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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양 여운형 생애와 활동 레포트
    몽양 여운형 : 독립·통일국가를 지향한 담대한 정치가Ⅰ. 머리말Ⅱ. 여운형 삶의 궤적1. 여운형 독립운동·정치활동 시기구분2. 제2기 : 중국 망명 독립운동 시기 (1914~1932)3. 제3기 : 국내 독립 및 건국 준비운동 시기 (1932~1945)4. 제4기 : 해방 이후 통일민족국가 건설 노력 시기 (1945~1947)Ⅲ. 맺음말Ⅰ. 머리말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한국근대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기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해방 후에는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정치가였다. 그의 활동은 특정 지역이나 이념, 단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활발히 전개되었고 다양한 노선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및 토론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중국, 소련, 그리고 일본의 지도층 각료들과도 교류한 바 있다. 특히 도일하여 만난 일본의 총독에게도 일본의 식민지전략을 단호히 비판하기를 마지않으며 조선의 해방을 역설하는 등 호방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게 매료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해방 후 1945년 10월~11월 간 선구회(先毆會)에서 실시한 〈국내·국제정세에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 최고의 지도자〉를 묻는 설문에서 무려 33%를 득표하며 1위에 올랐다. 이어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설문에서 역시 1위를 차지하였다.1940년대 시기엔 좌·우 이념적 노선을 초월하여 합작하는 통일민족전선의 독립운동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해방정국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누구보다 빠르게 수습하여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어진 미·소와 각 이념노선을 따르는 국내 정파들이 한반도 통치권을 두고 대립하는 가운데에서도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종횡무진한 그의 일대기 덕분에 그를 향한 평가 역시 극명하게 나뉘고 다양하다. 본 발제에서는 여운형 삶의 궤적을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등에서 수집하여 전시 중인 사진 자료를 중심으로 짚어보며 그의 사족함에 따라 2기부터 4기까지의 삶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제1기 : 국내에서 계몽운동과 청년운동을 전개했던 시기(1907~1914)제2기 :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된 시기(1914~1932)제3기 : 출옥 후 국내를 무대로 독립 및 건국 준비운동을 전개한 시기(1932~1945)제4기 : 8·15 해방 이후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시기(1945~1947)제1기에 해당하는 1910년대 여운형은 평양신학교에 다니며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서 전도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가치관 아래 평등을 주창하였고, 또한 일본의 한일병합에 대항하는 청년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105인 사건으로 활동 입지가 좁아지자 그는 1914년 망명길을 택하며 본격적인 독립·정치활동을 전개해 나갔다.2. 제2기 : 중국 망명 독립운동 시기 (1914~1932)※여운형의 제2기 주요 행적신한청년당1919년 파리강화회의 김규식 파견임시정부1919 외무부 차장1919 대한적십자회 이사 / 상해 교민단장개조파 활동일 본1919 일본 국빈방문 데이고쿠 호텔 기자회견소비에트 러시아1921~1922 모스크바 방문 극동민족대회 참석중 국1926 국민당 제2차 대표회의 참석 연설여운형은 1918년 8월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당시 몽고에 망명중인 김규식을 초청하여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 1919)에 파견하였다. 이로써 독립에 대한 염원을 만방에 알렸으며 이를 국내 기독교계 지도자 이승훈 등에게 소식을 전하는 등 3·1운동을 일으키는 동력에 공헌하였다. 김구와 신채호 등도 신한청년당에 뜻을 같이하며 신한청년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추진체가 되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외무부 차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그는 1919년 11월 일본으로부터 국빈 초청을 받았다. 일본은 3·1운동에 대한 여파로 정국을 수습하고자 회유 가능한 이들을 포섭하6년 1월 국민당 제2차 대표회의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의 초대로 참석하여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1927년 장제스의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으로 이후 중국 공산당과 연대의 길은 사라졌으나 장제스도 여운형을 찾아가 담론을 나누기도 하였다.이렇듯 그의 정치활동에서의 판단기준은 오로지 조선의 해방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독립 운동가들이 보였던 일정한 이념·사상적 노선이나 신념으로 인한 연합의 한계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한편 그는 건전한 신체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 정신을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학교 체육교사로 취직하며 스포츠 분야에도 두각을 보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청년들을 육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스포츠 활동과 스포츠맨십의 강화라고 본 것이다.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던 순간에도 그는 상해에서 야구경기를 관람 중에 있었다.3. 제3기 : 국내 독립 및 건국 준비운동 시기 (1932~1945)여운형은 대전형무소에서 1932년 7월까지 3년의 옥고 생활을 치른 끝에 출소되었다. 