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사 관련 지도 비교·분석- 『아틀라스 중국사』를 중심으로< 목 차 >주제지도쪽수1. 상과 주변의 청동기 문명들16쪽 지도1쪽2. 서주의 봉건제18쪽 지도3쪽3. 춘추 시대 패자의 회맹 질서21쪽 지도4쪽4. 전국시대 각국의 개혁22쪽 지도6쪽5.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사상26쪽 지도7쪽6. 진의 제국 통일28쪽 지도8쪽7. 군현제의 실시와 제국의 형성32쪽 지도10쪽8. 흉노의 성장35쪽 지도11쪽9. 염철 전매와 평준균수법37쪽 지도13쪽10. 장건의 서역 원정39쪽 지도14쪽1. 상과 주변의 청동기 문명들(16쪽)역사1(미래엔) 29쪽 세계사(교학사) 33쪽① 본문 주요 내용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1899년 발견된 갑골문과 1920년대 시작된 하남성 안양의 고대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결정적으로 갑골문(甲骨文)에서 ‘상(商)’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어 그 실체가 명확해졌다. 갑골문에 따르면, 상은 대소사를 점복을 통해 신의 뜻을 물어 행하는 신정 정치를 실시하였으며, 신에게 융숭한 제사를 바쳤다고 한다. 상의 정치적 영향력은 유물, 유적으로 추정해보건대 양자강 중류 호북성에서부터 산동, 하북, 섬서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그러나 당시 상이 위치한 중원 외에도 각 지역에서 청동기 문명이 성장하고 있었다. 양자강 중류의 오성 문화, 사천정의 삼성퇴 문화 등에서 다른 지역과 차별이 되는 청동기 문화가 발견되었다. 중국의 청동기 문화의 다원성을 짐작할 수 있다.② 지도 분석 및 비교- 교과서 지도를 봤을 때 상, 주의 영역만 비교하여 표시되고 있음. 기존부터 중국은 단일한 하나의 문화권 혹은 국가 체제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음.- 아틀라스 중국사에 나온 것처럼 중국에도 이질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했으며, 이는 중국에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음을 반영할 필요가 있음.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를 재단할 우려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함.- 상, 주의 중심지였던 중원 지역의 지리적 위치와 의미에 대해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음.2. 서주의 봉 삼고 각지에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봉건제란 왕이 제후에게 땅과 백성에 대한 통치를 일임하는 대신, 제후는 왕에게 경제적 공납과 군사적 보호의 의무를 지는 통치 제도를 말한다. 서주는 왕실 주변에 종친을 배치하고, 공신들은 각지에 분봉하여 군사적 지배를 확대해나갔다. 당시 각 제후국들은 도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지역 정도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읍국가였으며, 각 제후국은 지역의 습속과 전통에 맞춰 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다.서주의 봉건제는 왕과 제후의 관계가 혈연에 기초한 종법 관계로 맺어져 있어, 왕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왕과 제후의 관계는 경, 대부, 사 사이에서도 이어져, 피라미드 형식의 봉건 질서로 정착한다. 이러한 서주의 봉건제도는 서양의 계약적 봉건제와는 ‘혈연’을 매개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주(周)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 시대(戰國時代)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인 『주례(周禮)』에 의하면 관료들의 체계 정비가, 『맹자(孟子)』에 의하면 정전제라는 토지제도가 등장하나 후대의 윤색 등을 고려했을 때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② 지도 분석 및 비교- 지도를 통해 주대 봉건제가 ‘혈연관계’에 기초한 봉건제의 특성을 갖고 있음을 유추하기 어려움.- 동성 제후와 이성 제후의 차이점(봉지, 작위, 역할 등)에 대한 구분이 추가되었으면 함.- 제후들의 분봉 지역을 나열식으로 표기하기 보다는 주요 제후국들의 위치와 역할을 부각하는 편이 지도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함.3. 춘추 시대 패자의 회맹 질서(21쪽)동아시아사(천재교육) 33쪽 세계사(교학사) 43쪽역사1(미래엔) 200쪽① 본문 주요 내용혈연에 기초한 종법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던 서주의 봉건제도는 초기에는 결속력이 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통치 체제 전반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서주 유왕(幽王) 때 왕위 계승 문제로 서주는 멸망하고,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겨 동주가 건국되었다. 동주 시기의 전반에 해당하는 시기를 춘추(春秋) 시대라고 하는데, 이 명칭용으로 화북 지역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이 과정에서 읍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각 제후국들은 이들을 장악하여 세역과 군역을 부과하면서 직접 지배하는 중국 고대사의 전형적인 통치 방식으로 이행해 가고 있었다.② 지도 분석 및 비교-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의 지도를 합쳐 게시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경우 지도가 난해하고, 춘추전국 시대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초래함.- 춘추 5패와 전국 7웅의 역할이 다른데, 이 점에 대해 분명한 구분과 설명이 추가되었으면 함.- 전국 시대 중국의 전반적인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구체적인 설명과 도움자료가 필요함.4. 전국 시대 각국의 개혁(22쪽)① 본문 주요 내용춘추 시대가 끝나고 전국 시대가 시작되는 기점은 주로 진(晉)이 한(韓)?위(魏)?조(趙)의 세 나라로 분열되는 시기로 잡는다. 전국 시대는 오로지 강한 국력을 가진 자만이 전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약육강식?적자생존의 세계였다. 전국 시대 군주들은 권력을 강화하고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주를 중심으로 지배 체제를 개편하고 부국강병의 지상과제로 삼았다.모든 국가에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개혁은 상앙(商?)이 진행한 개혁(변법)이었다. 이 개혁의 방향은 먼저 옛 질서와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데에 집중되었다. 이는 백성들을 파악하고 지배하였던 십오제(什伍制), 전국을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파견해 중앙 집권을 추구한 군현제가 대표적인 정책이다. 이를 통해 씨족 공동체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부국강병에 필요한 세금과 병역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상앙은 개혁의 추진을 위해 귀천을 막론하고 법령을 준수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상앙의 개혁은 체제의 정비로까지 확대되었다. 