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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테마파크 비교분석- 한국테마파크의 발전방안
    한·일 테마파크 비교분석-테마파크 시장의 변화와 한국 테마파크의 발전 방안--목 차-제1장 서 론······………………………………………………………………………………………1제 1 절 연구의 목적··……………………………………………………………………………1제 2 절 연구의 방법…··…………………………………………………………………………2제2장 테마파크의 개념적 고찰·········…………………………………………………………3제 1 절 테마파크의 정의··………………………………………………………………………3제 2 절 테마파크의 역사와 형성 및 개발배경·………………………………………………51. 테마파크의 역사 …………………………………………………………………………51) 일본테마파크의 역사·…………………………………………………………………52) 한국테마파크의 역사·…………………………………………………………………62. 테마파크의 형성배경……………………………………………………………………73. 테마파크의 개발배경……………………………………………………………………7제 3 절 테마파크의 특징…………………………………………………………………………91. 테마파크의 일반적 특징…………………………………………………………………82. 테마파크의 사회적 특징·………………………………………………………………101) 테마파크의 사회적 역할····…………………………………………………………102) 테마파크의 파급 효과··………………………………………………………………11제3장 테마파크 현황········………………………………………………………………………12제 1 절 일본의 테마파크 ……………………………………………………………………131 .디즈니랜드………………………………………………………………………………142.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163. 하우스텐보스……………………………………………………………………………17제 2 절 한국의 테마파크 ……………………………………………………………………181. 에버랜드…………………운 프로젝트를 구상 중에 있는 시점이다. 아시아 지역의 이러한 추세로 볼 때 한국에서의 세계적인 테마파크 개발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테마파크에 대한 관심이 최근 높아지고, 또한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의 특성과 이미지를 살린 테마파크는 지역 경제의 활성화 지역적 문화의 개발이라는 측면과 국민의 생활 복지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주제를 테마파크의 개념과 배경을 토대로 한·일 테마파크의 형성과정 등을 비교분석하여 미래의 한국에 적합한 한국형 테마파크의 발전방향에 대하여 알아보고자한다.제 2 절 연구의 방법이 논문에서는 최근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 해외 테마파크의 도입 이슈와 관련하여 테마파크에 관한 본질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일본의 테마파크와 비교분석을 통하여 한국형 자생적 테마파크와 일본형 글로벌 테마파크에 관련된 차이점 및 앞으로 한국형 테마파크의 발전방향에 대하여도 알아보고자 한다. 이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연구의 범위는 한국과 일본의 테마파크를 중점적으로 하였다.먼저 글의 진행에 있어서 1장은 연구의 목적과 방법을 서술하였고, 제2장에서는 테마파크의 개념을 중심으로 정의 및 역사, 배경을 설명하였다. 제3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테마파크의 현황을 비교를 통하여 한국형 자생적 테마파크와 글로벌 테마파크의 도입배경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하였다. 제4장에서는 최근 이슈화 되고 있는 글로벌형 테마파크의 도입과 관련하여 테마파크 개발 성공과 실패 사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제5장에서는 앞장에서 확인한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하여 국내 테마파크 산업의 활성화 방안 및 대안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제6장은 결론으로 앞서 서술한 내용의 요약을 하고자 하였다.문헌적 연구방법으로 테마파크의 이론적인 내용을 검토하고 구체적으로 기사 및 학위 논문 및 인터넷을 이용하여 테마파크와 관련된 자료내용을 정리하였다.제2장 테마파크의 개념적 고찰제 1 절 테마파크의 정의일반적으로 테마파크테마파크는 스릴, 환상, 그리고 깔끔함과 친밀한 분위기라는 테마에 바탕을 둔 하루 종일의 건전한 가족 여흥을 제공한다.6. 테마파크란 티켓이나 음료는 판매하는 사업이 아니라 즐거움과 적절한 경험을 판매하는 사업이다.7. 종종 그 자체가 목적지가 되는 다양한 경험을 알 수 있는 지역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파크로 노트 베리 팜(Knott's Berry Farm)을 들 수 있다.이상과 같이 선행된 연구에서 나타난 개념정의를 토대로 볼 때 테마파크는 "독특한 주제를 가지고 이를 적절히 표현하는 소재를 이용하여 방문객들에게 일상을 탈피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원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름그대로 특정한 주제에 따라 오락과 체험, 문화를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시설공원인 셈이다.제 2 절 테마파크의 역사와 및 개발배경1. 테마파크의 역사테마파크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지역은 기존의 공원에 위락, 오락시설을 가미한 방식으로 시작하였고, 미국은 영화, 연출산업을 기반으로 한 테마파크, 일본은 박람회 중심의 테마파크를 발전시켰다.근대적 의미의 레저공간은 1760년에 나타난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의 플레저 랜드(Pleasure Land)에서 출발하였다. 플레저 랜드란 사람들이 모여서 자연 속에서 구경거리, 연극 등을 보면서 식사를 하는 장소였다.이러한 형태의 테마파크가 1843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등장한 티보리 공원으로 이어져 근대 테마파크의 원천이 되었다. 이후 산업의 발달에 의해 각종의 유희시설이 발명되면서 테마파크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19세기 말, 초기의 레저파크나 테마파크의 레저, 어트랙션(Attraction), 테마의 표현 방법의 장치 세계화, 환경조형 등의 세계박람회와 함께 발달하였다. 