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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양안관계 평가A+최고예요
    중국과 대만의 분쟁양안관계에 대하여..도시행정학과 90706096김대현Ⅰ. 들어가기중국과 대만 이 두 국가는 양안관계라고 하는데 이 양안관계라는 어휘는 근대이후, 특히 내전이 종결된 1949년 이후 패전한 국민당 정권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동하면서 생성된 정치적 성격을 지닌 어휘다. 양안관계는 2000년을 기점으로 과거 중국의 공산당과 대만의 국민당에 의해서 주도되던 구조가 대만의 정권교체로 인하여 과거와는 다른 질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양안관계는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점을 중심으로 과거 양안관계를 단계별로 나누어 그 전개양상을 살펴보고 양안관계의 성과와 한계 및 쟁점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양안관계의 단계, 정책, 쟁점1.양안관계의 단계??① 제1단계: 군사적 충돌단계(1949년 - 1978년)??1949년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에게 참패한 장개석 국민당정부는 대만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후 1978년까지는 양안간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지속되었던 시기다. 이 기간 동안 대만은 반공대륙을, 중국은 무력을 통한 대만해방을 주장하여 크고 작은 군사적 대립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양안의 군사충돌은 그 규모나 수에 있어서 점차 줄어들다가 1972년 미국의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여 양안의 평화를 촉구한 상해공보에 주은래와 함께 서명함을 계기로 양안의 긴장은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하였으며, 1979년 미ㆍ중수교 이후 실질적 군사충돌은 지금까지 발생되지 않았다.② 제2단계: 평화대치단계(1979년 - 1986년)??1979년 중국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발표한 고 대만동포서(告臺灣同胞書)를 통해서 '조국 평화통일'의 방침과 양안의 우편, 항공, 통상분야에 있어서 쌍방의 개방을 의미하는 '3통'주장과 동시에 무력으로 대만을 해방시키겠다는 기존의 주장을 일정기간 보류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또한 1981년 9월 30일 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는 대만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평화통일을 실현하자는 공식입장부터 현재)??중국 개방정책의 가속화에 따른 경제발전과 대만의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양안정세의 평화기류에 따라서 대만은 1987년 중국에 대한 문호를 개방, 양안교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1970년대 말 이후, 세계조류의 변화 역시 양안관계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되었다. 동서냉전의 완화와 미ㆍ중수교는 서태평양지역의 긴장완화로 이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양안간에도 화해무드가 자연스럽게 조성되기 시작하였다.??비록 대만정부의 공식적인 대륙정책은 아직도 여전히 비접촉, 비담판, 비타협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홍콩을 경유한 간접무역총액은 지난 1979년 7천7백만 달러에서 1993년 86억 8천9백만 달러로 급상승하여 14년 간 무려 100배 이상 성장하였으며, 1994년 1월에서 9월까지 70억 5천 8백만 달러(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약 10% 증가), 1993년 150억 9천3백만 달러, 1994년 160억 달러, 1998년 184억 달러, 간접수입총액은 41억 1천 1백만 달러, 대 중국투자는 모두 728건에 16억 1천 4백만 달러, 민간 소액 송금은 103,967건에 3억 5천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단순히 홍콩세관의 통계자료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욱 클 것으로 예측된다.??양안간에는 경제적 교류 이외에도 사회, 문화방면에 있어서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홍콩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88년에서 1994년 9월까지 대만시민의 중국방문자 수는 681만에 달하였고, 서신 왕래는 1988년에서 1994년 9월에 이르기까지는 9,400여만건에 달했다. 교통부 산하 국제전신국의 통계에 의하면 양안간 전화통화는 1989년 6월에 개통되어 1994년 9월에 이르기까지 1억 4천여만통, 총 사용시간은 4억 4천 3백여만分에 달하였으며, 전보는 40만여통에 달했다. 이러한 수치는 90년대 이후 더욱 증가하였다. 90년대 이후 대륙방문자수를 연도별로 나타내면 1990년 925,768명에서 1994년 1,150,000명, 1997년 1,것이며, 이는 양안관계의 장기적인 발전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다.??현재 양안관계는 근대사 이후 40여년 지속된 국공내전과, 상이한 역사적 경험, 정치·경제·사회제도, 의식구조로 인해 '나눌 수 없는 관계, 분명한 차이점'들이 현존하고 있다. 그중 정치적 변화는 양안관계에 있어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야당이었던 민진당의 후보였던 천수이볜은 당선후 '일국양제'에 의한 통일방안을 분명히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고, 중국 역시 같은 날 당중앙 및 국무원 판공실 성명을 통해 "대만의 지도자 선거와 그 결과가 대만이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며 천당선자의 말과 행동을 관찰할 것이라고 밝혔다.??2.양안관계의 정책① 중국의 대만정책현단계 중국의 대만정책은 1978년 이래로 강조하여 왔던 '평화통일, '일국양제'를 정책의 기본 틀로 삼고 있다. 일국양제의 구상과 발전은 대체적으로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1978년 소집된 제11차 삼중전회로서 중국은 양안의 통일이 기존의 무력사용원칙이 아닌 평화통일의 방법으로 이루어 져야함에 기본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둘째는 1981년 대만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평화통일을 실현하자는 상무위원회의 공식입장 표명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는 1984년 10월 15일 요망잡지에 실린 등소평의 통일방안이다. 