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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트, 룰러, 몰트만의 선교신학
    Ⅰ. 서론선교와 신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신학은 선교를 방해하며,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가? 마찬가지로 선교는 신학적 진리추구를 교회의 현실적인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선교를 문제 삼지 말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선교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신학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주의 도구나 종으로서 교회를 위하여 협력하여 공동의 선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생각해본다.신학과 교회, 특별히 선교와 신학이 상당히 양극화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선교이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교와 신학은 각자 자기 정체성의 확보와 동시에 자신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지 이 같은 선교와 신학의 평화로운 양립 가능성의 문제에 대해 선교신학의 입장에서 마땅히 어느 정도는 해명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를 선교하는 종교로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가 소위 말하는 ‘선교의 위기’에 직면해서 감당해야 할 시대적 연구과제인 것이다.때문에 선교와 신학의 관계규정을 통하여 교회현장과 새로운 신학적 논의 혹은 소개 사이의 괴리감을 다소 해소해보고자 하는 데 의도가 있다. 특별히 우리는 그 단서를 바르트, 룰러, 몰트만 이 들에게서 찾으려고 한다.선교사의 열정과 신학이 교회의 두 독립된 사역이며, 각각은 그 자체의 타당성을 가짐으로써 신학이 선교와 분명 구별되지만, 신학이 선교사역을 배격하거나 선교사역이 신학을 냉대하지 않고 선교와 신학은 모두 교회를 위한 순종의 다른 시도들이라고 보는 이들의 원고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의 상황에서 신학과 교회의 틈을 통전적으로 메울 수 있는 선교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고, 선교와 신학의 관계규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Ⅱ. 본론1) 바르트의 선교신학바르트에 있어서 신학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신학 역시 선교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표현,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그의 뜻을 행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러나 여기서 신학을 “교회의 사역”이라고 할 때, 선교와는 다 같이 교회의 사역임에 틀림없지만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은 “신학 자체는 복음의 전파가 아니며 오히려 신학은 이러한 복음전파에 대한 숙고, 복음전파의 올바름에 대한 숙고”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교회의 선교적 선포와도 구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가 복음의 전파에 국한된다면 신학은 그러한 작업에 대한 옳고 그르냐에 대한 숙고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의 과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복음 선포가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은 이 양자, 해야 함과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고, 바로 그로 인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때로 신학의 과제는 교회 내의 이단에 직면해서 참된 교리를 주장하기도 하고, “보편적 진리”의 원천들을 묻기도 한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복음전파를 위해 교회에 필요한 사항들을 제기하는 하나의 “교정하는 체계‘이다.그렇다고 해서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의 선포로부터 독립된 사치스러운 하나님의 지적 관조나 영지주의적 계시가 아니다. 또한 신학은 그 자체의 선포, 무언가 철학적 혹은 역사적으로 설명된 선포, 교육받은 사람들을 위한 선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학은 지식인들의 지적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의 선교적 행위의 올바름을 가르는 그 척도는 인간적 척도가 아니라, 교회를 기초로하는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척도라는 것이 바르트의 견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그 자신이 올바름에 대한 가치척도를 창조할 수 없다. 가장 훌륭한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궤적을 단지 조력하는 것이듯이 신학은 교회의 올바름과 실천에 대해 조력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러면 이 같은 신학의 이해는 선교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가? 여기서 바르트 관계설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학과 선교는 교회를 위한 순종의 시도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르트는 설교자 혹은 목회자가 신학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교와 신학이 교회를 위한 순종의 두 시도라는 것은 결국 그것들의 인간적인 동기, 방법, 목표설정에 대한 인간적인 행위들을 넘어서는 믿음의 두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도록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나, 그러한 복음전파에 대한 올바름을 수고하는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 은총, 권능 아래서 수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행위를 고백하는 장소로서 교회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입각한 인간적 행위가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러한 믿음의 두 행위로서 선교와 신학을 성취하게 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같은 전제에서만이 선교와 신학은 수행될 수 있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이 전제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선교와 신학은 불투명한 사업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투명한 인간적 행위로서 선교와 신학은 믿음의 두 행위로 전환되어야 한다.