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제1장 차티스트 운동의 경로1. 차티스트 운동의 세 국면2. 초기의 차티스트 운동 - 급진주의의 전통 안에서(1)급진주의의 정치학(2)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적 급진주의3.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 - 1840년대의 토지 계획을 통해(1)자본의 지배와 노동자 해방(2)소농장의 한계4. 차티스트 운동의 사회주의화 - 1851년 차티스트 강령으로(1)차티스트 내부의 세 가지 경향(2)헌장 사회주의자들5. 차티스트 운동 - 급진주의에서 사회주의로제2장 퍼거스 오코너와 토지 계획1.오코너의 오명2.오코너의 길(1)오코너, 급진주의자(2)전국헌장협회와 운동의 분화(3)노동 계급의 힘으로3.오코너의 제안(1)토지 계획의 추진(2)토지 계획을 둘러싼 논란들4.오코너의 꿈(1)노동자 권력과 토지(2)노동 해방과 농업 공동체5.오코너의 좌절(1)토지회사와 합법화 문제(2)오코너의 명암(3)토지 계획의 종결6.오코너의 삶제3장 윌리엄 러벳의 '새로운 움직임'1.러벳의 품성2.1830년대 러벳의 급진주의 운동(1)대중과 술과 지도(자)를 혐오하다(2)중산 계급에 다가서다3.제1차 인민헌장 청원 운동과 러벳(1)횃불 집회에 놀라다(2)감옥에서 자유로워지다4.러벳의 '새로운 움직임'과 차티즘(1)'정치'를 버리고 '정신'을 내세우다(2)단결론으로 중산 계급에 굴종하다(3)노동자 교육으로 개인주의 전파하다5.184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과 러벳의 행적(1)거듭 중산 계급에 접근하다(2)계략을 쓰고 비난하다(3)편안하게 사업에 전념하다6.러벳의 삶들어가는 말(차티스트 운동의 해석과 평가의 한계)최초의 산업 국가인 영국에서 1830년대 말부터 시작된 차티스트 운동은 성년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중심으로 하는 6개 항의 정치적 요구를 담은 ‘인민헌장’을 의회에 청원해 법제화하려 했던 영국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이었다.이러한 차티스트 운동에 관해서는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다. 차티스트 운동을 영국의 전통적인 급진주의의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이 운동이 보여준 유례없는 대중적 정치 운동으로서의 면모를 높의의 기본적인 논리를 고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정치적 급진주의는 1842년까지 차티스트 운동의 논거로 계승되고 있었다.2)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적 급진주의노동 계급 급진주의의 정치적 개혁만이 해결책이라는 인식은 전자본주의 시대나,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해 관심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정치적 지배 집단이 자본 축적과 재생산 기반의 확보를 위해 생산자들을 생산 수단에서 분리시켜 자본-임노동 관계 속에 강제로 편입 시켰던 ‘자본의 본원적 축적기’에는 타당한 것이었을지는 모르나 자본의 본원적 축적기를 지나 노동자들의 잉여 노동에 대한 수탈이 구조적으로 자본주의 생산 과정 자체에 내재하게 되는 그런 시기에는 타당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로의 사회적 변화는 급진주의 사상들을 자본주의하의 노동 계급의 조건에 알맞도록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켰다.그러나 차티스트 급진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변화를 불가피한 역사적 과정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정치가 만들어 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정치를 뒷받침 하고 있는 사회적 ? 경제적 토대를 인식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불행이 정치뿐만 아니라 자본의 지배에 의한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도 유래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노동 계급 급진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호지스킨 조차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의 불행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 경제 과정에서 발생 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법과 정치권력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위적인 법은 정치 체제를 개혁해야만 노동자들에게 소유권을 회복 시켜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렇듯 급진주의의 정치 개혁은 과거를 지향하고 있었고 과거의 회복을 희구하고 있었다. 이는 보통 선거권의 정당성을 과거의 역사 속에서 찾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1838년부터 1842년까지의 초기 차티스트 운동은 현실 자본주의 사회의 개혁을 전망하지 못한 채, 현존하는 정치 체제의 개혁을 통한 과거의 자연 상태의 회복간 차티스트 운동은 이념적 혹은 전략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진전했다.1850년 초 차티스트 내부에서 세 가지 상이한 경향이 나타났다. 전국헌장협회 내부에서 홀리오크와 클라크를 중심으로 전국의회 및 재정 개혁 협회의 소헌장을 지지하며 중산 계급과의 동맹을 추진했던 그룹이 상이한 경향 중 하나이다. 이들은 인민헌장의 6개 항을 ‘호주 선거권, 비밀 투표, 3년의회, 더욱 평등한 의석 배분’이라는 4개항으로 축소 ? 변형한 이른바 ‘소헌장’을 정치 개혁 강령으로 채택하고 노동 계급과 중산 계급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헌장 사회주의자들은 중산 계급이 주도하는 소헌장 운동은 기껏해야 중산 계급하층과 노동 계급 상층에만 이익을 줄 뿐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민헌장이라는 정치적 개혁 강령을 고수해야 하되 그 강령은 사회적 변혁 강령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차티스트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인민 주권을 통해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지배를 타파해 노동의 주권, 즉 노동자들의 정치적 ? 사회적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또 다른 상이한 경향이고 헌장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민헌장 6개 항을 차티스트들이 추구해야 할 변함없는 정치 개혁 강령으로 고수하고 끝까지 낡은 깃발만 내걸고 투쟁한 오코너로 대표되는 차티스트들이 나머지 경향이다. 오코너는 1849년 독자적으로 의회에 인민헌장의 법제화를 청원했으나 의회가 그의 청원을 부결시킨 후부터 그는 정치 개혁이 인민헌장의 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져야한 다는 것을 고수하면서도 중산 계급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바꾸어 소헌장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산 계급 급진주의자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는 소헌장 자체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중산 계급 급진주의자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으나 현장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중산 계급진영에 항복하는 것을 의미했고 오코너와 결별하게 되었다.2)헌장 사회주의자들이제는 185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은 의회 개혁이나 재정 개혁을 지향하는 중산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였다. 