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생애와 그의 작품관SUBJECT.러시아 사회와 문화STUDENT NO.NAME.PROFESSOR.Ⅰ서론Ⅱ본론-체호프의 생애와 그의 작품의 특징-체호프의 작품관(작품세계)Ⅲ결론Ⅰ서론작년 한창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대단히 문학이 발전된 나라고 그 내용도 심오하고 어렵다 하여 ‘단편선을 읽어야 겠다’ 는 생각으로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이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이다. 그 책 속 여러 가지 단편들 중 제일 앞에 위치했던 것이 ‘굽은 거울’ 이었는데 ‘아, 작가는 거울을 보고도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구나!’라고 감탄했던 작품이다. 이 책의 작가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인데, 올해인 2010년이 그의 탄생 150주년이고, 이와 더불어 한-러 수교 20주년이라 하여 연극계에 그의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위대한 여러 문호들에 가려 국내에서는 그의 빛나는 작품 활동에 비해 그 명성이 아직 우리에게 덜 알려진 듯하다. 나는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인 안톤 체호프의 생애와 그의 작품관, 그리고 이 둘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Ⅱ본론-체호프의 생애와 그의 작품의 특징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860년 러시아 남부의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주에게 돈을 주고 해방 된 농노였고, 그의 아버지는 잡화상이었다. 그가 16살 때 그의 아버지가 파산을 해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대학시절 어머니의 생신선물로 케이크를 사드리기 위하여 오락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하며 그의 작품 활동은 시작되었다. 오락잡지에 글을 실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또 농노인 할아버지와 잡화상인 아버지로 미뤄보아 체호프의 조부와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 역시 체호프에게 영향을 미쳐, 고차원적인 소재보다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택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이런 특징적인 소재 선택은 그의 4대 장막전(연극)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다. 그의 연극 4개의 제목은 각각 ‘갈매기’, ‘세 자매’, ‘벚꽃동산’, ‘바냐아저씨’ 인데, ‘갈매기’는 항구도시인 타간로크에서 태어난 그에게 매우 친숙한 존재였을 테고, ‘벚꽃’역시 봄마다 볼 수 있는 꽃이었을 것이다. 또 ‘바냐아저씨’의 원제는 ‘숲귀신(Леший)’으로, 숲귀신은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친근한 존재이다. 또 그의 연극에서 빚어지는 상황들은 당시의 흐름인 ‘극적 행동’이 아닌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데 이 역시 그의 일상적인 소재선택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나오는 특징이다.그의 희곡에는 대체로 열댓 명 정도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모두의 배역 비중이 비슷하다. 이는 농노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체호프의 사상이 배역에까지 미친 듯하다. 이러한 그의 연극의 특징은 오늘날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이 졸업 작품으로 체호프의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게 하고 있다.비록 유년기에 가세가 기울어 중학교를 고학으로 마쳤지만, 체호프는 의사가 많이 배출되던 당시의 흐름에 따라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삶 역시 살아가게 되는데, 본직인 의사 역시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연극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고, 인물들의 정신적 질병과 외적 질병을 교묘히 섞어내어 언제나 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들과 함께 사람의 심리를 구체화 시켜 복잡다단한 인물을 만들어 내었다. 이는 정확한 의학지식 없이는 서술할 수 없는 구체적인 것으로써, 다른 이들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체호프만의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체호프의 아버지는 상점을 하는 광폭하고 강압적인 사람으로, 체호프의 유년시절이 그리 밝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무척 부드럽고 사려 깊은 상냥한 부인으로, 체호프는 주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영향이 그의 연극에 이렇게 드러난다. “사회의 자연주의적 요소와 기분이나 마음의 인상주의적 요소가 교묘하게 표출되고 많은 장면이 서정적 장면으로 이루어진다.”이렇듯 체호프 작품의 특징들(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의 선택, 등장인물들의 비교적 평등한 배역 비중, 질병과 심리간의 교묘한 융합, 서정적 장면의 연출)은 그의 생애를 비춰준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곤 하지만 소소한 것들에 영감을 얻어 작품 활동을 하는 체호프는 어렵고 멀리 있는 문학이 아닌, 우리 주위에 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가이다.-체호프의 작품관(작품세계)지금까지 체호프의 생애와 작품의 특징에 대해 논해보았다. 지금부터는 이를 기초로 하여 체호프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체호프의 작품의 특징은 한 마디로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체호프는 그의 작품 소재로 삼았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지나간 과거의 행복에 연연하고, 이루지 못한 희망에 얽매이는, 현실과 꿈의 부조화 속에 살아간다. 체호프의 4대 장막전(연극)은 모두 이 ‘부조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갈매기는 현실과 이상의 분리를, 바냐 아저씨는 상실된 희망과 현실순응을, 세 자매에서는 이상향을 향한 욕망과 좌절을, 벚꽃동산에서는 현실과 자아의 분리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허우적대다 끝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더 우스운 사실은 인물들이 모두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끝내 그것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종속되어 살아가는 인간. 