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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유네스코유산에 담긴 수학(수학의산책 A+) 평가A+최고예요
    학과경영학과학년21. 어떤 유산을 찾았나요?(구체적으로 나타내시오-사진 첨부 가능)제가 선택한 주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무형유산가운데 하나인 ‘종묘 제례악 - 정간보’입니다. 종묘제례악은 2001년도에 종묘제례와 함께 제일 먼저 등재되었습니다. 그만큼 종묘제례악은 세계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중에도 첫 번째로 올라가 있습니다.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가 이루어지는 동안 연주되는 음악으로 기악, 노래, 춤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음악은 각각의 절차에 따라 ‘보태평’과 ‘정대업’(설명은 아래에)이 한국의 전통 악기로 연주되며 편종, 편경, 방향과 같은 타악기가 주선율을 이루고, 여기에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의 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더해집니다. 이 위에 장구, 징, 태평소, 절고, 진고 등의 아 끼가 더욱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종묘제례악은 그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구사합니다.이런 종묘 제례악도 조선 전기까지는 중국 음악을 가져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음악을 완전히 한국식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잇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종은 한국적인 미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고려로부터 전래된 ‘청산별곡’이나 ‘서경별곡’같은 고려 가요 선율을 이용해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현 종묘제례악의 모태가 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5곡입니다. 종묘 제례에서는 이 두 모음곡이 연주됩니다.제가 주제로 잡은 내용은 지금부터 나오게 되는 ‘정간보’입니다. 세종은 앞서 이야기한 ‘보태평’과 ‘정대업’의 전승을 위해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하였습니다. 이 정간보는 동양 최초로 음높이와 리듬을 동시에 표기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리듬을 적은 오선보가 13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우리와 크게 다를게 없다는걸 증명하는 것입니다.2. 찾은 소재 안에 어떤 수학적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나요?음악의 기본적인 속성, 즉 음악의 구성요소는 일반적으로 ‘음의 높낮이’, ‘음의 길이’, ‘음의 세기’, ‘음의 빛깔’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음악의 구성요소를 총체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기보 방법의 문제이자 주된 목적입니다. 또한 이 중 부차적인 요소를 따지자면 음의 세기와 음의 빛깔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선율(음악)을 이루는 주요 구성요소가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이기 때문입니다. 음의 빛깔과 음의 세기는 선율의 장식적, 변화적 요인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고 선율의 가장 중요한 골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음의 높낮이와 음의길이입니다.당시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아악을 기록하는 악보가 있었으나 아악은 음의 길이가 같기 때문에 음 높이만 기록할 수 있을 뿐이었고, 향악은 음의 길이가 서로 달라 아악의 악보만으로 향악을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세종은 우리말을 기록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듯이, 우리 음악을 기록하기 위하여 정간보를 만들었습니다.정간보는 훈민정음의 창제에서 얻은 여러 가지 이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정간보는 한행(한 줄)을 32정간으로 긋고, 한 정간(한 칸) 속에 12율명을 적는 방법으로 기보합니다. 정간보의 구성은 훈민정음의 글자 조합 원리와 같아서 ‘3정간-2정간-3정간’이 모여 ‘8정간’을 이루고, 각각은 ‘하늘-땅-사람(천지인)’을 상징합니다. 8정간은 또 4개가 모여 32정간을 이루게 되는데, 각각의 8정간은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합니다.정간보의 네모 칸에는 ‘음의 높이’를 나타내는 문자나 기호를 적어 해당하는 ‘음의 길이’를 표기하였습니다. 세종 시절의 정간보는 32정간이 1행이고, 1정간은 1박에 해당하며 각 정간에는 율명의 첫 자만 기록하여 ‘음의 높이’를 나타내었습니다.자 그럼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정간보의 수학적인 내용은 정간보의 ‘기보법’입니다. 쉽게말해 악보를 쓰는 법으로써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종은 ‘음의 길이’, ‘음의 높이’를 기록하는데 수학적 방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음의 길이를 기록하는 방법1) 정간 단위의 음의 길이- 정간보의 ‘한 정간(□한 칸)’은 ‘1박’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2정간’은 ‘2박’, ‘3정간’은 ‘3박’을 나타냅니다. 1박을 나타낼 경우에는 2분박이나 3분박에 상관없이 정간의 정 중앙이나 위쪽에 표기합니다.2) 정간 내에서의 음의 길이- 정간 내에서의 음의 길이는 한 정간 안에 몇 개의 음이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음표의 길이’가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작은 두 부분이 모여 1정간을 이루는 법(½+½=1정간)과 세 부분이 모여 1정간을 이루는 법(⅓+⅓+⅓=1정간)으로 나눕니다. 앞의 것을 ‘두쪽 1박꼴(2분법)’, 뒤의 것을 ‘세쪽 한박꼴(3분법)’이라 명칭 합니다.3) 음의 길이를 변화시키는 부호- 정간 내에서 율명의 옆에 표기하여 음의 길이를 변화시키는 부호들은 ‘덧길이 부호(|)’, ‘반길이 부호(·)’와 음의 연장을 나타내는 ‘연장부호( ㅡ )’가 있습니다.- 덧길이와 반길이특정 음의 길이가 동일하지 않을 때 이를 구분하기 위한 표기 방법으로, 율명의 좌우측에 덧길이표와 반길이표를 사용하여 나타내는데, 두 기호는 항상 함께 사용해야 합니다.