소위 ‘편호제민지배체제’로 불리는 이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토지 국유와 이에 기초한 수전제도(授田制度)였다. ‘폐정전(廢井田), 개천맥(開阡陌)’이라는 기록처럼, 상앙은 재산과 지위가 균등한 제민(齊 본문 주요 내용춘추전국 시대에는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편 전국 시대 군주들은 부국강병 정책을 도울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은 많이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형태의 지식이 요구되었다.그리하여 매우 다양한 사상이 출현했는데, 그것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른다. 이 사상 전체의 중요한 특징은 첫째, 인간 중심 사상 그리고 합리적인 사상이라는 점이다. 둘째, 이 사상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치 참여에 있었다는 점이다.대표적인 사상으로 유가, 법가, 묵가, 도가가 있다. 유가는 예악과 인의를 중심으로 한 교화를 주장하였고, 법가는 법률에 의한 통치를 확립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묵가는 사치와 낭비를 부정하며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였고, 도가는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의 존재와 무위자연을 설파하였다.② 지도 분석 및 비교- 각 사상별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지도임. 지도가 계통적인 반면 난해한 측면이 있음.- 사상가들의 이동이 어떤 사회,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함.- 지도를 분할하여, ‘유교 사상의 전파와 영향’, ‘법가 사상의 확산과 진의 성장’ 등 사상별로 지도를 분할하여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됨.6. 진의 전국 통일(28쪽)세계사(교학사) 45쪽 역사1(미래엔) 203쪽① 본문 주요 내용전국 시대 때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막대한 물자와 인적 손실이 나타났다. 사회 곳곳에서는 통일에 대한 바람이 커졌고, 이는 여러 제자백가 사상에도 반영되었다. 역설적이게도 통일을 위해서는 또 다른 전쟁, 의전(義戰)이 필요했고 이 의전을 성공리에 완성한 국가는 진(秦)이었다.전국 시대 후반 연의 침공으로 인한 제의 몰락으로 진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통해 제를 고립시키고, 한?조?연교류와 교통 상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됨.7. 군현제의 실시와 제국의 형성(32쪽)① 본문 주요 내용춘추 시대 말기에 설치된 초기의 현(縣)은 기존의 국(國)을 멸망시키고 유력 세족들에게 분배됐다는 측면에서 봉건 체제의 씨족 질서를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방식이었다. 이후 전국 시대에 강력한 군주 권력의 출현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물적 기반이 필요해지면서 현은 군주의 직할지로 변모했다. 진시황은 이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였다. 하지만 진(秦)의 군현제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었고, 지역의 특성과 발전 단계에 맞추어 차별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그런데 진(秦) 말에서 한(漢) 초에 이르는 시점까지 각지에 옛 6국에 지역 할거의 전통이 남아있었다. 때문에 한(漢) 왕조를 세운 유방(劉邦)은 지방 행정 체계를 이분화하였다. 즉 수도와 근기(近畿) 지방에 황제 직할의 군현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옛 6국 지역에는 제후왕을 봉건하는 봉건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른바 군현제와 봉건제가 혼합된 군국제라 부른다.하지만 중앙 집권 체제로 이행될수록 제후왕을 제거하려는 중앙 정부의 방향성은 분명했다. 한 고조 시기 이성(異姓) 제후들을 대거 제거하였고, 이후 황제들은 동성(同姓) 제후들에게도 제거의 칼날을 겨누었다. 결국 조조(晁錯)의 제후왕 영지 삭감책에 불만이 폭발하여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발발하였다. 그 결과 제후왕들의 권한은 급격히 약화되었다.최종적인 마무리는 한 무제시기에 이루어졌다. 제후왕 사후 봉지를 분할하여 제후국을 축소시킨 추은령, 종묘 제사에 헌상할 황금의 양과 기준을 정하고 미달하면 처벌하는 주금율,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제후왕의 죄를 보고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아당률, 백성이 제후왕과 함부로 군신 관계를 맺지 못하는 좌관율 등이 이 시기에 시행되었다. 그 결과 제후왕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군국제는 군현제로 개편되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중앙 집권 제국이 형성된 것이다.② 지도 분석 및 비교- 군국제 실시하 봉건제와 군현제 실시 지우이다.
서양고대사연구 과제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석사과정 김준기A20160296로마 공화정기 기사신분의 사회이동< 목 차 >내 용책 쪽수과제 쪽수1. 서언397~398쪽1쪽2. 기사신분의 성장398~413쪽1~2쪽3. 신분으로서의 성격과 직업413~424쪽3~4쪽4. 사회이동과 그 의의424~430쪽4~5쪽5. 결어430쪽5쪽1. 서언- 로마의 기사신분에 대한 연구는 183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분야임.- 본고에서는 다만 계층 간의 사회이동이 사회의 유지에 매우 중요하며 특히 중간 계층의 역할이 주목된다는 점에 착안함.- 로마 공화정의 체제 유지 측면에서 기사신분의 사회이동이라는 측면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함.2. 기사신분의 성장1) 기사신분의 유래- 고대 로마에서 기사(equites)의 기원에 관해서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음.- 몸젠(Th. Mommsen)에 의하면, 기원전 534년 세르비우스 왕의 개혁에 의해 기병의 켄투리아가 평민에게 개방되었다고 함.- 본래 귀족으로 구성된 켄투리아는 6표(sex suffragia)로, 추가된 12개의 켄투리아는 ‘기사 켄투리아’로 불림.- 그러나 이들 기사들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 로마 기사(equites Romani)란 처음부터 군사적 중요성이 크지 않았으며 후에는 사회적인 신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뀜.2) 공화정 초기 기사신분의 성장- 로마 기사들은 로마의 팽창으로 지중해의 주도권을 로마가 장악하면서 성장해 나감.- 기사신분이 자신들보다 상위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들보다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① 브런트(Brunt)의 말처럼 고대인의 관심은 정치적인 것에 있었고, 이 때문에 기사들의 영리활동을 혐오했었다고 볼 수 있다.② 로마의 팽창에 비해 국가의 행정력이 미흡했다. 특히 재정분야에서 이런 문제가 심화되자 푸블리카니(publicani)라고 불린 조세징수청부업자로 기사신분들이 진출하였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복속된 속주들은 기사신분들을 과정에서 조세징수청부업자의 착취가 반발심을 낳자 원로원은 속주법(lex provinciae)을 명문화하여 청부업자가 방목세와 관세의 징수만 담당하게 함.- 전통에 따라 비교적 원만했던 기사와 원로원의 관계는 그라쿠스 형제의 시기에 변화를 맞이함.