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와 이익창출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신화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 못했습니다.이번 서양문화사 수업시간을 통해 그리스신화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나 주변의 많은 것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영향을받았다는 것을 세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화가 과연 우리가소비하는 것들에도 많이 영향을 주었을까? 이익창출, 소비문화에 어떤 영향을주었는지 조사해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주변을 둘러보면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거나 이를 소재로 활용한 브랜드들이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랜드는 이익창출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대중에게 잘 알려진 신화의 상징성을 접목시켜 어필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친숙하게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중 략>현대도시와 올림푸스가 공존하여 인간과 신이 한 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포맷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판타지적 요소가 큰 작품입니다. 특징은그리스로마신화 속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 아니라 신화 속 인물들만을기초로 하되 현재 시대와 결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리스로마신화의 영웅들인 아킬레스, 헥토르, 헤라클레스 등이 아닌 새로운영웅을 현대와 맞게 창조하여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신들과 인간에서 태어난데미갓들 중 포세이돈과 아테나 자식 그리고 주인공의 수호신 그로버가 신들의 전쟁을막기 위해 모험을 펼치는 다소 유치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도시 모습과신들의 세계를 연결시켜 마치 지금 내 주변 어딘가에 올림푸스의 세계가 있을 것처럼느끼게 해주면서, 신화 속 캐릭터인 제우스나 포세이돈, 메두사 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여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80년대 영화는 처음 보는데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풍경과 영화의 전개과정이 신선하였다.영화의 시작은 보통 남녀의 연애 이야기와 비슷하다.영주와 세준은 서로 사랑을 하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 위해 세준의 집에 인사를 가는데 영주는 세준의 부모님께 잘 보이기 위해 긴장을 한다. 왜 항상 드라마나 영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자는 남자의 부모에게 죄인이 된 것처럼 긴장을 하고 꼭 잘 보여야한다는 모습을 비춰지는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께 좋은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여자는 큰 잘못을 한 사람같았다. 세준의 부모님이 영주를 보며 가장 먼저 물어본 말은 아버지께서는 무슨을 일을 하시냐는 것이다.세준의 부모님은 영주가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 영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전에 아버지에 대해 물었다.나 또한 얼마 전 학교에서 교육봉사자를 뽑는 면접에서 나에 대해 간단하게 질문을 한 뒤 아버지가 무슨일을 하시는지 질문을 받은 적 이있다. 면접을 볼 때 꼭 물어보는 질문은 아버지가 무슨일을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이다.하지만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은 받은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한다.아버지란 나를 낳아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어머니란 나를 낳아준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버지란 이런 사전적인 뜻 이외에도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고 ,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영화에서 또한 영주의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것에 대해 그녀는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느끼고 의식하고 있다.세준의 부모님은 영주의 어머니 과거를 조사하여 결혼을 반대하고 영주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충격으로 돌아가신다. 영주는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왜 이 모든 것이 영주의 잘 못일까? 여자 또한 자신감이 없고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그 당시 사회적인 배경 때문일지라도 여자는 죄인처럼 모든 일의 잘못의 원인이라고 하고, 세준과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기 위해 도망을 간다.남자 없이 여자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사회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자혼자 아이를 낳아 키운다고 하면 손가락질 부터하는 것. 전반적으로 사회에서 남자의 역할이 크다보니까 그 큰 역할을 하는 남자없이 여자혼자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비난하는 것 같다. 