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중국의 정책(소수민족 정책을 중심으로)목차Ⅰ. 들어가며Ⅱ. 중국 내 소수민족의 특징Ⅲ.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기본원칙Ⅳ.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1. 사회주의 건설 단계(1949-1978)2.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8)3. 개혁 개방기(1978-1997)4. 전면 개방기(1998-현재)Ⅴ. 나오며Ⅰ. 들어가며일반적으로 소수민족(少數民族)이란 다수만족(多數民族)에 대한 대칭개념이며, 특징한 국가의 전체 국민 가운데 인구 숫자 또는 정치적, 사회적 및 문화적 영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주류(主流)민족에 비하여, 민족 기원, 언어, 문화, 종교 및 여타 사회습관 등에서 구별되는, 하나 이상의 공동체 집단을 의미한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는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시기에 인구 및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영역을 주도하여 온 한족(漢族)이 주류 민족이자 다수 민족이며, 한족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을 소수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인구 숫자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이외의 여타 민족들을 지칭하며 이들 민족들의 인구가 한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기에 ‘소수’민족이라고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 정부 주도로 ‘과학의거’와 ‘민족의원’의 기준과 원칙에 따른 민족식별 사업을 거쳐 2006년 말 현재중화인민공화국 내에는 한족과 공인된 55개의 소수민족을 합하여 56개의 민족이 공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장세도,「중국 소수민족 미디어 정책에 관한 연구」, 광운대학교 대학원, 2013, p.10.대표적으로 몽고족, 회족, 장족, 위구르족, 묘족, 이족, 조선족, 티벳족, 부의족, 만주족 등이 있다.중국은 ‘단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정책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적 통합은 곧바로 중국 국내정치의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문제의 해결에 많은 정책을 제시 해 왔다.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만이라도 분리 독립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다른 소수민족에게 영향을 줄 수 기 달랐기에 각 민족 간에 역사적 사회경제 발전단계의 차이가 크다. 즉 1950년대 중반까지 여전히 원시 공동체 사회단계에서 수렵 채집생활을 하는 민족이 있었고 식인의 풍속이 남아 있기도 하였으며 많은 소수민족 사회에 봉건적인 노예제가 잔존하였다. 반면 조선족처럼 이미 토지개혁을 이루고 근대 사회 단계에 진입한 민족도 있었다.Ⅲ.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기본원칙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의 민족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기본원칙으로는 첫째, 민족평등의 원칙, 둘째, 민족구역자치의 원칙, 셋째, 분리불가(分離不可)의 원칙을 들 수 있다.먼저 민족평등원칙이란 각 민족 간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건국 초기 소수민족정책의 기본방침을 제시하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통강령(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에서는 “중국 국경 내의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며 우호합작의 대가정을 이루고 대민족주의(大民族主義)와 민족분열행위에 반대한다.”(제50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 정부가 민족정책원칙으로서 민족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신중국의 민족정책이 소수민족을 억압해 왔던 청나라 시기나 한족중심주의를 표방했던 국민당 정부와는 차별적이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평등의 강조는 민족통합을 유지하고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국가의식을 강화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족평등은 한족을 제외한 여타 소수민족들 사이의 평등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한족과 소수민족지역의 경제격차 등 역사적으로 형성된 여러 가지 사실상의 불평등요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다음으로 민족구역 자치란 중국 특유의 독자적인 제도로서 소수민족 집중 거주 지역에 대하여 자치기관을 설치하고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구역 자치는 중국이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특한 제도의 하나로서 강제동화(制同化)가 실시되었던 문화 대혁명 시기에도 외형적인 틀은 여전히 유지되었던 민족정책의 기본원칙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14, pp.24-25.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 원칙은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문제를 풀어가고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데 있어 일관되게 유지해 온 기본원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중국 정부가 시행한 소수민족 정책은 무엇인지 시대에 따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Ⅳ.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소수민족은 중국 총인구의 8.99%에 지나지 않지만, 분포지역이 매우 넓으며,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면적은 중국 국토 총면적의 약 5-60%를 차지한다. 특히 거주하는 지역이 대체로 중국 변경 지역인 까닭에, 소수민족문제는 중국 안보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티베트족과 신강 위구르족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중국정부가 무력으로 강격하게 대응하는 이유는 바로 중국 안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기본적으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상실시키고 지배민족에 흡수시키는 ‘동화 정책’과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민족 정체성을 유지시켜 나가는 ‘융화정책’을 접목시키면서 소수민족 정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중국이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1949년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이 존재하였고, 과거의 정책들이 현재 중국의 민족정책에 일정부분 반영되어 왔다. 