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한 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목차 서론 한국전쟁의 배경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한국전쟁의 원인 휴전의 성립 전쟁후의 상황 한국전쟁 후의 북한 결론서론 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은 군사력을 사용하되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실제 군대를 파병하여 전쟁을 감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의 대표적인 예이다 . ‘ 한국동란 ’ 또는 ‘ 육이오동란 ’ 이라고 불렸던 이 전쟁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 우리는 이러한 참혹한 비극적 전쟁이 왜 발생했으며 , 어떻게 진행 , 전개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 1)한국전쟁의 배경 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1945 년 일본의 패망으로 38 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 정치이념과 체제 면에서 극도의 경쟁관계를 형성 . 북한은 소련의 후원을 받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치체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함 .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단정수립이 제기되고 , 이를 반대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여수 ,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킴 . 공산주의자들은 빨치산투쟁을 전개했고 , 이승만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위해 정규군을 투입함 . 1949 년 초 소련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하였고 , 미국도 뒤를 이어 약 500 명의 고문단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 2) 4) 3) 6) 5) 7)한국전쟁의 배경 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1945 년 일본의 패망으로 38 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 정치이념과 체제 면에서 극도의 경쟁관계를 형성 . 북한은 소련의 후원을 받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치체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함 .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단정수립이 제기되고 , 이를 반대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여수 ,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킴 . 공산주의자들은 빨치산투쟁을 전개했고 , 이승만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위해 정규군을 투입함 .. 1949 년 초 소련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하였고 , 미국도 뒤를 이어 약 500 명의 고문단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 결과적으로 , 남한은 민주주의 7) 정치체제를 지향 , 북한은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구축했고 ,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등 이와 같은 상황은 남북한간에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를 만들게 되었다 .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새벽의 개전 미국의 참전 인천상륙작전 중국의 참전 1950 년 6 월 25 일 새벽 3 시부터 북한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 개전 첫 날부터 한국군이 밀리자 , 미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10 만여명의 미군을 파병했다 .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50 년 9 월 15 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서울을 탈환했다 . 50 년 10 월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중국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군 정예부대 40 만명을 파병했다 . 8) 9) 10) 11)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의 원인 “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수립하고 ,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동의함으로 발생하였다 ” “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정책으로 보아 , 한국전쟁은 남한이 북침을 계획하고 조직적으로 공격함으로써 발생했다 ” 남침설 북침설 “ 한국전쟁은 한국정부와 미국이 서로 공모하여 , 우리 북한이 먼저 공격을 하도록 유도하여 일어난 것이다 ” 남침 유도설 12) 13) 14)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의 원인 “ 한국전쟁은 양측 모두 침략계획이 없었으며 , 접경지역에서의 소규모 무력충돌이 확산되어 일어난 전쟁이다 ” 내란 확정설 “ 인민군이 서울에서 3 일동안 지체한 점을 보면 서울의 점령을 목표로 한 제한적인 전쟁이었다 ” 제한 전쟁설 15) 16)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휴전의 성립 3 년 동안 계속된 무의미한 전투 끝에 