그러므로 청원서를 의회에 지출하기 전까지 전술 문제를 둘러싼 도덕파와 폭력파 간의 대립은 개머지의 지적과는 달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지도부인 대표자회의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대표자회의는 비상설적인 협의 기구에 불과했고, 따라서 책임 있게 이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할 힘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 사항을 불이행한 책임을 차티스트 대중에게 전가하는 등 지도부로써의 역할을 포기하는 행위도 했었다. 한편, 이 같은 대표자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차티스트 대중은 “뉴포트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지도하거나 통제할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에 군대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었다. 이렇듯 제 1차 청원 시기 차티스트 운동의 가장 중요한 결함은 지도부의 무능 혹은 부재, 곧 조직의 문제였다.(2) 전국헌장협회와 운동의 분화1840년대에는 이 문제에서 새로운 진전을 이루어낸다. 영국의 차티스트들을 하나의 결사체로 결집시킬 “전국정당”으로써 전국헌장협회를 결성했다. 전국헌장협회는 차티스트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지도할 상설적인 기구로 집행부는 직접 선거를 통해 구성하기로 했고, 집행부 임원에게는 회원들이 납부한 회비로 급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같이 전국적 단일 조직으로 전국헌자협회가 출범하자 각 지방의 차티스트들과 노동자 급진주의 단체들이 신속하게 집결하였다. 뉴포트 봉기의 실패 후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던 오코너는 “중앙집권적 체제하의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전국헌장협회의 결성에 적극적인지지 의사를 표명했다.하지만 제 1차 청원과 뉴포트 봉기의 실패 경험이 발전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 실패의 경험은 지도자들 중의 일부를 정치 개혁의 요구에서 후퇴시키거나 중산계급에 다가서도록 만들었다. 인민헌장을 기초한 러벳은 1840년 석방된 후 ‘전국협회’를 창설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인민헌장을 획득하는 데 가장 시급한 것은 지적수준을 높이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지식운동’을 계급 계열의 여러 신문들도 토지 계획을 맹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코너는 1847년 10월에 각각 맨체스터와 노팅엄에서 중산 계급 계열 신문들의 기사 내용을 반박하는 집회를 개최해 금전상의 결백과 토지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을 보고했다.4. 오코너의 꿈(1) 노동자 권력과 토지오코너가 제안한 토지 계획은 노동자들을 소농장에 정착시키려하는 것으로 정치 개혁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코너는 그 구상 단계에서 실제로 추진하는 과정까지 내내 인민헌장의 법제화와 토지 계획의 불가분한 상관성을 강조했고, 토지계획의 추진 자체가 차티스트 운동의 재건 과정임을 확신했다. 앞서 보았듯이 제 2차 인민헌장 청원의 실패 이후 차티스트 운동은 침체 되었고 회원의 수가 감소했다. 이는 플러그 폭동 당시 전국헌장협회 지도부가 보여준 태도에 대한 실망도 있었지만, 토리당 정부의 정책도 무관하지 않았다.토리당정부는 파업 폭동을 제압하면서 구속자에 대한 처벌에 관대했는데 이는 토리당 정부의 제 1차 청원 실패 이후 발생한 뉴포트 봉기 때의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관대한’ 태도는 유화정책 혹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의 신포였다. 토리당 정부는 소비세를 줄이고 소득세 및 재산세를 늘린다 든가, 구빈법의 적용을 완화, 광산법 제정, 공장법 확대 적용 등 노동자들의 불만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토리 정부의 정책은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약화시켰고, 입법의 계급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다소 완화 했었다. 정치권력에 대한 도전은 불허하되 경제적 요구는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시키고 그 분말에 대해 일정하게 양보하는 이른바 ‘개량주의’ 정책의 시초였고, 중기 빅토리아 시대에 나타나는 정치권력에 의한 노동 운동의 ‘자유주의화’ 혹은 ‘부르주아화’의 초기적 모습이었다. 전국헌장협회는 인민헌장이 법제화 되면 노동자들의 상태를 개선시켜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것 마저 두 번씩이나 거부당하는 좌절을 겪으며, 더욱.
서사무가와 판소리 그리고 가면극 연구●서사무가서사무가는 신의 일생과 내력을 밝혀주는 것으로 무당이 굿에서 노래로 부른다. 현장에서는 본풀이라는 용어로 사용된다.(제주도에서는 무당이든 청중이든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창세유형의 서서무가는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창세신화의 유일한 잔존물이다.제석본풀이 유형의 서사무가는 삼신의 기원과 곡모신의 직능을 설명하는 무가이다.장자풀이 유형은 함경도, 충천도, 전라도,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내용의 서사무가이다. 전라도의 ‘장자풀이’의 전반부는 ‘장자못전설’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못된 장자가 중을 박대하는 내용의 서사무가로는 이밖에도 제주도의 ‘천지왕 본풀이’ 가 있다.‘장자풀이’를 액막이 또는 액두리 무가라고 부르는 것도 씻김굿의 기원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된다.칠성풀이유형의 서사무가는 함경도, 전라도,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자료로 인간의 수명을 맡은 칠성신의 유래담이다.●무가의 문학성과 문학사적 의의무가는 무속제의와 결함된 것이고 무속제의는 주술성과 신성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무속의 관습에 따라 무속의례는 신과 인간 사이의 화합의 축제를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오락성이 개입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건이 되고, 무가가 문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용할 수 없는’ 무당인 세습무가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렇게 예술적으로 세련되게 잘할 것을 요구하는 관중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강신무 보다는 무가의 문학성 제고에 훨씬 더 기여.