또한 박람회는 세계의 산업발달의 다양한 방법으로 전시하는 '장'으로서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법과 특정한 테마를 설정하여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박람회와 테마파크의 동질적인 성향으로 많은 박람회들이 개최된 장소들은 현재의 테, 가족 중심 문화,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 여가패턴의 다양화 등을 들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환경적 측면에서는 지방화시대의 도래, 교통의 발달, 제도적 지원체계의 확립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한편, 부정적 측면으로는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는 물가 상승, 과다 경쟁으로 인한 관광 상품의 가격하락, 지역주민과의 마찰 등이 있으며,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통행량의 증가, 환경파괴, 관광비수기기시의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테마파크의 개발배경에 미치는 영향 요인구분긍정적 요인부정적 요인경제소득(가처분소득)증가3차 산업비중 증가경제 개발의 수단물가상승과다경제->관광 상품 가격 하락지역주민과 마찰 초래사회, 문화여가 시간의 증대고령화, 가족중심의 가족패턴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 여가 패턴의 다양화소비성 위주 산업발달지방 문화의 소멸환경지방화 시대 도립교통수단의 다양화제도적 지원교통 혼잡환경 악영향관광지 비수기 테마파크 개발배경에 미치는 영향 요인의 세부사항경제소득(가처분소득 증가)GNP 연평균 실질 성장률 7% 수준 유지 (2002년도 자료)경제개발의 수단지방화 시대 도래로 지역의 고용과 소득 증대 및 세수 증대 수단으로 관광 개발의 적극 유치산업 구조 변화2차 산업 중심에서 3차 산업의 비중의 증대, 관광 개발에 민자 유치 적극 추진사회인구 구조의 변화인구증가율 둔화 경향,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고령화 사회 진입, 핵가족 시대로 가족 중심의 여가 생활 부각여가 의식의 전환산업사회 초기에는 필요악으로 최근에는 사치로 인식되었지만 앞으로 필수적 생활로 정착될 전망임여가 시간의 증대주 5일제 근무로 인한 노동 시간의 감소로자유 시간의 지속적 증가여가 패턴의 변화유한계급의 전유물에서 고소득층으로, 고소득층에서 중산층으로 대중화 추세, 사회의 복잡성으로 여가 욕구의 다양화환경적 요인지방화 시대의 도래지방화 시대 도래로 각 지방은 지역 개발의 수단으로 관광 개발 민자 유치 적극 추진도시 환경의 악화자동차 배기가스 등 환경 공해로 도시 환경 악화 압출 요인으로을 두어야만 한다.3) 독창성 - 테마파크는 현대적 감각이나 현대인의 욕구에 부응해야 하지만 지역적 특성이나 독창성이 표현되어야 한다. 결국 그 지역의 전통이나 자연적 조건에 맞는 테마의 선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지역의 특성에 근거한 독창성이 장기적인 안목에 있어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4) 통일성 - 테마파크는 오락 또는 흥미를 위주로 운영되는 위락공원과는 달리 뚜렷한 테마를 가지고 있다. 테마파크 안에 있는 모든 시설이나 운영은 테마에 어울리게 구성되기 때문에 테마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인위적으로 배제하여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일정한 테마에 맞게 건축양식이나 조경, 위락시설에서부터 종업원들의 복장이나 사용하는 물품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이미지를 구사해야할 필요성도 있다. 그리고 분위기 연출은 물론이며 각종 행사나 공연의 기획 프로그램, 디자인, 음악 등의 서비스 역시 통일된 전체를 구현해야 한다.5) 종합성 - 테마파크는 놀이에서 휴식까지 일괄적으로 즐기는 종합적 레저파크로 변하고 있다. 테마파크를 만드는데 있어 여러 분야에서의 종합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중요한 요체이다. 종합성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디자인과 연출 등을 중심으로 테마파크 건설에 필요한 노하우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 시설을 근간으로 하는 하드웨어 부문과 테마를 살리는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주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결합되어야만 진정한 테마파크라고 할 수 있다.6) 배타성 - 테마파크는 특정의 테마설정에 의한 비일상적인 유희공간으로서 현실과의 차단을 통해 체험하게 되는 가상, 허구의 공간이다. 따라서 현실의 차단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가 테마파크 성공의 관건이 되며, 테마설정이 독특하면 독특할수록 다른 테마와 차별이 되는 폐쇄적인 완전한 독립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테마파크의 특징은 대표적으로 디즈니월드를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디즈니월드는 특정의 주제가 있고, 비일상적인 일정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며, 시설이나 운영 모두가 그 주제 입장객
    경영/경제| 2011.06.26| 33페이지| 3,000원| 조회(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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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정치론 기말고사
    일본정치론1. 전후 미국의 대일점령정책과 변화요인 (2가지)전쟁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원래 일본을 가혹하고 보복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오히려 "건설적인 개혁", "민주적이면서도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을 만드는 것", "미국인의 삶의 가치를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도발을 막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민주화"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건전한 대중의 육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1) 전쟁은 육군, 재벌, 관료, 귀족, 민간의 파시스트 등 극우파 내지는 보수파들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 기존에는 정치적 실권이 없던 인사를 등용(2) 보수파의 권력은 천황제도 및 전제적 헌법, 독립적인 군부, 비민주적인 교육제도, 천황의 신성(divinity)을 주장하는 신도(神道)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 천황의 신성 부정, 헌법 개정(3) 우익 과격사상을 키운 것은 농민의 경제적인 후진성 때문이다. -> 경제 건설(4) 국내에서의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인 착취가 해외 침략을 유발하였다. -> 정치적 민주화따라서 점령군 정부는 먼저 탄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제도를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민주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1) 전쟁 기간중 구속된 정치범 석방(공산주의자도 포함)(2)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해체, 여론 통제에 이용된 법 폐지(3) 위험 사상을 감시하던 경찰 기관 폐지(4) 신도를 국가와 분리(5) 육군성, 해군성, 참모본부, 추밀원 등을 폐지하고, 향후 일본은 어떠한 전쟁수단도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6) 여성에게 보통선거권 부여(7) 전범 숙청 - 단, 일본 천황을 전범으로 규정할 경우, 심각한 소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하에 천황은 전범에서 제외. 대신 천황은 신이 아니며, 일본과 국민통합의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그 지위를 격하시킴.