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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리 엘리어트로 본 강제된 도시화 그 이면의 전경
    빌리 엘리어트로 본 강제된 도시화 그 이면의 전경영미문화의 이해 레포트로 빌리 엘리어트를 선택한 것에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이전에 이미 한 번 영화를 보았었기 때문에 그 작품성에 의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번에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면서 관점의 변화는 있었다. 그것은 도시화의 이면에 대한 시각의 변화였다. 그에 대한 내용은 이 레포트의 주이므로 이후 본론에서 다루기로 한다. 또 다른 변화는 영화를 보는 목적의 변화였다. 이전에 볼 때에는 주인공이 나온 포스터의 모습에 호기심으로 임했지만 이후에 또 보게 되면서는 세세한 부분의 모습에 주목했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아니 주목하지는 않았던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인 재키 엘리어트와 형인 토니 엘리어트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우리나라의 도시화 모습에서도 새겨져 있던 그런 풍경이었다.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조그마한 북부 지방의 더햄 주에 살고 있는 11살 꼬마이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 바대로, 또 시대의 남자에 대한 남성성의 요구대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레를 하는 여자 아이들을 접하게 되고, 그는 한 눈에 발레라는 우아한 몸짓의 운동에 빠져들게 된다. 돈이 없어 발레 교습서를 몰래 훔쳐서 연습하고, 그런 그를 발레 선생인 윌킨슨 부인이 눈 여겨 보게 되면서 권투 연습 대신 발레 연습을 하게 되는 빌리 엘리어트는 얼마 안 가서 권투 선생의 고자질로 그간의 행보가 들키게 된다. 그의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는 단호히 그의 발레 연습을 막았지만, 이미 그의 논리 자체가 빌리 엘리어트에게 들어먹히지 않았다. 단순히 남자이기 때문에 발레 대신 축구나 권투라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그의 아버지의 논리와 하고 싶은 운동인 발레를 고집하는 빌리 엘리어트의 대립. 그리고 그런 손자에게 자신의 어렸을 적 이루지 못했던 발레리나의 꿈을 대입하는 할머니. 결국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 선생을 찾아가 몰래 연습을 받기 시작하고,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게 된 발레 선생은 그에게 런던의 로얄 발레 스쿨에 오디션을 볼 것을 권한다. 그의 아버지가 빌리 엘리어트와 친구가 체육관에서 연습하며 즐기는 것을 보고 한 마디 하려 하자 그는 그 앞에서 지금껏 연습했던 발레 동작을 선보이며 자신의 재능을 막지 말아달라고 몸짓으로 내뱉는다. 그의 재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그의 아버지는 결국 그를 적극적으로 돕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문제는 결코 쉽지 않았다.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는 마을의 탄광 폐쇄에 대한 파업 노조에 적극 참여하며 굴복했던 자들을 몰아세우던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계속적인 데모에 참여하다가는 아들의 런던 로얄 발레 스쿨 입학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아들에 대한 부정에 이끌려 데모를 포기하고 광산으로 돌아간다. 그것을 본 큰아들 토니 엘리어트는 오열하지만 그의 반대는 오래가지 않고 누그러진다. 항상 티격태격하는 그와 그의 동생 빌리 엘리어트이지만 도시화의 커다란 사회적 압박에서 그들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빌리 엘리어트는 오디션에 합격해 그의 꿈을 이루게 되고, 영화는 그가 성장한 후 그의 바람대로 날아오르며 끝이 난다.이제 영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논제로 들어가 보자. 당시의 마가렛 대처 수상은 수지가 맞지 않는 탄광들을 폐쇄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도시화로 인한 전통적인 탄광촌 마을의 붕괴를 그들은 왜 이토록 반대했던 것인가. 서론에서 밝혔듯이 이 영화를 두 차례 보면서 나의 도시화에 대한 시각은 시간적 공백과 학습에 의해 변하게 되었다. 이전에 이 영화를 처음 접할 때는 그들의 데모를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도시화가 진행되면 더 살기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4년여 시간이 흐른 뒤의 지금은 강압적인 도시화에 맞서는 것은 당연한 저항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저항이 성과를 거두기는 극히 힘든 일이다. 또한 도시화가 오히려 탄광촌 생활보다 더 나은 삶의 만족을 보장해 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대처 수상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논점은 도시화에 숨겨진 강제된 근대성이다. 강제성이라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폭력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이 말은 곧 도시화의 강제성이라는 것이 도시화를 위한 사회적 폭력이라는 것을 뜻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80년대의 영국에는 한창 도시 근대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을 때이다. 과거의 문화적 산물이 다시 조명 받는 오늘날이 아닌 20여 년 전의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 국가들은 물질적 발전만을 그들의 목표로 삼아 전진해 왔다. 그때의 그들에겐 행복이란 곧 물질적 축복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무조건적인 물질적 추구로는 행복을 거머쥘 수 없음을 많은 이들이 깨닫고 생각을 바꿔나가고 있다. 그래도 우리의 생각 속에는 항상 물질적 만족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지배적이다.