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이후 20세기까지의 서양 철학의 주요 흐름1. 독일관념론2. 청년헤겔파3. 유토피아 사회주의4. 마르크스의 철학5. 실증주의6. 반(反)합리주의서론철학이란 것을 배운 적도 없고 접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 하면 누가 떠오르냐,고 묻는 다면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칸트(kant)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칸트는 철학을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이며, 또한 철학사에 있어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기존에 있던 서양철학을 집대성 하고 체계화 시킨 인물이며 후에는 헤겔, 피히테 등 다른 철학자들이 칸트의 사상을 계승받아 비판하거나 변화시킴으로서 근대시대 때 끊임없는 철학의 발전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본문에서는 칸트부터 그 이후의 사상과 그 변천과정을 알아볼까 한다.본문 설명을 위한 전체적인 도표 흐름아래의 도표는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서 본문에 나오는 모든 도표는 이 도표를 기반으로 수정 보완 하여 설명 즉 모든 도표는 근본적으로 이 도표를 따른다.근대철학탈근대주의현대철학관념론유물론실증주의실존주의반대독일관념론변증법적유물론현상학프랑크푸루트 학파칸트에드문드 후설마르크스셸링피히테헤겔청년헤겔파본론칸트 이후의 사상들은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칸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후에 철학적 변천사를 알기 위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아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근대철학은 중세의 신(神)중심의 철학이 막을 내리고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옮기게 된다. 흔히 근대시기를 계몽주의 시기 또는 계몽주의 철학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이때 계몽주의 철학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라는 인문주의적 철학을 이야기 한다. 즉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고 그런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가기 때문에 ‘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통한 지적 혁명의 시기이자 반 종교 투쟁의 시기다. 이 있다. 먼저 피히테는 자아가 스스로 행위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며 이때 그 활동의 산물로 비아라는 것이 산출되게 된다. 라고 주장했다.결국 비아와 자아는 상호작용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아를 통해 산출된 비아와 자아를 통일하는 것이 절대자아다. 절대자아란 ‘순수 자아’며 초개인적인 자아로서 실천적 주관인 이 자아의 본질은 순수한 ‘행동’이며, 근원적인 활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대상의 존재는 승인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체적 자아의 행위와 활동을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객체의 대상성도 오직 주체적 자아의 사행을 통해서만 또 그 안에서 의식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피히테의 관념론은 칸트가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단지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음에 비해 피히테는 인식이나 존재의 근거를 물 자체(절대 자아)의 활동성에서 찾음으로써 칸트의 현상과 물 자체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했다.다음으로 셸링은 피히테의 자아를 기초로 하는 주관적 관념론에 대하여, 근원적인 '절대자'를 인정하는 범신론적인 객관적 관념론을 주장하였다.셸링은 자아와 비아,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 사이에 공통적으로 절대자라는 뿌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절대자를 지적 직관으로 파악하려 하였다.때문에 셸링은 절대자를 주관과 객관에 대한 구별을 포함하지 않는 절대적인 동일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했으며, 이 점에서 셸링의 철학을 동일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셸링의 이러한 입장은 자연과 정신을 동질적인 것으로 보는 자연 철학으로 성립되었는데, 그것의 특징은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파악하는 데 있었다.마지막으로 독일관념론 철학을 완성시킨 헤겔이다. 그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이 지니는 모순과 대립을 지양하여 하나의 철학 체계, 즉 절대적 관념론의 체계로 종합 완성시킨다. 그의 철학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의 모순 대립을 매개하여 통일한 것이며 이 두 입장을 관념론의 웅대한 하나의 철학체계로 종 철학을 제기한 데에 있다. 그의 철학은 뒤에 나올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두 번째 다비드 슈트라우스는 헤겔의 종교철학을 계승하는 방향에서 독특한 그리스도교론을 전개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진리를 구별하고, 그 주장은 신앙적 진리를 전혀 저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정통파 신학자들로부터는 물론, 헤겔학파로부터도 격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문제 제기로 인한 내부 논쟁, 결국에는 대외논쟁을 통해서 헤겔학파는 좌파ㆍ중앙파ㆍ우파로 분열하게 되었다. 저서인 《예수의 생애》(2권, 1835∼1836)에서는 복음서의 예수에 관한 기사는 신앙에 근거한 신화라고 주장, 그 속에서 신 ·인(神人)의 양성(兩性)의 이념을 추구함으로써, 커다란 반향과 아울러 비난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결과 교단 및 종교계로부터 추방되었다.세 번째 브루노 바우어는 무신론자이자 반(反)그리스도자인 헤겔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나팔 및 종교와 예술에 관한 헤겔의 학설로 헤겔의 종교철학에 대하여 슈트라우스보다 더 철저한 비판을 하고 헤겔 좌파(左派)로 전향하였다 앞서 얘기한 세 명의 철학자들은 종교비판 철학자들이고그 다음 네 번째 아르놀트 루게는 1832~1841년 할레대학 강사로 있으면서 《할레연지(年誌)》 등 헤겔 좌파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잡지를 간행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파리로 망명하였다.