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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광개토대왕릉비 프리젠테이션 평가A+최고예요
    광개토대왕릉비에 관하여목차 1) 광개토대왕 소개 및 업적 2) 광개토대왕릉비의 생김새 3) 광개토대왕릉비에 담긴 기록 4) 광개토대왕릉비를 둘러싼 해석과 논란들광개토대왕 , 그는 누구인가 고구려 19 대 왕 고국양왕의 아들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 묘호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 ( 永樂大王 )광개토대왕의 업적 391 년 즉위 392 년 백제 공격하여 10 성 함락 396 년 백제 공격하여 58 성 차지 400 년 백제 · 가야 · 왜 연합군 격파 405-6 년 요동성 · 목저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10 년 동부여를 통합함 412 년 광개토대왕 죽음광개토대왕릉비독특한 생김새의 광개토대왕릉비 길이 3.5 미터 , 너비 2.7 미터 네모 반듯하지 않은 돌과 울퉁불퉁한 비면 반듯한 행선과 선 → 고구려인의 품격과 심성을 드러냄1 면에는 11 행 449 자 2 면이 10 행 387 자 3 면이 14 행 574 자 4 면이 9 행 369 자 네 면에 걸쳐 총 44 행 , 1,775 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짐 → 이 중 150 자는 훼손되어 읽을 수 없음광개토대왕릉에 담긴 내용 고구려의 건국설화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연대순으로 기록 태왕의 능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기록1 면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기록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건국신화 ( 주몽신화 ) 기재 역대 왕들의 이야기 기재 → 고구려의 정통성과 역사의 유구함을 드러냄2 면 광개토대왕의 생애와 업적 , 정복전쟁에 관한 기록 거란 일대의 정벌 백제 영역으로 진출 낙동강 유역 출병과 국제전 후연과의 전쟁과 요동 지역의 확보 백제 · 왜와의 전쟁 북부여와 동부여 흡수ex) 고구려 시대의 인천상륙작전 “ 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58 성과 700 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와 대신 10 인을 비롯한 포로 1000 명을 얻어 돌아왔다 .” → 고구려 수군에 관한 유일한 기록3 면 , 4 면수묘제에 관한 기록 수묘인 - 릉을 지키는 수호인 광개토 대왕 스스로 수묘인에 대해 기록해 무덤을 지키게 함 가장 규모가 크고 체계적인 수묘제 →각 지역별 선발할 수묘인 수와 왕릉 지킬 전체 수묘인 수 기록 →무려 330 가구광개토대왕은 왜 수묘인에게 유언을 남겼을까 ? 1) 왕실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 - 전연의 미천왕릉 도굴 사례 - 탄탄한 수묘제를 통한 왕릉의 보전이 목적2) 새로운 통치 질서를 알리는 선언 수묘인을 백제와 요동 지역 전쟁 포로로 구성 → 영토 확장 결과 새로 편입한 지역의 백성들 또한 고구려의 국민이라는 새로운 통치 질서를 선언 → 다양한 종족 통합 주변국 거느린 자부심과 긍지 →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임을 선포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 현존하는 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 삼국사기보다 700 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고 ( 最古 ) 의 역사 기록물 현존했던 고구려인들이 직접 작성한 생생한 역사 기록 광개토대왕의 화려한 업적을 보여줌잊혀져간 광개토왕릉비 처음 언급한 문헌 《 용비어천가 》(1445) - 평안도 강계부 서쪽에 강을 건너 140 리에 너른 평야가 있다 .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세간에는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 성의 북쪽 7 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 기가 있다 .17 세기 청의 봉금정책 -200 년 이상 지속됨 . 1880 년 무렵에 개간을 하던 한 농부가 비를 발견 → 이끼와 넝쿨 때문에 탁본을 통해서만 알아볼 수 있음광개토대왕릉비를 둘러싼 논란 신묘년 기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 비문의 변조 여부를 둘러싼 논란 우리 : 고구려의 영광과 왜의 미개함을 대비시키는 방향으로 일본 :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신묘년조 기사를 어떻게 해석 ?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 신라이위신민 ) - 어떻게 끊어 읽는지 , 보이지 않는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는 지에 따라 신민의 주체와 대상이 달라짐일본의 해석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 신라이위신민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 왜가 ” 백잔 ( 백제 ) 과 ○○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 - 생략된 주어는 일본쌍구가묵본일본의 해석 - 쌍구가묵본 바탕으로 해석 - 해방 이후 70 년대까지 일본학계의 정설 -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 . 