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32이 부분에서 막스 베버는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 조건-능력과 요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조국인 독일과 미국의 사정을 비교하며 이를 설명한다.독일에서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들의 학자 경력을 ‘사강사’에서 시작한다. 학자가 되길 희망하는 사람은 먼저 어느 특정 대학에서 해당 전문분야 대표자와 협의 및 동의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후 교수자격 저서를 제출하고, 해당 단과대학 교수진 앞에서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이 이후에서야 교수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교수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시강사’로서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지만, 보수를 받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의 유일한 수입원은 학생들의 수강료이다. 따라서 독일에서 학자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신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적당한 보수 없이도 몇 년 동안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에서 학자경력의 첫 단계는 ‘조교수’이다. 이는 독일 대학의 자연과학부와 의학부의 큰 연구소에서 흔히 행해지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러한 조교수들 가운데 교수자격시험을 통해 사강사 자격을 획득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이다. 조교수는 많진 않지만 고정된 액수의 봉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보다 안정적이다. 그러나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단점 또한 지닌다. 때문에 그들은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기대에 미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대란, 강의실이 학생들로 가득 차는 것을 의미한다.시강사와 조교수는 강의 담당량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시강사의 강의 담당량은 일반적으로 그가 원하는 것보다 적다. 중요한 강의는 전임 정교수가 하고, 강사는 부차적 강의만을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강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가 학문 연구에 바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얻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이와 상반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강사는 봉급을 받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 시절에 보다 많은 강의를있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대학교수 충원 과정에서도 요행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 누군가는 충분히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교수 선발장치라는 틀 안에서 자신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p.33~40이 부분에서 막스 베버는 학자가 되는 길의 내적 조건-열정과 소명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오늘날 학문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화단계에 들어갔다. 때문에 우리가 한 학문영역에서 진실로 아주 탁월한 것을 성취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매우 엄격한 전문화를 성취했을 경우뿐이다.학문을 위해 필요한 제1조건은 열정이다.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며, 열정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그러나 열정만으로 모든 성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조건은 바로 영감이다. 영감은 착상이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학문을 혼을 바치는 작업이 아니라 냉정한 지식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 특히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의 머릿속에 적절한 무언가가 떠올라야 한다. 이는 지식과 열정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일반적으로 착상은 끈덕진 작업 끝에 피어난다. 그러나 착상은 예상치 못한 때에 나타난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감이 떠오르느냐 안 떠오르느냐는 요행에 달려있기도 하다. 아무리 뛰어난 학문적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가치 있는 독창적 착상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을 하는 것은 이 모든 영감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이다. 대답을 정열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좋은 생각은 절대 떠오를 수 없다.학문 영역에 있어서 개성을 가진 자는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뿐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에 충실히 임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자만이, 그렇이 적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이전 시대의 예술품보다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는 다르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연구된 시기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전의 학문이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은 학문 연구의 운명이자 목표이기도 하다.물론 학문적 업적이 ‘낡은 것이 되어 의미를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업적이 예술적으로 우수하여 향유 수단으로 여겨질 때 그러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은 것이 되어간다는 것은 학문 자체의 숙명이며 목적이라는 사실이다.