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대의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발달과정과 동서 문물교류1. 머리말2. 장건(張騫)의 서역 파견3. 한무제(漢武帝)의 하서4군(河西4郡) 설치1) 위청과 곽거병의 흉노정벌4.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 교류1) 비단과 유리의 교역2) 불교의 전파5. 맺음말1. 머리말최근 우리는 서양의 문물을 아주 쉽게 접하고 사용할 수 있다. 서양의 음식을 전화 한통으로 쉽게 먹을 수 있으며, 의복은 서양식으로 변화했다. 또한 그들의 문화를 인터넷으로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서양 또한 마찬가지 이다. 서양에서도 동양의 음식, 문화, 의복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와는 다르게 과거에는 서양의 문물을 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동, 서양 서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동서양 서로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은 동서 문물 교류를 촉진 시켰으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실크로드라는 문명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실크로드로 나아가는 길목은 바로 하서회랑(河西回廊) 이었다. 그러나 동서 문물교류를 가능하게 한 본질적 목적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동서 문물 교류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 부차적으로 생겨난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서양 간의 문물 교류가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고에서는 실크로드로 가는 길인 하서회랑의 개착과정의 본질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어떠한 형태로 동서교류가 이루어 졌는지 분석해보고자 한다.2. 장건(張騫)의 서역 파견전통적인 중국은 북방 유목민족들과 끈임 없이 대결하는 양상 이었다. 중국 역사상 북쪽 유목민족은 그들의 터전에서 그냥 거주하면 되지만 날씨가 추워지고 환경이 척박해질 경우 남하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남하하는 유목민족 가운데에 하서회랑까지 오는 경우도 있었다. 평소 기온대로라면 유목민족들은 남하하지 않지만, 가령 동진(東진)말에 5호(胡)가 엄청나게 남하하는데 이유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하강했기 때문이다. 기후가 정확한 정답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때 흉노에게 굴욕적인 ‘평성의 치’를 경험하여, 흉노와 교섭하여 비단을 바치기 시작했고, 또한 화번공주(和番公主)를 보내기도 했다. 비단은 매년60만 필을 보냈는데 동쪽 지역에는 100필 정도만을 보냈다. 예컨대 동방지역과의 교역은 비단이 아닌 다른 형태의 교역인 ‘문방사우’의 교류를 더 중시했을 것이다.대체로 대내적인 재정이 완비되는 한무제(漢武帝) 통치기간에는 통치체제가 군국제(郡國制)에서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로 강화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나라는 대외적인 팽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외교적인 마찰을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동맹국을 찾게 되었다.한나라 이전에 하서회랑(河西回廊)에 월지족이 존재했었다. 흉노가 월지족을 정벌 하면서 월지족은 서쪽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흉노는 정복과정에서 월지족 족장을 죽여 해골에다 술을 따라 마셨다고 한다. 그렇기에 월지족 입장에서는 흉노에게 원수를 갚기 위한 복수심이 존재하고 있었다.[그림 1] 장건(張騫)의 원정로 한무제(漢武帝)시기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월지와 협력하기위해서 대략 기원전 139년에 장건(張騫)을 100명과 함께 월지족에게 파견했다. 하지만 장건(張騫)은 허무하게 무위에서 흉노에게 잡혀버렸다. 장건은 결국 10년간 흉노족의 노구수에 구류 되었다. 놀랍게도 장건(張騫)은 흉노족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천산산맥 북쪽에서 초원길을 따라 이동하였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월지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월지는 이미 흉노에 대한 큰 감정 없이 그 지역에서 정착하고 있었기에 장건(張騫)은 큰 소득 없이 서역남로를 따라 복귀했다.장건(張騫)은 ‘체르클릭’에서 기련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해로’에서 흉노에게 또 잡히고 선우정으로 압송될 위기에 쳐했다. 그러던 중 장건(張騫)을 압송하던 병사들이 사분오열되어 급히 도망을 쳤다. 예컨대 기원전 126년경 흉노 왕실의 내분이 있었기에 병사들은 급박히 본거지로 돌아갔을 것이다.장건(張騫)은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 도착한 뒤 많 기원전 129년 이후 기원전 119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 곽거병(藿去病) 등이 이끄는 한군과 흉노의 대격전이 있었다. 한나라군의 막대한 손실과 함께 흉노의 피해도 극심하였다.1) 위청과 곽거병의 흉노정벌[그림 2]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 기원전 127년, 흉노가 상곡(上谷)과 어양(漁陽)에 침입하여 랴오시(遼西) 태수를 살해하고 2,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위청의 공격을 받아 흉노는 병사 수천 명이 사로잡히고 100여 만 마리의 소와 양을 노획당하여 치명적인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또, 이 전쟁에서 비옥한 허난(河南) 지역을 한에게 빼앗겼다. 한은 이 지역 일대에, 관동으로부터 백성 100,000명을 이주시켜 이곳을 지키게 함으로써, 흉노의 장안에 대한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흉노 토벌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기원전 124년에도 역시 위청이 지휘하는 30,000 기병의 공격을 받아 우현왕 왕정(王庭)이 죽고 10여 명의 소왕(小王)이 체포되는 등, 15,000명의 인적 손실과 수십 만 마리의 소와 양을 노획당하였다. 기원전 121년에는 곽거병의 10,000 기병을 칸수 지방 동부에서 맞이하여 수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흉노병 30,000명이 전사하고 2,500명이 포로로 잡혔다.더구나 그 해 가을, 하서(河西)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흉노 혼야왕(渾邪王)이 전쟁 패배에 대한 선우의 문책을 두려워하여 그 무리 40,000명을 이끌고 한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 기원전 119년에, 한은 다시 위청, 곽거병에게 각각 50,000 기병을 주어 흉노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위청은 흉노 선우 이치사(伊穉斜, B.C. 126∼114)를 상대로 격전을 벌여 그들을 패퇴시켰고, 곽거병은 외몽골 고비 사막 이북에서 흉노병 70,00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곽거병의 전과는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대성과였다. 