1951 년 7 월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 그 후 2 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1953 년 7 월 27 일 정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 17)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휴전의 성립 휴전회담 주요쟁점 및 결과 남북한 경계선 설정문제 포로 교환문제 소련대표참여문제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전쟁 후의 상황 국토 황폐화 산업 , 공업시설의 파괴 수많은 인명피해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전쟁 후의 상황 전쟁고아 이산가족 양민학살연안파 김두봉 숙청 소련파 허가이 숙청 남로당 박헌영 숙청 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 후의 북한 남로당 박헌영 숙청 소련파 허가이 숙청 연안파 김두봉 숙청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 후의 북한 정 권 강 화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한국전쟁 후의 북한 정 권 강 화 김일성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북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됨 . 김일성 체제 성립01. 서론 02. 전쟁배경 03. 전개과정 04. 전후상황 05. 결론 결론 한국전쟁이 남북한 양쪽에 준 교훈은 매우 컸다 . 1. 민족 내부에서 전쟁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 2. 전쟁을 방지하려면 강력한 군사력을 양성해야 한다 . 3.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해서는 안 된다 . 4.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치 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인식이 필요하다 . 전쟁은 너무나 많은 민족적 상처를 초래하였고 , 다시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측에 심대한 민족적 교훈을 남김 . 18)감사합니다 . 출처 · 박준영 ,『 북한정치론 』, 박영사 , 2004, 205~238 쪽 · 안철현 ,『 한국현대정치사 』, ㈜새로운사람들 , 2009, 84~86 쪽 · 김학준 ,『 한국전쟁 』, 박영사 , 1989.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 구글 ·'6.25 란 무엇인가 ?‘ ·' 안강 토박이 ‘{nameOfApplication=Show}
러시아의 정치체제러시아 역사에서 나타난 정치체제 유형 (1) - 절대주의 러시아 역사에서 나타난 정치체제 유형 (2) - 전체주의 러시아의 정치체제 - 민주주의 러시아 민주주의의 평가 및 전망 CONTENTSⅠ. 러시아 절대주의 표트르대제 (1682-1725 ) ㆍ서유럽에 비해 수 세기나 뒤떨어진 러시아의 후진성 극복 ㆍ서유럽 선진국들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역사 발전에 큰 영향끼침 ㆍ정치개혁 착수 ,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관료 기구 개혁 . ㆍ대외정책에서 발트해로의 진출로 북유럽과 동유럽의 강대국이 됨 .Ⅰ. 러시아 절대주의 예카테리나 2 세 (1762-1796) ㆍ계몽 전제군주 ㆍ러시아의 팽창 ( 유럽으로의 서진과 흑해 방면으로의 진출 ) ㆍ흑해 연안 일대와 크림반도 획득 , 흑해의 자유 항해권 확보 ㆍ계몽주의에 입각해 왕권의 절대와 법 앞에서의 국민의 평등원칙 등 내정개혁Ⅱ. 러시아 전체주의 1.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ㆍ 1917 년 3 월 러시아 2 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 멸망 ㆍ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장부는 10 월 혁명으로 붕괴 ㆍ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세력이 러시아의 정권을 잡으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섬 ㆍ 볼셰비키 세력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을 물리치고 내전에서 승리 ㆍ 1922 년 12 월 30 일 주변 공화국들이 통합되면서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탄생Ⅱ. 러시아 전체주의 2. 스탈린주의 이오시프 스탈린 (1922-1953) ㆍ도시와 농촌에서의 자본주의적 요소 제거 ㆍ 공업화와 농업근대화 추구 ㆍ사기업 폐지 , 국가 주도의 제 1 차 5 개년 계획 및 농업의 집단화 실시 ㆍ 2 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로 현실적인 외교노선 ㆍ공산주의 이념 변질 → 전체주의적 통치체제 ㆍ 당이 모든 권력 독점 ( 헌법에 의해 보장 ) ㆍ대규모 비밀경찰 , 비공식적인 처벌 , 정치적 대숙청 ㆍ ’ 스탈린주의 ’ 파시즘과 유사 . 붉은 파시즘Ⅲ. 러시아 민주주의 1. 러시아 연방의 출범 ㆍ 1991 년 12 월 25 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사임 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공식적 소멸 ㆍ러시아 연방이 새롭게 출범 → 근본적인 체제전환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 국가가 됨 . ㆍ옐친 시대의 진통과 혼돈의 민주화 과정을 거친 푸틴 시대 ㆍ민주국가와 권위주의 독재국가 양자가 섞여 있는 합성체제로도 볼 수 있음 .Ⅲ. 러시아 민주주의 1. 옐친 시대의 민주화 보리스 옐친 (1991-1999 ) ㆍ소련붕괴 이후 급진적인 개혁 논리를 주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은 러시아 제 1 대 대통령 ㆍ강제적인 정계 개편 및 국가제도 개혁 착수 ㆍ신생 러시아연방의 출범 , 1993 년 가을의 의사당 폭격 , 두 차례의 체첸전쟁 , 1998 년 외환위기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러시아의 민주화가 공고화됨 . 