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略環境이 自衛的 先制攻擊戰略 選擇에 미치는 영향- 제3차 中東戰과 韓半島를 중심으로 -제1장 서 론제2장 정당한 전쟁으로서의 자위적 선제공격제1절 정당한 전쟁의 범위제2절 자위적 선제공격제3장 전략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제1절 지리적 환경제2절 군사적 환경제3절 국내 환경제4절 국제 환경제4장 사례 분석 : 제3차 중동전제5장 한반도의 전략환경과 전략의 선택제1절 한반도의 전략적 환경과 선택제2절 한국의 선택과 구비조건제6장 결 론참 고 문 헌제1장 序 論본 연구의 목적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전략환경이 한국의 自衛的 선제공격전략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함으로써 한국군의 군사외교적 작전전략의 전환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한 국가의 전략을 결정하는 요소는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지리 등의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관련되나, 전쟁의 목표와 군사목표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는 전략개념 설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정치, 외교, 군사, 지리적 요소가 될 것이다. 즉 그 국가의 지리적 환경, 군사적 환경, 국내 정치적 환경, 국제 환경 등이 주 변수가 된다.자위적 선제공격 전략은 적의 침공징후가 명확한 상황에서 적에게 초전 일격을 허용할 경우 국가방위가 위태로울 때, 자위권을 발동하여 적의 침공 바로 직전에 제한된 목표에 선공을 실시하는 개념이다. 작전기술적 차원에서는 적국에게 기습을 활용하여 먼저 공격하는 선공을 의미하지만, 국제법이나 관례상 정당한 자위행위에 속하는 군사행동이다. 결국, 자위적 선제공격전략은 적의 기습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객관적인 기습공격의 징후를 전제로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는 예방전쟁이 될 수도 있다.이러한 중요성에 비추어 지금까지의 한국군의 작전전략에 대한 연구는 억제전략이나 위기관리이론, 군비통제 등 평시의 군사전략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진하였다. 특히, 韓國國防의 韓國化란 국방정책의 기본방향을 설정하였음에도 선제이론과 수행방법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진하였다.한국의 작전전략은 공세적 방어전략으로 선국한되었다.현재 일반국제법이나 UN헌장에서는, 국가의 개별적인 무력행사와 전쟁을 금지하고 있으며, 자위권은 단지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에 한하여 개별적 자위권과 집단적 강제조치 및 자위행위로 한정(UN헌장 2조4항, 51조))하고 있다. 이는 국가간 평화, 안정유지, 일국의 영토보존,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행사하는 모든 개별적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논자가 주장하려는 자위적 선제공격의 제약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선제공격은 자칫 국제여론의 악화와 외교적 고립의 위험이 있게 된다.이러한 무력의 전면금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으며, 그중에서 고바야시 히로야끼는 선제적 무력사용의 정당화를 주장하면서 무력(특히 군사력)에 의한 위협은 장기간에 걸치든가 再三 행하여질 경우는 도발로 간주되고, 이에 대한 경고 후의 선제적 무력 사용은 정당화 된다)고 하여 자위적 선제공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또한, 국제법상 국가가 불법적인 공격으로부터 자신, 또는 자기 소속원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무력을 행사했을 때, 그 행위가 현실적이며 압도적인 위협을 회피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배제할 수 없으며, 熟慮할 여유가 없고 자기보호가 필요불가결한 범위내의 것인 경우에는 자기보호라는 형식으로 정당화 될 수 있다.)한편 국제연합의 기구 구조상의 문제점으로 볼 때 UN헌장에서 집단적 무력행사만을 적법화한다는 것의 실효성을 보면, UN이 무력공격의 위협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즉, 이는 적대국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의 허용 결과가 되며), 현대전의 무기체계와 속도 및 위력의 증대는 2격에 의한 보복의 현실성을 인정치 못하게 된다.제2절 自衛的 先制攻擊자위적 선제공격 전략은 적의 침공징후가 명확한 상황에서 적에게 초전 일격을 허용할 시, 국가방위가 위태로울 때, 자위권을 발동하여 적의 침공 바로 직전에 제한된 목표에 선공을 실시하는 개념이다.) 작전 기술적 차원에서는 상대방에게 기습적인 방법을 활용하여 먼저 공격하는 선공을 의미하지만,한 군을 가진 국가의 부대가 채 전열을 가다듬고 전선에 전개하기 전에 제한된 목표를 조기에 획득함으로써 군사적 승리를 정치적 승리로 연결시키고자 할 경우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우세한 국가는 기습의 결과로 얻는 이익을 열세한 국가보다는 덜 절실하며, 우세한 국가는 기습을 시도함에 있어 덜 위험한 방법을 선택한다.)