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lex agraria)를 제정하면서 재정수요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고자 함.- 한편 기원전 129년 평민회의 결의로 원로원 의원이 보유한 공마(公馬)를 반환하게 하면서 기사와 원로원의 구성원이 엄격히 분할됨. 기사 신분은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하게 됨.-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속주 아시아에 관한 법(lex de provincia Asia)’을 제정하여 십일세, 방목세, 관세 등의 징수권을 청부업자에게 임대함.-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개혁 정책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고, 경제적 이익을 통해 기사신분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속주의 반발이라는 위험부담마저 무릅씀.- 나아가 그는 아킬리우스 법(lex Acilia)을 제정하여 ‘부당취득물 반환법정’의 배심원직을 기사신분에게 넘김.- 마이어(Meier)는 그의 의도가 원로원을 견제하고 새로운 지배층을 창출하여 원로원을 재구성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하며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입장을 옹호함.- 그러나 실제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시도는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함. 기사신분은 오히려 원로원 의원 및 정무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으므로 그의 개혁에 소극적으로 응하였기 때문임.- 가이우스 그라쿠스 사후 배심원직을 놓고 원로원과 기사신분의 알력이 벌어짐. 두 세력의 갈등은 술라의 집권 후 기사신분이 많은 희생을 당하고, 원로원의 권한은 강화하면서 일단락됨.- 그러나 내전과 동맹국 전쟁 등으로 원로원 체제는 개편이 불가피했음. 기원전 70년 아우렐리우스 법(lex Aurelia)이 제정되어 배심원의 구서에서 원로원 의원, 기사신분, 트리부니 아이라리이가 동등한 비율로 결정권을 가지도록 함.4) 공화정 후기 기사신분의 성장- 기원전 60년대에 가비니우스가 해적을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청부업자의 임대료를 삭감하여 주고, 술라에 의해 처벌된 자들의 자손들을 복권시키며 다수의 기사신분을 충실한 지지자로 만듦.- 카이사르의 피살 후 옥타비아누스는 기사신분의 지지를 얻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둠. 이들은 공화파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체제에 순응하는 편이었음.- 크게 보아 기사신분은 로마의 지배층으로서 원로원의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다 제정기의 관료 기구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음.3. 신분으로서의 성격과 직업1) 기사신분의 사례로 살펴 본 오르도의 용례 ? 경제적 측면에서- 기사신분은 경제적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반면 정치 활동에는 매우 소극적이었음. 이런 그들의 태도는 그들의 직업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임. 따라서 기사신분으로서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음.- 기사신분에서 ‘신분’은 본래 라틴어인 ‘오르도(ordo)’를 번역한 말임.- 세르비우스의 병제(兵制)에 따르면 평민은 호구조사에 따라서 5개의 등급인 ‘클라시스(classis)’로 구분됨. 이 체제는 최상부에 기사인 ‘에퀴테스’를 두고 최하부에는 ‘프롤레타리이(proletarii)’를 두어 경제적 구분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임.- 그러나 핸더슨(Handerson)은 로마 공화정 후기에 기사신분은 재산에 의해서 자리 매겨진 이후 하나의 세습된 신분으로 남았다고 주장함.- 이를테면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재산자격을 철폐하면서 나타난 로마의 군대편성 변화, 기원전 167년 전쟁세인 트리부툼(tributum)의 부과가 중지되어 군역과 조세부담의 상관관계가 사라진 것인 그 예임.2) 기사신분의 사례로 살펴 본 오르도의 용례 ? 사회적 측면에서- 공화정기에 이 오르도가 일관되게 경제적 계층을 지칭하는 의미라고 보기에는 의문이 남음.- 일반적으로 기사가 되기 위한 재산자격은 대개 400,000세스테르티이(sestertii)로 추정됨.- 브런트의 의견에 따르면 이 액수는 그렇게 높은 액수는 아니었음. 결국 오르도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자 일반을 통칭하는 즉 공공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지위가 부여된 단체, 국역의 수행자라는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음.- 기사신분은 청부업자 등 국가 유지에 필요한 조세징수의 책임을 지고 있었으므로 공적인 기능을 지닌 집단으로 파악해야 함.- 이 점을 고려하면 기사신분을 비롯한 여러 오르도들이 더욱 체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음.4) 오르도로 분류된 기사신분의 성격 ? 사회·경제적 지위를 중심으로- 기사신분은 재산 소유보다는 국역의 수행에 따라 규정되지만, 이들은 한편으로 부유한 유산자층이기도 함.- 기사신분은 보통 청부업자, 대금업자 등 상인으로 전문직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으로 사업가로 이해됨. 하지만 이런 통념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고대세계에서 토지는 치부의 수단이었으며, 기사신분도 토지소유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음.- 니콜레는 사료상 기원전 4세기 말부터 기원전 43년까지 기사신분으로 확인된 370명의 직업을 분석함. 기사신분의 직업분포직업인원비율(%)직업인원비율(%)토지소유자6016*배심원174상업·대금업4612자유직업**5112청부업154관리인103정무관·시의원267미상35주) * 실제로는 80% 이상일 것으로 추정됨.** 법률가, 변호사, 작가, 웅변가 등의 지식으로 다른 범주와 중첩됨.- 사료상으로 밝혀진 범위라는 한계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기사신분에게 토지소유자로서의 생활기반이 우선이었음. 오히려 청부업에는 비교적 제한된 비율만 참여함.- 이런 경제적 기반을 고려한다면 기사신분이 보수의 입장을 견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음.- 앞 장에서 기사신분이 군사적 편제와는 무관함을 밝혔으나, 니콜레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 로마인은 누구나 훈련받은 전사로서의 시민이었으며, 사회와 군대가 불가분의 관계였음.- 이런 특징이 공화정 후기에 들어서 크게 달라지기는 했으나 로마의 전역사에서 지배층에게 군역수행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었음.- 원로원 의원의 아들일지라도 그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면 군복무의 과정을 이수해야 했음. 이들에게는 장교의 직책에 해당 평민의 사회이동의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음. 반면 핀리(Finley)는 귀족의 지배체제는 하층민의 암묵적인 동의가 없어서는 유지되기 어렵다는 지적을 함. 천부장 역임자의 사회적 진출시기(기원전)친척들의 사회적 지위(천부장직 진출 이후)합계콘술원로원 의원기사509~21974-11218~13488218133~823361281~49115112749~30131519합계30233487- 본고에서는 이미 로마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기사신분의 신분 상승 가능성이 열러 있음을 확인함.