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랑, 자비, 헌신, 희생나로부터 나아 온참된 것이사랑이요자비요헌신이요희생일 때나는 비로소인간이 된다.사랑, 자비, 헌신, 희생이라는 네 단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말들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 네 단어들을 배워왔고 이것을 이웃에게 베풀도록 교육받아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 네 단어들은 나와는 소원(疎遠)해지고, 타인에게 그 단어가 주워졌을 때는 박수를 보내고, 찬사를 쏟아내게 된다. 의인이니, 모범 시민이니 하면서 추모행사를 벌이고 기념비를 세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작 나 자신과의 관련성을 생각하면 선뜻 다가서기엔 무언가 걸림이 있고,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왜일까?사랑이란 단어는 나에게 막연히 좋은 것을 가져다 줄 것 같아 상당히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반해 자비, 헌신, 희생이란 단어는 나의 것을 빼앗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받아들이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다.사랑이란 단어는 내가 탐할 수 있는 것으로써 나에게 득이 되는 것으로 느껴지고, 자비, 희생, 헌신이란 단어는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닌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써 나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위의 네 단어는 모두가 이타심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 단어들은 행위자의 자유의지의 발로로 이루어진 실존의 현상이 타자에게 비쳐짐으로써 타자에 의해 지칭된 것들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개념이, 행위의 당사자에게는 무덤덤하고 그리 거창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지극히 겸손하게 들리는 행위자의 한결같은 대답은 '저는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을 한 것뿐이고,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상황에 맞닥트렸다면 그도 역시 저처럼 그러했을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의 행위는 당위성에 의해 저질러진 실존의 현상일 뿐이다.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15분 일본 도쿄 신오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가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때마침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같이 구조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노시로씨와 함께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되짚어 보면 '이수현'씨와 '세키노시로' 씨는 그 누구의 지시나, 타자에 의해 등이 떠밀려 선로에 떨어진 게 아니라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자극에 의해 투기(投棄)된 것이다. 그들에겐 사랑, 자비, 희생, 헌신 이란 단어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예 없었으며, 그 어떤 생각도 그들의 행위를 제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이 사건 후 역의 단 하나뿐인 개찰구에는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동판이 벽면에 설치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LSH아시아장학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민국과 일본정부의 훈장, 각종 감사패, 감사장, 상장 등 다수의 상훈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해마다 고인의 기일엔 이수현씨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모든 동물은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면 자기보호본능에 의하여 필사적인 방어행위나 공격행위를 한다. 피할 곳이 없는 구석에 몰린 쥐는 지금껏 도망만 치던 상태와는 달리 오히려 고양이에게 대드는 공격행위를 한다. 인간도 역시 본능적으로 예외일 수 는 없다. 급박한 상태에 빠지면 움츠려 숨거나, 도망을 쳐 그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본능의 욕구를 벗어난 '이수현씨와 세키노시로씨의,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 선로로 뛰어내린 행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는 것일까? 절체절명의 급박한 상황에 그들의 몸을 투기한 행위는 오직 취객을 구해야만 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순식간에 몸을 던진 일방적인 행위 일뿐이다.심리학의 용어 중 '방관자 효과(책임 분산 효과)' 라는 게 있다.이 용어는 눈앞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어도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들이 도와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 상황을 방관하고 개입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최근 중국 산시 성에서 나이든 여성이 길을 가다가 도로변에 주차된 승용차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머리가 자동차 바퀴 밑에 덜어간 채 방치된 사건이 발생하였다.