절차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Ⅲ. 러시아 민주주의 2. 푸틴 시대의 민주화 블라디미르 푸틴 (2000-2008, 2012~) ㆍ러시아 3, 4 대 대통령 역임 . ㆍ 2012 년 선거에서 6 대 대통령에 당선 , 현재 역임 중 ㆍ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 위에 오름 ㆍ ’ 강력한 러시아의 재건 ’ 강조 → 대통령과 연방정부의 권한강화 ㆍ부정부패 , 정경유착 최소화 → 올리가르히 ( 과두재벌 ) 등 기득권세력 압박 ㆍ높은 경제성장률 달성 및 WTO 가입 ㆍ대외적으로 강성국가 건설과 강대국 지위 회복 ㆍ 2000 년 집권 후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로 바꾸기 위한 노력 ㆍ ’ 상원구성법 ’ 과 ‘ 지방행정 및 입법기관 구성법 ’ 을 제정하여 권력수직화 법안을 완성시켜 중앙집권화의 토대 마련블라디미르 푸틴 (2000-2008, 2012~) Ⅲ. 러시아 민주주의 2. 푸틴 시대의 민주화 관리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도 언론 , 출판의 자유가 제한되는 권위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혼합된 체제 주권 민주주의 러시아의 주권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격리되면서 국익에 부합하는 정치시스템이 필요함 .Ⅳ. 러시아 민주주의의 평가 및 전망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된 체제 국민투표를 통한 대통령 직선제 , 중임제 → 절차적으로 민주주의 국가 그러나 ①정치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 ②정당은 조직력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역할 수행에 미흡 ③ 표현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 범위가 계속 확장 되었으나 지방공화국의 매체들은 언론의 자유가 제한 ④1993 년 총선과 2012 대선 부정선거 의혹 제기민주주의와 독재의 중간쯤에 위치할 가능성이 크고 , 경제가 성장하면 관리형 민주주의는 공고화될 가능성이 크지만 완전한 독재로의 복귀는 발생가능성이 적음 러시아는 민주주의를 위한 문화적 토대와 사회자본이 부족한 국가로 단 시간 내에 서구형의 자유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 Ⅳ. 러시아 민주주의의 평가 및 전망 매우 느리지만 젋은 세대의 인식 변화와 계몽활동 등 변화의 조짐은 보여지고 있으나 러시아의 민주화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T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목차Ⅰ. 서론Ⅱ. 디지털 사진매체의 활용현황1. 디지털 사진의 개념과 특성2. 디지털 사진매체의 활용현황1)포토저널리즘2)잡지3)광고4)위성사진5)순수예술작품Ⅲ. 디지털 사진매체의 활용방안1.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형성2. 정보공유3. 새로운 쇼핑환경4. 상호작용과 시공간의 재구성5. 디지털 기술의 발달Ⅳ. 결론Ⅴ. 참고문헌디지털 사진의 활용현황과 활용방안Ⅰ. 서론사진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오늘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매체 중 하나이다. 이러한 사진을 남기게 해 주는 기계가 바로 카메라인데, 불과 십년 전 까지만 해도 카메라라고 하면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어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고, 사진을 인화하여 보는 카메라를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일반애중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모습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내가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쯤 이였는데, 그때는 아주 고가의 상품이여서 쉽게 접하진 못했지만 오늘날은 저가로도 구입할 수 있어서 일반대중들에게 쉽게 보급 되는 것 같다. 또한 디지털 카메라 뿐만 아니라 디지털 사진이미지를 제작할 수 있는 휴대폰과 더 나아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디지털 사진에 대한 접근이 훨씬 더 쉬워졌고, 통신기기와 디지털카메라의 구분이 희미해졌다.이와 관련하여 디지털 사진이 현재 사회전반에 걸쳐 어떠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는지와 앞으로의 활용방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디지털 사진매체의 활용현황1. 디지털 사진의 개념과 특성디지털카메라는 렌즈와 렌즈사이즈 그리고 카메라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조리개 및 셔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필름을 사용하는 일반 카메라와 똑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의 필름이 빛에 민감한 CCD나 CMOS와 같은 실리콘 칩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CCD는 작은 장방형의 실리콘 칩으로 수천 또는 수백만의 빛에 민감함 요소 즉 픽셀로 구성되었다. 픽셀에 쪼여진 빛은 CCD로 하여금 전압을 발생시키고 많은 양의 빛에 노출되면 발생된 전압이 커지게 된다. 이렇게 발생영하는 방법으로 이것은 CCD가 영상을 감지해 디지털 신호로 바꾼 뒤 파일 형태로 메모리에 내장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네거티브나 슬라이드 필름 혹은 사진의 화상을 스캐너를 이용하여 입력의 과정을 거쳐 전자 시그널로 바꾸는 방법으로 평판스캐너와 필름스캐너가 있다. 이러한 디지털 사진을 출력하는 장비로는 프린터가 있는데, 미세한 구멍인 노즐을 통해 잉크를 분사시켜 종이에 묻게 하는 방식인 잉크젯 프린터와 정전기에 의해 종이나 프린트 매체로 옮겨져 나오는 레이저 프린트가 있다. 