- 수올라티의 연구 결과 기사신분의 출신자들이 군직을 발판 삼아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상위의 신분으로 승진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한편 원로원 귀족가문의 사정을 비추어 봐도 기사신분의 신분 상승은 필요한 일이었음. 홉킨스의 연구에 따르면 로마 귀족가문은 낮은 출산율로 인하여 가계가 끊어질 위험이 상존하였다고 함. 또 균분상속제의 풍습, 독신의 유행, 전쟁과 내분으로 인한 사망 등으로 지배층은 상당한 소멸을 겪음.- 이런 사정으로 지배층은 인원이 부족하였고, 고비마다 기사신분을 새로운 성원으로 충원해야만 했음.2) 기사신분의 사회이동이 촉발한 로마의 사회이동- 기사신분의 숫자가 고정되어 있고 이들 중 일부가 신분상승을 했다면 여석을 누군가가 채울 필요가 있음.- 그 역할을 평민이 맡았는데, 평민의 신분상승은 군복무 기간 중에 가능하였던 듯함. 이런 생각이 맞는다면 군사적인 공적을 세운 사람은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라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함.- 니콜레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위상승을 도모할 수 있었던 군대가 오히려 사회보다 더욱 민주적이었다는 역설을 제시함. 그는 평민으로 오를 수 있는 계급인 백부장이 바로 기사신분과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함.- 이런 과정을 거쳐 기사신분이 된 평민들은 비교적 높은 신분상승을 함. 기사신분 출신 천부장 75명 중 15명이 원로원 의원으로, 파견대장은 35명 중 7명이 원로원 의원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군대의 복무과정을
서양고대사연구 과제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석사과정 김준기A201602962부 공화국과 이탈리아 동맹국로마공화정기 이탈리아 동맹국의 사회구조와 토지보유 관계- 통일의 사회?경제적 지평< 목 차 >내 용책 쪽수과제 쪽수1. 서언131~134쪽1쪽2. 동맹국의 군사력 기여와 동화134~143쪽1~3쪽3. 이탈리아 동맹국에 대한 로마의 공유지 정책143~160쪽3~7쪽4. 토지보유 관계(關係)와 군사비 부담 체제160~172쪽7~9쪽5. 결어172~173쪽9쪽1. 서언동맹국전쟁(기원전 91~87) 이후 과거 피지배자이던 이탈리아 동맹국의 시민이 로마 시민이 되면서 로마 정치체제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새로운 시민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하여 나타난 트리부스 등재와 확대 문제는 이탈리아 반도 통일 문제가 결코 쉽지 않았음을 입증하였다. 정치적 갈등에서 사회 전 부문의 갈등으로 확대된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살펴볼 문제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이다. 이를테면 로마시민권의 수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농지소유권과 관련된 문제이다. 일단 시민권의 수여가 이루어지면 동맹국 시민들이 점유하고 있는 로마의 공유지가 로마 시민의 그것과 마찬가지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순리였다. 이 경우 국가의 공유지가 크게 침식되어 재정상의 여러 어려움이 초래될 것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되는 경제적 혼란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료는 침묵하고 있다. 침묵의 논증에 의하면 그런 문제는 야기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전해주는 사료가 미비한 상태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가설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이전에 로마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던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많았으나 실질적인 통일을 위한 정책은 마련되어 왔고, 동맹국 전쟁은 그런 결과를 앞당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맹국에서 원활한 군역의 동원이 로마에 긴요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기원전 111년 제정된 농지법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토가를 입은 자들에 관한 규정으로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징집하던 동맹국 또는 라틴인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련하여”이 규정은 동맹국 일반에 적용되는 규정으로 봐야 하므로, 이에 표현된 어휘를 검토하는 것이 동맹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선 ‘동맹국 또는 라틴인’이라고 번역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탈리아 땅에서(in terra Italia)’라는 규정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 내의 라틴 동맹국과 일반 동맹국으로 범위를 한정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징병과 관련된 규정으로 ‘토가를 입은 자들의 양식(formula togatorum)’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로마 및 라틴 문화에 동화된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농지법의 이 규정은 이탈리아인에게 널리 확산된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규정은 동맹국에 대한 표현이다. ‘동맹국이나 라틴 이름을 가진 자’로 번역한 ‘socii nominisve Latinum’라는 말도 라틴인과 이탈리아인이 통합되어 가는 중에 나타난 언어변화의 산물이다. 한편 이 표현의 법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논쟁이 제기된 바 있다. 몸젠을 따르는 전통적인 견해는 라틴인이라는 종족적 관계와 동맹국이라는 로마와 조약을 맺은 기타 이탈리아 국가와의 관계를 의미하므로 동일한 차원에서 언급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호이스(Heuss)는 종족을 달리하더라도 동맹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괼러(Gohler)는 기원전 2세기에는 이미 로마와 이탈리아의 통일체가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나아가 카탈라노(Catalano)는 이탈리아라는 관념이 이미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민족을 초월한 것으로서 형성되었다고 보았다.이런 주장들을 따른다면, 적어도 이탈리아 반도 내 라틴 및 이탈리아 동맹의 법적인 상태는 실질적으로 단일화 되어 왔으며, 농지법은 이 같은 관념을 표현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즉로 보인다. (왜냐하면) 면세된 농지와 과세된 (농지)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여기에 근거해 베버는 농지구획의 방식과 과세의 유형에 따라 3가지의 농지유형을 구분하였다. 이를 필자가 로 구성하였다. 물론 이런 구분은 베버의 이상형적 구성임을 전제해야 하며, 실제 토지구획이 정연히 실시되었는가는 의문이다. 