이것이 체호프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기에 우리는 부정할 수 없고, 역설적으로 사실적인 웃음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위트 때문에 체호프는 20세기 사실주의극의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에서의 바람직한 삶의 형태와 불교와의 비교 논의SUBJECT.남아시아 사회와 문화NAME.STUDENT NO.PROFESSOR.< 목차 >-힌두이즘에서의 바람직한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힌두이즘에서 제시한 인생의 네 가지 주요 목표)-힌두교도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네 단계에서 네 가지 주요목표들을 어떻게 수행할까?(바르나슈라마다르마에 따른 삶의 단계)-동양의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의 인생관은 어떻게 다른가?(금욕을 추구하는 불교와의 비교)-힌두이즘에서 제시한 인생관에 대하여(맺음말과 보고서를 쓰면서 깨달았던 점과 느낀 점)-참고자료와 문헌-힌두이즘에서의 바람직한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세계의 4대 종교 중 하나인 힌두교는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라문교와 민간신앙이 융합되어 발전한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이다.(http://100.naver.com/100.nhn?docid)인도에서 발생되어 인도를 중심으로 파생된 힌두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종교의 개념이 아니다.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 라는 말이 있듯이 힌두교는 인도인들의 생활방식, 식습관, 문화, 정신까지 지배하는 인도문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힌두교가 신자들로 하여금 인생에서 네 가지 목표를 잡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하는데, ‘다르마’, ‘아르타’, ‘까마’, ‘목샤’ 가 바로 그것이다.다르마(Dharma)는 광범위하게 정의, 종교적 의무, 도덕, 사회적 윤리 등의 인간이 지켜야 할 ‘법’과 같은 것인데, 좁은 의미로는 힌두교도들이 지켜야 할 종교적 의무를 말한다. 아르타(Artha)는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의미하는데, 생존을 위한 처세술, 실리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까마(Kama)는 인생의 재생산, 즉 육체적 만족-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힌두교에서 지정한 세 개의 목표를 모두 만족 시키면 목샤(Moksha)를 할 수 있는데, 목샤는 해탈을 의미한다. 앞의 세 목표 다르마, 아르타, 까마는 목샤를 만족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모순되는 삶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인도’라는 국가의 전반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란 인도의 독특한 신분제도로써 성직자인 브라만, 정치와 군사계층인 크샤트리아, 평민인 바이샤,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의 네 단계로 구분된다. 인도인들은 이 카스트 제도 안에서 각자가 속한 카스트와 삶의 단계에 따라 지켜야 할 종교적 의무가 달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인도인들은 바르나슈라마다르마(varna-shrama-dharma)라고 하고 이 가르침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한다. 바르나슈라마다르마에 따르면 사람의 인생을 이상적으로 나누면 학생기-가주기-임서기-유행기의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학생기(brahmacarin)는 1세부터 25세 까지로 금욕과 학습의 기간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경전(베다)를 공부하고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 각자가 해야 할 의무를 익히는데 전념해야 한다. 이 시기에는 남녀의 성적인 접촉을 금하는 금욕이 강조된다. 이 과정 후에 가주기(grihastha)가 오는데 이 시기는 26살부터 50살 까지에 해당된다. 가주기라는 말 그대로 결혼을 하고,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이라는 감정들을 체험해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시기가 이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는 학생기와 가주기를 통해 이룬 경제적인 기반과 가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임한다고해서 임서기(vanaprastha)라고 한다. 임서기는 51세부터 75세까지에 해당한다. 손자가 생기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대개 이 단계가 시작된다고 한다. 마지막 단계인 유행기(sannyasin)는 75세부터 100세까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에는 숲에서 나와 운수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때는 모든 집착을 떨쳐버리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명상한 내용들을 현실 속에서 다시 몸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유행기에는 속세에서의 삶이나 욕망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무소유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바람직하다고 하는 반면 힌두이즘에서는 이러한 세속적인 욕망도 인간의 본능 중 한 부분이라고 인정하고 이를 열심히 성취하도록 권장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욕심이 없는 인간은 드물다. 욕심을 억제하고 억제하여 무위에 이르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자신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을 인정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여기는 힌두이즘의 가르침 역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겠다. 임서기에는 가주기 때 이루었던 부와 지위, 권력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된다. 