하지만 중화인민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성립하고 그 이후에 민족이 법적으로 소수민족으로 분류된 사실에 미뤄 볼 때 구체적인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1949년 이후라고 하는 것이 타당 할 것 이다. 따라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대해 사회주의 건설 단계 (1949-1966),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8), 개혁개방기(1978-1997), 전면개방기(1998-현재)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1. 사회주의 건설 단계(1949-1978)1949년 이전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에 대한 비전은 국민당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국민당 집권 당시 소수민족 정책은 종족동화 정책이었다. 배정호, 구재회,「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개혁」,『중국의 (州), 자치현(縣), 자치구(區) 및 향(鄕)이 지정되었다. 이러한 민족 구역 자치는 이전까지 표방되던 민족 자결권의 인정과 연방제 국가수립에 비하면 소수민족의 권리가 상당히 후퇴 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일차적으로 구역자치 제도를 통해 분리 독립의 가능성을 제한하였지만, 소수민족들이 독립국가 건설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정체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중앙 정부는 소수민족 지구에서의 민족자치를 주도할 민족 간부 양성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각 지역에 대거 학원을 설립했고, 간부교육에 의해 육성된 소수민족 간부들은 그들이 속한 자치지역의 지도 세력이 됨으로써 정책집행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지역실정에 맞는 민족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언어, 문자의 경우에도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존중하였으며, 문자가 없는 민족이나 불 완비된 민족의 경우 적극적으로 민족 문자를 갖도록 지원했다. 이는 소수민족의 문맹률을 저하시키고, 소수민족들의 민족의식을 고양 시키는데 일조 하였다.그러나 그 정책의 기저에는 공산당의 정치적 술수가 작용하였다. 자치구역 지도세력의 경우, 당서기 직위는 대부분 한족 출신이 역임하였고, 소수민족 출신들은 성장, 시장 급의 행정조직 수장 직을 수행했다. 소수민족 출신 대표가 자치 구역을 이끄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몽골족 출신 울란후(Ulanhu)가 내몽골 당서기를 지낸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 이었다. 언어와 문자의 경우에도 소수민족의 정체성 함양에 일조하였지만, 사회주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국가체제에 대한 구심적 귀속의식을 강화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건국 초기 중국의 민족 정책은 전반적인 분야에서 소수민족의 자율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 민족지구의 실정을 고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문화융합정책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소수민족지구에 대한 영토적 통합을 완성함으로써 새로이 탄생된 사회주의 체제의 정치적 안정과 구심력을 강화한다는 수민족지구에서는 이중의 재앙이 있었다. 당시 ‘민족 융합론’이 제기되면서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따르는 자연융합을 표방한다는 정책 아래 당시 소수민족지구의 실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소수민족사회의 개조를 옹호하였다. 또한 배타적 민족 동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그 기본관점을 형성했던 것은 ‘계급투쟁론’으로, 지배세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해석되면서 모든 소수민족 지구를 하나의 기준 아래 표준화시키고 동질화 시키는 민족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격변은 폭력 사태를 만연하게 만들었는데, 그 주요 대상은 소수민족이었다. 계급투쟁과 구시대적 관습 타파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홍위병을 조직하여 소수민족을 공격하고 문화유산과 유적지를 파괴하였다. 문화 혁명 당시의 국경 분쟁은 소수민족들을 정치적, 사상적으로 불순한 존재로 의심 받게 만들었고,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불순분자 청소’라는 명목 하에 ‘정치선 방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소수민족들의 사유재산은 몰수당하거나 파괴당했고, 정신적, 신체적 폭력 등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문화 대혁명을 전후한 시기 중국에서는 한족의 언어와 문화습득 등 일방적인 질서가 강요되고 숙청과 노동개조라는 폭력적인 방법이 소수민족문제 해결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급진적 민족동화 정책이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급진적으로 변화하게 된 이유는 정치, 사상적 통합의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지도부의 노선투쟁 등 국내적 정치변동과 변경지역에서의 대외안전보장이라는 요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3. 개혁 개방기(1978-1997)1978년 12월의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11기 3중전)는 중국에 개혁 개방이라는 새로운 노선의 도입을 가져왔다. 이후 중국 사회는 급격한 변모를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라고 하는 큰 변화는 소수민족에게도 큰 변혁을 일으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문화대혁명 시기 추진되었던 강제동화정책의 실패는 중국의 민족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다.