다만 동맹국 보유의 농지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농지의 분할과 법적 지위분할 방식관할 관리처분방식토지소유권의 성격스캄나(scamna)와 스트리가(striga)호구조사관임대(locatio)공유지+용익권경제지조(limites)를 지닌 정방형의 구획(laterculi)재무관매각(venditio)사유지+하위 권리 부여켄투리아(centuria)를 통한 할당수여사유지+완전소유권 부여에서 스캄나나 스트리가는 가로 대 세로의 비가 1:2 혹은 2:1로 된 형태의 농지이다. 켄투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의 형태는 각각 상이한 종족적 기원을 지니는 것으로 베버는 인식하고 있다. 이를 테면 오블롱가(oblonga, 길고 가는 장방형 농지)라고 불리는 농지측량의 형태는 그 측량의 기원을 에트루리아로부터 찾기도 한다. 베버는 이렇게 기원을 달리하는 농지측량의 형태가 행적적인 관점에서 로마에 의해 채용되었다고 본다. 이탈리아 동맹국 지역의 기존 경지구획을 반영하였고, 크게 보아 동맹국의 사정을 십분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다.토지의 구분과 관련해 베버는 과세 여부를 또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호구조사시에 ‘모두스(Modus)’ 즉 규모라고 보고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두스는 원래 게르만의 농업에서 나타나는 소위 후페권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12표법 이후 2년의 시효취득과정을 통해 최상의 권리가 부여된 사유농지를 가리키며, 개인재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런 농지에는 국가가 농지세를 부과하지 않으므로 행정상 경계를 파악할 필요가 없다. 이 농지를 매각하는 경우 최초 소유자가 지닌 동일한 양식의 매각증서를 제시사적인 소유와 공유지의 점유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완전 소유권과 같은 권리를, 후자의 경우 벡티갈을 지불하도록 하였다고 보고된다. 막스 카저의 의견에 따르면 이 같은 관계는 로마와 동맹국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로마는 동맹국전쟁 이전에 이미 정책적으로 동맹국의 토지관계를 로마의 것과 유사하게 만들고, 이를 확산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음을 교재의 법조문을 통해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그러면 이런 토지보유의 관계는 동맹국전쟁 이후에 어떤 식으로 변화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는 로마로 편입된 동맹국의 경우를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최고(最古)의 사례로 가비이(Gabii)를 들 수 있다. 이곳은 별도의 주권을 가진 라틴 도시로는 나타나지 않으며, 기원전 331년(?)에는 로마시민의 권리를 부여받은 자치단체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곳은 로마의 시민이 지닌 농지와 다른 방법으로 측량되었는데, 이 농지는 ‘미구획지(ager arcifinius)’로 기술되어 있다. 기원후 2세기경 아게니우스 우르비쿠스의 주석을 보면 이 농지의 성격이 다소 분명해진다.”미구획지는 적에 근접해 있다는 데에서부터(arcendis) 명명된 것이다. … 어떤 시기에 적들이 두려워하여 그곳으로부터 도망하여 승자인 사람들에 의해서 점령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점령지(occupatorius ager)라고도 이야기된다. 당장 경작할 수 있는 양만큼 각 사람이 선점하였을 뿐 아니라, 경작하고자 하는 희망에 따라서 원하는 만큼 차지하였다. 참으로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경계를 다음과 같은 표지들로써 나누었다. 손으로 만든 배수구, 앞에 놓여진 나무들,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들의 만나는 점과 산등성이에 의해서이다. 이런 경계들은 바로 그 명칭에 의해서 파악된다. 왜냐하면 경계들은 계속성 그 자체에 의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천둑, 때때로는 통로에 의해서 또는 지역의 성질이나 잘 고안된 오랜 시설물이 확보하고 있는 다양함에 의해서도 파악된다.“이런 측량방식은 로마시민의 소유나 점유 토지와 관련 있는 농지책적 고려는 라틴식민시의 건설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로마는 법적으로 하나의 자치국가로 존재한 라틴식민시에서 토지보유의 규모를 차등화함으로써 의도적으로 2~3개의 범주로 계층분화를 조성하였다. 이는 로마와 같은 계층 구조를 라틴식민시에도 유지하고자 하는 정책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라틴식민시의 경우를 살펴보자. 라틴식민시에서 기병과 보병의 토지 보유식민시명연도보병기사수토지보유수토지보유Copia기원전 1933,00020유게라30040유게라Vibo기원전 1923,70015유게라30030유게라Bononia기원전 1893,00050유게라?70유게라새몬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토지보유의 차이를 가져온 목적은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계층으로 복무할 지방 귀족을 창출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니발 전쟁 기간 군역의 부담을 짊어졌던 동맹국의 사정을 고려하면, 라틴식민시 또한 군사적인 기여가 가장 중요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라틴식민시를 포함한 동맹국의 군대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을까? 폴리비우스는 다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봉급으로 보병을 하루에 2오볼로스를 받고, 백부장은 2배를 받으며, 기병은 1드라크마를 받는다. 보병에 대한 군량보급은 한달에 2/3메딤노스이며, 기병은 보리 7메딤노스와 밀 2메딤노스를 받는다. 동맹국의 병력 중에서 보병은 동일한 양을 받으며, 기병은 밀 1과 1/3메딤노스와 보리 5메딤노스를 받는다. 이러한 보급은 동맹국 병사들에게는 무료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로마인의 경우에는 재무관이 군량과 피복 및 추가된 장비의 값을 봉급에서 공제한다.“위의 기사에 따르면 하나의 지휘체제하에 있지만, 로마인 병사와 동맹국 병사에게는 상이한 봉급체계가 적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로마인 병사는 정규적인 봉급을 받고 일정한 비용이 공제되었던데 비해서, 동맹국 병사는 군량을 무료로 받는 대신 로마로부터는 봉급이 지불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의 봉급제도가 도입된 것이 장기적인 전쟁의 수행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같은 맥락에서 동맹국 병사에게도 봉급지