지금은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이라고 나누지않고 공평하게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정 속에서의 남자의 역할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회여러조직에서 여성의 활동성이 많아지면서 남녀가 평등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기초적인 조직, 가정에서의 남성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시 되고있는 것같다.아버지가 안계시거나, 여자가 이혼을 했을 경우 사람들의 시선을 아직까지 따갑다.세준은 영주가 아닌 다른 여자 정화와 결혼하여 살지만 정화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세준의 부모는 가문의 대를 잇기위해 영주를 찾아가 아이를 돌려달라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정화가 정말 너무 착한? 아니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세준과 결혼한 사람은 정화이다. 정화가 아무리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정화는 세준의 아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인다. 내가 만약 정화라면 세준의 과거 영주와의 관계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당연히 정화의 역할은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정화 입장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니 죄인 처럼 시댁의 뜻을 따라야 했다.영주는 고민끝에 아이를 세준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자신은 떠나려고한다.80년대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 영주는 남녀관계에서 항상 모든 잘못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능력을 갖추고 있는 여성임에도 그녀는 당당하지 못했다.요즘에 배우 김남주가 나오는 TV드라마에서도 직장을 다니며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시댁식구, 시어머니(시월드라고 표현함)와 생활하며 힘들어하는 모습과 ‘사랑하는 사람아’ 이 영화를 보며 걱정이 많아 졌다. 앞으로 사회생활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될텐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작고, 좁다.
생애 처음 본 오페라 카르멘수업시간에 오페라에 대해 배우기 전에는 오페라는 지겹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내가 즐기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들었던 오페라 음악 중에 귀에 익숙한 음악도 많이 있었고 재미를 느끼게 되어 이번 학기에 꼭 오페라 공연을 보고 싶었습니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오페라 카르멘을 보기위해 예매를 하고,10월 27일, 6시까지 전공수업을 듣고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오페라를 보러 갔습니다.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오페라 공연은 미리 그 내용을 다 파악하고 가야 된다고 하셔서 가는 내내 설레는 마음으로 카르멘의 내용을 찾아보며, 내 생애 처음으로 보는 오페라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오늘 오페라를 보러 간다며 자랑을 하니, “오페라 보다가 쿨쿨 자고 오는 것이 아니냐며 친구들이 다들 재미있을까? 오페라 지루하지 않아?”그런 말을 많이 들어 걱정이 되면서도 설렜습니다.공연장에 도착해서 자리를 찾아가 앉는데 제가 예매한 자리가 맨 앞자리 좌측 이었습니다. 제일 가운데 자리는 매진이라서 좌측에 앉게 되었는데, 우선 무대와 가까워서 좋았는데 무대와 객석 중간에 바닥이 들어간 공간이 있어 궁금하던 차에 공연이 시작되었고, 오케스트라가 거기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클래식 무대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위치하는데 객석과 무대 사이에 그것도 무대 밑에 있어서 너무 신기했습니다. 지하 밑에 있던 공간이 약간 위로 올라오며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연주 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신기했습니다. 금노상 지휘자분은 백발의 멋진 중년의 아저씨 이었는데 너무 멋있게 지휘하시는 모습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하시는 분들을 자세히 보면서 너무 신기해 한 분 한 분 살펴보았습니다. 녹음된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마다 연주 되는 모습은 흥미로웠습니다.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서 너무 신기했고, 연주자와 꼭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느낌 이었습니다. TV나 다른 매체를 통해 오페라를 볼 때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고, 내가 저 속에 쏙~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공연이 시작되고,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것은 웅장한 무대 이었습니다. 성악가 분들이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는 부르는 모습에 정말 성량이 대단하다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양 옆에 자막이 나와서 내용을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악가들이 그 캐릭터에 맞게 연기를 하며 노래는 부르는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여자 주인공 카르멘은 청순가련형의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매혹적이며 남자를 유혹하는 당당한 그 몸짓과 행동은 남자 주인공 뿐만 아니라 관객도 유혹하는 느낌이었습니다.