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의 욕망,문화대혁명(중국정치 에세이1)중국현대사의 트라우마, 문화대혁명『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의 제목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역사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던 사건이 아니었을까?’ 2012년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46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도 중국사회는 사회양극화, 실업문제, 국유기업 구조조정 등 풀리지 않는 갈등과 문제들이 난무하다. 이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과거의 문화대혁명으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반역은 정당하고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구호가 아직도 중국사회를 배회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 또다시 문화대혁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은 왜 일으켰는가?’ 또 ‘문화대혁명을 왜 종식시켰는가?’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끝이 마오쩌둥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흥미롭다. 더 나아가 대중들은 마오쩌둥을 찬양하고 그를 ‘신’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특히 홍위병들은 20대의 젊음을 문화대혁명에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기를 불태웠다.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문화대혁명에 동조하고 찬양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문화대혁명의 시작은 중국공산당 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들 (주자파)에 의해 자본주의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에 주자파를 타도해야 한다고 대중에게 호소했고, 또 많은 대중들이 그의 호소에 호응하면서 전개한 정치화된 대중운동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이 바라던 부강한 국가는 그가 경계하던 자본주의를 통해 달성되었다는 사실이다.마지막으로 우리는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을 일으키는 계층은 낮은 계층일 확률이 높다. 불만이 많고 혜택을 못 받는 세력이니만큼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이와 반대로 권력을 잡고 있는 통치자가 일으켰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권력의 통치자가 일으킨 혁명이다.마오쩌둥이 바라는 사회를 위한 발판, 문화대혁명충분히 권력을 가지고 있던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게 된 발판의 첫걸음은 권력투쟁이라고 생각하는 해석이다. 그는 당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난 당주석 마오쩌둥이 권력을 재장악하기 위해서 대중을 선동한 것이다. 대약진운동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으나 의지와는 반대로 대약진운동에서 실패함으로써 정치 실권을 국가주석 류사오치에게 넘기고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 마오쩌둥은 1959년부터 현재까지 덩샤오핑은 내게 어떤 것도 상의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마오쩌둥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당이 점점 관료화됨에 따라 통제가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두 가지 노선’의 대립을 형성해 이 노선에 대중을 개입시키고 확대해 정적을 제거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마오쩌둥의 계략이다. 자신과는 다른 의지를 갖고 있는 세력을 축출하고 찾아내기 위한 방안으로 마오쩌둥은 두 가지 노선을 형성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마오쩌둥의 목적이 단순히 권력 재장악이었다면 당내 정풍운동이라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반박이 나올 것이다. 마오쩌둥의 권위는 대약진 이후 권위는 전보다는 미비했고, 당내에는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세력도 충분히 있었지만 이런 일부 지지자들 외에 대중들마저도 마오쩌둥을 숭배하고 찬양한다면 그 권위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홍위병을 통해서 마오쩌둥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마오쩌둥은 학생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홍위병이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홍위병을 조직하기 전에 1949년 이전 경제상황이나 직업에 따라서 계급을 분류하고 자녀들의 계급은 부모의 계급에 따라 결정이 되었다. 대학을 입학하는 기준에 있어서 계급성분과 학업성취도 뿐만이 아니라 혁명적 행위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를 이용해 홍위병을 선동했을 것이다. 당시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어록을 암송하고 사상을 익히며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마오쩌둥의 충실한 수행자를 자처했다. 만약 이 당시 내가 홍위병이었다면 ‘나’조차도 대학으로 인해 직업과 주거가 결정되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사상과 반대되더라도 마오쩌둥의 신격화 시키는 모임에 동참했을 것이다. 더불어 마오쩌둥은 이들을 위해서 홍위병들은 어디를 가나 숙식 해결이 가능했고 남부럽지 않은 혜택으로 그들을 유혹했다고 생각한다.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의 방식으로 매듭짓기혁명의 미명아래 폭력이 정당화가 되고 문화대혁명은 점차 광기가 가득한 무장투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운동의 본질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고 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종식시키기로 마음을 먹는다. 마오쩌둥은 이기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홍위병을 선동해 자신의 위치를 신격화시키고 굳건히 하고 점점 의미가 변질되어가자 홍위병들에게 시골로 내려갈 것을 권유하는 방식이 풍선껌에 있는 단물만 쏙 빼먹는 것 같다. 또한 조반파가 자신의 지시를 거부하기 시작하자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조반파에 대한 군의 진압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마오쩌둥의 태도가 모호했지만 후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하자’는 조반파의 구호를 위험하다고 생각해 완전히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군은 문화대혁명 과정의 외부에 놓여 있었지만 질서의 명분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군과 조반파의 충돌은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고 문화대혁명은 종식되었다.
