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1.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1910년 한일합방 이후 국내엔 일제의 무단통치가 행해졌다. 즉 일제의 군사적 무력에 의한 통치를 하였는데 이러한 강압적인 정치상황 속에서 국내의 독립운동은 활발히 일어나기 힘들었고 많은 의병운동세력이 일제에 의해 1910년 이전에 대거 소탕당했기 때문에('호남'지방에서 벌인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호남지방의 의병운동세력의 씨가 마름) 독립운동의 자원이 될 만한 세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1910년대의 민족운동은 '비밀결사운동'의 형식으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소규모 조직의 독립운동으로 전국적이지도 못했고, 단절적이며 고립분산적인 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이상주의적 입장에서 미국 윌슨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게 되는데, 이런 '민족자결주의'의 세계적 조류 속에서 당시 상해의 신한청년당,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일본의 유학생그룹들은 이것이 조선독립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들은 국내로 건너와 국내독립운동의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국외로부터의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되는데,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천도교, 기독교 세력이 중심이 되어, 33인이 구성되고, 이 중 29인이 혜화관이라는 식당에 모여 선언서를 낭독한 것이 3·1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탑골공원에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그것은 전국적인 평화적 시위운동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이후 3·1운동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게 된다.2. 192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1920년대엔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의 문화통치가 시작되었다. 국내에선 최시홍을 중심으로 평안북도의 천마산 일대에서 천마산대, 김시황, 김동식 중심의 보합단, 황해도 일대의 구월산대가 식민통치기관 파괴와 친일파 숙청, 군자금 모금 등을 수행하였다. 한편 1920년대 사회주의가 유입되면서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6·10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1927년 ‘신간회’가 만들어져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주의계열의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하였고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독립운동을 더욱 가열시켰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이 이끈 ‘민족실력양성운동’ 이 전개되었는데 조만식이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산업의 육성을 통한 경제의 자립을 도모하였고, 이상재가 주도한 민립대 설립운동을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일제는 민립대의 설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사회주의 운동에는 방정환의 ‘조선 소년 연합회’ 의 조직과 여성들은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설립해 여성의식 계몽 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진주에선 백정들의 주도로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나는 등 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3. 193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1930년대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과 식민지 수탈정책을 비롯한 온갖 탄압이 강화되었음에도 국내엔 독립운동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속에서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발전하여 언어과 글씨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실로 등이 나왔다. 한국어 잡지들도 정간과 폐간을 되풀이 당하면서도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한 문화투쟁을 지속하였다. 동아·조선·중앙일보등의 언론기관도 민족주의사학을 교육하여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대항하였다.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의 반제동맹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이 강화되었다. 소작쟁의, 농민운동, 노동쟁의, 노동운동 등은 농민, 노동자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것 외에도 1차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4. 194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국내 반일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의 비중이 커져가는데, 이는 1940년대에도 나타났다. 당시 사상범 검거 상황을 보면 1941년 경우 공산주의자들이 전년이 668명에서 대폭 줄어 158명인데, 민족주의자는 72명 ~ 176명으로 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시체제였고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수많은 이들이 강제 징집, 징용 등등 끌려가는데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유포, 태업, 공출 기피, 징용 및 학병 기피 거부 등등 소극적인 반일 움직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한편, 1944년 8월 10일, 여운형, 조동호 등을 주축으로 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세우면서 건국동맹은 치안대와 군사단체 조직,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제휴 활동을 벌였다. 조동호 등으로 군사위원회 조직하여 후방 교란 활동을 벌이게 하였고, 박승환 등 만주군 장교들을 규합했으며 북경을 거점으로 하여 화북 조선의용군과 연결했고, 충칭 임시정부와도 연락하고자 했다. 이어 1944년 10월에는 농민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국동맹의 우군이었다. 여운형은 학생, 교사, 철도원, 여성 등도 조직하였고, 징용, 징병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