임나일본부설이란 ? - 일본이 4 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 신라 · 가야를 지배하고 ,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 ( 日本府 ) 라는 기관을 두어 6 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시하기 위함 식민사관에 이용우리의 반박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 신라이위신민 - 주어를 倭 ( 왜 ) 가 아닌 ' 고구려 ' 로 봄 신묘년 이래 왜가 도래하자 ‘ 고구려가 ’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음을 전제정인보의 해석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 신라이위신민 왜가 신묘년에 오니 , ( 고구려가 ) 바다를 건너가 ( 왜를 ) 격파하였다 . 백잔이 ( 왜와 연결하여 ) 신라를 ( 침략하였다 . 신라는 고구려의 ) 신민이었기에 〔 영락 6 년 병신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북한의 박시형과 김석형의 해석 왜가 신묘년에 오니 , ( 고구려가 ) 바다를 건너가 ( 왜를 ) 격파하였다 . 백잔이 ( 왜와 연결하여 ) 신라를 ( 침략하여 ) 신민으로 삼았다 . - 박시형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 ( 고구려가 ) 바다 ( 패수 ) 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 - 김석형문장의 서두 왜 ( 倭 ) 를 목적어로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 신라이위신 민 고구려가 왜를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 그런데 백제가 ( 왜를 불러들여 ) 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 - 일본 육군 참모부가 광개토대왕비를 변조 - 쌍구가묵본 만드는 과정에서 신묘년 조 기사 등 25 자를 변조 - 신묘년 기사 중 래도해파來渡海破는 변조된 글자 - 변조된 글자를 새롭게 판독하고 해석 시도신묘년 기사에 관한 또다른 관점 - 신묘년 기사 자체가 ‘허구’ - 일본의 입장대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인정 → but, 이는 고구려 측에서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한 과장고구려인의 입장에서 ...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 臣民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 신라이위 신민 - 고구려는 신민 을 자신의 나라와 타국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 -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 !!!!!!!{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2.10.23| 35페이지| 1,000원| 조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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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최초의 역사가, 역사책
    한국 최초의 역사가, 역사책20110420 이민섭한국에서의 최초의 역사책과 역사가를 꼽으라면 역시나 고려 시대에 지어진 삼국사기와 이를 편찬한 김부식이 있다. 한국사에서 현존하는 자료를 기준으로 했을 때 삼국사기와 김부식이 실질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역사책과 역사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존재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사기보다 앞선 시대에 역사서로서 존재했었다고 알려진 책들은 있다.유기는 고구려 초기에 100권으로 편찬되었다가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에 의하여 신집 5권으로 개수되었다. 유기는 그 명칭으로 보아 전승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이름일 수도 있다. 종래 구전되어오던 고구려 초기의 여러 가지 종류의 신화·전설이나 왕족 계보 등을 모아 편찬되었고 대체로 4세기 후반의 소수림왕 때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사가 미천왕 때까지는 설화적인 것이 많은 데 비하여 그 뒤 고국원왕·소수림왕 때부터는 이러한 성격의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역사서술에 있어 어떤 단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기는 고구려사회의 발전과 더불어서 역사인식이 높아지면서 개선할 필요성에 의해 신집이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단기고사는 발해의 시조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무왕 1)에 썼다고 전해진다. 