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랑스러운 역사와 그렇지 못한 역사?2014190403 나웅재I. 서론사람들은 한반도에는 반만년의 역사가 어려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한반도에는 거쳐 간 역사가 많다. 우리는 그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곤 한다. 그런데 모든 역사가 우리의 자부심을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역사는 감추고 싶어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부심을 오히려 낮추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를 모두 알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자부심을 얻는 동시에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당시 상황의 문제를 파악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기를 수 있다. 또한,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후대에 자랑스럽게 만들 길을 찾을 수 있다.자랑스러운 역사와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올바른 판단이 내려졌는지의 여부이다. 상황에 부합하는 판단이 내려질 때 사회는 발전하는 반면, 상황에 부합하지 못하는 판단이 내려질 때는 사회는 퇴보하거나 빗나간 방향으로 진행되며 이는 자랑스럽거나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로서 기록된다. 예를 들어, 사회가 특정 방향으로의 변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그 변화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기록될 것이다. 반면, 그 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그 역사는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로서 기록될 것이다.II. 본론1.자랑스러운 역사- 한글 창제1) 한글 창제의 배경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부분은 세종의 한글 창제라고 할 수 있다.당시 조선에서는 우리말을 직접 적을 글자가 없이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자는 어려운 글자였고 우리말을 소리나는 그대로 표기하지도 못하는 표의문자였다. 자연히 생업에 바쁜 일반 백성은 글자를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사실상 문자는 양반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러한 당시 정세는 사회를 더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 말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중들의 사회개혁 요구와 지위를 보장해야만 했던 조선 왕조의 보상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흉흉한 민심을 보살피고 민중이 지배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해 한글은 좋은 당근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2)한글 창제의 의의 및 효과이런 상황에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당시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변화였다. 훈민정음 창제는 양반 사회에 고립된 지식을 백성들에게 퍼뜨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당시 창제된 훈민정음은 여러 방향에서 이용되었다.첫째, 한문으로 쓰인 중요서적을 훈민정음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도록 보급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는 유교적인 지식을 일반 백성들도 익히기 쉽게 함으로써 지식의 범위를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둘째로, 행정실무를 맡은 서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익히게 하여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국가시책을 이해시키는 데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백성들이 글을 몰라 피해입지 않게 하는 애민정책으로 민심을 평안히 한 것이다.셋째, 훈민정음은 문학 창작활동에 많이 이용되었다. 한문지식이 풍부한 학자나 한자에 무식한 평민이나 부녀자들도 창작활동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활발해진 문학 활동은 사회 전체의 예술 수준을 끌어올렸다. 이는 조선 후기 많은 한글 소설이 창작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 역시 ‘언간’이라 하여 한글로 편지를 많이 적어 교환하며 소일거리를 삼았다.넷째, 한자의 발음을 우리 현실에 맞게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동국정운이나 홍무정운역해와 같은 음운서는 한글창제와 그에 뒤따른 연구 노력의 결실로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의 한자음 표기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 임용기결정적으로, 한글 창제는 애초에 목적한 바를 확실히 이루었다. 백성들이 글을 알게 되면서 백성들에게 유교의 충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윤리 도덕을 가르치기가 수월해진 것이다. 백성들은 충효를 알게 되었고 자연히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수 있었던 것이며 이는 서민들에게 학문이 퍼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네이버 지식사전둘째로,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서 조선은 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후기, 무신의 난으로 기존 정치 지배 질서가 무너지면서 일반 백성들의 의식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전체적인 자의식의 성장을 맞은 것이다. 혼란을 겪으며 기존의 질서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신분제에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스스로의 삶에 순종하고 살았던 노비들이 난을 일의기 시작한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사회는 혼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개경 사람들은 만두에 이성계의 이름을 붙여 칼로 다지는 등 조선에 대한 많은 불만을 표출했다. 게다가 태종 때까지 조선은 왕위다툼으로 혼란을 맞고 있었다. 집권층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현실에서 국민들은 고려에 대한 향수를 갖게 된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안정시키려면 백성에게 ‘당근’을 던져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특히 세종 때는 측우기, 물시계 등 수많은 민생을 생각하는 발명품과 애민정책이 등장헀다. 훈민정음 창제 역시 그러한 ‘당근’ 중 하나였다. 특히 훈민정음은 다른 애민정책과는 달리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방법이었다. 훈민정음을 통해 정부는 서민들에게 유교 윤리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한 유교 윤리는 주로 효와 충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효와 충을 강조함으로서 국가는 국민들이 국가를 존중하고 국가의 말에 순종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국민들이 문자를 모를 때 국민들에게 유교 윤리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힘들었으나 훈민정음이 보급된 후에는 그저 책 한 권 만으로 국민들을 교화할 수 있었다. 정부는 그러한 효과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훈민정음 창제 후 많은 책들을 출간했다. 예를 들어, 훈민정음을 만든 초기에 조선 정부는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과 같은 유교적 덕목을 담은 서적을 펴내 백성들에게 리고 훈민정음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거나 여자들이 편지를 보낼 때, 소설책을 읽을 때나 사용하는 글자가 되었다.훈민정음은 음운학적으로 매우 훌륭한 문자이고 그 창제 의도도 매우 훌륭했다. 실제로 백성들의 삶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배층의 외면을 받음으로써 훈민정음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문자가 되지 못했다. 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한문과 훈민정음을 함께 사용했으며 지배층 사이에서는 주로 한문이 쓰여졌다.여기서 당시 사대부들은 왜 훈민정음을 거부했는가라는 질문이 도출될 수 있다. 그 이유는 훈민정음 창제 전의 사대부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사대부는 정보의 확산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의 지배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그러한 사대부들의 바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이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됨으로써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진다면 차별적인 지배 질서에 반항할 가능성이 높았다.