디지털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 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생각되어져야 하며, 이 기술들의 맞물림은 이미지를 비트로 전환시키고 그로써 현성, 인화, 선공, 수정, 조작 등의 작업 속도가 빨라지게 되었다. 이는 전보다 훨씬 많은 이미지의 범람을 가져오는 한편 일반인들까지 사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작가는 인터넷을 통해 사진을 주고받음으로써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의 빠른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하나의 이미지는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으며, 변형된 이미지는 또 다시 급속도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2. 디지털 사진매체의 활용현황디지털 사진의 출현에 의하여 200년 가까운 사진술의 역사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그 활용분야는 무궁무진하다. 1990년대 이후에 와서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디지털 영상을 이용하는 범위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일차적으로 디지털 사진은 사진작가들에 의해 작품 활동을 할 때 쓰일 수 있고, 다음으로는 잡지에 실리는 사진들, 그리고 광고 사진가들이 광고를 제작할 때, 웨딩사진, 위성사진, 디지털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로 찍는 사진들, 보도사진, 인터넷 활용사진, 천문우주사진, 의료사진, 디지털 예술사진, STOCK사진 같은 것들도 전부 디지털 사진의 일종이다. 아래에서는 디지털 사진매체가 포토저널리즘, 잡지, 광고, 위성사진, 순수예술작품 등에서 활용되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문장이 줄고 쉬워진 반면 그래픽과 사진의 비중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1992년에 있었던 정치회담에서 처음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기 시작한 AP통신은 기존에 전통적으로 해오던 일반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현성, 전송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와 위성 전송 시스템을 채택했다. 그 결과 빨라야 20분 정도 걸리던 촬영 이후의 작업이 약 10분 정도로 단축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그들의 사진을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빠른 연속 셔터스피드로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빠른 속도뿐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가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또 하나의 요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LCD스크린의 존재이다. 촬영 즉시 그 상태를 보여주는 LCD스크린은 촬영된 이미지의 앵글과 노출 등의 정보를 바로 전달해 주기 때문에 아주 효과적이며 디지털을 이용한 매체의 혁명은 동일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정보의 전달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2) 잡지사진1) 보그 잡지 10월호 커버사진 (2012년) - 네이버 블로그잡지는 포토 저널리즘의 한 분야로 사진으로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대표적인 매체이다. 잡지에는 많은 사진들이 실리게 되는데, 잡지사진은 잡지에 실린 모든 사진을 말하는 것으로 용도에 따라 기사 본문의 내용을 설명 또는 장식하기위한 사진과 본문 자체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사진, 하나의 기사로서의 사진 즉 화보와 표지사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미 많은 전 세계 잡지사들은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여 잡지사진을 찍고 있으며, 스테리이트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많은 사진을 합성한 포토일러스트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쉽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진은 실은 대표적인 잡지로 미국의 , 프랑스의 등이 있다.3) 광고사진2) 시계광고사진, 네이버 블로그디지털 사진을 가장 먼저 활용한 것은 광고사진이다. 수년전 이스라엘지털 사진을 하기 위해서 전통사진을 촬영하기도 한다.사진이 광고에 등장하면서 예전에 삽화가들에 의해 재현된 상황들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었고, 메시지들의 진정성, 즉 상품의 신빙성을 강화하는데 아주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사진은 새로운 논증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광고 데생과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형태에 길을 연 것이다. 오늘날 광고는 종종 가장 공들여진 알림이라는 분야에서 막연히 초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영감을 통해 다른 영상 주제들을 생산하는데, 광고 필름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있다.4) 위성사진사진3) 위성지도-네이버지도, 대연동 일대위성 사진 또한 디지털사진 매체가 활용되는 하나의 예로써,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국토의 모습이 담겨 있는 공간영상자료를 ‘국토공간영상정보시스템’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영상정보시스템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항공사진과 위성영상뿐 아니라 지형의 높이 값을 3차원 좌표로 표현한 수치표고자료, 지도와 같이 모든 지형과 지물을 공중에서 내려다 봤을 때 모습으로 변환한 정사영상 등이다. 