현장의 폐쇄회로(CCTV)의 영상에는 쓰러진 사람의 바로 옆으로 오토바이와 차량들이 그냥 지나치고 총 25명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도 못 본 채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장면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포산 성에서는 두 살짜리 아이가 차에 치인 후 18명의 행인으로부터 방치된 사건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8명의 행인 중 한 명은 트럭이 그 아이를 한 번 더 치고 지나간 것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없이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다.방관자들은 양심의 소리엔 귀를 닫고‘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는 도와주겠지’라는 안일한 사고방식과,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관련된 성가신 일들에 빠지지 않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보호본능으로 인해 모두가 하나같이 현상을 외면한 것이다.
깨우침참된 깨우침은우리의 삶을나이가 들수록점점 커다란 베풂으로가슴 벅찬 희열로이끌어 주는행복의 열쇠이다.“가령 여기 한 사람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연유(練乳)를 먹었기 때문에 갈증을 느꼈다. 그는 갈증을 풀기 위해 연못으로 가서 물을 마시려고 엎드렸다.그 때 이것을 본 다른 사람이,‘자네는 이미 연유를 많이 먹었으므로 절대로 물을 마셔서는 안 되네. 물을 마시면 반드시 죽을 것일세,’하면서 주의를 주었다.그런데 고마운 충고를 들은 그 어리석은 사람은 오히려,‘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사람이네.’하고 화를 내며‘목이 말라서 물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남이야 살든지 죽든지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라.’며 욕설을 퍼붓고 그의 충고는 아랑곳없이 목이 마른 나머지 많은 물을 마셨다.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그 곳에서 죽고 말았다. “위의 글은 인도의 신앙설화로 ‘대보적경’이란 책에 실린 ‘어리석음’에 대한 글이다.이것은 무지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는 행동을 경고하는 글이다.이와 유사한 것으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설익은 지식만 믿고 아는 척하며 덤볐다가 큰일을 저지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실제로 우리의 주위엔 자신만의 단순한 짧은 지식만을 믿고 이러한 상황에 빠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널려 있다.더구나 위험한 것은 언어나 문자, 이미지를 통해 얻어진 지식을 오랜 숙고를 거친 후, 그 이치를 알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단지 자기기만의 상태일 뿐이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진정한 깨달음이란 반석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이 어떠한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림이 없으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얻었다고 느끼는 깨우침은 조그마한 외부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거나 허물어지는 그 바탕을 알 수 없는 터 위에 세워진 집과도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엔 집의 외부로 드러난 위 부분만 보일 뿐 땅 속에 묻힌 집의 하부인 기초는 보이지 않는다.반석 위의 집도 집이요, 모래 위의 집도 집이다. 이러한 깨우침은 현상을 보고 느낀 것은, 본질로 믿는 오류로써 우리의 삶에 많은 문제점을 파생한다.인생에는 우리가 원치 않았고 예측하기도 힘든 수많은 자극들이 펼쳐져 있어, 현상에서 유추된 깨우침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엄청난 피해를 끼치게 된다. 더구나 이런 깨우침을 철저한 검증이나 확증도 없이 책을 펴거나, 큰 소리로 군중을 선도한다면, 이것은 맹인이 맹인들을 이끌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그것을 본즉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이 글은 성경에서 선악과를 본 여자의 느낌을 표현한 글이다.인간에게 ‘지혜롭다‘는 것은 피하기 힘든 정신적인 유혹의 요소이다. 또한 가장 떨치기 힘든 유혹 중의 하나요, 가장 매력적인 게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위해 고행을 하며, 구도자의 절제된 삶을 수행하고 있다. 깨우침을 얻기 위해 참선을 하고, 명상을 하며, 세속을 떠나 입산하여 홀로 수양을 하거나, 훌륭한 스승을 따라 일생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진정한 깨우침이란 단순한 사고의 훈련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깨우쳤다고 믿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인 정, 반, 합의 무수한 절차를 거치며, 몸소 체득해 나아가 변증법의 최고점인 절대영역에 도달하여야만 비로소 진정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절대영역(최고정점)에서의 깨우침이란 정, 반, 합 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구분 없는 온전한 깨우침(본질) 만이 존재하는 것이다.시간성과 공간성에 의해 변하지 않으며, 온전체로 존재하는 것 이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다.깨우침에는 3가지 형태의 것이 있다.그 첫 번째는 타자의 말이나 글을 통하여 얻는 교육에 의한 깨우침이요. 