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和의 遠征에 대한 考察Ⅰ.序論1405년 중국의 한족 왕조였던 명(明)의 장강 하류 유가항(劉家航))에서 60여척의 정크 함선에 몸을 실을 2만5천여명의 승무원이 그동안 인류 역사상 없었던 사상 초유의 해상원정이 시작되었다. 이 원정을 지휘하였던 사람은 전통적인 중국의 민족인 한족(漢族)도 세계를 호령했던 유목민족인 몽고족(蒙古族)도 아니었다. 마화(馬和)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눈동자에 색이 있다 하여 색목인(色目人)으로 불렸으며 후손을 남길 수 없는 환관이었다. 또한 당시 황제였던 영락제(永樂帝)의 둘도 없는 심복이었다. 이 사람은 후에 황제에게 정씨 성을 하사 받아 정화(鄭和)라고 불리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유럽인들보다 약 반세기 앞서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닌 명(明)나라 제독 정화다.1405년 시작된 정화의 해외 원정은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입증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정화의 원정에 대한 평가는 영락제(永樂帝)의 조공관계 확립과 건문제(建文帝)를 수색하기 위해 파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화의 원정이 최근 중국을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들의 적극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게빈 멘지스라는 학자에 의해 새로운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총 7차례의 대규모원정의 규모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기억되는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을 이미 정화가 했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속속들이 출몰하고 있고 여러가지 설들이 주장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재까지 콜럼버스가 누리고 있는 아메리카대륙의 최초 발견의 영광은 정화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화의 이런 대규모 원정이 유럽의 르네상스에 무시하지 못할 사회적 영향을 주었다고 게빈 멘지스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정화는 어디까지 항해 했으며 명나라의 해금정책(海禁政策)과 함께 불타버린 대원정의 진실에 관한 것을 고민해 보았다.Ⅱ.영락제(永樂帝)와 환관(宦官)정화가 등장하기 이전의 중국은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던 대작위 수여의 사령이나 공문서 등을 보관하는 인수감(印綬監), 궁전의 청소를 담당하는 직전감(直殿監), 황제의 옷을 만드는 상의감(尙衣監), 황제가 외출할 때 경호를 담당하던 도지감(都知監), 말이나 코끼리를 다루는 어마감(御馬監)이 있다.정화가 장인 태감이 된 내관감은 목(木), 석(石), 와(瓦), 토(土)등을 관할 하고, 궁전과 능묘 따위의 조영에 종사하는 토목과 건축 공사를 주관하고, 동석 제품을 주조하거나 각종 집기를 구매하는 폭넓은 임무를 띠는 중요한 관청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임무를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 각 지방에 내관감 출장소를 설치해 전국 규모의 방대한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다. 토목과 건축 공사를 주관하는 내관감은 뒷수입이 매우 좋은 관청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청의 장관에 34세의 정화가 발탁되었다. 그의 비참했던 처지는 영락제의 총애로 정반대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정화는 자신의 불우한 인생을 바꾸어준 영락제에게 충성을 다해 따를 수 밖에 없는 충복이 된 것이다. 때문에 영락제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품은 남해에 대한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정화에게 일임하게 되는 것이다.Ⅲ. 조공무역(朝貢貿易)과 해금정책(海禁政策)영락제 시대는 명초기 농업진흥책이 성공을 거두어 국력이 충실하던 시기였다. 『明史』식화지(食貨志)·부역(賦役)에서는‘이 때 우내(宇內:천하)백성의 부입(賦入)은 넘치고, 곡물 100만 석이 경사(京師)로 반입된 것 외에 부현(府縣)의 곡물 창고는 참으로 풍족해서 썩어서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게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락제 역시 홍무제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계승했다. 홍무제나 영락제는 모두 종래 중화적 책봉관계에 입각한 조공무역(租貢貿易))을 다시 부활 시기고자 했다. 이에 개인의 사사로운 무역은 이러한 조공무역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책봉관계 확립을 위해 수많은 원정을 단행한 영락제가 이런 홍무제의 해금정책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홍무제의 해금에 입각한 이런 조공무역의 부활 노거웠다고 한다. 이 때 감합부(勘合符) 100장도 전해져서 감합무역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던 1404년(영락2년)에 정화가 10만명으로 구성된 군선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해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고 일본측이 이에 응해 왜구를 잡아 명나라에 보냈다는 것이 정화방일설의 내용이다.) 이러한 정화의 방일 기록은 ‘후기 왜구’가 명나라를 괘롭히던 16세기 중반 정순공(鄭舜功)의 『일본일감(日本一鑑)』, 호종헌(胡宗憲)의 『주해도편(籌海圖編)』에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다. 고염무(顧炎武)의 『천하군국리병서(天下郡國利病書)』의 일본 조(?)에는‘문황제 영락 2년 4월, 이선(夷船) 11척이 천산(穿山)을 노략질해 100호의 마흥(馬興)이 이에 죽다. 