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Ⅰ. 들어가며Ⅱ. 상대주의의 등장ⅰ) 역사주의ⅱ) 상대주의Ⅲ. 상대주의의 특징ⅰ)역사주의와 상대주의 비교ⅱ) 상대주의 역사가들의 입장ⅲ) 크로체의 역사관ⅳ) 콜링우드의 역사관ⅴ) 절충적 입장의 등장Ⅳ. 상대주의 역사관의 평가Ⅴ. 나가며Ⅰ. 들어가며현대 역사학을 확립한 사람은 19세기 독일의 랑케였다. 그는 인류사회는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는 콩도르세류의 낙관주의적 계몽사관과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인간구제의 역사’라는 헤겔류의 철학적 관념론을 단호히 비판하고,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인 역사만이 진정한 역사라는 근대 역사학의 기본 틀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학사는 랑케 사학의 성립에서 출발하여 그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는 셈이다.)특히 19세기의 역사이론은 랑케 역사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왕성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랑케에서 비롯된 근대 역사학은 많은 사료를 수집하여 그 사료를 비판함으로써 과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역사학은 곧 도전을 받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유럽에서는 이태리의 크로체와 영국의 콜링우드에 의해 주창되었다. 상대주의는 창세기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이미 크게 문제화 되어 근대에 들어와서도 심각한 문제로 논쟁의 중심핵의 역할을 하였다.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대주의 사관을 대표하는 역사가들의 주장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알아보고 올바른 역사 인식과 역사의 흐름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Ⅱ. 상대주의의 등장ⅰ) 역사주의역사주의는 사물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역사성은 시간적 변화에 대한 가치관이며 그런 관념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에게까지 소급된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사상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의 일관된 흐름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거부하는 자연법사상이었다. 특히 18세기에는 자연법사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로서 일반적으로 무시간적, 직선적 진보관과 유형적 순환사관이 지배적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전통적 관념에 대립하는 역사관이 대두되었는데, 그것이 곧 역사주의였다.역사주의에 따 역사의 여러 상황과 특정한 시공간적 여러 조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절대적 가치(절대적 판단. 절대적 규범)는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를 말하며, 따라서 어떤 기준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어떤 기준을 이용하지 않고 가치, 판단, 규범 등을 파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즉 역사주의는 그것들을 상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역사주의 역시 상대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상대주의는 철학에서 말하는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철학적 상대주의의 특징은 언제, 누가, 어디서 판단을 내렸는가에 따라, 그 판단의 진실성이 좌우된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점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판단도 다른 상황에서는 거짓이 될 수 있고, 반대로 특정한 상황에서 거짓이라고 여겨지는 판단도 다른 상황에서는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그러나 역사주의는 그와 같이 믿지 않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 따라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진실을 판단하는 인식이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인식은 역사적으로 변화하며, 그 각각의 발전단계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부분적인 성격만을 가진다고 주장할 뿐, 어떤 판단(진술)이 때로는 진실이 되고 때로는 허위가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판단(진술)은 항상 부분적 진실일 뿐이며, 절대적 진실은 다만 이러한 과정의 맨 끝에서나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ⅱ) 상대주의 역사가들의 입장상대주의 입장에서 역사가들은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사실 자체가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먼저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역사에 있어서의 사실(a fact in history)을 우선 구분한다.역사에 있어서의 사실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임에는 틀림없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이라고 해서 다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으로 만들기까지는 역사가의 부단한 작업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깊이 생각해보면 역사사가 찾아주지 않은, 그래서 역사가의 관심 밖에 있는 사실 자체란 우리에게는 영원히 인식되지 않은 물자체(物自體)와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래 그대로의 사실이란 것은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불가지론적인 것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는 바로 역사가가 역사를 기술(記述)해 나감에 의해 이루어진다.역사가가 여러 가지 자료와 전거(典據)를 통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확증하는 것은 결국은 역사가의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다. 상대주의 역사가들은 사건 자체로서의 역사(Geschichte)보다 사건에 대학 기술로서의 역사(Historie)에 보다 큰 관심을 둔다. 