두 번째는 혼자만의 사색이나 명상에 의해 도달하는 깨우침이요 세 번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직접 체득한 경험에 의한 깨우침이다.?헤겔의 변증법으로 본깨우침의 단계?한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 시대의 화두가 된 시절이 있었다.'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이라는 단서를 서두에 붙인 이 말씀은 단서가 없이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인가?세 살배기 어린 아이의 눈에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더불어 고해의 바다를 건너온 노인의 눈에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산은 표상으로서의 산이오, 물도 표상으로서의 물일뿐이다. 어린아이에겐 눈을 뜨고 있을 땐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지만 눈을 감으면 그 산과 물은 사라지고 없다.고해의 바다를 건너온 노인에겐 육신의 눈은 감고,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표상이 아닌 그 실상을 바라보면 어린아이의 감은 눈에서는 사라진 산과 물이 마음의 눈을 바로 뜬 노인에겐 표상으로서의 산과 물이 아닌 실상으로서의 산과 물로 다가오는 것이다.산과 물은 그 뿌리를 바다에 두고 있다.'산'의 우리말 뜻은 ' 평지보다 높이 솟아 있는 땅의 부분' 이라고 한다.'물'의 우리말 뜻은 ' 못, 내, 호수, 강, 바다 따위를 두루 이르는 말' 이라고 한다.'평지'의 우리말 뜻은 ' 바닥이 평평한 땅' 이라고 한다. 해발 1m 의 평지에 사는 사람에게 100m의 높이 솟아 있는 땅은 산이지만 해발 100m의 평지에 사는 사람에겐 해발 100m의 산은 산이 아닌 평지의 한 부분일 뿐이다.태양이 뜨면 별이 지고, 태양이 지면, 별이 떠오른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명약관화한 사실은 명약관화한 게 아닐 수 도 있다. 대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면 이는 진리가 아니다. 빛을 감지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낮과 밤의 제한이 없이 언제나 별을 볼 수 있다.대낮의 별은 태양이 너무 밝아 보이지 않은 것이지,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눈을 뜨고 있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별이 눈을 감은 자에게는 인지될 수 있다는 사실은 '표상으로서의 세계' 만이 부릴 수 있는 마술인 것이다.불교 경전인 '열반경'에는 맹인모상(盲人模像) 이라는 말의 어원이 담겨 있다. 이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만 가지고 고집한다는 말이다.6명의 시각 장애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무같이 생긴 동물이라 거나 곡식을 까불 때 쓰는 키 같이 생긴 동물 또는 커다란 절굿공이같이 생긴 동물이라는 등의 표현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만 이해하고 고집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9. 인생의 선택인생이란자유의지에 의해옳은 선택이든,그릇된 선택이든선택의 연속으로점철되어 있다.인생은 끊임없이 요구되는 선택의 결정에 의해 완성된다. 사람들은 단 하루 동안의 삶에 있어서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선택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잠들기 전에 오늘은 몇 번의 선택을 하였으며 선택의 결과는 옳은 것이었는지 그른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삶의 모든 행위는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점심식사는 무엇을 먹을까, 나에게 주어진 일들 중에서 오늘은 무슨 일을 먼저 처리하여야 하는 걸까 등의 선택은 의식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 외에 행해지는 수많은 행동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습관적인, 타성에 젖은 생활자세로 인해 선택이라는 개념이 상실된 채 자신도 모르게 행하여지는 것이다.모든 행위를 야기하는 선택은 두 단계의 과정을 필히 거쳐야 한다.첫 번째 단계는 선택 대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요,두 번째 단계는 두 본질의 경중을 가늠하는 척도로 측정하는 것이다.척도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 요소인 정신적, 육체적 요인에 기인한다. 이 두 단계를 충족시킨 선택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올바른 행위를 취할 수 있게 된다.직장인들이 겪는 고민 중 한 가지를 들자면, 매일 먹어야 하는 점심식사의 메뉴선택이다. 수많은 음식의 종류 중 한 가지를 고를 때에 대부분의 기준이 되는 척도는 음식의 섭취로 얻어지는 쾌감이다. 시각자극, 후각자극, 미각자극을 극대화 시킨 음식을 사람들은 선호한다.그러나 이러한 음식들은 식감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인공화학조미료나 권장 칼로리 이상의 고칼로리 식품들로서 섭취하였을 때에 몸에 이로움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친다. 아무리 맛이 있고 귀한 식품이라 할지라도 그 구성성분이 인간의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섭취를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음식이란 육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즐겨 먹는 이러한 음식을 먹기 전에 첫 단계인 음식의 본질을 규명해보자음식의 본질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영위함에 건강상 문제가 없도록 몸에 이로운 영양분을 지니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인 선택의 척도는 섭취로 얻어지는 영양분의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본질에 의해 선택된 음식은 우리 몸이 요구하는 적절한 밸런스의 영양분을 지닌 음식이어야 한다. 