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과 미술 전시감상 리포트≫『양혜규 展_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의 미학적 분석1212093 동양화과 안혜성2015년 상반기, 국내에서 5년 만에 설치 여류작가 ‘양혜규’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예술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는 여러 미학 또는 예술관련 수업을 수강하며 현대여류 작가로 그를 심심치 않게 접해봤기에 호기심 반 들뜬 마음 반으로 전시장을 방문했습니다. 국내에서 열리는 대형전시답게, 그녀의 전시는 리움 박물관의 초입부터 시작됩니다.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사유의 내용들을 하나의 설치 작업으로 구성해내는 작가 양혜규.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기 때문인지 그에게는'노마드 작가'라는 별명도 함께 합니다. 또한 그녀는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활동하며 그만의 독특한 예술관을 세계적으로 알리기도 했습니다. 해외에서 가져온 화려한 활동경력 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내에서는 작가로써 그녀의 이름이 회자 되지 못했는데, 베니스 비엔날레 덕분에 역으로 한국에 소개된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미학과 미술 수업을 들으면서 항시 좋은 전시를 주목 하던 중, 이번 상반기 전시에서 이만큼 ‘미학’ 또는 철학에 어울리는 작가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작품세계는 심오한 개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전시의 개별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 즉 질료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료와 작품의 내용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가의 컨셉트는 개인과 세계-보편성을 말함-의 관계 와 작가와 관람자의 관계 등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란 작품에서 작가는 ‘개인’으로 표현되는 민족적 개별성과 ‘세계’로 표현되는 인류적 보편성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인조 짚풀 이라는 질료를 이용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시리즈는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소재인 짚으로 문명의 보편성과 개별성, 유사함과 상이함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작품을 보며 언뜻 현상학과 실존주의적 관점이 떠올랐습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 세 가지의 건축물의 유사성으로 ‘개별성을 묶어놓은 상태’를 보여주는 것 혹은 이러한 유사성으로 ‘묶인’ 세 개의 설치물의 의미를 파 해쳐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보며 헤겔로 이어진 합리론 철학에 기초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합리론 철학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 개별현상들을 인간정신을 통해 범주화 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이러한 합리론 철학을 비판하며 나온 현상학관점에서는 이러한 정신의 지나친 신뢰가 인간의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특성을 희생시켰다고 봅니다. 실제로, 전시 팜플렛을 보기이전까지는 이것이 왜 ‘중간과정이며’-‘중간’의 의미는 크기 면에서 모형과 실재 건축물 사이의 중간임을 나타냄-건축물 같기는 한데 대체 어떤 건축물을 만든 것인지, 왜 이렇게 짚풀로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오랜 사유를 통해 이러한 의미도출을 해내기를 의도한 것 같습니다. 합리론 철학자가 만약 이 전시를 관람한다면, 작가는 세계와 개별성의 관계를 ‘베일에 싸여 나타나기 애매한(이 또한 작가의 의도일 지도 모릅니다.)형상’ 속에서 찾아내기를 바라며 인간의 이성적인 사유를 유도하고 있다고 볼지도 모릅니다. 현상학 관점에서 이 전시를 본다면,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마야 피라미드,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러시아 이슬람 사원 라라툴판’ 이 드러나도록 , 즉 관객이 존재자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았냐 하며 비판을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그러나 양혜규 작가는 관객에게 무엇일지 모르는 애매함만을 주는 것 이아니라, 그들의 참여를 유도해 그 ‘애매한’ 전시공간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즐길 수 있도록 하기도 합니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작가의 의도는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일례로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는 방울로 만들어진 옷, 팔찌, 목걸이 등의 장신구들을 관객이 착용해 볼 수 있고, 착용한 채로 선을 따라 안내를 받고 참여행위를 하며, 자신이 느끼는 대로 현실적인 자신의 상황과도 작품을 결부시킴으로써 작가가 한편으로 남겨둔 빈자리를 채워 넣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대상이라도 감상자가 살아온 인생관, 체험 등의 차이로 인해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감상자 각각 개인의 수많은 지향적 관점에 의해서 수많은 서로 다른 구체화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관객 참여 형 작품은 입니다. 의 2001년 원작은 베를린 아트페어의 vip라운지 디자인을 의뢰 받아서 그 지역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가구를 빌려서 관객용 쉼터를 제공하는 것인데, 이 작품의 포인트는 남들이 빌려준 가구들이 작가의 손을 떠나, 공간에 채워지면서 ‘작업이 스스로 이뤄지는 광경’을 작가가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컨셉트에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 설치된 작품은 그때와 또 다른 인물들의 지원을 받아 ‘재구성’ 한 것으로서 2001년의 작품과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작품인 것 같기도 하면서 단지 휴식공간을 마련해둔 것 같기도 한 이 애매함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이러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의도는 참신했으나, 과연 “전시공간과 작품의 상호작용이 바람직 한가” 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리움에서 새롭게 선보인 나 는 전시공간의 고유성이 작품의 본질을 훼손시킨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의 접근성이 용이했던 첫 시도 때와는 달리 지킴이 2명이 일일이 간섭하는 를 제한된 공간에서 착용하려 드는 관객이 많을 턱이 없습니다. 