특히 여자 주인공이 아바네라- 사랑은 제멋대로인 한 마리 새 라는 노래를 부를 때의 표정과 몸짓은 정말 매혹적이었습니다. 카르멘을 보기 전에 이 노래를 많이 들었는데 공연을 보면서 ‘아~ 이 노래가 여자주인공이 이런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구나!’ 오페라가 나와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2막에서 무대의 배경도 바뀌고, 술집이 나오는데 다른 집시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오페라에서 무용도 볼 수 있으며 종합 예술이라는 수업시간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페라서도 이렇게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매혹적인 여자 카르멘에게 빠져들어 어머니의 뜻대로 얌전하고 착한 고향 처녀 미카엘라와 결혼하려고 마음먹어 보지만 도저히 카르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돈 호세의 모습과 인기 투우사 에스카미요의 모습에서 주인공의 각각의 색깔을 느낄 수 있었고,3막에서는 집시들과 함께 밀수의 길을 떠나 산속에 머무르는 장면에서 무대 뒷 편에서 부터 서서히 걸어오면서 무대의 디자인이 변하는 모습이 정말 특이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제 전공이 디자인이다 보니 오페라를 볼 때도 그런 점을 유심히 보게 되었고, 4막에서 투우장 앞에서 투우사의 행진곡이 울려 퍼지면서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흘러 나왔고, 정말 신나면서 활기찬 장면이었으나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슬픈 음악에서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갑자기 끊임없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미 꽃 잎과 에스카미요와 카르멘이 팔짱을 끼고 나오는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주제 : 중국 및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건, 인물, 지역얼마 전에 우연히 영화 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청나라 12대 황제 푸이의 생애를 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또한 그의 삶을 보면 중국의 근대화 과정도 볼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보면 1908년 최고의 권력자인 서태후의 지명으로 광서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어린나이에 자금성으로 들어와 6세까지는 청나라의 황제로서 성장한다.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가 전까지 왕으로써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최고라고 생각하던 푸이는 신해혁명으로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하게 된다. 청나라가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어느 날 궁밖에 나간 푸이는 변화한 시대의 흐름을 보고 놀란다. 푸이의 동생이 “너는 왕이 아니야! 대통령이 있어!” 라고 말을 하면서 푸이는 세상 밖의 변화에 대해서 알게 되고 모든 것에 실망을 하고 좌절을 하게 됩니다. 이 신해혁명으로 푸이황제로 살아가는 삶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 후 1924년에 일어난 펑위샹(馮鈺祥 풍옥상)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추방과 함께 반역죄로 감시받는 신세가 되고, 푸이의 보좌로 일본군이 온다. 푸이는 마침내 일본군의 획책에 넘어가 신생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하고 푸이는 소련의 전범 수용소로 송치된다. 1950년 소련에서 중국으로 후송되지만 공산정권에 의해 10년간 재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식물원 정원사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 늙은 푸이는 자금성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서 내 집에 내가 돈을 내고 오다니 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황제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의 근대화 과정도 볼 수 있었습니다.이 영화에서 황제 푸이가 신해혁명으로 인생이 바뀌게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큰 변화가 시작된 혁명인 신해혁명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지 않아 수업시간에 신해혁명에 대해 배웠지만 그것을 더 조사해 보았습니다. , 봉건적 착취는 매우 가혹하였고 게다가 청조 정부가 매년 제국주의에 지급하는 배상금의 수량 또한 대단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민중에게 짐 지워져 민중들은 더 이상 살아나갈 도리가 없게 되었다. 때문에 민중의 반항투쟁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1910년 산동래양에서 군중성의 항연, 항조투쟁이 폭발했는데 참가자가 무려 5,6만에 달하였다. 그들은 반동적인 청조정부와 여러 달 동안 투쟁을 견지하였는데 그 밖의 각지에서도 여러 차례의 반항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당시, 전국의 민중들은 청조의 반동통치를 전복할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재, 반봉건의 애국운동은 왕성하게 발전해가고 있었다. 부패한 청조정부는 전국민중의 무수한 투쟁을 거쳐 이미 붕괴직전에 처하여 있었고 더 이상 그 반동통치를 유지해 나갈 역량이 없었다. 이른바 혁명의 형세가 무르익은 것인데 그것은 민족자산계급의 중하층으로 하여금 신속이 애국운동과 정치 사회운동을 추진하게끔 만들었다.*손중산의 혁명 활동신해혁명은 손중산이 영도한 것이다. 