왕리췬. 『진시황 강의』, 홍순도, 홍광춘 역. 파주: 김영사, 2013논문∙박성완. 『칭기즈칸 리더십과 공군 리더십 비교 연구』, 건국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7보고서∙고재웅. 「칭기스칸의 리더십, 경영전략, 성공비밀」, 『신한FSB리뷰-오피니언』, 신한FSB연구소, 2006웹 문서∙스타투어. 「진시황제」, http://www.startour.pe.kr/local/china/china_infom_1_15.htm, 2013년 11월 27일 검색∙컴내꺼. 「제3장 대 몽골제국」, http://jsyang2.com.ne.kr/homepage/history5-5.html, 2013년 11월 30일 검색 PAGE * MERGEFORMAT 1
    인문/어학| 2016.10.04| 3페이지| 2,000원| 조회(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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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당나라의 여성정치가 상관완아 요약본(역사적 배경, 활약, 인사정치, 역사적 평가)
    중국 당나라의 여성정치가, 상관완아배경-당 초 7~8세기 황실 여성들의 정치 참여 확대: 황실 상층 여성들과 내명부 아래 여관들의 긴밀한 연합-그녀는 누구인가? 상관의의 손녀. 무측전 집정시기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발탁되어 무측천을 도와 황제의 명령 담당 시작-그녀의 주요 임무: 황제의 명령을 문서로 만들고 전달하는 일-문서들을 장관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제도적 배경①당대 초기 황실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면서 궁관들의 역할 확대.(내명부 체계: 정 1품, 정2품(소용), 정3품(첩여), 정4품, 정5품, 정6품, 정7품, 정8품, 육상궁관)②당대 초기 중앙의 중서성, 문하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공식적 행정 체제 외에 황제의 뜻을 더욱 잘 관철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정책 결정 방식을 모색하는 노력-> 황제 직속의 문서 행정 체제 성립 과정에서 상관소용의 역할도 확대(현종 ‘한림원’, 고종 ‘북문학사’, 중종 상관소용이 홀로 담당/측천시기: 비공식적, 임시적 -> 중종시기: 공식적 직위와 명분)그녀의 활약-그녀의 임무와 무관하지 않음-중앙 정치의 격동기중앙 정치 흐름상관완아측천무후황제의 명령 담당장간지 ‘오왕의 난’ 일으켜 무측천 퇴위중종 황제, 위 황후, 안락공주-중종의 신임으로 첩여 자리에 올라 보좌-위 황후로 하여금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를 천거하여 힘 세진 장간지 중앙 정계에서 제거 하고 무씨들과 연합해 세력 키우게 함위 황후 중종 독살-위 황후가 전권을 휘두르려 하자 상관완아는 태평공주와 연합-중종의 유서 급조(온왕 황태자로 삼고 황후와 상황 단 섭정해라)태평공주와 임치왕 이융기 연합은 정변일으켜 위 황후와 안락공주 몰아내고 임치왕의 아버지 예종 복위-이융기는 상관완아 처형(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치질서 확립 위함)상관완아는 황실 내 정치 격동 속에서 자신의 직무를 적절히 이용해 자기의 세력을 지키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대응인사정치-그녀는 측근 층 형성으로 중앙 정치 참여를 더욱 확대①무삼사:중종은 장간지 등의 도움을 받아 다시 황위에 올랐지만, 장간지 등 무리의 세력이 강해져 이에 대한 견제가 필요. 상관완아는 무삼사를 위 황후에게 천거해 궁중 정치에 참여하게 하고, 이로써 무삼사는 중종과 위후를 도와 장간지 등을 통제 하에 둠.②최식최식을 재상이 되게 함. 최식은 재상의 자리에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뇌물을 받으며 관직을 제수 받도록 하기도 함. 탄핵으로 강주 지방의 사마로 좌천되자 상관완아는 그녀의 정치력을 동원에 수도에서 더 가까운 양주 지방의 자사의 자리로 좌천시킴.-당시 궁중 여성들 중 세력 있는 자들의 인사권 깊이 개입: 사봉관(관직을 임명할 때 공식적인 규정인 중서성, 문하성을 거치는 절차를 밟지 않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방식)자신의 측근을 주요 관직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중앙 정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 후비로서의 자신의 지위가 갖는 한계를 극복황제 중심의 정치 체제 속에서 궁중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신분의 한계로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는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지켜주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남성 정치가들이 필요했던 것.상관완아가 제시한 정책-참정하는 동안 여러 정책들을 제시: 문인 우대, 여성 관련-모친상의 복상 기간 조정: 위 황후에게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에 대해서도 자녀들이 3년 동안 상복을 입도록 상복관련 법의 개정 제안VS 남존여비의 질서 해친다-무측천의 선례를 따라함: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생존해 계셔도 1년의 복상이 아닌 3년간 복상 하도록 함-> 모친의 지위 제고, 여성 존중의 의미무측천처럼 정권 장악하려는 새로운 황후의 등장을 알리는 정치적 신호, 여성의 집정을 확실히 밝히는 상징적 의미여성에 대한 존중을 강화하는 정책의 정치적 의미: 상징 정치로서 여성의 집권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위 왕후의 집권을 돕고 상관완아 본인의 입지 높임)역사가들의 평가-‘내정을 오로지 하다’- 오대시기, 북송시기 사가들의 평가는 부정적이지만 당시 그녀가 궁중 정치에 매우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을 인정(, : 상관완아의 어머니 정씨의 범상치 않은 태몽 이야기 기록)상관완아는 자신의 직무를 통해 황제의 명령이 중서성, 문하성이라는 외정의 공식 기구로 전해지기 직전 단계의 과정에서 내정을 장악->그녀의 영향력이 황실 내 몇 명 여성 간의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중앙 정치에 영향 미침.