설령 착용한들 의도를 되살리지 못하는 한낱 전시물에 그칠 것입니다. 국내 유명 인사들로부터 빌린 가구들을 배치한 2015년 버전 에도 ‘사용금지’ 팻말을 올려놓은 여러 대의 가구와 그 주변을 에워싼 지킴이들 때문에 편히 쉬고 갈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전시 공간 특정적인 작업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리움의 공간 성격과 어울리는 작업도 있을 테지만) 최소한 양혜규의 초기작 일부는 본래 의도를 전시 공간이 왜곡시킨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이라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의도되지 않은 제3자의 개입을 이룬 것입니다. 이작품의 외관을 살펴보자면, 23점에 달하는 초기작품들이 미술품 운송업체가 포장한 ‘그대로’ 네 개의운반용 나무팔레트 위에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필자가 미술을 전공해서 인지는 몰라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작품이 가지는 소위 ‘보편적’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느껴졌습니다.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했지만 결국 팔리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모아둔 (즉, 한때는 보물과도 같았지만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린 작품들)에 대한 애증, 가지고 있자니 버겁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과 같은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그 느낌입니다. 이 또한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의 경우처럼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같은 미술을 전공하는 입장이기에 빠른 이해가 된 것입니다. 감상자인 필자의 구체적인 경험이 보다 빠른 의식의 지향작용을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다시 로 돌아가서, 이 작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의를 말해보겠습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작품의 의미가 작품의 장場이라는 맥락에서 일시적으로 고정되지만, 장 자체도 고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하면서 작품의 의미가 끊임없이 지연됩니다. 이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불안정한 것이 되었고, 미술작품은 고정된 중심이 없는 탈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이 작품의 이론적 배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뷔랭의 과 상당히 닮아있는데, 이는 가변적 장소성-의자에 관객이 앉고, 의자가 옮겨지며 작품의 구성이 뒤바뀌는 과정-에 따라 수많은 상대적인 의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리메이크 되지 않은-이번 리메이크작은 학생회실 이라기 보단 귀빈들을 대접할 법한 의자, 디자이너 작품 등의 비싼 의자이기에 ‘학생회’라는 컨셉과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임-)양혜규의 초기작 는 대학교 ‘학생회실’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여러 종류의 일관성이 부재한 의자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의 비일관성은 ‘득 들었습니다. 한 곳에 머무는 정적 상태에 놓인 작품이라기보다 그것의 주체가 관객이 되든, 작품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든--정해진 경로가 아닌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가도록 놔둔(엄밀히 말하자면 작가가 의도한 것)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그가 갑자기 기자의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잠시 빌리더니 탁자 위 노트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empowerment’. 어떤 권한이나 능력을 부여한다는 의미의 단어다. “관객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자발성’을 돌려주는 것이 제 작업의 특징이죠. 제 작품이 관객들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한다는 게 아니라, 작품을 대면한 관객들 스스로 그 감각적인 부분들을 체화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게끔 이끈다는 겁니다. 이 단어, 꼭 적절한 한국말을 찾아봐야 될 것 같아요. 저한테 매우 중요한 개념이에요.”』위는 네이버 캐스트에서 인터뷰한 그녀의 인터뷰 중 일부입니다. 관객에게 권한을 쥐어준다는 것은 작품을 제 3자의 참여로 인해 ‘완성’시키겠다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양혜규의 작업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공간’이라는 요소는 그의 블라인드 설치 작업과도 관련됩니다. 2006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시리즈나 2008년 LA 레드캣 아트센터 개인전 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에서 그는 블라인드라는 기성 제품을 이용했습니다. “블라인드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만드는 울타리 역할을 하지만, 사실 블라인드에 의한 경계는 벽처럼 정확하게 공간을 나누는 게 아니라 임의적이고 투명한 구분을 만듭니다. 경계가 있되 경계가 아닌 상태는 절대 완전한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서 그가 설치를 통해 형성하는 공간이란 머물거나 가둘 수 있는 공간이 아닌, 완전하지 않은 상태의 공간, 즉 관객의 참여로 인해 ‘완성될 여지를 가진’ 추상적 공간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작가는 관객들이 지닌 은밀한 생각과 순간의 감성을 일깨우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함께 설치합니다. 적외선 히터에서 나오는 빨간 조명과 뜨거운 열기, 에어컨이 일으키는 바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