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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본 한의학의 현대적 이해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본한의학의 현대적 이해철학과 4학년김 경민1. 서문오래 전에 생리통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었다. 한 밤에 통증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지독한 생리통이었고, 몇 년간 고생을 했었다. 처음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대학병원에서는 맹장을 의심했다. 당연히 맹장은 아닌 걸로 판명이 났고, 삼 일 간 입원을 하며 엑스레이, CT, 초음파 등 많은 검사들을 실시했지만 결국엔 극심한 통증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 했다. 다만 생리통이 유달리 심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을 뿐이었다. 당연히 처방받은 약은 진통제뿐이었고, 나는 생리가 다가올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통증 때문에 학교에 나가지 못 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어머니는 한의원에 다녀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한의학에 대한 이상한 편견이 있었다. 한의학은 지나치게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보조요법으로 이용되는 것이지 질병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 간을 고생하다가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 덕에 고향의 한의원을 찾았다.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다. 내 맥을 짚더니 한의사 선생님이 꺼낸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잠을 잘 못 자네요.” 나는 당시 학교 시험기간이라 하루에 서 너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 하던 상황이었다. 내 몸 안을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단번에 알아낸 게 너무 신기해서 어떻게 아셨냐고 했더니 선생님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달 치 한약을 처방받고 꾸준히 먹었더니, 생리통이 말끔히 나았다. 몇 년을 고생했던 생리통을 한약으로 치료하다니, 이상한 불신에 사로잡혀 미리 한의학을 찾지 않았던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한의학에 대한 나의 편견은 우리 전통 의학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점에서 기인했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우리의 한의학이란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것인지, 짧은 지식과 소견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편견에 사로잡혔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한의학이 어떻게 서양의 그것 못지않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지를 구체적으틱스가 탄생했다. 그것은 일체의 시스템을 제어하는 데 구조적 공통성과 제어 과정의 공통적 법칙을 연구하는 과학 부문이다. 이전까지의 과학이 분석과 해체를 연구의 주된 방법으로 삼았다면, 사이버네틱스에서 가장 중시하는 이론은 흑상(黑箱:Black box)이론이다. 이것은 ‘흑상을 열지 않고’ 시스템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분석의 방법이 아닌 종합의 방법에 입각한 연구 방법이다. 한의학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해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서양의학은 오랜 역사를 통해 해부학, 조직학, 생화학 등을 통해 인체를 연구해왔다. 이러한 연구는 베일에 쌓여있던 생명 운동의 여러 법칙들을 발견해내며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한계점에 부딪혔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들은 결국에는 정상적인 생명의 운동과 대치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은 분자의 운동이나 전파의 흐름 같은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조절하거나 분리하는 서양의학의 방법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생명이게끔 하는 인체의 운동들을 방해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방법으로는 생명 운동의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즉, 흑상 이론을 통해서 보자면 서양의학은 흑상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한의학은 현대의 흑상 이론이 그렇듯이 흑상을 열지 않고 외부에서 증상의 변수 시스템의 변화를 종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흑상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흑상을 열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흑상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전자는 확실히 사물을 세밀하게 인식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으며 실제로 현대 분석 과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현대 분석 과학이 간과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자연 대상을 분석하면 우리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연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나 생명 활동에 관한 부분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흑상을 여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흑상 자체의 구조에 간섭하기 때문에 온전한 흑상 자체의 원리를 물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흑상을 열지 않고 사물을 연구하는 사이버네틱스는 애초에 사물에 대한 완전한 인식의 불가능성을 수용한다. 대신에 입력과 출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 흑상 자체에 대한 전체적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한의학은 사이버네틱스의 이런 방법을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의학이 인체에서 정보를 얻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보아서 관찰하는 것,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는 것, 환자에게 물어보는 것, 배나 맥을 짚어보는 것이다. 이 진단법들은 모두 인체의 생명 활동에 아무런 인위적인 것도 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래의 상태나 구조를 조금도 파괴하지 않는다. 