주제: 청소년 팬픽문화1. 새로운 청소년 문화로서의 팬픽문화우리 사회에서는 199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인터넷 보급이 급격히 확산됨에 따라 익명성과 이용자들의 자율성을 전제로 다양한 범주의 사이트와 채트룸,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등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작용을 위한 행위들을 포함하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문화가 확대 발전되고 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실현하는 새로운 장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다양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이를테면, 온라인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활동하기도 하고, 인터넷 소설이나 팬픽(fanfic) 등을 씀으로써 자신의 창작 욕구를 발현하기도 하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모임을 만들거나 가입함으로써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등 공동체 구성원으로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을 실시간으로 즐기기도 하고, 롤플레잉 게임을 함으로써 실제의 성과는 다른 새로운 성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청소년들은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사이버공간에 접속함으로써 학교생활과 입시준비로 인한 시공의 제약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활동에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사이버 청소년 문화에 있어 新문화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팬픽(fanfic)이다. 초기에 팬픽은 팬들이 스타를 주인공으로 하여 각자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팬클럽 활동의 일부로 인식되었으며, 팬클럽 사이트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읽혀졌다. 하지만 이제 팬픽은 사이버 문학의 한 형태로써 팬클럽 사이트가 아닌 팬픽 사이트를 중심으로 공유되어진다는 점에서 팬클럽 활동의 범위를 넘어 일련의 청소년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다.2. 팬픽의 정의팬픽(Fanfic)이란 ‘팬(fan)들이 쓰는 이야기, 혹은 소설(fiction)이라는 뜻의 합성어인 팬픽션(fanfiction)의 줄임말로 팬들이 좋아하는 인기가수나 영화 또는 만화의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김민정, 2002)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팬픽션’과 ‘팬픽’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팬픽션’은 ‘팬픽’이라는 용어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에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의 열성적인 팬들이 인터넷상에서 관련 사이트를 개설하여 연기자나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 는 등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활동은 점차 시리즈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물에 이야기를 뒤틀거나 덧붙여서 가상의 소설을 만들어 내는 현상으로 전환되었으며, 미국 드라마 ‘스타트랙’이 시작이다(김양재, 2007).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드라마 ‘X파일’을 중심으로 연기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문화일보, 1997)내는 것으로 소개되었다.김민정(2003)은 국내 언론이나 지면에서 등장하는 ‘팬픽’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팬픽은 사이버 공간에서 청소년들의 ‘팬덤활동’,으로 특히 청소년 전반의 문화라기보다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는 연예인에 관한 문화라고 하였다. 그러나 팬픽을 일방적인 스타 숭배 문화가 아닌 창작하고 읽는 행위의 생산활동과 소비활동으로 보았을 때 대중문화를 주도적으로 실천하고 활동하는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발전적인 ‘팬덤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더불어 팬픽이 문화적 다양성과 집단 커뮤니케이션을 발전하게 하는데 의미있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박수진, 2004).즉, 팬픽션과 팬픽은 공통적으로 온라인 팬덤에 속하지만 다른 장르로 분류된다. 팬픽은 ‘10대 여학생들’이 남자 그룹가수의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한 동성애 소설을 만들어 유행시킨 것이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청소년 문화이다(2002, 김민정).3. 팬픽의 특징팬픽은 특정 연예인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청소년에 의해 텍스트 파일형식으로 쓰여진 후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되어 발전된 문화이기 때문에 그 시초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처음 시작이 우리나라의 초기 네트워크 연결망인 천리안이나 유니텔이 활성화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추측한다. 그 이유는 팬픽은 텍스트 파일 형식으로 공유하기 때문에 전에 쓰인 팬픽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유의 범위는 창작자의 주변인 정도로 예상할 수 있다. 처음 초기 팬픽은 팬 홈페이지 속 차단된 공간에서 자격이 주어진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는 현상이 특징이다. 때문에 유명한 팬픽을 읽기 위해서는 팬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운영자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하여 자격을 부여받고 난 후에나 파일을 소지하거나 읽는 것이 가능했으며, 그 자격조건을 홈페이지에서의 팬 활동 즉, 홈페이지 방문횟수, 글을 쓴 횟수 등의 활동에 대한 부분이다.팬 페이지 문화와 관련되어 접근의 엄격함과 소통과정의 특징은 김양재(2007)의 연구에서 논의한 바 있다. 현재까지도 인기 있는 팬픽은 창작자에 의해 공유 가능한 팬픽과 공유 금지된 팬픽으로 나뉘며 현재는 아류문학이나 하위문학으로 분류되기 보다는 창작물로써 저작권법에 적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는 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 P2P사이트를 통해 공유와 접근이 용이해 졌다. 팬픽은 매우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끊임없이 창작되며, 순정, 무협, 우정, 학원액션, 판타지, 현대물, 고전, 공포 등의 다양한 내용으로 쓰인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이들 대부분이 동성 사랑을 소재로 내용이 진행된다는 점이다.박수진(2004)의 연구에서는 여자 청소년들은 주로 동성애에 대한 지식을 팬픽에서 얻는다고 논의한 바 있으며. 이와 유사한 논의로 유주현(2004)의 연구에서도 여자 청소년들은 처음 동성애의 개념을 팬픽을 통해 얻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밝힌 바 있다.4. 팬픽에서의 문화적 담론(1) 동일시 담론Henry Jenkins(1995)는 팬픽션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는데 팬픽을 생산해내는 팬은 팬픽에 자신의 관심사를 포함시키고 자신의 욕구에 스타가 부합될 수 있도록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였다. 