    인문/어학| 2016.10.04| 2페이지| 1,500원| 조회(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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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고대문명 강의노트 정리
    미케네 문명기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그리스 신화/ 유럽중심주의 시각에서 새로 연구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사그리스 신화는 도리스족 침입 이전의 역사, 즉 1120년경 이전의 미케네 문명기의 그리스 역사를 담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 신화를 재미있지만 역사적 실재와는 관련이 없는 허구의 이야기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의 후기 역사가들은 통사를 쓸 적에 이러한 그리스 신화 이야기들을 사료보다는 허구적 이야기로 멀리하고 도리스족 침입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을 그리스의 역사로서 기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신화 최고의 신은 제우스라고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 신화의 족보는 이집트인 ‘다나오스’부터 시작된다. 제우스,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화적 인물들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집트와 오리엔트가 그리스 최초의 문명인 미케네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많은 서양학자들은 미케네 문명이 자생적이고 독특한 문명이거나 인도유럽어족인 아리아인종의 침입으로 형성된 문명이라 주장해 왔다. 따라서 서양학자 입장에서는 유색인종 이집트인 다나오스와 그 후손에 관한 그리스 신화가 역사를 말해 주는 사료보다는 허구성이 강한 이야기로서 여겨지길 더 원할 것이다.그리스 신화가 통사에서 제외되고 허구적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는 이면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미케네 문명기를 담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연구와 서술이 유럽중심주의 시각에서 새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마틴 버낼 ‘블랙아테나’적지 않은 학자들이 유럽중심주의적 고대 그리스사 서술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영국 학자 마틴 버낼은 ‘블랙 아테나’를 통해 그 연유에 대해 새로운 차원에서 명쾌하게 주장했다. 마틴 버낼에 따르면 유럽중심주의적 고대 그리스사 서술은 제국주의 정책과 프랑스 혁명 때문이다. 1800년을 전후해 유럽은 대대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폈으며 이집트인과 페니키아인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는 인종주의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두 명의 헤라클레스그리스인들은 도리스족 왕들의 조상들을 다나에의 아들 페르세우스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로 잡고 있고 그들을 그리스인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도리스족의 지도자가 이집트인들이었다. 이집트인 다나오스가 이집트를 떠나 그리스 땅 아르고스에 도래하여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해 많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보면 다나오스의 5대손은 페르세우스이고 9대손은 ‘헤라클레스’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이 국조나 수호신으로서 숭배한 헤라클레스는 사실 인간 헤라클레스이다. 신으로서의 헤라클레스는 이집트가 근거지다. 헤라클레스는 원래 이집트의 12신 중 하나였으며 그것이 페니키아에 전래되고, 또 페니키아에서 그리스로 전래되었던 것이다.2)헤라클레스가 된 이집트인 암피트리온의 아들 알키데스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 헤라클레스와 인간 헤라클레스라는 두 종류의 숭배를 확립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인간 헤라클레스가 어떻게 신 헤라클레스로 바뀐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깔려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숭배된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땅에서 태어난 인간 암피트리온과 알크메네의 아들 알키데스이다. 다나오스의 후손인 암피트리온의 아들 알키데스는 ‘이집트신 헤라클레스’의 명성을 물려받고자 이름을 헤라클레스로 개명하였다.3)헤라클레스가 제우스의 아들이 된 이유도리스인의 왕은 아이기미오스였는데 왕좌에서 쫓겨났지만 헤라클레스에 의해 다시 복위되었다. 아이기미오스는 헤라클레스가 죽은 후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장남을 입양하였다. 이렇게 해서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이집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땅에서 왕위를 이어나가게 된 것이다. 이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도리스족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입한다. 이것이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귀국’이라 불리는 도리스족의 침입 사건이다. 그리고 도리스족은 시조인 헬렌을 숭배하였고 헬렌은 제우스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의 후손들도 자연스레 제우스를 숭배하게 된 것이다.