그는 평화통일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써 '하나의 중국, 두 개의 제도'를 제시하였다. 이는 '일국양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정책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일국양제'는 일부에서 양안간에 현존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사회와 경제제도상의 차이, 사회주의 국가내에 자본주의를 허용하는 이론상, 법제상의 모순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일국양제'의 기본구상을 통해서 볼 때 '일국'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 중화민국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 대만은 하나의 지방정부가 된다. 이는 분명히 양안간 상호 평등한 입장에서 두 개의 제도를 운용하자는 취지는 아니다.?통일대만경제인의 대중국 투자확대를 통해 대만의 경제적 예속성을 가중시켜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것이며, 넷째는 양안의 교류확대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양안 문제는 외국이 간여할 수 없는 순수한 내정문제임을 확고히 함에 있다. 현재 중국의 정치상황으로 판단하여 볼 때 일국양제는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방안으로써 앞으로도 일정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러한 정책적 목표달성을 위해서 양안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을 승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며, 주권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② 대만 민진당의 중국정책과 양안관계 구상? 현 단계 대만 민진당의 양안관계 구상은 그 성격상 기존 국민당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국민당의 중국정책기조는 '하나의 중국'과 '3불원칙'(三不原則: 비접촉, 비담판, 비타협)고수를 통한 민주적, 점진적 통일방안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천수이볜이 당선됨으로써 민진당이 구상하여왔던 중국정책으로 대치될 것이다. 민진당은 대만의 정치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던 80년대 대만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며 탄생한 토착정당이다. 민진당은 창당에서부터 대만 본토화와 기존 국민당의 통치에 대한 강한 저항성을 지니고 출발하였다. 민진당의 정치주장과 양안관계에 따른 구상 역시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고 있다.??과거 양안관계를 처리하는 중국과 국민당의 기본적인 태도는 '대중화사상'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에서 출발하였다. 중국과 국민당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는 것 역시 '대중화사상'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의 통일관이다. 그러나 일부 혹은 대다수 대만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통일관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와 대만의 미래를 무시한 단순 정치논리로 생각되어 왔다. 민진당의 중국정책과 양안관계 구상의 기본은 민족주의 통일관이 아닌 다분히 대만본토와 사회구성원의 입장에서 출발된다. 기존의 '대중화사상'이 아닌 새로운 논리적 사고에서 의 미래는 대만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스스로 결정할 사안임을 강조하여왔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창당초기 민진당의 중국정책은 대만인들의 기본인권을 보호하고, 스스로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데 그 목적을 두고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민진당은 1988년 4월 제2차 전국대표대회 임시회의에서 통과된 결의문을 통해서 "대만은 이미 태평양지역의 지리적 명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대만의 국제지위 변동은 반드시 대만내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의 자주적 결의와 동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만약 국민당이 대만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통일논의를 한다면, 혹은 중국에 의한 대만통일이 구체화된다면, 혹은 국민당이 진정한 민주헌정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민진당은 당연히 대만독립을 추진할 것이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다음해인 1989년 4월에는 '현단계 중국대륙정책'을 발표하면서 "대만은 독립적 국제주권의 전제하에 양안관계의 각종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는 점, 1990년 10월 7일 제4차 전국대표회의에서 통과된 '1007 대만 주권결의문'을 통해서는 "대만의 실질적 주권행사 범위에는 중국대륙과 외몽골 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만의 미래 헌정체제와 내정, 외교정책은 반드시 사실상의 영토범위를 기준으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국민당이 주장하던 주권범위(중국과 이미 독립한 외몽골 지역포함)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중국에 현존하는 정권이 실질적으로 중국대륙을 통치하는 합법적 정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대만 역시 하나의 정치실체로 인정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현행 민진당의 양안관계 구상은 1991년 제5차 전국대표회의에서 결의된 '당강 기본강령 수정안'을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대만의 주권은 독립된 것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현실이다. 대만의 주권은 현실적으로 독립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새로운 헌법의 제정은 물론 법과 정치체제를 대만 사회현실에 부합다.
    인문/어학| 2011.05.22| 7페이지| 1,000원| 조회(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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