이때는 다시 세속적인 인생과 사회에서 벗어나 출가 수행자로서의 생활이 강조되는데, 해탈을 위한 수련을 하기 때문에 해탈을 위한 종교적 임무인 다르마가 다시 강조된다. 임서기와 유행기에 들어서면 다시 엄격하고 고달픈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주기 때 다시는 누릴 수 없는 아르마와 까마의 추구가 더 중시되는 것 같다. 유행기때는 임서기 때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와서 그 깨달음을 확인 하는 시기이다. 유행기에 있는 사람들은 ‘유행자’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을 가르켜 ‘산야신’이라고 부른다. 산야신은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 즉 포기한 사람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이거룡 아름다운 파괴 2000:238) 불교와 같이 윤회 사상이 있는 힌두이즘에서의 유행기는 해탈을 준비하는 시기이므로 이 시기에는 네 가지 주요 목표 중 해탈에 해당하는 목샤가 중시된다. 힌두이즘의 언뜻보면 모순된 것 같은 가르침은 큰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다.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이 말은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만큼 보이다고 한다. 경험한 만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사랑을 해보지 않고서 사랑에 대해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서 자신을 포기하는 산야신이 될 수 있겠는가?이러한 힌두이즘적 경험주의는 ‘금욕하라’라고 가 2.3%로 힌두교가 압도적으로 많다.(두산백과사전) 하지만 불교를 믿는 불교신자는 극소수로, 본고장보다 외부의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러한 상황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힌두교와 불교가 각각 어떠한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비교 논의를 해 보고자 한다.‘불교’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대부분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행하고 수련하는, 금욕적인 삶일 것이다. 물론 불교에도 여러 가지 종파가 있어 굳이 산 속에서 수행하지 않아도 되고, 결혼하고 술과 고기를 먹는 종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초기의 불교는 모든 세속적인 것과의 연을 끊고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말한다. 불교신자들은 사회 속에서 종교를 믿고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회 속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하기도 한다. 출가를 한 신자들은 여러 가지 금기사항들과 엄격한 수련 생활을 하면서 지내는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이렇게 불교에서 신도들에게 금욕주의적 생활을 권장하는 이유를 나는 불교의 ‘무신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가 신이자 진리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신이 존재하고, 그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한다. 힌두교 역시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그 중 시바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창시자인 석가모니 역시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고 스스로가 부처님이라는 “一 切衆生 悉有佛性”(일체중생은 모두 부처다운 성격이 있다)라는 가르침을 펼친다. 곧,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ixang/5959827)불교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종교이긴 하지만 불교에서의 최종 목표 역시 깨달음을 얻어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또렷이 기억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억누를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애욕이고 욕망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써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인생의 목표라고 힌두이즘에서는 말한다. 인생의 네 가지 목표 가운데 하나에 까마(육체적 만족)가 속해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이거룡 아름다운 파괴 2000:242) 하지만 불교는 다르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를 개방적이고 바르게 실현해야 부정적이지 않고 올바르게 해소된다고 보는 것이 힌두교의 입장이라면, 불교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숨겨야 되는, 접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하나의 밑 빠진 독으로 보았다. 즉, 이성을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고, 부를 축적하면 축적할수록 자꾸만 욕심이 생겨 더 탐내게 된다는 것이다. 또 초기의 불교 교단에서는 오랫동안 여자 수행자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여자를 ‘성적인 존재’로 보아 부정적인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이거룡 아름다운 파괴 2000:243) 어느 것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억만장자인 사람이 ‘돈’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의 욕망은 바다보다 넓다고 하는 경우도 있듯이 부를 모으고 모아도 부족함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인간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에 따라 그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에게 ‘당신은 깨달음에 대해 아십니까?’라는 말이 통할 것인가? 당장의 생계가 걱정인 사람이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할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온함이 필요.
