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정치중국역사 속의 권력 구조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환관의 존재인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중국의 환관은 한당명의 나라가 건국되고 멸망하는 동안 꾸준히 권력을 행사하던 존재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환관의 정치참여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본디 환관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궁에서 일하는 거세된 남성을 말한다. 왕은 많은 여자들이 기거하는 궁궐에서 질서와 순결 및 비밀 등을 유지하고, 최측근에서 자신을 도와줄 심부름꾼 같은 존재로서 환관이 필요했다. 환관은 신하와 달리 왕의 사적 필요성에 의해 왕의 뒤에서 일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환관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정치적 위치나 권력은 나라 전체를 흔들고 왕을 폐위시킬 정도로 막강했다.역사적으로 환관정치가 막강했던 시대를 보면 한당명대인데, 후한의 십상시, 당나라의 고력사, 명나라의 왕진과 위충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후한은 어린황제가 등극하면서 외척정치가 이루어졌고, 환관들이 이를 몰아내면서 권력을 키웠다. 공로를 세운 10명의 환관들은 중상시가 되었고, 12대 임금 영제 때 나라 전체를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당나라의 고력사는 현종의 난때 현종과 내응하여 현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후 현종의 신임을 받아 병권까지 쥐게 되었다. 이후 당나라에 환관의 정치가 발흥하였고, 환관이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명나라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자궁을 통해 스스로 환관이 될 정도로 환관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명나라 영종은 어렸을 때부터 최측근에서 자신을 보좌해준 왕진을 신임하였고, 왕진은 그런 영종의 곁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영종이 자신을 전쟁터로 내몰아 포로가 되게 한 왕진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사당을 지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세로서 왕진의 권력과 위치를 알 수 있다. 위충현은 왕의 유모와 내연관계에 있던 환관으로 왕은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하였고, 그를 비판하는 세력은 모두 참수되었다. 이러한 왕의 비호아래 위충현의 기세는 더욱 올라갔고, 당시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만세’를 따서 자신에게 ‘구천세’를 외치게 함으로써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위의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보면, 중국의 환관들은 황제 못지않은 권력자였다. 환관들이 이러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이유는 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었던 그들의 위치 덕분이다. 환관은 황제의 눈과 귀가 되어 궁 안팎의 여론과 기밀을 보고하고 신하에 대해 평가했으며, 왕이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에 대해 함께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남성으로서의 자존심과 출세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황제를 모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황제에 대한 충성만이 권세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늘아래 가장 외로운 존재인 황제에게 환관들은 조력자이자 자신의 뜻에 맞추어 위로해줄 벗이었고, 마지막까지 함께할 존재였다.
풍수지리의 자연관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의식주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고, 특히 집은 평온과 안정을 주는 공간으로 예로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풍수지리도 이러한 조상들의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는 이러한 사상이 주술적 행위 혹은 미신적 행위라고 보기도 하지만, 우리는 많은 부분 알게모르게 풍수지리를 염두에 두고 살고 있다.풍수지리란 산세?지세?수세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사상으로, 이 사상은 인체의 이론을 자연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 몸에 혈관이 있어 이 길을 따라 영양분과 산소가 운반되는 것처럼 땅에도 이와 같은 생기의 길이 있다고 믿는다.여기에는 산의 기운, 땅의 기운, 물의 기운 등을 판단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연결시키는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이 담겨 있다. 