●판소리란 무엇인가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산풀된 민중 예술의 하나로,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시켜 노래한 서민 예술이다.노래로 부르는 부분을 ‘창’이라 하고, 말호 하는 부분을 ‘아니리’라고 한다. 또 광대는 서서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연극적 동작도 하는데, 이를 ‘발림’, 혹은 ‘너름새’라고 한다. 고수는 북을 쳐서 반주하면서 소리 중간 중간에 ‘얼씨구’,‘좋다’ 따위의 추임새를 연발한다.판소리는 명창이 청중을 대상으로 부르면서도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만갑은 판소리 창자를 극창가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판소리 창자가 노래부르면서 연극적 동작도 보여준다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다.신재효는 그의 에서 광대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득음’,‘너름새’의 네 가지 덕목을 꼽고, 그 가운데서도 순식간에 천태만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너름새’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우조: 맑고, 씩씩하고, 거세다. 가곡, 시조와 같은 정악의 가락을 판소리에 응용한 것으로 웅장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장엄한 장면, 남성다운 장면, 영웅적인 인물의 호탕하고 씩씩한 기상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적용되는 방식이다.평조: 정대하고 화평하다. 슬프되 편안하고, 웅심하여 화평하다. 가곡과 시조의 가락을 판소리에 응용한 것으로, 명랑하고 화창한 느낌을 준다.계면조 :슬프게 흐느낀다. 판소리의 기본이 되는 조로서, 나 같은 전라도 민요의 가락을 판소리에 적용한 것이다. 슬프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애절히 탄식하는 장면, 슬픈 이별의 정서를 노래하는 장면이나 여자의 거동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판소리는 대체로 17세기경, 숙종조 말에 형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판소리 발생에 큰 연원을 차지하는 것은 무당이 굿판에서 부르는 긴 서사적인 내용의 무가이다. 판소리 광대들은 대가 무당의 남편이면서 장단을 쳐주거나 창악·잡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점과 관련하여 이 같은 추정은 비교적 들어맞게 된다. 판소리와 굿에서 사용하는 장단이나 선유르이 유사함이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판소리 사설의 수사법과 창곡의 구성에서 중요한 특징으로 ‘이면’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사실적인 묘사를 들 수 있다. ‘이면’은 사설의 내용이나 앞뒤 맥락에 서로 어긋나거나 모순되는 곳은 없는가, 사설의 내용과 음악적 결합이 적절한가, 창자는 이 대목을 적절히 노래부르고 너름새를 하고 있는가 하는, 판소리의 부분적 완성되어 전체적 균형을 문제삼는 철학적 기준을 나타내는 용어이다.●판소리의 전개와 변모1.판소리의 형성을 면하기도 하고, 일부는 자신들이 가진 예능/기술/곡예를 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결론 지었다.조선후기 유랑 예능인의 모습이에 중이나 초란이/ 풍각쟁이/ 각설이/ 사당패/ 판소리패등의 모습으로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판소리광대는 소리로써 생계를 이어야 했으므로 자신의 노래에 더욱 세련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깊은 산 속의 암자에서 10년씩 소리 공부를 했다는 것, 폭포수와 소리 싸움을 했다는 것은 이들 광대의 필수적인 연마의 증언이다. 더늠을 개발하고, 너름새를 고안하고 , 청중을 사로잡을 방법을 연구 했다.판소리는 17세기 경에야 형상화된 음악성이 강조 되는 시간 예술이며, 동화적 내용의 사설이 연극과 결합하여 이루어진 연행예술이다. 판놀음에서의 다양한 러퍼터리 가운데서, 특히 창우들이 맡아서 부르는 비교적 긴노래 였다. 그런데, 18세기경에 이르러서 판소리는 ‘판놀음’의 여러 레퍼터리 가운데ㅔ 하나로서의 존재하는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형태가 되었다.판소리가 가진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나서 판소리 공연만으로도 충분히 흥행성이 있었기 때문에 판소리는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있게 되었다.민중층에 기반을 두면서 세속적 인기를 누리게 되자 수많은 차우/광대들이 충원이 요청 되었다.2. 판소리의 성장기 (18세기 후반~ 19세기 중반)명창들이 자신이 계발한 독창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의 후배와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판소리를 가창하는 방법도 세련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전체적인 내용을 무미하게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확대/부연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연행 형태를 가졌으므로 부분이 발전하는 현상도 일반화 되었다.어느 부분을 특히 강조하여 장면화하여 그 장면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판소리 광대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각 부분의 상황을 개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 경우 더늠이 부분적으로 확대/발전되면서, 전체 내용과는 모순/당착을 범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부분의 독자성’이나판소리 사설이 전아한 형태로 변모. 양반들이 판소리의 중요한 청중으로 등장하면서 판소리의 사설과 창곡에서의 변화의 빌미를 마현한 것이 성장기의 특징3. 판소리의 변모기 (19세기 중반~)판소리의 변화는 신재효가 나타나면서 한번에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양반층이 패트론으로 대두되고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변화를 요구 받고 있었다. 신재효의 출현은 그러한 편화의 급전환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왕족들도 판소리 광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소리를 하게 한 다음, 후한상이나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양반층의 동향을 참조하면 19세기의 판소리 사설의 변모 양상이 다음의 두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1. 판소리의 줄거리를 플롯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방식의 개작한 독서물이 등장. 나 등의 작품으로 개작한 것이 하나의 축을 이루며, 우리말의 율격을 철저하게 조합할 수 있는 능력과 센스를 갖춘 문사나 교방의 소리 선생이 계통의 독서물로 개작한 것이 다른 한축이다.2. 판소리 연행의 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사설에 양반적 의식을 담아서 더늠 자체를 고치거나 창작하여 사설의 방향을 일정하게 변모시킨 것이 다른 하나의 형태이다.