편식에 의한 한 쪽으로 치우친 식사는 신체상의 불균형을 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선택 후 인간의 신체상에 과하지 않은 음식의 양을 선택하여 섭취함으로써 한 끼의 식사가 이루어져야 한다.이처럼 단 한 끼의 식사를 함에도 우리는 많은 단계의 선택을 제대로 거쳐야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단계의 선택에서도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몸은 병들게 되어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인간은 태어남으로써 형성된 결핍에 의해 결핍을 벗어나기 위한 욕망을 추구하도록 강제 되어져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란 괴물은 아무리 취해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결국 만족을 모르는 욕망은 끊임없는 욕구의 충족으로 인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욕망의 수렁에 빠져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마치 뱀이 자신의 몸체보다 몇 배나 큰 동물을 삼키고선 배 속에 들어간 동물을 감당하지 못한 채 배가 터져 죽는 것처럼, 결핍의 정도를 벗어난 욕망의 추구는 결국 욕망의 무게에 짓눌려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선박에는 DWT(재화중량톤수: Dead Weight Tonnage) 라는 게 선박 건조 시 지정되어있다. 이것은 연료유 등을 포함한 해당선박의 적재 가능한 무게를 일컫는 것이다.선박의 중앙부 양 현에는 만재흘수선(Load Line Mark)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선박이 선적할 수 있는 최대용량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표기이다.바다에 떠 있는 선박의 만재흘수선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선박의 항해는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만재홀수선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선장이 과적을 한 채 항해하다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는 참사는 왜 끊이지 않는 것일까? 처음부터 죽을 줄 알면서도 과적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구는 만재흘수선에 최대한 근접하는 선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보편적으로 과적은 시간차를 두며 조금씩, 서서히 이루어진다.DWT를 초과하여 1톤을 더 싣고 1주간의 항해를 거친 후에 다시 2톤을 더 싣고 2주간의 시험 항해를 거치고, 다시 5톤을 더 싣고 3주간의 시험 항해를 거친 후 이러한 방식으로 과적의 양을 늘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는 안일한 판단은 결국 사고로 이어진다.쭉 뻗은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규정 속도로 어느 시간 달리다 보면 속도감을 잊어버리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도불감증에 걸려 점점 과속을 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속도 불감증은 더욱 더 가속화되어 결국엔 브레이크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에 이르게 되어 큰 사고로 이어진다.톨스토이는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결정할 때에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판단이 서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만일 자신이 그날 저녁에 죽는다면, 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해답이 나올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기주의의 본질가장 인간적인사람이야말로철저히 이기적인사람일 수밖에 없다.인간은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와 양심 그리고 실존의 존재로 현상계의 일원이 됨으로써 얻어진 분리불안과 결핍을 본질로 가진 존재이다.생의 목적은 본질에 충실을 기하여서만 이를 수 있는 온전함으로의 회귀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농부가 호미와 쟁기로 농사를 짓듯이 자유의지와 양심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쟁기는 돌을 골라내고 흙덩이를 잘게 부수어 옥토를 만들듯, 양심은 생의 목적에 불필요한 것을 골라내고 그른 것을 제거하여 인간이 선을 이룰 수 있는 맑은 심성을 일구어 내어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도 실존하는 절대적 존재이자, 타자를 필요로 하는 상대적 존재인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원론(一元論)적 원리의 규제 속에서만 삶이 형성된다. 살아가며 부딪히는 모든 문제는 나로 인해 생긴 것들이오, 그 해답 또한 나의 내면에 있으며 타자의 존재란 나의 삶을 완성하는 데에 필수적인 도구로서의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독자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의 근원지이며, 타자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원인과 결과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즉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로 귀결되는 '내 안에 모든 것이 있다'라는 절대적인 원리만이 존재하는 것이 '일원론' 이다.