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사철학- 목차 -1. 초기 기독교와 체육 12. 수도원의 체육 93.`기사의 체육 194. 중세 중국의 체육 285. 중세의 스포츠 교육6. 문예 부흥기의 체육7. 실학주의와 체육8.단련주의와 체육9. 자연주의와 체육1. 초기 기독교와 체육중세의 사회와 문화유럽에서는 4세기 말엽부터 10세기 말까지 약 600여 년 동안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봉건제도가 생겨났다. 봉건제도의 핵심은 주종제도였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고, 평기사를 저변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봉건제도와 가톨릭교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중세 유럽 사회는 11세기에 들어 점차 정치적 안정과 사회 경제적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으로 서유럽 사회가 차츰 변하면서 장원제의 기틀이 무너지고 기사계층의 특권적 지위도 흔들리게 되었다.도시의 발달로 시민계층의 세력이 커지자 국왕은 왕권을 강화하여 봉건 제후들을 눌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갔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의 결과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의 변화는, 바로 중앙(고대제국)의 통치력이 약해진 결과에 따라 지방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귀족의 대토지사유제가 심화되고 자유민(자영농)의 몰락으로 경제가 불경기로 접어들었다. 경기의 불황에는 고대제국의 통치력 감소에 따라 다른 고대사회(동양과 서양)와의 무역이 감소하면서 상업과 무역으로 인한 부의 축적도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사회의 농업중심적인 폐쇄적 장원경제제도는 결국 소수의 귀족층에게는 유리한 사회였지만, 결과적으로 다수의 인민에겐 이러한 사회로의 이탈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반면 중세사회를 지배했던 유럽의 교회(기독교)는 이러한 중세사회의 속박에 일정 정도 정신적·문화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고, 따라서 상당기간 봉건시대의 존속은 불가피 하였다. 이러한 다수 인민의 속박구조를 개별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모험심 이 깊은 사람들에 의한 대륙간 여행 및 상업과 무역으로의 치중은 유럽의 경우 중세도시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이에 차츰 학문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고 법률, 과학, 의학의 분야와 예술, 건축, 자국문학의 분야도 발전하게 되었다.6~11세기까지는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동서문화가 교류됨에 따라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계급이 형성되어 절대적이었던 교황의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기독교의 진리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와 같이 기독교의 교리가 흔들리자, 이를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증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여기서 발생한 철학이 바로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은 당시의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의 아리스토 텔레스의 연역적 철학 이론을 결합시켜 이것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하고 이를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의 권위를 되찾자는 것이었다.스콜라 철학은 처음에는 신학분야에만 적용하는 학문이었으나 그 영향은 법률과 의학 분야에도 미쳐 사회의 각 분야에서 학자의 권위를 높였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교육기관도 이 스콜라 철학을 가르치고 탐구하여 교회의 신조와 조화된 중세문화를 이끌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발전하여 갔다.중세 대학의 경기대학의 어원은 조합 또는 단체라는 의미의 'universitas'에서 나온 말이며, 이 말이 '학도의 단체'라는 뜻으로 쓰여짐에 따라 후에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college'라는 단과대학의 명칭도 '학생의 합숙소', 즉 '기숙사'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들 초기의 중세 대학 중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 사레아노대학, 프랑스의 파리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켐브리지 대학이 유명하다.중세기의 대학은 문예부흥의 선도 역할을 했다. 