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1)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삼국유사(三國遺事)』 가 중요한 이유는 사료가 희귀한 한국 고대사 분야의 실정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고대사를 밝혀주는 사료로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거의 유일할 뿐더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편찬 방식의 차이 때문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삼국사기는 왕명에 따라 쓰인 사서로 체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쓰여져 있다는 반면, 삼국유사는 일연 한사람에 의해 사사로이 쓰인 사서로서 체계적인 틀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서술로 주제가 다양하고 이전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못했던 문화 방면으로 한국 고대사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여 그 가치를 더욱 고취시켰다.『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삼국사기(三國史記)』가 기록하지 않은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가락국 등의 역사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또한 단군 신화를 비롯한 우리의 신화와 설화들의 원형, 정형 시가의 가장 오래된 형태인 향가 14수, 방대한 불교 자료와 민속 신앙, 일화 등이 실려 있어 국문학, 지리, 사상, 종교, 민속 등의 연구에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 문화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4수의 향가(鄕歌)는 우리 민족의 고대문학을 연구하는 데에 아주 값진 자료다. 이 책에는 우리 고대 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에 관한 자료가 많은데, 이 중에서도 탑과 불상 건축 등에 관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2) 인각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일연이『삼국유사』를 편찬하기위해 인각사에 머물렀을 때는 이미 고찰(古刹)이었다.그런 인각사에 일연스님이 머무르면서 인각사는 고려 불교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는데, 바로 전국불교대회인 구산문도회가 2번이나 치러졌기 때문이다.인각사의 다른 가치로는 여러번의 발굴 작업 끝에 통일신라시대의 청동병향로 등 다량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였다.3) 일연에 대한 간략한 소개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사 반열에 오른 후 하산소(은퇴사원)로 인각사가 지정 된다. 일연은 5년 뒤 세상을 타계(他界)할 때까지 인각사와의 인연이 지속 되었다. 일연이 개경을 떠나 인각사로 향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본래 개경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흔다섯의 노모에게 마지막 효도를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일연의 어머니가 인각사 부근에서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인각사 동북쪽의 한 능선에 일연 어머니의 묘소라고 전해지는 무덤도 있다. 또한 늙은 몸을 이끌고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인각사 뒷산에 날마다 올라가서 어머니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를 토대로 했을 때 일연이 인각사로 간 이유가 노모에 대한 마지막 효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일연의 어머니가 일연의 나이 79세에 아흔여섯의 나이로 별세한 이 때부터 약 5년 동안 여기에 머물렀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구산선문 전체를 아우르는 모임이 두 번이나 열 정도였다면 사실상 인각사는 일연에 의해 더욱더 확장되었음이 분명하며, 발굴 과정에서도 일연이 인각사에 머문 이후부터 사세가 더욱 팽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연 사후에 인각사에 일연 탑비가 건립 되면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2) 삼국유사의 저술배경과 내용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70대에 저술한 역사서(歷史書)이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전설의 보고이며, 고대 민족문화를 탐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로로서 가치가 높다.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紀異)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있다. 흥법(興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는 이론을 정립해 당시 중국과 비견되는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의 편찬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이렇게 온 고려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이러한 사회상에서 일연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점진적 개선에 대한 사상을 담은 책인 삼국유사를 내보인 것이다. 물론 삼국유사에 실린 뜻이 이런 것뿐만은 아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민족 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는 일화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는 아마도 원에 의한 유린에 대해 민족성을 고취시키며 자긍심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삼국유사』「역사편'」에 주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삼국유사의 「단군기」에 나타나는 단군신화의 기술을 들 수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두서에 단군신화를 기재함으로써 이를 부각시키고 국가의 위상을 중국과 나란히 두었다. 