인간키데스는 개명하여 헤라클레스가 되었고 동시에 도리스족의 수호신 제우스의 아들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럽중심주의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아테네에서 국내적으로 발전한 민주주의와 국외적으로 펼친 제국주의는 상공계층 히페이스와 노동자계층 테테스를 부각시킴으로써 국내 정치상황을 변화시키게 된다. 기원전 594년 아르콘 솔론은 처음으로 평범한 시민에게도 공직에 참여시키고자 아테네 시민을 재산정도에 따라 4계층으로 나누었다. 귀족만이 아르콘이 될 수 있었던 전례를 깨고 상공계층에게도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또한 테테스에게 민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과 법정에서의 배심원 자격을 주었다. 솔론의 이러한 민중을 위한 개혁으로 인해 상공계층인 히페이스와 노동자 계층인 테테스가 부각되면서 아테네 제국주의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솔론 이후 기원전 493년 아르콘이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해군과 아테네의 숙적 아이기나를 대비하기 위해 자연지물로 보호된 피레우스를 요새화하기 시작하며 해군 개혁을 하였다. 기원전 483년 아티카에서 은광이 발견되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이 수입으로 삼단노선을 건조하자고 설득하였다. 이로써 아테네는 200척에 이르는 전함을 지니게 된다. 이는 아테네가 해군을 통해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시에 전함에 승선하여 해군을 구성하게 된 테테스 계층은 아테네 정국을 주도해나가는 세력이 된다. 또한 아테네의 새로운 외항 피레우스는 테테스 계층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피레우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테테스의 정치적 입김이 더 강해지는 근원이 된다. 즉 테미스토클레스의 개혁은 해군대중을 형성하게 한다.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재침에 대비하고자 기원전 478년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아테네는 468년 동맹에서 탈퇴하려는 낙소스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동맹국들을 예속국으로 삼는 제국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기원전 461년 해군대중을 등에 업은 페는 테테스들에게 지급되는 급료가 대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해군대중은 아테네가 제국주의 정책을 펴길 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테테스계층은 급료를 받으면서 중무장병의 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국가를 지키는 군대로서 참정권을 보상으로 받게 되었다. 따라서 테테스는 제국주의 정책의 추진 세력이자 수혜자였다.페리클레스로 하여금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게 한 또 다른 계급은 상공계급인 히페이스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 된 페리클레스의 메가라 봉쇄령은 페리클레스를 지지하는 상인들이 메가라와 코린트를 견제하여 무역로를 확보하려는 목적 하에 압박하여 입안된 정책이었다.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 해군대중의 제국주의에 대한 열의와 상공계층의 해외진출에 대한 열의가 원인이 되었다.기원전 420년대에 들어서면 상공계층 출신들이 장군으로 선출되기 시작하고, 클레온은 귀족가문 출신이 아닌 자로서 장군으로 선출되어 아테네의 국정을 이끈 최초의 데마고고스였다. 그러나 클레온은 그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테테스와 상공계층의 요구에 제국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시실리를 아테네 제국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시실리 원정과 펠로폰네소스 전젱에서 아테네는 패전하여 종결된다. 이렇듯 아테네의 제국주의는 테테스의 정치적 입지를 증대시켰고, 테테스는 상공계층과 더불어 제국주의를 극단으로 치닫게 한 추진세력이었다.그리스 비극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지 사이의 갈등, 티케 대 그노메로 구성되는 특징을 갖는다. 전통적 의미의 티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신이 인간사에 개입할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 사건을 우연한 사건으로만 알고 있다가 세월이 흘러서 그 사건을 뒤돌아보았을 때 신의 뜻이 곁들여졌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그러한 사건이 티케였다.그런데 티케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라는 뜻을 지닌 그노메를 중시하는 사람들 소피스트들이 나타났다. 소피스트들은 5세기 아테네에서 활약한 이오니아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토대로 쓰인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를 소피스트적 지혜인 그노메의 화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티케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오이디푸스를 팔자로 몰아가는 역할을 하는 티케이고 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신탁대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종말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티케의 중요성과 그노메의 한계를 말하고자 한다.연극은 오이디푸스가 생부를 살해하고 생모를 아내로 맞이한 사실이 밝혀지는 진상 해명의 순간에 초점을 맞춰 그 진실이 드러나는 역순의 과정으로 전개된다. 