결국, 선제공격은 군사적으로 우세한 국가나 열세한 국가나 절망적인 대항을 하거나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 선택한다. 즉, 군사적환경이 불리한 국가는 先制공격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제3절 國內 環境한 국가의 국민성향, 정치, 경제 , 사회 등의 제반 현안들의 상황 등 국내적인 환경이 先制공격에 영향을 미친다.먼저, 국민성, 국민의 사기, 의지, 여론 등 그 국가의 국민정신은 그들 국가의 정책이 대내지향적인가 혹은 대외지향적인가를 결정한다. 이는 전략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며, 진취적이고 용감한 국민성을 가진 국가는 대외지향적인 정책을 추구하게 되고, 그 국가가 위협에 직면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전쟁일 수밖에 없다면, 선제공격의 선택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에 대해서 Rosalind L. Feirabend는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사회적 욕구형성이 높으면 체제적 좌절감은 더욱 커지고, 정치적 불안정성의 자극은 더욱 커진다)고 하였다. 또한, Quincy Wright는 국가간 전쟁의 원인 중에서 국내적 병폐 문제로부터의 전환으로써 국가간의 전쟁은 호전적인 성향에서 연유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Leonard Woolf는 현대의 독재자는 그 국가자신의 문제를 외국에 대한 비난으로 열광적인 애국심을 일으키는데 의존하고, 전쟁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전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내 갈등-엘리트 분열, 정치지도 그룹과 대중의 갈등, 경제 혼란-이 발생시 국가 지도자들은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린다든지 국민으로부터 인기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또는 외부와의 軍事 위기나 내부의 결속을 유발시킨다는라엘은 약 20년이 지나면서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다.먼저, 일반국민의 구조상 변화로 생긴 사상적 와해의 분위기가 문제화 되었다. 獨立 당시의 인구 구성에서 주를 이루었던 유럽 태생의 독립정신과 민족주의 정신이 강했던 사람들의 구성비율이 58%에서 33.5%줄고, 이스라엘 태생의 Sabra가 38.5%, 동양계 이민 출신이 28%에 이르면서 건국시의 구세대와 신세대 및 신이민들간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매우 크게 벌어졌다.)이것이 결국, Ben Gurion 이후 이스라엘의 국민적 내부 분열의 잠재적 요인으로 형성되었다.정치적 혼란은 Ben Gurion의 후계자로 등장한 Eshkol수상과 벤구리온 간의 정치적 이견과 불만이었다. 원래 Eshkol은 Ben Gurion의 정책을 계승하기로 했으나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 중심적인 정치 보다는 세계 전체 유태인의 理解 중심의 정책을 전개하였고, 외교에 있어서는 유럽이 아닌 대미외교 중심으로, 그리고 아랍 및 소련과의 關係개선을 도모하였다. 여기서 Ben Gurion은 기존의 마파이당에서 분리하여 Rafi당을 창설하여 정파간 대립의 심화로 집권정당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또한 경제적 침체상황이 이스라엘의 무기매입, 에너지 부족 등 旣存 이스라엘의 경제적 취약성과 국민들의 소비성향 증가, 대외 무역수지 적자 폭이 증가, 실업의 증가와 기술이 없는 이민자들의 증가는 경제난을 더욱 가중시켰다.)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이스라엘의 지도 계층은 아랍의 위협을 독립시의 이스라엘의 단결된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과거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안보 문제는 이스라엘 전체의 생존과 관련되고, 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탁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국방정책과 군사전략이 형성되었다.이와 같이 국내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과 함께 형성된 국가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강화는 낫세르의 위협에 대항하여 국가생존 전쟁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지리적, 군사적 취약성과와 정전체제의 무력화를 병행하면서 한반도 내 軍事 위협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위기 고조시 한국의 대응전략은 적에게 주도권을 상실하기 전에 선제공격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3. 