흉노전쟁 중에서 가장 화려하였던 곽거병의 승리는 흉노족의 서쪽 땅(한나라 방향)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본거지발해지자 그 교통로였던 실크로드(비단길)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곽거병은 119년에 대사마(군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기원전 117년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이 당시에 무제는 장안 근처에 자신의 무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곽거병이 갑자기 죽자 자신의 무덤 옆에 묘를 만들게 한다. 곽거병의 무덤은 그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련산(祁連山)을 모방했다고 한다.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이 마지막 출정을 한 후 20년 동안은 한과 흉노 사이에 대규모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흉노에 대한 북벌(北伐)이 전과는 달리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전공(戰功)을 탐하는 군부의 파벌 싸움으로 한나라군은 예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또 이 시기에, 무제는 서역과 고조선(古朝鮮)에 대한 정복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결과적으로 이러한 활발한 정복사업을 통해서 하서 4군이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중국의 교역이 중심이 되는 실크로드의 개착이었다. 이후부터 하서 4군은 중국영역으로 들어와 서역과의 교역에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측 입장에서는 교역의 역할보다는 군사적 목적이 강했으며 문물교류는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결과였다.4.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 지적 교류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나라의의 군사적 목적으로 인한 흉노 정벌 및 하서 4군의 설치는 동서 문물교류라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교류를 낳았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공예품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환상은 중개 무역가들에 의해서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중국만이 가지고 있던 비단은 서역으로 팔려 나갔으며 유럽의 소수 국가만이 가지고 있던 유리는 동양으로 팔려나가 동서간의 무역은 활발해졌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산물인 종교 또한 전파 되었다. 동아시아에 지대한 여향을 준 불교는 인도에서 파생되어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가 융화되기도 했다며 느린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중국 북부에 살던 사람들은 기원전 2000년 점쯤 누에고치의 비밀을 알아냈다. 다 자란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었더니 애벌레는 죽고 껌처럼 뭉쳐 있던 고치는 아주 얇은 실로 풀려나왔던 것이다. 하나의 고치에서 풀 수 있는 실의 길이는 최장 1킬로미터에 이르렀다. 누에고치를 실로 잣는 기술은 중국 북부 지역에서만 전수되었다. 이 지역에서 자란 누에고치의 실은 유난히 튼튼하고 잘 끊어지지 않았다.상(商)나라 시대부터 중국 왕실은 누에를 키우는 여인들을 직접 관리했다. 양잠 기술은 오직 중국 왕실만이 보유하고 있는 독점 기술 이었다. 여인들 누에에서 뽑은 명주실로 천을 짜거나 염색을 했고 솜씨 좋은 몇몇은 아름다운 무늬를 넣어 천을 짜는 재주를 발휘하기도 했다. 기원전 400년 전에는 이들이 짠 비단이 광활한 대초원과 유라시아 평원을 거쳐 헝가리까지 전해졌다. 유목민들이 가져온 이 소량의 비단은 유럽 여인네들을 몹시 감질나게 했다.한나라 시대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서회랑을 개척하였다. 이 길은 중앙아시아 서부의 사막 같은 분지를 건너 천산 산맥, 파미르 산맥을 넘어 서방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인들 또한 서방에서 진귀한 물품을 수입할 수 있었다. 천리마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유리가 그것이었다.[그림 4] 로마의 유리잔 희소성과 가치, 제조 기술의 독점 등에서 볼 때 서방의 유리는 중국의 비단에 대적할 만한 귀한 교역 품이었다. 수메르인들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유리는 약 3000년 전에 우연한 실수로 인해 처음 탄생했다. 최초의 유리는 석영이 들어간 모래를 규산염에 혼합한 뒤 섭씨 1600도로 녹여서 천천히 굳히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혼합물을 굳히는 데는 며칠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거에 이미 만든 유리를 촉매로 첨가하면 훨씬 낮은 온도로 유리를 완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리에 갖가지 색깔을 첨가하는 것도 가능했다.로마시대 즈음에는 유리 제조다.
일본의 근·현대(近現代) 무엇이 문제인가?- 근대 이후 천황제(天皇制)를 중심으로 -목차Ⅰ. 머리말Ⅱ. 근대천황제(近代天皇制)의 탄생Ⅲ. 근대천황제(近代天皇制)의 특징과 폐해Ⅳ. 상징천황제(象徵天皇制)의 확립과 폐해Ⅴ. 맺음말Ⅰ. 머리말일본은 피로 얼룩진 근대를 만들어왔다. 그들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조선, 청나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을 천황체제 아래에 무자비하게 침략했다. 더 나아가서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무력으로 빼앗았다. 그들의 매우 비(非)인간적이며 잔인한 행위는 주변국들에게 치유 할 수 없는 아픔을 남겨 주었다. 한국의 군 위안부문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난징대학살, 진주만 공습 등의 아픔은 여전히 피해자들과 그 후손들의 가슴에 남아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본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서 사과할생각 조차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선을 근대화 시켰으며 서양 세력에 침투에 대항하여 조선을 보호해주었다며, 어이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서양세력에 대항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동남아시아 지역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그렇다면 일본 정부 및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침략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들의 이러한 가치관의 근간을 천황제라는 특수한 체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근대 천황제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천황제가 어떠한 연유로 일본인들에게 자긍심과 정당화를 시키고 있는지 고찰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현대의 일본의 상징 천황제에 대해서도 고찰하여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한다.Ⅱ. 근대천황제(近代天皇制)의 탄생1854년 에도막부 말기에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일본은 반강제로 개국당하여,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격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세계열강들의 선진적인 모습을 접하기 시작한 일본은 대외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막강한 구미자본주의 국가들이 일본의 쇄국을 타파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자 하였다. 