(8) 영국식 내각책임제 도입과 중의원(衆議院)의 권한 강화(9) 미국식 연방제를 도입하여 지방행정에 대한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 다. 미국에서 식량과 의약품을 원조해 주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점령당국보다는 더욱 과격한 변혁을 추진하려는 노동운동 지도자(=공산주의자)들은 가두시위를 유도하였고, 국가를 혁명 전야로 몰고 가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점령군 정부는 노동운동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세계가 "자유세계"와 "공산진영"으로 갈려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는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공산세력 팽창에 대결하는 미국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본주의적인 경제 건설에 보다 주력하게 됩니다. 재벌 해체 정책도 상당 부분 포기하였습니다. (해체 대상 기업이 1천여 개에서 18개로 축소)결과적으로 일본은 점령 통치를 겪으면서 정치적인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공산화의 우려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2. 1955년 보수합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3가지) (사회당의 합당, 재계의 보수합동, 일소국교 정상화 우려)요시다 내각의 총사퇴 후 1955년 3월 초로 예정된 총선거를 앞두고, 좌우 사회당은 하토야마 붐에 대처하고 보수 정당 재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통합을 위한 움직임을 가속화 함.통합 논의는 53년 선거 이후 개신된 상태였고, 54년 3월에는 양 위원회 합동회의가 개최되었고, 55년 1월 18일에 좌우 사회당 양당은 통합을 결의하고 선거에 임했다.선거 결과 민주당이 185석 자유당이 114석이었고, 통합을 예정한 좌우 사회당에 노농당, 공산당 등을 합치면 혁신 4개 정당이 162석을 확보, 헌법 개정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총원 1/3선인 156석을 웃돌았다. 이는 민주당의 개헌 의지를 꺾는 결과였고 재계를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혁신의 공세와 세력 확대에 불안과 우려를 느꼈다. 좌우 사회당의 통합 움직임은 보수 세력의 위기감을 고조시켰고, 민주당과 자유당의 보수합동을 공공연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대표적인 재계단체인 닛케이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인식이 공유되었다. 총재 선출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던 양당 합당파는 이 문제를 ‘대행위원회’라는 집단지도체제의 도입으로 잠정 해결하고 11월 15일 ‘자유민주당(자민당)’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자민당과 사회당의 보혁 대결로 특징지어진 55년 체제가 개막되었다.3. 1960년대 일본 고도성장의 정치경제(이케다 사토, 출발점 안보투쟁, 관용과 인내, 소득비중 정책)1960년의 안보투쟁은 전후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대는 비단 냉전적 안보정책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 기시가 추진하고자 했던 개헌에 대한 반대, 보다 넓게는 기시로 상징되는 전전(戰前)질서로의 회귀를 저지하려는 노력이었다. 전후 일본의 정치사상 가장 격렬한 이념적 대립의 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이는 뒤이어 등장한 이케다 수상이었다. 안보투쟁의 강렬한 충격 속에 등장한 이케다는 통치노선을 정치중심주의에서 경제중심주의로 전환한다. 그는 개헌 반대시위와 안보투쟁에 대한 강경진압 등 기시정권의 ‘고자세’로부터 이른바 ‘저자세’ 정치로 전환하여 대야관계에 있어서 ‘관용과 인내’를 강조하는 한편 경제주의, 즉 성장제일주의를 정권의 전면에 내걸었다 이른바 ‘소득배증계획’이라는 경제 중심의 노선이 그것이다. 향후 3년간 경제성장률을 9%로 끌어올려 10년간 GNP를 2배로 증대시키겠다는 장기계획을 공약으로 내건 것이다. 그는 야당에 대한 저자세, 민생의 안정, 헌법개정 소극론, 미일안보체제의 유지를 바탕으로 하여 성장제일주의 노선을 이끌어 갔다. 이는 경제적 성과를 보수권력 유지의 핵심으로 삼은 것으로 효율성으로 권위와 정당서을 획득하고자 하는 기능주의적 사고였다. 이런 속에서 이케다 이래의 자민당은 ‘저자세’ 속에서 사회당 등 야당을 보수체제의 틀 속에 편입할 수 있었다. 자민당은 다수결주의를 지양하고 타협적인 국회 운영방식을 채택하여 이른바 ‘국대정치’를 운영하였다.?이케다 수상의 공약7%성장(매년 7%씩 10년 성장하면 GNP 싼값으로 제공한 사건이었다. 일본 최대 취업 정보 제공업체인 리크루트 그룹 관련사인 리크루트 코스모스사의 주식이 시장에 공개되기 전에 정관계와 재계 실력자에게 싼값으로 제공한 사건이다. 아사히 신문의 특종 보도로 시작됐고, 검찰 수사로 1989년 4월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이 퇴진했고, 정계 막후 실력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리크루트 사건 이후 일본 정계의 정경유착을 끊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선거제도 개혁이나 정치 헌금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자금 규정법 개정이 잇따라 1994년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하지만 관련 정치인들은 사건이 잠잠해지자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사건일지1988년 6월 - 리크루트 주식 양도 의혹 최초 제기.1989년 2월 -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회장 구속.1989년 4월 -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 퇴진,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자민당 탈당.1997년 3월 - 후지나미 다카오 전 관방상 징역 3년 추징금 4270만엔 유죄 판결.1994년 - 정치 헌금 규제 강화한 개혁 법안 국회 통과.2000년 6월 - 다케시타 노보루 사망.5. 1990년대 일본의 선거제도 개혁과 문제점 ? 중선거구의 문제점(과잉대표제, 1표의 가치, 사표의 증가, 중복입후보체)1947년부터 1993년까지의 18번의 총선거는 모두 중선거구제로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한 선거구에서 원칙적으로 3-5명의 의원을 선택하는 것으로, 유권자가 한 표를 던져 득표가 많은 순으로 그 선거구의 정수까지 당선자로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1990년대 전반 정치 개혁의 큰 흐름 속에서 1994년에 새롭게 소선거구비례대표병립제가 도입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 새로운 제도로 최초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병립제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를 한 한명만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와 전국을 11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행하는 비례대표제를 합한 것으로 이 두 가지의 시스템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즉 정당 공인 후보에 한하여 지)지식기반 3차 산업 중심으로 세계경제의 부가 이동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수출 경쟁력 약화를 내수부양으로 극복하고자 저금리 정책을 핀 것이 버블의 발단 이었다. 