팬픽문화는 가면 문화처럼 성역할의 전이와 역전이를 반복하면서 다면적이고 가변적인 성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때 팬픽은 스타의 사랑을 전재로 하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허구성이 다른 소설보다 많다고 하였다(이화진, 2003). 팬픽 역시 소설과 같은 내레이션을 지니며 등장인물이 존재하므로 여타의 소설이나 영화와 같이 동일시의 과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Tudor(1974)는 독자는 감정적 친화에서 자기 동일시단계로 몰입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팬픽의 특성으로 볼 수 있는 스타와 팬의 관계가 설정되는 상황과 극적인 허구는 등장인물과 자신을 더욱 빨리 대입시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동일시 과정을 통해서 인물에 이미지를 자신에게 내면화하며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 극복과정이 독자의 가상경험이 되므로 이를 통해 스타와의 친밀한 관계를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였다(안선주, 2004).(2)동성애 담론팬픽에서 동성애 담론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팬픽에서 나타나는 동성애는 어떠한 시련도 갈라놓을 수 없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하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성적인 묘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들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사회의 통념적인 남성성(공)과 여성성(수)의 캐릭터로 설정하고 공수 구분에 따라 고정된 성역할을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인물적 특징은 결국 기존 사회에서의 이성애 커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팬픽에서 동성애커플의 관계는 ‘이성애적 틀’에서의 ‘동성애적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청소년교복문화)목차Ⅰ. 들어가며Ⅱ. 교복의 역사적 흐름1. 교복 자율화 이전 시기(1886년-1983년 교복 자율화 이전)2. 교복의 부활기(1983년 교복 자율화 이후-1996년)3. 교복의 브랜드화 시대(1996년-현재)Ⅲ. 교복의 현대적 흐름1. 매스미디어를 통해 나타난 교복2. 예술을 통해 나타난 교복Ⅳ. 교복문화를 바라보는 양가관점1. 청소년이 교복문화를 바라보는 관점(1)자기표현으로써의 교복문화(2)소속감으로써의 교복문화(3)패션으로써의 교복문화2. 기성세대들이 교복문화를 바라보는 관점3. 청소년-성인간의 양가관점 극복 방법Ⅴ. 나오며Ⅰ. 들어가며교복이란 학생들이 착용하는 학교가 정한 제복, 즉 유니폼이다. 유니폼은 사회에 대한 단체 표시이며 단체 구성원에게는 공통분모를 갖게 하여 규율을 지켜 질서를 잡게 하는 데에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교복은 학생들에게 공동의식, 집단성을 경험하게 하며, 다른 집단과 구별됨으로써 특수성을 나타내고 일반 유니폼이 가지는 목적 외에 교육적 효과도 함께 가지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교복 문화를 살펴보면 이러한 의미에 통제와 획일화라는 의도가 부가되어 학생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그러나 1990년대 후반, 교복시장의 팽창과 함께 시작된 대기업의 교복시장진출과 대중매체, 인터넷 등에 익숙한 10대들의 문화는 획일화와 통제의 상징이었던 교복에 다양한 색과 디자인을 입히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교복은 10대의 중요한 패션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듯 이제 교복은 ‘교복문화’이라는 말과 함께 발전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중, 고등학생의 90%이상이 교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교복을 착용하고 생활한다. 어떻게 보면 학창시절의 교복착용은 일생동안 오직 청소년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에 착용하는 교복은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유니폼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타인으로부터 평가받는 도구로서 이에 대한적극 권장하였다. 1938년 한복 착용 금지령이 내려지고 양복착용이 의무화되면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여러 학교에서 양장교복시대가 시작했는데, 블라우스, 스웨터, 세일러복 상의와 플리츠스커트 등을 주로 착용하였다.해방이후 학제개편이 실행되면서 각 학교의 자율적 결정에 의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복 형태가 제정되었다. 이전과 달리 교복은 학교의 전통을 반영하면서 변화되어갔다. 이 시기 개정된 교복은 학교에 대부분 동복으로는 감색의 더블 재킷과 넓은 플레어스커트 혹은 밑이 터진 형태의 슬랙스를 입었고, 칼라는 흰색 포플린으로 만들어 빳빳하게 풀을 먹여 덧달아 입었다. 하복으로는 대부분 감색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다.1970년대부터는 중학교의 평준화 시책이 실시되면서 서울시내의 남, 여 중학교 교복이 통일화되었다. 학교의 특성을 없애기 위해 단추, 모자 등을 포함하여 통일된 중, 고등학교의 교복이 제정되었다.하지만 이후 교복이 너무 획일적이어서 불합리하다는 일선 중학교의 건의가 잦아들자 문교부에는 교복자율화 지침을 발표하게 되었다. 머리형의 자율화를 시작으로 교복, 신발, 모자의 변경을 시도하였다. 1983년을 기점으로 학생을 자율화하여 어떠한 형태든 획일화된 교복 지정은 불가 한다는 정부 방침의 발표에 따라 청소년의 의생활에 전환점이 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2. 교복의 부활기(1983년 교복 자율화 이후-1996년)앞서 문교부는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한다는 교육적인 목적에 따라 어떠한 형태든 획일화된 교복 지정을 불가 한다는 교복 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탈선행위가 증가하고 사복 구입으로 인한 가계의 경제적인부담의 증가, 빈부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이유로 하여 학생과 학부모의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교복 자율화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5년 교복 자율화 보안 조치를 발표하였는데, 내용은 교복 착용여부를 학교장 재량에 일임한다는 것이다. 그 후 다시 교복을 착용하는 학교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1990년 문교부는 함께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그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청소년의 특성이 결합되면서 교복은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교복문화라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Ⅲ. 교복의 현대적 흐름1. 