그래서 침략자인 원과 비교하여 문화적 우위를 느낄수 있도록 한 것이다.여기서 삼국유사의 내용을 요약해보자.제 1의「왕력편(王曆篇)」은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赫居世)로부터 후삼국의 고려 태조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王代와 年表를 도표식으로 정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위쪽과 말미 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年號를 표하여 시대적인 준거가 되게 하고 있다. 왕력(王曆)은 현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편(篇)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부록으로써 단순한 연대표가 아니다. 즉 이에는 각 왕의 대수(代數), 즉위 연대, 존위년수(在位 年數), 릉(陵)의 명칭, 소재(所在), 화장기사(火莽記事), 왕모(王母)에 대한 기록, 왕비(王妃)에 관한 기술, 연호(年號)의 사용, 중국과의 교섭관계, 국호(國號)에 대한 설명, 사찰 건립, 수도(首都)의 옮김, 축성(築城), 제방(堤防), 시장(市場)에 대한 기록, 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연대 대조표가 아니라 일연의 선대(先代)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알 수 있는 한편의 저술이라 할 것이다.제 2의「기이편(紀異篇)」은고조선 이래로 후백제까지 이르는 우술력(神術力)에 대한 설화를 모은 것이다.이는 「기이편(紀異篇)」과 더불어 신이적(神異的)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하지만 「기이편(紀異篇)」이 왕(王)에 대한 설화가 주(主)라고 한다면신주편(神呪篇)」은 승려의 신이(神異)에 대한 설화가 주(主)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제 7의「감통편(感通篇)」은지극한 신심(信心)이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화를 다룬 것이며이 편(篇)도 신이(神異)로운 내용으로 일관되고 있다.제 8의「피은편(避隱篇)」은세속적인 부귀를 탐내지 않고 초연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여기에는 승려에 국한시키지 않고 화랑이나 일반 사람도 주제로 포함되어 있다.기본사상은 모두 세속사(世俗事)를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마지막의 「효선편(孝善篇)」은 가정의 기본 윤리인 효가 불교에서도존중되는 덕목이라는 것과 불교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3) 일연의 삼국유사 서술방식삼국유사는 몽골 침입기 혼란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일연에 의해 쓰여졌다. 삼국유사에는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민족사적인 특징을 갖는다.삼국유사의 유(遺)는 잃어버리다, 자취 등의 의미이고 사(事)는 사건, 사고의 뜻으로 잃어버린 시대의 사건 또는 자취의 사건 사고의 기록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국가의 내력을 다룬 거의 모든 역사서는 통치자의 행적을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삼국유사는 통치자가 아닌 민중, 즉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얘기들을 서술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정치적 범위의 얘기가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민중 역사서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는 신라의 문화, 생활 모습 등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 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삼국유사의 허구적인 요소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하고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믿겨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삼백 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햇다.“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몸을 삼간지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 할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햇다.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앗다.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이처럼 우리가 생활 속에서 흔히 알고 있는 기이한 옛날 이야기들은 삼국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또한 삼국유사는 불교적인 요소가 뚜렷한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삼국유사의 왕력 편이 연표이므로 실제 서술 부분은 8편인데, 그 중에서 기이 편 하나를 제외하고는 일곱 편이 모두 불교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즉, 삼국유사는 몽골 침입기에 쓰여져 고려의 자주의식을 반영하고 있고, 불교적 성격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삼국 역사서이다.4).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역사인식은 무신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문화적 배경이 고려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다. 「삼국유사」보다 150년 가량 앞서 고려문화의 난숙기에 편찬된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는 정치제도 중심의 현실문제를 주로 다룬 것이었고, 그 편찬을 주도한 김부식 등의 역사의식은 .