신재효는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몫을 해낸 인물이다. 그는 아전 출신으로 한문에도 능하며, 판소리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창 김세종이나 진채선 들을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여 교육장을 마련해주었다. 이들과 함께 판소리의 사설을 전아한 한문투의 문장으로 개작하면서, 충이나 효.열 등의 봉건적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사설을 수정하였다. 신재효의 이러한 작업에 대하여 “판소리의 동적인 발랄함을 보수적 교양으로 감퇴” 시켰다는 지적도 있다.어려운 한자 . 고사들이나 경전의 구절들이 서슴없이 사설 가운데로 들어오는 변화를 보이면서 민중들은 유식해진 판소리 사설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변모기 판소리 사설의 내용은 보수적인 봉건 이념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개작되었다. 가작에는 조잡한 것은 전아하게 바꾼다는 명분이 있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일정한 투로 분식되어 어려워졌고, 음악성도 고도의 기교와 시김새 등으로 세련을 거듭해서 서민층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는 고급예술이 되어 버렸다.기생계 춘향 -> 성격이 매우 발랄하다. 민중의 여성상을 대변비 기생계 춘향 -> 경판본 춘향,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양반의 여성같이 요조숙녀로 그려짐심청이, 심학규 -> 주책스러운 인물로 그려지다가 양반화 되면서 양반으로 지위가 상승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나 뺑덕어멈을 만나는 장면들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어색해짐을 보인다.4. 일제시대 판소리와 창극19세기 말까지 판소리를 지탱해준지지 기반이 양반층이었는데, 20세기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양반이라는 존재가 쉽게 해체되어 버렸고, 그 후예세력들은 일본 식민지 문화 정책에 이끌려 일본의 통속 예술에 경도되면서, 지금까지 패트론 역할을 자임하던 판소리와 판소리 명창을 방기하였다. 즉 판소리가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때문에 다시 예전에 자신의 예술에 갈채를 보냈던 서민 대중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과정에서 지금까지 구가해왔던 우아한 예술을 버리고 민중 취향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쉽고도 골계적인 사설의 회복과 계면조 전통으로의 회기였던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의 판소리가 계면조로 많이 흘러간 것은 이 같은 판소리의 기반 변모와도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다. but 대중의 관심이 이미 떨어진 상황.이와 같은 양상이 지속되면서 한편으로 악화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채의 일환으로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조직적인 압살이 진행되었다.단가를 일본어로 부르게 하거나 ,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형태로 성급하게 무대화 되면서 우리에게 고유한 연국술과 접합하지 못한 채 어설픈 신파의 영향을 받아 기형적 형태로 변화 되기도 하였다.20세기 초반 새로운 판소리에 대한 기대로 판소리가 창작된다. 이것을 창작 판소리라 부르며 이 최초이다. 이인직의 를 각색한 작품이다.또 반일 정서를 노래한 등이 창작판소리로 수용되기도 한다.창작 판소리의 미의식은 거칠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거나
판소리+판소리의 형성 (17~18세기): 18세기를 전후하여 급격하게 변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발생한 판소리는 호남 지역(전라도)의 무속을 배경으로 발생한 예술이다.호남 지역의 세습무 가운데 女巫를 "미지", 남무를 "산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여무가 굿을 담당하고 남무는 여무를 도와 여러 가지 잡일을 했으며 소득의 분배도 여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남무가 굿에 참여하고 그 몫으로 돈을 받는 경우는 노래를 할 때뿐이었는데, 세습무 집안에서 남자로 태어나면 노래를 잘하는 것만이 잘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러한 호남 지역의 무속적 특징은 조선 후기 사회와 관련을 가지면서 판소리의 발생을 자극했다.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무속의 사회적 신임은 퇴색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상행위가 활발해지고 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습무 출신의 명창들이 무속이라는 제전적 속박을 떨쳐 버리고 소리판을 벌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판소리는 음악적인 부분이나 사설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미숙한 상태였을 것이고, 연행방식 또한 돈을 주고받는 거래방식을 띠기보다는 적당한 물질적 보수를 받고 축제판이나 축하연 자리 등에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판소리의 성장기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일정한 체계를 갖춘 사설이나 창법으로 정비되지 못했던 판소리가 이 시기에 이르면 12마당으로 정리되면서 민족예술로 발돋움할 바탕을 마련했다. 19세기 초반에 민중 의식은 더욱 성장하여, 판소리를 통해 지배 체제를 풍자하고, 신분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며, 경제적 궁핍의 부당성을 폭로 하였다.성장기의 특징은 청중이 양반들에까지 확대되어서 양반들도 판소리를 즐겨 들었으며, 이를 듣고 시를 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판소리의 사설과 창곡에서 변화의 빌미를 마련했다.+판소리의 변모기 (19세기 중반~ ): 왕이 광대의 판소리를 감상했다는 기록도 있을만큼 이 시기에는 양반층이 판소리에 열광했고 때문에 판소리 사설이 민중 의식이 아닌 양허금파(許錦波) 등 많은 명창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2. 신재효에 대한 계층적 이해: 그는 순조 11년(1812)에 태어나서 고종 21년 (1884)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았던 당시 조선 왕조 중앙 권력의 강화 정책에 따라 지방의 토착 세력이 맡아 왔던 향리 직은 하급 관리직으로 한정된 신분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향리에게 일정한 급료를 지불하지 않았던 제도적 장치 때문에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을 저지르게 되고, 이러한 부정이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후기에 이르면서 부정은 더욱 심화되어 향리들은 부정 부패를 상징하는 신분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배층의 가장자리에서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피지배층과 대립하는 사회 계층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조선조 말기 향리를 포함한 중인층의 사회적 영향력은 커졌다. 