이제 선교와 신학의 각자 한계들을 규정하는 그 특수성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이 특수성은 신학과 선교의 차이점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예컨대 선교와 신학이 틈이 있다는 식으로, “선교는 기독교적 사랑을, 신학은 기독교적 신앙을 대변하는 것으로, 혹은 선교는 가치를 신학은 말씀을, 혹은 선교는 삶을 신학은 사유를, 혹은 선교는 서두름을 신학은 기다림을, 혹은 선교는 교회의 최전선을 신학은 군량과 탄약을 원활히 공급하는 후방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느 것이 우월한지 논쟁을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먼저 앞서지 않는다. 오히려 선교와 신학의 실제적 차이는 “섬김의 차이”라는 것이다. 선교와 신학은 그 섬김방식이 완전히 다른 두 수준에서 진행되므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치평가적으로 서로를 비교할 수 없고, 따라서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만 서로 도울 수 있는지, 도울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도울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선교를 위한 선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학이 그 자신의 법칙과 자신의 방법에 충실함으로써, 신학은 선교를 비로소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선교와 신학의 관계를 야곱과 야웨의 천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신학은 야웨의 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신학의 기능 그리고 선교에 대한 신학의 기능은, 그 천사가 야곱에게 행한 그 선상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통해 신학과 선교는 교회를 위한 순종 혹은 섬김의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동반자라는 점에서 그 명확한 관계가 설정된다.2) 룰러의 선교신학아놀드 판 룰러는 구약성경이 신약성경보다 신학적으로 우월하다고 본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동일한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본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게 계시라는 범주에 들어가며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의 계시의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유형론적 이스라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수렴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한 구원의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신정국가의 설립에 있는 것이므로 기독교국가란 단지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곧 이스라엘의 원형이다. 구약 없이 신약은 이해될 수 없기에 복음해석의 전거로서 구약은 복음전파에 사용될 수 있다.요약컨대, ‘신구약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있고, 구약은 신약과 비교하여 남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이고, 창조론은 구원론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3) 몰트만의 선교신학몰트만은 1926년 4월 8일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영국의 전쟁포로가 되어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포로생활로부터 석방된 후1948년 서독으로 돌아와 괴팅겐대학교에서 신학을 계속하여 공부하였다 전쟁 포로생활 시대였기 때문에 몰트만 신학의 결정적 계기는 인간과 그 세계의 고난의 문제였으며 이 고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를 질문하는 신정론(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한 이론)의 문제였다.1971년에는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으로 인하여 이태리 정부의 국빈으로서 최고의 문화상을 수여 받았다. 희망의 신학은 1964년에 출간되었다. 앞에서 거론한 구약성서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에 있었다면, 불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과 신앙 안에서 실천된 “역사의 종말”의 현재적 종말론에 의해 규정되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이를 다음과 같은 그의 도발적인 테제로써 문제 삼았다.“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어머니이다.”그가 말한 “묵시문학”은 물론 세계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사변이 아니라, 언제 하나님이 그의 나라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될 것이며, 언제 그의 정의가 세계 안에서 승리할 것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역사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미 현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몰트만의 신학사상은 괴팅엔 대학에서 발터 침벨리와 에른스트 케제만에게서 배운 내용을 통하여 이미 이런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홀랜드의 신학자 아놀드 반 룰러를 통하여 볼트만은 “사도직의 신학”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종말을 바라봄으로써 메시야적인 동기를 갖는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책 속에서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적 실천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루었다.그 후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1960년에 일어났다. 그는 스위스에서 휴가를 갖는 동안에 “희망의 원리”를 동독 판으로 읽었고,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스위스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 즉시 받았던 그의 인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원시 그리스도교의는가?