한국근대사 발표『갑오(甲午)?을미(乙未)개혁』< 발표자 >< 목 차 >내용쪽수1. 서론12. 1894년 ~ 1896년 주요 사건 연표23. 동학농민운동의 발발과 교정청 개혁기34. 제 1차 갑오개혁의 배경과 전개45. 제 1차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56. 제 2차 갑오개혁의 배경과 전개67. 제 2차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78. 제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의 배경과 전개89. 제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의 개혁 내용910. 갑오?을미개혁의 실시상황1011. 임용시험 기출문제1112. 결론1213. 참고문헌12한국근대사 발표 『갑오(甲午)?을미(乙未)개혁』1. 서론1) 갑오?을미개혁의 정의(1) 광의 :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일어났던 조선왕조 내 일련의 일본 내지 서구지향형 근대화운동(2) 협의 : 1894년 7월 27일에 설치되어 12월 17일에 폐지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개혁 의안(議案)을 심의·채택하면서 추진했던 개혁활동(갑오 제 1차 개혁)2) 갑오?을미개혁의 추진 배경1894년 봄 전봉준(全琫準)의 고부농민봉기에서부터 시작된 제1차 동학농민전쟁과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일본이 도발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다.3) 조선의 정계 상황조선이 갑오?을미개혁을 추진할 당시 조선의 정계는 다음과 같은 정파들이 활약하고 있었다.정파성향의존 외세주요인물활약민씨 척족1885년부터 1893년까지 청과 민비의 세력에 의존하여 정권을 장악했던 세력.청(淸)민영익(閔泳翊)·민종묵(閔種?)·민병석(閔丙奭)·민영위(閔泳緯)·민세호(閔世鎬)·민영환(閔泳煥)·민긍식(閔肯植 또는 민형식(閔炯植)) 등?갑오개혁 당시 숙청대상?갑오 3차 개혁 이후 정계에 복귀함갑오파(甲午派)민씨 척족 세력에게 핍박받던 반청(反淸)·반민(反閔)의 불평세력.일본(日本)김홍집(金弘集)·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조희연(趙羲淵)·유길준(兪吉濬)?안경수(安?壽)·김가진(金嘉鎭)·권형진(權瀅鎭)·김학우(金鶴羽) 등?갑오개혁 내각의 주요 인물 배출1894.05.08. (양) 06.11)까지의 기간① 강경 대응 : 황토현 전투 패배 이후 최정예 강화영(江華營) 병사들을 투입함.② 청군에게 파병 요청 : 민영준의 주장으로 청군에 파병을 요청함. 톈진조약에 의거, 일본에도 통보됨.③ 전주화약의 체결 : 청?일 양국의 군사개입 소식에 정부와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됨.④ 자주적 개혁의 준비 : 동학농민운동의 여파를 수습하고 청?일 양국에 대항하기 위한 개혁을 준비함.2) 청?일 전쟁 중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1)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상륙 : 청군이 아산만에(05.09 (양) 06.12), 일본군이 인천에(05.07, (양) 06.10) 각각 상륙함. 특히 일본군은 조선의 만류에도 서울로 진입함.(2) 일본의 내정 간섭 : 일본은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력으로 조선에 개혁을 강요함(노인정 회담).(3) 일본의 공동 내정개혁안 발의 제안 : 청?일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청에게 공동 내정개혁안 발의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함. 이후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돕는다는 구실로 이권 침탈에 박차를 가함.(4) 갑오변란(경복궁정변)의 발발(1894.06.21. (양) 07.23) : 주한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와 서울에 주둔하던 혼성여단을 이끌던 중장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본국의 승인 없이 경복궁을 점령함.(5) 청?일 전쟁기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 방안 : 대청 선전포고 1달 후 ‘을’ 안을 채택함.(갑) 조선을 명실 공히 독립국으로 처치(處置)할 것.(을) 조선을 명의상 독립국으로 공인하되 제국이 간접·직접으로 영원 혹은 장기간 그 독립을 보익(保翼)·부지(扶持)하여 타(他)의 모(侮)를 막아내는 노(勞)를 취할 것.(병) 일·청 양국이 조선영토의 안전을 담보할 것.(정) 조선을 구주의 벨기에 혹은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 것.≪日本外交文書≫ 27-1, 문서번호 438, 647∼649쪽3) 교정청 개혁기(1894.06.11.(양 07.13) ~ 06.21(양 07.23))( 8월 4일(양 9월 3일) 봉기 이후 강경책을 펼침. 이후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연합군인 ‘동학정토군’이 동학농민군을 공주 우금치에서 패퇴시킴.② 국내 정세의 변동 : 대원군이 애적손(愛嫡孫) 이준용(李埈鎔)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고종이 거부함. 이에 대원군파는 청군?동학농민군과 내통하며 반일활동을 전개함. 결국 8월 22일 경(양 9월 21일) 대원군파가 군국기무처에서 제거되고 주한공사 이노우에 카오루에 의해 대원군이 실각함.(4) 제 1차 갑오개혁의 종료 : 이노우에 카오루가 주한공사로 파견되면서(1894.09.17. (양 10.15)) 대원군파를 실각시키고 갑신파의 복권을 중재함. 이후 군국기무처를 폐지(11.21, 양(12.17))하고 새로운 내정개혁을 권유함.5. 제 1차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1) 제1차 개혁의 내용핵심내용세부내용(1) 대외관계의 개혁반청?친일적① 금후 국내외의 공사문첩에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쓸 것.② 국내외 문자 중 구문(歐文)을 모두 국문으로 번역할 것.③ 청과 조약 개정 후 특명전권대신을 열국에 파견할 것.④ 일병(日兵) 주둔은 청군 방비를 위함이므로 안심할 것.(2) 동학 ‘비도’에 대한 대책회유책↓강경책① 동학의 폐정개혁안을 일부 수용할 것.② 동학위민에 대해 은위겸행(恩威兼行)할 것.③ 동학을 ‘비도’로 규정하고 토벌할 것(9월 경).(3) 정치·행정제도의 개혁근대적 일본식 관료제도 도입왕권 견제① 중앙관서를 궁내부-의정부-8아문제로 개편할 것.(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공무?군무?농상아문)② 궁내부와 의정부 사무를 분리할 것.③ 과거를 폐하고 새로이 선거조례(選擧條例)를 정할 것.④ 18등급의 관제를 12등급으로 조정할 것.(4) 지방행정제도의 개혁지방자치적 성격① 읍단위의 향회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결정케 할 것.② 한성부의 권한을 줄이고 감리서의 직위를 격상시킬 것.③ 지방관의 임명을 8아문의 의결에 따라 정할 것.(5) 경제제도의 개혁재정의 일원화일본의 경제적 침투 용이① 재정을 탁지아문 종료 : 박영효가 군부대신 조희연을 탄핵하고 동파(同派)인 김홍집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붕괴됨.2) 전개(1) 박영효(박정양) 내각의 성립① 성립과 구성 : 갑오파를 실각시키고 갑신파 주도로 정동파 등의 연립으로 구성됨.② 활동 : 제 2차 김홍집 내각의 개혁법령을 계승하면서도 친일적 성향을 버리고 자주적 성향으로 전환함.(2) 국외 정세의 변동① 시모노세키 조약(1895.03.23. (양) 04.17) :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막대한 이권을 쟁취함.② 삼국간섭(1895.03.29. (양) 04.23) : 요동반도 할양에 러?독?프가 항의하자 일본이 이에 승복함.(3) 국내 정세의 변동① 박영효(박정양) 내각에 대한 불만 : 갑신파의 독재적 정치세력 구축에 고종 및 정동파가 반발함.② 일본의 내정간섭 :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박영효(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자 획책함.(4) 제 2차 갑오개혁의 종료 : 삼국간섭 및 불궤음모(不軌陰謀)로 인한 박영효(박정양) 내각의 실각 등으로 약 51건의 개혁법령이 수포로 돌아감. 내각제의 도입, 훈련대 창설, 예산안 편성만 이후에 계승됨.7. 제 2차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1) 제2차 개혁의 내용핵심내용세부내용(1) <홍범 14조>의 반포1. 청국에 의부(依附)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자주독립하는 기초를 확실히 세울 것.2.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제정(制定)하여 대위(大位)의 계승과 종척의 분의(分義)를 밝힐 것.3. 대군주가 정전(正殿에) 나아가 일을 보아 국정을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재결하고 후빈(后嬪)·종척은 간예(干預)함을 용납지 않을 것.4.