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74 영어 영문학과 윤하늘-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독일의 분단2. 독일의 통일 과정2-1통일의 배경2-2국내통일과정2-3국외통일과정3. 통일 이후의 독일의 정치·경제·사회4. 독일 통일이 한국 통일에 주는 시사점Ⅲ.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는 8일 "최근 북한 체제의 내구성이 서서히 악화되는 가운데 한국도 갑자기 통일을 맞이할 수 있는 만큼 철저히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자이트 대사는 '독일 통일 20년과 한반도 통일비전'을 주제로 열린 `통일연구원 개원 19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발제를 통해 "통일의 시작은 북한 경제의 쇠퇴와 권력층의 분열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그 이후 과정은 한국이 주도해야 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2010년 4월 8일 연합뉴스 김성진 기자)올해는 독일이 통일 된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독일이 통일이 될 그 당시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것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만해도 통일독일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내다보지 못했다. 통일 과정은 5년에서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40여년간 분단되었던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89년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되기까지 시간은 329일밖에 안 걸렸다. 이 329일 동안 동독 지역은 자유선거가 있었고 서독은 새 동독 지도부와 통일협상을 숨 가쁘게 진행시켰다. 수도이전, 독일의 나토가입과 통일 독일의 군사력 협상, 화폐교환문제, 법원, 경제, 교육, 행정과 경찰의 통합문제가 동서독간에 논의됐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2010년 오늘, 통일독일은 유럽통합의 기틀이 되었고 독일은 독일사회의 내적 통합의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위 기사의 울리히 자이트 독일 주한 대사의 말처럼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통일이 되었듯이 한국도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순식간에 통일을 맞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것은 서방진영과는 달리 처음에는 서독처럼 독일마르크로 바꿨다가 훗날 동독마르크로 바꿈으로써 새 화폐도입 이후에도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근본적으로 향상시켜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화폐개혁은 순수하게 국내용으로 구상된 것이므로, 대외용으로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소련은 서독지역의 화폐개혁에 해한 보복으로 1948년 6월 23일 밤에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육로 및 수로를 차단했다. 서부지역과 서베를린을 잇는 모든 육상통로를 차단하여 동베를린과 소련점령지역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가는 에너지 및 식료품 공급이 중단되었다.서방측이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리추천작업에 분주할 때 스탈린은 서부지역이 독일마르크화를 도입한 것을 핑계로 삼아 서베를린을 봉쇄하여 소련점령지역에 강제로 통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선전포고에 대응하여 미국과 영국은 항공가교를 설치했다.베를린 봉쇄로 인해 1949년 5월 12일 까지 서베를린 시민들은 연합군의 항공로를 통한 공중보급으로 살아야만 했다. 서베를린 시민들의 저항의지를 대표하는 정치가는 사민당 로이터 였다. 그는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1948년 12월까지 소련의 거부로 인하여 그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냉전이 유발한 첫 번째 최악의 위기였던 베를린 봉쇄를 통하여 소련은 서독과 서베를린이 서방동맹국가와 결속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독의 정치인들이 공동으로 강하게 대응했기 때문 사실상 그들의 봉쇄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소련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미소간의 비밀회담과 4대국합의에 따라 1949년 5월 12일 베를린 봉쇄는 끝났다.봉쇄기간동안 정치 및 행정에 있어서 균열이 생겨났다. 패전으로 인해 만들어진 점령통치국가 독일에는 냉전이 특히 강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독일 국민의 식량문제 개선을 위해서 미국 정부가 제안한 점령구역의 경제적 통일방안과 그후의 마샬플랜에 대하여 계획적인 ‘미국식 경제제국주의’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루르지방 형태가 되었다. 독일 국민은 자주권의 행사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다. 또한 콜 수상은 독일의 통일은 유럽 국가들의 협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일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콜 수상은 통일을 반기지 않는 이웃 국가들에게 동독의 혼란을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동시에 동독의 국민들에게는 통일 대한 강한 의지를 심어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다녔다.2-2독일의 국내 통일 과정)모스크바에서 만난 콜과 호네커는 강대국에 의하여 분단된 것이기에 강대국 간의 이해대립으로 인한 피해는 줄여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결국, 두 수상들은 강대국 사이에서 원치 않게 신음하는 독일 민족의 아픔을 서로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콜은 모스크바 만남에서 호네커가 초청한 것을 실행에 옮겨 2박3일간 가족여행으로 동독으로 떠났다. 