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 선정 이유_ 자연경관이 아닌 인공 산과 인공 호수_ 후대에 재평가된 점_ 중국의 문화유산 관리 방법<중 략>이화원의 역사적 가치_ 중국 최대 황실정원으로 동양 정원의 예술과 문화에 큰 영향_ 만리장성과 함께 베이징 필수 관광지로 자리잡음_ 당대 황실문화를 짐작하게 함_ 얽힌 사건들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해석의 기반이 됨_ 드라마 촬영장 등으로 이용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중앙의 유리 피라미드와, 르네상스 양식의 왕궁 건축으로 손꼽히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요새로 사용되던 이 곳은 왕궁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잠시 사용되지 않기도 했지만 16세기 프랑수아 1세에 의해 다시 새로운 왕궁으로 태어나게 된다. 현재의 남서쪽 전시실이 처음 지어졌으며 나머지는 루이 14세, 15세에 추가로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리모델링의 관점에서 루브르 박물관은 환경적 측면보다 역사, 문화적으로 지속 가능한 건축물이다. 리모델링 요소의 원리보다는 긴 역사를 가진 이 건물이 세월을 따라 어떻게 역할이 바뀌어 왔는지, 그 가치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현대 최고의 박물관이 되었는지가 중점적인 내용이다. 1.요새에서 왕궁으로1988년,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요새로 사용된 듯 한 공간이 발굴되었다. 이 곳은 복원을 거쳐 루브르 박물관 자체를 거대한 역사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14세기에 들어와 샤를르 5세가 이곳을 루브르 왕궁으로 변화시켜 이 요새는 왕실과의 인연을 만든다. 그러나 1628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로 왕궁을 옮겨 이 궁은 왕실의 예술품을 보관, 관리, 전시하는 용도로 쓰인다. 프랑수아 1세에 다시 왕궁을 짓게 된 것은 재정난으로 인해 왕정이 파리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왕궁에서 박물관으로1692년 이곳에 ‘왕립아카데미’가 세워진다. 그 후 100년간 루브르는 계속하여 수많은 왕실 예술품들을 관리하고 보존하였으며 프랑스의 예술가들을 배출하였다. 본격적으로 루브르가 박물관의 명칭을 얻게 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다. 1793년 혁명 정부는 국왕의 미술품들을 국유화하고 루브르성을 공공박물관으로 선포하는데 이는 혁명 후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즉, 전제정치라는 구 체제의 몰락과 신질서 등장의 상징물이 된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박물관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후의 리모델링 목적도 그에 부합한다.
DDP 개요 3차원 비정형 형태의 "노출콘크리트" 착공 • DDP 노출콘크리트 전체 21,673㎡에 곡면 또는 버섯모양 등의 다양하고 파격적인 비정형 형태가 9,402㎡로 건물 내외에 과감히 도입 건물 입구 및 옥외 브릿지 난간, 도서관 기둥 등) • 일반적인 노출 콘크리트와는 다른 모양으로 국내 노출콘크리트 건축기술의 새로운 이정표 제시 • 실물크기의 노출콘크리트 모형(Mock-up)을 수차례 사전 제작해 최적의 노출 콘크리트 품질기준 마련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12년 7월 완공, 서울을 상징하는 세계적 랜드마크 BIM 기법 적용 BIM 이란? (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2차원의 평면적 도면 정보를 3차원의 입체설계로 전환 하고, 건축의 모든 정보를 Data Base화하여 설계, 시공 등에 활용하는 3차원 건물설계를 위한 차세대 기법
선정 이유 독일 국회의사당은 일반적인 리모델링 건물들과 달리 경우 도태된 이유가 특이하다. 도태는 대부분 기존 용도가 현대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산업시설이거나 역사, 창고인 경우 일어나기 때문. 그래서 리모델링해서 다른 용 도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경우는, 일정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던 건물과 여러 가지 용도변경을 거쳐 온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 하여 건물 당시의 목적대로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는 부활형 방법 <중 략>리모델링 후의 모습. 건물의 옥상에서부터 1층 의회장이 있는 곳까지 관통할 수 있는 구조이며, 투명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회의사당의 중심에 위치한 의회장을 위에서 국민들이 내려다 볼 수 있고 나선형 계단으로 돔을 전부 둘러볼 수 있는데 이는 국민과 정치 사이에 친근함을 형성하며 개방된 정치를 암시.
스투파가 재가 신도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 결국 탑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조형물로 발전하였다면 반면 출가승들은 세속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무리를 이루며 수행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수행하고 의지하여 열반하는것이 목표였고 초기에는 숲속에 초가집을 만들고 생활했다고 추정된다. 사찰이 아닌 그저 민가와 다름 없었을 것이고 비영구적이었다. 그러나 승단에 대한 일반인의 시주가 늘어나며 영구 거처가 필요해졌고, 이내 석조로 만든 거대한 승방들을 만들고 절벽을 뚫어 인공 동굴을 만들어서 그 안에 가람을 조성하게 된다. 출가승들이 기거하는 승원굴과 승단이나 방문신도들이 예불하기 위한 예배굴로 구성되는데, 보통 한두개의 예배굴과 네댓개의 승원굴이 합쳐져 하나의 사원을 이룬다. 이러한 석굴사원이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퍼져 유행을 이루고 우리나라에서도 경주의 석 굴암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중 략>가람이란?예배굴=불상을 안치한 불전이나 법당/승원굴=승방 또는 요사채 예배공간과 수행공간이합쳐진 복합체지만 어원적 의미로는 승가 집단의 수도원적 의미가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