매스미디어를 통해 나타난 교복매스미디어는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사회화의 도구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TV와 같은 영상매체로부터 제품구매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를 통해 유행에 관한 정보를 습득한다. 특히 인기 있는 드라마 속 연예인의 교복패션은 매스컴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제시되면서 교복착용 스타일과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추구 성향은 청소년들이 의복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TV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청소년들은 TV속 드라마나 시트콤 등에 나타나는 교복이 실제로 존재하는 교복인지 방송을 위해 만들어진 교복인지 등 교복의 출처를 궁금해 하기도 하고 교복치마의 길이, 리본, 넥타이 모양과 색과 같은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는 청소년들이 교복의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심은 교복변형 행동을 유발하기까지 하고 있다.또한 각 교복 브랜드들은 10대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광고모델로 기용하여 브랜드이미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청소년들에게 피력될 수 있는 광고카피를 내세워 패션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실제 교복을 착용하는 학생들과 연령대가 동일하거나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여 스타가 되었다. 이러한 스타 모델들의 이미지는 청소년들에게 모방과 동일시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2. 예술을 통해 나타난 교복1990년대만 해도 교복은 학교의 제복으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강하였지만, 현재는 기능성과 활동성뿐만 아니라 세련되게 디자인된 교복을 원하게 되면서 디자이너의 교복이 출연하게 되었다. 또한 체육복의 경우, 유명 스포츠 브랜드와 계약을 맺어 학교 전용 디자인을 주문해서 사용하는 학교도 있다. 디그들의 개성을 나타낼 뿐 만 아니라 자신의 패션 코드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복의 디자인을 결정하는 것도 예전처럼 학교 측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교복 패션쇼를 열어 다양한 교복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Ⅳ. 교복문화 바라보는 양가관점1. 청소년이 교복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청소년기는 발달과정상 자아 개념이 확립되어 가는 시기이고 급속한 신체의 성장, 사회성의 발달로 자신의 신체 및 외모에 관심이 집중되고 사회적 활동이나 대인 관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급속한 발달은 청소년의 외모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이러한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의복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킨다. 청소년들의 외모에 대한 관심은 기성세대와는 구별되는 그들만의 문화와 감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그들의 라이프스타일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터넷, 연예인, 또래집단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아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청소년들이 하루의 절반정도를 착용하고 있는 교복은 이들에게 자산들을 나타내는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따라서 그들이 교복문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크게 소속감으로써의 교복문화, 자기표현으로써의 교복문화, 패션으로써의 교복문화로 나누어 살펴보았다.(1)소속감으로써의 교복문화사회적인 측면으로 청소년기는 그들에게 기대되는 사회의 기대와 역할에 적응해야 하므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소속감에 대한 갈망으로 청소년들은 동료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하고 그들에 동조하여 집단과 다르다고 인정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데 그 수단의 하나로 의복이 사용된다(김미영, 1999).특히 청소년은 또래 집단에 속하려는 욕구 등을 충족하기 위하여 집단의 특성을 나타내는 극단의 스타일이나 두드러진 색의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생활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착용하는 의복에 대한 동조성의 하나로 교복변형을 꾀하고 패션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교복행동을서 교복을 착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홍선옥, 1998). 또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교복을 이용하며, 동시에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과도기적 단계이기 때문이므로(임숙자, 1983) 교복은 자신을 사회화 시켜 나가는 좋은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하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에게 교복은 그들의 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교복변형 행동으로 나타난다. 교복변형 행동은 의복 관심도의 반영으로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놓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교복변형 유형은 하의의 길이와 폭을 줄이는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 상의의 품과 길이 순으로 많았다. 교복변형의 유형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하의 교복에 대한 변형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어 신체만족도 면에서 하의의 신체불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교복을 변형하는 이유로는 첫째는 ‘변형한 것이 예뻐보여서’, ‘튀고 싶어서’, ‘여성스러워 보여서’, ‘몸매을 드러내고 싶어서’ 등 자신의 신체의 장점을 살려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 변형을 하는 것으로, 둘째는 ‘상의를 줄이면 다리가 길어 보이므로’, ‘품을 줄여 입으면 더 날씬해 보여서’, ‘굵은 다리를 감추기 위해서’ 등 신체결점을 커버하기 위해 변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몸에 꼭 맞는 교복이 예쁘고 아름다운 교복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러한 미의 기준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복을 변형하고 있다.(3)패션으로써의 교복문화빠르게 변하는 패션 트렌드와 한번 개정되면 잘 바뀌지 않는 교복은 상반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교복은 분명 패션의 흐름 안에서 청소년의 고유문화와 결합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패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청소년은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면서 그들 나름의 패션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것은 교복을 통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예를 들면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붉은색과 청색, 남색과 갈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조끼와 그 조