서문,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대에 여러 역사가들이 번역을 하였으나 최초의 단기고사 원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최초의 것과 동일한지는 의심스럽다.이외에도 신라시대의 화랑세기나, 백제의 서기 등의 역사를 서술한 책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일부는 이들의 필사본들이 대를 거치며 존재한다고 하지만 원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역사적 사료로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사료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삼국사기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서 대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서의 삼국사기는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8인의 참고(參考)와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 삼한고기와 김대문의 고승전, 화랑세기 그리고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했다고 한다. 이 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당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부식 가문과 윤관집안의 대립, 김부식과 이자겸의 충돌 등 문벌가문 간의 격심한 갈등이 겹쳐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비리가 쌓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열과 갈등이 국가멸망의 원인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후세에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역사 편찬은 불가피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 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 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채호 이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유교 중심의 사대적인 개악서는 아니었다. 12세기의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당시의 중국 중심의 풍조 속에서도 우리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학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서술 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정부 주도하의 관찬이라는 역사 편찬의 본을 정착시켜 조선 초의 역사 서술, 특히 고려사 편찬에 기여함으로써 전통 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인문/어학| 2015.04.10| 2페이지| 1,000원| 조회(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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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지도 최종본
    고대 한일 관계사의 민감한 화두 칠지도목 차 1. 칠지도의 발견 2. 칠지도의 모델 3. 일본의 주장 4. 한국의 주장 5. 우리조의 결론 6. 결론에 따른 백제상황과 대외 정세길이 약 74cm 날 양쪽으로 가지 금으로 상감한 명문 총 61 자 칠지도칠지도 ,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 육차모 ’ 라는 명칭으로 전해내려옴 신궁의 궁사에 의해서 명문이 발견됨 ‘ 칠지도 ’ 로서 학계에 알려짐앞면 泰 ( 和 ) 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 出 ) 辟百兵宣供供候王 □□□□ 作祥 뒷면 先世以來 未 有此刀 百濟王世 ( 子 )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칠지도의 명문칠지도의 모델 원가도 중평도원가도와 중평도 元嘉 三年 五月 丙午日 造 比管刀 長四尺二宜侯王大吉祥 中平 □ 年 午月 丙午 造 作支刀 白練淸剛上應星宿下辟不祥이소노가미신궁 본당 뒤쪽에 칠지도가 안장되어있다 .안내문에 신공황후가 백제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일본의 국보가 된 백제의 칠지도 ? 임나일본부설 의 물증 !! 4c 중엽 ~6c 중엽까지 왜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 한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 !일본서기 에 등장하는 칠지도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 년조 기사 백제왕이 칠지도 한구 , 칠자경 한면 , 갖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 그 후 해마다 조공하였다 . -‘ 하늘의 은혜를 내리시어 바다 서쪽을 떼어 우리에게 주셨다 (49 년 조 기사 )일본서기 에 등장하는 칠지도 신공황후기 49 년조 기사 신공황후 가 군사를 보내 임나 7 국 을 평정하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녘 오랑캐 탐미다례 를 잡아 백제 에게 주었으며 그 왕 초고와 왕자 귀수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 비리 . 