우리 문학 중에 이런 도시화를 비판하는 소설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곳은 서울의 재개발 지역이고, 시대적 배경은 70년대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사는 곳의 상황과 많이 비슷한 모습이다. 강제 철거가 돈을 보장하지도 않고, 직업을 보장하지도 않게 되는 비극적인 도시화의 문제점을 이 소설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잘 계획된 도시화는 많은, 적어도 물질적인 풍요만은 가져다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의 준비가 덜 된 정책이라면 주민들에게 기존의 정서적인 풍요함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면(생계적인 측면)마저 앗아가는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집안의 영희는 심지어 순결도 잃고, 웃음마저 잃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기에 실제보다 조금 더 비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는 게 사실이다. 빌리 엘리어트란 영화가 실제 더햄 주의 탄광 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마가렛 대처 수상의 도시화 정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잘 계획되었을지라도 급변한 삶의 터전에서 혼란 없이 물질적 풍요만을 얻게 되리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도시화 정책이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소수의 부유한 층을 더 배부르게 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어쩌면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는 일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문/어학| 2012.04.24| 3페이지| 1,0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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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포레스트 검프`로 본 아메리칸 드림과 이상 상실, 그리고 그 대안
    -아메리칸 드림과 이상 상실, 그리고 그 대안-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다. 평범한, 아니 보통 사람보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심성이 착한 포레스트 검프가 아무 기반 없이 혼자의 힘으로 몇 번씩이나 직업을 바꾸고, 바꾸는 직업마저 성공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살아가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회. 작가와 감독은 그 점에 주목해 영화의 흥행을 예상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평범한 많은 수의 미국인들의 소망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의 이상적인 희망을 뜻한다. 또한 다른 의미로 외국인들이 미국에 가서 이런 삶의 질 향상을 기대하게 되는 심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기대심리는 과거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을 하던 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근원을 짐작할 수 있다. 청교도들이 인디언들과 싸워가면서 삶의 기반을 잡아갈 때 타국의 신분이 미천했던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며 평등한 미국민으로서 살 수 있었고, 이것이 곧 아메리칸 드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흑인 노예 제도가 사라지면서 아메리칸 드림에는 흑인들도 참가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 때부터가 아메리칸 드림의 정의가 확실해진 그런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아이큐가 75밖에 안 되는 저능아로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포레스트 검프를 잘 키워내기 위해 몸까지 팔아가며 교육에 열중한다. 다행히도 일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포레스트 검프는 그 곳에서 인생의 목표가 된 제니를 만나게 된다. 지능은 낮았지만 순수했던 포레스트 검프에게 손을 내민 그녀는 같이 나무에서 별 구경도 같이 한다. 어느 날 다리 교정기를 끼고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피해 제니읨 말대로 뛴 포레스트 검프는 교정기가 부서짐과 동시에 앞으로 질주하며 달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 장면은 상당히 상징적인 복선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화 초반 앞으로의 전개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틀을 벗어던지고, 앞으로 질주해 괴롭힘을 피해 달려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첫 번째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한 포레스트 검프가 성장한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달리다가 우연히 미식축구장에서 눈에 띄어 선수가 되는 것은 작가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표현의 출발점이다. 앞으로의 포레스트 검프의 삶의 여정이 이 첫 번째 직업에서 출발한다. 검프는 대학 진학도 이 미식축구로 문제없이 마칠 수 있었고, 군입대도 해서 또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된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 곳에서 제대 후 새우잡이를 꿈꾸던 부바를 만나게 된다. 또 댄 중위도 만나게 되는데 베트콩의 습격으로 댄 중위는 무릎 아래로 두 다리를 잃게 되고 부바는 죽는다. 군에서 부상으로 인해 병원에서 요양을 하던 포레스트 검프는 우연히 탁구를 접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서도 두각을 발휘한다. 국가대표로도 참가한 그는 말 한 마디로 많은 고아고출연료를 얻게 되는데 이 돈으로 그는 새우잡이를 시작한다. 방황하던 댄 중위가 같이 동참하면서 폭풍을 계기로 이들은 무사한 돈을 벌게 된다. 