그러나 이들은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비판적 지식인의 기능을 수행할 처지도 못되고, 피지배층의 현실적 소망을 이끌어 들여서 새로운 역사와 지평을 여는 주동적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힘들었다.신재효는 이러한 시대의 중인층으로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나 현실세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판소리 사설에서 나타나는 그의 세계인식의 바탕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3.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1)사회 모순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 조선조 신분 사회의 모순을 심각하게 문제 삼고 있던 신재효는 그 자신이 향리로 체험할 수 있었던, 부패된 현실을 에서 심봉사를 통하여 폭로했다.관문 밖에 막 나서니 삼반 관속들이 와 하고 달려 들어 심봉사님을 찾는데 그런 야단이 없지. 우리 청으로 가십시다.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색주가로 가십시다. 삼백 냥 드릴게 죄수 시켜 주오. 천 냥 낼게 이방시켜 주오.(신재효, 중에서)이것은 심봉사가 관아에 가서 나라에서 장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인데, 신재효가 고치고 다듬은 에만 나오는 부분이다. 관직이 흥정되는 현실 체험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신 조조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또 화용도에서 관운장을 만나 깜짝 놀라는 조조의 모습을장담통이 쏙 빠지고 방정을 떠는구나 두발 동동 구르다가 가슴 탕탕 두드리는(신재효 중에서)겁쟁이로 그리거나, 하용도 장승을 만나 크게 놀라는 조조의 태도를적벽강 불에 간담 놀래 지랄병을 얻으셨소. 왜 공연히 앉았다가 솔방울 모양으로 뚝 떨어져 굴러 가오. (신재효 중에서)라고 직접 공격하고 있다.이러한 부분은 『삼국지연의』에도 묘사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로 불러진 의 다른 이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부분들은 신재효가 다시 고쳐 쓴 곳으로 권력층을 상징하는 인물인 조조를 강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3) 남창 춘향가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① 이도령이 춘향에게 구애를 함② 춘향이 상이한 신분을 이유로 거절함③ 이도령이 춘분한 언질을 줌④ 춘향이 만족하여 화답함⑤ 양자 모두 본의 아닌 이별을 당함⑥ 신관 사또가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⑦ 춘향이 수절을 이유로 거절⑧ 신관 사또의 핍박⑨ 춘향이 죽음을 각오하고 항거함⑩ 이어사 출현으로 행복한 결말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보다 큰 단락으로 묶여질 수 있다.[가] ①~④[나] ⑤[다] ⑥~⑨[라] ⑩[가]는 이도령과 춘향의 결연, [다]는 [가]의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사회적 차원으로 변모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그 계기가 되는 것은 [나]이다. [라]는 문제점이 해결되는 대단원에 해당된다.에서는 춘향의 신분이 이도령 보다 낮다. 그러나 신재효는 춘향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춘향의 출생담이 다른 이본보다 더욱 길게 나타나며, 춘향과 이도령의 결합이 이미 예정되어 있음을 태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등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출생담과 성장 과정이 의 서두에 등장함으로써 춘향은 이도령과의 결합에 있어 그에 합당한 자격을 지닌 여인으로 변모된다. 이와 같은 춘향의 격상은 청중에게 춘향보다 이도령의 자격에 관심을 쏟게 유도한다.사또 자제 도령님이 년광은 이팔인데 얼굴은 관옥이요 풍채는 의 신의의 실험을 위한 필수 단락이다.아비 고을 따라와서 글 공부는 아니하고 밤낮으로 몹쓸 장난 이 소문이 서울 가면 급제하기 고사하고 혼로부터 막힐테니....... (신재효 중에서)아버지의 위엄 앞에서 이도령은 수직적 부자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이도령 자신의 일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 이도령의 자의에 의한 춘향과의 관계는 견고하지 못하였다.팔자 좋은 도령님은 동방화촉 정실 얻고 낙교청운 급제하여 금마옥당 좋은 벼슬 부기 행락 하실 적에 보는 것이 미색이요, 듣는 것이 풍악이라. 천리 남원 천첩 춘향 손톱만큼 생각할까 (신재효 중에서)그의 대응 능력이 확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춘향은 불안해하며 이도령에게 푸념을 늘어 놓는다. 둘의 이별은 신물 교환으로 춘향이 제안하게 되고 이로서 이별의 주관자로 춘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도령이 떠나고 신관사또 도임의 호화로운 치레는 춘향의 불행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가 춘향을 부르는 것은 이도령이 춘향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선상에 놓여 있다.도령님 좋아하며 퇴기의 딸이며는 한 번 구경 못할쏘냐 네가 가서 불러오라. (이도령)기생의 딸이며는 무슨 허물 있겠느냐 구경하게 불러오라. (신관사또)(신재효 중에서)두 지시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와 의식의 차이가 놓여 있다. 춘향은 이미 이도령과의 사랑으로 자신이 변모되어 있었다. 또한 이도령은 대등한 관계에서 춘향에게 접근하여 왔으며, 신관사또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에서 접근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시간적 차이를 제거한다고 하여도 춘향의 자세는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사또가 도임 초에 춘향 행실 모르고서 처음에는 불렀으나, 하는 말이 이러하니 기특하다 칭찬하고 그만 내어 보냈으면 관촌 무사할 것인데, 생긴 것이 하도 예쁘니 욕심이 잔뜩 나서 어린 계집이라고 얼러 보면 혹시될까 절자를 가지고서 한 번 잔뜩 얼러댄다. (신재효 중에서)여기에서 두 번재 쉼표를 기준으로 앞부분은 바람직한 처리 방식이지만 뒷 부분은 이념이나 신분을 떠난는가 이를게 들어 보오 부자는 패망, 아전은 도망 백성은 원망 출패는 양망 그게 사망 아니오 흉악한 일 또 있지요 우리 고을 춘향이가 매우 예쁜 일색이지 구관 자제 책방하고 백년가약 맺었기로 수절하고 있는 것을 신관사또인 원님이 수청 아니 든다 하고 월삼동추 뚜드리며 착가수옥 볶아내니 불쌍한 춘향이가 그 새에 죽었는지(신재효 중에서)위에 든 백성의 말은 신관사또의 행적에 대한 일면적 파악이다. 이것은 새 시대의 등장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구시대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수반 한다. 출도 장면이 되면서 신관사또 자신이 한일을 잊고 경황없이 날뛰는 모습과 ‘피가 쭉쭉 흐르는’ 상황이 격동과 통쾌함으로 표한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불안과 설레임을 드러낸다.