‘독재자와 영웅 양날의 검’율리우스 카이사르목차1.서론2.시대적 상황1) 원로원의 통치력 상실2) 공화정 체제 내 개혁의 실패3. 카이사르의 성장과정1) 유년시절2) 권력의 중심으로4. 카이사르의 집권1) 집정관직 당선과 삼두 정치2) 갈리아 전쟁 발발3) 삼두정치의 몰락과 내전5.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견해6. 결론1.서론『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이다…. 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에게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이다』위의 인용처럼 세계사에서는 그 시대에 정점에 선 위대한 개인들이 존재한다. 위대한 개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그 시대마다 존재하였으며, 그들은 자기 시대의 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볼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갖고 행동하였고, 역사는 그들이 의도한데로 흘러가게 된다. 기원전 100년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위대한 개인이 탄생한다. 카이사르는 전 시대를 통틀어 탁월한 지도자 중에 하나였으며 자신이 치른 전쟁을 누구도 넘보기 힘든 탁월한 문장으로 남긴 저술가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공화정 로마의 최고 권력을 쥐었던 정치가였으며, 비록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취했던 적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황제의 지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하지만 카이사르의 이야기는 너무도 극적이었기에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독재 정치를 시도하려 한 로마의 반역자 혹은 한계점에 다다른 로마를 개혁함으로써 로마를 더욱 번영하게 했던 로마 역사상 독보적인 존재, 이것은 카이사르를 바라보면 후세인들의 견해이다. 카이사르처럼 역사가들이나 사람들 간의 견해가 이토록 극과 극으로 상반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카이사르의절은 원로원에 초대되었다. 때문에 지방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나가서 해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둘째로 인사권이 있었다. 주요 공직은 여전히 민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거기에 출마할 것을 허락하는 것은 원로원이었다. 결국 원로원에 줄이 닿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공직에 진출이 불가능했다. 셋째로 재정권도 있었다. 속주의 조세제도를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고, 국고 지불을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 의원을 겸한 재무관이었다. 게다가 원로원에는 사법권도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는 항소권이 있고, 속주민에게도 고발할 권리가 보장되어있지만, 그것을 재판하는 기관의 장은 원로원 의원인 법무관이었고, 평결을 내리는 배심원단은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때문에 로마를 재판하는 사법권은 원로원에게 독점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끝으로 권사권도 실제로 원로원에 있었다. 집정관 선출권은 민회에 있었지만, 선출된 두 집정관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은 원로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직 집정관에게 어느 속주의 통치를 맡길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원로원이 내렸다.이렇게 거대한 제국이 된 로마의 가장 핵심적인 삼권이 모두 원로원이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권력 집중 현상으로 로마가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은 당연했다. 원로원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도록 속주들과 관계를 맺어나갔고, 원로원의 지배를 유지하기위하여 자신의 이상에 맞는 자들을 관직에 진출시켰다. 전쟁 이후 쌓은 엄청난 부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분배하였으며, 그것에 대해 고발당했을 때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덮어주며 보호했다. 그리고 농민봉기 등 무력을 통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군사권을 활용해 제압해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이 같이 강대한 권력이 집중됨에 따라 원로원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긍정적인 통치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2) 공화정 체제 내 개혁의 실패포에니 전쟁 이후 승자의 혼미에 빠진 로마는, 로마를 승자의 주역으로 이끈 기반들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시대에 뒤쳐진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카이사르를 비롯한 결연한 인물은 이런 사태서 어떻게 하면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혈통, 교육, 그리고 재산이 현재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파트리키 귀족과 손을 잡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것과는 다른 코스를 선택한 것은 그의 선견지명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카이사르의 첫 번째 강적은 술라였다. 술라는 원로원파의 일원으로 과두정의 대표자로서 로마의 최고 유력자로 인정받았으나, 그 자신은 마리우스의 일가인 카이사르를 두려운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대담하고 겁 없는 도전을 시작했다. 