손중산은 자산 계습 혁명파의 대표 인물이며 근대의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 활동가이다. 그의 이름은 손문이며 광동성, 향산형, 취형촌사람으로 농민집안 출신이다. 그는 1866년 출생했는데 이 해는 태평천국혁명의 실패 3년째에 해당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태평천국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의 혁명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4년 여름, 손중산은 광동으로부터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에게 글을 올려 정치를 혁신하는 것에 관한 주장을 제시하였지만 뜻하지 않게 거절을 당하였다. 이홍장에게 상서가 실패하자 그는 북경 등지를 돌아다녔으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두가 부패 몰락의 양상뿐이었다. 당시 청일전쟁이 폭발하였는데 중국 군대는 전방에서 패배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부패한 청조정부는 도리어 대량의 금전화 재화를 낭비해가며 자의 태후의 60세 생일을 경축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생생한 사실들이 손중산을 교육, 그리 하여금 오 ‘민보’라고 불렀다. 민보는 한편에서는 혁명사상을 널리 선전하고 또 한편에서는 강유위 양계초등입헌파와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강유위 등은 1898년 무술변법 실패이후 여전히 보황을 견지하면서 군주 입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자본주의를 실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청조통치와 봉건세력을 보호할 것을 요구, 힘을 합해 혁명에 반대하고 혁명파괴 작용을 하고 있었다. 입헌파는 혁명에 반대하는 언론을 산포하하면서 혁명군중을 마비시킴은 물론 오히려 해독을 끼치려고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아래 중국동맹회는 입헌파와 투쟁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투쟁은 사실상 혁명과 반혁명의 투쟁이었다. 민보는 입헌파의 반동적 언론에 강력한 반박을 가하였고 혁명파의 영향은 날로 커져갔다. 동맹회가 성립된 다음 해에 동맹회 회원은 강서에서 그 지역 회당군중의 기의에 참가하였다. 또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동맹회는 광동, 광서에서 여섯 차례의 무장기의를 잇따라 거행하였다. 이러한 기의들은 광대한 민중과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청조정부의 통치에 크나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국의 민중에게 투쟁의 의욕을 고무시켜 혁명의 영향을 확산시켰다.이렇듯 손중산이 이끈 혁명당의 사건들은 요약해 보면 1894년 10월 홍중회 창설, 1986년 9월 삼민주의의 완전한 체계수립, 1950년 8월 20일 중국동맹회 성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신해혁명의 전개무창 기의와 남경 임시정부 수립1) 보로운동청조 정부의 통치는 날이 갈수록 엉망이었다. 그들의 통치 방식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굴복하는 자세였고, 대내적으로 온 힘을 다해 인민을 착취코자 하였다. 이것은 민족위기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기황을 가져다주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두 해 동안 기민의 폭동 항세가 빈발하였다. 이러한 폭동들은 청조 통치자를 무척 당혹케 하였지만, 그렇다고 적절히 대응하지도 못하였다. 청일 갑오전쟁 후에 청 정부는 철로건 1911년 10월말에 무창에서 기의를 일으키기로 준비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0월9일 손무라고 하는 한 혁명당인이 한구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잘못하여 폭파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기의를 영도한 비밀기관이 폭로되고 혁명당인의 명부는 청조정부에 의해 수색 당하였다.청조정부의 관리는 명부의 근거하여 도처에서 혁명당인을 수사하였다. 무창성에는 계엄이 내려져 자못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창성 안에 남아있던 신군 중의 혁명단인은 모두 당시 사람들로 그들의 나이, 용모, 주소 등이 모두 청군의 장부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도주할 수도 없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일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아래 무창성 내 신국 중의 혁명당인은 10월10일에 기의를 일으켰다. 그들은 함께 기의한 관병과 함께 그날 밤 군계국을 점령하고 창고를 열어 총탄을 꺼내 호광총독아문을 공격하러 갔다. 청조의 호광총독 단징은 혁명당인의 기의를 보고 간담이 서늘해져 뒷담 벽에 구멍을 하나 파서 담장 바깥으로 빠져나가 장간에 정박해 있던 군함을 타고 도망쳐 버렸다. 또한 그 밖의 일부 청군 장들도 소문만 듣고 도주하였다. 이리하여 기의군은 손쉽게 무창을 점령, 무창기의는 성공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청조정부가 부패 할대로 부패하여 어떤 지방에서든 조금만 손대어도 그대로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었다.3) 남경임시정부 수립무창기의가 성공한 뒤 기의군은 혁명정권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기의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으로 혁명당의 주요 수령들은 무창에 없었다. 특히 손중산은 외국에 있었는데 기의가 일어난 지 이틀 뒤 오후에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무창기의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혁명정권을 영도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기의군은 몇몇 지도적 인물을 찾아 담임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기의군의 대표는 몇몇 신사, 상인 및 청조의 관료들과 공동으로 호북군 정부를 조직하고 아울러 원래 신군의 협통 이었던 여원홍을 수뇌에 앉혔다. 