이는 청년들의 훈련소였으며, 과학 연구의 장소로서 당시의 문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체육이 없는 대학은 신체활동을 경시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중세기 대학은 문화를 중시하고 무공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당시 대학생들이 무사를 경시함으로써 일체의 체육활동(경기, 사냥, 레슬링 등)은 모두 대학생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394년 올림픽 경기를 폐지하였다. 마지막 검투 경기가 로마에서 열린 것은 404년이었다. 그러나 전차경주와 맹수와의 싸움은 6세기까지 여전히 지속되었다. 무용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표현의 한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찬송가와 무용으로 교회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은 묘지에서 죽은 이를 위한 의식을 치를 때 춤을 추었다. 장엄한 축제 때에도 춤을 추었다. 여러 축일 때 감사의 표현으로 춤을 추기도 하였다. 예수회 소속인 Claude Menestrier 신부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종교 무용은 초기 성직자들의 애호를 받았고 미사 전례에는 실제로 추가되었다. 성가대석은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 뿐 아니라 무용도 공연된 장소였던 것 같다. 시일이 흐르면서 종교 무용은 사라지게 되었다. 안무가 지닌 신성한 특성은 세속의 영향으로 오염되어 많은 공연이 경건 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용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마침내 배격 당하였다. 554년 칠테베르트는 그의 재임 중 무용을 금지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고 774년 교황 자카리아는 불경스런 공연을 금지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춤추는 것보다는 땅을 파헤치는 것이 더 낫다."라고 하여 무용의 무가치함을 설명하였다.사회기강을 위한 교육과 스포츠비도덕적이고 부패한 로마 정부는 게르만 민족이 남하를 저지할 수 없었고, 통치권 행사도 지속하기가 힘겨웠다. 로마 제국의 생명과 재산은 강도, 폭동, 억압하는 지주들, 거듭되는 침입 등으로 인하여 위험한 지경이 되었다. 놀라고 절망한 백성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돕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확인하자 제각기 안전을 찾을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를 찾는 방법 이외에 3가지 제도가 있었는데, 봉건제도, 장원제도, 그리고 기사도 제도가 그것이었다. 봉건제도 아래서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였고 다만 소수의 자유지주들이 가진 토지만이 제외될 뿐이었다. 왕실은 이 소란스러운 시대를 맞이하여 스스로 관리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영토와 들로 구성되었다. 이 소년들은 평화 시에는 전투적 성격이 짙은 거친 스포츠 곧 방패싸움, 지우오코 델 폰테, 팔리오, 지우오코 델 칼치오 등에 참가하였다.13세기와 14세기에는 투스카니와 움브리아의 대부분의 도시에는 지우오코 델 마자스쿠도를 하였다. 토너먼트와 비슷한 이 게임은 곤봉과 방패를 무기삼아 두 발로 서서 싸우는 경기였다. 관습상 곤봉과 방패 전은 마을의 광장에서 열렸다.15세기 말엽부터 1804년에 이르기까지 피사시의 주요 교량위에서 싸웠던 모의 전투인 지우오코 델 폰테는 옛 방패싸움 게임의 일종으로 등장하였다. 이 게임은 성 안토니오 축일인 1월 17일에 가장 성대하게 열렸다. 아르노의 북쪽 기슭에 사는 시민들은 6개 기병대를 조직하였는데 1개 기병대는 30∼6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남쪽 기슭에 사는 시민들이 같은 수효로 조직한 기병대와 싸움을 벌였다.하나의 경주를 뜻하는 팔리오라는 단어 자체는 기 또는 깃발을 의미한다. 중세는 승마 경주의 우승자에게 팔리이라고 알려진 모직물이나 견직물을 수 야드씩 주었다. 마침내 팔리오는 경주의 상품을 의미할 뿐 아니라 경주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팔리오는 대체로 승마 경주였지만 달리기 경주, 전차경주, 당나귀경주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보트 경주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 경주들 또는 팔리이는 13세기 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지우오코 델 칼치오는 초창기에 경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공놀이와 더불어 난투전을 벌이는 주먹 싸움이었다. 16세기에 이 게임은 럭비와 비슷한 스포츠로 발전되었다. 경기장은 정삼각형의 당 바닥에 기둥을 박고 울타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경기장의 한 쪽을 벽, 다른 쪽을 도랑이라고 각각 불렀다. 경기자들은 공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 상대방의 goal line을 넘기고자 하였다. 