때문에 과거 도성이나 사찰, 주거, 분묘 등을 축조하는 데 있어 재앙을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땅의 형태, 기운 등 지상을 판단하려 했다. 풍수의 자연현상과 변화가 인간 생활에 행복에 깊게 관여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특히 국도풍수라 하여 국운은 도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으며, 국도는 풍수대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었다.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의 수도 한양도 모두 이 설에 토대를 두고 선택된 곳이다. 고려의 국도풍수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대목으로는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에 왔던 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풍수상에 대해 언급하기를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확신한 연후에 자리를 잡는다.’라고 하여 고려인들이 풍수사상을 많이 받아서 나라를 세울 때는 반드시 풍수지리를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태조 왕건에서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도읍과 관련된 풍수논의가 끊이지 않았다.우리는 풍수지리의 물형론을 통해서도 풍수지리의 자연관을 엿볼 수 있는데, 물형론이란 산천의 형세를 사람, 짐승, 새의 형상에 빗대어 이름을 정하고 혈을 찾는 풍수 유파이다. 물형론은 주로 사람과 동물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과 동물이 상황에 따라 그들의 신체 어느 부위에 기가 응집되는가를 상상할 수 있고 그곳을 혈로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면 눈이나 손가락에 기가 모이고, 화장을 할 때면 눈에, 새가 날아갈 때는 날갯죽지에 힘이 들어가며 기가 모인다.산천의 형세에 비유되는 사람과 동물을 알아보면, 사람은 옥녀?스님?장군?선인 등에, 짐승은 사자?거북?용 등에, 새는 봉황?닭?학 등에 비유 되었다. 이들 물형의 풍수적 발복 내용을 보면, 용은 여의주를 얻어야 승천하고, 묘당에 설 고관을 배출한다. 선인은 거문고, 책, 술병 등이 필요하고, 청렴한 선비나 재상이 배출된다. 거북은 신령스런 동물로 묘지보다는 택지가 좋다. 이는 조상들이 풍수지리를 의인화 또는 의물화 하여 복을 빌고, 그 결과에 대해 감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풍수지리를 모두 갖춘 좋은 영향을 미치는 땅을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결국 풍수의 법술이 자연의 성국을 발견하는 것에서 인위적으로 길국을 만드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를 비보진압풍수라고 하는데, 고려 신종 때는 산천비보도감이란 관청을 두어 산천을 비보해 국운을 연장코자 했다. 이 인위적 풍수법의 대표적인 것이 진호를 위한 풍수탑이며, 보허를 위한 조산이고, 방살위호를 위한 염승물이다.비보사탑이라고 불리는 풍수탑은 지력을 비보하기 때문에 국도의 기지가 영원히 동요하지 않도록 진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이탑은 호국을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탑을 세우고부터 천지가 평안하게 되고 삼한이 통일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공허를 보충하는 다양한 방법의 보허법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 예로 덕수현의 보허산이 있다. 보허산은 옛날 덕수현을 이 땅으로 정할 때 애포천이 그 앞으로 동쪽으로 둘러서 임진강에 흘러들어가는 형세로 동쪽이 허해서 풍수상 결함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곳에 산을 만들고 수풀로 간주해서 절 및 석당을 두어 이 공허를 보충했던 것이라 한다. 염승물은 혈국에 모이는 길기의 상실을 염승 또는 위호에 의해서 막고 또한 외부로부터 살기가 도래해서 혈국의 길기를 손상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주로 유물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들면, 평안남도 평양의 지형은 행주형(모란대에서 보아 배가 가는 형태와 닮음)이라 하며, 가는 배가 정지 하려면 닻을 내려야 한다는 것으로, 닻을 연광정 밑의 깊은 곳에 내려놓았던 것이다. 1923년 이 닻을 찾아서 올려보니 철로 만든 커다란 닻이었다. 인양한 이상 이제는 닻을 내릴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해서 그대로 내던져 두었는데 , 이상하게도 그해 평양이 생긴 이래 대홍수가 나서 평양시 전체가 침수되어 거의 폐허가 되어 버릴 뻔했다. 이 미증유의 사건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고 확실히 침정을 인양한 때문이라고 여겼다.