서학이 조선에 미친 영향ⅰ. 동학의 출현서학의 유입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대해서 주장한 또 다른 동학이라는 종교가 생겨났다. 천주교와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생겨났지만 동학은 천주교와는 달리 동쪽에서 생겼다고 하여 천주교와는 반대된다고 주장하였다.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1824 ~ 1864))는 19세기 중반 당시 살고 있던 사회에 매우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조선사회가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며,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다(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라고 규정했다. 그는 당시 사회질서와 사회상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과 신하 등에 대한 이 비판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1860년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동학에서는 한울님을 믿었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대해서 주장하였다. 이를 탐탁치 않은 조선조정은 1864년 최제우를 잡아들인다. 심문을 받던 최제우는 동학을 서학이랑 비교하자“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지만 학은 동학이며 나는 이 도를 여기에서 받았고 여기에서 선포하니 어찌 서학이라고 이름 하겠는가” )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최제우는 『권학가(勸學歌)』)를 통해서 천주교가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세 지향적 특성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허무한 풍속’으로 규정했다. 특히 부모님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이는 천주교의 교리가 조선의 전통적인 관행이나 현실세계에 놓여 있는 민중들에게 무관심함을 비난하고 있었다.최제우는 이처럼 서학에서 드러난 현실적 과제에 대한 무관심을 동학이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동학은 1860년 이래 농민을 중심으로 하여 전파되어 나갔던 사회변혁사상으로 새롭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입장은 이와 상반 되었다. 조선의 천주교회는 사실 외국인 선교사의 전교(傳敎) 없이 조선인의 자발적인 수용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간 수차례의 박해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꾸준히 확장되었고 양반과 중인중심이던 지도층은 점차 평민층 위주로 넘어가고 교민의 대다수는 하층민이 구성하게 되었다.천주교 측의 1848년경 기록을 보면 “천주교 쪽으로 돌아서서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가난과 곤궁에 짓눌려 아무 재원이 없는 사람들이며 교난(敎難)으로 인해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학식 있는 이들은 남의 조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입교를 꺼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이미 바꿀 수 없는 현실보다는 내세를 중요시하던 하층민들의 선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포도청에서 취조를 당한 천주교도의 진술울 보면 확인 할 수 있다. 입교 동기를 명백히 토로한 교도 중 55%는 내세지향적인 동기로 신앙을 갔게 되었으며, 여성의 경우에는 88%가 그러 하였다. 천주교인들은 현세의 고통을 감내하며 죽어 천상에서 행복해 질 것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천주교는 동학을 어떻게 생각 하고 있었을까? 동학은 창시 당시 서학에 대항하여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동학의 출현에 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동학의 의견과는 다른 이야기다. 만약 천주교가 동학의 출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천주교에 대항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동학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교회 책임자에게 보고하여 적절한 대책 수립을 강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학의 존재에 대해 천주교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선 천주교는 동학의 존재를 예의 주시 않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ⅱ. 실학의 태동-성호학파와 북학파를 중심으로-실학(實學)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 당시 정치, 경제적인 문란 속에서 관념주의적인 성리학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이를 비판하며 실용적인 학문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후 덧붙입시다)성호학파18~19세기 조선에 전래된 서학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하는 조선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던 실학자들은 서학을 받아들임으로써 개혁의 방향과 내용 및 방법을 모색하려 하였고, 사회적 소외계층인 중인들과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서양에 싹튼 평등주의 시민의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의 다수 지식인들과 기득권자들은 서학에 이론을 비판하였고 성리학적 가치관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이들을 성호학파(星湖學派)라 하며 근기학파 또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라고도 한다. 그리고 성호학파는 서학을 학문적인 차원에서 파악하고 일종의 신문화수용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부류를 신서파(信西派), ‘벽이단론(闢異端論))'적인 입장에서 서학을 ‘사학(邪學)’이라 단정하고 서학 유입을 비판하고 저지하려는 부류인 공서파(攻西派)로 나눠진다.)신서파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유지하면서 그 보완으로, 혹은 유학을 재해석하기 위한 틀로 서학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서학을 성리학적인 학문관점을 뛰어넘는 하나의 새로운 학문으로 보았고, 서양문물을 배우는 목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종교적인 관점 보다는 실용적인 역수학, 기하학과 같은 실학관련 내용에 더욱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다 점차 종교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서학에 의해서 촉발된 원시유가의 천(天)개념을 가지고 기존의 주자학 전통을 재해석 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던 정약용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조선 15~16세기가 주자학적 이념, 즉 도학 정신의 구현을 위한 건설의 시대였다면.