이에 막부는 사쓰마(薩摩藩), 쵸슈(長州), 토사(土佐), 히젠(肥前)번의 다이묘들에게 막부정치에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천황의 전동적인 권위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페리가 일본에 온 후 총포를 만들고자 사원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천황을 이용하여 절들의 종을 대포로 주조하는데 사용토록 명령을 내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황이 정권을 장악하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막부가 오히려 쇠퇴해가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그렇게 한 것뿐이었다. 당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것도 결코 막부를 폐지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막부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급무사세력이 점차 강해져간 1861년부터 존왕(尊王)은 반천황(反天皇)이기도 했다. 孝明天皇은 막부체제의 지지자였다. 天皇은 옛날 가문의 권위에 의해서만 겨우 잔존하고 있고 게다가 경제는 막부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옛날 것을 존중하고 현상을 유지하며 급진정책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이른바 막부타도파는 천황을 투대하여 통일된 일본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지만 천황자신은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다 1866년 말에 孝明天皇이 急死하게되었다. 그 후 불과 15세의 나이인 명치천황(明治天皇)이 대를 이었다. 이것으로 막부타도파는 세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1867년에 와서 왕정 복고파인 토막파(討幕派) 내부에서 무력으로 天皇制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기 위해 일련의 행동을 실시하였다. 1868년에 와서 드디어 일본의 통일을 위한 무진(戊辰)전쟁이 시작되었다. 1868년 1월3일 , 무력으로 天皇制國家를 세우려는 討幕派는 무장봉기하여 쿄토의 왕궁을 포위하고 왕정복고 및 將軍制 폐지를 선언하고 천황제 정부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궁정내의 대표로 하고 실권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등이 장악하였다. 明治天皇앞에서 회의를 열어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장군직天皇制가 탄생한 것이었다.Ⅲ. 근대천황제(近代天皇制)의 특징과 폐해討幕派의 반란에 의하여 성립된 天皇制 국가는 그 후에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강력한 절대천황제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절대천황제의 존립근거를 밝히는 명치헌법에서 천황제가 신의 뜻에 기초하여 성립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의 정치체제는 신의 자손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의 법칙에 의하여 천황제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명치유신에 의한 천황제는 율령제 국가로의 복귀, 종교적 관념의 결합, 신분제의 상속 등의 복잡한 성격을 갖고 출범하였다. 그리고 천황제를 성립시킨 주역들은 천황이 친정을 용이하게 하도록 천황 일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강력한 절대천황제의 성격을 갖도록 헌법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런데 이 명치헌법체제하에서의 절대 천황제의 지위와 성격은 무제한의 정치권력을 소유한 절대주의적 측면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근대입헌주의의 체제와는 다르게 위험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 번째로 절대 천황제는 통치원리 자체가 국민의 주체적인 정치참여를 배제하고 천황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과 일체감을 요청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천황제 내부에서는 입헌적 기구에 의한 민주정치의 담보가 원래부터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두 번째로 개국 이래 선진국의 뒤를 숨 가쁘게 쫓아간 천황제국가는 국내외의 수많은 위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 민주세력들은 언제나 억압되어 천황제의 전제화를 방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명치유신 이후 성립한 근대의 절대 천황제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며 국가의 원수인 동시에 통치권의 총수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적 국가기구 그 자체였다. 즉 천황제가 정치체제의 일부로서 존재 했다기 보다 천황제는 국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천황에 의한 천황을 위한 천황에 의한 국가로 변모한 것이었다.위에서 살펴본 천황제의 특징은 천황은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며 천황제는 국가 그 자체였다는 것가제 특공대’라는 극단적인 자살특공대로 대표된다. 그들은 오로지 천황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 돌격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천황의 광신도(狂信徒)처럼 그저 천황의 명령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침략행위를 실시한 것이었다.두 번째로 일본의 천황이 신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여 천황이 행하는 대·내외적인 정치행위를 모두 정당화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은 결국 자국중심적인 가치관으로 귀결되었다. 일본의 정부 및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선을 비롯한 중화민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을 침략한 행위를 서양열강들의 침략에 대응하여 일본이 아시아를 방어해주기 위한 최선의 행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아시아의 신질서를 위해 대동아공연권을 구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어 패전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무지몽매한 일본인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세 번째로 이토 히로부미의 헌법 개정에서 천황제의 폐단이 있다. 이를 대일본 제국헌법이라고 하는데 대일본 제국헌법을 살펴보면 내각은 천황을 보필하며, 내각 하위에는 행정기구가 설치되어있다. 또한 육군과 해군은 천황을 보필하는 존재이며, 내각의 간섭을 받지 않는 천황의 군대였다. 천황 밑에는 또한 의회가 존재했다. 의회, 내각, 육, 해군은 각각 독립적인 기능을 하며 서로 크게 간섭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육해군은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게 되었다. 즉 천황개인의 군대, 사병의 성격이 짙었다. 정부가 군에 대해서 간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육, 해군의 대신은 정부와 논의하기 위해서만 내각에 파견되기도 했다. 