킨나, 즉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으로 평민파에 속해 있던 인물의 딸 코르넬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술라는 그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명했지만 강경한 반대에 부딪히자 유피테르 신관임명을 취소하고, 아내의 지침금과 재산을 몰수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아시아를 행해 떠났다. 신관직을 잃은 카이사르가 국면 전환을 위해 동방으로 떠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지방장관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의 참모라는 특권적인 지위를 얻었고, 장관은 카이사르를 맘에 들어해 로마의 동맹자인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에게 사자로 보내기도 했다.기원전 78년 술라가 몰락하자 카이사르는 급히 로마로 돌아왔지만 그의 상황은 이전과 같았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정치활동을 되도록 삼가면서 변론가로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부정하게 돈을 모은 술라의 부하를 고발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술라의 지지자들을 화나게 하여 웅변술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카이사르를 동방으로 보내버린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소아시아 해안을 눈 앞에 두고 해적에게 잡히고 만다. 하지만 오히려 카이사르는 해적들은 놀리고 교란하여 풀려나게 되었으며 이후 해안의 군소 도시 주민들을 모아 해적을 기습하여 모조리 책형에 처하게 한다. 하지만 함께 지내며 친분도 생겼던 카이사르는 해적들을 책형에 처하기 전에 미리 목을 회담과 달리 통치와 조정능력에서 확연한 신뢰성을 지닌 모임이다. 왜냐하면 정상회담은 실력 있는 당사국끼리의 모임으로 당면해있는 사건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이사르가 고안한 ‘삼두정치’도 역시, 원로원과 달리 제국에 대한 통치력을 회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체제였다. 카이사르는 반체제 세력의 선두에 서서 체제를 공격하기 보다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술라와는 달리 낡은 가죽부대를 과감히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종래의 정치체제와 어울리지 않은 실질적인 체제를 고안했다. 그것이 삼두정치였다.집정관 취임 두 달 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농지법’을 발의했다. 이 농지법은 국유지를 분배해 로마시민에게 영구 임대했는데, 로마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두정치를 등에 업은 농지법이 통과됐다. 카이사르의 독주를 본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은 불안해했다.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갈등은 평생을 두고 계속됐다.카이사르가 대권을 잡은 후의 개혁을 살펴보면, 먼저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개혁을 들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2대왕인 누마의 태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개정하고, 기축통화로서 로마화폐를 개혁하면서 두 가지 모두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의 병용을 허용하였다. 또, 금융부문에서 이자를 연리 12%를 상한으로 제한을 두게 된다. 다음으로 시민권의 분배를 들 수 있는데, 시민권을 갖고 있으면 직접세가 면제되고, 사유재산보호와 인간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며, 로마시민을 죽이는 것에 대해 로마제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타국에서의 안전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는 이점을 갖게 된다.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속주에 로마시민권을 부여하였고, 시칠리아와 남프랑스속주에는 라틴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로마시민권자인 군단병을 속주에 정착시켰으며, 갈리아인, 게르만인, 에스파냐인 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데 개방적이었다. ’라는 말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탑수스 회전에서 승리하여 폼페이우스 파의 잔당을 소탕하고 아프리카를 떠난 기원전 46년 4월에 끝이 났다. 이 투쟁은 원로원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거기에 반대하는 ‘개혁파’의 다툼이었고, 이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시대가 원한대로 ‘개혁파’였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카이사르는 드디어 과거의 술라와 마찬가지로, 거부권 행사에 방해받지 않고 체제의 개혁을 정책화할 수 있는 독재관의 절대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드디어 본격적인 제정의 길이 열린 것이다.물론 이러한 그의 개혁의 핵심은 정치개혁에 있었다. 공화정의 잃어버린 통치능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로마는 개혁될 수 없었다. 우선 그는 원로원을 900명으로 늘렸다. 물론 이것은 술라처럼 원로원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서 원로원을 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원로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원로원의 수를 늘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원로원은 독재관의 보조적인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결코 ‘원로원의 최종권고’라는 계엄령을 선포할 권한을 주어선 안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영토의 확대로 무의미해진 민회를 형식적인 기관으로 바꿨다. 민회는 카이사르가 선정한 인물을 추인하는 제도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카이사르는 호민관과 자신을 통합시켰다.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질서는 원로원에 기반을 둔 ‘체제’와 호민관을 기수로 하는 ‘반체제’로 나뉘지 않고, 이 두 파벌의 통합에서 생겨나는 ‘새 질서’였다. 그래서 그는 종신 독재에 취임했다. 원래 종래의 독재관이란 일시적인 위기관리체제였기 때문에, 그는 이 특례제도를 상설제도로 바꿔서 그의 생각을 한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려했기 때문이다.그가 원한 것은 통합체의 정점에 올라, 국내 계급투쟁을 해소하고 광대한 로마 세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5.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견해카이사르는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천재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적으.