나의 선한 행위에 나의 뺨을 때리는 타자의 행위나,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나를 기만하고 원망하는 행위도 이 모든 것은 나로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므로 타자에게서 이 사건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잘한 것도 나의 몫이요, 못한 것도 나의 몫이며 타자가 나의 행위를 곡해한 것도 내가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일원론의 상태에서 자기완성은 절대적인 자기애와 완전한 이기심을 요구한다.절대적인 자기 사랑과 완전한 이기심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도 이루'거룩하다'라는 단어는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의미로 신의 어원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며, 사람도 거룩하여질 수 있도록 온전함의 근원을 허락하신 것이다. 즉 인생이란 여정은 거룩함의 성취를 통해 신의 온전함에 융합될 수 있는 존재로의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또한 ‘해동종주’라고 불리는 신라의 승려 원효대사는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서(大乘起信論書)에서 일심(一心)사상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이고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 는 것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 또한 인간은 일심사상을 통해 부처-온전함- 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인생을 온전함을 성취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거룩함의 성취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설명하고 있다.거룩하기 위해선 사욕을 버려야 하며,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도록 행실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여야 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이성을 지닌 존재는 인간뿐이며, 이성으로 인해 인간은 신앙을 가짐으로써 금수의 삶과 다른 삶을 누릴 수 있다. 모리스들류겔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자이며 최대의 계몽자이지만, 반면에 외면적인 현상과 정치상의 이기적 활동은 인류의 진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종교의 본질인 신성함과 영원함은 살아있는 한, 느끼는 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한결같이 채워준다.우리가 탐구의 길로 나아가면 갈수록, 모든 위대한 종교의 근본 원리는 하나라는 것, 천徵)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종교의 본질적 원리는 예수, 바울, 마누, 조로아스터, 부처, 모세 소크라테스, 실러, 마호메트가 한결같이 설파한 '이웃에 대한 사랑' 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오직 자신만의 존재성에 가치를 두기에 절대적인 자기애와 철저한 이기성이 없이는 실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세계 2차 대전 중 전쟁에 내몰린 일부 군인들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전쟁의 참상에서 정글에 피신하던 중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료의 인육을 먹으며 생활하다 구출된 사례가 있었다.그들은 생존을 위해 도덕보다는 인간의 본질인 결핍의 욕구가 더욱 강했기에 이러한 동물적인 행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야수적인 행위를 할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은 생존이라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이성적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으로써 그 의문은 사라지게 된다.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잔인성에 비해, 유아기의 아이들은 생명이 없는 물질로 구성된 무기적인 인형을 생명 또는 영혼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인형이 어디에 부딪히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되면 눈물을 머금고 진심을 다해 인형을 치료하는 행동을 볼 수 있다.이것은 물활론(物活論)이라는 것으로서 성인이 되면 사라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양심에 깃들어있는 범신론의 한 가지 이다. 일원론 하에서의 절대적 존재인 자아는 그의 행위를 함에 있어서 타자의 요청이나, 거래에 의해 제약이나 제도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단지 자아의 본질인 자유의지와 양심에 따라 타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율성에 의해 행위가 이루어질 뿐이다.이원론(二元論) 에서 이루어지는 단어들은 일원론에서는 그 가치가 사라진다. 즉 자아와 타자가 공존하는 시스템에서는 사랑, 헌신, 희생, 봉사, 명령, 구속, 속박 등의 단어가 그 의미를 갖게 되지만,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만이 중요한 일원론에서는 타자와의 거래가 없으므로 위의 단어들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이러한 단어들은 극히 아름답거나, 추악한 단어들로써 자아서 있을 때에 훨씬 더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누구에게 특별히 강요받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일부러 자신들의 군주를 만들어 내었다.