여원홍은 본래 수한 3일간휴전과 만기 시 계속 1일 휴전 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회담에서 첫째, 청 정부를 타도한다. 둘째, 공화정체를 주장한다. 셋째, 구황실을 예우한다. 넷째, 인도주의로서 만주족을 대우한다는 등 이상의 4개 조항을 책정하였다. 동시에 임시대통령의 직책을 비워두고 원세개가 돌아와서 위임받도록 묵계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12월25일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29일 각성대표들은 남경에서 임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후보는 손중산, 황홍과 여원홍 등 세 사람이었고 회장에는 45명이 출석하였다. 개표결과 손중산은 16표로 민족, 민권, 민생주의인 삼민주의를 바탕으로 한 제 1대 대통령이 되었고, 혁명적인 남경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원세개의 등장과 반혁명으로의 전환무창기의가 폭발하자 청조 통치자는 급히 당시의 유력한 부대 북양군으로 하여금 진압에 나서게 하였다. 여기에서 원세개를 중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세개는 대 군벌로 일찍이 변법유신을 파괴하였으며 또한 의화단의 기의를 진압한 자로서 극도로 반동적인 데다 야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청조의 통치가 빠른 속도로 무너져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혁명당이 승리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혁명의 성과를 약탈하여 정권을 자기의 손안에 거머쥐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청조의 토벌 명은 행해지지 않고 영국의 중재로 화평이 획책되었다. 열강측이 압력을 가하고, 많은 지방에서 실권을 장악하여 혁명정부의 내부에 숨어들어간 입헌파의 책동도 있었으며, 또한 혁명파 내부의 대립도 있어서 혁명군은 북벌을 중지하고 남북화의가 진행되었다. 원세개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대총통의 지위를 탈취,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 정부를 조직하였다. 즉, 원세개는 청나라의 퇴위를 실현시켰고, 1912년 2월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퇴위조를 내림으로써 268년 걸친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다음날 손중산은 사직했고 원세개가 임시대총통으로되었다.
「프랑스 명품문화와 우리나라 명품문화」‘프랑스’라는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머릿속에 몇 개의 이미지들이 떠오른다.건축에 있어서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구스타프 에펠(Gustav Eiffel)'을 빼놓을 수 없다. 음악에서도 특히 샹송은 프랑스 대중음악으로서 뿐 아니라, 현대음악의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미술에서는 ‘반 고흐(V. Van Gogh)’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와인과 치즈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식탁 예술 또한 가장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된다.‘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나 '볼테르(Voltaire)'부터 실존주의의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현대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철학자들이었다. 두터운 팬을 가진 프랑스영화 등 이렇듯 건축, 음악, 문학, 미술, 음식, 철학, 영화 등에 이르는 방대한 분야에서 프랑스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의 문화발전이 앞선 이유는 개방성이라고 생각된다. 일찍부터 문화나 모든 분야를 개방함으로써 다양한 분야의 발전이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그리고 ‘프랑스’하면 떠오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명품이다.명품이라고 해서 여자들이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의류, 가방, 신발 등을 말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명품은 이미 경제의 의미와 국가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산업이다.흔히 우리가 명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유명한 디자이너의 제품 혹은 브랜드를 말한다. 그리고 주로 유럽(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브랜드들을 말한다.명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수 백 년 전부터 왕족과 귀족들만을 위해 제작한 일급 장인들의 손길이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다. 이렇듯 명품은 오랜 시간동안 철저한 장인정신과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역사라도 불릴 수 있다. 프랑스 국가의 귀족적 이미지, 깊이 있는 장인 정신이 상징하는 서구화 귀족주의와 상통할 수 있겠다 하겠다. 프랑스의 명품은 국가의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프랑스 전체 산업으로서 10%도 안 되는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적 가치를 지녔지만 프랑스를 알리는 첨병적 역할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조사에서는 첨단 전자 장비인 휴대폰의 1대 판매 경제 효과보다도 사치성 소비재인 루이뷔통 지갑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더욱 크다는 조사도 나와 있다. 