그렇다면 학문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학문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한한 진보라는 법칙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학문 연구를 계속해서 하는 것이 “광의의 기술적 목적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문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학자 스스로는 “학문 자체를 위해” 연구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학문을 통해 기술적 성과 따위를 이루어내고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학문의 진보는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겪어온 주지주의화 과정의 작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과거의 사람들, 예를 들어 미개인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지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가 매일 매일 사용하는 화폐의 속성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대답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타는 전차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지에 대한 질문에도 완벽히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완벽히 아는 사람은 전문 물리학자뿐이다. 우리는 그저 전차의 작동을 신뢰하고, 그를 바탕으로 전차를 이용하기만 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주지주의화와 합리화의 증대가 곧 우리가 처해있는 생활조건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일반적 지식의 증대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진보는 ‘끝’이라는 정점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속에 편입되어 있는 문화인의 삶 역시 같은 이유로 종결될 수 없다는 특성을 가진다. 만약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고대의 사람들과 같이 죽음의 문턱 앞에서 스스로가 진보의 절정에 놓여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생에 대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진보의 절정’은 무한이라는 궤도 속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결코 죽음 이전에 그곳에 다다를 수 없다. 문명이 사상, 지식, 또는 제반 문제들로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은 생에 지칠 수는 있어도, 충분함의 감정과 포만감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의미 없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톨스토이의 후기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는 바이기도 하다.‘인간의 생활 전체에 있어서 학문의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 과거의 사람들이 ‘학문만이 허상과 그림자가 아닌 진정한 존재를 포착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의 인간들은 ‘진, 선, 또는 용기나 영혼’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것들의 진정한 존재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레오나르도와 같은 예술 분야의 실험자들과 음악분야의 개혁자들에게 학문은 진정한 예술에 도달하는 길이자 진정한 자연에 도달하는 길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연에 도달하는 길로서의 학문’과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학문의 주지주의로부터 벗어나야만 자연과 예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비슷한 맥락에서 계속 생각해보자면, 정밀 자연과학이 탄생한 시대의 사람들은 ‘신(神)의로의 길을 찾는 것’을 학문, 그 중에서도 과학연구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슈페너와 같은 사람들이 과거에 이미 인지하고 있었듯, 신의 길과 우리 인간의 길은한다. 따라서 교수들은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정치구조 및 정당구도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실천적-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한 교수가 강의실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논한다면, 그는 오직 민주주의의 형태나 기능을 강의하는 데에 그쳐야지 학생들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특정한 입장을 드러내어선 안 된다. 그것이 노골적인 방법을 통한 것이든, 암시적인 방법을 통한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대중 집회의 경우는 다르다. 강의의 목적이 ‘학생들에게 정치에 대한 학문적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면, 대중 집회의 목적은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 집회에서 연사는 자신의 개인적 입장을 숨기지 말아야 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쪽의 편을 들어 모두가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그렇다면 대체 왜 교수는 강의실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면 안 될까? 이 물음에 대해 막스 베버는 “강의실은 비판이 가능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강의실은 길거리와 같은 공개적인 장소와 다르게 비판이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들은 설령 강의에 불참하고 싶더라도 자신의 진로를 위해 그럴 수 없으며, 강의실 안에서도 교수의 말에 비판적으로 맞서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스 베버는 “예언자와 선동가는 교실 강단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길거리로 나가서 공개적으로 말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정치적 견해를 배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교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강의실 안에서는 주관적인 정치적 선호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한 반대 증거가 될 순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막스 베버는 “학문적 발전 그 자체를 위해서 강의실에서는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혼합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단원’은 교회형태 및 국가형태 또는 종교사에 대한 교수의 강의를 서로다.