    학교| 2017.06.27| 5페이지| 1,500원| 조회(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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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T와 Caltech에 대한 분석(엠아티이와 칼텍)
    MIT와 Caltech※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즉 MIT는 남북전쟁을 전후해서 미국 사회가 새로운 공업 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 1861년에 설립인가를 받아, 1865년에 개교를 한 미국 명문대학 가운데 하나이다.이 대학은 1916년 학교의 위치를 보스턴에서 케임브리지로 옮길 때까지는 '보스턴 텍'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한때 하버드 대학이 이 MIT를 흡수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초창기부터 MIT에서는 공학과 기초과학 사이의 균형 문제가 연구중심의 공과대학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주요 난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물리화학과 화학공학 사이의 대립은 좋은 한 예라 할 수 있다.20세기초 MIT의 화학과에는 서로 대립하던 두 개의 연구소가 있었는데, 1903년에 설립된 아서 노이즈의 물리화학 연구소에서는 수준 높은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서 1908년에 설립된 윌리엄 워커(William H. Walker)의 응용화학 연구소에서는 대학과 산업체 간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다.당시에 화학공학 분야는 아직 독립된 학과로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워커와 노이즈는 학과의 운영 문제를 놓고 서로 충돌했다.처음에는 물리화학 분야가 화학공학에 비해 대학 내에서 영향력이 컸으나, 1910년부터 역전되기 시작하면서 대학 내에서 워커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인해 독일의 화학 원료 공급이 중단되고, 이에 따라 미국의 각 기업체들은 독자적인 연구를 강화해야 했으며,이에 따라 화학공학 쪽의 계약과제가 엄청나게 증가했던 것이다.워커와 노이즈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지만, MIT 본부에서는 두 프로그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둘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어, 마침내 1919년 봄 워커가 당시의 맥로린(Richard C. Maclaurin) 총장에이런 상황에서 1920년 맥로린 총장이 갑자기 죽고, 워커가 그 권한대행을 맡게 되면서, 잠시 MIT는 워커의 시대가 된다. 그러나 워커가 행한 산업체와의 마구잡이식 계약 방식과 그의 독재적인 관리 스타일에 대해서 교수진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여, 대학운영위원회는 1921년 1월 워커를 사임시켰다. 워커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MIT에서는 산업체와 연결이 계속 강화되어 갔다. 1920대초에 10만 달러였던 용역 과제가 20년대 말에는 무려 27만 달러로 약 3배 가량 증가했으며, 또한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 1854~1932)을 비롯한 산업가들이 낸 기부금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이 기간 동안 MIT는 아주 부유한 사립대학으로 발전했다.하지만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를 경시하고 지나치게 산업적 연구를 편중한 데에 따르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즉 기초연구 분야 교수들의 이탈 현상이 나타나면서 대학의 명성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혔다. 또한 대학교수들의 수입의 약 절반이 외부의 산업자문이나 연구에서 얻어져서, 대학이 마치 교수들의 대학교육 외적인 돈벌이를 보조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연구주제의 선정과 특허문제에 있어서도 산업체로부터 간섭이 심화되어 대학의 자율성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결국 1920년대에 MIT가 이루어 낸 산업적 연구의 성공은 기초과학을 희생시키고 심각한 행정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면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1920년대에 MIT가 산업적 연구에 열을 올리고 기초과학 분야를 경시하고 있는 동안 이 틈을 비집고 비약적으로 성장한 공과대학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즉 칼텍이었다.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칼텍은 '스룹공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한해에 약 10여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건물 한 채뿐인 작은 학교였다. 이 대학은 목재왕인 아서 플레밍(Arthur F정적으로 바랬던 헤일은 자신이 건설한 윌슨산 천문대와 협동적 연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룹공과대학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우선 MIT에 있던 노이즈와 시카고에 있던 로버트 밀리컨을 캘리포니아로 불러오려고 노력했다. 이 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학문적으로 서로 조화가 가능했던 인물들이었다. 즉, 그들은 우선 같은 나이 또래였으며, 인종적으로는 북유럽 계통이었고, 계층적으로는 상류사회 출신이었으며, 헤일의 협동연구 및 학제간 연구에 동감하던 사람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국립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라는 조직을 통해 밀접한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국립연구회의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헤일이 국방연구를 도울 목적으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해서 만든 국립과학아카데미 소속의 민간단체였는데, 전후 이 단체는 록펠러와 카네기 재단을 비롯한 공익재단으로부터 돈을 얻어내어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단체로 변신하게 된다. 