이 골라인 경기장의 말단부 전체를 길게 연장시켜 두었다. Touch down은 칵치아라 불렀는데 터치다운을 많이 시킨 팀이 우승하였다. 이 경기에는 반칙에 관한 규정도 있었다. 공을 도랑 쪽으로 사상과 학문이 가진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지위상승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청소년은 군사운동을 연마하여야 한다. 이교도인 투르크로부터 기독교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너희들의 운명이다. 따라서 활, 투석기, 창 등의 사용법과 높이뛰기, 수영 등에 관한 학습이 너희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메르쿠리알리스 - 인문주의 시대 고전학에 정통한 사람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운동의 가치를 기술한 책「고대체육」을 펴냈다. 이 책에는 고대의 체육장과 체육에 대하여 조사하고, 건강을 위하여 신체 훈련을 행할 것을 장려하였다.체조를 두 가지 측면 즉 예방적인 것과 치료적인 것으로 분류했고 모든 운동의 양과 강도는 개인의 체질을 고려하여 개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 「체조예술」은 고대 체조운동을 역사적으로 기술하였다.의학적인 관점에 투철하였고 운동에 대해 일정한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였지만 메르쿠리알리스가 체육의 발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할 수밖에 없다.사회적 인문주의와 체육개관 - 이탈리아의 인문주의가 쇠퇴할 무렵 여행이나 군대 원정에 의해 이탈리아에 온 사람들이 남부의 인문주의를 접하게 되고, 이탈리아의 학생들이 프랑스나, 도이칠란드로의 유학을 통해 전달하게 되어 북유럽에 인문주의가 꽃피게 되었다.이탈리아는 귀족적, 보수적, 심미적 경향이 강한 개인적 인문주의가 발전하였고, 북유럽은 현실비판적,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회적 인문주의가 유행하였다.북유럽은 중세적 전통이 깊고 도시와 농촌의 차별이 적지 않아 르네상스에 사회개력이나 종교적 갈등 및 민족주의적 욕망 등이 가미되어 보다 냉철하고 비판적이며 사색적 의미의 르네상스가 발달하게 되었다.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보급은 르네상스기의 연구 논문이나 교육 논문 및 고전 서적의 빠르고도 대규모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였다.체육북유럽의 교육자들은 신체와 정신과의 관계를 유기적인 통일체로 인식하고, 신체와 정신과의 상호 관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초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체육에 대한 넓은 개념은것이다.
체육사철학- 목차 -1. 고대 사회와 스포츠 문화 12. 그리스의 체육과 스포츠 문화 93.`로마체육과 스포츠 문화 194. 중국체육과 스포츠 문화 285. 소감문 421. 고대 사회와 스포츠 문화-1. 생명과 생활의 보전을 위한 신체 동작만일 원시 시대에 체육이 행하여졌다면 그것은 단지 일반적인 생활과 미분화되어 개인과 민족이 자기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생활을 유지하여 나아가려는 강한 욕망과 신체활동에 그쳤을 것이다. 그래서 신체 활동은 수렵, 물고기잡기, 전쟁과 같은 생활에 필요한 신체기술이었으며 이러한 기술을 잘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체근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위하여 걷기, 달리기, 뜀뛰기에 능하고 나무에도 잘 오르고 물에서는 헤엄칠 수 잇는 기본 능력과 상대방을 잡고 쫓고, 또 쫓기는 과정에서 몸을 재빨리 감출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자기 남편이 수렵이나 전쟁에 나갈 때나 돌아올 때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인 것이 후에 춤과 유희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활동은 모두 생명과 생활의 보전과 유지를 위한 활동으로 이것은 후에 생활기술의 획득으로 발전해 나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사람들은 현재와 같이 과학적인 체육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나 선배나 선친들 혹은 친지나 이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이 보급되고 발전하며 사회생활이 복잡하게 변한 오늘날에서는 생활 기술의 내용도 여러 종류로 분화되어 체육에 있어서도 차츰 근육의 발달만 꾀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오늘날 처럼 생활이 복잡하고 바쁜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판단력과 결단성, 의지력 그리고 안정된 정서와 신체적응 능력을 길러야 한다.-2. 각종 의식과 춤춤은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춤은 신련의 축복과 가호를 일으키는 것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원시 시대의 춤의 종류는 그들이 당면한 행사나 목적에 따라 달랐다. 출진무는 남편이 전쟁에를 부렸기 때문에 노예들은 매우 비참한 생활을 했다. 