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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항해 시대의 해적 - 바르바로사 형제
    산업화된 현재의 바다를 떠올리면 오염됐고, 투박한 무역선들과 군함이 움직이는 삭막한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세의 바다는 다르다. 온화한 지중해, 아름다운 항구, 고풍스러운 선박, 모험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바다 대서양. 이것이 내가 가진 ‘대항해시대’의 이미지이다. 이번에 나는 대항해시대의 해적, 그중에서도 ‘해적왕’의 칭호가 어울리는 바르바로사 형제를 주제로 잡았다.1. 해적이 되는 이유해적은 인류가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다. 고대의 갤리 선, 범선 혹은 현대의 고속 모터보트를 타고 활동하든 않든, 그들이 해적을 택한 수많은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절망, 혹은 환멸이다.온 시기를 통틀어 각국에서는 해적질을 막기 위해 잡힌 해적은 엄벌에 처했다. 그 예로 18세기 황금 해안에서 해적을 처형하고, 시체의 보존을 위해 타르에 담갔다가 교수대에 사슬로 묶인 채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그대로 매달아두는 형벌을 가한 것을 들 수 있다. 해적이 되면 처벌이 그들을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해적의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해적행위가 뱃사람이 택할 수 있는 다른 어떠한 방법보다 더 매력적인 대안이었기 때문이다.해적행위는 부를 쌓고 사회적인 신분 상승을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정식 상선에서 일하거나, 해군에서 복무하는 것과는 달리, 해적은 이익을 스스로 나누어가졌고 자신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더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사회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해적의 길을 택한 것이다.2. 바르바리 해적일찍이 기독교 국가는 지중해 남쪽 해안, 이집트에서 대서양의 지브롤터 지역을 ‘바르바리’라 불렀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이 야만인, 미개인을 부를때 사용하던 용어 ‘바르바로이’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당시 유럽 국가들이 북아프리카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15세기, 동서 지중해의 양끝에서는 큰 사건이 두 차례나 일어났다. 동방에서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서방 이베리아에서는 수백 년간 진행된 레콘그들과 같은 종교를 믿은 북아프리카인들과 합세하여 공동으로 해적활동을 폈다. 바르바리 해안지대는 땅이 비옥하고 물이 넉넉하며 조수간만이 없는 천혜의 항구가 수없이 널려 있어 해적행위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이 바로 150여년간, 지중해를 주름잡은 바르바리 해적이 탄생한 배경이다.바르바리 해적은 15세기 말에 등장하여 대서양 입구에서부터 성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선박과 해안 마을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흉악하다는 평판은 거의 전설적이다. 이들은 단순한 해적들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섬기며 이슬람 군주를 위한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략해적(국가에서 허용한 해적. 교전국의 선박을 공격, 약탈할 권리를 가짐)이었다.바르바리 해적들이 기지로 삼은 곳은 북아프리카 해안의 작은 도시들을 포함해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 등의 도시들이었다. 이 해안도시들은 사하라 사막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의 인구가 희박한 작은 내륙 지역들은 도시를 지탱하는데 요구되는 필수품을 가까스로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지방의 영주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항구를 열어주고 기지를 마련해주며 장려했고 그 대가로 해적행위를 통한 이익의 일정 몫을 챙겼다.바르바리 해적들의 가장 큰 수입원은 금은보화의 약탈도 있지만, 노예무역이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포로를 잡으면 자신들의 배의 노를 젓도록 할 포로와 몸값을 받을 만한 포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예시장에 넘겼다. 바르바리 해안의 도시들에는 노예시장이 발달했는데 알제의 경우에는 노예시장에 팔 포로를 2만명 가까이 수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약탈을 통해 포로를 확보하는 것 또한 수십 명 정도의 소규모가 아니었다. 한번에 10000명이 넘는 포로가 노예로 팔리기도 하였다.바르바리 해적들은 공격 표적을 비이슬람 선박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기독교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의 조약에 따라 공격 표적을 변경하기도 했다. 그 예로 베네치아는 16세기에 오스만 제국과 평화를 유지했기 때문에 베네치아 선박에 대한 공격은 억제되었다 바르바리 해적의 주 활동 영역까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한 후, 바르바리 해적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이들의 전성기는 17세기 중반에 끝났으며, 19세기 초까지 지나가는 배를 여전히 공격했지만, 바르바리 해적들은 더 이상 기독교 세력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유럽 제국의 강력한 해군력에 토벌되고 만다.3. 갤리선바르바리 해적이 16세기 지중해를 휩쓰는 일이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의 갤리선이다. 갤리선은 고대시대부터 사용된 선박이며 노를 주로 쓰고 돛을 보조로 사용하였다. 고대시대의 해전은 충그림 2 - 중세 갤리선각의 싸움이었기에 배의 무게를 늘림과 동시에 속도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갤리선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중세에 들어서는 대포가 탑재되었고, 주로 백병전의 전술을 취하였다.