또한 인체에 대한 입력 과정 즉 제어 과정도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진단이 분별할 수 있는 증상 변수의 범위에 제한된다. 달리 말하면 흑상을 열지 않고 외부의 조건들을 제어함으로써 출력되는 변화를 살피고 이를 다시 증상 변수에 반영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한의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흑상의 조절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3. 흑상 이론과 한의학의 방법론 비교한의학이 처음 시작된 고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의료 기기도 없었고, 해부학도 없었기 때문에 인체 내부의 매커니즘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의학의 시초는 무엇이며 당시에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질병을 다루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모든 조치들을 하나씩 취해보고 그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른바 하나하나 시험해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약초를 투입해보면, 그 약초가 인체에 대해 일으키는 작용에 대한 결과들이 나타난다. 만일 그 결과가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다시 다른 약초를 투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버네틱스의 흑상에 대한 추정조절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지나치게 맹목적이며,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성공할 확률도 적다. 그러나 당시에는 질병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한의학은 무수히 많은 의료 실천을 통하여 대량의 입력, 출력 자료를 축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있다. 따라서 어떤 과정들은 유사하게 반복되어 일어난다. 한의학에서 경험들은 무수한 역사 동안 축적과 정리되는 과정을 거치고, 그 안에서 일정한 법칙들을 찾게 됨으로써 비로소 유용한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인체라는 흑상은 어떤 입력에 대해서 일대일 대응하는 출력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한의학의 대증요법은 불완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한의학의 대증요법은 그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증후를 분별하여 치료하는 변증논치로 발전해갔다. 이 때 사용한 방법이 바로 시스템을 새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흑상 이론에서는 만일 시스템이 불안정하면, 새로 시스템을 규정하기 위해 입력과 출력 변수들을 검토하는 방법을 쓴다. 한의학에서도 개별 변수에만 착안해서는 질병에 대한 안정적인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체를 여러 변수를 가진 시스템으로 보게 된다.한의학이 이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음양변증이다. 이는 흑상 이론의 부피드백 조절과 유사하다. 부피드백 조절에서는 방향성(경향성)이 매우 중요하다. 증상 변수는 각자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간섭 요소들을 일일이 따지는 방법으로는 어떤 유효한 조치도 취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부피드백 조절에서는 복잡하게 얽힌 요소들 사이에서 규칙적인 변화의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 된다. 한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부피드백 조절의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음양’이라는 언어로 표현된다. 한의학은 수없이 많은 변화와 변증들을 ‘음증’과 ‘양증’으로 분류하며, 우리의 몸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를 ‘음양’ 평형의 안정 상태라 부르고, 각각의 소재를 살피고 조절하여 음양의 균형을 추구했다. 실제로 현대 과학에서도 모든 간섭 요소들을 일일이 파악하는 것보다 경향성을 찾아내고 이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다.한의학의 또 한 가지 방법은 심증구인이다. 이는 한의학이 발병 요소들에 대처한 방법이다. 고대에는 발병 요소들 자체를 분석하고 깊이 연 관계를 구하는 것이다. 한의학은 비록 실제 발병 요소를 분석하지는 못하지만, 증상변수 체계의 변화를 통하여 입력을 추론하고 병의 원인을 알아내는 간접적 방법을 사용할 수는 있었다. 한의학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신체의 일반적 성질에 대한 유효한 이론들을 만들어 냈다.마지막으로 한의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상 학설과 내안정기 모형에 대해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장상 학설에서 상이란 인체 밖에 나타나는 징후나 모습을 의미하고 장이란 인체 내부에 있는 하나의 변수로 직접적 데이터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장변수는 상변수의 규율적인 변화를 보여주며, 시스템의 내재적 연관성은 상변수 사이의 연관성을 나타내준다. 이처럼 장상의 학문은 한의학적 진단으로 알 수 있는 상변수를 이용하여 직접적 데이터로 파악이 불가능한 장변수를 어떻게 유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한의학은 추론과 실험을 거쳐서 경험에 근거를 두고 일반적으로 상용되는 몇 가지 유효한 장변수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흑상 이론에서 입력과 출력 연구를 통해서 시스템의 내부 구조를 추측하고 모형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는 많은 증상들이 고립된 장변수들로는 해석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장기적인 연구를 통하여 인체 흑상에 대한 하나의 구조적 모형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 한의학이 세운 인체 모형에서 장부들이 여러 피드백 회로를 통해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하는 메카니즘은 사이버네틱스의 내안정기, 항상성 유지 장치와 매우 유사하다. 내안정기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만일 시스템의 일부분이 본래 안정 형태에 큰 이탈을 갖지만 않으면 기타 하위 시스템들이 이 일부분이 원래의 안정 상태를 회복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고, 둘째, 일단 시스템이 안정적인 형태를 갖게 되면 시스템의 초기 상태에 상관없이 하위 시스템의 상호 작용만으로 시스템이 안정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의학에 의하면 인체도 안정과 평형을 저절로 유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의학의 인체 모형이
    인문/어학| 2015.02.13| 5페이지| 1,5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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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인에 대한 이해와 현대 사회의 타자 윤리