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규정될 만큼, 예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성행했던 시기이다. 그로 이어진 18세기 조선 실학자들은 앞선 실학자들의 과정에서 새로운 유학과 새로운 서학 공동체의 형성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1645년 개량력인 시헌력을 채택하는 등 서양 과학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서양문화의 수용으로 유럽이라는 또 다른 문명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동양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지구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학문연구의 태도를 중시하게 되었고, 근대적 학문연구의 학풍이 싹트기 시작했다.)공서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신후담(愼後聃, 1702 ~ 1761)을 꼽을 수 있는데, 신후담은 서학을 사후에 천국에 이르기 위한,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마땅함을 추구하는 유교의 이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이렇게 사후의 복만 추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현재의 윤리규범을 경시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부자와 군신이라는 두 축에 지탱되고 있는 유교사회가 붕괴될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장 크게 비판한 것은 영혼의 존재에 대한 것인데,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적인 입장에서 보면 영혼이라는 것은 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서학의 영혼불멸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성호학파의 창시자 성호 이익(星湖 自新))은 시대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사상의 정립에 힘쓰는 한편, 서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양중심을 벗어난 세계중심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당·지옥설 등 서학의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는 유학의 도덕가치관을 중심으로 비판하였다. 성호학파는 조선후기의 사조와 정치, 사회방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 그렇게 발전한 것이 성호학파이고 신후담의 공서파와 정약용의 신서파로 나눠져 나타나게 된 것이다.)북학파18세기 사신들은 청나라에서 직접적으로 인지되는 그들의 생활양식, 각종 건물과 기물, 그리고 산천에 대한 묘사와 인상, 그리고 정보였다. 이전의 ‘북벌’과는 달리 당시의 연행 기자들은 좀 더 유연하고 차분한 시각에서 전성기에 접어든 청 문물의 실상을 전달하였다. 연행 중에 들르는 심양(瀋陽), 통주(通州), 북경(?京) 등 대도시의 인상이 연행기에 빠짐없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대도시와 그 공간을 구성하는 각종 구성물의 놀라움이 클수록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 기계의 편리함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였다.18세기 초 연행기는 김창업(金昌業)의『연행일기(燕?日記)』가 대표적이었다. 이 연행기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으로 청의 문물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소개 하였기에 후대 연행 사신들도 종종 휴대하였다. 그런데 그 중 여러 대목은 후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어 오랜 기간이 흐른 후에도 거의 변함없이 인용되었다. 이는 연행록이 풍부한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선 고정된 인상과 순환하는 담론 체계를 형성하였음을 보여 준다.그러나 18세기 후반, 이전 연행기에서 보여주던 정보와 인상 전달을 넘어 새로운 사유의 틀과 주체인식을 촉구하는 수준의 연행기가 점차 늘어났다. 이른바 북학파로 대표되는 연행 기자들은 청의 기술과 문물들의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선입견에 묶여있는 조선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였다.이 중 박지원은 연행 동안 다양한 층위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음미하거나 경험하였다. 북경의 주점에서 몽고와 회회인)을 보았을 때는 그들의 복색을 관찰하면서도 그들은 내 복색을 어떻게 볼지를 상상하며,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 호기로 술을 들이킨 일화는 연행 일상에서의 호기심과 세심함을 보여준다. 연행에서 돌아온 박지원은 고정된 시각에 사로잡혀 사물을 재단하는 사고의 위험성을 면밀하게 전개했다. 그는 잘못된 인식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을 본 것이 적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견문의 확대는 곧 선입견의 깨어짐을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로써 얻어진 시각은 세계를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며, 그들과 우리를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의 상대화였다.