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수즉(須卽) 분리하고 서로 혼합하지 않을 것.5. 의정부와 각 아문 직무·권한의 제정을 밝게 작정할 것.6. 인민이 세를 바치는 것은 다 법령으로 작정하고 멋대로 명목을 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7. 조세의 과징(課徵)과 경비의 지출은 다 탁지부에서 관할할 것.8. 왕실비용을 솔선하여 절감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도록 할 것.9, 또한 보호 및 점령의 웅심(雄心)을 억제하여 구미열국 가운데 공평한 나라와 서로 모의하여 공동보호의 독립국으로 하는 방침을 취할 것인가.제3조. 조만간 반드시 한 두 강국과 분요(紛擾)를 일으키는 것은 가장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추세이므로 대난사(大難事)가 일어나지 않은 금일 오히려 단호히 결의하여 일강국(一强國)과 고려 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방침을 취할 것인가. ≪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50, 1711∼172쪽?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명확한 결단을 내려주지 않아 미우라 고로 공사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게 됨.(3) 제 3차 김홍집 내각의 성립(1895.04.23. (양 05.17))① 성립과 구성 : 갑신파를 실각시키고 민씨 척족?정동파의 연립에 갑오파가 참여하는 형태로 구성됨.② 성격? 고종과 민비 중심의 민씨 척족과 정동파가 친일적인 갑오파를 압도하여 친미?친러 정책을 표방함.? 민씨 척족의 등장으로 약화되었던 궁내부의 권한이 다시 강화됨.2) 전개(1) 배일정책의 전개① 복제의 환원 : 친일적 성향의 내각이 진행한 제 1차?2차 갑오개혁의 개혁법령을 부분적으로 폐지함.② 친미?친러 정책의 표방 : 친일적 성향의 인물들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하고 정동파를 중용함.③ 군사 개편안의 통과 : 8월 19일(양 10월 7일)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시위대만을 존치시킨다고 결정함.(2) 을미사변의 발발(1895.08.20. (양) 10.08)① 을미사변의 준비 : 메이지 정부의 불명확한 지시로 미우라 고로 공사는 일본의 세력을 만회하고자 함.② 훈련대 해산 통고 : 친일 성향의 군부대신 안경수가 미우라 고로 공사에게 훈련대 해산 결정을 통고함.③ 을미사변의 발발 : 일본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옹립함.(3) 아관파천의 단행① 정동파의 축출 :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강압으로 정동파가 축출되고 갑오파 주도의 내각이 성립됨.② 춘생문(春生門) 사건(1895.10.12. (양) 11.28) : 정동파 인사들을 주축으로 친왕파 미국인”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 중국 고대사Ⅱ. 본 문01. 최초의 왕조【내용정리 및 보충】 현재 남아 있는 문헌에는 중원의 초기 국가만이 서술되어 있다. 치수에 성공한 우(禹)가 산서성 남부, 하남성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지역에 하(夏) 왕조를 세웠다는 것인데, 최근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청동기와 궁전 등이 발견되면서 문헌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규모 성벽이나 문자가 확인되지 않아 그것이 과련 하의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기원전 2,000년 이후가 되면 이 지역에 초기 국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각종 지표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인근 지역에서 하 문화 외에 다른 성격의 고고 유적도 확인되는 만큼, 하의 규모와 범위는 의외로 좁았던 것 같다. 따라서 주변 지역에 대한 하의 배타적 우위성을 강조하기는 어렵다.【논문】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1992), 이성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교과서 반영 및 수업 활용】① 고등 세계사(교학사) Ⅱ. 문명의 성립과 통일제국 32쪽생각열기 -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순 임금이 황허 강 치수에 공로가 큰 우를 등용하여 양위하였으며 우의 자손이 대대로 천자 자리를 계승했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이다.”라고 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 국가 형성과 관련된 시사점을 생각해 보자.02. 서주의 봉건제【내용정리 및 보충】 서주 왕조는 낙양에 동방 지배의 거점을 만들고 동시에 광대한 피정복민 지역에 주왕실의 자제·일족(희성(姬性) 제후) 및 동맹 부족 출신자들(이성제후)을 파견하여 제후로 분봉(分封)하고 상 유민의 감시와 주변 이족(異族)의 반란에 대비하였다. 또한 주에 복속한 지방 토호는 소제후로서 그 지역을 지배하게 하였다. 주요 제후국으로는 노(魯), 진(晋), 송(宋), 위(衛), 연(燕), 제(齊) 등이 있었다.이런 제후봉건을 “사기”에는 무왕 때 시행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왕 시대의 동정(東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다시 강왕(康王), 소왕(昭王), 목왕(穆 발휘하여 제후들의 맹주(盟主)로서 기반을 쌓았다. 이리하여 기원전 667년에는 주의 혜왕(惠王)에 의하여 패자로서 인정되었다. 더욱이 제환공은 남하한 북방의 적적(赤狄)에 의해 근거지를 빼앗겼던 형(邢)과 위(衛)를 각각 땅을 옮겨 재흥케 하였다. 또한 노(魯)의 반란을 평정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이로써 제환공의 패자로서의 명성을 더욱 높아졌다. 그 절정을 이룬 사건은 남쪽 초(楚)에 대한 승리와 규구(葵丘)에서의 회맹이었다. 형만(荊蠻)으로도 불렸던 초를 기원전 656년에 제환공이 소릉에서 저지하고 화평의 서약을 받아냄으로써 초의 북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뒤이어 제후들을 규구에서 모아 주왕실의 경사(卿士)인 주공(周公) 공(孔)의 배석하에 회맹을 맺었다.② 춘추5패의 대표국이었던 진(晋)·초(楚)의 대결로 그 외의 소국들은 두 나라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출정시켜 거의 매년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여러 제후국들은 화평을 요구하게 되었다. 기원전 579년에 송의 대부 화원(華元)이 진·초를 설득하여 부전조약(不戰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언릉(?陵)에서 진·초 양국의 대격돌이 이루어지면서 파기되었다. 이 때 초는 크게 패하고 공왕(共王)도 부상을 입었다. 이후로 다시 전투가 반복되고 더욱이 여러 제후국에서 내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다시 화평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대두하였다. 송의 재상 상술(尙戌)은 진·초 등을 설득하여 기원전 546년에 송의 수도에 각구의 대부들을 모아 화평을 약속하였다. 이를 미병지회(彌兵之會)라고도 한다.【논문】【교과서 반영 및 수업 활용】① 춘추시대 패자의 역할 파악하기② 춘추시대에 나라의 내분이 심했던 이유와 군주의 권력이 비교적 약했던 이유 탐구해보기05. 