    사회과학| 2012.11.19| 7페이지| 3,0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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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관계론 레포트
    Ⅰ. 서론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즐겨보는 영화나 드라마 또는 즐겨듣는 음악의 이야깃거리는 대부분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 간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이란 남녀의사랑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 이웃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우정) 모두를 뜻한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사랑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행복의 원천이다. 이러한 사랑이 인생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행복은 인간관계의 관리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는 것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를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라고 대답한다. 본론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다양한 이유들과 인생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에 이르기 위한 행동원칙들 그리고 사랑의 실천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Ⅱ. 본론1.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부자비결 1순위, 성공비결의 85%는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할 만큼 우리의 삶에서 인간관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갈등 중 가장 빈번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것 역시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인간관계의 문제는 의식 차원보다는 무의식 차원에서 발생하고 발전한다. 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은 무의식적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러한 무의식적 특성상 성격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편적인 인간관계 상황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왜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는지 그 기본적인 이유를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자.1-1. 개인차의 법칙(심리학의 제1법칙)인간은 각기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성장하고 서로 다른 욕구를 추구장, 욕구, 능력, 지능, 기호, 사고방식, 소질, 흥미, 경험, 교육, 감정, 종교, 적성, 성격 등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1-2. 가치관의 차이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마다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이나 삶의 의미가 모두 다르다. 어떤 부부는 장을 볼 때마다 다툰다. 아내는 조금 덜 먹더라도 옷은 반듯하게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남편은 옷은 대충 입더라도 먹는 것만큼은 좋은 것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부부는 중요시 하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돈에만 가치를 둔다던지 권력에만 가치를 둔다던지 지나치게 하나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관점을 식별한 경우에도 그냥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 배울 만한 점도 발견할 수 있다고 시인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려는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1-3. 개인은 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부족그림‘점’만 보는 사람은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전체적 존재의 한 부분임을 모르고 자신을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중심적 존재로 생각한다.1-4. 자기 자신과 자신의 약점에 대한 무지우리는 평생 자기 모습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행동을 본인은 모르나 낯선 사람은 단번에 알아챈다. 사장은 부장들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해대곤 했다고 한다. “당신은 부하 직원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밖에 할 일이 없소? 당신의 그 잔소리 때문에 부하직원들이 일할 의욕이 떨어지잖소.” 이 이야기를 듣고 사장이 부장들에게 한 행동이 부장들이 부하 직원에게 한 것과 뭐가 다른지 의아해 질 것이다. 사장의 눈에는 부장들이 하는 행동만 보였지 정작 자신이 그들에게 하고 있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던 이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면서 기를 꺾어놓는 사람 역시 자기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다.1-5. 많은 시간과 노력 필요인간관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개선하고자하나 곧 어려움에 닥치게 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어려운 과제이다.1-6. 좁은 '우리' 의식한국사회에서는 지연, 혈연, 학연 등의 폐쇄된 '우리'의식이 너무 강한 면이 있다. 이러한 '우리' 의식의 폐쇄성 때문에 특히 집단 간의 인간관계가 나빠진다. '우리' 집단만을 고집하게 되면 타 집단 간에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폐쇄된 '우리'의식에서 좀 더 확대된 '우리'의식으로 전환해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2. 행복에 이르기 위한 행동의 원칙지난 200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수강한 과목은 탈 벤-샤하르 교수의 ‘행복학’이었다. 수강생의 23%는 “강의 덕분에 삶이 변화했다”고 평가했고 이러한 행복학은 사회 전반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 대학에도 '행복학 강의'가 필요하냐는 물음에 100%가 그렇다고 응했다. 