즉, 이 단체는 양차대전 사이에 오늘날의 미국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1917년 1월 게이츠의 기부금으로 '게이츠 화학연구소'(Gates Chemical Laboratory)가 스룹공과대학에 세워지고, 1919년 워커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뒤 MIT를 떠난 노이즈가 소장을 맡게 된다. 이때 노이즈의 건의로 학교 명칭을 동부의 MIT에 필적한다는 의미에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IT)으로 바꾸었다.※ 칼텍의 비약적인 성장다음으로 헤일은 유적 실험으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밀리컨을 임용하기 위해서 미국 교수 임용 사상 전대 미문의 방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밀리컨에게 물리학과 학과장 자리를 주고, 당시 다른 대학 최고급 교수의 두배에 해당하는 초특급 봉급을 주기로 약속했다. 또한 은퇴한 의사인 브리지가 기증한 노먼 브리지 물리학연구소(Norman Bridge Laboratory of Physics) 건물 1는 '칼텍 후원회'(California Institute Associate)를 조직했다. 그 내용은 1년에 약 1,000 달러씩 10년 동안 후원해주면, 대학에서는 그 보상으로 대학의 강연을 포함한 각종 행사들에 그 사람들을 초청해 주는 것이었다. 이 후원회는 불과 1년만에 정원을 다 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이 낸 매년 10만 달러의 기금은 약 2백만 달러의 증여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공학과 기초과학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MIT와는 달리 칼텍에서는 기초과학과 공학 분야가 처음부터 탄탄한 연결을 가지고 진행될 수 있었다. 또한 1920년대에 록펠러 재단의 위클리프 로즈(Wickliffe Rose)가 내건 각 대학에 대한 연구지원 정책은 "가장 높게 발전한 분야들을 더 높게"(Making the peaks higher)라는 것이었는데, 소수 정예를 내세운 칼텍은 이 정책에 가장 합당한 조건을 갖춘 대학이었고, 실제로 물리과학 분야와 천문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비를 얻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헤일은 1925년 생물학과를 맡을 적임자로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에게 접근했다.당시 컬럼비아 대학에 있던 그는 초파리 연구로 유명한 유전학의 대가였다. 헤일을 그를 집요하게 접근해 결국은 임용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 역시 물리학, 화학과의 협동연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또한 지역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부 지역과의 긴밀한 연결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H.A. 로렌츠(1921~23), C.G. 다윈(1922~23), P. 에렌페스트(1923), C.V. 라만(1924), A. 좀머펠트(1928), A. 아인슈타인(1931~2)과 같은 유럽의 우수한 과학자들의 초빙해서 연구와 강의를 하게 하였다. 이런 우수한 연구조건 속에서 칼텍은 짧은 시간 내에 우수한 학생과 연구자를 모으는 데 성공하여, 마침내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된다.< 라이너스 폴링 (Linus Pauling, 1901~1994) >밀리컨이 이끄는 물리학 분야에서격 이후 미항공우주국가 설립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결국 1930년대에 이르면 칼텍이 모델로 했던 MIT오 히려 칼텍을 본받으려고 하는 역전현상이 벌어진다.※칼 컴프턴의 MIT 개혁(PPT 사진은 부시(공대학장&부총장)와 칼 컴프턴)칼텍의 비약적 성장을 목격한 MIT에서도 30년대에 이르러 강력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930년 7월 1일 당시 프린스턴 대학 물리학과 학과장이었던 칼 컴프턴(Karl Taylor Compton, 1887~1954)이 42세의 젊은 나이로 새로운 MIT의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컴프턴 효과로 유명한 아서 컴프턴(Arthur H. Compton)의 형이었는데, 1930년부터 1948년까지 무려 18년간 MIT에서 총장으로 있으면서, 오늘날의 MIT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컴프턴은 취임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기였기 때문에 대학의 산업체로부터의 연구용역이 급격히 감소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컴프턴 총장은 기업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후원자를 물색했다. 연방정부는 기업을 대신할 새로운 후원자로 떠올랐고, 컴프턴 총장은 1933-35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과학자문위원회(Science Advisory Board) 위원장을 맡으면서 연방정부에 접근했다.컴프턴은 우선 대학본부가 단위 연구소들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던 산업적 연구용역을 산업협력부(Division of Cooperation)라는 단일 부서로 통합하고 총장이 직접 통제하게 만들었다. 또한 교수들의 임용과 승진, 포상에 있어서 독창적 연구에 우선권을 주고, 과도한 자문활동에는 불이익을 주는 식의 가이드라인을 채택하여, 교수들로 하여금 과도한 자문활동을 하는 것을 지양하고 높은 수준의 독창적 연구와 교육에 힘쓰도록 유도했다.또한 기업이 비밀로 요구하는 계약과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높은 간접경비(overhead charge)를 물려서, 이 기금으로 기초과학 분야의 교수들을 포함한 대학의 모든 교수들을 공평하게 지원했다환했다.
    학교| 2017.06.27| 10페이지| 1,500원| 조회(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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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 아리스토텔레스 분석