서민은 상대적으로 노예보다는 좋은 생활을 했다. 귀족들은 서민들에게 일부의 땅을 줘서, 그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받아냈기 때문에 자유민이라고 해도 귀족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다.아테네의 국민은 시민, 외국인, 노예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노예는 전적으로 시민들이 사용하였다. 그들은 일할 의무만 있고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없었다. 외국인들은 노예처럼 일만 하지는 않지만, 역시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아테네의 노예는 수가 아주 많아 어떤 집에는 500명이나 되는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그리스 시대의 교육은 육체적인 미와 정신적인 미를 양면으로 강조 하였다. 그 당시의 사상가, 정치가, 교육자들은 대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의 발달에 협조하는 것이 양호한 국민의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육체를 아름답게 하려면 운동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즉 체육을 통하여 정신면에서도 발전하고 아름답게 되며, 이러한 교육은 음악을 통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들은 체조와 음악을 중요한 훈련과목으로 하여, 체조는 신체단련을, 음악은 정신교육을 하는 데 중요시했다.그리스 사람들은 노예들이 모든 일을 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인의 교육에서 직업교육과 생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시대의 교육은 일종의 장식품일 분이었다. 이런 장식품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다. 귀족들의 자녀에 대해 교육은 강압적이 아니었으며 자발적인 참여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다방면에 걸쳐 인격과 인성의 발달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러한 환경과 사회제도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체육을 중요하게 여겼다.2. 호머 시대의 체육호머(Homer) 시대는 보통 전설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기원전 776년 엘리스(Ellis)의 올림피아에서 제 1회 제전경기가 행해진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완전한 인간상으로서 지혜인(the man oh wisdom)과 실천인(the man of action)이라는 2개의 이상을란 사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기원전 776년 제1차 경기대회 이후 4년마다 한 번씩 대축제가 있었다.기원전 776년의 대회까지는 단거리 달리기 한 종목만 있어서 하루면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제 27차 대회(B.C. 686년)부터는 신을 찬양하는 관념이 강화됨으로써 경기의 종목도 많아졌지만 (예를 들면 권투, 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경주, 장거리 달리기 등) 경주 기간도 하루에서 5일까지 연장되었다.대회 참가자격의 심사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그리스의 혈동을 가진 자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기타 종족이나 노예들은 참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도덕상, 정치상, 종교상 결점이 없는 자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대회의 첫날에는 여성들의 관람을 금지했다.대회의 첫날은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제물로써 짐승을 바쳤다. 운동선수와 심판들은 모두 신 앞에서 선서를 하고 경기를 시작했다. 마지막 날에는 우승자에 대해 표창을 하는 의식이 있었다. 표창에서는 금으로 만든 소를 상품으로 받았고, 신이 있는 지역의 감람나무를 잘라 만든 감람나무 회관을 우승자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 우승자들에 대해 신은 가장 사랑하고 국가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하여 사원에 비를 세워주고 경기에 그의 모습도 조각해 두어 영원한 기념으로 남겼다.또, 유명 인사과 외국 손님과 함께 경축파티를 한다. 웅변가들은 그들을 찬양하고 시인들은 그들을 칭송하고 조각가들과 기타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미를 칭찬하였다. 우승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길을 개척하고 또 개선문을 만들어 그 개선거리에서 그들의 세금을 일생동안 면제해 준다. 각종 파티에서는 귀빈대우를 받고 관람 장소에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따라서 우승자는 가문의 영광뿐만 아니라 한 도시, 한 마을의 영광이기도 했다.