1. 기쁨의 연대 네그리와 박노해● 인다라의 구슬 박노해● 다중, 공통되기 네그리-‘개인 있는 우리’ = “자유롭고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노동자의 혁명을 통해 새벽을 맞이하자 개인 없는 우리-: 전체 노동자를 위하기만 하는 개인 없는 우리가 아니라 개인 있는 우리-박노해가 시를 통해 전하는 화엄 세계는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조화로 가득한 곳이다. 이 속에서는 울림과 전체를 통해 일종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인다라의 구슬과 같이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노동자나 자본가나 하나로 연결된 세상을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탕에는 개인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 없는 우리’가 아니라 ‘개인 있는 우리’로 존재한다.-연대는 코나투스(삶의 의지)를 높여 우리를 기쁘게 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타자와 만나고 연대하려고 한다. (스피노자 - 코나투스)-이는 철학자 네그리의 생각과도 궤를 같이 한다. 박노해가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무한한 그물 위의 방울들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명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네그리는 이를 ‘다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통되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된다. 예를 들어 정보화시대에는 우리가 먼 거리에서도 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다라의 구슬처럼 하나로 엮이고 있는 것이다.-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터넷 등 기술의 발달은 자본가와 노동자를 대립시키며 사람을 고립시켰지만, 오히려 이런 것들은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했다. 바로 ‘다중 되기’를 통해서 말이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같은 발달된 기술을 통해 세계적인 소통, 원거리 소통을 할 수 있다.-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한 몸 바치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개인 있는 우리가 되자.-대표자가 있긴 하되, 그가 못한다면 민중들도 참여해야 한다. 개인이 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개인이 있는 우리, 다중 되기!2. 언어의 뼈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소리의 뼈 기형도● 규칙의 맹목성 비트겐슈타인-소리의 뼈 =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관심이 없음. 또한 자기의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부족해짐. 이렇게 무사유가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언제든지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음.-우리가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바로 우리가 속한 거대한 전체는 언제든지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괴물로 손쉽게 탈바꿈할 수 있음 “개인 없는 우리”-전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1: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계속해서 축소하기. 조직이 크면 익명의 사회, 이름이 없는 사회가 됨. 그러나 이건 혼자 달성하기 어려움.-전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2: 조직 속의 내 행동이 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항상 ‘사유’하는 것.-“기쁨의 정치학” = 나만 코나투스가 증가해선 안됨. 남의 코나투스도 생각.4. 삶의 우발성 알튀세르와 강은교● 물길의 소리 강은교● 우발성과 마주침의 철학 알튀세르-우발성: 우연한 순간에 인간이 비와 마주칠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우발성: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름 남을 함부로 대해선 안됨-시의 주제 연: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폭포 소리 = 물방울 하나가 다른 물방울 하나와 마주치면서 나는 소리. 두 개의 물방울 가운데 어느 한 곳에 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님. 그것은 두 물방울의 사이, 즉 두 물방울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 이게 계속 확장됨. 얘도 만나고 쟤도 만나면서.-라이프니츠 “미세지각이론” 지금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은 너무도 다양한 수많은 미세 지각들이 쌓이고 종합됨으로써 이루어진 것. 작은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큰 개체를 형성한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내리는 비를 보면서 촉발된 알튀세르의 사유는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의 철학”, 즉 마주침의 철학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에피쿠로스는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원자들이 평행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조금만 각도를 바꿔 편차를 보이면 (이 편차가 바로 “클리나멘”) 원자가 획, ‘아케이드 프로젝트’ 19C 파리를 연구함 숨겨진 욕망의 논리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함.-아케이드: 가운데에 긴 보도가 있고 양쪽에 상점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으며 그 상점들 위로는 밝은 채광을 위해 유리 아치로 뒤덮어 놓은 건축 양식-물질문명, 백화점, 화려한 네온사인, 쇼윈도의 불빛 = 인간에게 작용하는 “욕망의 집어등”-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유혹과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욕망. 