    목 차Ⅰ. 아리스토텔레스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 「정치학」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의의Ⅱ. 마키아벨리의 국가철학 - 현실주의 정치사상1. 마키아벨리가 본 인간의 본성① 마키아벨리의 부정적 인간관② 정치기술과 국가의 필요성③ 마키아벨리의 이중적인 인간관2.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 - 서양 근대 정치사상의 시작(도덕.종교.윤리와 정치의 분리)Ⅰ. 아리스토텔레스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 「정치학」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의하면, 언제 어디서나 복지(福祉)의 요체는 '행동의 목표와 목적을 올바르게 정하는 것'과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목적인 좋은 생활, 즉 ‘행복’이란 윤리학에서 정의하기를 완전한 수준과 절대적인 방식으로써 ‘선’을 실천하는 것과 그 ‘힘’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선하고 행복한 사람은 그 자신의 선의 본성에 의해서 절대적인 이점들을 바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국가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들을 기반으로 그 국가의 통치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선을 좇아 선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국가 또는 정치공동체는 이러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성립된 ‘생활공동체’이며, 다른 생활공동체 중에서도 최고이며 ‘큰 정도의 선’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이런 국가의 기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적으로 가정을 들고 있다. 인간은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결합이 필요한데, 이 결합의 기초는 가정인 것이다. 가족은 원래 사람들의 일상 필수품 보급을 하기 위하여 성립된 공동체이나 다수의 가족이 모이면 취락이 되고, 몇 개의 취락이 제법 자급자족할 수 있을 만큼 큰 단일체인 완성된 생활공동체로 결성될 때 비로소 국가가 나타나는 것이다.이처럼 국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앞서며 개인은 고립되어있을 때에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완전한 경우에 가장 훌륭하지만 법이나 정의로부터 이탈하는 경우에는 최악인 것이므로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임을 명백히 증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가정에서 나아가, 국가는 한 차원 더 높은 공동선을 추구하며, 인간은 이러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완전해지는 정치적인 동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국가에서 이러한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좋은 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와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플라톤의 이상사회에 반해, 자기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이 이상사회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현실적인 영역에서의 정치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면서 인간의 ‘본성’을 잘 이용해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다.또한 플라톤은 덕이나 예에 의한 ‘인치’를 주장하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치’에 의한 법적 안정성을 강조한다. 이는 ‘소수정’이라는 독단적 통치자로부터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다수정’ 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를 통해서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면서 독재적인 권력의 문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풍부한 ‘중용’에 관해서 언급한다. 사적이익이 지배하지 않도록 ‘제도’와 ‘법’ 그리고 ‘교육’으로 조화시키고, 민주주의는 혼합적인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용의 덕’을 통해 극단으로 가는 것을 막고, 과두정치와 빈민정치를 혼합하여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정치 이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란 현실정치에서 삶에 ‘좋음’을 주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치학」은 최선의 정치질서를 고려하고, 그처럼 이상적인 상태에 가기 위해 가져야할 성질들에 대한 고찰이다.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의의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로 학문의 분류를 시도했다. 그는 ‘실천적인 것’, ‘창작적인 것’, ‘이론적인 것’의 세 가지로 지식을 분류하였다. 분류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과학을 세분화하고 정치학을 독자적인 개별적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실천적인 것으로 ‘정치학’과 ‘윤리학’ 등을 두었다. 그에게 있어 정치학은 국가 내에서 ‘좋은 삶’(a good life)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한 개인이나 국가에 있어서 ‘좋은 삶’(a good life)은 부분적으로 실현되기 힘들기 때문에 좋은 삶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학은 총체적인 학문의 성격을 띤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통해서 우리는 이전의 많은 사회과학적 업적과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정치학이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사회과학으로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우선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경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보다 본질적으로 ‘인간본성에 관한 철학’을 완성시키기 위해 쓰여졌으며, 정치학에 관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이전의 학문을 검토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이전의 학문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서 정치학을 새로운 사회과학 분야로 개척하고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Ⅱ. 