그리스 초창기의 체육은 그 훈련 방법이 과학적이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도 스파르타에서는 군사훈련을 강력히 실시했기 때문에 많은 우승자를 배출했다. 스파르타에서는 선수들이 군사훈련에만 치중하였 그리고 벽에다 공을 치는 핸드볼과 세 사람이 삼각형으로 서서 두개의 공을 가지고 던지고 받는 트레곤 과 테니스와 비슷한 스파에로마키 또는 하르파스툼 등과 같은 종목이 청소년 사이에서 행해졌다.전기 로마인은 휴일에 대게 전차경주나 검투시합에 몰두하였는데 그리스제전의 주요종목이었던 경기는 일반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반면에 에투루리아에서 B.C. 264년경에 축제경기에서 등장한 피비린내 나는 검투사 시합은 호전적인 로마인의 열광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로마의 제전이 전기에는 경기와 연극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후기에는 거의 연극의 상연만이 되었다.로마의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무엇보다도 사냥일 것이다. 그들은 로마근교에 별장을 설치하고 그 별장에 친구를 초대하여 사냥을 즐겼으며 사냥에는 자연 그대로의 동물은 잡는 경우와, 어떤 일정한 구역 내에서 길러 놓아둔 동물을 잡는 경우의 2종류가 있었다. 별장에는 훌륭한 목욕장 시설이 있어 사냥이 끝난 뒤에는 목욕을 즐기고 탕녀와 볼게임을 하고 주연을 즐기든지 하였다. 따라서 로마황제나 귀족은 사냥이 단순한 유희나 훈련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거래의 시장도 되었다.무용은 가장 신분이 높은 로마인에 의해서 조금씩 행해지기 시작했으며, 의식적인 무용은 제물의식과 호전적 성격을 무용으로 보충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표현으로 무용의 상징성이나 미 등은 로마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었다.스포츠의 방법전쟁에 관한 명예로운 이야기, 영웅들의 행위, 전투의 성과가 곧 사유 재산과 명성을 좌우한다는 인식 등은 젊은이들에게 전술의 습득을 열망하도록 자극하였다. 젊은이들은 부모들을 본받고 그 훈계를 따름으로써 전술을 배웠고, 군사 기동작전의 소강상태 중에서도 중단 없이 지속되는 고된 신체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함으로써 전술을 익혔다. 규율은 엄격하여 심지어 죽음까지 초래하는 체벌이 아버지들 또는 군대의 상급자들에 의해 가하여졌다. 그러나 호전적인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순종은 엄격한 처벌에 의해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기수는 많은 팬을 모으고 그 기수의 상의의 색이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다. 검투사의 시합은 공화정 시대에는 제전에 편성되어 있지 않았으나 제정시대에는 제전의 중요한 종목이 되었다. 그래서 황제가 주최하는 제전 중에는 검투사 시합이 제법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가는 막대한 금액을 공식적 경기회를 하는 것에 낭비하였다. 그리고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하는 야망에 불타는 소장 정치가는 제전의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였기 때문에 사재를 털어서 보조하든지 사적으로 추가하여 경기회를 개최하든지 하였다.이렇게 하여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여 정권을 얻은 후 다시 잃어버린 재산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결국은 경기회에 쓰여 진 막대한 비용은 공적인 재산을 소비하는 셈이 되었고 많은 유능한 지도자들은 이 정책에 잠재한 부패를 인정하였지만 이러한 행위를 중지하여 자신의 정치 생활의 장래를 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로마인은 경기회나 제전을 경기의 이상이라고 하기보다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장려한 것이었다.4. 중국 체육과 스포츠 문화중국의 체육사인류문화 발생지의 한 곳인 중국은 세계 고대문명국가의 하나로 아시아 동쪽의 광대한 지역에 자리잡은 나라이다. 중국의 공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며 아시아 동부, 태평양서안에 위치한 국가다. 영토는 동쪽의 흑룡강과 우쑤리강이 모이는 곳으로부터 시작해 서쪽의 파미르고원까지 거리는 약5200㎞이며, 시차(時差)는 약4시간이다. 북은 막하(漠河)부근의 흑룡강으로부터 남쪽의 남해증모암사(南海曾母暗沙)까지의 거리는 약 5500㎞이다. 국토면적은 960만㎢이며, 전체 지구 육지면적의 약1/15,유럽대륙의 면적에 상당하며 러시아,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에서 면적이 제일 큰 국가다.중국의 대륙 해안선은 길이가 1.8만㎞이며 동남쪽은 바다를 사이 두고 한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와 마주하고 있다.수천 년 동안 중국은 고정된 사회패턴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가족제도와 조상숭배에 크게 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