린 마을을 통해 본중국의 한 조각자유전공201122104이상진린 마을과의 첫만남저자는 린 마을에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캠퍼스에 사는 몇 안 되는 외국인 교사들과 함께 특별 건물에 갇히면서 답답함과 향수를 못 견디던 중 농촌 조사활동 허가를 받으면서 린 마을에 관심이 생겼다. 이 부분에서 중국이 당시 외국인을 대학이라는 체제 하에서도 철저히 격리 시켰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저자는 린 마을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린 마을을 집 구조는 전통적인 건축 양식과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어서 옛 것과 새 것이 잘 어울러져 조화로운 구조였다. 그는 거주할 곳을 찾게 되면서 예 서기를 만나게 된다. 사진을 통해 본 옛 서기의 모습은 환한 웃음으로 인자해보이지만 저자는 옛 서기와 거리감을 두며 예의만 지키게 된다. 그 후 예 서기의 아버지 무덤이 훼손되면서 저자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예 서기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서양사람들은 주로 마오 주석과 주더 장군과 같은 중요한 인물의 관점을 통해서 중국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마을에서 실제로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즉 평범한 간부들에 대해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을 던진 저자는 생각이 깊고 멀리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현 교육에서도 우리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중요인물에 대해 공부하고 중국을 어느 정도 간파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중국이라는 숲을 통해 나무를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린 마을의 희로애락린 마을은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희로애락을 통해 예 서기의 면모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린 마을의 기쁠희(喜)로는 1980년대 초 인민공사로 18개 생산대대를 대상으로 콘테스트를 개최로 인하여 린 마을이 성과를 높인 것을 꼽을 수 있다. 그 콘테스트는 그해 곡식의 생산량과 판매액을 적어도 20%까지 증가시키고 출산율을 천 명당 25명까지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우승한 생산대대에서는 3천 위안의 상금이 돌아갔다. 이 콘테스트에서 린 마을은 그해 말 곡식생산과 판매수입에서 20%이상의 수입을 기록했으나 출산율을 감소시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상금을 받지 못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노여워할 일이었으나 이를 통해 린 마을은 성장하였다. 비록 상금은 받지 못했지만 20%까지 성장한 예 서기의 성장비결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 당 서기로 승진했을 무렵 시행한 정책이 이미 린 마을에서 시작했던 일을 정당화시켰다. 두 번째로 샤먼 시 중심가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린 마을의 전략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가장 큰 요인은 인화였다. 예 서기는 사청운동 기간에 알았던 간부들과의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꽌시가 떠올랐다. 수업시간에 배울 때는 이정도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는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연고주의와 같은 역할은 실제로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두 번째로 성낼로(怒) 부분에선 출산율이 대표적이다. 출산율을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 산아제한운동이 있었다. 부부에게 두 자녀가 아닌 한 자녀만 허용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정책이 실행되고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여자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린 마을 또한 이 정책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예 서기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정부와의 관계도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한다는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한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나름의 기준을 제시했지만 정부 측이 제시한 범주를 넘어서 결국 벌금 5000위안을 내었다. 린 마을 또한 낙태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이 기준을 명확히 함으로써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산아제한운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예 서기의 현명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충격적인 사실은 중국정부가 여자들에게 아기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링을 삽입하거나 난관결찰술을 강제적으로 시행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출산율이 증가함으로 나타나는 사회문제가 있지만 이를 낙태 또는 링 삽입, 난관결찰술로 대처했다는 것은 분노해야할 일이다. 출산율 문제는 중국이 앞으로도 끌어안고 가야 할 사회문제이다. 조금 더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필요할 것 같다.세 번째로 슬플애(哀)로는 대약진운동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부는 대약진운동을 시행함으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 서기는 그런 굶주림과 기근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저자와 아이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판했지만 나는 예 서기의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생각한다. 인민 공사 시절 어른과 아이들은 식당에서 배불리 먹고 과일까지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공업발전이 강조되면서 정부는 용광로를 만들기를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강대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 시행된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신념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열광적으로 사회주의에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공업문제에서 ‘과학영농’을 촉진하라는 지시 때문에 무리하게 모 사이를 좁혀서 농사를 망치고 기근에 시달렸던 농민들이 안타까웠다. 정부의 잘못되고 무리한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마을 사람들의 무지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마오쩌둥의 신념과 내용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수동적인 삶이 당시 중국의 현실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