그들은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역사를 쓰는 것이 곧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이와 같이 역사를 쓰는 것 자체가 역사인식의 본질적인 요인으로 간주 될 때에는 역사를 쓰는 역사가의 관점과 해석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 이유는 기록되는 역사상의 사실들은 기록자의 정신 속에서 해석이라는 매체를 통해 항상 굴절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랑케를 비롯한 역사주의 역사가들은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이나 해석을 포기하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역사의 객관성을 흐려놓고 공정한 역사서술의 저해요인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역사가가 아무런 관점이나 가치판단, 또는 해석이나 설명 없이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 속에서 “만약 우리가 선택적 관점을 회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객관적 기술에 도달하기커녕 전혀 관련이 없는 진술들의 단순한 집적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관점 없는 역사서술이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카아(E.H. Car, 1892~?) 또한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 문에 대한 의미는 그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며 그러므로 각 세대는 앞 세대가 쓴 역사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역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ⅲ) 크로체의 역사관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한 사람 중의 하나가 이탈리아의 크로체이다. 그는 역사를 「과거에 투영된 현재의 사유」라고 하여 역사를 정신의 산물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역사의 구조 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정신의 산물이다. 정신행위가 없는 기록들은 단지 죽어버린 대상일 뿐이다. 크로체는 정신행위가 없는 기록들을 「연대기」(chronicle)라 부르고 이를 역사와 엄격히 구분한다. 그는 그의 주저(主著) 『역사서술의 이론과 그 역사』속에서 「역사는 살아있는 역사이고 연대기는 죽은 역사」이며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고 연대기는 과거의 역사」라고 규정짓는다.연대기는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비교적 상세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그것이 곧 역사적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역사는 아무런 사고행위가 없이 다만 기록 속에서만 기억되고 보존되어 있는 연대기적 기술(chronicle writing)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경험으로부터 이끌어진 진실이다. 즉 역사는 확실하고 정확한 것보다는 진실한 것을 요구한다.역사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진실성은 결코 역사적 자료나 전거(典據)만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자료나 전거는 진실 된 역사를 위한 하나의 준비물에 불과할 뿐이요 역사의 창조적인 재생의 과정을 통해서 모두 용해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죽은 역사, 과거의 역사는 현 시대의 정신 하에서 현재의 생(生)과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크로체는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Jede wahre Gerchichte ist Geschichteder Gegenwart.)임을 강조한다.이와 같이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한 크로체에게는 지나가버린 역사란 공허한 역사가가 그 사상을 재사고(re-thinking)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사건 속에 담긴 사상을 역사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재연(再演, re-enactment)해 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B.C. 49년 케사르가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한 사건이나 B.C. 44년 원로원 계단에서 부르투스에 의해 23곳에 상처를 입고 살해된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 사건들이 갖는 외면만을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즉 많은 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케사르의 외형적인 행동이나 원로원 계단에서 케사르를 살해하는 부르투스의 신체적 움직임이나 변화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일으키게 한 케사르나 부르투스의 내면적인 사사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케사르는 어떠한 야심과 목적을 가지고 그의 부대를 거느리고 루비콘강을 건넜을까?” 또는 “부르투스는 무슨 생각을 했기에 케사르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을까?” 하고 역사가가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재연시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사건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적인 맥락을 찾아내는 데 있다.역사적 사건은 마치도 자연과학의 대상들이 자연 과학자에 의해 관찰되듯이 그렇게 역사가에 의해 관찰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결코 사실의 목격자는 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추체험(追體驗)해 보는 수밖에 없다. 마치 자신이 케사르나 부르투스가 된 것처럼 로마 헌정상의 무질서함을 개탄해 보기도 하고 황제가 되려는 시저의 야욕에 의분을 느끼기도 해 보며 그래서 내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들과 같은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과거의 상황 속에 자신을 투영하여 자신이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볼 때에 비로소 그 역사적 사실이 갖는 내면성 즉 그 사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볼 때 콜링우드에 있어서는 역사적 인식이란 사고를 그 본래의 고유한 대상으로 한다고 볼 수.