갤리선은 노를 젓는 추진력에 더해 돛을 사용해 바람을 이용했기에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강한 바람이 불지 않는 지중해에서 이것은 돛을 사용한 범선보다 유리한 이점이 되었다. 범선이 중무장할 수 있고 더 높은 구조를 갖고 있지만, 기동성이 떨어졌다. 그리고 넓은 현측에 대포를 실었던 대형 범선과는 달리, 갤리선은 선수에 대포를 실어서 뱃머리를 적에게 향해야 했는데 이로서 좁은 선체의 특징을 살려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범위를 최소화한 것이다.16세기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전형적인 갤리선보다 더 작게 개조된 갤리선을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속도를 더 살리기 위함이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갤리선의 속도를 활용하여 지중해 바다를 휩쓸었다. 하지만 해전에서 대포의 비중이 커지고, 함포전에 맞추어진 대형 선박이 사용됨에 따라 갤리선은 쇠퇴하게 된다.4. 바르바로사 형제바르바리 해적들 중 가장 유명한 해적이 아루지, 히지르(후에 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파샤) 바르바로사 형제이다. 두 형제는 예니체리에서 퇴역한 뒤 도공 생활을 하던 그리스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맏이인 아루지는 선원 생활을 하다 성 요한 기사단에 포로로 잡혀 노예 생활을스파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의 공격에 무력했다. 해적은 북아프리카의 지방 영주들에겐 군사력이자 동시에 수입원이었다. 따라서 해적과 동맹을 맺고 항구를 내어주었다. 아루지는 처음에는 튀니지의 술탄과 동맹을 맺고 항구를 기지로 삼았다. 하지만 술탄과의 갈등으로 튀니지를 떠나 자신에게 구호신호를 보내온 알제로 갔다. 당시 알제리는 에스파냐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알제의 군주 셀림은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아루지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구원하러 온 아루지는 오히려 셀림을 죽이고 자신이 술탄임을 선언하였다.아루지는 알제 내부의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을 토벌하러 온 에스파냐 함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신속하게 오늘날의 알제리 공화국 거의 전 지역을 석권했다. 아루지가 해적행위를 시작하고 알제리를 손에 넣기까지 걸린 기간은 고작 13년에 불과했다.아루지가 알제리를 거의 손에 넣자, 에스파냐에서는 더 늦기 전에 아루지를 토벌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따라, 에스파냐는 원정대를 틀렘센으로 파견했다. 아루지는 틀렘센의 방어시설이 미흡하다고 보고 페스의 술탄에게 병력과 장비를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핑계만 대고 원조를 해주지 않았다. 아루지는 틀렘센은 포기하고 알제로 퇴각했지만 에스파냐 추격대와 싸우던 도중 전사했다.아루지가 전사하자 동생 히지르가 알제의 군주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신의 선물이란 뜻을 가진 ‘하이레딘’으로 불렸다. 계속되는 에스파냐에 맞서기 위해, 하이레딘은 스스로 알제를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바치며 귀순했다. 이제 막 이집트를 정복한 오스만의 셀림 1세는 하이레딘의 제의를 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 그래서 하이레딘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2000명 규모의 예니체리 부대를 지원해주었다. 오스만의 원조로 하이레딘은 공략이 힘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에스파냐 지배하에 있던 지역을 모두 수복했다.하이레딘은 알제리 지역을 수복하고 내륙에 있는 주요 아랍 부족과 베르베르족과의 동맹을 확고히 다졌다. 그럼으로써 짧은 파샤(장군, 총독, 사령관 따위의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주던 영예의 칭호)의 칭호도 수여하였다. 이후 하이레딘은 알제로 돌아가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 신장에 온 힘을 쏟았다.하이레딘은 콘스탄티노플에 1년여 머무는 동안 오스만 제국의 해군을 사실상 창설하는 일을 도맡아했다. 오스만이 해상에서 우위를 점한 시점은 하이레딘이 콘스탄티노플 조선소에서 첫 겨울을 보낸 시점부터이다. 그는 그해 겨울에만 갤리선 61척을 건조했고, 이듬해 봄 오스만은 84척 규모의 대함대를 발진시킬 능력을 갖추었다.하이레딘은 1534년부터 이 새롭게 건조한 함대를 몰고 지중해로 나아갔다. 그리고 수년간, 지중해를 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약탈했다. 약탈한 재물과 포로들은 하이레딘의 함대를 부유하게 했고, 오스만 술탄을 부유하게 만들었다.하이레딘이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유럽 국가들은 쓸데없는 언쟁이나 벌이고 상호 간에 불신이 팽배하여 동맹을 이룰 가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다 1538년 여름 하이레딘에 위협을 느낀 교황은 신성 동맹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동맹에는 교황령, 에스파냐, 베네치아, 제노바, 몰타 기사단이 참여하여 하이레딘에 대항했다.신성 동맹은 주력인 갤리선만 162척이었으며 다른 배들을 합쳐 모두 302척이나 되었다. 이에 맞서 하이레딘이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은 갤리선 122척에 불과했다. 함대의 규모로만 보면 신성 동맹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신성 동맹의 지휘부는 분열되어있었다. 총 지휘관은 제노바 출신의 안드레아 도리아 제독이었지만 각국의 제독은 도리아의 명령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만군은 지휘관 하이레딘 아래 일치단결되어 있었다. 양측 해군은 프레베자에서 격돌하였는데 신성 동맹 지휘부의 분열의 영향은 전투에서 드러났고 전투는 오스만군의 승리로 끝났다. 프레베자 해전 이후 30여 년 뒤 레판토 해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하이레딘은 이후로도 오스만의 해군 제독이자 지중해의 해적왕으로서 활약했고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부를 안
    사회과학| 2012.06.02| 6페이지| 1,000원| 조회(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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