콜 수상의 동독 방문은 동독 국민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효과를 주었다.마침 그 시기는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기였고 동독에서도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다. 그 결과 호네커는 사임을 하고 모드루우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동독의 움직임을 감지한 서독의 콜 수상은 10대 통일 방안을 발표하였고 세계 및 독일 정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통일 방안은 우선 환경 보호구역을 즉시 보호조치하고 전화와 철도의 확충에 착수하자는 것으로 시작했다. 다음 단계로서 동독 헌법을 개정하여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어서 모드로우 동독 총리가 제안한 상호간에 협정공동체를 만들자고 했다. 자유선거를 실시한 이후 연방구조를 갖는 독일 연방, 즉 연방국가의 질서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 연합을 만들자는 것이 그의 통일 구상이었다. 콜은 통일독일의 상세한 국가 형태에 대한 계획은 유보했지만 통일과정에서 나타난 바처럼 유럽연합속의 독일국가형태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서독 총리와 동독 총리가 12월 19일 드레스덴에서 첫 공식적인 회담을 가진 것은 중요한 주주의 체제로 옮겨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 조약에 따라 동독은 경제와 화폐에 관한 주권의 대부분을 서독에게 넘겨줌으로써 동서독은 통일이라는 정치통합에 앞서 완전한 경제통합을 이룩했다.그리고 그해 7월에는 두 독일 정부가 완전한 국가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조약에 관한 제2차 회담을 시작했다. 드디어 8월 23일에는 국민의회가 헌법 제 23조에 따라 10얼 3일 동독을 서독에 흡수통일 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2-3 독일의 국외 통일 과정)평화적 혁명과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의 몰락은 유럽과 세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분단 45년만에 재통일하려는 독일인들의 권리는 아무도 거역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통일은 4대 승전국가 및 인접 국가들의 밀접한 동조가 있어야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콜은 동독과의 협상은 유럽공동체와 유렵안보협력회의에서 규정한 유렵전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협상일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통일과정 초반부터 독일이 강대국의 지위를 노린다는 국제적 의혹을 염려했기 때문이다.고르바초프가 1989년 12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원회에서 “모스크바는 동독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동독 주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는 급속하게 커져 나갔고 구체화되었다. 1990년 1월 15일 라이프치히에서는 약 15만명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동독 주민들은 새 정부를 불신했고 서독정부에 마음이 다가가 있었다. 동독의 사회불안은 급속히 증폭되었다.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독일통일에 대한 유보정책을 고수했다. 폴란드와 헝가리가 소련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가 1989년 12월 퇴진하여 동독마저 바르샤바 협정국가에서 이탈한다면 소련의 안보정책이 이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미국의 부시는 독일이 나토에 잔류한다는 전제 아래 독일통일에 찬성했다. 또한 독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독일연방국화국의 무기감축, 37만여명 선으로 군사병력 감축,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동관한 국가협약에 의해서는 서독 DM이 동독 지역에서 공식통화로 인정되었다.서독 DM의 도입과 비합리적인 환율채택으로 인한 동독시장은 붕괴되었다. 이 당시 적용된 환율의 적절성 즉, 1:1교환은 계속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이 환율을 통한 화폐교환과 서독 DM의 공동 통화화는 통일 전에 이미 동독지역의 생산비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생산성이 뒤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만 인상된 대부분의 동독기업들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90년 후반부에 동독의 임금은 30%가 상승했고 91년에는 60%의 임금상승을 기록했다.그 결과 서방 산업국가들은 아무 제한 없이 동독시장에 물건을 공급할 수 있었고, 동독인의 서구 상품선호 현상까지 겹쳐 동독기업은 점차 활로를 잃게 되었다.통일 후 동독의 노동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화폐통합이 실시된 지 1년 후인 1991년 7월에는 서독과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분야에서의 급격한 감원으로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12.1%로 107만의 실업자가 공식 집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57.4%(1991년 12월)까지의 휴업률을 보였던 2백만 명의 동독 단기노동자들의 절반 정도는 사실 실업상태에 있었다. 1992년 1월부터 동독에만 적용되던 단기노동자 규정이 효력을 상실하자 실업자는 30만 명 이상이 증가하여 134만 명을 기록해 동독지역 실업률은 17%에 달하게 되었다.이 밖에도 독일은 통일 비용 또한 만만치 않게 들었는데 서독정부가 분단 상황에 의해 지출한 경비는 약 4천억 DM으로 추산된다. 이중 대부분이 베를린 원조에 쓰였고, 동독내 양심수 석방사업과 동독에 지불하던 도로이용료 등이었다. 통일과 함께 이러한 분단에 근거한 비용대신에 통일에 의한 지출이 늘어나게 된다. 1991에만 공적자금이 1,070억 DM이 투입됐고, 1992년에도 1,260억 DM이 투입됐다. 경제, 사회, 행정 전반에 낙후돼 있던 동독 지역을 서독의 수준에 맞게 재정비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던 것이다.통일 후 독일의 통일과 관련된 재정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