마키아벨리의 국가철학 - 현실주의 정치사상1. 마키아벨리가 본 인간의 본성① 마키아벨리의 부정적 인간관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직접 검토하기 전에 미리 살펴야 하는 것은 바로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이다.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은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에 깊은 토대가 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자인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고 이득에 눈이 어둡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받는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주저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팽개쳐 버린다.’‘더군다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 인간이 모든 것을 바라는 힘과 욕망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으나 운명으로부터는 욕망을 성취할 힘을 적게만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언제나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얻은 것에 대해 언제나 실망한다.’결국, 미키아벨리에게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무한히 확장하는 욕구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의 무한성과 충족수단의 유한성으로부터 결국 공격적인 경쟁과 분배 투쟁을 수반하는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둘은 모두, 부정적 인간관으로부터 자신의 정치사상을 도출해내는 것이다.② 정치기술과 국가의 필요성그렇다면, 부정적 인간관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먼저, 군주가 한없이 선할 수만은 없으며, 때로는 부도덕한 정치기술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수많은 평화조약과 협정이 신의 없는 군주들에 의해서 파기되고 무효화되어 왔다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악한 자들만이 존재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군주가 선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미움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국가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건설하고, 법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악하고 또 그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항상 악한 본성을 나타낼 것이라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고 본다.또한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분명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약속을 맺은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인간본성론과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주는 부도덕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두 번째로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공격적 본성을 제압할 수 있는 ‘외면적 강제장치’가 필요하다는 도출한다. 질서와 이성은 국가라는 ‘외면적 강제장치’를 전제하는 것이며, 좋은 정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한계를 설정하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법과 권력을 확립하는 정치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부정적 본성에 근본적 의미와 실체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서, 국가. 법. 권력. 정치의 강제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는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이렇게 건설된 국가는 자연상태를 극복하여, 외적의 침입과 인간 상호간의 침해로부터 만인을 보호하여 안전을 확보하여 준다.’고 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③ 마키아벨리의 이중적인 인간관이 때, 마키아벨리의 인간본성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고 보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인간학은 주어져 있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표출되는 위기의 상황에서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에 의해 질서가 안정된 상황에서의 인간은 선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고대로마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으면서, ‘지배자가 존경을 받고 명예의 영광을 차지하며, 민중의 삶은 사랑과 신뢰로 가득차는’ 사회를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통제장치(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일정한 통제장치만 마련된다는 인간은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인간은 그 본성상 그들이 받은 은혜는 물론 베푼 은혜에 의해서도 유대가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들이 가난과 굶주림이 인간을 근면하게 만들고, 그리고 법은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 운좋은 환경이 선을 통제가 없이 가능하게 한다면, 법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의 영향이 부족하다면, 법은 즉각 필요하다. 그들(군주와 인민)의 행동에 있어서 차이는 그들의 본성에서의 차이 때문이 아니고,(왜냐하면 그들의 본성은 동일하며, 만약 선에 대한 어떠한 차이가 있다면 인민이 더 선하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지켜야하는 법에 대한 존경심이다.
