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의 삼각형의 욕망가짜 욕망과 가짜 가치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사회와 소설 사이에서 구조적 동질성을 발견시장경제체제-진정한 가치인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진정한 가치인 교환가치를 추구소설-자연발생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암시된 욕망을 품는 것‘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우리의 욕망의 체계를 소설 주인공의 욕망의 체계에서 발견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을 제시개인이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 개인이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초월은 자기가 욕망하게 되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가능.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돈키호테의 주인공들의 욕망은 간접화한 욕망주체-돈키호테, 대상-이상적인 방랑의 기사그러나 직접 이상적인 기사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디스라는 전설의 기사를 모방함으로써 도달돈키호테의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중개자에 의해 간접화, 주체와 대상 사이에 간접화 현상주체-돈키호테, 대상-이상적인 방랑의 기사, 중개자-아마디스주체-산초 판사, 대상-섬과 딸의 공작부인 칭호, 중개자-돈키호테이처럼 하나의 작품이 여러개의 삼각형으로 구성기독교주체-기독교인, 대상-진정한 기독교인, 중개자-예수삼각형의 구조에서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분석에서 가장 먼저 고려‘돈키호테’-주체 돈키호테와 중개자 아마디스는 동일한 세계에 있지 않음.아마디스는 전설적인 가공의 인물,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는 극복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음.주체 산초 판사와 중개자 돈키호테는 동일한 공간에 있음.그러나 물리적 거리가 아닌, 정신적 거리로 생각시종과 주인간의 거리-정신적 거리를 유지.간접화한 욕망을 ‘삼각형의 욕망’- 욕망하는 주체, 욕망의 대상, 욕망의 중개자가 세 꼭지점을 형성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주체-엠마 보바리, 대상-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 중개자-삼류소설과 잡지에 나오는 여주인공, 파리의 여성들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돈키호테’의 경우보다 가까움-여행이나 파티에 초청됨으로써 중개자를 만나기도 한다.‘보바리 부인’의 주인공이 ‘돈키호테의’의 주인공보다 현대적-주체가 주인공을 모방하는 태도근대이전-돈키호테는 욕망의 중개자인 아마디스를 모방하고자 한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말함.현대-엠마 보바리는 욕망의 중개자인 파리의 여성들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춤.(자기만의 특색)스탈당의 ‘적과 흑’주체와 중개자간의 경쟁관계-내면적 간접화주체-레날, 대상-가정교사 쥘리앵, 중개자-발르노‘돈키호테’, ‘보바리 부인’-외면적 간접화오늘날 우리 자신의 욕망이 고도 산업사회의 광고에 따라서 도발되고 간접화하는 현상사용가치에 따라 어떤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경쟁관계, 즉 교환가치에 따라 어떤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주체-마틸드, 대상-쥘리앵, 중개자-페르바크 원수부인경쟁관계라는 내면적 간접화 현상-가짜 욕망, 교환가치가장 고통스러운 삼각형의 욕망도스토예프스키 ‘미성년’아버지 베르실로프와 아들 돌고루키가 동일한 여인을 사랑하는 상황아버지와 아들의 경쟁관계욕망의 간접화 현상-돌고루키의 욕망은 아버지의 욕망에서 베껴온 것‘영원한 남편’파벨 파블로비치와 벨차니노프 사이에 욕망의 간접화 현상두 사람 사이의 우정관계는 경쟁이라는 감정으로 배가되지만, 그 경재관계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음.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실존주의에 대한 비판-공산주의자들은 실존주의가 인간을 적극적 행동을 체념하고 절망에 빠지는 상태인 정적주의 속에 빠지도록 만든다고 비판하다. 왜냐하면 모든 해결이 막혀져 있어 명상적인 철학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카톨릭 파들은 실존주의가 인간의 수치스러운 면, 더러운 면, 부정한 면, 몰염치한 면만 표현하고 인간의 밝은 면을 업신여긴다고 비판하다. 또한 출발점을 인간이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파악하는 순간으로 삼고 있어 ‘나’의 밖에서 도달할 수 있는 연대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도 비난한다.-기독교 신차들은 실존주의가 인간 생활의 참뜻과 근엄성을 부정한다고 비난한다.-내가 오늘날 답변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비난에 대해서이다.●비관주의와 실존주의-실존주의란 우리는 인간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게다가 모든 진리나 모든 행동이 인간적 환경과 주체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혀 낼 수 있는 이론을 의미한다.-실존주의가 받는 중요한 비난은 인간 생활의 나쁜 면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존주의를 추악한 것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실존주의자를 일종의 자연주의자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만약 실존주의자가 자연주의적 경향을 가졌다면 사람들은 오늘날 자연주의가 공포와 분개를 일으키고 있는 이상으로 실존주의가 공포를 주고 분개시키고 있다는 점에 놀랄 것이다.●처세법-실존주의자를 공격하는 것은 비관적 견해 때문이라기보다 차라리 낙관적 견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컨대 내가 독자들에게 서술하려고 하는 이론 속에서 공포를 주는 점은 그 이론이 인간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남겨 둔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것을 명백하기 위하여 철학적인 면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존주의란 어떤 것인가?-실존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설명하는데 곤란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유행어가 된 오늘날에는 음악가나 화가를 실존주의자라고 즐겨 밝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가장 스캔들하지 않고 가장 준엄한 이론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문가나 철학가를 위한 이론이다.●두 갈래의 실존주의-실존주의에는 기독교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야스퍼스와 가브리엘 마르셀와 무신론적 실존주의 야스퍼스와 가브리엘 마르셀가 있다. 이 둘에서 공통된 점은 존재는 본질에 앞서고,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다.-하나의 물건을 생산할 때, 그 물건은 하나의 개념이 머리에 떠오른 공장에 의해서 제조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물건이 무엇에 소용될 것인가를 모르고서는 그 물건을 만들 사람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즉, 본질이 존재를 앞서는 것이다.-이는 세계에 대한 기술적 세계관으로 생산은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점을 볼 때, 개개인의 인간은 신의 오성 속에 있는 어떤 개념을 구현시키고 있는 셈이다.