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영토 분쟁조어도를 중심으로중국 역사 바로 알기1314576일본학과 양진경중일 영토 분쟁조어도를 중심으로현재 우리나라의 독도를 두고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것과 같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도 영토 분쟁 지역이 존재한다. 이 영토분쟁 지역은 중국과 일본에서 각자 댜오위다오, 혹은 센가쿠 열도로 불리기 때문에 중립성을 위하여 이 리포트에서는 조금 생소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사용하는 ‘조어도 열도’ 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다. 조어도 열도는 “1972년 5월 오키나와 반환과 함께 일본이 실효적으로 점유” 한 이후 꾸준한 중일 간의 영토분쟁의 실마리가 되어 왔으며 따라서 이 리포트에서는 조어도의 위치 및 그것의 가치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 양 나라가 조어도가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본 후 최근에 있었던 민감한 사건인 2010년에 발생한 중국 선장을 일본이 나포한 사건, 그리고 2012년 일본 국유화 사건을 다룰 것이다.가장 먼저 조어도 열도는 동중국해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 오키나와 본섬의 나하(那覇)로 부터 서쪽으로 약 420km, 중국 대륙의 복주(福州)로 부터 동쪽 약 420km, 석원도(石垣島)북쪽 175km, 대만의 기륭(基隆)으로 부터 북쪽 190km 해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조어도(중국명 釣魚島 일본명 魚釣島,)·북소도(중국명 北小島, 일본명 北小島,)·남소도(중국명 南小島, 일본명 南小島,)·구장도(중국명 黃尾嶼, 일본명 久場島)·대정도(중국명 赤尾嶼, 일본명 大正島) 등 5개 도서와 각각 비뢰(飛瀨)·북암(北岩)·남암(南岩)으로 불리는 3개 암초로 구성되어 있다. 조어도의 총면적은 약 6.32km이며, 가장 큰 섬인 조어도는 동서 약 3.5km, 남북1.3km로 이루어진 타원형, 면적은 4.32km 표고 362m로 거의 전 섬이 밀림으로 덮여 있다. 다만 1978년, 1988년, 1996년 7월 등 3차례에 걸쳐 일본의 우익민간단체인 “일본청년사(日本靑年社)”가 동 군도에 세 개의 등대를 설치한 것을 제외하면 건축물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아시아근해지역광물자원 공동탐사조직위원회(CCOP)의 조사결과가 발표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더 나아가 최근 일본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조어도 근처에는 일본이 1300년간 사용 할 수 있는 코발트, 일본이 32년 사용할 수 있는 망간, 일본이 100년 사용할 수 있는 니켈, 천연가스, 일본이 1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석유(약 77억 톤)등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은 광물들이 매장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양국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이렇듯 중국은 주로 사료를 근거로 하여 역사적으로 조어도는 중국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조어도가 대만이나 복건에서 출어하는 중구어민들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으며, 어로기에는 이 섬에 어민들이 수개월씩 살았던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어도가 가장 최초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03년 「순풍상설(順風相說)」이다. 이후 나타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은 1534년 명나라의 책봉사로 류큐에 파견된 진간이 쓴 「사류구록(使琉球録)」에 잘 나타나 있다. "10일 남풍이 심하게 불어 배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순풍이라 요동이 심하지는 않았다. 평가산, 조어서, 황미서, 적서를 지났다. 11일 저녁 고미산이 보였다. 이제 류큐령"이라고 기재하여 고미산부터 류큐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또한 1556년 정순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왜구를 방비하기 위한 대책을 조사하고 반년 뒤 귀국하여 일본일감(日本一監)을 지었는데, 여기에 "조어서가 소동(현재의 대만)에 속한 섬"이라고 기술했다. 진간보다 120여년 뒤인 1561년 류큐의 책봉사로 갔던 곽여림은 '사류구록'에서 "적서는 류큐와 경계하는 산"이라고 하여 적서가 류큐의 경계라는 것을 기술했다.한편 16세기 조어도가 중국령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헌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호종헌이 편찬한 주해도편이다. 호종헌은 당시 창궐하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총괄하여 왜구 방어의 전략·전술, 성채·초소 등의 배치, 병기·병선제도를 설명하면서 연해 방어의 거점을 지도로 표시했는데 여기에 조히 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사유구잡록’(1683년), ‘중산전신록’(1719년)그려진 ‘류구36도도’및 ‘유구지도’, ‘유구국지략(琉球國志略)’ (1756년), ‘유구입학문견록’(1764), 등 17, 18세기에 걸쳐 꾸준하게 조어도가 중국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들을 중국측은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사료들의 맥락으로부터 중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만에 인접하거나 부속된 도서"에 따라 조어도가 일본에 강점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카이로회담에서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는 점이 합의 되었다는 점에 의거하여 당연히 중국에 반환/보귀시켜야 할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절취한 모든 영토" 또는 "탐욕과 폭력의 수단으로 약탈한 모든 다른 지역"에 조어도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중국의 주장에 반해 일본은 국제법적으로 조어도가 일본에 속해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먼저 무주지 선점론을 들어 일본은 영유 의사를 가지고 무주지에 대해 실효적 점유를 하고 있으며 이는 영유권 취득이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조어도는 중국의 주장과는 달리 대만이 아닌 오키나와 소속 도서로 1972년 오키나와를 미국으로부터 반환 받을 때 오키나와와 같이 일본의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주장한다.