그리고 그동안 지도제작과 역사적 자료로만 활용해 오던 항공사진을 산업 분야 등으로 용도를 확대하고 매년 고해상도의 디지털 항공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한 활용분야 중 가장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고, 앞으로의 발전도 기대된다.5) 순수예술작품디지털 이미지의 출현은 사진 분야의 좀 더 폭넓은 장르로서 자리 잡게 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컴퓨터를 예술적 도구로 폭넓게 활용하고, 급속도로 그 활용성이 퍼져가고 있는 디지털 사진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예술적 담론과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인식된다. 디지털 사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확장성은 창의성을 요구하는 순수사진의 목표와 잘 부합하고 있다. 사진의 창조 수단이 결국 작가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할 때에 기존 사진에 비해 변화의 폭이 넓은 디지털 사진의 응용부분은 매우 높다.Ⅲ. 디지털 사진매체의 활용방안디지털 사진매체는 현재도 많이 활지 불과 5~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존의 카메라에 대한 많은 단점들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디지털 카메라 문화의 형성이 가능했을 것이다.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이미지는 사용자가 자신의 크기를 조정하고, 회전시키고, 자르기도 하는 등의 변경이 가능하다. 20대들의 디지털 카메라 문화는 단지 사진을 찍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개성을 표출하며 서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어느 문화든지 그 문화와 그 문화의 주 계층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디지털 카메라 문화는 디지털 카메라를 주로 사용하는 젊은이들의 특성을 반영한다. 빠르고 신속하다는 특성을 가진 디지털 사진의 활용은 복잡함과 기다림을 싫어하는 대중들의 취향과 맞물려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2. 정보공유디지털 카메라 사용자들은 항상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면서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새로움과 정보들을 사진으로 나타내어 원하는 사람들과 공유한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 일수도 있고,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 일수도 있는데 이러한 정보들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어 실제로 가보지 못한 이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모두 함께 나누자는 이러한 정보 공유는 개인적인 현대인들의 풍토를 바꾸는데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사람들은 취미나 관심분야가 같다면 인터넷에 사이트를 만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는데, 디지털 사진은 쉽게 인터넷에 올릴 수가 있어 인터넷상의 디지털 사진 동호회나 카페, 인터넷 사이트에서 서로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 하고 평가도 받으며 같이 사진촬영을 가기도 한다. 이러한 인터넷을 통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3. 새로운 쇼핑환경바쁜 현대인들의 생활 특성으로 인해 24시간 문을 열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대형 마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이 가능한 곳이라면 컴퓨터를 켜고 올려 진 사진들을 보면서 물건들을 비교하여 선택한 후 사기 까지 편리한 소비가 가능하다. 실제로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는 동대문 시장과 명품관, 백화점,있다.
유럽문화수도 프로젝트 - 이탈리아 볼로냐1. 유럽문화수도 프로젝트란?유럽연합이 지정한 가맹국의 도시에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집중적으로 전개하는 사업으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도시들은 관광객이 증가하여 문화적, 사회경제적 측면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으며 유럽문화수도 또한 대내외적으로 호평을 얻었다. 이러한 유럽문화수도 프로젝트의 목적은 첫째, 유럽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를 홍보하고, 둘째, 서로 공유하는 문화적 유산을 기념하고 셋째, 유럽공동문화를 통한 유럽공동 시민의식의 증가, 넷째, 문화를 통한 도시의 발전, 더 나아가 유럽연합의 발전에 그 목적이 있다.2. 유럽문화수도 - 이탈리아 볼로냐(1) 이탈리아 볼로냐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문화, 산업, 무역, 정치, 경제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10만 명의 학생(볼로냐대학이 1088년 설립된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대학)을 포함해 인구 40만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볼로냐는 오랫동안 대학의 도시인 동시에 요리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볼로냐는 좌파적 기질이 강해 붉은 볼로냐로도 불렸다. 