식민지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목차Ⅰ. 들어가며Ⅱ.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의 전개Ⅲ.논쟁의 진전ⅰ) 논쟁의 쟁점ⅱ) 식민지 근대화론ⅲ) 식민지 수탈론Ⅳ. 논쟁의 문제점Ⅴ. 나가며Ⅰ. 들어가며1990년 후반에 본격화한 식민지 근대화 논쟁은 경제사학계 일각에서 한국사학계의 근대사론을 ‘식민지 수탈론’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수정을 요구했고, 한국사학계는 이들의 수정사론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반비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식민지 근대화 논쟁은 식민지기를 대상으로 했지만. 내용상으로는 한국근대의 역사경험을 총괄적으로 평가하는 작업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 사회는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능력이 있었는가. 일제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식민지기의 유산은 해방 후 고도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한국근대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한국사화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등 논쟁 과정에서 제기된 질문은 한국근대를 이해하는 데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생산적 전개와 올바른 이해는 학술적으로는 근대사 연구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실천적으로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이한 한국사회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는 데 시사하는 바 클 것이다.)‘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시대 조선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가 전개되었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결과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견해를 총칭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일제의 조선 지배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종래의 주류적 견해와 대비된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국 사학계의 주류와 빙탄적 대립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고, 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핵심은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조선이 ‘근대화’되었는가 하는 여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는가를 엄격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근대화라는 개념을 정의 내려야 할 것이다.근대화란 간단히 말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치관 등의 모든 면에서 전반적으로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변동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등 편향된 역사인식을 보여 왔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식민지기에 일어난 사회 변화를 주목하고 나선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반면 이런 연구경향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꺼리고 있는 일본의 보수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현실적 역기능을 우려했다. 또한, 민족해방운동을 근대화의 주요 동인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등치시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제주의적 편향을 비판했다.다른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신식민사관’이나 ‘식민지 지배 미화론’, ‘제국주의 옹호론’이라는 식의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고 식민지 수탈론의 기존 틀을 고수하는 연구 경향이다. 이들 연구 경향은 대체로 민족주의, 자본주의, 국민국가 등 서구 근대화의 지표를 기준으로 식민지기의 근대화를 부정했다. 그리고 일제하에서는 국민 경제의 형성 전망이 원칙적으로 차단됐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특질을 찾을 수 있는데, 식민지 근대화론은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더욱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에 고무되어 자본주의화에 의한 양적·단선적 성장 노선만을 중시할 뿐 생산력 발전의 향방이나 삶의 질 문제를 경시하고, 체제 변혁의 가능성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한편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반비판은 신랄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느 논자는 자신의 주장이 “한국 근현대사학계에서 일종의 파천황(破天荒))일지도 모르겠다.” 고 하면서 한국사학계의 “근현대사 연구는 ‘민족정기’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한국사학계 전체를 자극하고 나섰다. 또 다른 논자는 식민지 수탈론자들이 마치 실증적 근거도 없이 ‘식민지 근대화론자=친일파, 친일파=매국노’로 등치하는 국민의 감정적 정서를 이용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려 한 것처럼 식민지 수탈론자들의 논쟁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내는데, 이 자료는 일제시대 초기에는 신뢰성이 특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조선의 GDP 추계와 관련하여 김낙년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농림수산업, 광공업 등과 같은 재화의 산출액 통계는 대체로 1911년부터 조사되기 시작하여 1940년에 이르고 있지만, 통계조사의 정도(精度)는 초기로 거슬러 갈수록 떨어지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1910년대에는 조사되지 않았거나 그 커버리지(coverage)가 낮은 품목이 적지 않다. 