벽중 . 포미지 . 반고의 네 읍이 저절로 항복하였다 . 그리하여 백제왕이 앞으로는 언제나 봄 . 가을로 조공하겠다고 맹세했다 . 칠지도 역사스페셜일본의 주장은 ? 제작연대 태 ( 泰 ) □ 四 年 ? 태초 ( 泰初 ) - 서진 ( 西晋 ) 태시 ( 泰始 ) 4 년 (268) 태화 ( 泰和 ) - 동진 태화 ( 太和 ) 4 년 (369 년 ) - 임나일본부 인정 중국 남송 태시 ( 泰始 ) 4 년 (468) 설일본의 주장은 ? - 제작이유 논란의 문구 ! 백제왕세자기생성음 ( 百濟王世子奇生聖音 ) 1. 백제헌상설 - 백제왕세자가 목숨을 왜왕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 음音을 진晋으로 판독 , 백제 왕세자가 목숨을 성스러운 진나라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일본의 주장은 ? - 제작이유 백제왕세자기생성음 ( 百濟王世子奇生聖音 ) 2. 동진 하사설 3. 그외 - 기생 ( 奇生 ) : 근초고왕 때의 왕세자인 귀수 ( 貴須 ) 를 가리킴 , 성음은 존칭 - 성음 ( 聖音 ) 은 왕자의 경칭인 ‘세시무’ 로 훈독그 한사군이 사라지면서 백제와 고구려는 그 국경을 맞대고 치열한 전쟁을 시작합니다 . 백제가 고달픈 삶을 맞이하게 된 시기에 근초고왕이 군사를 일으켜 북진을 하게 됩니다 .근초고왕은 북으로 한성에서 치양 , 평양까지 진출했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투에서 죽이는 전과를 올립니다 .근초고왕은 남으로는 남해일대와 가야까지 백제의 세력권 안에 두는 성과를 올립니다 .근초고왕은 고대 철 생산지인 북쪽의 곡산과 서산까지 진출하고 남부로는 철기 문화가 발달해있던 가야를 몰아붙이고 곡성을 차지합니다 .이 사진에서 범하고 있는 오류는 무엇일까 ?한국 - “ 태화 ” 372 - 일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함 , 이병도 408 – 손영종 → 홍성화 480 - 이진희 , 후에 미야자키 설에 동조 5 세기 무렵 – 김석형 504 - 연민수한국의 해석 백제왕세자기생성음 ‘ 성음 ’을 성스러운 덕 , 성스러운 계시 백제 왕세자를 훌륭한 사람으로 표현백제 하사설 백제 왕세자가 왜왕보다 높은 위치 백제 증여설 백제 왕세자와 왜왕은 동등한 위치 기타 성음을 석가세존의 은택 ( 불교 ) 신선의 가르침 ( 도교 ) 으로 보고 백제 왕세자의 신앙생활을 뜻함해석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 1 . 일본의 고대 문헌 사료 조작 ! 2 . 백제와 가야의 사료 부족 !임나일본부설은 거짓이다 ! 1 . 금 또는 은 상감 명문이 있는 쇠칼이 유 행했던 건 , 후한 말기 까지 (~ 2 세기 ) 5 호 16 국 시대 말기에 다시 시작 ( 5 세기 ~) 즉 369 년 (4 세기 ) 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임나일본부설은 거짓이다 ! 2. 칠지도와 함께 보내진 칠자경은 무령왕릉 ( 525) 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형태 즉 칠지도는 525 년 무렵 또는 그보다 앞서는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것 . 3 . 성음은 불교용어 .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는 침류왕 384 년 이므로 시기상 맞지 않음 .임나일본부설은 거짓이다 ! 4.4 세기는 백제의 융성 시기로 왜에 백제 가 복속할 이유가 없음 . 전통적으로 고대 동양에서는 종주국이 속 국에게 치하할 일이 있으면 칼이나 거울 같은 물품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치하하던 것이 관례였음 .임나일본부설은 거짓이다 ! 5. 칠지도에 적힌 명문의 내용이 백제 왕 세자가 왜왕에게 조공하는 표현이 아니 라 하사 하는 표현을 쓰고 있음 . 즉 임나일본부설은 거짓 이다 !!!1981 년 일본 NHK 가 촬영한 X 레이 ! 1996 년 다른 일본학자 무라야마 ( 村山正雄 ) 가 펴낸 칠지명도록 에는 77~78 년 찍은 확대사진 ! 홍성화씨는 새로운 판독결과 ‘ 11 월 16 일 병오’가 확연하므로 이에 합당한 ‘일간지 ( 日干支 )’ 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 그 결과 4~6 세기 사이 11 월 16 일이 병오 ( 丙午 ) 인 날 가운데 408 년 , 즉 백제 전지왕 4 년 때를 주목했다 .새롭게 고쳐야 할 부분 칠지도 연대 5~6 세기 신공황후기 기사는 대부분 믿을 수 없음 근초고왕 때의 일이라고도 볼 수 없음 백제가 왜국에 칠지도를 보낸 경위를 5~6 세기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함 인정해야 할 부분 근초고왕 때 백제와 왜의 교류가 시작결론 칠지도 5~6 세기의 어느 백제 왕세자 ( 아마도 전지왕 때 ) 가 대등한 입장 또는 우월한 입장에서 왜 왕에게 칼을 만들어준 사례백제 전지왕 (405~420) 백제의 18 대 왕 아신왕 의 맏아들 - 고구려 광개토왕의 전투에서 패 -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위해 일본과 동맹강화 : 태자 전지를 일본에 볼모로 보냄 - 분쟁 속에서 왕이 되어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 시작전지왕의 대내외정책 정통성을 위한 노력 인사개편 : 진씨 세력 ↓ , 해씨 세력↑ 상좌평 설치 (- 삼국사기에 관직명 처음등장 ) 동진과의 긴밀한 외교 ! - 동진에 노예를 바침 양서 416 년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백제왕이란 칭호받음 삼국사기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 - 첫부인이 왜 왕실의 공주 야명주를 보내온 일본특사 대접 삼국사기 비단 열필 사은품으로 보냄초기 백제의 정치 3c 고이왕 5 부체제 6 좌평제도 16 관등제 도입 : 기존의 부족적체계 →왕권의 강화한 모습 5c 전지왕 6 좌평 중 내신좌평 → 상좌평 으로 변함 : 정변으로 동요한 왕권 강화 : 왕족간의 분열 수습초기 백제의 경제 : 전지왕 옹립에 큰 기여를 한 해충에게 한성의 국가창고에 보관된 조세수납미 중 1000 석을 해마다 지급하였다 . → 특정지역의 수납미를 지급한 것 → 후대 녹봉제의 연원초기 백제의 경제 역 ( 役 ) 제도 기록 ‘ 전지왕 13 년에 15 세 이상의 정남을 부단위로 징발하였다 ’ →신라와 고구려의 정남은 15 세 이상 60 세 이하였지만 백제의 정남은 제한연령이 x전반적인 정세 금관가야 쇠퇴 백제수도 함락 백제의 천도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동 백제와 왜의 교 류 활성화신라의 정세 – 실성왕 (402~417) 신라 제 18 대 왕 . 405 년 명활산성에 침입 한 왜병을 물리침 408 년 정벌을 계획하였 다가 서불한 미사품의 건의로 중지고구려의 정세 – 광개토대왕 (391~412) 400 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 으로 5 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 405∼406 년 후연 ( 後燕 ) 의 모용희의 침입 요동성 ( 遼 東城 ) 과 목저성 ( 木底城 ) 에 서 격퇴 407 년 고운 ( 高雲 ) 과는 수교전지왕 때 중국은 ? -5 호 16 국 시대 (304~439) 삼국을 통일한 서진 ( 西晉 ) 이 멸망한 후 , 5 개의 비한족을 비롯한 16 개의 국가가 회수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 - 동진 ( 東晉 ) (317~420) 중국의 서진 왕조가 유연의 전조에게 멸망한 후 사마예에 의해 강남에 세워진 진의 망명왕조 .삼국과 중국의 관계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과 활발한 전쟁과 교류 * 송서 고려전 서기 413 년 장수왕에게 ‘ 고구려왕 낙랑 공 ’ 이라는 지위를 주어 고구려의 낙랑 지배를 인정 : 풀리지 않았던 영유권 문제를 해결 , 화해 ( 동진은 유목민 견제 , 고구려는 백제 견제 위해 ) 신라 신라는 6c 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과 교류했다 .{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2.10.23| 45페이지| 1,000원| 조회(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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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원고구려비3
    중원 고구려비 선돌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소개 중원 고구려비 해석 중원 지역이 중요한 이유 중원고구려비와 관련된 인물 제작 시기 조왕에 대한 논란 6.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의 영향력소개 - 축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 국보 205 호 - 높이 203cm - 폭 37~55cm - 4 면비발견 당시의 중원교구려비1979 년 발견당시 2000 년 새로 탁본충주 지역의 중요성 - 교통의 요지 - 철 생산의 중심지- 교통의 요지- 교통의 요지- 철 생산의 중심지중원 고구려비와 관련된 인물들 - 장수왕 - 조다 - 문자명왕장 수 왕 생사 : 394 년 ~491 년 재위기간 : 413 년 ~ 491 년 평양천도 : 427 년 백제의 수도 한성 함락 : 475 년 신라 7 성 함락 : 481 년조다 ( ? ~ ? ) 장수왕의 아들로서 문자명왕의 아버지 문자명왕 ( ? ~ 519 ) 497 년 신라의 우산성 점령 512 년 백제의 가불성 , 원상성 점령 나제 군사동맹에 대항조왕 ( 祖王 ) 에 대한 두가지 학설 . 1. 조왕은 실제 할아버지왕 ( 祖父王 ) 이다 . 2. 조왕은 선조왕 ( 先祖王 ) 이다 .1. 조왕이 실제 할아버지왕 이라는 학설2. 조왕이 조상왕 이라는 학설 광개토 대왕때 이미 군신관계가 성립됬다조왕이 장수왕이라면 ??? - 제작시기는 문자명왕때다 !! - 충주지역의 순수를 통해 타 국가에게 충주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임을 강조 - 나제 동맹을 약화시키려함조왕이 장수왕이라면 ??? - 문자명왕의 아버지인 조다 강조 - 문자명왕의 왕위 승계 정통성 확보 - 정통성 확보로 귀족의 불만 억제장수왕 시기의 국제 정세 436 년 북연의 왕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 466 년 북위의 청혼을 장수왕이 거절 북위와의 관계가 악화될뻔 했으나 !!!!!!!!!!!!!!! 