흔히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몇 가지 상황 정도는 쉽게 열거한다. 그러나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면 보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그 행동 원칙들을 알아보도록 하자.2-1.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라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는 게 더 재밌어지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대학을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얻으면, 일에서 탁월한 실적을 올리면, 좋은 직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좋은 집을 사고 아이를 낳으면과 같은 뭔가를 이뤄내고 성공해야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가 넋두리하듯 꾸며대는 이야기는 ‘삶은 이래야만 한다’라는 완전히 자의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 행복학자들은 흔하지만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일상에 감사하라’고 조언한다. 또 “사람들은 행복을”고 말한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작고 사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느낄 때 매일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2-2. 자신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라지금 이 순간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당신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 자신이다. 그런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비결 중 하나는 자신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최고의 친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내고, 그런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고 지지해 준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인정하며 자신과 솔직하게 대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어떤 상황에서나 자신에게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따질 줄 알아야 한다.2-3. 걱정을 버려라이쯤에서 당신의 삶을 돌이켜보자. 5년 전에 당신은 지금 걱정하는 일로 똑같이 걱정하지는 않았는가? 요즘엔 어떤가? 여전히 똑같은 문제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걱정해서 상황이 달라졌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걱정은 삶을 조금도 편하게 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쓸데없이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누구도 걱정을 잊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걱정이 부정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며 스트레스를 주고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걱정거리를 면밀히 조사해서 정말로 걱정할 거리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진실이 아닌 문제로 걱정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 문제로 계속 걱정한다는 게 어리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2-4. 원하는 일을 하라당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욕망을 억누르고 있다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삶의 행로에서 욕망을 따르려면 많은 이유에서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생존의 문제, 즉 경제 문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기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욕망을 억누르며 가지 않은 길선물은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선물을 놓쳐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행복을 찾아 다른 곳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닌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하루에 잠시라도 짬을 내어 모든 일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라. 그리고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직하게 살펴보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서 현재에 집중할 때 삶은 한결 단순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2-6. 기다림을 스스로 선택하라생활이 점점 더 빨라지면서, 기다리는 일이 갈수록 흔해졌고 또 그만큼 어려워졌다. 끊임없이 빨라야 한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기다리는 시간에도 장점이 있다.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인생의 충격을 흡수해주는 쿠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 시간은 일상생활에서 숨 쉴 공간을 마련해준다. 또 가슴을 열고 순간순간마다 인생이 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해준다. 언젠가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할 때가 되면 그 시간을 활용해보라. 기다림을 통해 현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3. 사랑의 실천 방법사랑을 알고 싶으면 직접 사랑을 해봐야 한다. 생각하고, 읽어보는 것은 정말 사랑이 필요할 때에는 쓸모없는 헛지식이 되고 만다. 그런 지식에서는 아무 대답도 얻을 수 없다.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늘 ‘참사랑은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주면서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되풀이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보통 사랑으로 고통을 입는 때는 상대에게 무엇인가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인 경우가 흔하다. 사랑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행복해진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먼저 요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못 된다. 차라리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쪽이 낫다. 사랑은 문명화된 인간에게는 다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사랑의 능력을 아낌없이 풀어내는 것이 우리가 도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수많은 사랑을 실천하보자.
