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복지정책 발달과정1. 사회복지정책의 발달배경-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발달은 1960년대 이후에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서 관련이 있게 되며, 1980년대까지의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정책은 사회복지사업 관련법들이 제정이 되고 체계적인 사회복지의 제공을 위한 제도가 추가가 되기 시작을 하였다. 경제발전을 정부정책의 우선으로서 삼았기 때문에 사회복지와 관련을 한 정책은 기대를 한 만큼 발전을 하였다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래는 발달배경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1)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여타 선진복지국가에서 초기에 시도를 한 것처럼 공공부조제도를 통하여 절대적인 빈곤계층을 요보호대상으로서 하여 국가적인 노력을 하게 되었다.2) 사회구조적인 변화 외에도 1960년대 이후부터의 지속적인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서 국민들의 삶의 수준이 높아지게 됨과 동시에 시민의식도 함께 높아지게 되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더 강조되기 시작을 하였다.3) 급속한 경제의 성장 이후에 경험을 한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는 과잉 생산, 대량실업자의 양산, 불경기 등의 문제에 직면을 하게 되면서 사회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이 되었다. 먼저 1995년 사회보장기본법 제정 후 그리고 2003년 참여정부의 생산적 복지, 1997년 이후 노령연금법, 건강가정지원법, 모자가족법, 모, 부자가족법, 위탁가정지원센터 등이 신설이 되기 시작을 하였다.2. 사회복지의 발전과정-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은 공적인 구휼사업이 그 중심으로 출발을 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종교기관을 통하여 복지활동, 계와 향약 등의 민간조직의 활동 등 현대적 개념의 민간차원 복지제도를 통해서 서비스가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을 하였고, 우리나라 사회복지발전은 국가의 책임에 의한 사회복지사업이 나타나기 시작을 한 196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에 마련이 된 사회보장기본법에 따라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은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복지서비스로서 나누어서 시작이 되었다. 발전과정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1) 1960년대- 이 시기의 우리나라 사회복지는 시설보호로부터 시작을 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이후 정부의 복지정책은 보육시설과 양로시설을 우선적으로 설치, 유엔의 구호계획과 외국민간외교단체의 활동은 사회사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외국원조에 의존을 한 사회복지의 형태로서 시설보호와 공공부조에 한정이 되었다. 공공부조의 기초가 된 생활보호법은 그 적용대상과 급여의 내용에서 일제강점기의 조선구호령과 미군청의 후생국보 3C호에 기초를 하여 제정이 되었다. 1962년 이후 사회문제를 해결을 하려고 하는 노력을 보이게 되었다. 1963년에 제정이 된 산업재해보상보호법은 그 시행과 적용대상이 일반근로자이므로 이 법이야말로 우리나라 사회보험의 시초라고 할 수가 있다.
이성계의 왕위 등극,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1. 왕위 등극-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쫓아내고서 신진사대부들의 추대 속에서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리고서 왕이 되게 되었다.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게 되어 정권을 장악을 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전쟁의 영웅의 화려한 등극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고 확정을 하고 공식적으로 새로운 왕조의 출범에 대해서 만천하에 선포를 하게 되었다.조선의 시조가 된 태조 이성계는 화령부(지금의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과 최씨 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키가 크고 용모가 출중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다라고 한다. 왕비는 밀직부사 한경의 딸인 신의왕후이며,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태조의 본관은 전라북도 전주이며, 조상들의 고향 역시도 전주였다. 그런데 고려의 지방 관리였던 고조부 이안사(목조로 추증)가 원나라에 투항을 하여 천호의 관직을 맡으면서부터 함경도 일대의 유력 가문이 되었다. 이후로 태조 가문의 함경도에 대한 영향력은 부친 이자춘까지 이어지게 되었다.태조의 부친 이자춘이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로 있던 1356년 공민왕 재위 5년에는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려고 공략을 하였다. 이때 약관의 나이였던 이성계는 이자춘과 함께 고려군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여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이자춘은 동북면상만호에 올라서 개경의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할 수가 있었다. 이성계는 부친이 죽자 동북면상만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마침 그해에 독로강만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을 하였고, 홍건적 10만 대군이 개경을 함락을 하자 친위병 2천 명으로 홍건적 격퇴에 일조를 하며 조정에 얼굴을 알리게 되면서 동북면을 대표를 하는 세력으로 성장을 하였다.