테베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받고 명망 높은 점쟁이를 불러 라이오스를 죽인자를 묻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혜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대단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점쟁이는 살인범이 오이디푸스라 말하지 못하고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푼 일이 바로 그를 파멸케 할 것이라 말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것은 티케라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면 테베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테베의 전왕 라이오스의 아내이자 자신의 생모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왕비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가 받은 신탁과 라이오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주는 것은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신탁대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티케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오이디푸스는 30년 전쯤 자신이 테베 왕이 되기 전 길거리에서 살해한 노인이 라이오스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또한 코린트의 왕자였을 때 연회석상에서 취한 어떤 사내가 자신이 코린트왕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티케로서 오이디푸스를 팔자로 몰아가는 역할을 한다.오이디푸스는 코린트 왕의 부음을 전하러 온 사자와 라이오스를 수행했던 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의 증언으로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이며 지금의 왕비가 생모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스스로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 방랑한다.
    인문/어학| 2016.10.04| 4페이지| 1,0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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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문)사례연구: 대리인문제(부산저축은행사태)/Case Study: The Agency Problem(Busan Savings Bank Scandal)
    Case Study: Agency Problem제 출 일담당교수님학번 /전공이 름ContentsIntroduction to the Case…………………………………………..3The Beginning of Busan Savings Bank Scandal…………..4Busan Savings Bank……………………………………………………………………………..…………..4Backgorund………………………………………………………………………………………………………4Busan Savings Bank Scandal……………………………………………………………………………5The reason of Busan Savings Bank Scandal………………..6The insolvent operation of PF loan by the recession of real property…………..6The fiercer competition in the market of small loan………………………………………7The Major Shareholders and Executive’s Moral Hazard and Insufficiency of Operating Capacity…………………………………………………………………………………..………8The limitation of the policy and the supervision……………………………………………8Agency Problem by the Moral Hazard………………………9The Busan Savings Bank………………………………………………………………………………...9The ownership Structure………………………………………………………………………………10Conclusion and Implication…………………………………….11.Reference……………………………………………………………………….……..12Introduction to the CaseAccording to Berleand Means(1932), compand of practice was blamed after IMF foreign exchange crisis. Now, I would like to study agency problem more by the case of the Busan Savings bank.The Beginning of Busan Savings Bank ScandalBusan Savings BankThe savings bank is nonmonetary institutions. They provide higher interest rate so that many ordinary people who have small money use the savings bank. In 1972 there was a legislation of Mutual Savings and Finance Company Act to make private loan market legalized and the mutual savings banks were established. In 1980s the mutual savings bank’s work range was increased and they become community reinvestment act.Banking sectorCity Bank-General bank(Kukmin bank, Shinhan bank, Hana bank, Woori bank etc)-Specialized bank(Suhyup, Korea Federation of Livestock, National Agricultural etc)-Local bank(Jeonbuk bank, Daegu bank etc)Non-banking sectorNon-bank financial institution-Securities, Insurance Company, investment trust, Merchant bank, Mutual savings bank, leasing, Venture CapitalThird setitution and so on.