    학교| 2017.06.27| 7페이지| 1,500원| 조회(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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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마이닝을 이용한 재고관리(A+과제)
    데이터 마이닝을 이용한 재고관리에 관한 사례연구 CONTENTS 01 _ 사업 환경 02 _ 데이터 마이닝 03 _ 통제 계획 04 _ CASE 05 _ 결론 06 _ Q A 1. 사업 환경 01_ 사업 환경 최근 기업의 동향 수요에 대한 신속한 대응 02_ 데이터 마이닝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고객관계관리 (CRM) 수요 예측 필요 ⇒ 물류 관리 시스템 구현 필요 구매 패턴 전달 도구 결정 → 고객과 제품간 연관성 분석 가능 01_ 사업 환경 02_ 데이터 마이닝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 데이터 마이닝 ’ 기법 적용 각 제품 사이의 종속적 관계를 고려한 재고관리 방안 다양한 종류의 많은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에서 매출 증대를 위한 방안 각 제품 사이의 판매관계를 고려한 재고관리 방안 - 각 제품의 종속적 관계는 과거 고객 주문 정보를 데이터마이닝 기법에 적용 , 연관성 분석에 따라 추출 - SAS enterprise Miner 사용 01_ 사업 환경 02_ 데이터 마이닝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2. 데이터 마이닝 02_ 데이터 마이닝 데이터 마이닝 (Data Mining) 데이터속에 숨겨져있는 패턴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함 01_ 사업 환경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통계학 인공지능 → 유용한 지식 추출 , 의사결정 도움 데이터 마이닝 (Data Mining) 과정 선택 정제 변환 마이닝 패턴 평가 지식 표현 02_ 데이터 마이닝 01_ 사업 환경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데이터 마이닝 (Data Mining) 과정 마이닝 군집화 연관규칙 인공신경망 의사결정나무 → 다양한 알고리즘으로 이용가능 02_ 데이터 마이닝 01_ 사업 환경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연관규칙 (Association Rules) → 데이터간 연관성에 따른 세분화과정 → 연관규칙은 ‘If X then Y (X→Y )’ 02_ 데이터 마이닝 01_ 사업 환경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연관성 분석 (Association Analysis) 지지도 (Support) 신뢰도 (Confidence) 향상도 (Lift) → 각 항목의 연관성 및 종속성 평가 02_ 데이터 마이닝 01_ 사업 환경 03_ 통제 계획 04_ CASE 05_ 결론 06_ Q A 지지도 (Support) → 전체 거래항목 중 두 품목을 동시에 구매 한 거래의 비율 → 지지도는 상호 대칭적 ‘ B ⇒ A ’ 의 지지도와 같음 ( B 를 구입하면 A 도 구입한다 ) ‘A ⇒ B’ 의 지지도는 ( A 를 구입하면 B 도 구입한다 ) 지 지 도 = 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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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요타의 리콜사태 - 마케팅전략
    Toyota Recalls도요타는 관련 경영서가 수십 권에 달할만큼 품질경영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기업이다. 도요타만의 생산방식을 ‘TPS’라고 이름붙여 품질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는데, 2010년 미국에서의 가속페달 결함 차량에 대한 리콜을 시작으로 품질경영에 대한 막대한 이미지 타격을 입었다. 도요타의 품질경영, 리콜사태, 그에따른 도요타의 대응 등을 알아보자.Ⅰ.도요타의 생산방식(TPS)이란?도요타 생산방식. 20세기 초 헨리 포드에 의해 완성된 대량생산방식이 개성과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최근의 시장 여건에서 더 이상 먹혀들지 않으면서 개발된 도요타 자동차의 독창적인 시스템. 이 생산방식은 질(質), 양(量), 타이밍의 조화 속에 철저한 원가절감을 실현함으로써 오일쇼크와 엔고파고 속에서 위력을 발휘했으며, 도요타자동차는 이것을 개발·도입한 덕분에 1인당 부가가치 1800만엔, 총재고일수 3일, 생산리드타임 10시간이라는 기록을 달성해 세계 산업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Ⅱ.도요타 리콜 사태의 경과세계 최고의 품질, 안전, 협력업체, 위기관리 시스템을 보유한 도요타가 위기에 직면한 이유는 성장통과 대기업 병이 만연하면서 문제 해결의 민첩성이나 유연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초기 대응 미숙으로 사상 최대의 리콜 사태 유발당시 대규모 리콜은 도요타의 위기관리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오작동하고 차량 결함의 근본 원인규명이 지연되면서 발생했다. 도요타의 급가속 문제는 2002년부터 보고되어 전미고속도로 교통안전국(NHTSA)과 도요타가 자체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뚜렷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바가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도요타가 충분한 자료를 NHTSA에 제공하지 않았는지, 도요타의 로비로 인해 NHTSA가 충분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도요타 최고경영자도 인정했듯이 사태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도요타 차량의 급가속 문제는 1999년부터 발생했다.