즉 내각은 군부를 간섭 할 수 없으며, 군부는 내각을 간섭 할 수 있는 체제였다. 의회, 내각, 군부는 단절되어 있으면서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자신들의 고유 정치범위 내에서만 활동 하며 그저 천황에게만 충성을 다할 뿐이었다. 이러한 체제를 천황제의 무책임 체제라고 한다. 결국 의회와 내각은 군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만주사면, 중일전쟁, 태평양전절대적인 권위성을 가지고 국민통합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온 천황제가 폐지되거나 또는 전쟁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天皇의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天皇制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것은 일본의 구지배층만이 아니었다. 침략전쟁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던 히로히토 천황 본인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구체호지’를 회구한 장본인이었다. 패전 직후 일본의 지도층 내부에서도 천황제 존속이라는 전제하에서 히로히토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히로히토 자신은 스스로 퇴위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함으로써 일본인의 불철저한 패전인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일본의 점령지배에 있어서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 천황제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천황제를 존속시키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었다. 그러나 미국이 천황제를 전쟁전과 같은 절대주의적인 체제로 남겨두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천황제를 現人神의 관념을 폐지하고 정치적 실권이 없는 천황제를 정착 시키고자 한 것이었다.‘대일본제국헌법’의 개정에 있어서 天皇의 지위도 미국의 이러한 기본적인 노선에 의거하여 구상되고 있었다. 당초 폐원내각(弊原內閣)의 개헌안은 천황의 통치권을 종전과 같이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GHQ의 강력한 개입에 의하여 국민주권 하에서 천황을 일본국가와 국민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정치적인 권력으로부터 격리시켜 상징천황제가 탄생하였다.이러한 미국의 戰後 정책은 일본의 비상식적인 일본인들의 가치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패전 후 일본은 인자한 천황 만들기 위해 전국순행을 시작했다. 천황의 순행은 전쟁의 책임의 회피와 천황제 존속뿐만 아니라 외포(畏怖)의 대상이었던 現人神천황에서 친애감(親愛感)을 주는 仁慈한 평화주의자 천황으로 탈바꿈하고 象徵天皇象을 민중들에게 침투시킨 것이었다.일본인들은 상징천황제를 평화주의의 상징으로 美化하고 과거의 어두운 역사와 분리, 은폐하려는 의도
중앙아시아 탐험기-누란유적을 중점으로-목차Ⅰ. 1895년 1차 탐험1. 사막횡단2. 탐험의 실패Ⅱ.2차 탐험1. 헤딘의 수집품2. 카누에서의 생활3. 수수께끼의 유적지4. 누란의 유적지Ⅰ. 1895년 1차 탐험1894년 나는 스벤 헤딘을 후원함과 동시에 그의 탐험에 동행했다. 내가 그를 따라 탐험에 동참한 이유는 고대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관심이 워낙 크기 때문이었다. 특히 우리 가문이 운영하고 있는 박물관에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헤딘을 후원하는 대신에 그와 함께 탐험하면서 수득한 유물들에 대해서 일정부분 소유권을 요구했고 그는 나의 요구에 응했다. 그를 따라 파미르를 횡단해서 카쉬가르에 도착했다. 날씨는 우리가 예상한 것 보다 너무나 추웠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얼어붙고 온도는 38도까지 내려갔다. 우리 탐험대는 고산증에 시달렸다. 탐험대 가운데 일부는 혹한으로 인해서 시력을 잃기도 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의 혹독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1. 사막횡단나는 이번 탐험이 처음이지만 탐험대의 리더인 헤딘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21세에 페르시아와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의 탐험가였다. 나는 헤딘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그의 수 많은 경험들을 무시 할 수 없었다.헤딘은 자신이 호탄을 방문했을 때 어떤 사람은 돈을 갚지 못해 죽을 마음으로 사막으로 들어갔다가 보물을 우연찮게 발견하여 돈을 갚고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를 비롯한 우리 탐험대는 모두 이 이야기가 진실일 것이라는 생각과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우리는 이 이야기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행동으로 나섰다. 1895년 2월 17일 카쉬가르를 떠나 야르칸드 강 근처의 메르케트로 향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메르케트에 도착하여 사막으로 인도해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는 한 사람을 고용할 수 있었는데, 그는 필요한 낙타와 양식 등을 체계적으로 구입했다. 나는 물론 그와 말이 통하지 잘 통하지 않았다. 내가 구사 할 수 에 없었다….1895년 4월 10일 낙타 8마리, 경비견 2마리, 그리고 움직이는 양식인 양 3마리, 암탉 10마리, 수탉 한 마리를 데리고 출발했다. 우리 탐험대의 목표는 타클라마칸을 횡단하면서 야르칸드 강과 호탄 강 사이에 있는 이 사막의 서남쪽 귀퉁이를 실지 측량한 후에 티베트 까지 가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겁이 났지만 탐험대의 리더인 스벤 헤딘을 믿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다. 우리가 메르케트를 떠날 때쯤에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결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충고를 듣지 않고 탐험을 강행했다.1895년 4월 11일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사막을 횡단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지만 딱히 힘들 것도 없었다. 이 정도는 모두 각오했고 나 또한 이 정도는 되어야 타클라마칸 사막이지 라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1895년 4월 15일 슬슬 금은보화가 매장된 유적지가 나오길 기대하는 눈치지만 나오지 않았다. 역시 유적지를 찾기는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1895년 4월 20일 타클라마칸의 사막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구상 최악의 사막이라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낮에는 엄청난 더위에 몸이 녹아내리는 듯 했고 계속해서 불어대는 모래 폭풍으로 인해서 한치 앞도 보기 너무 힘들었다. 밤이 되면 반대로 영하로 내려가는 추위와 사투를 벌였다. 무엇보다도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2. 탐험의 실패1895년 4월 25일 불길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탐험대의 식수는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탐험대장인 헤딘도 이 이야기를 듣고 공포에 떨었다. 우리가 마지막 우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고용인들은 열흘분의 물을 채우지 않은 것이었다. 