    타인에 대한 이해와현대 사회의 타자 윤리1. 들어가는 말.우리가 사는 세계를 들여다보자. 나는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 가는 나’이다. 그러나 나는 곧 나 이외의 다른 존재들도 발견하게 된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나와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나와 함께 수업을 듣는 타자’가 바로 그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내가 즉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나’ 이외에도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나’만큼이나 우리는 일상에서 ‘타자’를 즉각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나 아닌 타자에게서 잉태되어짐으로써 세상에 나오게 되며 수많은 타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속에서 성장하여 결국 또 다른 공동체의 일원을 생산하는 한 단위를 이루게 된다.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이 ‘타자’에 대해서 조금 더 면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이해하지 못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며 이는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우리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만큼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이 불가능함은 자명한 일이다.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자를 수용하고 있는 것만큼의 짧은 거리가 아니다. 이미 일상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너무나 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왜곡을 경험하지만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심지어 우리는 타자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상자 속의 딱정벌레”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상자를 가지고 있다고 치자. 내가 가진 상자 속에 딱정벌레가 들어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상자에 딱정벌레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딱정벌레가 들어있다’라고 말하는 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우리는 나 자신의 인식 주관에 대한 일인칭적 접근성을 타자에 대해서 결코 적용시킬 수 없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 타자의 인식 주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가질 수 없다. 이렇듯 주관과 객관의 분리라는 틀을 가지고 타자에 대해 접근하면 결국 타자에 대한 이해는 영원한 미결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타자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한 대안은 없는 것일까?2. 인식의 주관성과 객관성서양 철학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 철학의 두 가지 양상이 객관주의적 플라톤 철학과 상대주의적인 소피스트 철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플라톤은 개별 사물들과는 별개로 현실 세계를 초월하여 본래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본질인 ‘이데아’를 상정함으로써 주관성을 초월하는 객관 지식(Episteme)을 추구했다. 이후 서양 철학은 근대의 자연 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플라톤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플라톤의 객관주의가 타자의 개별성, 다양성, 구체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 서구 철학이 존재의 전체를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한꺼번에 파악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체계 안에서 나와 다른 ‘타자’는 완전히 용해되어 버린다. 타자는 나라는 인식 주관의 인식 대상으로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하는 나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타자라는 철저한 주객 분리 하에서의 타자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미지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인식론적으로 봤을 때 인식은 근본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분리에서 출발하며 인식하는 나(자아)와 인식되는 대상(타자아)의 구별이 선재해야 나와 타자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인식론적으로 주객의 분리는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주관과 객관이 절대적으로 배타적이고 독립적인가를 생각해본다면,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설명했던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문제는 바로 이점에 있다. 객관성과 초월성을 중시하는 전통 형이상학은 나의 인식 대상이 되는 ‘타자’라는 존재가 다른 사물들과는 달리 나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하는 소피스트 철학의 상대주의적 입장이 인식의 주관성을 되살려냄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타자 개념을 이해하는 힌트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나와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관과 객관은 완전히 배타적이지도 완전히 독립적이지도 않다. 사실 나와 타자를 완전히 분리해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외부 대상 없이 순수하게 이루어지는 인식이란 가능할까? 우리의 사고란 필시 ‘무언가에 대한’ 사고일 수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항상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바로 이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의 인식 주관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반대로 대상 역시 우리의 인식 주관을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사르트르는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바깥에 있다. 우리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것은 그러하다. 