부동산과 주식 투자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엔고로 인해 낮아진 해외자산을 매입하려는 수요도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권의 무리한 대출 확장 부동산 담보대출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심각한 버블을 양산했다 이로 인해 부동산가격은 10년 만에 70%가 넘는 하락율을 보였다 일본의 경기침체는 1985년 플라자 합의에 의해서 시작된다. 당시 G7(선진7개국 회담)에서 달러화 가치 하락에 의해 일본 엔화 가치가 무지막지하게 상승하자 일본의 해외투자는 환 손실로 치명적인 손실을 기록하게 되고 그 후에는 흑자는 쌓여 가지만 환 손실을 우려한 나머지 흑자로 쌓인 달러가 모두 국내시장으로 들어오게 된다. 거기에다 금리차이까지 벌어져 너도나도 닥치는 대로 달러를 조달하였고 투자할 곳이 없는 이 달러들도 모두 엔화자금이 되어 국내로 흘러들었고 (이 돈들이 국내투자로 이어졌다면 일본은 내수가 팽창하여 잃어버린 10년 대신에 기록적인 호황으로 이어졌겠지만) 현실적으로 국내에는 그만한 수요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갈 데가 없는 엔화자금이 주식시장과 부동산의 거대한 버블을 불러왔고 그 거품의 붕괴가 일본경제를 망친 것이다.엔화 가치 폭등 -> 생산단가 상승 등등으로 소비시장 위축 -> 소비시장위축에 따른 기업들의 투자 축소 ->? 실업률 증가 ->?소득감소 ->? 소비시장 다시 위축 -> 소비시장위축에 따른 기업들의 투자 축소 ->? 실업률 증가 ->?소득감소 ->? 소비시장 다시 위축 -> 악순환 계속일본경제의 부활은 정부와 기업의 꾸준한 구조조정의 결실이다. 기업은 종업원 수를 줄이고 임금인상을 자제했다. 정부역시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공적 지출과 공무원 조직을 과감히 축소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재정을 쏟아 붓던 과거 정책의 실패를 거울삼아 규제 완화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기업들이 정규.
    경영/경제| 2011.06.26| 6페이지| 1,0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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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사 기말고사국민경제형성-식민지와의 연속과 단절(해방공간 남북통일과 자주경제수립을 위한 노력과 좌절을 소개하고 식민지유산의 연속과 단절문제를 짚어본다.)8.15 광복 직후 토지와 귀속재산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과정 속에서 남한의 사회경제구조가 확정되어갔다. 귀속기업체가 민간에게 특혜적으로 불하되면서 자본가 층이 성장하고 사기업 중심의 경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식민통치 하의 파행적 산업구조와 분단으로 인하여 경제가 자율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움에 따라, 미국의 경제원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 원조를 매개로 한국은 미국의 경제권에 편입되었다. 농지개혁은 지주층을 쇠락시키면서 농촌사회를 균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때부터 지주의 시대가 가고, 산업자본가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다. 농지개혁 당시 지가증가를 통하여 귀속재산을 매입한 사람들이 산업자본가가 되었다. 대미 종속적 자본주의로 전환하면서 국민경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농지개혁과 귀속사업체의 불하 및 경제원조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원조경제와 종속적 자본주의(이승만정권기 대미원조경제의 종속성을 재검토한다.)50년대 자본축적과 공업화의 주요한 계기는 경제원조였다. 첫째, 원자재 등 원조물자의 특혜적인 배정은 기업이윤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 당시 정부는 기초 소비재 산업을 육성하여 국민경제의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에서 원료를 실수요자에게 배정하였다. 그 결과 무역상인의 개입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둘째, 원조물자의 판매대금, 곧 대충자금을 통한 금융투자가 자본축적에 기여하였다. 대충자금은 산업은행을 통해 융자되었는데, 대충자금에 의한 융자는 저리 3%대였다. 이를 통해 장기산업자금의 주된 공급원이었다. 셋째, 달러를 시장 환율보다 훨씬 저렴한 공정 환율로 배정받는 것은 원조물자의 배정과 마찬가지로 특혜였다. 달러를 배당하기 위한 무역업자와 기업가의 노력은 치열하였고, 그 배당은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야 했다. 이는 당시 정경유착의 문제점을 야기 시켰다. 원조물자와 달러의 공정 환율에 따른 배정과 저금리융자는 엄청난 특혜였다. 이러한 특혜라는 생산외적 요인이 50년대 기업 이윤의 중요한 원천이었고, 현재 대한민국의 대기업의 구조를 만들게 하였다.경제원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원자재의 원조와 생산 잉여농산물 원조는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구매력을 정체시킨 반면, 원조물자를 특혜적으로 배정받기 위한 설비의 확장투자는 생산을 확대시켜다. 그 결과 구매력과 생산력 간의 불균형이 나타나 50년대 중반이후 면방, 제분 등의 공업에서는 과잉생산의 문제가 나타났다. 둘째, 57년을 정점으로 무상원조가 감소하고 유상차관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원조를 매개로 하는 경제 운용이 지장을 받았고 59년부터 60년까지 심각한 불황이 초래되었다. 그리고 원면환율이 인상됨에 원조물자에 의존한 산업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이승만정권의 수입대체공업화(1950년대 이승만정권의 경제정책을 수입대체공업화를 중심으로 검토한다.)50년대 한국경제는 종속적인 체질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식민지 유산과 남북분단 때문에 경제적 자립이 어려웠으므로 경제원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조를 통하여 원자재를 조달받고 대충자금에 의존하여 기자재와 설비를 수입하여 기업이 가동되었다. 당시 공업원료는 거의 미국제품이었고, 생산설비는 일본제와 서독제의 비중이 높았다. 이러한 종속성은 확대 재생산되는 면을 가졌다. 원면과 원맥의 원조는 면화생산을 궤멸시켰고, 밀 생산을 위축시켜 해외의존성을 한층 심화시켰다. 또한 대충자금을 통한 저리의 금융자금을 통하여 외국기계를 구입하기 때문에 국산 기계의 사용은 상대적으로 억제 당하였다.이승만 정부는 일본경제로부터 자립 할 수 있는 수입대체공업화를 지향하였다. 비료와 시멘트 등의 기초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기초산업을 육성한다는 취지하에서 수입 제한적이며 산업보호적인 조치를 다각적으로 강구하였다. 