그는 이후 한반도 내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하였다. 1931년 일본이 만주 침략 이후 한반도에 보다 강력한 동화(同化, 황국신민화정책, 민족말살정책)정책을 꾀하며 전쟁을 확대하여 갔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가장 암울한 상황일 수 있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한다면 동시에 일본의 패망을 기대하는 희망적인 시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은 국내에서의 활동을 도모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의 지식사회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이미 세계대전을 전망하는 분위기 아래, 미-일전쟁이냐 혹은 소-일전쟁이냐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상황이기도 하였다.※여운형의 제3기 주요 행적1932년 7월대전형무소 출소1933년 2월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취임1933년 5월대한체육회 이사 취임1936년 8월일장기 말살사건조선중앙일보 폐간도쿄 방문, 일본 각료들과 회견1942년 12월일본 귀국중 시모노세키에서 피검되어 투옥1943년 6월집행유예 3년으로 출옥1944년 5월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중국행 요구하나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을 돕고 위로했다고 한다.여운형은 1933년 5월부터 1938년 7월까지 조선체육회 이사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건전한 정신이 건전한 신체에서 깃든다는 평소 지론 아래 조선 청년들을 단련시켜 독립 및 건국 준비의 토대로 삼고자 한 것이다. 특히 그는 ‘조선 풀-마라톤대회’의 대회위원장을 맡기도 하였고, 손기정에게 한반도의 긍지를 당부하며 1935년 베를린 올림픽 참가를 독려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손기정이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며 우승하자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손기정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문은 정간되었고, 다수가 구금되었으며 끝내 1937년 11월 폐간되었다. 여운형은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에게 주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그는 1940년부터 1941년 사이 여러 차례 도쿄를 방문하였는데 직접 일본의 상황을 주시하고 유학생들을 규합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총독부와 친일인사들은 갖은 회유와 종용으로 그를 포섭하고자 하였지만 여운형은 늘 단호히 거절했다. 마침내 1942년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도교 공습을 목격하며 그는 일본이 반드시 전쟁에서 질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변에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해 12월 ‘유언비어 유포죄’로 검거되었다. 여운형은 1943년 7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여운형은 국내 청년들을 결집하여 1944년 8월 10일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건국동맹은 이 시기 가장 비밀결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실천적인 조직으로서, 여러 조직들을 아우르고 국외 독립운동진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던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45년 8월 15일 당일에 조선건국동맹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여 국내치안과 직접적인 건국준비 등을 담당하는 데 원활한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4. 제4기 : 해방 이후 통일민족국가 건설 노력 시기안 유지를 부탁하였다. 당시 엔도는 17일 오후 소련군이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에 여운형은 소련군을 환영하는 연설문을 작성하고 공산당 출신의 정백과 박헌영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건준을 이끌어 나가는 판단을 취했다. 한편 우익 진영의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과는 결별하였는데, 이는 해방조선이 소련군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한반도의 지식인들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알 길이 없었기에 해방 후 북한과 남한을 갈라서 주둔한 미소 양군의 불협화 양상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간과하며,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개회된 미소공동위원회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독일·일본 패배 이후 원자탄 개발에 전격적으로 나섰다. 이에 스탈린은 미국과 교섭하기 전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지역에 주둔중이던 극동군 사령관에게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며 북한지역 단독정권 수립을 말한 것이다.여운형의 잘못된 정무적 판단은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 설립으로 방점을 찍었다. 박헌영, 최용달, 이강국 등 조선공산당의 중진들이 여운형에게 인민공화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여운형이 측근들과 어떠한 상의 없이 즉흥적으로 함께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특히 인공 설립을 위한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있었던 9월 6일은 미군의 인천 상륙 전날이었으며, 인공의 각료명단이 발표된 14일은 이미 미군이 남한 통치권을 장악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여운형은 ‘인민대표회의’에 축하연설까지 하였다. 이후에야 심각성을 느끼고 내각 발표를 보류할 것을 지시했으나 그의 의사는 묵살된 채 공산당은 독단적으로 발표했다. 미군정은 ‘공화국’이 아닌 ‘공화정’ 칭호를 사용할 것을 종용했으나 설득되지 않았고, 임시정부의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여운형은 1945년 11월 공산당과 분리할 필요를 느끼며 독자적으로
    인문/어학| 2020.09.30| 7페이지| 1,000원| 조회(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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