모든 것은 바깥에, 세계 속에 다른 것들과 더불어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인식 주관이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내적 사유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수행하는 나의 활동과 타인과의 교제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달리 말해 세계 속에서 행하는 나의 활동을 통해 구성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관과 객관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를 만들어가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와 타자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전통 철학은 초월성과 객관성을 중시 여기며 개별적 인간을 전체성의 부분으로 취급해왔다. 이런 종류의 거시적이고 존재론적인 철학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만나는 개별적 타자들에 대한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회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타자와의 끊임없는 의사소통과 합의 속에서 나는 인식 주체로서 규정되고 또 다른 개별적 주체들을 규정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우리가 잠정적 결론으로서 드러내고 있는 이 논의가 윤리적 측면까지 확장됨을 보여주고 있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결국 사회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윤리 문제와 결부되어질 수밖에 없다.3. 타자에 대한 이해와 현대 사회의 윤리타자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이 글의 초반부에서 제기했던 물음이다. 전통 형이상학처럼 인식 주관은 내적 사유에, 인식 객관은 외부의 대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타자는 어쩌면 영원히 이해 불가능한 “상자 속의 딱정벌레”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본래 철학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고, 전통 철학이 그랬듯이 우리의 구체적 삶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만 전개되어온 학문이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발견하고 마는 타자, 부단하게 우리와 소통하는 타자에 대해서 더 적극적인 의미를 생산해내야만 한다.그래서 우리가 찾아낸 타자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의 타자이다. 그들은 추상 세계에서 내가 인식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이 세계에서 여러 가지 생활의 조건 안에서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타자이다. ‘나’라는 주관 없이는 ‘타자’에 대한 이해도 불가능하지만 ‘타자’라는 대상 없이는 ‘나’라는 주관도 불가능하다고 상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구체적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타인은 곧 나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므로 내가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나에 대한 인식의 방법을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득력 있는 논변을 펼칠 수는 없다.전통적인 서양 철학이 직관적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나와 타자의 존재를 분리시키고 독립적으로 상정하는 데에 익숙해 있다. 타인이라는, 나 아닌 낯선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바로 타자 이해에 대한 윤리적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직관적으로는 받아들이기 불편한 타자의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부단한 의사소통과 함께 타자를 나와 같은 인식 주체로 나아가 나의 인식 주체를 형성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타인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인식론적 정당성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당위성에 근거하는 문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12.08.01| 5페이지| 2,000원| 조회(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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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초 불교 용어 설명 (십이연기와 오온, 수면)
    1. 십이연기를 간략히 쓰고 약술하시오.◆ 십이연기 : 십이연기는 앞에 나오는 연결고리가 다음에 나오는 연결 고리의 조건이 된다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서양의 고전 철학에서는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재에 대해서 탐구해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계에 대하여 有라는 것도 없고 無라는 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오로지 세계를 연기의 과정으로서만 파악한다. 십이연기는 기본적으로 열반이 성취되기 전까지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인생 전반(전생과 내생을 포함)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지각 현상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는 일체의 고가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첫 번째 고리인 무명을 끊어냄으로써 고의 멸에 이르는 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명 : 명(vijja) 즉 지식의 반대말로 고의 발생, 고의 멸에 이르는 도의 길에 대한 무지를 일컫는다. 사람은 지식이나 별 이해력 없이 세계에 태어난다. 그리고 세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 성장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무명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자연스런 충동에 따르도록 하고 환경이 주는 다양한 자극들의 희생자가 되게끔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사람의 무명은 다른 모든 연기의 요소들을 작동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행 : 행은 한 평생 진행되는 작위 행위 전체를 일컫는다. 일종의 생명력, 형성력으로 개인의 평생을 만드는 힘이며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만드는 힘이다.◆ 식 : 의식 과정 전체의 흐름을 일컫는다.◆ 명색 : 명색은 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식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식의 과정들을 구분한 受 ,想, 思, 觸, 作意 등의 名의 요소와 신체를 구성하는 色의 요소를 합친 말로 신체성과 정신성을 나타낸다.