종이 발명까지 고대 서사재료의 종류와 특징인간의 역사를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라고 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타인과의 소통이 필요했고, 이 소통을 시공간의 제약 없이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발명된 것이 바로 문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문자의 출현은 인류의 출현과 그 시작을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 문명의 발상지에서 고대 문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고대 문자들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그들만의 방식으로 쓰여져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종이 발명이전의 고대 서사재료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특징은 무엇일까.특별한 서사 재료가 없던 시절 중국에서는 거북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를 이용하다가 점차 돌이나 옥, 도기, 청동기 등도 이용했으며, 원시시대 서양에서는 돌이나 바위, 나뭇잎, 동굴의 벽을 이용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이러한 원시적인 재료가 사용되었는데, 이후에는 이동성과 보관성, 필서의 편리성을 위해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서사재료가 쓰이게 되었다.종이의 어원인 파피루스는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기원전 3500년경부터 12세기까지 사용하였다. 나일강 연안에서 자라는 다년생의 초본인 파피루스 줄기를 일정한 길이로 자른 다음 얇게 쪼갠 후 말린 것으로, 주로 권자본 형태로 되어 있다. 고대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를 여러 장 이어서 두루마리로 하여 문서를 기록하였는데, 서사재료로서 파피루스는 사용하기 편리하고 기록면도 넓어서, 그 소장 공간에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습기에 매우 약하고 그 보존성이 낮은 결점이 있다. 로마시대에 파피루스는 책의 출판 뿐만 아니라 법률이나 외교 문서에도 사용되었고, 양피지나 종이가 사용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인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파피루스와 비슷한 종류로 타파와 패업경이 있는데, 이들은 섬유를 해리하여 재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이로 보지는 않는다.유목 생활이 주업이었던 지역에서는 양이나 송아지 등의 가죽을 필기 재료로 쓰는데 이를 각각 양피지와 우피지라고 한다. 소아시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페르시아, 아시아, 유럽 지역에서 기원전 500년경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의 최대 결점인 약한 내구성을 해결해 장기 보존이 가능하게 했지만, 값이 비싸고 재료도 한정되어 많은 기록을 하지 못했다.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쓰던 서사재료로 죽간과 목간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종이의 발명 이전까지 약 2천년 동안 주로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죽은 질이 견고하고 세밀하며 살청에 의하여 충해 방지가 가능하였으므로 그 내구성이 훌륭하였고 죽이나 목이 다 함께 그 원료가 풍부하여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과 목은 문자의 기록이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또 원료 자체가 무거워서 열람에 불편하였고 충해방지에도 불완전하였다. 이들 모두는 정보량의 축적과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이어서 이후 제지술의 발명을 맞으면서 사라지게 된다.죽간이나 목독 외에 겸백도 서사 재료로 사용되었다. 비단으로 만든 겸백은 중국에서 은시대부터 사용하였으며, 서사가 용이하고 가벼워서 열람에 편리하고 그 보관도 다른 재료에 비하여 장기간에 걸쳐 가능했고 임의로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원료가 매우 귀하고 풍부하지 못하여 고가였기 때문에 대중들 간에 널리 이용되지 못하고 제한된 특수 계급층에서만 사용이 가능하였다.
1.조선시대 여성의 지위변화우리는 일상에서 남존여비, 가부장제, 호주제 등의 남성중심적인 단어들을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이러한 사상과 제도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져 왔고, 특히 유교를 신봉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던 남녀차별적인 제도와 풍습의 역사는 일천하다.조선시대를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여성의 지위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전기는 고려시대의 영향으로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은 시대였다. 물론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는 없었지만, 가정 내에서는 남성과 동등한 자격을 가졌다. 조선 초기에는 결혼 후 남자가 여자의 친정에 들어와 사는 처가거주혼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율곡이이의 아버지도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친정에 함께 기거하였다. 남성들은 자식이 어느정도 성장하면 처가를 떠나 본가로 돌아오는데, 일부는 분가 이후에도 처가 근처를 떠나지 않고 지내는 경우도 많았으며, 사위가 죽은 후에 처가의 선산에 묻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친가, 외가, 처가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 친척의 범위에 포함시켰다.