    교육학| 2012.11.13| 4페이지| 2,000원| 조회(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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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켈러, 트뢸치, 브룬너의 선교신학
    - 목 차 -Ⅰ. 서론 ‥‥‥‥‥‥‥‥‥‥‥‥‥‥‥‥‥‥‥‥‥‥‥ 1Ⅱ. 본론 ‥‥‥‥‥‥‥‥‥‥‥‥‥‥‥‥‥‥‥‥‥‥‥ 21. 켈러의 선교신학 ‥‥‥‥‥‥‥‥‥‥‥‥‥‥‥‥‥‥‥‥‥‥ 22. 트뢸치의 선교신학 ‥‥‥‥‥‥‥‥‥‥‥‥‥‥‥‥‥‥‥‥‥ 33. 부룬너의 선교신학 ‥‥‥‥‥‥‥‥‥‥‥‥‥‥‥‥‥‥‥‥‥ 5Ⅲ. 결론 ‥‥‥‥‥‥‥‥‥‥‥‥‥‥‥‥‥‥‥‥‥‥‥ 6Ⅰ. 서론에딘바라 선교 대회를 거치면서 세계 교회가 하나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머리를 들었다. 1921년 I.M.C.의 등장과 1938년 마르다스 대회를 통해서 선교가 단순히 전도라는 개념을 서서히 떨어버리고 전쟁과, 기아, 세계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복음의 역할을 교회의 선교적 책임으로 절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그 후, 성례전을 중심한 교회가 종교개혁과 함께 말씀중심의 교회로 발전하고 이것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선교 중심적 교회로 변화하게 된다. 이 선교중심의 교회가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다.선교적 교회는 “신학적”이며 또 “신학적”이어야 한다. 신학은 예수안에 나타난 진리가 인류의 역사(歷史) 속에서 활동하는 인류구원의 보편적 진리로 파악되고 그 의미를 밝히는 일이 신학의 주제다. 이 진리는 모든 종족과 종교와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인간 일반이 지닌 궁극적 질문에 대한 근본적 대답을 제시하는 특성을 지녔다. 신학은 인간의 근본 문제해결을 위한 대답 작업이다. 여기서 해석학적 기능을 통해서 신학의 기능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신학의 기능이 교회의 핵심적 기능이다. 즉 모든 인류의 구원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요청에 대하여, 교회가 지닌 다양한 기능을 총동원하여, 대답하려는 노력을 지니고 있다.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공동체로서, 고정된 “틀”에 사로잡혀 변화에 대처할 줄 모르는 고착된 형식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과 물음에 역동적이요, 능동적으로 응답하며 변혁을 일으키는 운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현존의 산 움직임으로 시대적 요청에 따르는 새로운 구원의 삶을 창출해야 한다. 그런 의미독일 튜빙엔에서 신ㆍ구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신학,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그들은 오늘의 세계 상황을 현대신학의 모형을 탈바꿈할 시점으로 구분하는데 동의하고 오늘날의 급격히 변모하는 현대 사회와 교회 현실에서 신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란 문제점들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신학 모형의 구성요소로서 오늘의 세계경험을 강조하였다.그들의 신학 방법론은 신학 함에 있어서 많은 점을 시사해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새로운 신학모형을 창출하기 위한 계기로 삼는다는 것인데, 이 점은 다음의 몇 가지고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첫째, 신학은 시대와 상황성을 떠나 보편화한 교의로 정형화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신학은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체성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현실 문제들에 대해 그 관련성을 정의해야 하며, 셋째, 신학은 오늘 세계가 직면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 그 해결점과 대안을 내어놓고 이 세계가 지향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의 새로운 정의와 신학 방법론은 오늘 한국 역사와 상황 속에서 신학하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과연 오늘의 한국 신학은 우리가 처한 한국 사회와 교회 현실을 바르게 수용하고 이를 극복하는 구체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가?따라서 서구 현대 신학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대두된 신학의 주제와 방법 등을 살피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 신학사와 갖는 역사적 관련성과 방법적 통찰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한국 신학을 형성하려는 우리의 토의 작업에 폭넓은 역사적 자료와 해석의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Ⅱ. 본론1) 켈러의 선교신학켈러는 이미 두 세대 이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학사상 주요한 의미를 가진 이로 널리 알려진 것은 오히려 우리의 세대에 속한다.20세기의 신학의 조류로서 가장 뚜렷한 것들을 든다면 하나는 칼 바르트의 소위 변증법 신학이요 다른 하나는 이 켈러에서부터 내려오는 히려 후자가 전자를 넘어서는 감이 있다.복음에서는 설교의 책이라고 하여 그것에서부터 역사적 예수를 그리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켈러는 갈파하였는데 이 생각은 그 시대에는 용납할 수 없는 역사적 회의주의라고 비난을 받았으나 1919년에 발표된 마르틴 디펠리우스의 복음에서의 양식사에서 이러한 켈러의 근본 사상은 소위 양식사적 방법의 인식에 의하여 지지된다는 것이 드러났다.양식사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복음서의 보도는 어디까지나 교회의 부활절 이후의 신앙에 의하여 재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그 신앙의 표현 때문에 덮이고 쌓였다. 우리가 가진 예수는 교회의 신앙 안에 그에 대한 사도의 설교 안에 즉, 케리그마 안에 들어 있다. 이제 이 케리그마 배후에 돌아가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는 것은 희망이 없고 어이없는 기도다. 