그들은 왕을 세우게 되면 자신들의 자식들이 전쟁에 동원되고, 그들 소유의 1/10을 거두어 나라에 바쳐야 하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여야 함을 알면서도 그들의 군주를 세워줄 것을 하나님께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분리불안과 결핍은 그 자체만 해소시킬 길이 있다면 그 길이 자신의 삶을 담보로 한 노예의 삶일지라도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게끔 만드는 것이다.몽테뉴의 친구이자, 보르도 재판소의 재판관이며 작가였던 '에티앙드라보에티'는 '스스로 노예이기를 원하다' 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민중은 한번 예속 당하기 시작하면 당장 자유를 망각해버리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 좀처럼 없다는 것에는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롭다는 것,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익숙해지기만 하면 무엇이나 자연스럽다’일원론에서의 자유의지는 경계 없는 초원을 마음껏 휘저으며 자신의 기량을 모두 발휘하여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발휘하는 야생마처럼 그를 그답게 만드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타자의 명령만으로 움직여지는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만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느냐, 노예로서의 굴종의 삶을 사느냐는 전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진다.양심이란 텅 빈 그릇이 그릇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음식물을 담아야 하듯이 인간의 육신이 인간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의 내용물이다. 양심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삶의 모든 것을 일일이 간섭하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잠시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며, 선이 아닌 것은 제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 하여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한다.양심이 인간에게모르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쫓아다니며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이지만 양심의 소리에 이기적이고 절대적인 이기심으로 따르고 행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며, 실존으로서의 가치를 100% 모두 누릴 수 있게 된다.양심은 지고지순한 선이며 절대자의 명령이다.양심에는 이원론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당위성' 이란 일원론적 단어 하나로 압축되어 소멸해 버린다.수많은 화려한 수식어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인류 역사상 모든 작가들이 예찬한 '사랑' 이라는 것은 일원론적 의미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여야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단순한 것으로 귀결된다. 이원론에서의 사랑은 동등한 자격으로서의 나와 네가 성립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성립된다. 이 원리가 깨어졌을 때에 비극과 불행이 일어나고 인생의 애환이 시작되는 것이다.그러나 일원론에서의 사랑은 자아만이 주체로서 존재하고, 타자는 자아의 삶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는 대상물에 불과하다.이러한 사랑은 절대적 존재에서 발현된 기투된 행위로서 타자의 반응과 결과에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이 날아간 화살처럼 시위를 떠난 순간 자아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이 된다.기투된 행위의 근원은 양심이며, 도화선은 철저한 자기애의 실현이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기록한 글이 있다.성경에 기록된 글 중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까?
자녀교육 맞춤법자식은부모의 소산물이 아니다.자식은자신만의 특질을 가지고그것을 꽃피워자신만의 향기를 뿜어야 한다.부모나 자식이나모든 인간에겐자신만의 향기가 있다.그 어떤 사람도자신의 향기를 닮으라고타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사람이 먹는 음식 중 밀가루와 팥을 이용한 식품들이 많이 있다.밀가루 전병, 팥죽, 팥이 들어간 떡, 팥빵, 붕어빵 등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일지라도 그 맛은 제각기 다른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리자의 미각, 제작방법, 재료의 구성 등 여러 가지 변인들로 시각적으로 똑같은 모양일지라도 그 맛은 모두 각각 다르다.방송이나 메스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맛 집이라는 곳을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한 곳을 찾아가 보면 맛 집 주변의 가게들은 손님이 별로 없는데 유독 맛 집 만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동일 재료로 조리한 음식인데도 일반 음식점과는 달리 특이한 맛을 내는 맛 집은 그 나름만의 노하우가 있기 마련이다.