백제와 신라와의 대립상황을 고려하여 관계 유지장수왕 시기의 국제 정세 - 백제 개로왕이 왕족중심체제의 권력체계 형성 469 년 고구려의 남쪽 공격 472 년에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원조 요청-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의 계략에 빠져 백제의 강성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대규모 공사를 시작 백제 내부에서 국력의 약화 발생 장수왕 시기의 국제 정세장수왕 시기의 국제 정세 - 신라 자비 마립간이 경주를 중심으로 방리명을 확정 왕경이 행정적 성격을 띄게됨 왕권의 강화문자명왕 시기의 국제정세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 북위로부터 ‘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낭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 지위를 받음 남조의 국가인 ‘제’ 로부터 ‘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 ’을 ‘양’ 으로부터 ‘ 무동대장군개부의동삼사 ‘의 지위를 인정문자명왕 시기의 국제정세 - 백제 24 대인 동성왕에 이르러서 체제를 재정비하기 시작 기존의 귀족인 남래귀족을 대체할 신진귀족을 정치적으로 등장시킴 신라와의 혼인 동맹 남제에 사신을 보내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 그러나 501 년 동성왕은 백가에게 피살당함대전 에서의 고구려 유적포항에서의 고구려 유적유물을 반영한 고구려의 최대영토{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2.10.23| 30페이지| 1,000원| 조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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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블랙홀, 동수묘지3
    역사의 블랙홀 , 동수묘지 안악 3 호분 , 그 주인공은 누구인가 ? 안악 3 호분 안악 3 호분 내의 묵서명과 그에대한 설명 동수는 누구인가 ? 동수의 정체는 무엇인가 ? 동수묘설 왕릉설 - 북한의 주장 미천왕릉설 고국원왕릉설 정리안악 3 호분은 높이가 6 미터에 달하고 , 길이가 무려 33 미터에 이르러 고구려의 고분벽화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다 . 벽화의 내용도 그 중 가장 다양하고 풍부해 발굴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 고구려에는 이렇게 벽화가 그려진 무덤이 모두 100 여기 정도가 있다 . 그런데 그 중에 평양 부근의 덕흥리 고분을 제외하고는 주인을 아는 무덤은 하나도 없다 . 무덤의 주인을 알만한 묘지명이나 그 외에 주인을 유추할 어떤 단서도 무덤 안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 고분벽화 무덤의 주인에 대한 연구는 아예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그런데 , 유독 이 안악 3 호분만은 발굴 이후 우리나라 학자뿐 아니라 북한 , 일본 , 중국의 학자들까지 무덤의 주인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안악 3 호분의 발굴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49 년 6 월 이다 . 무덤의 주인공을 비롯하여 천정과 벽면 빼곡히 그려진 벽화이 그려져 있다 . 부분적으로 훼손이 되긴 했지만 1600 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비교적 선명히 남아있는 벽화들은 1600 년전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벽화들은 아궁이를 갖춘 전통적인 고구려식 부엌에서 시루를 얹고 음식을 만드는 여인의 모습 , 부엌 옆에는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고 외양간 , 우물 등 집 구조를 비롯해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풍부한 그림들은 기록이 부족한 고구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이 점에서 안악 3 호분의 발견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도 한다 .묵서명이란 ? 발굴 당시 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 다른 고분벽화에선 잘 보이지 않는 글이 무덤의 한 쪽 벽면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글을 묵서명이라고 하는데 , 묵서명 은 옛 무덤 내부에 년 이전에는 상 , 이후에는 내사라 불렀는데 , 낙랑내사가 아닌 낙랑상이라 표기한 점도 의문스럽다 . 묵서명학자들은 336 년 요동의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와 같은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 동수는 전연의 왕 모용황 밑에서 사마로 있던 인물이다 . 모용황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불만을 품은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러 나갔다가 패하고 오히려 모용인의 부하가 되는데 , 다시 군대를 일으켜 모용황이 모용인 세력을 무너뜨린다 . 이에 동수는 곽충 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게 된다 . 위의 지도는 전연에서 내란이 일어난 시기인 336 년의 정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도는 앞서 본 것보다 20 년 정도 앞선 시기의 정세이다 .