◆ 육처 : 眼, 耳, 鼻, 舌, 身, 意의 여섯 가지 감각 양식들을 말한다. 육처는 식의 요소들, 명색의 요소들이 더 분화한 것으로 명색은 명색의 과정이 흘러가기 위한 여섯 통로로서 육처를 요구한다.◆ 촉 : 촉은 심리적 생리적(psycho-physiological) 체계를 외계와 접촉하게 하는 요소이다. 신체의 일부로서의 안, 안식, 외부 대상, 이들 삼자 사이의 끊임없는 ‘촉’을 통해서 수와 상이 생긴다. 식으로 정보를 끊임없이 유입하기 위한 통로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수 : 촉을 통해서 생기는 감각(sensation)과 감정(feeling)이다.◆ 애 : 낙수에 대한 개별적인 반응이며 지속적인 반응 양식으로서 유쾌한 정보가 육처 중 어느 하나를 통해서 우리의 심리적 생리적 체계 속에 들어올 때마다 생기는 것이다. 이 단계부터 우리는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상태를 경험한다.◆ 취 : ‘축적’, ‘집착’, ‘쌓아올리기’이다. 심리적 생리적 체계의 활동을 통해 세계에서 얻은 정보에 의해 경험과 업보는 쌓이고, 집착이 생기고, 인격은 형성된다.◆ 유 : 취가 벌이는 축적 활동을 통해 말미암은 증장(增長)이다.◆ 생 : 취를 통해 일어나는 증장을 통해 생이 준비된다. 십이연기의 맥락에서 생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내생을 가리키는 것이나 유와 함께 그릇된 것, 비현실적인 것,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것들의 발달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 : 세계의 몰락이며 고(苦) 자체이다. 초기경전은 “생에 연하여 노, 사,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2. 세계의 생기에 대해 약술하시오.불교에서는 지각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계는 지각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지각을 이해하고 지배하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지각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세계에 대한 연기 계열이다. 초기 경전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눈과 색에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의 결합이 촉이다. 촉에 연하여 수가, 수에 연하여 애가, 애에 연하여 취가 있다. 취에 연하여 유가 있고, 유에 연하여 생이 있다. 생에 연하여 노, 사, 슬픔, 비탄, 고뇌, 고통, 절망이 생긴다. 이것이 세계의 集 이다.” 이는 하나의 연기 계열을 보여줄 뿐 만 아니라 조건이 되는 연결고리들을 끊음으로써 각각의 요소들을 멸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3. 칠 수면에 대해서 약술하시오.수면은 우리의 잠재적 성향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수면으로는 욕탐수면, 진에수면, 견수면, 의수면, 만수면, 유탐수면, 무명수면이 있다.
    인문/어학| 2012.08.01| 3페이지| 1,000원| 조회(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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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을 가진 컴퓨터는 가능한가? 강한 인공지능과 설의 중국어방 논변을 중심으로 평가A좋아요
    마음을 가진 컴퓨터는 가능한가?: 강한 인공지능과 설의 중국어 방 논변을 중심으로2009101586 철학과 김 경민1. ‘마음’의 의미컴퓨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논제를 분석할 때 철학적 면밀함의 칼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철학도가 아니라면 이 논제에 대하여 영화 ‘AI’에 등장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로봇 소년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을 갖는다’에 대한 논의는 ‘마음’에 대한 난해하고 복잡한 의미들을 정교화하지 않으면 의미 없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컴퓨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와 ‘컴퓨터는 인간과 같을 수 있는가?’를 혼동하면 안 된다. 영화 'AI'에 등장하는 데이비드처럼 인간의 사랑을 갈망하고, 인간이 아닌 자신에 대한 ‘자기 의식’을 가지며, 이에 절망하고 상처받는 그런 인간과 ‘꼭 같은’ 컴퓨터를 상정해야한다면, 이 논의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런 컴퓨터는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료가 완전히 다른 두 개체가 완전히 똑같아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그렇다면 현재 논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 컴퓨터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마음에 대한 여러 관점 중에서 ‘기능주의’가 이에 대한 설명과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기능주의에 의하면 심성은 그것들을 실현하는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물리적 매커니즘이 완전히 다른 컴퓨터와 인간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자동차의 엔진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엔진의 개념을 설명할 때 그것이 가솔린 엔진인지 혹은 전기 엔진인지 아니면 증기 엔진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다만 에너지를 자동차를 움직이는 힘으로 변환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물리적 장치라고 말할 뿐이다. 기능주의자들은 “모든 고통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 손상 감지기’로서의 기능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규정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동일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컴퓨터나 인공 지능 체계가 있다면 이도 고통과 같은 심적 상태에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 논의가 정확해 보인다. 우리는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물리적 양식과 심적 체계를 가진 컴퓨터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심적 상태는 기능적 상태와 동일하다는 기능주의의 입장에 서서, 동일한 기능적 상태를 가진 컴퓨터 체계에 인간과 같은 심성을 부여해야 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2. 튜링 테스트기능주의에 관한 논쟁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튜링이 고안한 튜링테스트이다. 