큰 회사까지 차리게 되는데 댄 중위가 ‘애플’사에 투자하면서 더 큰 부자가 되는 것 또한 자수성가해 부자까지 되는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되는 모습을 잘 드러낸다. 아마도 이 시점까지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경제적 의미로의 아메리칸 드림 실현에 대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포레스트 검프가 명성은 얻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소시민에서 부와 명성을 얻는 이상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할 때 포레스트 검프는 이 때 그것의 완성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는 제니가 떠나고 3년간 미국을 횡단하며 유명세를 치른다. 그리고 영화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면서 제니와 결혼도 하게 된다. 제니는 병이 악화되어 둘 사이의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포레스트 검프의 이야기이다.포레스트 검프에 드러난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명대사가 하나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얘기가 그것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어떤 걸 가질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말은 곧 어떻게 어떤 지위에서 태어났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살아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평등과 자유를 연상시키는 나라 미국이기에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자수성가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따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이면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지는 미국 사회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제는 소위 엘리트 그룹의 인재들이 주도해가는 미국 사회임에도 큰 나라이기에, 능력이 있다면 부와 명성을 가져오기가 수월한 나라이기에 아메리칸 드림은 아직도 건재하다.피츠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또한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가자 온갖 술수를 동원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이용해 사랑을 되찾고자 하는 개츠비는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한 면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상을 뜻하는 아메리칸 드림에도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이상 실현은 곧 미국사회에서 더 이상 순수한 이상 실현은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본디 아메리칸 드림의 정의에는 행복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단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로 정의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1931년 제임스 애덤스가 ‘아메리칸 서사시’란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아메리칸 드림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모든 이의 삶이 보다 훌륭하고, 값지고, 알찬 땅, 각자의 능력이나 성취한 바에 따라 기회가 제공되는 땅에 대한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이 정의대로의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철저한 기업 사회가 된 미국에서는 이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펑범한 사람이 자수성가한 사례는 극히 보기가 힘들어졌다. 미국이 희망의 땅으로 불리며, 수많은 이민자들을 모았던 과거의 영광과는 대비되는 사실이다. 이제 미국 안에서도 명백한 계급이 존재한다. 다수가 성공의 길로 선택하는 대학 진학은 명문 사립대의 비싼 등록금 때문에 첫 번째 벽에 부딪히게 되며, 이 안에서도 소수의 사람만이 상위 사회에 진출한다. 이제 아메리칸 드림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대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없어 보인다. 이전의 많은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국민 모두에게 노력하는 만큼의 성공을 약속했던 미국은 이제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국의 부유층에게 더 부유함을 주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는 가난한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점점 더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두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설문조사를 보더라도 자국민들은 이제 아메리칸 드림은 실현하기 힘든 정말 이상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다른 국가, 다른 기업을 상대로 돈을 벌어들여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자국민들에게 이제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상이 되어버렸더라도 여전히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존재한다. 그들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보다는 기존의 미국 사회로 편입하는 것이 더 성공하는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그 선까지이다. 그 이상의 성공은 지금 버티고 서있는 미국인들조차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12.04.24| 3페이지| 1,000원| 조회(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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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해군, 외교가로서의 재조명에 대한 탐구