그들의 차별화 전략과 고급화 전략 그리고 브랜드 관리의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실례로 세계적 브랜드가 된 삼성전자 휴대폰의 브랜드 관리 전략은 프랑스 명품회사에서 그 역할 모델을 삼았다. 프랑스를 상징할 만한 것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그런 브랜드의 가치로 국가의 가치도 높아지므로 명품은 단지 패션으로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미지 상승에도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프랑스의 명품브랜드들은 모두가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다.첫 번째, 접근성의 제한이다. 최고급 브랜드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때는 최고급 브랜드였건 것이 어느 날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어버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 원인은 대부분 매출 증가를 위해 브랜드의 희소성을 깨뜨려 버린 데에 있다. 명품은 가격보다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명품의 판매 전략인 것이다.두 번째, 브랜드의 차별성이다. 최고급 브랜드는 포멀하면서도 격식있는 상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루이뷔통이나 샤넬은 면 티셔츠에 독특한 캐릭터를 붙여서 그 차별성을 강조한다. 이들 브랜드의 티셔츠는 고급 양벌 한 벌 값을 웃돌지만 차별성을 강조하는 소비자들은 독특함을 위해 기꺼이 비싼 가격을 지불한다.마지막으로, 브랜드의 일관성이다. 고객으로부터 선택되는 최고급 브랜드들은 이미지를 수십년 혹은 100년 이상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최고급 브랜드들은 대중적 브랜드에 비해 매출 규모면에서나 광고비 등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 투입되는 비용에 있어 훨씬 뒤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드의 인지도가 높고 정체성이 잘 확립되어 있는 이유는 브랜드 전략에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프랑스의 명품은 단지 예쁘고, 멋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명품이 유명하고 그 나라를 대표할 만한 것으로 생각되는 반면 우리나라의 명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장인들의 손길이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왜 우리나라의 명품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하는 것일까?한국산 제품이 뛰어난 품질에도 불구하고 명품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문화적 이미지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브랜드 중에 사람들이 기꺼이 거금을 지불하여 구매하고자 하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있느냐하는 사실이다. 오늘날 메이드 인 코리아를 달고 해외로 진출한 브랜드와 그들의 제품은 세계 유명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품질이 우수하다. 이들은 디자인, 유통망, 마케팅 능력,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한국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 어느 것도 럭셔리 브랜드로는 자리잡지 못했다. 그것은 브랜드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품 브랜드가 갖고 있는 품질과 기능만이 아니라, 그 브랜드들의 전통과 이미지를 함께 구매하는데, 사람들을 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력, 이것이 바로 브랜드 특유의 광채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의 브랜드 제품들을 부러움과 질시라는 이율배반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요즘같이 어려운 때야말로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을 키우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고유한 가치를 심도있게 들여다봐야 할 때이다. 세계적인 브랜드로의 도약은 그 주체가 대기업이든, 소규모 업체이든 해당 기업이나 브랜드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총체적인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럭셔리 브랜드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럭셔리 브랜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점을 모색한다면, 불황을 모르는 명품산업계에 당당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 명품은 문화는 분명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을 전하는 기술과 전략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앞에 말했다시피 프랑스는 일찍부터 개방함으로써 그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었고, 우리나라는 그 개방성, 전달하는 기술이 부족한 것이다. 훌륭한 문화가 존재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프랑스는 그런 점에서 훨씬 앞서나가고 있고, 문화를 어떻게 전달해야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만의 장인문화라고 하여 세계적으로 퍼져 유명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