헤딘은 직접 확인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했다. “이봐 헤딘 우리가 지금 물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우물로 다시 돌아가서 물을 채우고 돌아오는 것이 좋은 선택이야”라고 탐험대 일원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가 고용한 안내인은 이틀 안 젠장 괜한 짓을 해서 괜히 힘 만 빼고 헛짓거리였다.1895년 4월 30일 날이 밝았는데 낙타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역시 물을 먹지 않고 강행하는 것은 낙타라 할지라도 무리였던 것 같다. 헤딘은 낙타와 쓸데없는 짐을 버리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고용인들은 낙타를 버릴 수 없다며 항의했지만 그렇다고 걷지 못하는 낙타를 데리고 갈수는 없었기에 버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점점 한계점에 다다랐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는 목구멍에 칼을 들이미는 듯 했다.갑자기 헤딘이 안내인인 욜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 인지 봤더니 비축한 물을 혼자 훔쳐 마신 것 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원들 모두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기 혼자 살려고 했던 이 배신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고, 다른 대원은 동아줄로 그를 죽이려 했지만 헤딘은 그를 말렸다.1895년 5월 1일 헤딘이 갈증을 참아내지 못하고 휴대용 난로의 알코올로 목을 축이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 탐험대는 비장한 결의로 물을 찾아 나섰지만 도중에 우리는 쓰러졌다. 어느 누구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있는 곳까지 헤딘이 다시 따라왔다. 우리는 닭의 피도 먹기도 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1895년 5월 4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지 닷새째 되는 날, 발자국을 발견했으나 이것은 우리들의 발자국이었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던 것이었다.1895년 5월 5일 새벽 해가 떠오르자 지평선 위로 짙은 녹색의 선이 보였다. 헤딘과 나는 숲을 발견하고 숲을 향해 나아갔다. 숲에 도착했으나 강을 찾는 것 또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 돼서야 겨우 물을 발견한 나와 헤딘은 물을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계속 마셨다. 얼마 후에는 극적으로 지나가던 양치기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우리는 카쉬가르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1895년 6월 21일 우리는 마침내 카쉬가르에 도착했다. 우리는 사라진 도시를 찾는 데 실패했다. 특히 이 죽을 고비를 탐험하자는 제의였다. 이미 나는 4년 전에 죽기직전까지 간 경험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탐험은 다시 할 생각 이 없었기에 정중히 거절 했다.[사진 1] 요트칸에서 수집한 여래좌상(如來坐像) 1. 헤딘이 수집한 여래좌상1899년 7월 3일 헤딘이 잠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탐험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 있다고 그는 이야기 했지만 나보다 베테랑인 그가 나와 논의할 것이 무엇일까?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틀 뒤에 그를 만나기로 했다.1899년 7월 5일 스벤 헤딘은 나에게 이번에 탐험할 장소와 저번에 탐험한 보라산(요트칸)에서 가져온 각종 유물들과 발견한 유적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특히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처 조각은 나를 유혹하기 충분했다. 동양에서는 ‘여래좌상’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와 유물들을 접하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안전한 장소로만 이동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헤딘이 이렇게 설득하고 나오니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9월에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하라고 했다.2. 카누에서의 생활[사진 2] 카누위의 헤딘의 모습 1899년 9월 5일 우리들은 이슬람 바이와 함께 야르칸드 강변에 있는 라일릭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헤딘의 최종목표는 롭 호수였다. 타림 강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염호인 바로 이 호수로 흘러가는데 몇 년 사이에 호수가 이동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원래 지리학자인 헤딘은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했다. 나는 사실 이런 지리학적인 것보다 고대 유물들과 유적지를 찾고 싶었기에 조금은 지쳐있는 상태였다.1899년 9월 6일 헤딘이 카누를 구입하자고 하기에 함께 카누를 구입하러 갔다. 그는 그 카누 위에서 몇 달 동안 있을 것처럼 보였다.1899년 10월 3일 카누위에서 헤딘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축음기를 틀었는데 스웨덴 국가의 선율이 사막으로 퍼져 나갔다. 이런 음악이 퍼져나간 적이 없었던지 양치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캐러밴은 우리를 쳐다보기도 했다. 이 음악이 퍼져나가자 세상은 멈춘 듯이 고요했다을 출발한지 거의 석 달 만에 일이었다. 우리의 목적지까지는 220킬로미터를 남겨두고 있었다. 계속 가는 것이 불가능 했기에 헤딘이 육상탐험을 하자고 했다. 이 소식에 미친 듯이 기뻤다.1899년 12월 13일 밤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고 눈이 끊임없이 내리는데도 우리는 텐트조차 없어 노숙을 하면서 잠을 잣다. 하지만 물이 없어 죽을 고비를 넘긴 그때와 비교하면 물이 있는 지금은 행복한 것이다. 식수는 운반해 온 얼음덩이를 사용했다.1899년 12월 27일 우리는 실크로드 남쪽에 있는 체르첸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진로를 잡고 타클라칸 동쪽 끝의 롭 사막을 향해 나아갔다.3. 수수께끼의 유적지1901년 1월 16일 우리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고대 유적이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2미터 50센티미터 안팎의 작은 모래 언덕 위에 아주 오래된 고대의 목재 가옥 몇 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유적을 목격했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유적을 유심히 조사해보니 수세기에 걸친 침식 작용으로 이 가옥들 주위의 황토들은 모두 깎여 내려간 데 비해 비교적 높고 건조한 자리만 남게 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주변을 급히 조사해봤다. 나는 이번 여행 내내 지겨운 지리조사에 시달렸지만 어느새 그 지겨움은 다 잊어 버렸다. 바로 고대 중국의 동전과 철제 도끼,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목각 몇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낙타에 싣고 고용인 중 한명을 타림 강가에 있는 그들의 베이스캠프로 돌려보냈다. 우리는 물도 바닥나나기 시작했기에 얼른 이곳에서 출발했다. 몇 시간 갔을까 물을 얻기 위해 모래를 파기로 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삽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딘은 고용인에게 그 유적지로 가서 찾아오라며 돌려보냈다. 삽을 가지고 돌아온 그는 우연히 돌아오는 길에 처음 본 유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헤딘은 나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을 시켜 그것들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같다.