귀속기업체의 특혜적인 불하 및 원조물자의 실수요자에 대한 특혜적인 지원은 공업육성의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외환가치가 과도히 저평가 된 상태에서 수입대체품목 수입의 금지와 양적 제한은 긴요한 산업보호책이었다. 최종소비재의 수입에 대하여는 높은 관세율을, 원료와 원자재의 수입에 대하여는 저평가하여 원료와 원자재의 가격을 낮게 하였다.이러한 수입대체공업화 정책은 일반적으로 부작용을 낳았다.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게 원조물자와 외화와 금융자금을 배정함으로써 자원의 비효율적인 이용과 의도하지 않은 인위적인 독점이 형성되었다. 달러 공정 환율의 저평가는 수입대체를 촉진하는 면이 있지만 수출을 억제하였으며, 기업은 수입 금지와 같은 보호에 안주하였다. 또한 원조물자와 대충자금의 특혜적이고 편중적인 배정은 정경유착을 조장하였고, 중소기업의 성장에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이승만정권의 수입대체공업화이승만 대통령이 펼친 자립경제를 위한 공업화 노선을 가리켜 흔히 수입대체공업화 전략이라고 한다. 외국에서 수입하여 쓰는 공산품을 국내 공업으로 일으켜 국산품으로 대체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공업화 전략의 핵심적 정책수단은 저환율 정책이다. 예를 들어 1달러에 300환이 시장에서 성립한 균형 환율임에도 1달러 100환으로 1/3 수준으로 환율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어 미국에서 1달러어치 물건을 사올 때 300환이 아니라 100환만 지불해도 된다. 수입대체를 위한 국내 공업을 일으키려면 미국에서 기계와 부품을 수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 비용을 줄이고자 저환율 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또한 저환율 정책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 달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정부가 달러를 손에 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로는 한국에 주둔하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한국화폐를 대여한 다음, 그것을 달러로 상환 받는 것이었다. 그때 될 수 있는 한 많은 달러를 상환 받으려고 저환율로 한국화폐의 가치를 실제 이상으로 높여둔 것이다. 이를 두고는 미국정부와 적지 않는 마찰이 있었다. 미국은 부당하게 낮은 환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면서 대여금 상환 달러의 지급을 미루었다. 예를 들어 한해 미국으로부터 원조가 3억 달러로 책정되었다고 치자. 3억 달러의 자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3억 달러의 만큼 미국이나 다른 나라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정부는 장부상으로 들어온 3억 달러를 민간의 수입업자에게 배당한다. 이 수입업자는 한국 화폐를 한국은행에 예치한 다음 수입허가증을 얻는다. 그리고 그 증서를 미국의 원조 당국과 금융기관에 제출하여 필요한 물건을 구해오는 방식이었다. 이때 한국은행에 예치된 수입대금은 미국 정부의 감독 하에 한국정부의 재정자금으로 지출되었다. 이를 가리켜 대충자금이라고 했다. 달러를 배당받은 수입업자는 횡재한 것과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수입한 물건을 그대로 국내 시장에 내다 팔면 실세 환율에 따라 몇 배나 큰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정부가 그런 특혜를 부여한 것은 수입업자가 외국에서 원료와 부품, 기계를 사와서 판매의 목적이 아닌 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공업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립경제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었다.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와 수출지향공업화1960년대 개발독재체제의 구축과 수출지향공업화전략이 채택되는 과정을 설명한다.60년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 경제계획원이 발족되어 경제개발계획을 총괄적으로 운영하고 경제조정정책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계획은 어느 나라 보다 국가주도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군사작전처럼 일사 불란하게 추진되었는데 군사문화와 박정희의 개성에 비롯된 것이었다.박정희 시대의 초기 공업화 전략은 내포적 공업화였다. 식민지에 대한 기억과 원조의 감소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종속화로 인해 내포적 공업화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국내시장 활성화를 통하여 공업화 발전을 이루고자 하였다. 농민을 육성하여 내수시장에서 농민이 공업제품을 구입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선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농업정책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의한 농업소득의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농가 고리채를 정리하는 사업을 실시하고 농촌의 빚을 일정기간 유보하고 국가가 대신 탕감해주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정책의 시행은 이후 대선에서 농민들의 표가 몰리는 계기가 되었다.또한 농협과 중소기업은행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자금력부족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정축재를 처리하였다. 부정축재 처리법을 통하여 50년대 원조경제 당시 부를 축적한 대재벌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대재벌로부터의 자금 조달 방침이 완화가 되어 재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장을 설립하여 그 주식이나 후에 현금을 납부하도록 하게 하였다. 또한 화폐개혁을 통하여 환을 원으로 개혁하였다. 당시에 전부를 바꿔주는 것이 아닌 일부만 변경해주고 나머지 금액은 은행에 예치시키게 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와 같은 내포적 공업화의 추진은 자립경제를 목표로 하였지만 자금의 부족과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이에 따라 내포적 공업화를 포기하고 수출을 지향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은 원천기술 개발을 통한 성장이 아니기 때문에 원료를 수입하여 완제품 수출을 통한 성장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국내 시장은 포기하고 해외시장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당시 베트남 파병을 통한 장병들의 월급, 용역을 통한 외환을 유입할 수 있었다. 또한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하여 식민지에 대한 배상금을 통해 포항제철을 건설하고, 서울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였다.