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과 대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 미천왕이 활발한 대외 정책을 펼치며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313 년과 314 년 연달아 낙랑과 대방 지역을 점령했다 . 기록상으로는 이때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마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하지만 , 실질적으로는 언제 고구려와 백제가 접경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다 . 낙랑 , 대방 세력이 이 지역을 완전히 떠난 시점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 그런데 , 바로 이시기에 속하는 거대한 무덤인 안악 3 호분이 바로 이 지역 , 옛 낙랑 , 대방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때문에 안악 3 호분의 주인을 밝히는 일은 이 시기의 역사를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동수 = 무덤의 주인이다 ? 묘지명은 주인공의 주변에 있지 않다고 해서 묘지명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 또한 , 벽화에 나타나는 인물들 옆에는 붉은 글씨로 관직명이 적혀있는데 , 문지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장하독 , 주인공의 왼편부터는 소사 , 기실 , 성사 , 문하배 라고 적혀있다 . 묵서명의 내용 중에 동수가 태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 당시의 관직 랭킹을 따져보면 태수가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 따라서 이 묵서명은 주인공의 것이고 접 지배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 그렇다면 ,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 고구려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덕흥리 고분이 그 단서를 제공한다 . 안악 3 호분보다 50 년 정도 늦게 지어진 이 고분에서도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 하지만 그 묵서명은 주인공의 머리위에 반듯하게 쓰여 있고 , 중국의 연호대신 영락 18 년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나타난다 . 그리고 , 안악 3 호분이 중국관직명을 쓴 반면 , 이 곳에서는 ‘소대형’이라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명도 나타납니다 . 50 년 동안 나타난 이 상당한 변화는 50 년간 낙랑 , 대방 지역을 어떻게 다스렸느냐 하는 지배방식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 즉 , 고구려가 동수라는 인물을 내세워 통치한 것에서 , 점차 직접 지배로 전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동수묘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내용이다 .왕릉설 하지만 , 왕릉설을 내세우는 입장에서는 그것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 미천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 전축분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다 . 우선 전축분은 한족고유의 무덤양식인 반면 안악 3 호분의 무덤은 양식이 다르다 . 즉 , 다른 류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 선비족 출신인 동수가 기존의 한족을 다스렸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지게 된다 . 왕릉설을 뒷받침 하는 더 많은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 먼저 묵서명의 끝 구절을 보면 , 육십구세훙관이라고 적혀있다 . 일반적으로 관리를 지내다 육십구세에 죽었다고 해석한다 . 하지만 이는 한문 어법상 맞지 않다 . 훙 까지만 써서 표현하는게 보편적인데 굳이 관 자 까지 썼다는 것은 장하독을 꾸민 것으로 볼 수 있다 . 즉 , 관리를 지내다 육십구세에 죽은 관리 장하독 이라는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 또한 묵서명은 가장 반듯한 공간에 격식을 갖추어서 쓰는 것이 상식인데 , 주인공 가까이에 이렇게 빈 공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문 앞에 장하독의 머리 위에 쓰여있다 . 자세히 보면 키듯 화려하고 장엄하다 . 또 , 높이 2 미터 길이 10 미터에 달하는 대행렬도도 지방관을 위한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 행렬도에 참가한 인원을 전부 고려하면 5 백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 전반부에 고취악대에 동원된 인원은 250 명 정도입니다 . 김유신의 장례식에 동원된 고취악대 인원이 100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규모이다 . 