그래서 당시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의 창제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생활에서 철저히 훈민정음을 배재함으로써 훈민정음이 지배층의 문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세종은 교서를 훈민정음으로 쓰는 등 훈민정음의 사용을 확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지배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양반 사대부는 철저히 훈민정음을 외면했다. 또한, 세종 이후의 왕실 역시 옹공 문서에 훈민정음이 아닌 한자를 활용하면서 훈민정음은 결국 서민, 여자 등 피지배층 사이의 소통 방편으로 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결국 훈민정음은 그 과학적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인 지배층의 태도에 의해 국민 계몽의 수단이 되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한글 창제의 역사 속에서 창제 후 적극적으로 한글을 사회 전체에 퍼뜨리는 데에 실패하여 한글이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 한계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2.자랑스럽지 못한 역사: 흥선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1)흥선 대원군의 업적대한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이 사건, 곧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침공, 병인양요 때 일어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제 약탈 등 서구 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합리적인 자구책’이라는 평가 역시 존재한다.여기에서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어떤 배경에서 실시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2)흥선대원군 통상수교거부정책의 배경조선왕조 후기는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걸쳐서 그 내부적인 붕괴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난 시기였다. 이러한 와중에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북경이 함락된 사실은 조선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조선은 서양의 힘을 크게 실감했다. 중국은 서양 열강의 상품시장이 되었고 일본도 미국에 의해 개항된 상태에서 조선 근해에 이양선이 출몰하여 다양한 형태의 통상을 요구하는 당시 현상은 조선 정부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이처럼 서구 열강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서양의 접근에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할 것인가는 큰 논의 대상이 되었다.그러나 당시 조선의 국내사정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60여년간 지속되어온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국가의 기강은 흐트러졌고 지배계층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여 각지에서 대소의 민란이 빈발하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흥선 대원군은 대외적으로 개방을 추진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조선 사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왕권을 다시 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흥선대원군 정책의 성격, 가진석따라서, 흥선 대원군은 우선적으로 나라의 문을 닫고 외세와의 접촉을 차단함으로써 밖으로 향하는 국력을 최소화하고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나라의 힘을 집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게다가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대부 세력들도 외세를 배척하는 양이정책에 대해서는 동감했으며 서민들 역시 양이정책을 지지했식사전
한국인이 역사드라마, 영화에 환호하는 이유는?: 한 가지 사례에 비추어 논증2014190403 나웅재TV를 켜면 적어도 1개 채널에서는 사극이 방영된다. 한국에서 역사 영화와 드라마 중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히트작들이 많으며 현재도 끝없이 사극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는 역사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역사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희열이 정말 순수한 자긍심에서 나오는 것인가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는 ‘민족’과 ‘애국심’을 매우 강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역사 교육은 다양한 사관을 가르치기보다는 민족주의적 사관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 속의 대한민국은 교과서에서 배워 온 화려한 역사와는 괴리가 있다.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국 사이에 지정학적으로 끼여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미국과도 매우 긴밀하게 엮여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분단국가이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은 지속적으로 역사왜곡을 시도하면서 우리의 화려한 역사를 축소하거나 아예 그들의 것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국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만족할 만한 정치 수준을 보이지 못한다. 정치의 후진성은 항상 지적받고 있으며 복지나 민생은 국민들이 원하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의 괴리는 열등감과 좌절감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이 감정을 수용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자연히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하여 자기위안을 삼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현실의 부정적인 면이 심해질수록 강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 역사 드라마와 영화는 두 가지 역할을 하게 된다.첫째로, 역사 드라마, 영화는 열등감 해소의 도구 역할을 한다. 2006년 방영된 ‘연개소문’이라는 드라마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동북공정이 추진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심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 방영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자주성과 힘을 강조한 드라마이다. 실제로,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는 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대막리지에 오른 역적에 가까운 인물로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은 한칼에 적군 대여섯을 쓰러뜨리고 전장을 지배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는 중국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역사 드라마의 모습을 대표한다. 양만춘이 쏜 화살이 당 태종의 눈을 맞히고 연개소문에 의해 당나라 군대가 풍비박산나는 것을 약간은 과장되게 표현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중국보다 우위에 있다는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둘째로 역사 드라마와 영화는 현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과거 회상을 통해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이 대중이 바라는 이상에 미치지 못할 때, 역사인물 중 유명한 인물을 포장하여 결점이 없는 ‘이상적인’ 인물로 만들어 그(혹은 그녀)의 행동에 대중들이 매료되게 하고 현실을 잊게 하는 것이다. ‘연개소문’ 역시 그러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현재 정치 지도자가 유유부단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대중은 이상적인 리더에 대한 환상을 품고 현실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 때 ‘연개소문’과 같은 긍정적으로 포장된 인물이 방송에 등장한다면 대중은 국가적 위기에도 대담한 결정을 내리고 인간적이면서도 대의를 위하는 선택을 하는 완벽에 가까운 인물인 ‘연개소문’을 통해 현실에서의 결핍감을 해소하게 된다. 역사 영화, 드라마가 가상의 ‘영웅’을 창조하여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잊게 하는 약물 역할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