이와 더불어 1895년 일본이 조어도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후 패전에 이르기까지는 물론이고, 일본 패전 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승전국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 하였을 때 그 후에 두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단 한 번도 영토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 센카쿠는 오키나와와 동일한 조약상의 처리를 받은 것이고, 냉전 시기였다 해도 중국이나 대만도 영토 요구를 할 권리와 자유는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았다. 현재의 국제법 상으로 볼 때 중국이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영토를 요구할 근거를 거의 잃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가장 큰 세 가지 사건은 1978년 있었던 중일우호조약, 2010년 일어났던 중국선 나포 사건, 2012년 일어난 조어도 국유화이다.가장 먼저 1978년 중국일본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다만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혼란을 한창 수습해가던 중국은 당시 부수상이던 등소평이 일본에 방문하였을 때, “센카쿠 열도의 문제는 다음 세대, 또는 그 다음 세대에게 넘겨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라는 제안을 했었고 센카쿠 열도가 굳이 논쟁거리가 되길 원하지 않던 일본정부 역시 그에 동의하며 중·일 정부가 영토 분쟁을 보류한다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영토 분쟁이 갈등으로 전이되지는 않은 상태였다.그러나 이후 자잘한 분쟁은 계속 있어왔지만 결정적으로 영토 분쟁은 더 이상 두 나라간의 정치적 문제뿐 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2010년에 일어난 중국인 선박이 나포 사건 이다. 일본 측은 조어도 해역에서 조업을 하던 중국어선이 일본측의 순시선의 검색 요구에 불응하고 도주하다가 일본측의 순시선과 충돌한 것과 관련하여, 일본은 중국어선이 불벚으로 자국의 해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해당 중국 어선을 나포하고 선박의 선장과 선원들을 구금할 것을 결정했다.이에 중국 측은 불법으로 구금된 선장과 선원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조어도가 중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의 석방요구를 거부하고 선장에 대해 10일간 추가 억류를 결정하자 중국은 그에 대응하여 대일본 희토류 수출 금지 결정을 내렸다. 반도체 산업에 필수 불가능한 자원으로 중국이 대다수 독점하고 있던 희토류를 금지해버리자, 일본으로써는 어쩔 수 없이 며칠 지나지 않아 체포 했던 선장의 구금을 번복하고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영토 논쟁이 더 이상 두 나라의 외교적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경제적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2010년 나포 사건에 이어 가장 최근에 발생한 심각한 영토 분쟁 갈등은 2012년에 있었던 조어도 국유화로 인한도쿄도가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실제로 14억 6000만엔(약 210억 원)을 국민모금을 통해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이시하라 도지사가 이끄는 도쿄도가 센카쿠를 구매해 실효지배를 강화하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막기 위해 도쿄도보다 먼저 조어도 구매 결정을 내렸다.2012년 9월 3일 결국 일본 정부는 20억 5천만 엔에 센카쿠 매입 합의 하고 구매 결정을 내렸다. 하필 일본의 중국 침략의 발판이 된 만주사변(9.18사변)과 날짜도 가까워 중국 국민은 조어도 국유화 결정에 분노하며 격한 반일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국유화 결정은 심각하게 중일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2012년 9월 19일 노다 일본 총리는 “이번 센카쿠제도 매입에 따른 중국 측의 반응이나 상호 갈등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으나, 당초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며 자신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노다 총리는 또 “중국과 소통 할 수 있는 여러 채널들을 모색하고 이를 통한 사태 안정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여 2010년 중국선박 나포 사건에 이어 일본은 또 다시 중국 측의 항의를 인정하였다.참고 문헌하도형, “2010년 중ㆍ일 댜오위다오 분쟁과 중국의 대응”, 「 영토해양연구 」, 제3권(2010)이정태, “조어도 분쟁에서 ‘무주지 선점론’과 ‘역사주권론”, 「 국제정치연구 」, 제14집(2011)최판규, “첨단산업 부품소재인 희토류의 가격파동에 대해서”, 「 한국자기학회지 」, 제21권(2011)윤호, “일본의 댜오위다오 ‘국유화’에 대한 중국의 인식 및 대응”, 「 독도연구 」, 제13호(2012)이명찬,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중ㆍ일간 갈등과 동북아”, 「 국제정치논총 」, 제53집(2013)전일욱, “중일 영토분쟁의 전개과정과 분쟁구조의 특징 : 조어도(釣魚島)를 중심으로”,「 평화학연구 」, Vol.14(2013)박정현, “조어도 문제의 역사적 배경과 동아시아 해상 영유권 분쟁”, 「내일을 여는 역사」, 제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