몽골은 분열되어 혼란스럽던 끼예프 루시를 침략하여 그들을 정복하고, 킵차크 한국을 건국하여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Fact)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위의 사실을 해석하여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몽골의 루시 침략 및 정복, 그리고 점령의 유산에 대해 그들이 각기 어떻게 다르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석의 차이와, 다른 해석이 나온 이유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제일 먼저 출판된 역사서는 플라토노프의 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플라토노프가 ‘루시에 대한 타타르 권력의 영향’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에 앞서 ‘우리 역사에서 이 우연에 대해서는 연구가 불충분한 편이어서 타타르 멍에의 역사적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고 확정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라는 복선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위의 복선을 제시함으로써 어떠한 견해도(타타르의 영향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완전히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 즉, 따따르의 멍에에 대한 논쟁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것을 사전에 명시하고 있다. 플라토노프는 타타르의 루시에 대한 영향을 국가 및 사회 구조에 대한 영향과 문화에 대한 영향의 두 가지로 나누어 전자에 대한 서술을 주로 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공위 상속 제도에 있어서 따따르의 영향은 ‘없었다’라고 보고 있다. 따따르 이전의 루시에서의 공위 상속 제도는 씨족적 방식이었고, 이것은 종종 제한되고 위반되었으며 침략 이후에도 이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히려 타타르 권력은 이러한 관습에 관여하기는커녕 이러한 제도 위반에 수반되는 다툼을 여분의 수입원으로 여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따따르의 태도는 ‘따따르 권력은 의식적인 동기에 전혀 의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어떤 것도 설치하거나 폐지할 수가 없었다.’라고 서술하면서 따따르의 루시에 대한 영향을 부인하고 있다. 공들 사이의 관계변화에 있어서도 플라토노프는 이러한 변화의 원인들이 따따르 이전에도 루시 땅에 작동는 동시에 따따르로부터의 영향을 바랴크인들과 비잔티움으로부터의 영향과 동일하게 제시함으로써 따따르의 영향이 부각되지 않게 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플라토노프의 시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제 1권의 “역사가들은 13세기 중엽부터 사건들의 자연적 연결(중략)을 중단시키고 따따르 시기를 삽입해서 따따르족과 따따르 관계를 가장 중시할 권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요 현상들, 그리고 이 현상들의 주요 원인들이 필연적으로 은폐되는 결과를 빚는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따따르족의 영향은 이렇듯 뚜렷하지 않았다.’라는 자신의 견해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향은 오로지 부정적인 것 뿐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그렇다면 플라토노프는 어떠한 이유로 몽골의 영향을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을까? 플라토노프가 주로 활동했던 시기인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반의 시기에는 ‘민족주의’가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플라토노프도 그러한 국제적인 흐름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던 듯 하다. 실제로 플라토노프는 스탈린시대에 민족주의 활동을 하다가 기소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플라토노프의 삶과 당시의 유행 사상을 고려해 봤을 때, 플라토노프는 러시아적인 시각을 갖고 몽골의 루시 침략에 대해 서술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소비에트 시기에 출판된 스이로프의 에서 스이로프는 몽골의 침략을 언급하기에 앞서 몽골침략 전 루시의 봉건국가들을 높은 수준의 경제와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13세기 초 동시대인에 의해 “오! 희망차고 아름다운 땅, 루시여!”라는 기록을 통해 침략 전 루시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몽고 따따르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몽고군은 교활하고 무자비하였다.’라고 하며 그들의 잔인함에 대해 운을 띄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깔까강의 전투에 대해서는 루시의 공후들은 도움을 주려 하였고 루시의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단합의 부재, 폴로베츠인들과의 튼튼하지 못한 동맹이 승리를 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가 절정에 달하자 뽈로베쯔인들은 도주하였아내가 아이와 함께 자살했다는 것을 서술한 것도 루시인들이 몽골의 폭력과 조롱에 비굴하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스이로프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술자의 의도는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따따르 군대와의 전투에서 완전히 격파당한 랴잔군에 대해서도 ‘따따르인은 대군이었으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루시인 병사들은 1당백, 1당천으로 싸워야만 했다. 랴잔의 군대는 완전히 격파당하였다. 그러나 바투도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라고 묘사하면서 포커스를 랴잔군의 패배보다는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피치 못 할 이유가 존재했다는 것에 두고 있다. 전투 장면의 묘사에 있어서도 ‘랴잔의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도시의 방어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중략) 전투는 밤낮없이 5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루시의 무사들은 따따르인 대열의 한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가 대열을 가르며 힘차게 칼을 휘둘러 적을 무찔렀다.’, ‘예프빠찌 꼴로보라뜨와 그의 용감한 친위대 병사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따따르인들도 수천 명이 죽었다. 