이런 점에서 , 북한학자들은 2 백명 이상의 고취악대를 거느리고 행진을 할 수 있는 인물은 고구려의 왕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 수레를 타고 가는 주인공의 앞에서 한 인물이 들고 가는 깃발에 새겨진 세 글자 . 성상번 . 성왕이나 성상은 왕 , 그 중에서도 위대한 왕을 나타내는 말이다 . 호태성왕 , 광개토대왕 같은 분에게나 붙는 칭호이지 , 태수나 지방관에게는 붙일수가 없는 말이다 . 이에 대해 고취악대 크기를 김유신의 것과 비교해서 근거를 내세울 수 있는지로 반박할 수 있다 .안악 3 호분 내의 대행렬도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 왕인가 ? 고구려의 허리띠 중국의 허리띠 주인공의 차림새를 통해서도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옷고름으로 처리를 하거나 깃과 소매 부분을 화려한 장식단추로 장식한 복식형태는 벽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중국의 양진남북조 시대나 이전시대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복식 형태라고 한다 . 허리띠를 묶는 방법에서도 , 중국과 차이가 나는데 , 주인공의 경우 폭이 좁은 허리띠를 약간 오른편으로 묶어 내린 반면 중국의 복식은 어느 시대 ,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아주 넓은 허리띠를 중앙에서 묶어 내렸다고 한다 . 이런 특색들은 같은 시대의 중국의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고구려 고유의 복식이다 .동수 = 무덤의 수호자다 ? 주인공이 왕임을 결정짓는 요소는 주인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흰색의 덧관이다 . 이것은 수서 고구려전에 등장하는 고구려 왕만이 썼다는 백라관으로 , 이마 부분에 금테가 둘러져 있고 , 그 위에 흰색의 곱고 섬세하게 짜여진 라로 만든 덧관이다 . 관의 끈은 턱밑에서 묶어져서 가슴부분 까지. 또한 ,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을 미천왕릉을 파서 가져간다 . 이런 수모를 당한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화해를 모색하여 , 이듬해인 343 년 2 월 , 동생을 전연에 보내 진기한 물건을 바친 뒤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찾아온다 . 그리고 그 해 7 월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 동황성으로 옮긴다 . 즉 , 342 년 전연이 가져갔던 왕의 시신을 이듬해 2 월 돌려받았고 7 월에 평양으로 천도를 해서 , 새로운 수도 평양과 가까운 안악지방에 미천왕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미천왕인가 고국원왕인가 미천왕 (300-331) 동수묘지명 357 고국원왕 (331-371) 그런데 , 무덤의 주인공이 미천왕이라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 동수는 분명히 미천왕이 죽고 난 뒤에 망명을 했는데 , 왜 미천왕릉 입구에 서 있는 것일까 . 이에 대해 , 동수가 망명을 온 2 년뒤 전연으로부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게 되는데 , 이 과정에서 동수가 많은 공을 세웠다는 설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많다 . 하지만 , 미천왕의 시신을 찾아온 것은 343 년 , 동수가 죽은 것은 357 년이다 . 신하인 동수를 그리기 위해 왕의 무덤을 다시 연다는 것은 아주 미심쩍은 부분이다 .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공으로 또 다른 후보 고국원왕이 있다 .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을 온 것도 고국원왕 때 이고 , 세상을 떠날때도 고국원왕 재위중 이었다 . 즉 , 동수는 고국원왕의 재위 기간 중 22 년 동안 고구려에 살았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국원왕인가 ? 고국원왕릉설은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 일대에서 고구려 제 2 의 수도였던 남평양 유적지를 발견했다는 발표와 함께 빛을 보게 된다 . 북한학자들은 이 남평양을 고구려가 남방정책의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라고 주장한다 . 장수산성 근방에 이미 4 세기에 남평양이란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겨루고 있었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준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국원왕ow}
    인문/어학| 2012.10.23| 24페이지| 1,000원| 조회(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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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2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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