신재효는 신관사또를 처벌한 뒷 부분은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은 갈등의 해결과 함께 춘향과 이도령이 신분적인 관계를 배제하고 인간대 인간으로의 관계를 나타낸다.신재효는 자신의 에서 신분 갈등을 제거시키고 애정의 문제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끝까지 일관되게 계속되어 양면의 대립을 파국으로 이끌지 않고 조화시킴으로써 새 시대의 흐름과 맞닿는 개편자의 성숙한 사고와 교양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춘향에게 양반에 대한 관념적 우위를 확보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인 서민의 승리를 화해 속에서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재효의 개작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4. 신재효의 사설 작업의 한계: 후대의 판소리 창자들이 소리책 속에 베껴넣어 부른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은 박헌봉의 창악대강에 편집되어서 오늘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재효는 판소리 책을 직접 구해보고, 또 여러 판소리 창자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면서, 판소리 소리책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설을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직업적인 판소리 창자로서 청중 앞에서 소리를 해본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판소리 사설 개작 작업의 성과는 만족스럽게 나타나지는 .
누군가에게 불편했던 진실 (광해군)광해군은 왕이지만 왕이 아닌 인물이다. 제위도중 폐위되어 광해군이라는 지위로 남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된다. 왕이라는 지존의 지위에서 그것도 철저한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조선에서 폐위의 나락으로 떨어진 광해군은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그리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광해군은 선조의 아들로 임진왜란을 몸으로 직접 이겨낸 인물이다. 왜란 당시 선조는 무능했고, 여러번 스스로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전쟁을 버터내기 버겨워하는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무능함을 보이는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로 나서 조선의 모든 최전방 전선을 누비며 실무를 담당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등 쓰러져 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한 경험은 광해군의 실무적인 탄탄한 토대가 되었고, 왕이 된 이후 외교에 대한 균형적 시선의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험 많은 임금인 광해군은 왜 폐위가 되었을까? 후세의 평가를 보면 그의 정치적인 리더십은 부족했다고 한다. 그렇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실이다. 하지만 외교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인 광해군이 정치적인 능력은 부족했다고 말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조금 억지가 있다. 일단 아버지 선조의 경우 정치적인 센스가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왜란이라는 전쟁을 뛰어난 근성과 부지런함으로 직접 이겨낸 인물인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부족한 인물이었기에 폐위당한 것이라고 단순히 평가하는 것은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광해군에 대한 기록이 그 폐위를 주도한 인물들에 의해 쓰여진 것에도 원인이 있다.광해군은 왜란 중의 조정의 대신들의 무능력을 보았다. 왜놈들이 눈앞에 보일 때까지 정치적 논박만 했다. 도망가는 것에선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지만 왜란을 극복하는 데는 무능력을 보였다. 물론 모든 대신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조정의 높은 신하들은 전쟁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음은 분명하다. 하여튼 이러한 대신들의 무능력과 광해군 즉위 과정에서의 선조의 권력에 빌붙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막으려 했던 유영경의 모습을 본 광해군은 정치인들인 본질을 본 듯하다. 권력에 빌붙어 그 힘을 발휘하는 대신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모습에서 그들에 대한 혐오가 생긴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 후 유영경을 축출하고 자신의 세자책봉을 지지한 대북파를 대거 등용했다. 대북파는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이었다. 이들이 주도권을 잡은 정계를 광해군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이 좀 무리하게 정적을 물리치거나 하는 것에 무관심했다. 어차피 정치인들 힘의 근본에는 왕인 자신의 권력에 있다고 경험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단 광해군 자신이 실무적으로 필요하다는 인물은 당파 가리지 않고 썼고, 대신들이 반대하는 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면 원칙과 근본을 말하고 그대로 행했다. 이러한 모습은 외교적인 부분에 관해서 두드러진다. 광해군은 지금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대북파는 자신이 끊어버리면 쉽게 버려질 것이고, 그들을 대신할 인물들은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정치인들에 대한 과소평가는 광해군의 폐위의 원인이 되었다.정치적인 부분의 광해군의 자세는 자신이 외교적인 부분에 신중하게 고민하고 집중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실무적인 인물인 광해군에게 대신들의 논박은, 그들의 성리학 맹신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외교적인 부분과 국내 정세를 보살피는 데 집중했다. 정치는 대북파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두었다.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그의 균형적인 시각은 당시를 지배하고 있는 사대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왜란 당시의 명군의 무능과 세자책봉에서 명의 행동은 광해군에게 명이라는 커다란 나라 앞에서 실리를 따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광해군은 후금을 지속적으로 지켜보았다. 중간자적인 위치를 지켜려 했으며, 그것은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다. 강홍립의 파견과 그 후 처리에 관한 부분에서도 광해군은 아주 균형적으로 행동했다. 그러한 고난이도의 외교적인 전략은 놀라울 정도다. 그의 외교적 수완은 더 논할 필요 없이 탁월했다.