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위화도회군은 그야말로 이성계 일생 일대의 선택이었다. 이성계는 당시 고려조정에 있어가히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대 받고 있는 장수로 일생의 전장에서 단 한번의 패배도 없었던용장중의 용장이었다.젋은 시절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고구려 고토회복의지에 맞물려 원의 쌍성총관부함락에내조한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과 이성계는 쌍성총관부 수복에 지대한 공을 세워일약 고려조정에 등장하게 되고 이후 수십년간 고려에 침략하는 원나라와 왜구의 침략을격퇴하며 최영과 더불어 고려 최고의 용장으로 이름을 떨친다젋은시절 수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온 나하추를 함경남도 일대에서 쳐부수었으며이후 원나라 순제의 군대를 받은 덕흥군일파 역시 의주에서 격파하였다. 1377년 이후엔 계속고려를 괴롭히던 왜구 토벌을 위해 대대적으로 군사를 남으로 몰아 충청도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섬멸하였으며 경상도 전라도의 지리산일대에서 또다시 왜구를 크게 쳐부수었다1380년에는 아기바투가 이끄는 대규모의 왜구를 황산일대에서 섬멸 하였으며 1385년 여진의 침입이 있자 다시 군대를 북으로 몰아 이들을 격퇴하였고 다시금 남으로 군대를 몰아 남은 왜구의 잔당을 모조리 섬멸하였다위같이 이성계는 30여년간 전쟁터에서 살았으며 한번의 패배도 하지 않은 불패의 용장이었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이성계의 전공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일약 문하시중에 오르며최영과 더불어 고려조정의 실권자가 된다하지만 원나라가 망하고 주원장의 명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면서 시대는 급변한다.명은 고려조정에 공민왕때 수복하였던 철령위이북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 하였고 당연히고려조정은 속국이 되라는 말과 같은 명에 반발하여 고려와 명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고려조정은 급기야 명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위한 전초기지로 요동을 쳐야한다는 주장이선택되게 된다. (여기에는 최영이 이성계의 사병이 너무 많은 점을 염려하여 이를 견제하기위해 요동정벌이란 명분을 내세워 이성계를 압박하였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나라의 국운을건 일대의 정벌에는 맞지 않는 비약적인 논리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제외하겠다.)이성계는 요동정벌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고려조정의 대세는 요동정벌로 흘러 갓기 때문에결국 요동정벌에 찬동하게 되고 요동정벌을 떠나게 된다요동정벌에 동원된 군사의 수는 다음과 같다.팔도도통사로 임명된 최영은 후방의 위협 때문에 개경에 남았다 휘하 5 원수우군도통사 조민수 휘하 12 원수좌군도통사 이성계 휘하 16 원수좌우군 3만8,830명수송대 1만1,634명말 2만1,682필도합 5만명 정도 였으며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10만대군이라 불렀다. 각각의 원수급이1600여명 정도의 군사들을 통솔 하였으며 최영과 그 휘하의5명의 원수들은 다가올 왜구의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개경에 남았다.이는 당시 고려국력으로 동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국력이었으며 다시 말하면 이 부대가패하면 고려 국방력의 상실을 의미한다.1388년4월 18일 원정출발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도착5월 22일 위화도 회군결정6월 1일 개경도착6월 3일 개경함락위와 같이 위화도 회군은 전개 되었다. 4월 18일 왕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한 이성계는 20여일간의 행군으로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위화도에 도착하니 여름장마가 시작되어압록강의 물이 불어 건너 갈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후방의 보급또한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대다 탈영병이 속출하여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여러 악재가 겹치자 이성계는 조정으로 서한을 보낸다. 그유명한 4불가론이다.1. 작은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맞지 않다.2. 여름에는 농사를 지어야지 전쟁에 동원될 수 없다.3. 무더운 장마철 활의 아교가 녹아 쓸 수 없고 전염병이 돌 우려가 있다.4. 대군이 원정을 나간 동안 후방의 왜구가 염려되는 바다.요동정벌이 불가 하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약 2주간을 머무르며 오매불망 왕의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 오는 답장은 서둘러 요동을 정벌하라는 왕명뿐 결국이성계는 서한이 도착한 날 밤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찾아가 회군을 설득하고 다시 한번요동정벌을 중지해 달라는 서한을 보낸 뒤 바로 회군에 나선다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의시작이었다.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이 있다. 과연 요동정벌을 이성계가 단행하였다면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답은 그시대 국제 정세를 들여다 보면 바로 알수 있다.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출정년 바로 직전에 당시에 명의 최고 명장중 1명인 남옥이 15만 병력을 동원하여 몽골세력을 괴멸상태로 만들어 버렸으며 출정년 당년해인 1388년 명장부우덕의 20만 대군이 원의 잔존세력 나하추를 요동에서 섬멸시킨다. 또한 회군당시 요동지역을 책임지던 주체는 미래의 영락제로 황위에 오르는 인물로 당시 그 밑의 요동수비군만1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다. 즉 요동정벌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10만 요동수비군을무찌르고 후에 요동을 다시 되찾기 위해 오는 남옥과 부우덕의 수십만 대군을 막아내야만비로소 이루어지는 정벌 이었다. 고려의 5만군세 중에서도 4만여명 정도만이 전투부대였으며 이마저도 보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고 탈영병이 부지기수인 상태였다. 또한 이미명나라에 의해 잠재적인 호응세력이 괴멸한 상태에서 명나라와 전면전을 펼친다는 것은 수십년간 전쟁터에서 살아온 이성계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여기 까지만 짚고 다시 위화도회군의 과정으로 돌아가 보자.5만에 육박하는 대군의 행군속도는 하루에 약 20~30km 정도이며 많이 간다면 40 km 정도이다. 개경에서 위화도까지의 실 거리는 약 400km 정도로 19일을 갔으니 정상적인 속도로 행군 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돌아 올 때는 보면 9일만에 개경 앞 불과 수십리 까지당도한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하게 회군병력을 인솔 했음을 알수 있다. 그 이유 는 이렇다. 5만의 군대가 빠지긴 하였어도 아직 개경의 최영에겐 5원수 휘하의8천여 병력이 남아 있으며 왕성 수비대와 기타 주변의 방어군을 끌어 모은다면 충분히 수성전을 펼치며 버틸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수록 불리해 지는 것은 명분이 없는쿠데타를 일으킨 회군파였다.요동정벌로와 회군로고려조정엔 아직 1만에 육박하는 수비군이 있으며 명장 최영이 작정하고 수성전을 펼친다면 개경함락이 단기간에 이루어 질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성계휘하의 원수들에 대한 통제력 역시 서서히 잃어갈 것이고 거사를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았을것이다. 이렇듯 불리하게만 보이는 이성계의 회군파는 어떻게 회군을 결정하게 되었을까.이성계는 4불가론을 담은 서한을 보내며 분명 고려조정의 동태를 살폈을 것이다. 때마침요동정벌군이 떠난 직후 다시금 쳐들어온 대규모의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최영이 5원수의8천병력 전부를 남하 시켰다는 소식역시 듣게 되었을 것이고. 회군의 적기라고 판단한 이성계는 그들 5원수의 병력이 다시 복귀하기 전에 개경에 당도 하기위해 회군을 서두르게 된다. 이 모든 정황들은 당시 이 모든 결정 이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판단에서 나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