불트만의 이른바 케리그마신학이 이런 양식사적 사고방식에서 켈러를 끌어내어 방패로 삼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신화화 문제에 있어서 그를 반대하는 편도 슈니빈트를 비롯하여 대부분은 사상적으로 켈러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이나 병증법 실학의 이해에는 케르케골의 언식이 선행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오늘의 신학의 중심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켈러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요컨대 켈러는 신약의 문서 뒤로 돌아가 거기서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고 하는 역사가의 수고는 헛된 일이기도 하며 또 그런 히스토리의 예수는 성서가 우리에게 대하여 의미하는 바도 아니라고 하였다. 역사 안에서 움직이는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신 주로 설교한 바 그분이며 성서는 바로 그런 설교의 책이다.2) 트뢸치의 선교신학트뢸치는 리츨의 제자이면서도 슐라이멜마허의 포괄적인 신학체계를 그의 스승과 종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역사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모든 인간들이 선험적으로 가지는 종교의 보편성을 깊이 탐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기독교의 역사성을 주장하고 종교적 절대성의 주장을격적인 완전한 종교의 표현이다.”따라서 그는 타종교의 오류와 불확실성을 지적하며 예수의 인격의 구속적 절대성을 주장하는 그의 스승 리츨과는 달리 기능적 필요성만을 인정한다. 즉 예수의 인격은 예배의 초점과 공동체 통일의 요인을 이루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이유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신적인 구속자에 대한 신뢰에서 인간적 인격성의 진화론적 발전에 대한 신앙으로 바뀌어진다. 따라서 트뢸치는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문화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인식을 통하여 새롭게 해서 하나님과 연합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문화의 신생에 대한 신앙이다.이렇게 트뢸치는 성서와 서구 기독교 밖의 세계와 종교에 대한 인식에서 기독교의 상대성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계시의 우주적 보편성에 근거한 신학의 대화적 차원을 개방하였다.예수의 역사적 인격을 중심하여 신학을 학문으로서 정립한 슐라이엘마허, 리츨, 트뢸치의 공통적인 점은 신앙을 이성과 조화시키고 신의 초월을 내재와 결합시킨 점이다. 그리고 신학의 탐구 대상을 폭넓게 개방하여 사상의 자유를 확보한 점이다.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19세기 자연과학의 귀납적 사고와 이성주의 철학 속에서 신앙의 과학성을 입증하고 종교의 윤리적인 측면을 되살려 내었다.그러나 이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이들의 계시와 역사이해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계시에 대한 인간의 경험적 또는 이성적 인식 가능성과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또 인간 역사의 진화론적 발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 물론 이들은 미신적, 비개화주의적 종교신념들을 해소시키고 과학적 발전을 신앙 안에 용납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역사 진보의 한계와 내적 모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낙관적 인간이해와 역사관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복음 안에 있는 인간의 한계와 죄에 대한 심판의 요소를 찾지 못하고 결국 신앙을 문화의 양식과 혼합시켜 교회의 정체야 할 자리를 잃고 문화주의의 포로가 되어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3) 부룬너의 선교신학변증법적 신학의 동지로서 칼바르트와 함께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지만 바르트의 지나친 은혜 중심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한 이가 부룬너이다.그는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분노의 거부(Angry No!)"에서 자연을 은혜와 대립적 개념으로만 생각한 편협함을 비판하였다. 부룬너도 바르트와 같이 자연을 은혜와 동등하게 평면위에 대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의도는 신의 독자적 행위(allein wirksamkeit)를 완전히 보존하면서도 자연과 은혜를 바르게 정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서와 종교 개혁자들의 전통의 빛에서 로마서 1장 18절-20절과, 2장 14절-15절을 성서적 전거로 하여 자연신학을 증명하였다.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비록 죄로 인해 그 형상이 깨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룬너는 그러한 증거로 인간의 주관(主觀)과 언어능력, 그리고 책임성을 든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 여분(餘分)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은 그 자신의 우월한 인간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또한 부룬너는 복음의 지성적 요소보다 역사성과 인격성의 요소를 중시한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영원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고, 또 들어온 역사적 진리는 자기를 열어 인간과 사귐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 인식과 사귐이 하나로 결합되고 이 결합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인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이러한 인격적 사건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위로 하나님과 사귀고 아래로 인간과 사귀는 인격 공동체이다. 단순한 기관과 질서가 아니다.이와 같이 부룬너는 자연계시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의 계시획일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의 세계 책임성과 공동체의 내적 유대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사회과학| 2012.11.08| 8페이지| 2,000원| 조회(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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