소송제처(蘇松諸處)도 심히 노략질 당하다. 그 해 상(황제)은 태감 정화에게 명해 누선(樓船) 수군 10만명을 통솔해 해외 번(番)들을 초유했는데 일본의 우두머리가 먼저 정성을 다하고, 변(邊)을 범한 왜적 20여명을 잡아서 바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정화가 활동한 시기 정화 함대의 원정기록 속에 일본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이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1405년(영락3년) 공식적인 첫원정이 시작되었고 기록된 규모역시 대형정크선 62척 2만5천여명의 인원이다.만약 위의 기사(記寫)에 나온 수군10만은 터무니 없이 많은 병력일뿐더러 육군이 포함된 숫자라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과장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락제가 즉위한 후 일본과 명의 관계가 크게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이 설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영락제가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분명 환관을 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이 굴복 시키지 못한 일본과 책봉 관계를 맺음으로서 상대적 우월성을 입증 하려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Ⅴ.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정화는 자신이 명받은 남해의 세계에 중화적 책봉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은 평생을 바칠 긴 여정을 시작한다. 물론 생사가 묘연한 건문제가 남해 일대에서 화교세력을 규합해 영락제에게가는 성과를 올린다. 이후 정화는 인도의 켈리컷까지 항해에 성공하고 귀국한다.2차 원정에서 귀국중 실론섬에 정화가 세운 비석이 있는데 이는 함대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비석으로 비문의 내용은 비신(費信)의 『성차승람』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1911년 도랑을 덮는 석판으로 이용되었던 비석이 발견되어 지금은 콜롬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석의 우측은 한자, 좌측 상단은 타밀어 하단은 아랍어로 적혀져 있다. 내용 역시 각기 다르다.)또한 아유타야 왕조를 견제하여 명의 책봉관계에 편입시키는 것에 성공한다.3차 원정에서는 실론섬)에서 정화일행이 한차례 위기를 겪는다. 실론섬에 정박한 정화일행을 실론의 왕이였던 아열고나아(亞烈苦奈兒)가 금, 은을 헌상한다는 핑계로 정화일행을 불러들이고 그사이 5만의 군대로 기습한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정화는 2천의 군대로 왕을 사로잡고 5만 적군을 격퇴시킨 뒤 왕을 영락제에게 압송한다. 영락제는 왕에게 귀국을 허락하게 되고 이후 실론섬은 친명성격의 왕들이 탄생해 명과의 관계가 돈독해 지게 된다. 또한 실론의 풍부한 보석들의 가치와 부(富) 덕분에 말라카 해협의 팔렘방과 더불어 인도양에서의 중간 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4차원정에서 정화는 인도를 넘어 페르시아 만을 향해 넘어가게 된다. 이제 켈리컷에서 명까지 그 사이 남해의 국가중 명에게 거역하는 또는 명의 책봉을 받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때문에 영락제(永樂帝)는 더 멀리 책봉(冊封)관계를 확산 시키기 위하여 페르시아 만으로 항해를 명하게 된다. 때문에 정화는 페르시아 언어에 능통한 인재(人才)가 모이기 시작했다.) 남경(南京)을 출발한 정화 일행은 삼도라 파세에서 왕위 다툼에 다시 한번 휘말리게 된다. 삼도라 파세에서 분쟁을 해결한 덕분에 말라카 해협의 이슬람 세계들 역시 명의 책봉체계에 편입되게 되어 말라카 해협내 명의 위치를 더욱더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이후 정화의 일행은 종전의 항해와는 다르게 함대를 2개로 나누게 된다. 정화가 포함된 본대(本隊)는 종전의 항로대로년 지나지 않아 선덕제 역시 사망하게 된다. 뒤이어 9살의 어린나이로 즉위하게 된 정통제(正統帝)때는 운남성(雲南省)의 7년 반란과 복건성(福建省)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 제정적으로 원정을 단행할 수 없게 된다.정화함대의 출발과 도착시기출 발도 착제1차1405년(영락3년) 겨울1407년 9월제2차1407년(영락5년) 겨울1409년 늦여름제3차1409년(영락7년) 9월1411년 6월제4차1413년(영락11년) 겨울1415년 7월제5차1417년(영락15년) 겨울1419년 7월제6차1421년(영락19년) 봄1422년 8월제7차1430(선덕5년) 12월1433년 7월정화함대의 승무원 규모와 출전사료원정차수승무원 수출전 사료제1차2만7800명3만7000명『명사(明史)』 정화전『죄유록(罪惟錄)』 정화전제2차미 상제3차2만7000명3만명『성차승람』 점성국 조『황명사이고(皇明四夷考)』제4차2만7670명『영애승람』제5차미 상제6차미 상제7차2만 7550명『전문기(前聞記)』하서양 조직책별 인원 분류A.환관정사태감(政使太監)7명감승(監丞)5명소감(少監)10명내감(內監)53명B.관료로서 외교, 교역 등에 종사한 자호부낭중(戶部郎中)1명매변(買弁), 서수(書手), 통사(通事), 교유(敎諭)각 1명C. 조선(操船), 군사, 의장(儀仗)등에 종사한 군인도지휘(都指揮)2명지휘(指揮)93명천호(千戶)140명백호(百戶)403명관교(官校), 기군(旗軍), 용사(勇士)D. 기타음양관(陰陽官)1명사인(舍人)2명의사(醫師), 의관(醫官)180명여정(余丁)2명Ⅵ. 신대륙발견과 르네상스정화의 원정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가 르네상스, 둘째가 신대륙발견이다. 얼핏 들으면 두 사건과 정화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 같다. 하지만 게빈 멘지스의 저서 『1434』에 따르면 당시 정화가 가지고간 많은 진상품중 유럽으로 넘어가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외륜선의 도면은 중국의 도면과 크게 차이가 없다. 톱니를 이용하는 기어와 탑을 건축할 때 사용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