이를 그대로 두면 1910년대 성장률이 과대평가된다. )ⅱ) 식민지 근대화론한국 근대가 세계근대의 전시장이었던 만큼 근대사 인식에서도 시각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식민지기 사회경제적 변화가 한국근대에서 어떤 위상과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인식의 갈등은 첨예한 실정이다. 20세기 말의 식민지 근대화 논쟁은 그런 갈등이 학술적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 논쟁은 주로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탈민족·국가론이 대두, 개입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그렇다면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사이에 근대사 인식의 격차와 접근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탈근대론의 대두와 확산에 따라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 탈근대론 사이에 복잡하게 형성되고 있는 대립구도를 주목하여 이들 삼자의 문제의식, 갈등 지점, 그리고 의의와 한계를 대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2000년 이후 자신들의 역사상을 입증하기 위한 실증적 연구 성과를 정력적으로 산출해 냈다.) 이들은 주로 장기 시계열(time series)통계를 정리해 경제성장의 장기 추세를 파악했는데, 이를 통해 ‘18세기의 안정, 19세기의 정체, 20세기의 성장’이라는 거시적인 역사상의 기초를 구축하는, 일단의 작업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계량경제사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이런 구도를 체계화하는 데 앞장선 이가 차명수 교수이다. 그의 성과에 입각해 근대 사회경제 변화상을 그려보면 다음과소하면서 일본 자본과 일본인 기술자·숙련노동자의 유입은 증가했고, 그로 인해 기술 전파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때 근대적 경제성장의 추동력으로 가장 주목된 것은 식민지 개발을 추진한 일제 권력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토지소유권과 재정·통화제도를 확립했고, 철도, 도로, 항만 등 사회기간시설을 확충했다. 또한 세수를 확대하거나 일본 내 자본을 도입하여 공공투자를 늘려 나감으로써 총투자율을 제고했다. 이런 개발정책을 시장경제 발전과 경제성장에 기여했다.한국인도 근대적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렸다고 한다. 근대교육이 보급되고 근대적 행정·사법기구, 공장에 취업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한국인의 인적 자본이 축적됐다. 식민지기의 문맹률 감소, 취학율 증가, 한국인 기술자·기능공 증가가 이를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됐다. 한국인의 생활수준 또한 향상됐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 2.37퍼센트보다 느리게 향상되거나 아니면 정체했지만, 그렇다고 생활수준의 하락을 경험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차명수 교수는 식민지 수탈론에서 제시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질임금 정체에 대해서는 동의를 표했지만, 그조차 평균수명의 증가로 비숙련 노동자 한 명이 평생 벌어들이는 소득은 증가했다고 반박했다.식민지 수탈론에서 주로 거론하는 민족별 소득이나 자산 분배의 불평등화 현상을 인정했다. 일본인 소득이 한국인 소득보다 빠르게 향상됐고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일본인 소득이 한국인 소득보다 빠르게 향상됐고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일본인 소득의 비중이 증가했고, 1910년 전체 논의 2.8퍼센트를 소유했던 일본인이 1935년 18.6퍼센트를 소유하게 됐으며, 1942년 전체 공업자산의 95퍼센트가 일본인의 소유였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화를 일제의 착취나 식민 지배정책의 결과로 바로 연결 짓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소득분배의 불평등화는 근대적 경제성장의 초기 단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간주했다. 자산 분배의 불평등화 또한 식민지기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많은 해 식민지 수탈론의 역사상을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 역사상을 그려내려고 시도하는 데 반해 한국사학계는 뚜렷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시도에 맞선 고군분투는 경제사학자 허수열 교수에게서 나왔다. 그는 풍부한 통계자료 분석을 토대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제기와 식민지 수탈론 비판을 체계적으로 반박하고 식민지 수탈론에 입각한 식민지기 사회경제적 변화상을 새롭게 구축하는 연구들을 생산해 냈다. 그의 연구 성과에 입각하여 식민지기 사회경제변화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허수열 교수는 식민지 수탈론과 같이 개항 이전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하는 등 역동적인 사회인지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정체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생적 발전이 불가능한 사회로 보는 식민지 근대화론과는 거리를 뒀다. 단적인 예로, 조선왕조 말기가 왕조 붕괴기로 농업 개발을 위한 노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경지면적·관개시설·품종개량 등 농업의 대부분 분야에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지기 초 한국의 농업은 왕조 말기 시대에 도달했던 농업 상태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국가가 공권력을 회복하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게 된다면 한국 농업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일제 지배가 없었더라도 한국 사회는 스스로 근대화될 개연성이 높았다. 이런 인식은 한국 사회가 내재적 발전의 성과로 인해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식민지 수탈론의 기조와 맥락을 같이 한다.식민지 지배 미화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 단골 메뉴로 지적하는 식민지기 한국의 개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허수열 교수에 따르면 식민지 한국은 공업을 중심으로 매우 빨리 성장했다. 철도·도로·항만·통신 등의 각종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농업·광공업·수산업 등의 모든 산업 생산시설도 급속히 확충됐다. 교육·행정·사법제도와 시설도 빠르게 발전됐다. 결론적으로 19세기 말 조선왕조 시대와는 비교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