國內 環境작전전략의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작전전략은 공세적 방어전략으로 선제공격의 개념을 배제하고 수세적인 戰略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략적 종심이 짧은 한국의 방위상 문제점과 전격전 형식의 단기속전속결전략의 북한과의 대전시 적의 기습에 의한 개전 초기 주도권을 상실한 채 수도권의 안전과 전방의 韓國 주력부대의 상실은 이후 반격작전의 능력 확보나 공세 이전의 가능성이 불확실하며, 만약 최초 방어에 성공한다고 해도 초전에 한국의 수도권 지역에서의 전장이 확대됨으로써 복구하기에는 치명적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이 채택하고 있는 수세적 자세의 전략개념의 문제이다.전쟁억제 측면에서도 전면전, 제한 목표 도발, 통제된 시험도발은 억제가 어느정도 이루어 지고 있으나 납치, 테러, 무장공비 침투,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등의 분란도발형의 도발은 억제가 실패하여 왔으며,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위기관리 차원의 연구와 공세적 抑制 및 응징보복적 억제에 대한 대안이 없으며, 지도부의 낮은 Risk taking level로 인한 명확한 의지도 부재한 상태이다.또한, 정책지도자나 학자들은 북한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과 그들의 서구식 정책결정과정의 합리적 사고를 할 것이라는 판단의 오류를 범하여 지금까지의 작전전략에 대한 연구는 평화를 위한 억제이론과 통일 후의 한반도 주변 강대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치중하였으며 작전술이나 작전교리에 대한 연구도 수세적이고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접근만 시도되어 온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여기에 21세기 초입에 등장한 햇볕정책의 영향과 최근 진보세력을 표방한 종북세력의 여론전에 이끌려 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되고,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림으로써 반공을 국시로 한 한국의 국가이념이 혼란에 .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Ⅰ. 서 론Ⅱ. 클라우제비츠의 생애와 전쟁론Ⅲ.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Ⅳ. 결 론Ⅰ. 서 론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적 국민전쟁 시대의 군사사상은 나폴레옹을 통하여 실천되어졌고, 클라우제비츠가 집대성함으로써 그이후의 모든 새로운 이론과 사상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클라우제비츠가 등장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시기였으며, 클라우제비츠는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서 전쟁을 체험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12년간에 걸친 사색과 연구, 정열을 가지고 불후의 명작인 『전쟁론(Vom Kriege)』을 집필하게 된다.그는 이 저서로 인해 근세 군사 이론의 원조가 되었으며,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란 명언은 전쟁론을 읽기는커녕 그의 책을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널리 인용하는 말이다.그의 저서인 『전쟁론(Vom Kriege)』에 대하여 미국의 전략사상가인 버나드 브로디는 “전쟁론은 그저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쟁론은 전쟁에 관하여 쓴 책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라고 표현하였으며, 원고를 작성하는 도중 한 번 읽고 버려지는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혀지는 책을 저술하겠다는 소망대로저서가 출판된 지 17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군인, 정치인, 외교관, 실업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군사적인 문제, 즉 전쟁이나 전략을 다루는 저서치고 그의 저서내용이 인용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그러면 클라우제비츠의 생애를 통해 전쟁론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전쟁론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속에 담긴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에 대하여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Ⅱ. 클라우제비츠의 생애와 전쟁론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프러시아의 마그데부르크 부근에서 태어나 1831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제비츠는 할레대학 신학 교수였던 할아버지로부터 탁월한 정신과 합리주의버지로부터 다양한 성향의 장교들을 보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다.