튜링은 모든 면에서 충분히 심리적인 평균 인간들과 컴퓨터의 수행 능력을 관찰하는 테스트를 통해 만일 기계들이 어떤 과제에 대하여 인간만큼 잘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인간만큼 심리적인 존재들이라고 판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테스트는 질문자, 컴퓨터, 질문자와 다른 또 한 명의 사람(X)이 참여하는 하나의 게임으로 이루어진다. 질문자는 격리되어져서 컴퓨터 터미널을 통해 계속 X와 컴퓨터에게 질문을 한다. 질문자의 목표는 어느 것이 사람이고 어느 것이 컴퓨터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 테스트의 요지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인간과 잘 프로그래밍 된 컴퓨터를 구분할 수 있는가?” 튜링은, 만일 우리를 평균 이상으로 속일 수 있는 컴퓨터가 있다면 우리는 그 기 기계를 인간이 갖는 심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체스 게임 컴퓨터가 이미 존재한다(이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은 지금까지는 무승부로 남아있다).그러나 우리는 이에 따르는 논쟁들을 살펴보기 위해서, 또한 이런 기능주의의 명제들에 관해서 타당하고 일관된 평가를 하기 위해서, 다시 논의를 명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가진다는 ‘심적’ 특성이란 무엇인가?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체계 안에서 여러 가지 규칙들을 사용하여 개별 개항들을 조작해내는 일종의 계산 기계이다. 컴퓨터가 갖는 심성이란 인간이 가지는 감각질의 느낌까지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갖는 계산 능력이 인간 심성의 기능적 상태와 동일하다면 심성의 충분조건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능주의자들의 논변이다. 우리는 여기서 강한 인공지능과 약한 인공지능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1) 강한 인공지능 논변 :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는 ‘마음’을 가진다. 적절히 프로그램 된 컴퓨터는 인간의 심성과 똑같이 기능한다. (따라서 ‘이해’의 능력을 지닌다.)(2) 약한 인공지능 논변 : 심성에 대한 컴퓨터 모델은 심성을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적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우리는 약한 인공지능 논변에 대해서는 더 발전적인 의견을 끌어낼 수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계산적 속성으로 모델화할 수 있는 심성의 영역이 일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강한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만 하다. 강한 인공지능의 입장에서는 컴퓨터가 가지는 계산적 속성이 마음의 계산적 속성을 넘어서서 ‘이해’하고 ‘의식’하는 측면까지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논쟁적 논변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강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다.3. 중국어 방 논변과 강한 인공 지능의 한계설은 강한 인공지능의 입장을 거부하면서 이를 반박하는 논변을 펼쳐 보였다. 그는 튜링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지만 이해의 능력은 결여할 수 있는 예시를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이를 우리는 ‘중국어 방 논변’이라고 부른다. 설은 중국어라곤 전혀 모르는 자신이 중국어 기호가 들어 있는 상자로 가득 찬 방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그는 한 권의 규칙집을 가지고 있는데 이 규칙집은 출제된 중국어 문제에 대답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컴퓨터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은 전혀 이해하지 못 하는 기호들을 외부로부터 받고, 그러면 상자에서 기호들을 꺼내 규칙집에 따라 이를 조작하여 방 밖으로 내보낸다.이런 작업을 잘 수행하면, 설은 중국어 이해 능력을 측정하는 튜링 테스트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중국어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중국어로 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과 내가 진정으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이 다른 것을 이 상상 실험을 통해서 이해했다면, 우리는 설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간파해낸 것이다.설은 영어로 된 문제에 대해서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컴퓨터일 뿐으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한다. 그의 이 논변은 인간의 인지는 컴퓨터가 가지지 못 하는 어떤 고유의 특성을 지닌다는 그 이전의 학설들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컴퓨터는 인간의 인지를 완벽하게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지는 단순한 기호의 해석,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의 계산적 속성이 인간의 이해력을 구성할 수 있다는 인공지능의 강한 논제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면, 중간에 ‘강한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가 없이는 설의 반박은 대상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우리는 이해(understanding)의 개념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용하곤 하는데 크게 나눠보면 첫째는 형식적이고 통사적인 기능적 이해이고, 둘째는 개항 혹은 개항들 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의미론적 이해이다. 설이 중국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중국어 개항들의 조합을 규칙적으로 처리하고 출력하는 기능적 이해를 넘어서서, 중국어 개항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설은 어떠한 인공 지능도 심성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의미론적 이해에 대한 기능적 복제가 없이는 그것은 어떤 체계라도 심성의 충분조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컴퓨터들이 매우 간단하게 튜링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기능주의자들에게 기능적 의미의 이해는 이해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들은 심성을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한 인공 지능의 입장에서 컴퓨터들이 갖는 심성이란 계산적 속성으로 나타나는 기능적 이해의 단계를 훨씬 넘어서서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기능적 이해는 인간의 의미론적인 이해에 대한 충분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반드시 단순한 기능적 이해가 어떻게 의미론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면밀하게 설명해야만 한다.