자본주의의 유혹, 다시 말해 소비 사회의 유혹.-전통적 마르크시즘은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의하여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말함. 경제를 연구하는 것만이 의미 있음-그러나 벤야민은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나름대로의 고유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 알튀세르의 중층결정. 상부구조(문화)도 나름의 자율성을 가진다. 문화와 인간의 상관 관계를 찾자. 아케이트 프로젝트: 문화와 관련된 인간의 복잡한 욕망 구조-상부구조(문화): 기업, 국가 등에서 소비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 예를 들면 유행을 얼른 바꾼다든지. 하부구조에 영향 줌-자본주의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의 욕망에 관해 더 잘 알고 있음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면서 유혹할 수 있었던 이유-창녀와 노숙자들이 많았음 부르주아 가정의 ‘체면을 차리려는’ 여성들 대거 출현. 은근히 부를 과시하려 함 상품은 사용가치X 교환가치O 백화점과 돈을 절대 신으로 모심 (사원과도 같음) 소비-노동-소비-노동의 악순환7. 무한으로서의 타자 레비나스와 원재훈●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그리운 102 원재훈● 시간과 타자에 관한 철학, 유한성과 무한성, 일자와 동일성, 유아론 레비나스-사랑에 빠진 우리는 ‘기묘한 비대칭’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느낌 시인: 작은 존재, 그대: 큰 존재자신의 욕망과 느낌은 알고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감정 상태는 모름-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을 고통이자 행복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행복해 진다면 그것은 개인 있는 우리가 서로 만나기 때문임.새로운 해석, 즉 나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해석을 갖기 위해선 먼저 기존의 해석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이는 ‘망각’을 통해 가능하다.기존의 해석 체계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해석 체계를 갖춰야 한다. 동물은 오랜 진화과정을 겪어야 이것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힘은 곧 “꿈”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해석 체계를 꿈꿔야 한다.-낙타: 우리 사회의 관습, 제도, 규칙 등에 순응하고 굴복하는 주체. 의무와 복종-사자: 저항하는 주체. 부정과 자유-어린아이: 자기 나름대로 꿈을 만드는 것. 저항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 망각과 창조. 유희에 가까우며, 행복감과 즐거움을 느낌. 실패했을 때 또 시도할 수 있는 능력. 꾸중 한 번에 갇히지 않고 굴복하지 않아 결국 실현해내는 주체-낙타에서 사자로, 어린아이로 나아가며 변모의 시점을 찾으려고 함 기쁨을 수반하는 유쾌한 관점을 창조할 수 있게 됨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가 새롭게 긍정됨9. 미시정치학 푸코와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미시 정치학, 계보학 푸코-그림자가 없다 = 빛이 없다 = 그림자의 ‘실체’가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 = 자발적인 복종+내 아랫사람에게 또 권력을 부림(미시권력)-푸코는 우리의 자유를 길들이고 억압하려는 권력이 청와대나 국회 같은 거시적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의 개인들이 의식하기 힘든 “미시적인 차원”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함 우리 스스로가 “자발적인 복종”을 하고 있는 것!우리는 타인이 부여한 규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노예적 의식, 노예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음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라고 말하는 것!4.19혁명 주도세력들은 자신들이 이미 권력에 훈육되어 있다는 걸 알지 못함 (미시권력)-낭만주의적 혁명 넌 너무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 거야. 내부까 규칙을 공유하는 공동체에 함께 속해 있으므로 서로에게 타자가 아님. 서로 알고 싶은 게 없음12. 주름과 리좀의 사유 들뢰즈와 최두석● 성에꽃 최두석● 주름, 아장스망, 다중체, 리좀 들뢰즈-화자가 보고 있는 차창에서 성에꽃이 보임. 성에꽃은 우연한 마주침으로 생긴 것. 그리고 그걸 보면서 고단한 우리 이웃들의 한숨과 열정을 되새겨봄.유리창에 비치는 화자의 노곤한 얼굴도 결국 다양한 사연들의 마주침과 그 흔적으로 인해 생긴 걸 거라고 생각.나와 비슷한 주름을 간직한 친구의 얼굴도 보임. 친구는 나와 같은 길을 걸었으니까 얼굴에 드러난 주름도 비슷함. 그러나 친구는 민주화를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잡혀감. 앞으로 그 친구의 얼굴에 생길 주름을 나는 갖지 못하겠지. 이젠 따로니까. 같이 걸을 수 없으니까.-다양한 것들의 마주침, 그로부터 생기는 흔적이나 주름 = 아장스망 = 다중체(많은 주름, 멀티 플리). 주름이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일종의 흔적이다.보병의 강건한 다리 근육은 땅과의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플리’, 즉 ‘주름’이고, 기병의 다리 근육은 말과의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주름’이다.-친구의 주름이 낯설어 보이는 이유: 내가 걜 못 본 사이, 걘 다른 사건이나 인물들과 마주치면서 새로운 주름을 만들었기 때문에. 친구의 새로운 주름을 알기 위해선 그걸 펴봐야 한다.주름이 생기는 작용은 implication(접기), 펼치는 작용은 explication(펴기)친구의 주름을 펼쳐 보아야 우리는 그 친구와 함께 새로운 주름을 만들 수 있음 (다시-접기)-들뢰즈는 인간의 사유를 두 가지 이미지로 구분함나무가 절대적인 일자를 상징한다면(아버지와 자식 같은 친자 관계), 뿌리줄기를 의미하는 리좀은 마주침과 그 흔적을 상징함. 다른 뿌리줄기와 연결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니까. 따라서 남녀가 마주쳐서 사랑에 빠지는 수평적인 관계는 리좀의 활동.리좀은 ~와, ~와, ~와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가짐뿌리가 가지들을 지탱하는 것처럼 무엇이 무엇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