이러한 영향으로 1792년 12세때 군에 입대하여 1793년 13세에 제1차 대프랑스전에 참가 마인츠 공성전, 호겐젠 진지전 등의 실전을 통하여 전쟁경험을 쌓았으며, 1801년 『크리크슐레』라는 베를린 사관학교에 입학, 평생의 스승이었던 샤른호르스트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하여 군생활의 전기인 전쟁연구에 매진하게 된다.1803년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부관으로 발탁되었으며, 1806년 아우구스트를 따라 나폴레옹과의 대프랑스 전투에 출전하였으나 아우에르쉐테트 전투에서 황태자와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이시기에 프랑스와 조국 프러시아를 객관적으로 비교 관찰하고, 군사적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1808년 포로에서 풀려나 귀국후에는 샤른호르스트의 보좌관으로 패전한 프러시아의 재건을 위한 군제개혁의 이론적 틀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육군대학의 교관으로서 황태자에게 군사학을 강의함으로서 군사학 연구를 통한 전쟁론을 배태케 하였다. 1812년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동맹군으로 러시아 원정에 올랐을 때 클라우제비츠는 황제에 반하여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하여 러시아군의 대령이자 참모로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1814년 프러시아군에 복귀후 1815년 워터루 전투시 제3군단 틸만장군의 참모장으로서 프랑스 그루쉬군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여 나폴레옹을 패퇴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18년 소장으로 승진한 그는 1930년까지 12년간 모교인 베를린 사관학교의 교장으로서 재직하면서 불후의 명저인 『전쟁론(On War)』 저술에 착수하였다. 1830년 제2포병감으로 전출된후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인의 반란에 대한 파급효과에 대비한 그나이제나우의 참모장으로 임무수행후 제2포병감으로 복귀한지 불과 9일만에 콜레라로 사망하였다.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집필하면서 “2~3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책, 전쟁연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한 번 이상 읽는 책을 만들겠다”는 남아있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이면서 전쟁론 집필에 동참하였던 아내 마리에 의해 1832년 출판하게 되었다.Ⅲ.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클라우제비츠의 군사사상이 결집된『전쟁론』은 제1부 1편 ‘전쟁의 본질’로부터 총 3부 8편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은 ‘전쟁의 본질’로서 ‘전쟁’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으로 정의 하였으며,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 이라는 명제에서 보듯 정치와의 관계를 통하여 전쟁의 일반적인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제2편 ‘전쟁이론’에서는 전쟁이론의 가능성과 주요난맥상을 개관하고 있다. 제3편 ‘전략’에서는 ‘전략’이란 “전쟁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전투의 운용”이라고 정의하며 전략의 제요소와 운용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제4편 ‘전투’에서는 핵심적 군사활동으로서 적의 격멸과 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전투의 기본개념과 주력회전 개념에 대하여 논하였다. 제5편 ‘전투력’에서는 싸움 자체가 아닌 싸움의 필수조건으로 간주되는 전투력의 수량과 편성, 전투이외의 상황, 전투력의 유지, 지형과 지면의 일반적 관계 등에 관하여 다루었다. 제6편 ‘방어’, 제7편 ‘공격’은 상호 대조되는 내용으로 전편의 기본관점을 토대로 분야별 이론들을 예증하고 설명하고 있다. 제8편 ‘전쟁계획’에서는 제1편에서 논의된 중요한 주제들을 재조명하고, 전쟁전반의 설계에 대하여 논의하였으며, 특히 절대적 전쟁과 현실적 전쟁과의 관계를 고찰하였다.이와같이 『전쟁론』에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몽으로 체험한 나폴레옹 전쟁 등 전사에 바탕을 두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를 요약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의 이론 가운데 일반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핵심적인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건전한 전쟁철학적 방법론을 보여주었다.클라우제비츠는 체계적인 철학공부를 하지 않았으나 전쟁론은 칸트의 비판철학, 헤겔의 변증법 등 당시 독일의 풍부한 철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떻게 결부시킬 것인가하는 것이 기본문제였다. 이에따라 클라우제비츠는 절대적 전쟁을 이론적 또는 이상적 전쟁으로 제시한후 이를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의 현실적 전쟁을 설명하는 논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경험을 중시하여 “병학에 있어서 모든 철학상의 진리보다도 경험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였으며, 전쟁이론을 구성함에 있어 프레드리히 및 나폴레옹의 전쟁을 실전적 경험으로 비교 제시하였다.