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져 있을 때다. 또한 자동차 기술을 대표하던 닛산21’ 계획을 공표했다. 경기 침체에서 막 벗어나 어려움에 처해 있던 당시 세계 1위 자동차 기업 GM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이후 GM은 서서히 침몰해 갔으며, 도요타의 위기 역시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도요타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판매를 배증해야 했고, 다수의 신차종을 개발해 출시해야 하는 부담감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타는 막대한 누적 순익을 바탕으로 연구개발투자를 확대해 친환경차의 대명사인 하이브리드자동차의 기술과 세계시장을 선점해 나가고 있었다. 단지 유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수요는 부진했다.당시 도요타는 정보기술의 도입을 적극 추진햇다. 리콜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전자제어 장치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장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도요타는 매출신장을 위해 신차 개발 기간을 대폭 단축하였고, 이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비용도 절감해 나갔다. 그러나 도요타의 급가속 문제는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엔고에 시달리던 도요타는 해외공장 건설을 통한 세계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였다. 도요타가 2002~2007년 중 300만대 이상의 해외 생산능력을 확충ㅎ라면서 도요타의 신화, 특히 3현 주의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엇다. 해외 생산의 확대는 해외 인력의 확충으로 이어졌다. 지속적인 개선과 인적자본을 중시해 온 도요타의 철학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품질은 사람의 손끝과 마음에서 나온다. 일본의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품질로 명성을 쌓아 온 도요타의 손끝이 무뎌지기 시작했고, 조직 내 상호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자동차 산업의 세계화, 즉 ‘수요가 있는 곳에서 생산한다.’ 는 전략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세계화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인력, 조직과 전략 차원에서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세계 경영을 추진할 경우 상이한 문화의 충돌과 조직 내부의 소통 문제, 성장통과 대기업 병을 유발해 문제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요타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반으로 축소하고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는 한편 소재 사용의 효율화를 적극 추진했다. 가장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부품 공통화로 인한 대규모 리콜과 덴소와 CTS가 생산한 가속페달 부품 소재의 차이가 발생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도요타는 품질 문제로 리콜이 증가하자 당시 유럽 영업을 맡고 있던 현 아키오 사장을 불러들여 최고품질경영자의 자리에 임명한다. 그리고 최고 경영진이 참석하는 ‘고객우선(Customer First)’라는 품질회의를 주기적으로 개최하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도요타방식’의 재건을 위해서였다.2006년에 도요타는 최고경영자를 교체해 경영쇄신에 나선다. 그러나 도요타의 위기는 계속해서 수면 아래 도사리고 있었다. 사상 최고의 순익을 경신하고 있었고, 세계시장 판매도 증가일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타의 품질문제는 점차 심각해져 갔으며, 초기품질평가(IQS)에서 4위로 전락하면서 3위를 차지한 현대자동차에게 처음으로 밀렸다. 도요타의 외형 성장은 내홍에도 불구하고 이어졌다. 그 결과 도요타는 2007년에 매출 20조 엔, 순익 2조엔을 달성했다. 자동차사업을 고수익 사업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자동차산업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한편 도요타는 원가 절감을 위해 임시직인 기간제 근로자의 채용을 확대하면서 정규직 근로자는 동결하는 인력관리 체제를 운용해 나갔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00년대 전반 도요타의 국내 고용은 소폭 감소했다. 반면 도요타의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현장의 피로감이 누적되어 가고 있었으며, 이는 리콜 증가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도요타 현장의 피로감 누적에 대한 우려는 일본 내에서 2000년대 중반부터 제기된 바 있다.2008년에 도요타는 그룹 전체로 923만대의 자동차를 판매하여 GM을 물리치고 세계 1위의 자동차 업체 자리를 차지하였다. 