주제 : 청소년 이성교제1. 주제선정이유‘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등 최근 청소년 이성교제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많은 드라마에서 청소년들의 러브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대중매체에서조차 공공연하게 소재로 다룰 만큼 청소년 이성교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얼마 전 뉴스를 통해 2011년 SOS생명의전화가 처음 설치된 이후 올해 9월까지 접수된 전화는 총 2351건이었으며 이 중 1044건(44.4%)은 10대 청소년의 전화라는 것을 보았다 .상담 내용에서 이성 문제는 425건으로 진로 문제(693건)의 바로 뒤를 잇는, 거의 절반 이르는 높은 수준이었다.이처럼 이성교제는 청소년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으며 많은 청소년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의 성문화, 특히 이성교제를 중심 주제로 선정하여 인터뷰를 통해 이성교제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보기로 하였다.2. 청소년 이성교제에 대한 인터뷰1) 인터뷰 대상이름이*민안*미성별남자여자나이고등학교 2학년고등학교 3학년사는 곳경기서울이성교제 횟수3회(현재 이성친구 있음)2회(현재 이성친구 없음)인터뷰는 이성교제에 대한 남녀의 다른 시각을 알아보기 위하여 남학생 한명과 여학생 한명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2) 인터뷰 방법인터뷰 방식은 구조화 면접이었으나 상황에 따라 추가적인 질문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미리 정해 놓은 질문은 6개였으며 한 사람당 인터뷰 소요 시간은 약 2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3) 인터뷰 질문Q. 처음 이성교제는 언제 시작하였나요?Q. 교제의 대상은 보통 어디에서 만나요?Q. 이성교제를 할 때 부모님께 교제 사실을 알리나요?Q. 데이트는 주로 어떻게 하나요?Q. 이성교제 시 스킨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Q. 청소년이 이성교제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4) 인터뷰에 대한 내용과 특징먼저 첫 번째 질문인 “처음 이성교제는 언제 시작하였나요?” 에 대한 내용이다. 남학생의 경우에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의 경우 중학교 2학년에 처음 이성교제를 시작하였다고 답했다. 덧붙여 말하길 요즘에는 초등학생들도 자유롭게 이성교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질문을 통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이성교제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부담스러운 인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두 번째로 “교제의 대상은 보통 어디에서 만나요?”에 대한 내용이다. 남, 여학생 모두 대게 친구사이에서 연인사이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고 답하였다. 예를 들어 학교나 학원, 교회 등에서 만나 호감을 갖게 되어 연애를 하는 경우이다. 현재 남학생의 경우 같은 학교의 여학생과 교제를 하고 있는데 이 경로가 가장 보편적인 경우이다. 이밖에 다양한 경로가 있는데 바로 청소년의 소개팅 문화이다. 소개를 받는 경로는 보통 주선자는 자신의 친구이며, 그 주선자의 친구를 소개받는 형식이라고 하였다. 여학생의 경우 중학교 때 소개팅을 통하여 연애를 한 경험이 있는 데 그때 당시 좋지 않은 피드백을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 중학생 때보다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답하였다.세 번째로 “이성교제를 할 때 부모님께 교제 사실을 알리나요?”에 대한 내용이다. 여학생의 경우 이성교제를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그 이유는 부모님께 말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에 이성교제 당시 부모님께 알리고 연애를 하였는데 집에 늦게 들어갈 때마다 남자친구 만나고 온 것 아니냐고 혼내셨다고 한다. 또한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늦어도 믿지 않으시고 혼을 내셨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남학생의 경우 부모님께 알리고 연애를 한다고 답하였다. 중위권 성적이었던 이 남학생은 오히려 여자친구가 생긴 이후 성적이 올라 부모님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말하였다.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녀의 성적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대학에 가고 나서 이성교제를 하기 바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학생의 사례를 미루어보아 이성교제가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즉 청소년이 공개연애를 하는 경우는 연애를 함으로써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우이고 반대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우 비밀연애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네 번째로 “데이트는 주로 어떻게 하나요?”에 대한 내용이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길거리를 구경하는 등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 비슷하게 데이트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학생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연상 남자친구를 만날 경우 상대방이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또래친구들에게 부러움을 받는다고 답하였다. 남학생의 경우 여자 친구에게 얻어먹는 경우도 있지만 자존심 때문에 용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벌어 데이트 비용이나 선물을 산다고 하였다.다섯 번째로 “이성교제 시 스킨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에 대한 내용이다. 또래친구와 만나 공개적인 연애를 하는 경우는 스킨십의 수위가 비교적 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학생은 고등학생의 보편적인 스킨십 수위는 키스 정도라고 답하였다. 아직까지는 학생이기 때문에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친구와의 스킨십에 대해서는 각별한 친구사이에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라고 하였다. 남학생의 경우 여학생 보다는 스킨십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이성친구와 성관계를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과 동시에 부러움을 갖는 것으로 보였다. 청소년의 성관계 대해서 좋지 않은 의사를 밝혔지만 여학생이 성관계를 바라보는 시각보다 관대하였다. 스킨십에 대한 이야기는 어울려 다니는 무리의 또래친구들에게 주로 이야기한다고 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