    광해군, 외교가로서의 재조명에 대한 탐구1.광해군의 삶광해군은 조선왕조 제15대 왕이다. 1575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다.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이다. 이름은 이혼(李琿), 본관은 전주,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며 비는 판윤 유자신의 딸이다. 당시 선조는 몸이 약했던 정비인 의인왕후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자 14명이나 되는 후궁들의 왕자들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에게 사랑받던 인빈은 신성군을 세자로 앉히려 했다. 광해군이 자질로서는 유력했으나 선조는 이 때문에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다. 더군다나 선조는 광해군이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살에 이르자 더이상 왕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서인의 좌의정인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유성룡 등과 함께 광해군의 책봉문제로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진 정철은 경연에서 "나라가 어려울때 빠른 시일내에 세자를 책봉하는것이 현명하다." 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했다.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선조는 신성군을 모함한다는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사 정철은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가게되고, 동인은 이 일을 처리하게 되는데 많은 서인들을 외직으로 쫓아버리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 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이 일 처리문제로 인해 동인이 남,북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어, 건저문제를 통해 서인에 대한 보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비록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비록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고 궁궐 조성공사에 힘을 다하여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덕궁·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여 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에 힘썼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여 명에서 원군요청이 있자 강홍립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사이에서 능란한 외교솜씨를 보였다. 일본과는 기해약조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고, 회답겸쇄환사로 오윤겸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쇄환하였다.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선조실록 등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오늘날 광해군의 공과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측면이 있다. 묘호는 광해군지묘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인조 이후로 줄곧 안 좋았다. 폭군이면서 실정을 일삼는 임금으로서 연산군과 같이 왕호를 받지 못한 비운의 임금이다. 망나니 짓을 일삼던 연산군과는 달리 폭군으로서의 면모는 왕권강화책이자 당시로서는 상황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았던 때라 그에 대한 복위 여론은 지속되어오고 있다.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외교문제가 더욱 중시되었고, 이런 시대상황에 광해군의 외교능력은 재평가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시대의 스위스 중립외교를 보는 듯한 광해군의 외교철학은 일본, 미국, 중국 등의 강대국에 둘러싸에 명군의 화력은 약했기 때문에 명군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육성된 조선의 조총수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작전통제권 없이 명군에 배속된 존재였던 조선군은 1619년 3월 후금과의 심하 전투에서 대패한 뒤 후금에 투항했다. 조선군이 심하 전투에서 후금에 패해 항복한 뒤 명의 반응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일부에서는 조선이 명을 돕기 위해 파병했다가 수천 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니, 조선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강홍립의 항복이 고의적인 것이라고 의심했다. 명에서 이 두 입장을 보인 사람들의 속셈은 사실 똑같은 것으로 조선에서 다시 한 번 원병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가장 강력하게 조선으로부터 원병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유명한 서광계였다. 서광계는 1619년 6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선에 재조지은(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한 것을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을 베풀었으니 다시 한 번 징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자신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해줄 것을 자청했다. 