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전남지역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12 이꽃잎목차1. 머리말2. 을사조약 이전의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3. 을사조약 이후의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4. 맺음말1. 머리말한국 근대교육은 1894년에 단행된 갑오개혁과 敎育立國詔書의 반포를 토대로 본격화하였다.짐이 政府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학식으로 나라를 中興시키는 큰 공로를 이룩하기 위해서이다. 너희들 신하와 백성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너의 덕성, 너의 체력, 너의 지혜를 기르라. 왕실의 안전도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교육에 달려 있고 나라의 부강도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교육에 달려 있다. 너희들 신하와 백성에 대한 교육이 훌륭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짐이 어찌 나의 정사가 성공했다고 하며 짐의 정부가 어찌 감히 그 책임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당연한 직분이지만 학식의 등급에 따라 그 효과의 크기가 결정된다. 이러한 일을 하는 데서 조그마한 결함이라도 있으면 너희들 신하와 백성들도 오직 우리들의 교육이 명백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상하가 마음을 합치기에 힘쓰라. 너희들 신하와 백성의 마음은 또한 짐의 마음인 만큼 힘써야 할 것이다. (「교육입국조서」,『고종실록』, 권 33, 고종 32년 2월 2일자 ; 현대문으로 수정, 이하 같음)위의 내용은 고종이 발표한 ‘교육입국조서’이다. 교육입국조서의 내용은 교육은 국가의 근본이라 하여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교육내용은 德 體 智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육이 나라를 중흥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정부의 발표에 앞서 이미 중앙에서는 1883년 同文學과 1886년 育英公院이 세워졌으며, 지방에서는 근대사립교육의 효시로 삼을 수 있는 元山學舍가 1883년에 세워졌다.1895년 이후 사립학교의 설립은 개화사상을 가졌던 지식인이나 서양의 우월함을 실제 경험했던 전·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 이후 현저한 동 각출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재정난으로 인해 공립학교로 인가해 줄 것을 학부에 요청하였다. 아래의 기사를 검토해보자.담양군수 김덕수씨가 해당 사림의 공의를 從하여 소학교를 창설하고 유생의 구망으로 조만복을 교사로 택임하였는데 교비는 본 군수 및 교유들이 각출하야 학원 57명을 □□하니 공립학교로 인허□하고 학□□□□하였어라.담양군수 김덕수가 학교를 설립해달라는 사림의 요청에 따라 소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57명을 확보했으며, 군수와 교유, 즉 향교 유생들이 각출하여 학교 운영비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담양은 아마도 전라남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사립 근대학교를 설립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진도에서는 1904년에 光新학교가 설립되었다. 설립주체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개화기의 지식인이었던 安國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는 1899년 11월 박영효와 관련된 역모사건에 연루, 체포되었다. 4년의 미결수 기간을 거쳐서 1904년 3월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당시 진도에는 姜英華·姜仁弼이 정부요인 암살주모자로 잡혀 1900년부터 유배 중이었고, 鄭萬朝도 1896년에 유배되어 진도의 지식인들과 교우를 맺고 있었다. 안국선은 진도에 오자마자 朴鳳瑀·朴泳培·崔文奎 등 10여 명과 친목회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고종의 소학교령이 발표되면서 유배수 안국선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진도의 근대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아래의 기사를 통해서 진도의 당시 군수와 교감, 총무와 광신학교의 대략적인 학생 수를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광신학교는 꽤 큰 규모의 지방학교였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전남 진도군 광신학교는 설립한지 팔구년이나 재정이 군출하고 학과도 미편하더니 금년 춘에 군수 서병윤씨와 교감 박진원씨와 총무 김상대씨가 일심협□하고 열심흥학하야 □명한 교사를 안빙하고 교사를 일신 증축하니 군내인사가 옹연 상응하야 찬조금이 천여원에 달하고 학도가 백 여인에 지하야 울연흥기함을 막불 찬송하더라.금리가 있었다. 학도 중에 군악대가 있었는데 일본 교사가 교습시킨 것이다.읍의 서쪽에 위치한 지명학교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준다. 정기적으로 일본어와 산술시험을 보았다는 점, 30명 학생들의 연령층은 7,8세부터 20세까지, 그리고 시험 후 일본인 교사에 의해 운동장에서 체육행사를 했는데 군악대도 운용했다는 것이다. 지명학교가 근대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군수와 김윤식 역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이 지도는 섬이었음에도 일찍이 새로운 문화와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유리했으며, 근대화의 과정의 영향을 고스란히 흡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편,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친일세력에 의해 설립된 학교도 존재하였다. 1905년 장흥 사립 明進학교가 그것이다. 장흥의 명진학교는 一進會員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송병준 등이 만든 일진회는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단체로서 전국에 걸쳐 郡單位 一進支會를 조직하고, 다수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일본인을 교사로 임명하여 주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학교 설립의 동기를 ‘한일협약 결과 국민들이 시세에 통하지 못하여 일어를 모르는 것은 국가에 불이익한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장흥은 일찍부터 동학세력이 강력하였으며, 1894년 음력 12월 농민군 최후의 격전지인 석대들 전적지가 있는 지역이다. 