서학에 대한 성리학자들의 반응ⅰ) 성리학적 질서와 충돌조선 왕국은 성리학의 왕도 정신에 입각한 정치 철학을 도입, 수용한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국가 이념과 사회 원리로 삼고 이것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때문에 성리학의 가치를 벗어나는 모든 학문을 '사(邪)'로 단정하고 이것을 철저히 물리치는 '벽이단론(闢異端論))'이 유지되어왔다. 천주교는 성리학이 아니고, 성리학 위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천주교가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천주교는 인간의 평등과 사랑을 가르쳤다. 이는 지금껏 유지되어 오던 양반사회를 뒤엎는 파격적인 교리였다. 천주교회는 신분의 귀천, 성별, 직업에 한정되지 않고 평등과 사랑을 나누기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은 신분 체제를 무너뜨리고,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를 그르치며, 국왕에 대한 충성마저 위협하였다.실은 초반에 천주교가 유입되었을 때, 기득권층의 비난과 배척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큰 탄압은 없었다. 하지만 조상 제사 문제로 성리학과 서학이 극명하게 대립하게 되면서 박해가 시작 되었다. 유교 사회에서 조상 숭배와 유교적 제례는 가부장적인 성리학적 질서 하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전례였고, 이에 대한 거역은 가장 큰 죄목인 불효(不孝)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천주교는 조상숭배와 유교적 제사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앞서 언급하였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불살라 버린 사건이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선비 사회에 동요가 일었고 이를 패륜행위로 간주해 왕에게 탄원서를 넣어 윤지충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을 참수한 신해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제사 문제와 더불어 유교 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중 하나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이었다.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고귀한 피조물로써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분이라고 하는 상하관계가 아닌 형제라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신분제도에 도전하는 주장이었다. 이는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가 활동하던 때 어떤 신도가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걸세.")이렇게 지금껏 조선 사회를 유지해오던 신분질서와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펼치는 천주교는 성리학을 신봉하던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그리고 천주교와 함께 천주교와 관련한 천문학, 산학(算學) 등 근대자연과학도 유입되었는데, 이에 대한 수용도 성리학의 도덕주의적 자연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성리학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원리를 통해 모든 우주현상과 사물의 생성 및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는데, 만물이 하나의 이-이치(理致)-로 이루어져있고 개개의 사물과 현상은 상황에 따라 이치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일분수설(理一分數說)을 근본으로 한다. 그런데 서양 근대자연과학의 입장에서는 만물을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존재로 보고 있다. 이 점이 이일분수설을 부정하고 있어 성리학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던 학자 층에게 반감을 샀다.)유교 문화에 물들어 있던 조선시대에 천주교의 전래는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지녔다. 조선인들이 새로운 종교를 수용 실천하게 되었다는 점과 새로운 인간관, 사회의식, 문화 창조의 수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주교 신앙의 수용은 전통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역사적 변수의 과정으로 우리 사회에 작용하게 되었다. 인간 존엄과 평등한 인간관, 평등실천의 사회의식, 개방적 문화 활동으로 인해 전통적 봉건 사회를 서서히 침식, 풍화시켜 근대로의 접근을 촉진하였다.)
천주교의 수용에 따른 조선후기 사회, 문화적 변화조선시대는 17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가부장적 성리학 사회질서가 정착되게 된다. 혼인제도의 경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에서 친영제(親營製))로, 상속도 장자, 차자, 딸의 구별 없이 고루 나누어 주는 균분에서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에서 장자 단독 봉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성리학적 사회가 강화되면서 여성, 노비 등의 사회적 약자의 위치는 더욱 열악해졌고 정치적 약자 또한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천주교의 수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급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잠재적 요구, 행정기구의 붕괴로 인한 정부의 기능 상실, 생산계층의 대두 등으로 사회조직의 재조정이 요구되던 조선사회의 구조적 긴장 하에서 그 폐쇄성에 새로운 세계관을 연결시키려는 통합적 시도였다 할 수 있다. 또한, 천주교의 수용은 그것이 단순한 서양문화의 침투가 아니라 조선사회 내의 지식인들에 의해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당시, 사회 내의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천주교의 초기 수용과정에서는 하나의 학문의 형태로 일부 지식인들의 비판적 작업을 통해 수용되던 것이었다. 이후 점차 피지배계층으로 확산되면서 신분질서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천량, 빈부, 남녀를 막론하고 민중 속에 침투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백여 년 간의 박해시기를 통하여 지식층에서 정부의 탄압에 못 이겨 배교를 하는 일이 있은 후에도 민중 속에서는 계속적인 전파가 진행되었다.) 18세기 중반, 명말청초 시대 때에는 한문서학서가 조선으로 유입되어 조선 지식층에게 읽혀왔다. 하지만 천주교가 일반 민인들에게 널리 전파되면서 한문서학서를 독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반 민인들을 위해 한글로 번역된 한글서학서가 출현하게 된다. 