꼴로브라뜨의 군대와 싸우고 난 따따르족 장군들은 바뚜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중략) 그렇지만 이렇게 용감한 자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들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라고 묘사하며 전투의 패배보다는 용감하게 싸웠던 루시 주민들과 장군들의 태도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몽고군의 행태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그리고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약탈, 학살, 참혹한, 야만스러운, 겁탈 등등의 단어들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잔인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또한 이들 야만인들은 공후의 가족과 부녀자들, 어린 아이들 그리고 성직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교회를 불태워버렸다.’라는 부분을 삽입함으로서 몽고인들의 잔인함과 종교가 없는 야만인이었다는 측면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스이로프의 서술 방식은 블라지미르의 침략에서도 같은 양상을 띈다. ‘따지휘하였다. 모든 주민들이 조국의 방어를 위해 나섰다. (중략)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화살과 돌, 재, 모래 등을 날랐으며 물과 타르를 끓였다. (중략) 그러나 피의 한도 끼예프 방어군 지도자의 용감함에 탄복하여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라는 묘사를 통해 끼예프가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적들에 대항했던 끼예프 주민들과 병사들의 용맹함을 강조하였다.몽골의 루시 침략 후의 상황에 대해 스이로프는 ‘그러나 루시의 여러 공국의 주민들은 따따르인 침략자들에게 복종을 하지 않고 자주 징세관들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킵차크 한국은 징벌대를 파견하였으며, 징벌대는 봉기를 일으킨 주민들을 참혹하게 징벌하였다.’라고 서술하며 몽골 정복 이후에도 이러한 대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커다랗고 탐욕스러운 거미와도 같이 킵차크 한국은 루시 땅으로부터 모든 생명의 즙을 모조리 빨아먹었다. 루시의 경제는 파괴되었으며, 문화가 꽃피었던 많은 도시들이 폐허로 변하였다. (중략) 몽고 따따르족의 압제는 루시가 서유럽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오랫동안 뒤떨어지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라는 서술을 통해 몽골의 루시 점령의 유산, 즉 몽골의 멍에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원인을 여기서 찾았다. 스이로프의 이러한 한 쪽으로 편향된 시각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출판시기가 CCCP시기였다는 것을 안다면 문제는 쉬워진다. 냉전시대 미국과 대치하던 최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후진적인 아시아의 유목민족에게 지배당했던 세월에 대한 변명과 권위 회복을 이 책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다닐로프의 에서도 몽골의 루시 침략에 대한 스이로프의 와 비슷한, 편향된 시각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강도가 스이로프의 서술에 비해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닐로프는 칼카 강에서의 전투에 대한 묘사를 ‘러시아 공후들의 행동에는 합의가 없었다. 그들은 총사령관을 가지지도 못했고, 그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있 떠났고, 군사령관 페트르 아슬랴듀코비치가 도시의 방어를 지휘했다.’라고 함으로써 지도자의 부재라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몽골에 함락될 수밖에 없었다는, 함락을 합리화 하려는 듯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리고 ‘화재는 가장 귀중한 책들, 성상 그리고 프레스코 벽화를 파괴했다. 많은 사원들이 폐허로 변해버렸다.’라는 서술은 다른 역사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서술로 당시의 시대와 서술자가 어디에 관심을 두었는지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닐로프는 코젤스크 요새에 대해 ‘그때에 몽골인들은 즐겨 쓰는 책략을 사용했다. 즉 몇차례의 습격 후에 허겁지겁 도주하는 척 위장하기 시작했다. (중략)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중략) 바투는 코젤스크를 악의 도시로 불렀고, 그 도시를 파괴하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라고 명령했다.’라고 서술함으로써 스이로프에 비해 비교적 담담하게 몽골군의 비열한 책략을 묘사하고 있다. 끼예프 침략에 대해서도 ‘몽골 군대가 접근해 왔을 때, 자신의 세습영지 방어를 조직하기 위해서 그는 끼예프를 버리고 친위대와 함께 갈리치야로 갔다. 군사령관 드미트리가 끼예프 방어를 지휘했다. 모든 주민들이 루시 도시들의 어머니를 방어하기 위해 궐기했다. 세 달 동안 끼예프인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큰 손실을 입은 대가를 치루고 몽골인들은 도시 점령에 성공했다.’라고 서술하면서 공후의 부재로 인한 최대 전력의 불가피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운 루시 주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 봤을 때 다닐로프는 몽골의 루시 침략을 막을 수 없었던 당시 루시 사회의 모습을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했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저항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다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묘사의 정도만 다를 뿐, 스이로프의 서술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의 루시 점령 유산에 대해서도 스이로프와 비슷한 견해를 보이는데, 다닐로프는 몽골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서술하면서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루시 땅이 킵차크한국에 합병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