그 후 살아남은 장흥지역 농민군들은 천도교와 일진회를 통해 꾸준히 세력을 신장시켜 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동학세력이 근대화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주목된다.이상과 같이 을 토대로 정리하자면 전라남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사립학교가 세워진 지역은 목포였을 것이다. 1897년에 개항한 목포는 일본세력과 근대 문물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전라남도에서는 가장 먼저 유입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인해 목포와 그 인근 지역인 진도, 무안 지도 등에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근대학교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아가 이들 지역 외에도 여수 거문도와 영광 등, 연해 도서지역 李?를 초빙해왔다. 이표는 신·구 학문을 겸비한 인물로, 고정주의 “구태의연한 선비가 되지 말라. 모름지기 고금과 사리에 통달하여 시무를 훈련한 연후에 현재에 쓸만한 그릇이 되라”라는 ‘博古識今’이라는 교육관과도 일치하였기 때문에 초빙해 왔으리라 짐작한다. 이렇듯 고정주가 지니고 있었던 사상은 당시 근대적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으며 이러한 사상을 창평 지역의 후생들에게도 심어주기 위해 교육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순천에서도 1906년에 前 위원 金貞鉉과 지주들이 사립 昇明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설립과정이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인 교사를 두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어 교육을 실시했을 것이다. 순천의 인근 지역인 낙안(현재는 순천시)에서는 樂英학교가 군수 徐丙潤과 유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私立學校令」에 의해 1909년 9월 사립낙영학교로 인가되었고, 1910년 12월에 東下面에 있던 日新학교와 병합하였다.다음 해인 1907년 서울에서 호남지방 출신들의 湖南學會가 조직되었고, 각지에 지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창평으로 낙향한 고정주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당시 호남학회는 호남의 교육발달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고정주의 관심과 일치되었다. 1907년 서울에서 돌아온 고정주는 지역 유지들과 힘을 합하여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후반과 1908년 초 사이에 昌興義塾이 설립되었다. 창흥의숙의 교사는 예전 창평현의 객사를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향리의 젊은 청년들에게 한문은 물론 국사와 영어 산술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창흥의숙과 같이 호남학회의 영향을 받은 무안읍의 교육 부인회에서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무안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여학교의 특징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교육회의 주도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또 교육회의 주도로 세워진 학교는 1907년 진흥학회에서 세운 진흥학교가 있다. 진흥학교에는 역사, 지리, 한문, 어학의 교과목을 가르쳤다.같은 시기 광양에서는 마지막 군수였던 徐相鵬이 옛 향청에 사립 曦陽학교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1개 군에서도 여러 개의 다양한 학교가 설립되고 있음도 주목된다.각 군별로 설립된 학교 중에 몇 개의 사례를 통해 이 시기 학교 설립의 특징을 알아보기로 하자. 1908년에만 순천에는 4개 교, 영광에 3개교, 구례와 나주, 화순에 2개 교 등이 설립되는 등 한 지역에도 여러 개의 학교가 설립된 점이 눈에 띈다. 그 중에 가장 읍세가 미약한 구례의 壺陽학교는 일찍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호양학교의 설립당시 기본재산은 지천리 등 광의면의 유지들이 낸 기부금과 각 마을 공유의 논과 산판을 매도한 금액 560원, 용강면의 각 마을 공유의 논과 산판을 매도한 금액 160원 도합 720원이었다. 매년 3학씩 방광면과 용강면, 고달면 3개면에 빌려주어 학교 운영을 위한 경비로 썼다. 그러나 호양학교 예산은 1907년 구례읍에 설치된 공립보통학교의 4,718원 15전에 비해 1/6에도 미치지 못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황현은 3, 4개월 지난 호양학교 예산이 7, 8할이나 소비하게 되어 교원들의 월급을 줄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募捐疏를 지어 군내 유지들에게 호소하였다.생각건대, 호양학교 건립의 노고는 진실로 백척간두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방해를 물리치며 이미 온갖 재난의 고역을 겪었고, 경영에 힘을 다 바쳤으나... 결국은 가루 없이 떡국을 만드는 격이니,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옥을 쪼다 그친 듯 어린이들을 가르칠 방도가 없으니 안타깝고, 교원들에게 급여를 못주게 되니 선생 노릇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날 우리의 신학문에 대한 발원은 단적으로 모든 국민을 위한 소망이었습니다. 장차 훌륭한 후손을 남기고자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낯이 두껍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서양의 호걸들을 보더라도 그 누가 학교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그리하여 구례에서는 황현의 동학과 제자들이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그 가운데 왕수환이 초대 교장을 맡았다. 호양학교 설립의 취지와 목적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