당시의 지식청년들은 한문서학서의 수용을 통해서 이를 ‘서학’의 차원에서 파악하고 일종의 신문화수용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글 서학서가 출현함에 따라 천주교 서적이 민인들에게까지 전파될 수 있는 계기와 천주교 신앙이 종교의 차원에서 실천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천주교의 초기 수용 당시에는 천주교 서적의 합법적 수입이나 국내에서의 유통이 금지되어있었다. 이 상황에서 한글 서학서의 소장과 보급을 위해서는 이를 직접 필사하여 제공하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길이었다. 그리고 이 필사된 책자는 필사자 자신이 직접 소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매매되기도 했다. 천주교 신앙의 확산은 한글서학서의 수요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요자 층이 증가됨에 따라서 천주교 서적은 그 자체가 상품화되어 봉전행매(俸錢行賣))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김세박(金世博)이 1791년 이후 신도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서학서를 등서해 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는 일화나, 정광여(鄭光受)는 천주교 서적을 만들어 도처에 판매하는 등 서학서 필사 작업 및 유포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와 같이 적지 않은 신도들이 1790년대를 전후하여 서학서의 필사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서학서를 보급받는 과정에서 서학과는 무관한 전문적 필사자에게 고가(雇價)를 지불하고 서적을 필사시켰던 사례도 나타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사상, 가치가 재해석되고 부정되면서 평등의 개념과 인권을 강조하는 서학이 들어오고 이에 반해 동학이 창도되었다. 동학은 최제우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창도하였다. 동학 창도의 배경에는 중세 봉건사회의 모순 속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던 민중을 구원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으나 천주교 확대로 인한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이 큰 몫을 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나 서양의 무력간섭이 필요하다는 김대건 신부의 발언, 프랑스 해군 소장 세실이 함대를 거느리고 와서 기해옥사 때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일을 항의하는 무력시위는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었다. 이처럼 애초에 서학, 서양문명, 서구세력 등에 반대한다는 취지에서 동학이라고 이름을 짓고 창도되었으나 오히려 정부로부터 서학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그것은 동학 교리가 가지는 혁명적 성격 때문이었다. 후에 천도교로 개칭되는 동학의 핵심은 천(天)사상으로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여기서 천, 즉 한울님은 남녀노소, 지고위하, 신분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평등의 개념이었다. 군부지상주의의 유교적 인륜사상을 부정하고 양반, 노비 모두 마음에 천주를 모시고 있으며 이들 모두 곧 하늘이고 천주의 같은 자녀, 동포라는 사상은 조선 봉건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계급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반상, 적서, 남녀노소, 빈부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상의 동학은 남인 시파, 중인, 서민, 천민 등 교도의 증가를 가져왔다. 농민들은 동학이 그리는 새로운 이상 사회에 매혹되고 교세는 삼남지방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동학을 사교라 하면서 최제우를 처형하고 탄압했으나 교도 수는 더욱 증가해갔다. 특히 동학이 종교적인 색채를 벗고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선 왕조 정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정부가 일본군을 끌어들여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을 진압하면서 동학의 박해는 정점을 찍게 되었다.동학은 조선 후기,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으나 다만 자각하지 못하고 개념화하지 못하였던 천부인권은 서학을 통해, 그리고 동학을 통해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 인식되어져 갔다. 한울은 명확하게 개념화 지을 수 없었지만 주재자이며 인격적인 신이라는 것을 깨달아갔고 그러한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고귀하다는 생각들을 성리학적 봉건체제 속에서 신분과 성별을 넘어 서로 교류하여 나갔다.)동학과 더불어 서학도 마찬가지로 천주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기존의 국왕이나 양반, 지배계층 대신에 천주인 하나님을 유일신으로서 섬기게 되었고 남녀, 노소, 계급의 차별이 없는 이념을 학습하고 전도하여 갔다. 그 과정에서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비록 외세의 무력에 의지하려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으나 순수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은 비신앙인들에게 기독교 사상의 참모습을 각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혁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서도 나타났다. 그 변화는 생활적인 측면에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이유나 그 밖의 여러 이유에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왔다. 그러나 이전의 금욕적 실천이란 어디까지나 일부 특정한 사람들만의 일이었고, 대게 일정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달리 천주교에서 금욕적 실천은 많은 신자들이 행한 일반적 실천이었으며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지속적 실천이었다.