여기 지구상에 존재하는 밀가루 중에서 일반 밀가루에 비해 1/10의400성의 희소성을 지닌 특이한 밀가루와, 일반 팥에 비해 1/10의400성이라는 희소성을 지닌 팥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밀가루와 팥이 존재할 가능성은 지구상에서 1/10......0 즉 0이 400개 붙은 분모를 가진 것 중에서 단 1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이러한 희소가치를 지닌 물질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 밀가루와 팥이 만약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신은 이 희귀한 재료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밀가루와 팥을 정해진 비율에 따라 배합하여, 정해진 공법을 거쳐 형태만 달리한 채 다량으로 생산되는 기계식 빵은 절대로 장인만의 노하우를 거쳐 수동으로 생산되는 빵의 가치(상품가치포함)를 따라 갈 수는 없다.당신에겐 이미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맛 집을 차릴 재료가 준비되어 있다. 많은 실험과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은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맛 집으로 당신에게 명예와 엄청난 부를 선물해줄 것이다.그러나 당신이 이토이 아무렇게나 만들어 팔아버린 제품의 재료의 특성의 가치를 깨달았을 때는 당신에게 평생 한 번 밖에 허용되지 않는 행운을 당신 스스로 차버렸다는 자괴감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무리를 지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심지어 경쟁을 하면서까지 저지르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아니 더욱 경악할 일은 그 재료라는 게 음식물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분신이라는 사실이다.MHC(주조직적합성복합체: Major Histocompatibility Comp Lex) 라는 거대한 유전자군이 인체에 있다. MHC는 단백질을 암호화(encoding)하는 유전자 부분으로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서로 다른 MHC 대립형질로 존재한다.로또 복권의 당첨 확률은 1/8145060 로서 1/10*의7성 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 비해 동일한 MHC를 가진 인간이 존재할 확률은 1/10*의400성 이다. 즉 여러분의 자녀는 로또의 당첨확률보다 -57배나 되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기적 같은 관문을 통과하여 여러분에게 자녀로 선택된 것이다. 이러한 희소성을 띤 생명들은 자라면서 부모나 이웃들의 강요에 의해 서서히 특질을 잃어가며 일반적인 평범한 생명체로 살아가게 되는 서글픈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유아기에 접어들면서 말을 익히게 되면 유아가 가장 먼저 사용하는 의사 표현의 단어들은'아니, 싫어, 내가 할 거야, 미워' 등이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유아기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기인하는 것들로써 자신만의 특질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 때 부모는 유아에게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려 하지 말고, 무조건적인 반대나 강요를 하여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물러서서 유아가 왜 고집을 피우고, 투정을 부리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충분한 관찰을 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유아만의 특질을 읽어 들여 유아의 고질을 지니게 된다.어린애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무엇을 만들 때에 동료가 자신의 것을 보지 못하게 몸으로 가리거나, 홀로 외진 곳에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아이들에게 숨겨진 특질을 짚어보자.첫 번째로는 자신만의 개별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의 차별성을 중시하며, 독창성이 강하기에 모방을 싫어하고, 자신의 창조성으로 자신만의 표현을 하고자 한다.두 번째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만족감이 적다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눈길을 강하게 의식하기에 수치심을 잘 느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정적이고, 사회활동에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세 번째로는 현재 행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행위를 하면서 짜증을 내거나, 지루함을 나타낸다.이 외에도 다양한 심리적 특질이 잠재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간단한 행위 하나에도 여러 가지의 특질이 숨어 있다. 이 특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강제력을 행해서는 안 되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의 행위를 이해하여야 한다.'착한아이컴플렉스'라는 심리적 문제가 있다. ‘위키백과’에는 이것은 '착하거나 말 잘 듣는 것은 좋은 것, 착하지 않거나 말 안 듣는 것은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타인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타인으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이르는 말이다.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이 하는 말에 집중하며 갈등 상황을 피하고 타인의 요구에 순응한다. 