이후에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 원나라 나하추가 수만 명의 병력으로 함경도 홍원에 침입을 하게 되자 함흥평야에서 패퇴시키게 되었다. 1364년에는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을 옹립을 하려고 평안도에 침입을 하였으나, 당시에 실세였던 최영과 제휴를 하여 이들을 소탕을 하였다. 이어 함경도 화주에 침입을 한 여진족 역시 이성계가 앞장서서 격퇴를 하게 되었다. 전장에서의 잇따른 수훈으로 말미암아 이성계는 밀직부사의 벼슬과 익대 공신에 책봉되기에 이르게 된다.2.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 왜구의 출몰이 잦던 1380년, 이성계는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에 올라서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산대첩이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하여 왜국의 노략질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됨을 보이게 되었고, 중앙 무대에 진출을 하게 된 이성계의 정치적인 입지 또한 견고해지게 됨을 보이게 되었다.전공이 쌓이게 되자 1388년 우왕 재위 14년에는 수문하시중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무렵에 우왕과 최영이 신생 국가인 중국의 명나라에 대항을 하여 요동 정벌을 추진을 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 불가론을 내세우면서 반대를 하게 되엇으나, 묵살되기에 이르게 된다. 원정이 결정이 되면서 이성계는 왕명에 따라서 우군도통사에 임명이 되어 요동으로 진군을 하게 되나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한양으로 말머리를 돌리게 되니,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게 된다.
왕건의 고려 창업1. 고려의 창업- 고려 태조 왕건의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멸하고서 삼한 땅을 신라의 통일에 이어서 다시금 재 통일을 하게 된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서 고려를 건국을 하게 된 지 장장 19년 만의 일이게 된다. 이로써 천 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를 하던 박씨, 석씨, 김씨 왕조를 창출을 한 신라가 몰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부활을 꿈을 꾸던 견훤(경북 상주(문경)의 호족 출신으로서 전주 견씨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견훤에 대해서 진흥왕의 후손인 아자개의 아들로서 전하게 되나 명확하지는 않다. 892년 무진주(광주)를 손에 넣은 뒤에 900년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을 하기에 이른다. 고려의 왕건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고, 서라벌에도 침투를 하여 신라의 경애왕을 참살을 하기도 하였다. 왕위 세습의 문제로 장남인 신검에 의해서 탄압을 받다가 왕건에 망명을 하게 된다.)의 후백제 역시나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려의 삼한 통일은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게 된다. 특히나 신라처럼 당나라와 같은 외세의 힘을 빌어서 통일을 한 것과 비교를 할 때에 고려의 통일을 경우에는 외세가 배제가 된 통일이게 되며, 삼국은 물론이고, 한민족 스스로가 이루게 된 최초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은 서기 877년 신라의 헌강왕 재위 3년에 송악(지금의 개성)의 토호인 아버지 왕륭과 어머니인 한씨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왕륭의 성품에 대해서는 그 도량이 크고 삼한을 통일을 할 만한 기상을 지녔다라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2. 왕건의 출생 배경- 왕건의 출생 배경은 삼국의 시조들처럼 탄생 설화가 전한다. 그 중에서는 풍수도참의 대가인 도선 스님과 관련이 된 탄생 설화가 비교적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송악에 살던 왕륭이 어느 날 남향으로서 새 집을 짓게 되었다. 그때 당나라에서 일행지리법을 터득을 하고 귀국을 하던 도선이 그 광경을 보고서 '삼한을 평정을 할 인물이 나올 집터인데 방향을 잘못 잡았도다.'라며 탄식하듯이 중얼거리고 홀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본 왕륭이 황급히 도선을 쫓아가게 되었다. 신발을 거꾸로 신을 만큼 황급하게 달려온 왕륭이 도선에게 자초지종을 묻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도선은 왕륭에게 집터의 길한 방향을 정하여 주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아들이 태어나면 반드시 왕건이라고 이름을 짓도록 하시오.' 그 이후에 왕륭의 부인인 한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인 음력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왕륭은 도선의 말을 따라서 아이의 이름을 왕건으로 짓게 되었다.이러한 풍수도참은 풍수설과 도참설이 어우러져 하나의 사상을 형성을 하게 된 것으로서 풍수설은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하여 천지의 기가 인간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에 도와 보기 생겨난다라는 사상이게 되고, 도참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을 하여 그것을 신봉을 하게 되는 사상이게 된다. 풍수도참이 우리나라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을 한 것은 신라 말기의 승려인 도선에 의해서이다. 그가 저술을 한 '도선비기'는 대표적인 풍수도참서로서 '묘청의 난' 등의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3. 