동양의 르네상스 강남문화머리말(지역개관)Ⅰ. 경제적 번영과 도시발달1. 경제적 번영2. 도시발달Ⅱ. 문화, 예술 후원1. 신사층의 후원2. 양주 염상의 후원Ⅲ. 강남지역의 문화1. 원림문화1) 졸정원2) 개원2. 연극문화1) 곤극2) 송성가무쇼3) 서민극3. 식(食), 주(酒) 문화1) 식문화2) 소흥주머리말(지역개관)‘소호에 풍년이들면 천하가 족하다(蘇湖熟天下足)’는 말이 있고 한편으로 대도시인 소주와 항주에는 ‘천상에는 천당이 있고, 천하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天上有天堂 天下有蘇杭)’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남은 아름답고 풍족한 지역이다.강남은 장강 중하류 지역을 통칭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그 하류 삼각주 지역의 강소성, 절강성 및 안휘성 일부에 형성된 오월 문화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에서는 7000년 전에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태동하였고 그것을 기초로 후대 한문화가 형성되었다. 삼국시기 오나라 땅이었던 이 지역은 비교적 오랑캐의 지역이라고 생각했던 이전과 다르게 점차 한족의 문화권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동진대의 팔왕의 난과 5호16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잦은 전란을 피하기 위해 많은 집권층을 비롯한 그 일족들이 대거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후 남송 代에 이르러서는 줄곧 중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성장하여 중국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술과 문학의 분야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양명학과 같은 새로운 사상이 유행됨에 따라 실용적인 지식에 대한 관심과 과학적 정신이 고양되었고, 각 방면의 문화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정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술분야에서는 전통에 도전하는 창의적인 작품들이 양산되고, 자의식이 강한 낭만적인 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다.유럽의 르네상스에 필적하는 이러한 명말(末)의 문예부흥에는 왕실의 행정적인 후원과 경제적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부유한 상인, 문예작품의 감정 수집가, 사대부 혹은 관리들의 호의적인 협력이 있었다. 상업자본이 형성되고 시기술이 굉장히 섬세하다. 양면의 그림이 같은 것은 물론 다른 그림까지 자수가의 손길에 따라 자유자재로 만들어지며 명암과 감정표현 등도 가능해 마치 비단 위에 그림 한 폭이 그려진 듯 느낌을 준다. 이토록 우월한 지리적 환경을 기반으로 화려한 무늬의 비단과 오색찬란한 색실이 생산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비단은 강남지역의 광범위한 하천과 운하에 의해 유통되었고 경항 운하를 통해 북경 및 북부지역으로 판매되었으며, 나아가 장강을 넘어 해외로까지 무역이 이루어 졌다. 비단 뿐 아니라 소주에서 생산되는 견직물은 60%이상이 조선과 미얀마 인도 등의 해외로 팔려나갔다.이에 따라 상업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하였고, 경제적 풍요와 상업자본의 형성은 문화의 발달을 촉진하였고,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상업사회 특유의 정신과 논리가 짙게 밴 문화를 낳았다.2. 도시의 발달명청시대 강남지방에서는 소주, 남경, 항주와 같은 대도시 외에 시진(市鎭)이라 불렸던 다수의 중소도시들이 명대 중엽이후부터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주부의 시진을 예로 들면 정덕연간(1506~1521)부터 건륭연간(1736~1795)까지 72개였던 것이 139개로 증가하여 대략 250년간 2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시진의 수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호구의 수도 증가 하여 도시의 규모 자체가 커졌다. 소주부 오강현의 성택진(盛澤鎭)을 예로 들면, 명대 초기만 해도 이곳은 50~60초 남짓하던 촌락이었는데 청대 강희연간까지 1만여호까지 늘어났다.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었다. 소주부 오강현 진택진의 사례도 비슷하다. 원대에 인구 규모가 수십호에 불과하던 것이 청대 초엽까지 2,3천 호 까지 증가했다.Ⅱ. 문화, 예술 후원후원자란 예술 작품의 경제적, 물질적 담당자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를 이해하고 작품을 평가하고 예술가를 지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경제력을 문화적 힘으로 바꾸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일부가 고급의 문화적 소양을 갖춘 상태에서 개인의 정치적 좌절감을 각종 문화,식민지라고 할 정도로 휘상들의 소금을 이용한 상업 활동이 두드러졌다. 양주로 이주한 휘주상인의 다수는 소금의 유통을 통해 얻은 재산을 각종 귀중본 서적이나 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썼다. 일부 상인들은 황제의 남순을 염두에 두고 화려한 원림을 조성하기도 했다. 일부 가문은 각지의 명사나 왕래하는 신사를 자신의 원림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시문회를 개치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극단을 후원하여 연극문화가 꽃 피우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염상들은 학자나 화가, 극단의 활동을 뒷받침 하는 든든한 후원자였던 것이었다.그런데 청 강희 연간과 건륭 연간에 걸친 양주에서의 문화 후원과 극단양성 활동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발전 추세를 드러낸다. 가택에서의 소수를 위한 폐쇄적 연출에서 대중을 향한 개방적 연출로 전환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러한 양주 염상의 문화 후원과 극단 양성으로 말미암아 청대의 연극 연출은 양주를 위주로 색다르게 흥성할 수 있었다.이렇게 극단 주인의 후원행위는 배우의 의식주 해결 및 사회적 지위 향상이나 화려한 무대의상 및 무대장치의 발달 혹은 대형 무대의 출현과 같은 재정적 측면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심미적으로 성숙하고 양식적으로 변하하는 데에까지 막대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이는 후원자 계층의 예술적 성향 및 경제적 역량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결과이며, 명말청초의 강남지역에서 서구의 문예부흥과 흡사하게 후원자에 의한 전대미문의 예술적 번영이 야기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Ⅲ. 강남지역의 문화1. 원림문화강남지역의 염상들은 원림을 경영하여 아집을 개최하고 화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들은 경제적 능력, 생원 이상의 정치적 자격, 그리고 시서화를 향유할 수 있는 지적 능력까지 갖추었다. 