반면 자신의 느낌이나 욕구는 억압하기에 타인을 향한 투사나 반동형성의 행동이 뒤따르게 되며 언제나 위축되고 우울한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는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때야 마이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나 엄격한 집안 교육 때문이다.오늘날 우리 사회에 사는 청소년들은 '자아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소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제도화된 천편일률적인 교육시스템은 1/10*400 의 확률로 특질 화된 인간을, 지구상에 생존하는 인류의 총합 중의 한 사람으로 대비한 1/10*9 의 특질을 지닌 인간으로 퇴화시켜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다.영유아원을 기점으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생 시절의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 체육학원 등, 중학생 시절의 국어학원, 영어 학원, 수학학원 등, 고등학생 시절의 다양한 사설학원 등을 거치며, 자신의 생득적인 특질과는 무관한 제도화된 천편일률적인 교육시스템으로 부모나 사회에 의해 강제적으로 내몰린 지난날의 이력이 오늘날 평범한 일상인의 한 사람으로 자아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로 전략해 버린 것이다.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거름지고 장을 간다는 말처럼 나만의 주장이나 주관이 없이 타자들의 행동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현 세대의 젊은 부모들은 20여 년 전부터 자신의 기준이 아닌 타인의 기준을 따라가는 타자의 삶을 살다 보니, 지금은 모든 부모들이 단체로 동일한 스케줄에 의한 동일한 교육을 자식의 자질과는 상관없이 행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특히 오늘날의 부모가 아동 교육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아동을 오늘의 사회 상황에 맞춰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사회의 주역이 되는 그 시점의 생활변화 조건에 맞춰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부모들은 현재의 상황에만 맞춰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는 수준의 안정되고 생계 걱정 없는 직업군 중 하나를 택해 아이들을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자녀 개개인이 지닌 특질과는 상관없이, 자녀가 하고 싶어 하고, 되고 싶어 하는 인물로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무사 안일한 사고에서 결정된다.인공지능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실정에서 앞으로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 일들을 인공지능 로봇이 담당하게 된다. 인간의 오감을 느끼고 스스로 사고하는 판단할 줄 아는 인공지능(AI) 로봇의 등장은 인간이 육체를에서는 인간과 인공지능로봇과의 뚜렷한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된다. 기계와 인간의 고유의 차별성은 신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정신세계만이 유일한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바로 코앞에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부모들은 아직도 동일한 시스템에 자식들을 내던져두고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부모의 어리석은 선택은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올해는 고추 값은 비싼데 배추는 수확하는 인건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인해 한 해의 배추농사를 망쳐버리고 싱싱하게 출하를 기다리는 배추밭을 아예 뒤엎어버리는 일들과 같다. 다음 해에는 이와 반대로 배추 값은 비싼데 고추 값이 떨어져 싱싱하던 고추가 서리를 만나 시들어 죽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해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실패의 경험을 인간은 되풀이 하여 실패의 경험을 축적하듯 백해무익한 행위를 답습하는 어리석음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자식들에게 고충을 안겨주는 '착한 아이'를 강요하고 있다.이러한 교육방식에 길들여진 요즘의 청소년들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아정체감의 상실에 내몰린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는 하나같이 '좋은 게 좋은 게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만을 만들어 내고 있다.착한 아이로 성장한 성인은 자신의 오늘이 어릴 적부터 타자의 계획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친 순간 '자아 존재감'을 상실한 채 자신의 삶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채 표류하는 상황임을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 인간은 신경증, 불면증, 우울증, 무기력증 등을 동반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종국에는 자살에 이르게 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기도 한다.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은 페르소나(Persona)를 그림자와 같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일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