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알게 되어, 1844년 공동으로 《독불연지(獨佛年誌)》를 발행하였으나, 곧 마르크스와 분열하여 귀국하였다. 1848년 3월 혁명 당시 공화주의자로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활약하고, 잡지 《개혁 Die Reform》을 발행하였다. 혁명에 실패한 후 런던으로 망명, G.마치니와 함께 유럽 민주주의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850년 이후 교직에 종사하면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만년에는 국가주의로 전향하여 비스마르크를 지지하였다.다섯 번째 모제스 헤스는 라인신문의 창간자 중 한명이며 1840년대에는 소위 '진. Saint-Simon(세인트 생시몽), 3. Fourier(푸리에) 4. Robert Owen(로버트 오웬)이 있다. 첫 번째로 에밀 바베프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후로는 부르주아 공화파에 도전하여 법(法)과 신분의 평등뿐만 아니라 교육과 취직의 기회균등을 요구하고, 토지 사유의 제한, 생산물과 배당 ·분배의 국가관리, 재산의 평등 등을 주장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봉건영주의 부정에 통분하여 빈농층의 해방을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물의 국가 관리에 의한 공산주의를 주창했다두 번째 세인트 생시몽은 불로 소득의 계급을 배제하고, 과학과 산업이 지배하는 사회를 종교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이상사회를 실현시킬 것을 구상했다.세 번째 푸리에는 팔랑주(해)(협동조합)를 이상 사회의 단위로 해서 생산을 합리화하고, 소비를 절약하는 전형적인 소생산자 사회를 실현시킴으로써 모든 사회 모순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푸리에의 팔랑주에서 구성원들은 하나의 건물 안에서 살며, 수입을 각자 제공한 노동의 양에 따라 분배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푸리에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사회의 평화적 개조를 이었다.네 번째 로버트 오웬은 인간의 행복은 성격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판단, 뉴라나크의 공장에서 협동사업체를 구성하여 이를 실험하고, 인도주의에 의한 노동자 구제에 힘썼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의 뉴하머니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 뒤 영국으로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을 펼쳤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마르크스의 철학후에 청년헤겔파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가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사상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체계를 성립해갔다. 그는 자연법사상을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성립시키고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문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자연법사상이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면 의식주가 보장되는 자유가 실현되고 있는가를 주장하였다. 이를 쉽게 예로 들자면 인간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는데 그렇다면 ‘실재로도 아무렇게나 거주이학의 방법을 인간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실증주의라고 나타냈다. 실증주의 철학자들은 관찰 가능한 현실적 존재(정신적 부분을 인정하긴 하지만 관찰 가능한 것을 토대로)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하였다. 또한 실증주의는 그 당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후에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후에 사회학 과 논리실증주의 가 등장한다.공리주의공리주의는 실증주의와 같이 프랑스 혁명후의 극도한 사회적 혼란, 도덕적 퇴폐, 무정부 상태 극복을 위한 구체적, 실증적, 경험적, 객관적 행동 기준이 요청됨에 따라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의 문제점인 자유와 평등의 조화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그렇다면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19세기 영국에서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사상을 가리킨다. 공리주의는 쾌락의 계량가능성을 주장한 벤담의 ‘양적(量的) 공리주의’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J. S. 밀의 ‘질적(質的) 공리주의’로 나뉜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나타난 사회사상으로 가치 판단의 기준을 효용과 행복의 증진에 두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실현을 윤리적 행위의 목적으로 보았다. 먼저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는 행복(幸福)이란 쾌락이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 이므로 개개인의 행복은 사회전체의 행복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최대다수의 행복’을 도덕과 입법의 원리로 제시했다. 올바른 행동은 가급적 여러 사람과 많은 사회 국가에 도움을 주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쾌락과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임을 주장했다. 결국 쾌락은 한 가지 종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쾌락이 질적으로 동일하므로 질적인 차이는 없고 양적인 차이만 있다는 것이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이다. 다음 존 스튜어트 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