다른 의미로는 붉은 볼로냐는 붉은 벽돌집들이 많아 그리 불리기도 한다. 축구가 강한 이탈리아에서 볼로냐는 농구로 유명하기도 하다.(2) 선정된 계기볼로냐 사람들이 문화도시 대변신 작업에 착수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1970년대부터 도시 외벽 밖으로 펼쳐진 주거지와 주변 농촌의 경계지점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패키지 기계제조 기업 등이 들어섰다. 그러나 교외지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역사적 건축물이 몰려 있는 도심은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볼로냐는 ‘역사적 시가지 보존과 재생’이라는 슬로건 아래 도심 재생전략을 세밀하게 짰고, 이로 인해 2000년 볼로냐가 유럽문화 도시로 지정되면서 일대 도약기를 맞았다. 문화도시를 향한 ‘볼로냐 2000 프로젝트’의 핵심은 우선 옛 건물을 해체시키지 않고 개조하기로 하고 문화 컨텐츠를 풍부하게 만들어 볼로냐 시를 하나의 창조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도심의 빵공장, 담배공장, 도살장 같은 오래된 건물들을 선정하여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로 바꾸어 나갔다. 도심재개발을 하면서 고급아파트가 아닌 이런 문화시설을 세웠다. 또한 볼로냐는 장인들의 도전정신과 창의성이 지역문화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창의성을 불러일으켜 성공적인 문화도시이자 첨단산업도시로 탈바꿈한 대표적인 창조도시로 꼽힌다.(3) 볼로냐 문화수도 프로젝트1) 과거 도살장 건물의 재생담배공장 바로 옆에 위치했던 과거 도살장 건물도 변신했다. 무성영화에서 현대영화까지 다양한 영상자료와 관련 도서들을 소장한 종합 영상 자료관이자 지역영화 문화센터가 된 것이다. 도축장은 크게 영화관, 영화 도서관, 대학교 부속 예술 연극학교의 지역서비스센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은 광장을 둘러싼 형태로 재생되었다. 도축장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상징성을 지니도록 배려하였으며 원래 건물 뒤로 예술연극학교를 설립하여 예술문화 클러스터를 이루게 하였다. 도축장의 입구는 기존 건물의 특성을 살려 문화예술센터 입구로 거듭나고, 전통형 건물 오른쪽 도축 장소는 시네마 건물 도서관으로, 그 왼쪽은 영화관으로, 그리고 광장의 오른쪽에는 예술연극학교 스튜디오로 변모되었다.그림 1. 도축장 재활용 계획이렇게 하여 도축장은 지역사회 예술 문화를 진흥시키는 클러스터로 재생을 통해 변모하였다. 이때 건물의 구조적 부분은 살리고 채광 등 제반 여건이 개선되게 하면서 그대로 재활용해 저렴하게 문화시설로 변모시켰다. 이곳에서는 찰리채플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희귀한 영상자료들을 소장하고 있고 1년 내내 영화제들이 개최된다. 과거 도살장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영화연구의 1번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그림 3. 도축장 재생 후 모습그림 2. 공장지역 내 도축장의 재생 전 모습그림 4. 도축장 개조 후 도서관 내부 전경그림 5. 도축장 개조 후 영화관 내부 전경2) 과거 제빵 공장의 재생볼로냐의 제빵 공장은 1915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밀가루 공급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1928-1929년에 소비자 자치 단체본부로 사용되면서 현재 건물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공장은 현재 이 시대의 예술문화지역센터의 박물관, 즉 현대미술관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탈바꿈 하였다. 이 건물은 장엄한 외관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구조와 실내공간조직을 완전히 복원시키고 새롭게 설비하였다. 불필요하게 누적된 부분을 제거하고 필요한 배관과 안전설비를 부가하였고, 모든 공간이 현대미술관에 장애인도 접근할 수 있도록 무장애 건축으로 배려되었고, 매우 정교한 안전경보시스템으로 강화되었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빵공장은 그 전통적 건물 모습을 남기면서 현대적 기능 변화를 하였다. 2007년 지역사회에 그 모습을 보인 MaMbo(Museum art of modern at Bologna) 현대 미술관이다. 건물의 한 쪽은 지역사회 특성을 그대로 살려 주변지역과 어우러져 형성되어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는 한쪽이 열린 포티코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현관으로 들어가면 실내에서부터 미술관의 연대와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는 전이 공간을 볼 수 있다.그림 6. 과거 제빵공장 개조과정그림 7. 현대 미술관 전시실 내부3) 기타 옛 건물들의 변신이 밖에도 볼로냐의 도시는 미술관, 박물관으로 가득하다. 모두 버려진 옛 건물들을 개조해 낸 것이다. 건물뿐만 아니라 전시된 유물과 예술품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시대 볼로냐교회 유물과 의상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중세사 박물관은 원래 귀족의 저택이었던 것들을 특색이 있는 미니 박물관, 대규모 이벤트와 회의를 열 수 있는 시설로 개조해냈다.