도요타 DNA의 일부이자 일상화된 품질관리와 세계화 전략이 성과를 발휘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결함 조사에 적극 협조해 공동으로 문제의 원인을 규명했다면 도요타의 품질경영시스템은 또 한번 빛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 후 계속된 조사과정에서 도요타가 문제의 축소를 통한 비용 절감보다 전통인 문제를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보다 낳은 성과를 달성했더라면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리콜 사태가 불거지고 나서의 최고경영자의 태도와 경영진의 대응책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사태 초기에 최고 경영자의 진두지휘 아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습에 나섰더라면 조기 진화가 가능했을 것이다.Ⅲ. 도요타 리콜 사태의 원인-급속한 세계화, 현지화, 디지털화 문제도요타는 보호무역주의의 환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해외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원가절감을 위해 부품 공통화와 부품 조달의 현지화 및 개방화를 추진해 왔으며, 개발 기간의 단축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정보기술을 영업 프로세스 전반에 도입하는 디지털화를 급속히 추진해 왔다. 경쟁업체들 역시 이러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나, 도요타의 문제는 추진 속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요타의 해외생산은 2005년에 수출을 상회하였으며, 2007년에는 국내생산을 추월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해외 고용이 10만 명 이상 증가해 도요타는 인력관리 부담을 가중시켰다.도요타는 선진국의 통상압력을 완화시키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조립 부품을 현지업체로부터 조달하는 현지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현지조달율이 90%를 상회하는 차종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인력운용과 현지화는 도요타의 철학인 ‘도요타방식’과 부품업체와의 장기적 거래관계인 게이레츠 구조에 변화를 유발했다. ‘도요타방식’을 문서화했고, 각지역에 교육훈련을 위한 글로벌생산센터를 구축했지만, 교육훈련기간이 짧았고, 체형과 사고가 다양한 해외 근로자들에게 도요타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랐다. 또한 일본 자동차산업의 전통적인 1:1이나 1:2 거래 방식보다 다:다 거래방식에 익숙한 구미부품업체들에게 저비용 고품질 부품을 공급하라는 요구도 무리였다. 또한 도요타의 급속한 연구개발 도한 도요타는 국내 생산이 불안해지자 정규직 보다는 임시직 채용을 확대해 나갔고, 이는 현장 경험을 전수받은 전문인력을 확충하는데 문제를 야기하였다. 또한 현장 인력의 고령화와 피로감도 누적되어 갔다. 여기에 원가절감을 위해 경쟁업체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장착한 스마트 페달로 불리는 Brake Override 시스템도 장착하지 않았다. 이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화이어스톤 사태가 재현됐다고 볼 수 있다.이와 함께 도요타는 결함문제가 신고된 후 관련비용의 최소화에 급급했다. 2007년 리콜 대수를 최소화하여 관련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NHTSA의 추가조사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여 조사를 조기 종료시켰고, 안전관련 법의 적용을 지연시켜 1억 달러 이상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인 사태 수습 방식이 화를 더 키웠다고 볼 수 있다.결국 도요타는 양적 성장과 사상최고의 순익 경신에 따른 윟머증가에도 불구하고, 위기의식 결여, 자만감 팽배, 기업문화의 경직성 고조, 인적자원의 다양성 증가 등으로 품질과 안전 관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규모 리콜사태를 맞게 되었다.-GM, 포드 희생을 위한 미국의 도요타 후려치기 문제미국과 일본은 1980년대 이후 자동차분야에서 대립각을 세워왔다. 미국은 일본차의 수입이 급증하자 1981년에 일본과 수출자율규제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차의 수입이 감소했으나 일본업체들은 북미 공장 건설을 통해 맞대응했다. 미국은 1985년에 선진 5개구 회의를 개최하여 엔화 절상을 도모했으며, 엔화는 변동을 보이면서 강세를 지속했다. 미국은 자동차부문을 비롯해 대일 교역 불균형이 개선되지 않자 1989년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구조조정협의를 가속화하였다. 1995년 미국은 일본과 자동차 및 부품 프레임워크 협정을 체결하여 일정액의 부품을 구매해 주도록 요청했고 일본업체들은 미국산 부품 구매를 확대해 나갔다.이와 같이 미국은 일본에 대해 3차례의 통상압력을 가하였으며, 일본은 더 이상 양국간 마찰을 회피하고 어려운했다.
    학교| 2017.06.27| 9페이지| 2,000원| 조회(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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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