왕건의 궁예 축출- 왕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장부로서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왕건은 17살에는 도선대사의 가르침으로서 군사학, 천문학, 제례법 등을 배우게 되었고, 895년 진성여왕 재위 9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세력이 방대해지게 된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궁예는 자신의 수하가 된 왕륭에게 금성태수를 제수를 한 뒤에, 약관의 왕건에게 기병을 지휘를 하는 정기대감의 벼슬을 내리게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에 따라서 양주와 견주를 공격을 하여 차지를 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광주, 충주, 당성 등을 평정을 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전쟁은 북원(원주)을 근거지로 한 양길과의 세력적 다툼으로서 보이게 되며, 궁예가 양길을 무너뜨리게 되고 나서 견훤과 대결 구도를 이루게 된 것으로서 보이게 된다. 왕건도 연전연승한 공로를 인정을 받아서 궁예에게 아찬을 임명을 받게 되었다.궁예는 자신의 세력이 강원도와 한강 일대까지 확장이 되자 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게 되며 스스로 왕위에 등극하게 되었다. 그런데 왕이 된 궁예가 미륵불의 헌신이라면서 기이한 행동을 보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궁예의 기행이 이어지게 되는 가운데 903년 해상으로 진출을 한 왕건이 나주를 공략을 하여 승리를 하게 되었다. 왕건의 해상 진출과 나주 장악은 후일 후백제가 전라 지역을 평정을 하게 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궁예는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서 바꾸고 연호를 무태로 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를 모방을 하여 국가적인 기틀을 마련을 하게 되었다.
영국의 고령자 고용지원정책1. 고용주의 인식의 변화- 영국은 최근 고용에서 연령에 대해 다양화를 하자라는 슬로건 아래에 '뉴딜 50플러스'라는 프로그램을 운용을 하고 있음을 보인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일자리를 찾는 50세 이상의 고령자들의 직업의 훈련과 임금보조금제도를 연계를 하게 된 것이다.1970년대 중반에 보수당 집권 이후에 영국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의 정책과 시장친화적인 복지정책을 실시를 한다. 예를 들어 복지분야에도 시장메커니즘을 도입을 하여, 서비스의 제공자 간의 경쟁을 활성화를 하고, 개인주의 및 개인의 섵개을 강조를 하며, 국가는 최소수준의 서비스만을 제공을 하고자 하게 된다.전통적으로 시장의 원리를 중요시를 해 왔었던 영국에서는 고령자 노동시장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하기 위해서도 인위적인 정책을 시행을 하여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기 보다는 시장참여자들의 자발적인 변화, 즉 고령자의 고용을 기피를 하는 고용주들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경향이 크다라고 할 수가 있다.1990년대 초까지 영국정부는 고용주의 고령근로자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고용주를 대상으로 하여 설득과 권고를 위한 '홍보 캠페인'을 주로 실시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영국에서는 고령화가 가져오게 될 사회, 경제적인 영향에 대해서 보다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을 한 이후에도, 고령근로자의 고용문제를 고용주의 연령차별과 인식의 문제차원에서 다루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였다라고 할 수가 있다.1997년 노동당 정부가 출범을 하게 되면서 연령의 차별을 법으로서 금지를 하는 방안이 검토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법의 제정에 대한 시도 또한 유럽연합의 연령차별금지 법제정 권고에 호응을 하게 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게 되는 실정이다. 한편 생산적 복지의 차원에서 적극적 노동시장의 정책의 일환으로서 고령자를 위한 뉴딜정책이 시행이 되게 되면서 고령자의 고용을 촉진을 하기 위하여 성이느이 학습과 계속적인 교육 등의 직업교육훈련 및 취업알선 서비스 강화 등 보다 더 적극적인 방안이 실시가 되고 있다.2. 고용지원 방향- 영국의 대기업의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조기의 퇴직에 대한 후유증을 극복을 하고 은퇴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를 하기 위한 노력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 전화번호 안내업체 '더 넘버 118-118'은 최근 선정소감을 이와 같이 밝혔다라고 한다. '연령 챔피언] 인사담당자가 Davi peer 씨는 '최근 정년퇴직한 형사가 새로 입사를 하였는데 1주일의 훈련만으로 능숙하게 업무에 적응을 하여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라면서 '50세 이상의 근로자들은 대부분 유능하고 헌신적'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개념과 한국의 가입 영향1. 개념- 현재 세계는 미국과 일본이 세계국제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을 통해서 국제 금융을 장악을 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중국이 주도적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라는 명칭으로서 이에 대항을 하기 위해서 설립을 하려고 있다. 이는 2013년도 10월에 중국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아시아 순방을 하던 중에 공식적으로 제안을 하게 되었고, 이에 2014년 10월에 500억 달러 규모로서 공식적으로 출범을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500억 달러라는 초기 은행 자본금 자체를 중국이 대부분을 투자를 하여 시작을 하였고, 점차적으로 각 국의 참여를 유도하여 총 1000억 달라까지 늘릴 계획으로 보고 있다.