그리고 광해군이 왜란 전후의 처리를 함에 있어서 대동법 시행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무리한 궁성의 중건은 오히려 백성들의 고통을 부가한 것이라 평가 받는다. 그 부분에 있어 개인적으로 볼 때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일단 궁성의 중건은 강력한 왕권의 기본 초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후 넘쳐나는 유랑민들을 처리하기 위한 대안은 아니었을까? 다만 광해군이 조금 무리하게 궁성 중건에 주력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인조반정이후부터 이어져온 역사의 승자들의 이야기란 점을 어느 정도 감안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몰입의 즐거움 (finding flow)미하이 칙센트미하이 著그동안 삶의 지침서라 불리는 몇 권의 책을 보았다. 그러나 항상 가슴은 뜨거웠지만 머리는 아무 반응이 없는 일시적인 감상적인 책이 되어버리기가 일수였고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책들은 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처음 북리뷰를 선택할 때 삶의 지침서라는 작은 글씨를 먼저 읽었더라면 다른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이라는 방법으로 내 자신을 돌이켜 분석해 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그 동안 말로는 설명 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삶을 이루는 틀이 무엇인지 알았고 무엇이 그 틀에 힘을 부여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떠한 여가를 보내고 있고 그러한 여가는 어떠한 것이며 어떠한 여가가 삶의 질을 위해 바람직한지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느끼던 아니면 어떠한 경쟁에서 느끼던 설명할 수 없었던 부분도 몰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으면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나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우리의 일상의 틀은 휴식, 생산, 소비, 교제라는 순환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보기, 듣기 같은 감각의 영역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세상을 접할 때 쏟아 부을 수 있는 주의 집중의 절대적 상한선을 규제한다. 때문에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들의 시간 배분이 아주 유사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삶이 모두 같을 수가 없는 것은 성, 연령, 신분이라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기회의 차이이다. 우리네 삶은 엇비슷한 제한 요소들에 의해 규정되지만 경험의 내용을 판이하게 만드는 사회적 범주로 인간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사람들의 개성이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따라서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기회의 차이는 불평등한 삶을 만들지만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사람의 인식에 유연성과 개인의 주도적인 선택으로 운명의 굴레를 어떻게 쓰는지 알고 어떻게 쓰는 것이 자아개발에 더욱 바람직할 수 있을지 알아야 한다.사람들은 행복을 중요시 여긴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추구하는 목표이며 모든 일의 궁극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행복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라 모호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며 상당히 가변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 행복은 무엇인가. 어떤 공장의 노동자가 행복해 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으므로 그런 주관적 행복감은 자기기만이라 못 박은 마르크스의 해석과 장 폴 사르트르의 ‘허위의식’ 이라는 비난,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실제 사건을 반영하지 않고 이야기 자체만 겨누는 말하기 방식이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미하이 교수의 생각처럼 나 역시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 할 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정반대로 해석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개성의 차이처럼 행복의 체감 도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행복은 오늘을 살아가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분명한 것은 너무 이른 행복감은 자아발전에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무 빨리 만족하면 앞으로의 발전은 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감정은 의식 안의 상태를 말한다. 두려움과 같은 종류의 감정은 ‘심리적 엔트로피’를 조성하여 우리가 외부의 일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는 내부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 과단성 등 과 같은 바람직한 감정은 ‘심리적 반 엔트로피’의 상태를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외부의 일에 우리의 정력을 모두 온전히 투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엔트로피’로 설명 가능한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감정이란 복잡한 사고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다소 위험 할 수도 있으나 분명 그를 이해하고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좋은 전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심리적 엔트로피로 인해 생기는 내적 동기부여와 개성 있는 ‘자아’로 발현되는 것이다. 감정과 목표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고의 인지적 과정 또한 중요하다. 사고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미지의 연쇄를 낳아 유기체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 기본이 원인과 결과를 잇는 것이다. 감정, 목표, 사고가 따로 떨어진 경험의 가닥들로 의식을 통과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교섭하면서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정신적 과업이 어려울수록 집중하기는 어렵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는 객관적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별다른 갈등 없이 집중할 수 있다. 