-There was a suspicion that the information of the suspension of business leaked in advance.-4 officer of the Busan savings Bank took 26billion won from the company by threating the blow of lillegal behavior.-Illegal loan and provision of credit of majority shareholers: The president of the Busan savings bank illegaly invested to the 120 SPC with the clients’ deposit and directly operated.-The Busan savings bank manipulated the loss of 1 trillion to the net profit of 1 trillion, then they did fraudulent accounting with total 2 trillions and 4533 billion and paid a dividend to a large stockholder unfairly.-There was a suspicion of robby, a request of loan, and bribe to the officer of finance provision institution.The reason of Busan Savings Bank ScandalThe insolvent operation of PF loan by the recession of real propertyAs the real property become active after the middle of 2000, the savings bank dealt with the real property Project Financing (PF) loan too much. PF loa pressure of deposit interest. Almost all savings banks depend on the arbitrate decision making of manager’s intuition in terms of their credit risk management because the savings banks can’t construct the systematic credit risk management system. Except for several large savings banks, individual savings banks have a lack of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so that the savings banks can’t establish the specialized credit risk management system with the advanced measure.The limitation of the policy and the supervisionThe government focused on the policy that can improve the external development of the savings bank such as introduction of ‘88club’ while the government did not take care of strengthening the function of supervision. The Finance Supervision Institution did not complement to the 17 savings banks which lost the qualification although the Finance Supervision Institution should obliterate the excess giving credit of 8 billion within 1 year if the savings bank lost the qualificatiohe high risk. Especially, the mutual savings bank has the permission of ownership of the industry asset which is different from the city banks that have the restriction of the share ownership. Also the size is small so that the large shareholders can acquire the ownership with the small asset. That is, the ownership of the large shareholder is generalized. However, recently the size is getting bigger and the number of the mutual savings bank that individual become the large shareholder is decreasing while the corporate large shareholder is increasing. On the other hand, in terms of the ownership structure, the large shareholders participate in the direct management more or they participate in the indirect management as external directors. There is a trend of management form that the ownership and the management are separated in the mutual savings bank.In Korea, the characteristic of the ownership structure in the mutual savings market is that the people concerned including the large sh2
    경영/경제| 2014.07.10| 12페이지| 1,500원| 조회(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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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험심리학 사례: 월미은하레일사고