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정의 완성을 이룩하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면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잡았었다. 이 후, 로마 공화정, 과두정이 무너지고 로마 제정이 시작되면서 로마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이 두 시대의 중심에는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BC 461-429)와 로마 제정을 시작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가능케 했던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있었다. 각 시대의 번영을 주도했던 이 두 인물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첫째로 그들이 정권을 잡게 된 배경을 비교 할 수 있다. 먼저, 페리클레스의 경우부터 살펴보자면, 페리클레스가 정치가로 등장하는 시기인 기원전 460년대에는 보수파와 개혁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보수파의 지도자 키몬(Cimon)은 스파르타와는 평화를 유지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스파르타를 지원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개혁파의 중심인물 에피알테스(Ephialtes)는 스파르타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였다. 이 현안이 민회에 상정되자, 자영농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던 키몬이 승리하여 스파르타를 지원하게 된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 아테네 군 일부가 반란파를 선동한다며 회군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을 국가적인 모독이라고 본 아테네 시민들은 키몬 측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서 에피알테스 측은 먼저, 키몬을 지지하고 있는 전직, 현직 아르콘들의 회의체인 아레오파고스회의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시도한다. 아레오파고스회의가 가지고 있는 법, 체제 수호 기능을 없앰으로써 보수세력을 억누르고, 부수적으로 민회의 기능이 강화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페리클레스는 키몬에 반대하고, 개혁파인 에피알테스를 적극 도왔다. 그는 키몬을 도편추방하는 데 성공했으며, 에피알테스는 키몬의 도편추방에 대한 보복으로 보수파에게 암살당했다. 결과적으로 개혁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 중 페리클레니우스를 무너뜨릴 때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되었는데, 무티나 전투 이후 자신을 소모품으로 본 원로원에 대한 반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연합하여 삼두정을 결성하게 된다. 삼두정의 탄생과 함께 삼두들은 많은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을 추방,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정적들을 숙청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실각시키고, 본격적으로 권력 잡기에 몰두 하게 된다. 이 때 까지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보다 훨씬 우세해 있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들의 정서를 거스르는 내용이 담긴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같은 로마인들끼리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로마를 위협하는 외국인과 그에 현혹된 안토니우스에 대항한 전쟁으로 탈바꿈 시켰다.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였다. 그리고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친우이자 조력자인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군대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군대에 맞서 이겼다. 이로써 모든 정적들을 숙청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아우구스투스는 페리클레스에 비해서 훨씬 잔혹하고, 적극적으로 정적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페리클레스는 두 부류로 나뉜 정국에서 한 편에 가담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입지를 확보하고, 주변 상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적들이 숙청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정적들을 없애고 독자적인 권력을 펼칠 수 있는 독무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두 번째로 그들의 지위나 칭호에 대해 비교하자면,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43년 최고 군사위원, 또는 군사 위원장(strategos : 장군)으로 선출된 이후 15년 동안 민주정치를 이끈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아테네에서 장군은 장군들은 단순히 군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국가 최고의 입법 및 행정관이었다. 아테네의 최고관직인 아르콘이 추첨제로 변화하면서 아르콘직의 비중 기원전 31년 3선 콘술이 된 이래 해마다 콘술직을 역임하였다. 기원전 27년 공화정을 로마 인민과 원로원에게 돌려준다는 선언, 즉 ‘공화정의 회복’을 선언했을 때 그는 7선 콘술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5세였으며, 그가 자신을 위해서 수용한 유일하면서도 새로운 직함은 프린켑스(princeps:군주)였다. 원로원은 이에 대한 회답으로 옥타비아누스가 반환한 모든 권력을 다시 그에게 되돌려주면서, 처음에는 형용사로 사용되었지만 후에는 명사로 전환되었으며 사전적으로는 ‘높이는 자’(역사적으로는 성스러운 자)를 의미하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새로운 칭호를 부여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반복적인 간청에 마지못해 승낙하는 듯 한 제스쳐를 보였다. 사실 이 사건은 양측 모두가 해낸 완벽한 정치적 연기로서, 이중적인 행동이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보수주의와 공화주의의 결정적인 몰락을 상징하였다. 