-18세기 철학자들의 무신론에서는 신이 부정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존재를 앞선다는 생각이 부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인간성의 소유자이고 이러한 인간의 개념인 이 인간성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사람은 제각기 인간이란 보편개념의 특수한 표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칸트에 있어서는 이러한 보편성으로 해서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정의에 얽매여 있으며, 같은 기본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역시 인간의 본질은 우리가 자연 속에서 조우하는 역사적 존재에 앞선다.●무신론적 실존주의-가령 신이 없다면 적어도 본질보다도 앞선 하나의 존재, 또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저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존재는 사람이거나 인간의 실체일 것이다. 본질보다 존재가 앞선다는 것은 사람은 먼저 있어 가지고 세상에서 존재하고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본질은 그 다음에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을 상상할 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이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인 주체성이다. 이 말은 장래 속에 뛰어드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그 어떤 존재를 말하고 있다.●지향-사람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어 나가는 하나의 지향적 존재이다. 이 지향 이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고 하나의 뚜렷한 그 무엇이 있을 리 없다.-정말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사람은 자기가 어떤 것이가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이래서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사람은 모든 타인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주체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의한 개개 주체의 선택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인간적 주체성을 초월하는 데 대한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실존주의의 깊은 뜻은 위에서 말한 제 2의 의미를 가진다.●선택-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선택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항상 선한 것이다. 한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또 우리가 우리의 개념을 만드는 동시에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그 개념이란 모든 사람과 우리의 시대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나의 행위는 전인류를 앙가제한 것이 된다.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즉,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한다.-불안은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기 일뿐만 아니라 자아와 동시에 전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은 자기의 전적이고 심각한 책임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불안과 불성의-실존주의가 그려 내는 불안은 그것이 이끌어들이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책임으로서도 또한 설명되는 것을 우리는 뒤에서 볼 것이다. 그 불안은 우리를 분리시키는 커튼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비종교적 윤리관-선을 생각하여 주는 무한하고도 완전한 의식이 없는 까닭에 실존주의에서는 선험적인 선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도스토예프스키와 실존주의-신이 없다면 무엇이고 허용될 것이다. 그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이다. 사람은 자유로우며 사람은 자유 그것이다. 한편으로, 만약에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정당하게 하여 주는 가치라든가 질서를 우리 앞에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은 아닌 까닭에 선고를 받는 것이요,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채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아무런 의지도 도움도 없이 매순간 인간을 창조하도록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가치와 감성-가치라는 것이 막연한 한, 또 그것들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비해서 너무나 광범한 것인 한, 우리는 우리의 본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감정은 우리의 행동으로써 형성된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을 함에 있어 감정에 따를 수는 없다. 행동을 허용하는 개념의 설명을 어떤 모랄에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보편적인 모랄은 있을 수 없다-표적들이 가지고 있는 뜻을 선택하는 것은 항상 나 자신인 것이다. 판독의 전적인 책임은 자신이 지고 있다.-생각하는 가능성이 나의 행동에 정확히 얽매여 있지 않는 순간부터 어떠한 신이나 어떠한 섭리도 세계와 그 가능성을 나의 욕망에 부합시켜 줄 수는 없으므로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절망과 행동-선량한 인간성이라든가, 사회의 이익을 위한 인간의 관심을 기반으로 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스러운 것이요, 기반으로 삼을 만한 하등의 인간성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앙가주망-사람들은 자유로우며 인간이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를 앞으로 자유로이 결정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삶에 뛰어들어 자기의 모습을 그려내며, 자기가 그려내는 그 모습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비관론이냐, 낙관적인 준엄함이냐-중요한 것은 전적인 앙가주망이고, 그리고 우리를 전적으로 앙가제하는 것은 무슨 특수한 경우나 특수한 행동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행동으로 정의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정적주의의 철학이라고는 할 수 없고 또 인간의 비관적 묘사도 아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인간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므로 그보다 더 낙관적인 이론은 없다.●실존주의는 낙관론이다.-실존주의는 진리에 입각한 이론을 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코키토 밖에서는 모든 대상은 다만 있음직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에 뿌리박지 않은 개연성의 철학은 허무 속으로 와해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절대 진리가 필요한데 절대 진리란 단순하고 도달하기 쉽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서 중개자 없이 파악되는 것이라야 한다.●실존주의와 유물론-코기토로써 직접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은 또한 모든 타인을 발견하고 그는 그들을 자기 존재의 조건으로 본다. 나에 관한 어떤 종류의 진리라도 그것을 파악하려면 나는 타인을 거쳐야만 한다. 나의 내면의 발견은 나를 드러내 주는 동시에 그 생각하는 바와 바라는 것이 나의 편이거나 나의 반대편인 한낱 자유로서의 타인을 또한 드러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