그들은 원림을 경영하여 빈한한 문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장기간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양주의 성안과 수서호 주변에는 원림이 수십 개에 달했다. 한 시기에 이렇게 많이 그것도 연합적으로 원림군이 조성된 것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 왕헌신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소주로 돌아와서 지은 것이다. 졸박한 사람의 정치라는 뜻을 지닌 ‘졸정’은 서진때 문인 반악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1490년 왕헌신은 전방에서 군사문제로 규탄을 받아 곤장 30대를 맞고 말직으로 좌천되었다. 1509년 부친상을 당한 왕헌신은 한적한 시골생활을 누리기 위해 관식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 소주로 돌아왔다. 왕헌신은 당시 소주의 저명한 문인이던 문징명에게 졸정원의 설계를 의뢰했다. 왕헌신의 정치적 좌절은 환관들과의 대립과 관련이 있다. 그가 자신의 정원을 졸정이라 붙인 것은 당시 정치상황을 의식한 의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왕헌신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은 도박으로 원을 서가의 손에 넘기고 만다. 그토록 고매하던 왕헌신이지만 중요한 자식농사는 망쳐버린 것이다.졸정원의 주인 왕헌신처럼 환관의 전횡에 밀려 현실 정치에서 쓰라린 좌절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강남 문인들은 자신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세계를 원림에 재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림에다 현실과는 다른 대안적 세계를 구현했다. 그들에게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세계는 혼란한 현실과는 다른 대안적 세계였다. 산은 양이고 물은 음이다. 한정된 공간인 원림에다 산을 옮겨다 놓을 수 없으니 태호석이나 돌을 산처럼 쌓을 석가산을 대신했다. 그리고 원림중앙에 연못을 파거나 원림 주변으로 물이 흐르게 만들어 양을 상징하는 산과 결합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끌어냈다. 산과 물 사이에는 꽃과 나무를 심어 축소된 자연의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그리고 원림 곳곳에 정, 사, 누각, 당, 등과 같은 건축물을 배치하여 원림을 거닐거나 건물안에서 창문을 통해 축소된 자연을 감상하게 만들어 놓았다.*태호석 설명*중국 원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정원석인 태호석은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좋은 돌이 갖추어야할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 째가 투(투)이다. 실제로 또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통로나 동굴을 통해 지나갈 수 있어야한다. 둘 때 수(수) 이다. 바위는 동남쪽 모퉁이에는 겨울의 설산분위기를 내기 위해 눈처럼 하얀 바위를 쌓아 산처럼 만든 동경이 있다. 바닥에는 갈라진 얼음을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평편한 흰 돌들을 갈아놓아 겨울 분위기를 더했다. 원림의 주인은 개원을 노닐거나 중앙의 연못 주변의 포산루나 주추각과 같은 누각위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음미할 수 있다.Ⅲ. 강남지역의 문화2. 연극문화1) 곤극곤극은 중국 희곡의 황금기인 명나라를 대표하는 전기에서 발전하여 부드러운 음악과 시적인 대사 그리고 섬세한 동작을 그 특징으로 하며, 장엄한 스타일의 경극과는 구분되는 남방을 대표하는 지방극이다. 곡곡을 그 기원으로 하는 곤극은 강소성 곤산 지방에서 시작된 연극이다. 원말 명초에 소주에는 곤상강이라는 음악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는 명나라 가정 연간에 위량보라는 음악가가 당시 유행하던 해염강과 익양강 등 여러 음악을 다듬어 새롭게 만든 희곡 음악이었다. 이렇게 생겨난 곤곡은 명나라 중엽에 강소뿐만 아니라 절강일대로 퍼져 나갔으며, 이후 무려 200여 년간 화려한 명성을 이어 갔다.곤극은 주로 사대부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발전한 지방극 중에서도 특히 유미주의적인 색체가 두드러진다. 그래서 음악의 반주 또한 경극과 달리 주로 피리와 생황, 비파 등의 관현악기를 사용하여 특유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선율로 극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감칠맛 나는 발설을 구사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연기 동작과 화려한 문대가 조화를 이루어 표현 면에서도 여타 지방극과 구별되는 독특한 풍취가 있다.대표적으로 완사기(완사기), 모란정(牡丹亭), 보검기(寶劍記), 장생전(長生殿), 명봉기(鳴鳳記), 옥잠기(玉簪記), 어가락(漁家樂) 등이 꼽히는데 내용상 꿈과 사랑을 노래한 애정이야기가 주를 이룬다.명말에 곤극 공연은 주로 배타적이고 비공개적인 상황 하에 극단의 주인 자신 혹은 친지 및 소수의 벗들에 국한된 관중이 개인 저택의 청당이나 원림에 있는 조그만 희대에서 관람하는 당회 공연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물길이 발달했던 강남지역의 한다.
휘주상인과 휘상의문화목차Ⅰ.명청기의 상업발달Ⅱ.휘상의 상업발달원인1) 과다한 유입인구와 상대적으로 좁은 경작지2) 무거운 토지세금3) 지리적 조건 - 수로의 발달로 인한 유리한 수로체계Ⅲ. 상업주도의 변화 - 진상과 휘상의 교체Ⅳ. 휘주상인 유교숭상1) 유교숭상의 원인2) 휘주상인의 유교적 경향Ⅴ. 휘주상인의 문화1)원림문화2)차문화명청기에는 강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상업망을 구축하고 삼품경제를 주도했던 상인집단은 휘상이었다. 이 휘주상인은 초기 휘주라는 일개 ‘부’에서 성장하였다. 휘주는 주로 명청시대의 휘주부의 6개현인 흡현, 휴녕현, 이현, 기문현, 적계현, 무원현을 가리키는 지역명칭이었다. 현재는 무원현과 적계현이 각각 강서성, 안휘성 선성지구 관할로 들어가고 흡협, 휴녕현, 이현, 기문현도 황산시도 개칭되어 휘주라는 명칭은 사실 완전히 역사지리상의 명칭이 되었다.사실 휘주는 명청시기 이전만 하더라고 7이산이고 1이 경작지이며 1이 밭이라 할 정도로 험악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명청시기 이 지역에서 나고 성장하여 경제를 휘상이 주도하면서 화려한 건축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휘상은 명청기에 나타난 강 상인집단 중에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상방과는 비교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독특한 부분은 유상(儒商)이라 불릴 정도로 상인이면서도 문인의 풍격이 있었으며 명청기 강남 문화 발달에 실질적인 후원자였다는 점이다. 이에 명청기의 차문화는 문인 풍류적이며 바로 강남문인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시기 휘주 지역이 명차생산지로 유명하였다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될 부분이다.Ⅰ. 명청기의 상업발달명청 시대와 이전시대를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상업의 번영이다. 명 초기에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정하고 제도적 장치를 통해 문신들을 관리로 등용하며 이갑제, 사민 개간정책의 실시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농업 경제를 이루었다.그러나 사회경제정책은 불공평한 상황이 점차 심각해졌고 과거를 통해서 사대부가 되는 일이 15세기 중기부터 급증하여 명말에는 50만 명으로 증가하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정성을 가졌다. 