    경영/경제| 2011.06.26| 5페이지| 2,000원| 조회(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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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고중세사 기말자료
    일본고중세사새로 제작된 토기는 승목 문양의 토기로 대표시켜 조몬식 토기라 부르고, 이후 기원전 3세기까지를 조몬시대라 한다. 이 시대의 주거 유적은 거의가 패총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다. 패총으로부터는 이 밖에도 다양한 도구와 인골 등이 출토되기 때문에 원시인의 생활 상태를 알려 주고 있다. 주거는 수혈식 소가옥이다. 하나의 수혈에는 4~5명에서 10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몬사회는 집락을 단위로 강한 결합의식을 갖고 생활하였고, 공동의 노력에 의해 획득한 물품은 집락 전체의 소유물이 되고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당시의 생산력은 개인적인 부와 권력을 발생시키는 잉여생산물의 축적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집단의 통솔자는 있다고 해도 계급적인 지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정의 지역을 영역으로 하는 혈연집단(씨족공동체)은 제각기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특수한 물건을 얻기 위하여 원거릴 집단과 교역을 행하기도 하였다. 문명이 미발달한 조몬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의 위협에 취약하여, 그 때문에 자연현상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영적인 힘을 믿게 되고(애니미즘), 주술에 의지하여 이러한 재난이나 질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조몬시대라고 하는 수천 년간 지속된 일본의 원시사회에 대변화를 초래한 것은 농경문화의 유입이었다. 한반도 남부로부터 유입된 농경은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종전의 수렵과 채집, 어로에 의한 자연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 바뀌고,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잉여농산물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정한 경지를 단위로 하는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적 수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몇 개의 집단을 종속시킨 유력 수장은 지역적 맹주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정치적 수장에게는 경지의 개발, 제사의 주관 등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야요이시대 중기 이후가 되면 지역적 정치집단이 각지에서 출현하게 된다. 중국의 『한서』지리지에는 야요이시대 중기쯤의 일본열도의 상황에 대하여, 100여 국이 분립해서 낙랑군에 조공하고 있었다고, 교통상의 요충에 위치하여 지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미야케의 설치에 의해 지방의 수장 층에 대한 지배력이 진행된 결과, 이들은 중앙 왕권의 정치 질서 속에 편입되어 갔다. 국내의 통일이 진행됨에 따라 야마토 정권의 정치조직도 정비되어 갔다. 야마토 정권은 복속한 소국의 수장을 그대로 새로운 정치조직에 편입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력 호족 가바네(姓)를 하사하여 대와을 정점으로 한 신분질서를 명확히 하였다.5세기 후반 이후의 정치적 변동은 고분의 형태와 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이 시기를 경계로 해서 기나이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방후원분의 규모는 축소하고 그 수도 전국적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야마토 정권이 기비와 쓰쿠시 등의 대호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제 4장 스이코조의 정치와 문화스이코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아스카시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의 정치적 특징은, 소가씨라는 호족이 오오미의 지위를 갖고 실질적으로 정국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소가씨와 함께 왕실에서는 쇼토쿠 태지가 스이코의 섭정으로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내정에서는 관위12계를 정하고, 쇼토쿠 태자가 헌법17조를 제정하였다. 대륙으로부터 학문, 사상의 유입과 한자에 의한 기록법의 발달에 따라 이제까지 구전되어 오던 여러 호족의 계보와 전승을 사서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는 왕조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고, 대외관계를 포함한 국가 발전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하려는 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628년에는 『천황기(天皇記)』.『국기(國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다.대외적인 특징으로는, 한반도 제국을 비롯한 중국의 수, 당 제국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해 나갔다는 점이다. 중국에 많은 유학생, 유학승을 파견하여 율령제를 비롯한 중국의 제도, 문물의 섭취를 통해서 왜국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특히 백제와는 4세기 말 등 군사적 방어시설을 구축했다.667년 나카노오에 황자는 왕도를 아스카에서 오미(近江)로 천도하였다. 이듬해 나카노오에는 여기서 정식으로 즉위하여 덴지 천황이 되었다. 덴지 천황은 개신정치의 완성을 위해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해 온 백제의 귀족,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각종의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그 사이 신라와 당과의 국교도 회복되어 왕도는 평화와 번영을 맞이했다.그러나 672년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진신의 난이라는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에서 승리한 오아마 황자는 673년에 기요미하라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덴무 천황이 되었다. 덴무 천황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모든 호족을 제압하고 율령제에 기초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추진해 나갔다. 천황의 사후는 황후인 지토 여제가 그 사업을 계승해 나갔기 때문에, 이 덴무.지토조에는 율령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덴무는 즉위 후 종전의 관제를 폐지하고 친정을 행했다. 이러한 황족 중심의 정치를 황친정치라고 한다.이 시기에는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을 배경으로 궁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덴무 천황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불력에 의해 국가를 수호한다는 생각에서, 불교를 국가의 것으로 한다는 국가불교의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왕도에는 국가의 대사원이 세워지고, 아스카 주변의 호족과 지방의 유력자들도 제각기 우지데라를 건립했다. 불교를 국가불교로 한다는 불교흥륭책에 따라, 조정에서는 사원 및 승려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제 6장 율령국가의 성립과 구조율령국가의 기본을 규정하는 율령은 다이호율령에서 완성되었다. 이 다이호율령의 편찬은 몬무 천황의 즉위 직후에 시작되어, 700년에 영(令)이 완성되고, 이듬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율이 만들어졌다. 701년에는 다이호라는 연호의 제정과 함께 영이 시행되고, 이어서 율도 시행되었다. 일본에서의 율령제의 도입은 7세기 중엽 이래의 동아시아의 동란, 이에 연동하는 국내의 권력 투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 혹은 공을 세운 자나 우수한 능력을 가진 자는 감형 조치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제7장 율령정치의 전개8세기 초 다이호율령의 제정으로 율령국가가 확립하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도성의 조영을 계획하여 710년에 헤이조쿄로 천도하였다. 천도 후 국가적 정비에 동반하여 수요가 증대하고, 이에 따라 생산과 유통도 활발해지고, 화폐의 주조와 상설시장도 개설되었다. 변경에 대한 개척이 진행되어, 이민족인 에미시와 하야토에 대한 지배도 한층 진전되었다.