둘째, 전쟁과 정치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킨 점이다.클라우제비츠는 알리는 글에서 “전쟁이란 다른수단을 가지고 행하는 정치와 다를바 없다”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관점을 제시하였으며, 제1편 제1장에서 “전쟁은 다른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에 불과하다.” “전쟁은 정치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도구이고, 정치적 교류의 연속이며 다른수단에 의한 정치적 교류의 실행이다.” “정치적 의도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이 없는 수단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전쟁을 정치적 목표의 틀안에서 조명한 것으로 전쟁의 단기적인 목표가 군사적인 것일지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정치적인 것이며, 전쟁을 정치속에 포함시켜 정치의 한 수단으로 만들었고, 전쟁을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민전쟁시대 이전의 군주나 영주의 쟁탈전, 직업적 용병들의 전쟁과 같이 시민들과 아무관계가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볼 때 전혀 새로운 주장이었다.셋째, 전쟁의 본질을 규명했다.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확대된 양자 결투로서 양자는 공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물리적 폭력으로 상대방을 강요할 것이며, 이들의 당면 목적은 적을 타도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추가적인 저항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보았으며, 그러므로 전쟁은 “적을 굴복시켜 자기의 의사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폭력, 즉 물리적 폭력은 전쟁의 수단이며,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전쟁의 목적이다. 폭력의 운용에 있어서 전유발하지 않고 적을 무장해제시키거나 타도할 수 있다는 인도주의자들의 견해에 반하여 폭력의 극단적 운용을 통하여 적의 의지를 무력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러한 폭력의 극단적 운용은 “전쟁은 일종의 폭력행위이며, 그 폭력의 운용에는 한계가 없다”는 명제에서 볼 때 누구나 상대방에게 법칙을 강요하여 이론상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호작용이 생겨나 힘의 무한계적 노력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전쟁의 개념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론상 추상적으로 한계를 갖지 않는 폭력행위이지만 현실세계로 돌아가면 다른양상을 띄게 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결코 고립된 행동이 아니며, 전쟁은 지속기간없이 단 한 번의 타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폭력도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현실세계에서 전쟁의 결과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현실적 제한과 실제 생활의 개연성이 극단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쟁에 사용되는폭력의 범위와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원천적 동기인 정치목적이며, 이러한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중요성과 에너지의 정도에 따라 섬멸전쟁에서 단순한 무장관측 활동에이르기까지 온갖 유형의 전쟁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결론을 도출하였다.넷째, 인간의 정신적 및 비물질적인 요소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클라우제비츠는 전략에서 전투의 운용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서로 상이한 유형인 정신적, 물리적, 수학적, 지리적, 통계적 요소로 구분하였다. 이를 요소별로 살펴보면 정신적 요소는 정신적 특성과 그 영향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것이 속하며, 물리적 요소는 전투력의 규모, 편성, 무기체계 등이 속하며, 수학적 요소는 구심적 기동과 원심적 기동이 속하는데 그 기동의 기하학적 본성이 계산의 가치를 가진 경우에만 해당된다. 지리적 요소는 감제지점, 고지, 하천, 삼림, 도로 등의 지형적 영향이 속하며, 통계적 요소는 보급수단이 속한다. 이중 당시의 전략사상가들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명제로서 정신적 요소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