춘추 시대의 전쟁【내용정리 및 보충】 서주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그 대신 힘에 의지하는 패자에 의해 정치 질서가 주도되면서 전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전국 시대에 모든 나라들은 약육강식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사력을 결사적으로 증강시킨다. , 백성들로 하여금 안으로는 농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었다. 이를 통해 진은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그로부터 140여 년이 흐른 뒤에 시황제에 의해 마침내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③ 고등 동아시아사(교학사) Ⅰ. 동아시아 역사의 시작과 국가의 형성 28쪽‘탐구활동’ 진의 통일 정책? 진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④ 중등 역사(좋은책신사고) Ⅶ. 통일 제국의 등장 208쪽‘탐구활동’ 진의 통일 정책? 진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의 병사는 전투에서 얻은 공에 따라 그에 맞는 상과 벼슬을 받았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자는 아무리 왕족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것이 진이 마지막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라고 쓰고 있다.08. 제자백가【내용정리 및 보충】 춘추전국 시대에는 정치적으로는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는 옛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엄격한 질서 구분이 사라진 만큼 신분 간의 이동도 자유로웠다. 한편 전국 시대 군주들은 새로운 정치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부국강병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중략) 그리하여 매우 다양한 사상이 출현했는데, 그것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른다. 제자백가 사상 전체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 중심사상, 그리고 합리적인 사상이라는 점이다.【논문】【교과서 반영 및 수업 활용】① 제자백가의 여러 주장 중 춘추전국시대의 전쟁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사상을 선택해보기② 여러 딜레마 상황에서 제자백가의 특성에 따른 주장을 만들어보기10. 군현제의 실시【내용정리 및 보충】 현이 처음 설치된 것은 춘추 시대 말기였다. 초기의 현은 기존의 국(國)을 멸망시키고 난 뒤 유력 세족들에게 제의 통일 정책(자료)’ 진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사상통일’ 정책의 예시로 소개함③ 고등 동아시아사(천재교육) Ⅰ. 국가의 형성 34쪽‘활동하기’ 진 시황제의 정책- |탐구 1| 시황제가 자료 1~자료 4(분서갱유)의 정책을 시행한 직접적인 목적을 각각 써 보자.- |탐구 2| 위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시황제가 건설하고자 했던 국가의 모습을 추론해 보고, 그 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④ 중등 역사(비상교육) Ⅶ. 통일 제국의 등장 224쪽- 분서갱유를 기록화로 보여주고 해설하였다.⑤ 중등 역사(미래엔) Ⅶ. 통일 제국의 등장 202쪽(탐구) 시황제가 분서갱유를 단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에 성공한 시황제는 법가 사상을 토대로 사상을 통일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분서갱유를 단행하여 다른 사상을 탄압하였다.⑥ 중등 역사(교학사) Ⅶ. 통일 제국의 등장 209쪽 ? 사상의 통일 ‘분서갱유’로 사료 소개하고 있다.235쪽 ? 역사 신문 활동 예시로 소개하고 있다.13. 진시황 각석【내용정리 및 보충】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20년, 1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였다. 진시황의 순행에는 몇 차례나 습격을 받는 등 어려움이 잇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통일 이후 제위 기간의 1/3 가량을 순행에 소비하였다. 일반적으로 순행의 목적은 지역의 민심을 살피고, 황제의 권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순행을 하며 남긴 각석의 명문이 남아 있는데, 통일 전쟁의 정당성, 자신의 업적 찬양, 국가 제도 통일의 필요성과 그 완비, 백성들의 충성 요구 그리고 풍속 개량과 천하 교화 등이 그 내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각석의 목적 외에도 제국의 경계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 순행 중 각종 제의를 잇달아 거행하면서 통일 업적을 하늘과 조상에 고하며 동시에 자연 재해를 막고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기원을 했을 것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논문】【교과서 반영 및 수업 활용】① 고등 세계사(금성)온 한신에게 유방은 ‘너는 얼마나 많은 군대를 이끌 재능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⑤ 한신은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며 재능을 과시했다. 두려움이 생긴 유방은 한신을 사형에 처한다. 죽기 전 한신은 ⑥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는 법이다.’라며 신세를 한탄하였다고 한다.1. 유방이 세운 나라의 이름은 무엇인가요?한(漢)나라2.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를 2가지 이상 적어봅시다.비옥한 진나라 땅을 차지함.인재를 능력에 따라 적합한 곳에 활용함.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통해 민심을 얻음.3. 유방은 공신들에게 포상을 주기 위해 군국제를 실시합니다. 군국제가 어떤 제도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봅시다.중앙은 유방이 파견한 관리가 통치하지만(군현제), 지방은 봉건제를 실시하여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한 것이다.4. 천하를 통일한 유방이 공신들을 제거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지방 제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이다.5. ①~⑥은 초·한 시대에 나온 고사성어들의 유래입니다. 각각 어떤 고사성어의 유래인지 찾아 적어봅시다.1) 건곤일척(乾坤一擲) : 운명을 걸고 승부를 겨룸 → ( ③ )2) 사면초가(四面楚歌) : 도움을 못 받는 외로운 상태 → ( ④ )3) 금의환향(錦衣還鄕) :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옴 → ( ① )4) 다다익선(多多益善) : 많으면 많을수록 좋음 → ( ⑤ )5) 배수진(背水陣) : 물러설 수 없어 힘을 다해 싸우게 함 → ( ② )6) 토사구팽(兎死狗烹) :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 → ( ⑥ )18. 사기의 체제【내용정리 및 보충】【논문】【교과서 반영 및 수업 활용】① 고등 세계사(교학사) Ⅱ. 문명의 성립과 통일제국 47쪽‘그림자료’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구성된 기전체의 역사서로 신화 시대부터 한 무제 때까지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② 고등 세계사(비상) Ⅱ. 문명의 성립과 통일제국 43쪽③ 중등 역사(천재교육) Ⅶ. 통일 제국의 등장 220쪽④ 중등 역사(천재교육)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