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동반하여, 8세기에 들어가면 상급관인으로서의 귀족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은 더욱 안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천황 권력을 둘러싼 귀족층 내부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후지와라씨는 황실과의 혼인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황권을 둘러싼 황족과 귀족 혹은 귀족 상호간의 대립과 항쟁을 격화시켜, 8세기 후반의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나가야왕의 변 후 후지와라씨의 전성시대가 되었지만, 이 시기에 규슈에서 발생한 천연두가 전국을 엄습하여 후지와라씨 4형제는 차례로 사망하고, 많은 공경, 귀족들도 죽음을 당하여 조정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심각해졌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쇼무 천황은 불교의 진호국가의 사상에 의해 불력에 의해 정치와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대불의 조영과 고쿠분지(國分寺) 건립을 추진하였다.한편, 율령국가는 공지제를 대원칙으로 하고 있었지만, 구분전이 자손에게 계승되는 경우도 발생하여 구분전은 사실상 사유지화 되어갔다. 또 귀족에게는 많은 사유지가 주어졌고, 사원과 신사에 주어지는 전지는 세금을 내지 않는 불수조전(不輸租田)으로, 근본적으로 공지제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과역의 부담이 과중하여 구분전을 버리고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토지를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부랑.도망하거나, 유력자의 사적 예속민이 되는 자가 증가했다. 정부는 건전영년사재법을 발포하여 개간한 토지에 대해서는 영구 소유가 가능즉위와 동시에 그는 신하로서는 최초로 섭정에 임명되었다. 게다가 고코 천황 대에는 자신을 천황으로 세운 모토쓰네에게 관백의 지위를 주어 모든 정치적 실권을 맡겼다. 이후 후지와라씨는 천황에 대신해서 실질적인 정무를 수행하게 된다.후지와라 북가의 권세는 점차 확대해 갔지만, 반면 율령정치의 재건에 노력한 유능한 관인들을 중용한 우다.다이고.무라카미 세 천황은 섭정.관백을 두지 않고 천황친정의 정치를 행하였다. 우다 천황은 후지와라씨와 외척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토쓰네의 사후 ‘간페이(寬平)의 치(治)’라고 하는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조.용.조의 세제, 반전수수법, 국사제도 등을 완전히 실시하고 율령제를 재건하려고 했다. 특히 902년에는 장원의 정리를 명한 ‘엔기의 장원정리령’을 내렸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율령제의 최후의 단계로서 율령제의 붕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제 9장 섭관정치와 국풍문화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후지와라씨는 천황가와 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천황을 대신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섭관정치는 바로 이러한 인척관계를 배경으로 성립.발전해 나갔다. 866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정식으로 섭정이 되고 그의 양자 모토쓰네가 관백이 된 이래, 후지와라 북가의 세력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섭관정치가 확립됨에 따라 모든 권력은 섭정과 관백에게 집중되었다. 섭관가 내부에서는 섭정과 관백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족 사이에 치열한 쟁란도 일어나지만, 11세기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대가 되면 수습된다. 섭관시대가 되면 율령제의 변질과 붕괴가 급속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율령제의 원칙으로는 재정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지방통치의 운영에 국사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국사는 다토라고 불리는 유력 농민에게 일정 기간에 한하여 전지의 경작을 청부시키고, 대신에 조.용.조와 기타의 관물.임시 요역을 부담시켰다. 다토 중에는 국사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점차 대규모의 경영을 행하는 다이묘다토라고 하는 자가 많이 나타났다. 이리굳혔다.
    인문/어학| 2011.06.26| 9페이지| 1,000원| 조회(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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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사 중간고사 정리! <한국경제통사> 평가A+최고예요
    한국경제사1.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경제구조를 설명하고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선행조건이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한다.근대화가 발전되면서부터 산업생산에서 농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근대적 생산력체계에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농경에 종사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농업이 이처럼 고용과 생산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경제생활과 전반적인 경제동향은 농업에 의하여 좌우되었고,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계급적 이해가 형성되었으며, 농업잉여의 재분배를 통하여 지배기구가 유지되었다. 사적소유의 진전은 경제발전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토지사유의 진전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인데, 조선시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이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소유제도의 진전은 거래비용을 절감시킴으로써 토지의 상품화, 나아가 농업의 상품 경제화를 촉진시켰다. 토지의 사적소유가 진전되면서 신분이 구분되게 되었다. 지주와 소작농의 형태의 농업경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영농법의 개발을 통하여 농산물시장의 확대는 잉여의 처분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지주경영을 성장시켰다. 이후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가 성장하면서 시장의 발달로 인한 상인층이 부를 축적하고 토지 매매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노동시장에서 부역노동이 임노동으로 대체, 노비제의 해체와 같은 신분제가 철폐되어 노동력의 자유로운 처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면서 기업가적 활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조건도 조금씩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소유권제도는 비교적 정비된 편이었지만, 자유롭고 공정한 경제활동의 추구에는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또한 상인자본주의의 전통이 약하였기 때문에, 이익추구 동기가 부여될 여지가 작았고 산업자본으로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국가가 상업 활동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적극 육성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 나타난 이러한 경제활동들을 비추어 볼 때 우리 스스로 자주, 근대적인 자본주의 체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개화정책이 실시되고 우정국, 박문국의 설치등과 같은 근대적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위한 역량과 노력은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부국강병을 위한 서양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지만, 근대화를 뒷받침할 제도적 변화에는 소극적이었고, 근대산업의 육성책을 지속적이고도 강력히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정부는 근대적 산업의 보호, 육성을 위한 확고한 의지와 충분한 재원 및 유능한 실무 층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관영공장은 치밀한 준비와 체계적인 지원이 되지 않아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부채만 남기고 문을 닫아야만 했다. 또한 민간의 상공업경영은 외국자본에 비해 자본력과 기술력이 부족한데다가 정책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재정위기에 몰린 정부는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할 자금원을 가지지 못하였고, 재정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한 채 생산자와 상인에 대한 증세를 추구하였다. 또한 상인은 시장의 변화에 따른 투자에 반응하지 못하고,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자 층은 미곡과 콩의 농산물에 제한된 일차생산물들을 수출하는 존재로 국한되었다. 