우리나라는 어리석었다. 이유인즉슨 나라를 일제에게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강탈당하기 전의상황을 살펴보면, 일본은 1876년에 맺은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했다. 그 후로 많은 불평등 조약을 맺었으며,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이에 따라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펴 외교권을 대행하는 등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다. 그 후 정미 7조약이라는 한일신협약을 체결 한 후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 ·조인하였다. 많은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주권을 잃어가고, 결국 1910년 한일합병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은 36년간 일본의 통치아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통제에 대해 10년대, 20년대, 30년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우선 1910년대에 일본은 무단통치를 시행했다. 무단통치기는 헌병 경찰통치기라고도 불리는데, ‘헌병 경찰 통치기’라는 명칭은 1910년 9월에 창설된 헌병 경찰 제도에서 나왔다. 즉 헌병이 일반 경찰 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 처분권 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일본은 2만여 명의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한반도 전국에 배치하여 무단 식민 통치를 자행하였다. 이 당시 통치의 강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을 조선인에게만 적용하여 처벌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조선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 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1912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한부 신고제로 시행, 이를 잘 알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 왕실의 토지 등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침탈된 토지는 일본 이민들에게 싼 값에 팔렸고 이 때에 고래의 소작권 개념이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이는 한반도에서 이뤄진 최초의 실질적 근대 토지 소유 개념을 도입한 정책이나, 광무개혁 시기에 이뤄진 양전 사업이나 지계의 발급이 일본 측의 방해로 실패했다는 것을 되돌아보건대 그 실질적 의도는 토지의 침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서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회사령이나, 산림령과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으로 한반도의 경제적 지배권은 대부분 일본에 넘어갔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수익이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재벌이나 조선인 지주층의 회사에 투자되면서 한반도의 경제적 개발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는 있으나, 민족 자본의 성장은 철저히 금지되었다.그 후 1920년대에 일본은 문화통치를 시행하게 된다. 문화통치는 3.1운동의 전개로 인해 높아진 조선인들의 독립의지와 반일정신과 비폭력주의 운동이었던 3.1운동에 대한 무력진압과 보복학살로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국제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일본의 정치적 변화이다. 문화 통치로 바뀌게 된 배경은 겉보기에는 대외적 상황과 여러 정치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련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난 것 같지만 근복적으로는 문화통치로의 통치체제 변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 통치는 일본이 조선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실행한 통치이기 때문에, 겉보기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고 행동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듯 하지만 이 기간 동안 경찰의 수는 더욱 늘어났으며, 일본의 식민통치에 비판적 내용의 기사를 실은 신문 언론사에 대하여 정간과 폐간, 기사삭제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선총독군인이 아닌 문관 출신의 총독도 임명될 것이라 선언하였는데,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이 독립되기까지 한 번도 문관이 총독은 임명되지 않았다. 사이토 총독의 후임 총독들은 모두가 육군 대장 출신들 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무력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헌병 경찰 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이름과 제복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으며 오히려 민족운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탄압하기 위해서 경찰의 숫자와 치안에 필요한 장비, 유지비등을 증가시켰으며 고등경찰제도를 실시함으로서 오히려 헌병 경찰제도 때 보다 더욱 심한 탄압이 잇달았다. 또한 민족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검열 강화, 기사 삭제, 정간, 폐간 등의 조치를 이용, 민족 신문을 친일 언론화 시키고 기사 내용을 조작해 언론 조작을 이끌어 낸다. 