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위기 상황대처의 경제 정책대처~현재까지의 영국 경제 정책 변화이후 우리나라가 나아갈 경제 정책 방향(후보의 정책)70년대 영국의 위기 상황?해가지지 않는 나라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20세기 초 영국의 산업화는 도시화를 낳고 도시에 밀집된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노동당을 결성한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용으로 하는 복지국가와 산업국유화를 정강정책으로 표방했다. 하지만 이러한 복지정책이 훗날 ‘영국병’이라고 불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소득세가 90% - 저생산성 고임금 경제구조설상가상으로 복지국가를 유지하려다 보니 소득세의 최고세율이 90%에까지 이르고, 일할 의욕은 더욱 없어졌다. 근로자들은 생산성과는 무관하게 파업을 통해서 임금을 올려 받곤 했다.?파업으로 해가지는 나라-1970년대 영국[이제 국민들이 참는 것도 한계에 와 있다]- 노동당의 캘러헌(J Callaghan) 수상은 勞組에게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勞組냐 정부냐] - 1974년 보수당의 히스(E. Heath) 수상의 실각히스(E. Heath) 내각의 출범-노동당에서 보수당의 승리?1973년 오일쇼크 - 인플레이션 발생, 실업률 상승으로 영국의 경제는 곤두박질하였으며 히스수상은 집권기간 내내시장친화적 정책과 정부개입주의 정책사이에서 1974년 탄광노조의 파업에 굴복하여 실각했다.구분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성장률3.04.32.22.33.22.34.7실업률6.51.81.83.13.96.16.9고용증가율0.8-1.6-1.6-1.4-0.91.40.5G7국가들의 연평균 성장률, 실업률, 고용증가율:1973~79 (자료 : OECD-1987 단위 :%)1973년에 불어닥친 유가파동때문에 G7국가들의 연평균 성장률을 이전기간에 비해 모두 매우낮다. 하지만 영국의 실업률은 1980년대에들어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84년에는 무려 11%로 G7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높았다.1976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다?수준낮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영국정부는 부담능력을 초과하는 사회보장비를 계속 지출할 뿐 비대해진 공공부문의 비능률과 그로 인하여 활력을 상실한 민간부문의 경쟁력을 회복시키는데 무력하였다. 1974~75년에는 통화 공급량이 50%나 증가한 결과 23.5%의 인플레이션을 가져왔고 파업으로 교통수단은 마비되어 다른 근로자들이 일터로 출근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시체매장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악취가 코를 찔렀다.노동당이 집권한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도 경제활동인구에 비해 늘어나는 노령인구로 재정팽창은 계속되었고 공공부문은 점점 비대해지는 반면 민간부문은 축소되고 활력을 상실하고 노동자들의 근로의욕은 점점 약화되어 영국은 ‘영국병’ 이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결국 노동당 정부는 1976년 9월 마침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영국은 1947년 IMF가 창설된 이래 1979년에 이르기까지 IMF에 의하여 각국에 제공된 총 여신의 40%를 점하는 최대 채무국이 되었다. 그 결과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은 IMF의 감독과 지시를 받아야 하는 채무국으로서의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IMF로부터의 감당하기 어려운 긴축요구, 높은 실업률, 노동조합의 격심한 파업 등 총체적 위기 속에서 1979년 마가렛 대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당 정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Miners demonstrate outside the Conservative Party conference centre. Brighton, 9 October, 1984.http://kr.blog.yahoo.com/minky1999kr/1005(1) 인플레를 잡다대처 수상은 취임하자마자 개혁에 착수했다. 야당 당수 시절 대처는 저명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 A. Hayek)와 밀튼 프리드만(M. Friedman)을 만나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하이에크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했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바 있었고 프리드만은 통화주의자로서 인플레이고 일률적으로 15%를 부과하였으며 법인세는 79년 이래 해마다 인하하여 1984년에는 30%가 되었고 현재는 25%가 되었다.(3) 실업률 저하, 흑자재정 실현公기업의 민영화와 같은 발상으로 公共주택의 불하정책도 실시했다. 대처 정부가 집권하기 전까지 영국 정부는 수많은 公共주택을 건설하여 근로자들에게 임대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정부의 재정부담이 늘어나고 주택의 質도 나빠졌다. 대처는 公共주택을 저렴한 가격으로 거주자들에게 매각함으로써 정부의 재정부담을 줄이고 주택의 질을 높였다. 대처가 집권한 10년 동안 주택 소유자 수가 1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함에 따라 이전에는 無産(무산)계급에게 주어지는 혜택에 안주하고 있던 근로자들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한편 대처는 국민들의 경제활동 의욕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減稅 정책을 실시했다. 1979년 소득에 대한 기본세율을 30%로 낮추었으며 근로소득과 투자소득을 구분하지 않고 최고세율을 60%로 낮추었다(이전에는 최고세율이 98%에 이른 적도 있었다). 1988년에는 11단계로 나눠져 있던 누진세율 적용 구간을 대폭 축소해서 25%와 40%의 두 단계로만 구분하고 법인세율도 대폭 낮추었다. 