특히 재산상속에 있어 남녀차별을 두지 않고 균분상속을 원칙으로 했는데, 경국대전을 보면 출가한 딸의 경우도 자신의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 받았다. 여성들은 자신에게 상속된 재산을 보존유지하기 위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건국으로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자녀균분상속을 이의제기한 예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자녀 균분이라는 재산상속의 원칙이 조정의 보호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을 뿐이다.이와 같이 재산상속이 평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산상속에 따른 자녀의 의무와 책임감 또한 같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모가 죽은 후 자식들은 남녀의 구분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의 형태였다. 만약 아들이 없다면 그 제사는 외손자에게 승계되기도 했는데,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율곡이이에게 제사와 묘지관리를 맡겼다.이 외에 호주 문제에서도 조선 초기에 남편이 죽으면 장남이 아닌 미망인이 호주가 되었으며, 여자들만 남아있는 경우에는 며느리가 호주가 되기도 했다. 재가도 비교적 자유로워 법적으로 미망인의 개가를 허용했는데, 성리학의 대학자인 이황조차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자신의 큰 며느리를 재가시켰다. 개가한 부인의 자손도 과거에 응시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게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사림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가는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뿐만 아니라 생활에 까지 적용시켰다. 조선 후기 남성중심으로 가정이 재편성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땅에 떨어졌다. 조선 전기만 해도 재산을 균분상속 받았던 여성들은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의 존재가 되어 재산상속과 제사를 모시는 일에서 제외되었고, 시댁에서도 여성은 삼종지도를 따라야하는 남성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여성들은 안채를 사용하여 문밖출입을 제한했으며, 외출을 할 때에도 가리개와 가마 등을 사용해 여성의 생활을 철저히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또 ‘과부재가금지법’을 만들어 여성의 재가를 금지했고, 재가한 여성의 자식은 관직 진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여성들은 사회에 의해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고, 심지어 국가에서는 ‘열녀’라는 개념을 만들어 죽은 남편을 따라 죽어야만 도덕적인 여성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대중문화론 REPORT-그라운드에 부는 여풍(女風)현상-목 차서론프로야구 관중 700만 시대본론대중문화로서의 스포츠1. 프로야구의 시작2. 프로야구의 인기프로야구의 인기와 여성팬3. 2011시즌 프로야구 관중 10명 中 4명이 여성4. 프로야구와 여풍의 시작5. 프로야구 선수의 스타화6. 팬클럽과 ‘얼빠’문화7. 각 구단의 여성 타겟 마케팅프로야구의 중심에선 여성들8. 프로야구 속 여성의 위치9. 속속 생겨나는 여자야구단결론놀이터와 나들이의 공간그라운드에 부는 여풍(女風)현상서론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된 이후 야구는 국민 스포츠로서 많은 인기를 누려왔다. 2000년대에 들어 국민들의 관심이 월드컵과 축구로 쏠리면서 야구는 암흑기를 걷기도 했지만 2007년 이후 우리나라 야구국가대표팀이 뛰어난 성적을 거둬들이며 다시 한번 국민 스포츠로 급부상했다. 2011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 30주년을 맞았으며 600만 관중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올 시즌은 박찬호, 김병현, 김태균, 이승엽 등 해외파의 복귀로 역대 최소경기 200만 관중을 돌파하며 700만 관중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한국 프로야구 인기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과거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야구가 여성 관중들의 유입과 참여로 더욱 활기를 띄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을 대변하듯 각 구단은 높아진 여성들의 관심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본론우리나라에서 스포츠는 종종 부정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곤 한다. 