    월미은하레일 사고월미은하레일은 2007년 안상수 전 인천 시장이 무려 853억원을 들여 조성한 사업으로서 인천역~월미도~인천역 6.1㎞ 구간을 순환 운행할 예정이었다. 국내 최초의 도심 관광용 모노레일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쏠렸었지만 2010년 4월 시범운행 중 추돌사고가 발생했고 같은 해 8월에도 차량 하부와 안내륜이 파손되는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월미은하레일 사고의 원인은 무리한 사업 강행에서 비롯됐다. 안상수 전 인천시장은 타당성 연구보고서를 무시했다. 인천교통공사에 의하면 당초 월미은하레일은 결함이 적어 안정적인 운행이 가능한 ‘노면전차 방식’으로 구상됐다. 인천시가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실시한 ‘관광전차 도입 타당성 검토 용역’ 결과에서도 노면전차 방식이 최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안상수 전 인천시장은 당시 모노레일 방식을 선택했다. 인천도시축전 개최 시기에 맞춰 개통하기 위해 공사 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한 것도 사고의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로 최소 공사기간이 24개월 이상 필요한 사업이었지만 13개월로 공사기간을 줄인 것이다.안상수 전 인천 시장과 시공사는 공사 착수 이전 과정에서 타당성 연구 결과에 따라 미리 위험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용-이익 분석’에 따라 공사를 계속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노면전차 방식 공사비용+24개월 이상의 공사기간에 따른 비용’과 ‘모노레일방식 공사비용+공사기간 단축에 따른 수익+사고 후 보상비용’을 비교해 본 결과 예상된 이익이 예상된 손해보다 더 컸을 것이다. 조사해 보니 노면전차 방식이 결함이 적어 안정적인 운행이 가능하지만 초기투자비용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계속 진행된 공사 결과 사고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예상했던 손해보다 더 큰 손해가 생기게 되었다. 안전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됨에 따라 월미은하레일은 시범운행이 중단되고 개통이 무기한 연기됐다. 전문기술진의 진단 결과 그대로 정상 운행할 수 없다고 밝혀졌고 결국 인천교통공사는 월미은하레일 사업을 포기하고 처리 방안을 결정해야 했다. 월미은하레일의 안전 문제를 해소하고 운행을 위해선 최대 250억~300억 원의 추가 투자가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은 300억 원이라는 많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위험을 줄여 안전하게 하길 바라지만 인천시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고 공사 과정에서 피해를 본 주변 상인들 때문에 결정을 쉽게 내리기가 부담스러운 입장이었다.월미은하레일 사고는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사회적 피해를 불러왔다. 부상이나 환경 손상과 같은 직접적 피해뿐만 아니라 이차적 충격효과로서 위험 감시와 규제 변화와 같은 강한 교정적 행동을 야기했다. 사고 후 구성된 시의회 조사특별위원회(특위)는 월미은하레일의 하자와 운행 불가에 대한 원인과 책임 소재를 규명하고?운영정상화와 안전사고에 대비를 위해 ‘철로와 차량 전면 교체’, ‘안전시설 확보와 차량 또는 레일 개조’를 제안했다. 또한 월미은하레일이 약 4년 째 방치되고 있는 탓에 주변 상인들의 주거지 자산 가치와 경제 활동에 국소적 충격이 있었다.월미은하레일 사업을 둘러싼 인천교통공사와 시공사 간 법적 책임 다툼이 계속되고 인천지역의 여야 간에도 각각 다른 입장을 보이며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논쟁이 과도하게 지속되다 보면 위험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각자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민주당 시당은 부실시공으로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만큼 다각도로 활용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새누리당 시당은 보수를 통해 당초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월미은하레일의 위험 문제가 정치 집단인 여야의 갈등 관계 선상에서 정치적 의제가 된 것이다. 이는 대중의 주의를 더 많이 끌게 되고 사회적 확산을 일으킨다. 사회, 인류학적 연구에서 바라보면?여야의 월미은하레일 위험성에 관한 논의가 사실 위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 차이가 기초가 된 것일 수 있다.최근 기사에 따르면 “인천시와 인천교통공사가 안상수 전 인천시장 교체 3일 전 월미은하레일의 준공 및 운행 허가를 내준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전문 엔지니어링사 기술조사 내용, 시민 여론조사 결과와 각계 전문가 의견, 시스템 안전성과 신뢰성, 기존 시설 활용도와 적용성, 관광 상품성과 경제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레일바이크로 활용방안을 결정하게 됐다는 게 인천교통공사의 설명이다. 또한 인천시 거주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월미은하레일을 즉시 철거하거나 새 시설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66.5%를 차지했으며, 보수해 현재 용도대로 쓰자는 의견은 23.8%에 그쳤다”고 한다. 같은 통계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분석하고 제시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위험 소통에서 매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보의 중간 전달자인 뉴스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다. 월미은하레일의 사고와 전문가들의 위험 진단에 대해 예전부터 여러 차례 보도되어 왔었기 때문에 많은 양의 정보가 시민들의 월미은하레일에 대한 잠재적 공포를 동원하여 사고와 관리 실패를 떠올리게 하거나 실패가 상상되도록 그 정도를 확대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보수해 현재 용도대로 쓰자는 의견’이 높은 수치가 나올 가능성은 적다.
    사회과학| 2014.07.10| 2페이지| 1,0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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