    인문/어학| 2012.08.01| 4페이지| 2,000원| 조회(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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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의 표지가 있는가? : 지향성, 마음의 간극을 어디까지 메울 수 있을까?
    마음의 표지가 있는가?: 지향성, 마음의 간극을 어디까지 메울 수 있을까?2009101586 철학과 김경민1. 문제 제기사후 세계는 있을까?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내 몸이 썩어 없어지고 나서도 나는 나로서 존재할까? 종교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종교적인 물음이 될 수 있다. 많은 종교에서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관념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멸하는 영혼의 관념은 이들이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달리 보고 있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그런데 종교인 뿐 만 아니라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도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이 영혼은 단순하고 불변하는 실체라고 파악했다. 그는 단순하고 순수한 인간의 영혼이 복합적이고 썩어 없어지는 육체라는 물질과 함께 있기 때문에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플라톤보다는 우리와 훨씬 더 가까운 근세 철학자 데카르트도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영혼만이, 정신만이 나다.”, “신체는 연장을 가진 것이요, 물질적 물체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신만이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체와 영혼을 준별하는 대표적인 심신 이원론자로서 자리매김했다.이제 불멸하는 영혼의 관념에 대한 문제 제기는 완전히 철학적인 물음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심신 준별은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지극히 철학적인 통찰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심신이원론에 대한 종교적 논증은 철학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각각의 종교들이 가진 목적이나 기원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2. 영혼과 심성 (정확한 대상 파악하기)일상적 생활 속에서 우리는 마치 육체와는 다른 독립된 실체로서의 마음이 존재하는 듯이 말하고 생각한다. 몹시 힘들어 보이는 친구에게 “너 어디 아프니?”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몸이 괜찮은지를 물은 것이지만 어젯밤 실연을 당한 친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몸이 아픈 게 아니야.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고.” 그러나 유의해야할 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구분하는 심신의 분리가 심신의 완전한 분리일상적 심신의 구분이 데카르트적 심신 구분을 이해할 수 있게는 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과 육체가 인과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심리적 상태가 물리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거의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연을 당해서 마음이 아픈 친구는 상심이 너무 심해 며칠 후에는 앓아누울 수도 있는 것이다.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러한 “심신 인과”를 설명하지 못 함으로써 위기를 맞는다.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완전히 비물질적인 실체가 물리 법칙의 지배하에 있는 완전히 물질적인 다른 실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사실 불멸하는 영혼, 순수한 비물질적 실체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은 철저하게 재고되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종교적인 믿음이 아닌 철학적 입장에서 심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과연 영혼이라는 실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확실한 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중세 철학자 오캄이 표명했듯이, 같은 정황을 가지고 있다면 불필요한 것을 가정함으로써 논의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합리적인 방법론이 아니다.그래서 내게는 불멸의 영혼, 독립적인 심적 실체를 상정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물질적 육체 속에 들어있는 마음의 속성들을 탐구하는 일이 더 적절해 보인다.3. 심성의 특징우리는 비물질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마음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물리적인 세계의 법칙과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 정신적 행위들을 영위하고 있다. 물리적 세계 밖의 순수 영혼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우리는 물리적 세계 안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속성들과는 전혀 다른 마음의 속성들을 직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우선 우리가 마음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특징들을 살펴보자. 이를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인식론적 기준과 비인식론적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인식론적 기준으로 분류할 만한 대표적인 마음의 특징들은 직y), 사밀성(privacy), 자기 고시성(self-intimacy)이다. 만약 우리의 논의에서 마음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이러한 특징들이 진정으로 마음이 가지고 있는 단일한 속성으로 판명이 날 경우 우리는 물리적 속성들과 심리적 속성을 구별할 만한 표지를 지니게 될 것이다.마음의 직접성이란 나에게 일어난 심적 사건들의 지식은 직접적 지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 복통을 앓고 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내가 복통을 앓고 있다는 사건을 어떠한 매개도 없이 즉각적으로 안다. 물리적 사건의 발생이 증거를 필요로 한다면, 복통이나 치통 같은 심적 현상들은 ‘그냥’ 안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은 직접성을 가지고 있다.마음의 사밀성이란 심리적 사건에 대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사자뿐이라는 것이다. 