반 식민지적 환경 하에서 제국자본주의의 침투는 면업을 비롯한 토착적 가내수공업과 독립수공업을 해체시킴으로써 이들 수공업의 자생적 성장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러나 외국자본주의의 침투는 동시에 근대문명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가내수공업을 해체시킴으로써 자본주의체제 성립을 위한 시장을 만들고 교통, 금융, 통신과 같은 근대적 설비를 이식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면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토착자본의 순조롭고 정상적인 성장기반을 억압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조선 내적 발전을 통하여 축적된 역량은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조선인의 다양한 대응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개항 전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은 개항 후 무역의 확대, 상공업의 성장 등과 관련이 있으며, 집약적 소농경영의 발전은 일본식의 집약적 농업의 원활한 도입을일제시기 일본에 의해 강요된 식민지근대화의 실상을 제도적 측면에서 살펴본다.조선총독부는 안정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제도 정비에 나선다. 첫 번째가 화폐정리 사업이다. 당시 일본화폐와 조선의 화폐를 교환함에 있어서 복잡한 교환문제가 야기되었다. 또한 시중에 유통되던 다양한 종류의 백동화를 환수하고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교환해주고 조선의 법화로 하고자 했던 사업이다. 이를 통하여 국가가 화폐를 주조함에 있어서 독점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화폐주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화폐정리 사업을 통하여 일본과 조선을 동일한 통화권을 목표로 하였다. 제일은행권을 발행한 이유는 일본화폐를 직접적으로 교환하게 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사태를 대비하여 경제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두 번째, 재정정리 사업이다. 조선총독부는 황실재정과 국가재정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가재정을 확보하여 근대적 재정국가로의 변모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재정정리사업을 실시한 이유는 식민지 경영비의 현지 조달을 위해서였다. 이 당시 일본인의 세무감을 배치하고 재정을 국고에 귀속시키고 제일은행을 지세를 관할하게 하는 국고제도를 실시하였다. 이후 조세사업의 일환으로 조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세 번째, 금융제도의 정비였다. 제일은행을 중앙은행기능을 수행하게 하고 조선의 세입을 일본상인의 무역자금으로 대출하는 등의 금융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도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국유림을 관리하고 그 수입으로 대부업을 운영하는 등 금융제도의 정비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조선정부도 의도하던 바였지만, 자금력, 기술력, 추진력의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후 산미증식계획을 통한 농업생산기반이 확충되고 농업생산력이 상승하였다. 이후 근대적 공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의 역할이 되고 농업어업의 비중은 감소되는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앞선 제도의 정비는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기초적인 제도마련에 불과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소도를 정비하고 이를 통하여 식민지 재정수입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이고 안정적인 수탈방법을 이용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다. 근대적인 소유권을 확립하여 이를 통하여 조세를 거두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근대적 토지소유 제도를 확립하는 동시에 지주제를 식민지 통치의 동반자로서 육성하였다. 그리고 과세지가제를 시행함으로써 조세부과의 객관성을 가질 수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은 지주경영에 유리한 제도로 운영되었다. 실제적인 농민들의 참여율이 저조하였고,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는 행정처분에 의해 처리되었고, 사법처리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식민지경제체제(2) - 농업경제일제시기 일본에 의해 강요된 식민지근대화의 실상을 농업경제의 측면에서 살펴본다.1910년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부터 식량, 원료공급기지로서의 기능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특히 1910년대에 곡물, 면화, 양잠의 3대 농산물의 증산정책을 추진하지만, 미곡의 증산정책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우량품종의 보급, 관개설비의 개선, 시비법 등이 이 당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공업화 진전에 따른 농촌인구 감소와 도시로의 인구유입에 따라 공업화의 발전과 소득의 상승으로 인한 식량의 소비가 증가하였다. 식량 소비의 증가에 의해 일본 내 쌀값이 상승하였고 상승한 쌀의 값은 일본의 도시인구들의 생활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저곡가 정책을 유지해야만 했다. 저곡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의 쌀을 수입하기 위해서 조선으로부터 미곡 반입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의 수립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한 기본적으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으로 나뉘어져 실시되었다. 토지개량사업은 관개설비 개선, 지목변경 등이 이루어졌고, 농사개량사업으로서는 농사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우량품종 개량사업과 비료의 질과 양저금리의 이자공급이 부진하였고 이자를 부담하면서 수리시설을 만들기보다는 여유 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고율소작료를 얻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1920년부터 26년까지 6년 동안 원래 계획의 취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선 내 공급되던 쌀마저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은 일본으로 수출되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쌀 가격의 상승으로 인해 구매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경과 서울의 쌀 가격이 같이 상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곳의 시장이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쌀 가격의 변화가 동일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후 2기 계획에서는 사업자 개인부담이 대폭 경감되고, 정부의 지원이 강화되었다. 또한 이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농사개량사업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20년 장기불황으로 인하여 조선의 쌀 수출마저 급감하게 되는 바람에 쌀값 하락으로 인하여 이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는 동안에는 지주제가 성장하였다. 개량농법 등이 시행되면서 값 비싼 화학비료를 이용 가능한 지주계층들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또한 금융기관의 자금 지원등도 지주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은 지주계급을 강화시키는 반면 소작농과 빈민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돈이 되는 쌀만을 생산하는 미곡 단작화가 심화되어 가능한 밭들을 논으로 변경하려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곡 단작화를 통하여 일정정도의 토지 개량이 이루어졌고, 조선의 농업생산력에 기여한 측면도 있었다.민족분할지배정책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는데, 이 문화통치의 본질은 민족분할지배정책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동조하는 사회계층을 창출하기 위한 회유, 동화정책을 펴는 동시에 경찰과 군대를 증강하여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였다. 민족분할정책을 위한 경제적인 대책은 조선인자본의 종속적인 발전을 허용한 회사령 철폐, 그리고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내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미곡소비의 증가에 상응하는 식량의 증산을 도모할 필화
    경영/경제| 2011.05.31| 5페이지| 2,000원| 조회(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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