뿐만 아니라 생각 있는 원로원 의원들조차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차라리 절대군주를 원하고 있었다. 기원전 23년 11선 콘술 직에 있을 때 자신의 동료 콘술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의 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콘술 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정무관이 가지는 권한만 보유하였다. 콘술이 아니면서 군대를 지배할 수 있는 콘술의 명령권(consulare imperium)을 보유하였고, 호민관이 아니면서 법안을 발의, 거부 할 수 있는 호민관의 권한(tribunicia potestas)를 보유하였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에 대한 지배권을 강조했는데, ‘최고 군지휘자, 승리한 장군’이라는 뜻의 임페라토르(Imperator)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도 그것이 군대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평화로운 속주는 원로원의 관할 아래, 좀더 위험한 속주는 자신의 관할 아래 두었다. 대부분의 군단은 전쟁 가능성이 있는 변경지역에 주둔했기 때문에 이러한 속주 분할은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로는 공화정을 제창하면서 권한을 1인에 집중시켜 실질적으로는 로마를 제 파르테논 신전 건축비로 사용하면서 그리스 세계의 비판이 일어 전쟁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페리클레스는 이에 대해 받은 돈으로 부양을 하든 장식을 하든 그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는데, 동맹국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불만이 있으면 야만인데 대해서 스스로 지키라는 일침을 가한다.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와는 벌써 평화조약을 맺고 있었으면서도, 이 제국주의를 위장하기 위해 파르테논 신전에 야만족 켄타우루스를 인간의 적대자로 묘사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쟁 기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모습은 제국주의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번영에 일조하며 환영 받는 정책이었겠지만 국제관계에서는, 다시 말해 피동맹국의 입장에서는 참주에 불과했다. 페리클레스는 유능한 정치가였고 장군이었으나 국제관계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제국주의적 참주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한편 아우구스투스 때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절히 사용하였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大敗)를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만회하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親)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에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또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된다. 기원전 15년에는 알프스 산악 지역의 정복을 마쳤고,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사이에 군사적 완충 지대가 생겼다.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아우구스투스의 대외정책은 이전의 로마 대외정책보다는 소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민중들이 질서, 평화, 안전, 훌륭한 행정, 통화와 저축의 안정을 원하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민중의 이러한 심정을 제도를 통해서 보장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노력으로 ‘로마식 평화(Pax Romana)’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전쟁과 정복사업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외부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경지역들은 방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전처럼 활발한 정복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방어하기 유리한 큰 강을 국경선으로 확보하기 위해 국경을 조금씩 확장하는 대외정책을 펼친 것이다.)페리클레스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매우 공격적이고 적극적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평화 유지를 위해 국경선 확보 수준의 소극적 대외정책에 그쳤다.마지막으로 국내 정책에 대해서 비교 하자면,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부를 챙기기 보다는 아테네의 번영에 목적을 두고 아테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원래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군선이나 병력을 내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다른 동맹국들이 공납금을 바치게 하고 동맹의 기금을 아테네로 옮기게 된다. 공납금을 바치지 않는 폴리스에 대해서는 강제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아테네는 제국으로 변모하게 되며 이것이 민주정 운영에 필요한 자금원이 된다. 이 자금으로 아테네는 수군을 유지하면서, 빈민(thetes)들이 수병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로 인해 보통 시민들 가운데 2만 명 정도 였던 빈민의 절반이 혜택을 누리게 되고 정치 참여도 가능해졌다. 또한 그는 시민이 국가의 일을 보살펴야하며 국정의 방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실천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레오파고스회의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상대적으로 민회의 권한을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