복통을 앓는 사람만이 오직 직접 그 고통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간혹 사랑하는 연인이 아플 때 ‘차라리 대신 아파주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음의 자기고시성이란 우리가 겪는 심리적 사건들은 경험의 여부에 있어서 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복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틀릴 수 없는 말이다. 자기의 고통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명백할 뿐이다.그러나 언뜻 물리적 속성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심적 속성들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과연 이 속성들이 ‘완전하게’ 심리적 속성들이라고 불릴 만 할까 의문을 품게 된다. 고통과 같은 뚜렷한 감각들은 직접성과 사밀성을 가질 수 있지만 믿음이나 태도, 가치관 같은 것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사회적인 담론을 살펴보고 나서야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태도들에 대해 보다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우리는 위의 인식론적 특징들은 매우 강력하고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심적 사건들을 포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위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내 눈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그들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물리적 사건들은 직접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물리적인 것도 사밀성을 가질 수 있다는 예로 신경생리학이 제시하는 자기수용감각(proprioception)을 들 수 있다. 이로써 심적 속성에 관한 특징으로서 인식론적 기준들이 가지는 입지는 상당히-혹은 거의 전적으로- 약화됐다고 할 수 있다.이제 비인식론적 기준들을 살펴보자. 비인식론적 기준으로서 널리 알려진 것 중에는 비공간성과 지향성 등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지향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향성은 심적 상태들이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가지거나 그것을 향하여 있으며 지시하기도 할 때의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심리철학은 어렵다]고 생각한다.[심리철학 에세이를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위와 같은 예들은 특정한 명제에 대한 ‘태도’를 나타나고 있으며 각각의 상태들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지향성은 철학자들에 의해 종종 물질적인 것과 심적인 것을 준별해주는 표지로서 여겨져 왔다. 일찍이 브렌타노는 심적 현상의 특징 중 가장 기본적인 특성으로 지향성을 표명한 적이 있다. 지향성은 브렌타노가 말한 것처럼 심적 현상의 표지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지향성’은 그것이 심적 현상의 표지로서 논의되었을 때 우리가 앞서 보아왔던 단순한 인식론적 특성들보다는 논파하기가 어려운 듯이 보인다.우선 심적 현상의 준별자로서의 지향성을 거부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심적 상태만이 지향성을 표출하는 유일한 속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물리적으로 발화되기도 하는 우리의 ‘언어’는 지향적 성향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경희대학교’는 경희대학교를 지칭한다. ‘경희대학교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경희대학교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향성을 심적 현상의 표지로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매우 희대학교를 지칭하는 ‘경희대학교’라는 언어가 본래적으로 경희대학교를 지칭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사실은 그럴 수 없다. 만약 경희대학교 학생이 메모지 위에 쓰인 ‘경희대학교’라는 낱말을 봤다면 그 낱말을 통해 그것이 지칭하는 실재하는 학교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그 낱말을 보았다면 경희대학교를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종이 위에 휘갈겨 쓴 하나의 낙서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가 가지고 있는 지향성은 사용자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고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지향성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지 본래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흥미로운 점은 이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켜봄으로써 얻어지는 통찰이다. 앵무새가 우연히 ‘경희대학교’라는 낱말을 발화했다고 해보자. 아니면 타자기 앞에서 얼쩡거리던 수십 마리의 개미들이 우연히 ‘경희대학교’라는 낱말을 찍어냈다고 해보자. 우리는 앵무새나 개미가 어떤 지칭하는 바를 가지고 이 낱말을 만들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앵무새나 개미가 만들어낸 그 낱말을 경희대학교 학생이 보거나 듣는다면, 거의 자동적으로 경희대학교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정신 안에 지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인간의 언어가 지향적 성질을 가지는 것은 언어 자체가 지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를 만들어낸 인간의 정신에 본래적으로 지향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앵무새나 개미가 만든 낱말을 보고도 인간 나름대로의 지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향성’은 인간 정신이 가진 강력하고 중대한 특성으로서 부상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 전반에 있어서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찾기란 힘들다. 우리는 잠을 잘 때를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고 무언가를 원하며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상태로 보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끊임없이 내용들을 생각하고 잘 다듬기를 원하며 온전히 이
    인문/어학| 2012.08.01| 5페이지| 2,000원| 조회(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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