제5공화국 시절 정부가 정치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3S(screen, sports, sex)정책을 폈고, 이에 스포츠는 국민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대표적인 정책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는 대중문화의 한 줄기로 국민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소통되며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 특히 프로야구는 여러 스포츠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대중문화로서 화합과 소통의 기능을 하고 있다.1. 프로야구의 시작프로야구란 야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로 구성된 각 팀이 승부를여 용산 철도구청에서 전 조선군과 경기를 가졌는데, 이 경기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프로야구를 선보인 것이었다. 광복 이후 실업야구와 고교야구가 인기를 끌었고, 이러한 인기가 절정에 달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되었다.한국의 프로야구는 “자라나는 새싹에게 꿈을 키워주고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에게 밝고 건강한 여가선용을”이라는 기치로 첫발을 내딛었다. 1982년 MBC청룡(서울), OB베어스(대전), 삼미슈퍼스타즈(인천), 삼성라이온즈(대구), 롯데자이언츠(부산), 해태타이거즈(광주)의 6개 구단을 회원으로 시작한 프로야구는 1986년 빙그레 이글스(대전),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전북)가 출범하면서 8개구단으로 늘어났다. 2010년에는 NC다이노스(마산)가 출범하여 현재 2군 무대에서 뛰고 있으며, 2013년부터 9구단 체제로 들어가게 된다.2. 프로야구의 인기전두환 대통령이 프로야구를 출범한 이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던 프로야구는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시절 다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경제성장으로 한층 가벼워진 사회풍토가 이를 가능케 했고, 1990년 LG트윈스가 서울을 연고로 탄생하면서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야구의 인기가 높아지며 어린이야구단에 가입하는 붐이 일었다.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야구는 IMF로 인해 암흑기를 걷게 되지만,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가 승승장구하면서 국민들은 희망을 얻었다. 당시 박찬호 신드롬은 야구의 암흑기라고 말하기 무색할 만큼 대단했으며, 이러한 인기는 김병현까지 이어졌다.2002년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신화’를 이룩하면서 야구의 인기가 꺾이는 듯 했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과 2009년 WBC 준우승을 계기로 많은 팬들이 프로야구에 몰리면서 프로야구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프로야구 관중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으며 올 시즌 700만을 넘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3. 2011시즌 프로야구 관중 10명 中 4명이 여성2011시즌은 사상 처음으로 프로야구 정규시즌 관중수가 600만명(680만근 프로야구에 관심을 쏟으면서 그라운드에 여풍이 거세지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야구에 여성 팬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일까?4. 프로야구와 여풍의 시작 : 신바람야구 LG의 신인 삼총사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많은 팬들이 생겨났지만, 여성들이 야구팬 문화의 중심에 선 때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LG의 신인 삼총사, 유지현-서용빈-김재현의 등장과 함께 였다. 이들은 뛰어난 실력과 출중한 외모를 겸비한 루키로 신바람야구를 주도했다. 많은 여성팬들은 삼총사를 보기 위해 잠실구장 스탠드를 꽉꽉 채웠고, LG트윈스는 삼총사를 선봉으로 싸우면 이겼다. 유지현은 입단 첫해 신인으로 3할 타율에 50개 이상의 도루를 해냈고, 깔끔한 수비로 이종범과 한때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서용빈 역시 안타제조기로 신인때부터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했고, 김재현은 ‘캐넌히터’라 불리며 빠른 스피드와 함께 적시타를 때려내곤 했다. 셋은 연예인이 아닌 프로야구 선수로는 거의 처음으로 이른바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고, 당시 신인 삼총사의 인기는 9시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지금은 많은 선수들이 팬클럽과 여성팬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성관중 불모지였던 프로야구에 여성팬을 대거 그라운드로 모이게 한 것은 이 신인 삼총사부터였다. 이때부터 야구선수들은 단순히 ‘운동선수’가 아닌 ‘스타’가 되었다.5. 프로야구 선수의 스타화스포츠의 인기와 함께 김연아, 박태환, 이대호 등 스포츠 선수들은 TV속의 스타들처럼 광고를 찍고, 팬클럽을 거느리는 등 이제는 ‘스포츠스타’라는 수식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타 연예인들처럼 이들도 많은 팬들의 관심 속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국민스포츠가 된 야구도 예외는 아닌데, 특히 여성팬 사이에서 야구선수들의 인기는 타 스포츠선수들 보다 훨씬 높다. 