참여 국가로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몽골과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오만과 쿠웨이트, 베트남과 브루나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미얀마와 태국, 카타르 등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동남아국가연합 아세안의 10개국을 포함한 총 21개국이 참여를 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 등은 포함이 되지 않았으나, 중국의 입장에서는 참여를 유도하는 면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우리나라는 2015년 참여의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참여 요구사항을 첨부하여 유보가 된 상태이다.우리나라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참여를 하게 될 경우에는 기존의 국제금융기구 내에서 그 지분과 참여율이 저조하였던 입장에서 볼 때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일 수가 있게 되는 기회가 될 수가 있고, 중국 주체의 인프라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중국의 위안화의 청산과 결제를 할 수가 있는 은행의 설립 등의 중국의 각 지원들을 받게 될 장점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투자 자체가 중국이 지분의 50%를 넘게 차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지분을 차지하기 위하여 많은 자금의 투입을 하여야 한다라는 단점이 있다. 또한 중국이 정치적으로 악용을 하게 될 경우 입장이 난처해질 수가 있게 될 수도 있게 된다.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2015년 초까지 참여 국가를 모집을 한 이후에 2015년 말 정도에 출범을 할 예정이게 된다. 쉽게 말을 하면 국제금융기구인 IMF가 아시아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라고 가정을 하고 있는데, IMF는 어떤 나라의 경제위기를 구제해주는 금융이라는 특색이 많이 가진다. 하지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발전이 되는 도시 또는 발전이 될 만한 도시에 가치를 보고 경제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투자를 실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세계은행이나 아시아 개발 은행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게 된다.2. 한국의 가입영향-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중국이 유치를 하게 되는 금융기구로서 우리나라 정부는 2015년 3월 27일 공식적으로 참여를 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면을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요인이 된 사항은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내한을 할 당시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대해서 참여를 할 것을 설득을 하였고, 이에 한국 정부는 참여를 할 명분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명분을 찾으려 한 이유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의 영향권 아래에 미미한 지분을 가지고 있던 한국에 대해서 직, 간접적으로 가입을 견제를 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국제금융기구에 한국이 가입을 한다면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 예상을 하였기 때문이다.하지만 한국 정부는 참여를 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 중국의 입장의 변화를 줄곧 모니터링을 하였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일본이 주도를 하고 있는 아시아개발은행(ADB)와 비슷한 투자만 하더라도 향후에 연간 100억 달러(11조원)의 규모의 투자결정을 내리는데 그 권한에 대해서 회원국이 포진한 이사회를 주겠다라는 것을 밝혀서 이러한 정보를 입수를 한 한국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결국 최종적으로 가입을 결정을 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한국 정부는 당장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의 지분율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창립 회원국이 되는 것이 앞으로 운영 시에 목소리를 키울 수가 잇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립 회원국이 되지 못하게 되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이 국제적으로 증자를 할 때에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을 얻게 되거나, 탈퇴를 한 나라에 대한 지분을 받아야만 하기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쉽지가 않게 되기 때문이다.한국은 2005년도에 가입을 한 미주개발은행(IDB)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이 고작 0.002% 불과하게 된다. 이는 당시에 IDB를 탈퇴를 한 보스니아의 지분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면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국가에 많은 지분을 할당을 할 것으로 보이게 된다. 각 GDP 등의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지분이 결정이 될 것이다. 앞으로 지분의 협상등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