조선은 의리를 아는 나라이니 설득이 가능할 것이며, 만일 설득이 안 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파병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만일 조선이 명의 재파병 요구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광계는 조선을 감호해야 한다는 이른바 조선감호론을 폈다. 19세기 말 임오군란 직후 청이 위안스카이를 보내 10년 이상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감호란 명이 직접 관리를 파견해 조선을 통치한다는 의미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을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명의 조야에서 간간이 나온 적이 있었기에 조선감호론이 제기됐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광해군과 신하들은 모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광계의 조선감호론은 조선이 후금의 위협에 굴복하여 친교를 맺는 등 이미 후금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때문에 광해군은 서광계가 상소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사실과 다르니 명에 사신을 보내 이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 장본인이 바로 광해군 자신이라며 압박했다. 조-명 동맹의 균열을 가져온 사람이 바로 광해군의 친후금정책이라는 것이다. 신료들은 광해군을 압박하기 위해 감호론의 실상을 과장해서 보고했다. 비변사에서는 명 조정에서 조선을 의심하는 사람이 서광계 한 사람만이 아닐뿐더러 구경이 황제에게 건의한 내용도 서광계의 뜻과 같으니 철저히 해명하지 않으면 엄청난 화가 닥칠 것이라며 광해군을 협박했다. 그럼에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정구는 명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청의 주목적이 조선에 대한 감호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인 양 과장했다. 나아가 그는 감호의 의미도 서광계에 비해 훨씬 강력하게 보고했다. 서광계는 감이란 그 정형을 살핀다는 것이라 했는데, 이정구는 감이란 그 나라의 정형, 즉 정치와 형정을 감독하는 것이라 과장한 것이다. 이렇듯 광해군의 신하들은 명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다. 당시 광해군의 왕권강화책도 이런 신하들의 일관된 사대주의를 무너뜨리고,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환이기도 했을 것이다.3.인조반정인조반정 이후 세력은 조선 멸망 때까지 집권했고, 그 결과 광해군은 최근까지 거의 400여 년을 역사의 음지에서 신음해야 했다. 광해군에 대한 복권이 시도된 것은 최근이었다. 여러 명의 역사학자들이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즉위 후에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실시하고, 실리외교를 추진하는 등의 정책으로 전란 극복에 일정한 공을 세웠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먼저 광해군은 스스로 한 당파의 영수로 자임하면서 고립을 자초했다. 물론 광해군의 자리에서 대북을 총애한 것은 이해할만 하다. 선조 39년(1606)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영의정 유영경 등이 소북이 되어 영창대군을 지지해 위기에 빠졌을 때 정인홍 중심의 대북이 광해군을 지지해 어렵게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즉위한 이상 군주는 특정 정파의 이해를 대변해서는 안 되었다. 광해군은 이런 원칙을 무시하서인은 물론 북인들과 뿌리가 같았던 남인들까지 동조했던 것은 광해군이 자초한 것이었다. 광해군이 대북 당수가 아니라 당파를 초월한 국왕의 자리에서 정국을 이끌었다면 인조반정은 발생하지 않았다. 의정부를 각 당파 영수들에게 주고 집행부서인 육조를 대북에게 주는 식으로 정국을 운용했다면 서인과 남인들이 쿠데타까지 결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모 문제로 제1당 서인과 제2당 남인을 축출하고, 북인 일부에게 정권을 모두 주다보니 다른 당파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어 쿠데타 음모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반정 직후 대북정권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강했을 것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반정 정권이 광해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결과 극단적인 친명 사대주의 정책을 채택했고, 병자호란의 비극을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집권자가 선호하는 길이 아니라 가기 싫은 길을 선택했을 때 성공한 예가 많은 것도 역사의 교훈이다. 보통 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를 직계, 후궁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방계라고 하는데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이른바 방계승통으로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본인에게는 큰 오점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중신들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 받게 된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그의 지지파인 대북파가 앞장서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의 왕족과 그들을 지원하던 소북파와 서인, 남인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였으며 인목대비마저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켜버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인 능양군을 중심으로 그동안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은 이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으로는 능양군이 추대되는데 이것이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이다. 그 후 18년다.
    인문/어학| 2012.04.23| 5페이지| 1,000원| 조회(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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