실제로 이러한 조치는 성과가 있어서 문화통치 당시는 아니더라도 식민통치 말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많은 민족 신문이 친일화 되었으며, 지방 행정에 조선인 참여지방 제도 개정, 도평의회 등의 각종 행정기관을 설치하여 조선인을 참여시킨다고 하였으나 실제론 선거권 제한, 일부 친일파(親日派)와 부유한 재산가만이 참여함으로서 실권없는 자문기관 수준에서 그쳤고, 교육 기회의 확대는 명목상일 뿐 오히려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조선인들에게 가르치는데 이용되었으며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까지만 지원했을 뿐, 식민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등교육은 가르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보급한 초 중등학교의 수가 부족했고, 조선인들의 경우 경제적 문제 등 이 이유가 되어 실제 조선인 취학률은 매우 저조했다. 문화 통치의 성격민족 운동을 막기 위해 한민족을 기만하고 분열시키는 성격이 강했으며 가혹한 식민통치를 대외적으로 은폐시키고 국제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한 성격이 짙었다. 또한 문화 통치기간에도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과 탄압은 여전했다.그 후 30년대로 들어와 경제 대공황과 태평양 전쟁 등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통치방식이 민족말살통치로 변경되었다. 민족 말살 정책은 일본제국이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조선민족의 저항을 철저히 분쇄·말살하여 최후까지 전쟁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취한 정책이다. 일본제국은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여 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에 대한 말살정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시에 국가총동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상조치가 일본 국내에서 행해졌는데, 식민지인 한국에서는 더욱 심하게 자행되었다. 일제는 이 시기에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했다. 이미 일제는 조선을 합병한 후 점차 조선에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해나갔으며, 모든 민족적인 문화 활동을 금지하고 자신들의 언어교육을 강요함으로써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획책했다. 이러한 탄압이 전시에 더욱 강화되어 1938년 이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되던 조선어 교육마저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해 어린 초등학교(당시의 국민학교) 학생마저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을 주는 등 언어말살을 꾀했다. 이와 함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과〈문장〉등의 한글로 된 잡지를 전면 폐간시켰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해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이밖에도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해 황국신민의 서사제창, 신사참배 등을 강요했다. 이 정책은 조선인에게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될 것과 더 나아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에게도 황국신민의 의무라는 징병·징용 등을 강제했는데, 그 반면 교육기관의 확충, 정치적 권리의 확대 등은 외면함으로써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이 같은 일본의 조선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은 그들이 도발한 침략전쟁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극도로 심해져 창씨개명(創氏改名)까지도 강요했다. 창씨개명은 조선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각 급 학교에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고, 각 행정관청에서 사무취급이 거부되었으며, 더 나아가 식량과 그 밖의 다른 물자를 배급받을 수 없었고, 조선식 성명으로 우송된 화물의 수송이 전면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그밖에도 일본은 조선민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이른바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의 조상이 같다는 동조 동근론으로, 조선이 강제로 합병되던 시기에 그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의 어용사학자들이 조작해낸 논리였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내선일체 및 동조 동근론이 더욱 강화되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없애버리고 일본정신을 가지도록 강요했다. 즉 고대사회에서는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이 같은 민족이었음을 내세워 친일화된 조선인 지식인들을 통해 이를 인정하게 했으며, 일본의 조상신인 천조대신의 신주를 조선인의 가정에 걸어놓고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도의 민족말살정책은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안고 세계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민족의 저항을 초기부터 철저히 차단하고, 끝까지 전쟁협력을 강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징병과 징용, 정신대 등의 강제적인 인신 동원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