재능의 개발에는 집중력이 필요하고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을 다스려 자신이 하는 일에 내적동기를 다져야한다. 그 기본위에 목표를 세워 경험의 질서를 만들고 자아를 충실히 하며 사고를 깊게 하여 대상을 인지해야 하며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발전적인 기본자세라 할 수 있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좀처럼 쉽게 맛보기가 어렵지만 그 순간에는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러한 예외적인 순간을 몰입경험이라 부른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몰입은 명확한 목표 앞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고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데 한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 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경험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강렬한 삶의 선사한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 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 뒤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이 경험은 배움으상 몰입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 몰입의 가치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몰입은 일을 할 때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일은 과제의 난이도와 요구되는 실력 수준이 비교적 높을 뿐만 아니라 목표 또한 명확하고 효과도 즉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명확한 목표, 뚜렷한 결과, 자신감, 힘에 부치지 않은 난이도, 정돈된 분위기를 줄 수 있다면,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운동을 하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 할 때 맛보는 희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능동적인 여가에서도 몰입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운동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갈 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사람들은 더 행복하고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끌어 올리려면 먼저 가장 보람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삶을 설계해야 한다. 또한 삶의 질을 영향을 주는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이다. 친구와 가족은 각각의 긍적적인 영향이 다르다. 그리고 예전의 창조적인 사상가와 예술가의 말을 빌려보면 마음에 드는 경관이야말로 영감과 창조력의 샘으로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여건에서 일을 하느냐도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눈부신 일상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 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삶의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일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고 피해왔었지만 그 속에서 많은 삶의 소중한 가치를 얻어 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가시간보다 일하는 동안 몰입의 경험을 더 많이 느끼면서 일을 기피하게 되는 것은 청소년 때부터 시작된 일에 대한 역설적인 이해가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미 굳어져버려지는 것 때문이기도 하고 고용주가 직원들이 일을 통해 얻는 체험의 질에 무관심 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을 천시해 온 의식과 무관하지도 않다. 일에 대한 우리의 역설적인 모습은 자아의 발전에 긍정적이지 못하다. 또한 21세기 현재의 우리들의 여가 생활은 이고 비몰입적인 여가는 삶의 질을 끌어내린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한다.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한마디에 울고 웃고 한다. 몰입 경험을 하다 다음 순간에 냉담, 불안, 이완, 권태가 찾아오는 경우는 비일비재 하다. 인간관계가 우리의 정신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고도화된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시간들은 우리들에게 정서적 고립감과 소외감을 줄 수 있다. 그리하여 혼자 있으면 울적함을 호소하고 별로 신이 안 나고 즐겁지도 않으며 기운이 떨어지고 무력감과 권태감, 외로움에 휩싸인다. 이러한 고독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 대부분이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창조적인 개인들은 이러한 고독의 시간도 현명하고 잘 헤쳐 나가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름난 과학자 프리먼 다이슨도 연구할 때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 노력하지만 집필을 하는 동안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고 한다. 경영인 존 리드의 일과를 보면 아침 다섯 시 반에 출근하여 아홉시 반에서 열시까지 하루일의 경중을 나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고 한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외향적인 성향과 고독의 시간을 이용할 줄 내향적인 성향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우리는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 일과 여과의 이분법적인 생각은 발전에 경직을 가지고 올 수 있다.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선택하여 하거나 해야 할 일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는 일과 여가가 이어지면서 더욱 값지게 변화하게 된다. 일에서 얻어지는 몰입이 여가로 이어지면서 얻어지는 발전의 가능성은 아주 강렬하다. 이러한 자세는 생활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몰입의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목적성을 가지게 된다.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그 일을 경험하는 것 가체가 목적이 될 때를 자기목적적이라고 한다.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이미 보상이 되었기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