이러한 세제 개혁의 결과 노동당 시절 세금을 피해 해외로 빠져나가던 돈이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고 국민들의 근로의욕과 투자의욕이 크게 향상되었다.대처의 경제개혁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영국의 인플레율은 선진국 최저 수준인 3.7%로 떨어졌고 경제성장률은 4.25%를 기록해 OECD 국가 중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실업자 수는 1987년에 300만 명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해 1989년에는 2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재정수지는 1987년 18년 만에 약 30억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하더니, 1988년에는 140억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다. 강철 같은 의지로 밀어붙인 개혁이 성과를 거두면서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져 1987년 눠가지는 형태를 지향한 한국의 수구보수 정당과는 본질에 있어 다르다.?물론, 보수당은 자본주의의 유지·강화를 내세우고, 사회의 주류계층을 대변하고 있으나 약자를 위한 사회보장정책의 수립에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 진보 정당인 노동당처럼 ‘중요 산업은 국유화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적도 있다. 하지만, 대처는 이렇듯 유화적이기도 한 보수당의 기조와는 달리 엄정하고 냉혹한 보수주의의 입장을 시종 견지했다.?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그 녀의 경제정책은 철저하게 시장중심주의를 지향했다. 생존권 차원에서 진행돼 온 석탄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밀어붙였으며, 서민들이 받아오던 사회보장 혜택은 대폭 축소시켰다.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와 ‘풀 몬티’ 등은 대처 집권시절 광산노동자와 철강노동자의 피폐해진 삶이 풍자적이지만 여과 없이 담겨 있다.?정치적으로도 철저한 반공산주의 노선을 걸었던 대처. ‘철의 여인’이라는 닉네임에는 우측으로만 질주하는 그녀에게 혀를 내두르던 소련 공산당의 한숨이 섞여 있었다. 대처가 그의 이름에서 연유한 ‘대처리즘’을 기반으로 제52대 영국 총리로 재임한 기간은 호오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지지자들은 “향후 지속된 경제호황의 기틀을 닦고,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료했다”고 칭찬을 말을 쏟아내지만, 비난의 목소리 또한 높았다. “본질에 가닿지 못한 경제개혁으로 영국의 2차산업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간 것도 모자라, 빈부와 지역간 격차를 돌이킬 수 없이 심화시켰다”는 게 그 비판의 요지.?어쨌건 영국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깔린 대처의 영향력은 그녀가 퇴임한 이후로도 7년간 지속된다. 대처 퇴임 이후 총리에 오른 존 메이저는 대처의 그늘 아래서 외무장관과 재무장관을 지냈던 사람. 총리에 선출되는 과정에서도 그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을 받았다.?전임 총리의 정책을 대부분 계승하면서도 차별화된 유화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고질적인 문제인 북아일랜드와의 평화협상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나 파들에겐 “대처와 다를 바 없는 보수주의자”라는 혹평을 들었지만, 국민적 인기는 높았다. 10년에 걸쳐 3번의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그의 재임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은 지속적 상승곡선을 그렸고, 전쟁과 테러의 위험이 상존했던 북아일랜드 문제도 평화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급작스런 증세 없이 의료와 교육 분야의 재정 지출을 확대한 것도 박수 받은 정책의 하나였다. 블레어가 국내외에서 가장 큰 비판에 직면한 때는 미국 조지 부시 정권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 무비판적으로 지지를 보내며 참여했던 시기다. 이때 그는 오랜 정치적 동지이던 로빈 쿡과도 결별했다.?2001년 아프가니스탄 공습,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대규모 영국군을 파병한 블레어에게도 나름의 변명은 있었다. ‘중동 지역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고, 향후 그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는 명분이 바로 그것. 그러나, 그 논리와 명분은 반전기류로 가득했던 당시의 세계적 분위기와는 판이한 것이라 설득력이 약했다. 그런 까닭에 진보적 색채가 뚜렷한 반전 운동가들은 물론, 보수 성향의 영국 국민들조차 미국과 조지 부시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른다는 뜻에서 블레어를 “부시의 애완견”이라고 조롱했다.?이후 2007년 6월 총리직에 오른 고든 브라운은 오랜 시간 블레어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해왔던 인물이다. 블레어 집권 내내 재무장관을 맡았던 브라운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으로 20대 초반부터 진보적 잡지를 창간해 편집장을 맡는 등 영국 좌파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이라크전 파병 등 몇몇 문제에서 블레어와 이견을 보인 적은 있으나, 너무나 오랫동안 한 몸처럼 일해 온 탓에 전임 총리와 크게 구분되는 정책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10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에게 승리를 빼앗기자 브라운은 총리직을 떠났다.??2010년 5월 제56대 영국 총리로 선출된 데이비드 캐머런은 전형적인 정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청년정치가. 영국 왕 윌리엄 4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