그렇다면 여성 팬들은 왜 그들에게 열광 하는가.우선 그들은 실력과 외모를 겸비했다. 연예인들이 출중한 외모와 연기력 혹은 노래실력을 바탕으로 스타가 되었다면 그들은 연예인 뺨치는 외모와 운동 실력으로 스하게 만들었다.세 번째는 거리감을 들 수 있다. 기존의 연예인들은 브라운관이라는 단절된 매체를 통해 존재하였다. 그러나 야구선수들은 야구장에 가기만 하면 언제나 직접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할 수 있다. 즉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가 무척 가깝다는 것이다. 종종 팬들이 자주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는데, 26일 은퇴한 기아 타이거즈의 이종범 선수는 자신의 팬이었던 아내와 결혼한 대표적인 야구스타이다. 이종범 선수의 결혼은 야구팬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와의 로맨스를 꿈꾸게 한다.이러한 이유로 현재 많은 선수들은 팬클럽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6. 팬클럽과 ‘얼빠’문화프로야구 선수들의 팬문화를 두 가지로 분류하자면, 팬클럽과 ‘얼빠’문화를 들 수 있다. 팬클럽은 일반 연예인 팬클럽과 마찬가지로 팀이나 선수 개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고자 만든 공동체이다. 특히 요즘 여성팬들은 연고주의적인 팀 선택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이나 선수를 중심으로 팀을 응원한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팬카페를 운영하고, 블로그에 직접 찍은 사진을 올려 후기를 제작하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또 정기채팅을 하거나 경기가 끝난 이후 실시간으로 경기 관람 소감을 올리는 등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한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은 오프라인에까지 이어지는데, 각 선수의 팬클럽 회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 혹은 팀 전체에 간식을 전달하거나 경기일에 모여 단체관람을 하고 있다. 이러한 팬클럽 활동의 대표적인 예로, 대한민국의 우완에이스 기아타이거즈의 윤석민은 실력과 귀여운 외모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데, 윤석민의 팬클럽 회원들은 윤석민이 등판하는 날이면 언제나 찾아와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응원을 해주고 있다. 때론 타점을 올려주지 못하는 타자들에게 간식을 보내며 “부탁해요, 타자님들.”이라는 애교석인 항의도 한다. 윤석민의 해당 선수들의 수비위치가 주요한 요인이 된다. 또한 몇몇의 ‘얼빠’팬들은 일명 대포카메라를 구비하여 구장을 방문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스탠드가 아닌 반대편 스탠드에 앉는데, 그 이유는 반대편 스탠드가 덕아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빠’팬들은 대부분 블로그를 운영하고 그곳에 자신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올려 다른 팬들과 공유하는데, 같은 야구팬 사이에서 그들은 유명인사다. 이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얼빠’라고 부르며 ‘카메라 스토킹’을 일삼지만, 경기장 외부에서는 선수들의 사생활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팬으로써 자부심이 강하다.팬클럽과 ‘얼빠’문화는 여성 팬들이 향유하는 팬문화의 한 형태로 여성들이 프로야구에 심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7. 각 구단의 여성 타겟 마케팅각 구단들은 이러한 선수들의 인기를 이용하여 선수들을 프랜차이즈화하고 스타마케팅을 도입하고 있으며, 그들의 유니폼과 기념품 등 라이센싱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또한 프로야구 인기몰이 중심에 선 여성 관중을 잡기 위하여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두산베어스는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구단으로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잠실구장은 타 구장에 비해 객석이 제일 많지만,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많은 관중을 유치하고 있다. 두산 마케팅팀은 여성 관중을 그라운드로 불러들이기 위해 ‘퀸즈데이’를 운영한다. 퀸즈데이에는 두산의 선수들이 핑크색이 들어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하며, 여성관객들 한해 50% 할인된 가격으로 표를 제공한다. 또한 경기가 끝난 후에는 인기 선수와 포토타임을 가질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했으며, 외식상품권도 제공한다. 이러한 마케팅의 효과로 ‘퀸즈데이’에 여성 관객이 52%를 육박한다고 한다.SK와이번스는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터치라운지와 코인라커를 설치했고, 아이를 데리고 온 주부 팬을 겨냥해 의무실과 수유실을 만들었다. 또 엄마가 야구경기를 보는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