이러한 천혜의 지리적 조건은 자련스럽게 피난민들이 이주해 왔고 이곳에 8세기 당대 안사의 난ㅇ부터 남송 전환기까지 전란이 있을 때 마다 북방의 유력가문들이 대거 남하하여 휘주의 종족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산으로 둘러싸인 휘주는 높은 산과 깊은 골이 안전함을 제공하였으나 경작할 땅이 부족하였고 일구밀도는 높았다. 그러므로 휘주인들은 기예를 가지거나 사업에 종사하거나 다른 부에서 생계를 구하는 경우가 10명 가운데 9명이었다.또한 명말에는 상업을 경영하는자가 다수 출현하였고 농업과 상업의 비율이 3대7로 심지어 1대9로 까지 변화했다. 그만큼 휘주에서 많은 상인을 배출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양한 측면이 있으나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1) 과다한 유입인구와 상대적으로 좁은 경작지허승요의 기록을 살펴보면 휘주의 풍속은 고향을 떠나기를 좋아하며 걸핏하면 수 십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산이 많아 토지는 적은데 인구는 많아 나가서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동란기 때마다 많은 수의 인구가 유입되어 인구 과다 현상을 겪었고 토지는 척박하고 풍년이 드는 경우도 매우 적어 생산되는 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산에서 나오는 산물과 이를 이용한 공예품 생산이 많았다. 차, 칠기, 목재, 대나무 공예품은 고래로부터 빈약한 농업조건으로 인해 휘주인들이 외지로 나가 필요한 양식고 바꾸는 상업활동의 물질적 기반이었다.중국의 민감속담에 ‘전생에 덕을 쌓지 않으면 휘주에 태어나 15~16세가 되면 외지로 보내진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지블 멀리 더나 장사에 나서는 일이 휘주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2) 무거운 토지세금휘주지역은 명대에 들어와서 토지세금이 무겁기로 유명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점도 사람들이 농경을 포기하고 의학을 배우거나 그림 그리기, 요리, 토목기술을 익혀 생업의 밑천으로 삼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생업교육은 생존해 나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을 뻗기 시작해다. 특히 명 성화연간의 개중법의 변화에 따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종족합자(宗族合資)와 대본(貸本)등의 방식으로 거대자본을 성립시키고 경영은 혈연 결합관계 및 지연을 기초로 하였다. 그러므로 휘주 출신만의 독점적 자본을 축적하고 전국적으로 그 상망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당시 유력한 상방이었던 진상을 누르고 명청기 가장 영향력 있는 상방이 되었다. 휘주 방언이 금융업계의 공용어가 될 정도로 휘상의 경제에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따라서 양주 소주 남경 뮤한 안경 무창 한양 항주 등 장각 지역을 활동무대로 나아가서는 전국 각지로 진출하였고 해외까지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명청기 이 장강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고 소비가 많은 지역으로 강종문물과 산업이 최고로 번영하였고 이곳에서 ‘휘상이 없으면 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無徽不成鎭)’이라 할정도로 많ㅇ느 영향력을 지닌 상방으로 성장하였다.Ⅳ. 휘주상인의 유교숭상1) 유교숭상의 원인휘상의 출신지인 휘주는 남송의 대 유학자인 주희의 고향이기도 한 곳으로 동남추노(東南鄒魯), 주자벌열(朱子閥閱)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풍이 가득한 곳이었고 휘주인들은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주희의 외조부 축확(祝確)은 상업에서 번 돈으로 주의 땅을 반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주희는 어린 시절 외조부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부유한 사인집안의 뒷받침으로 유명한 이학자가 되어 휘상의 가문을 빛낸것이었다. 이는 휘주인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주희의 고향인 무원현 사람들이 긍지로 여기는 말이 ‘독주자지서, 복주자지교, 병주자지례(讀朱子之書, 服朱子之敎, 秉朱子之禮)’ 즉 주자의 책을 읽고 주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주자의 예를 지킨다는 것이니 이 마을이 유학을 얼마나 숭상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재 알려진 것만해도 7품이상 관원이 36명 진사합격생이 16명, 문인학사 92명이 배출되었다. 게다가 이들이 남긴 저작물이 333부 582권이 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5부 78권이 사고전서에 성공한 휘주 상인출신의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휘상은 중국 역사에 나타난 10대 상방 가운데 유독 유상(儒商)으로 불리었다.2) 휘주상인의 유교적 경향휘주상인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상인집단과 달리 유교를 숭상하였고 학문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유교를 중요시하고 학문을 중시한 휘주상인들은 다른 상인집단과 차별화되었던 유교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 째 휘상들은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학자는 치생을 근본으로 해야한다.’라는 유학자의 풍격을 체현하였다. 유명한 휘상 가운데 허문림은 시진에서 상업활동에 종사하면서도 손에는 책을 들고 앉아서 장사를 하였고, 평생토록 우애와 효도를 다하고 유생처럼 글 읽기를 좋아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원의 한 상인가문은 성현의 책을 읽을 때에는 문장의 과명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아우들과 조카들에게 가르치니 비록 상업을 경경하였지만 역시 유풍이 있었다. 이는 상업에 종사하여도 유생의 본색을 버리지 않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둘 째 상업을 경영하면서 유교적인 도덕 규범과 행동 양식으로 이익보다 義를 우선시했다. ‘작은 이익에 급급 하지 않는다.’ ‘義에 밝고 판단을한다.’ ‘무뢰한과는 무리짓지 않는다.’ 등의 말들은 당시 휘상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흡현의 상인 오남파(吳南破)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상업 신용을 중시하여 말하길 “남들이 나에게 거래를 하면서 사기를 친다면 나는 차라리 신용을 지키겠다. 오척동자라 해도 그가격을 속이지는 않겠다.” 라고 하였다. 또한 흡현의 상인 허헌은 “오직 정성으로 남을 대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한다. 술수로 사물을 제어하면 사물은 끝내 자신과 친밀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며 誠과 義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어 그 덕을 우러러보고 점차 재산이 더욱 쌓여갔다. 이렇게 상업으로 번 자본을 고향인 휘주에서는 일족의 인재 확보와 방편으로 종사를 짓고 족보를 편찬하거나 족전을 설치하는데 주러 썼으며 빈자를 구휼하기도 했다. 이처럼 명청기 휘상들의 도덕적 알 수 있다. 원림은 아집에서 필요한 책상, 지필묵, 다구, 과일 등을 갖추기 용이하였고, 특히 아집에서 지어진 시를 책으로 엮어 출간하기 매우 적절 했다. 게다가 원림 안은 숙식은 물론이거니와 장서루 등이 있어 발간된 시집을 보관하고 성안에 널리 배포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도 이점으로 작용 했다.양주는 소금의 집산지였다. 휘상들이 소금으로 막대훈 부를 축적하였고, 그 막대훈 부를 동원하여 경관이 빼어난 원림을 조성한 것이었다. 당시의 양주의 성안과 수서호 주변에는 원림이 수십 개에 달했다.한 시기에 이렇게 많이 그것도 연합적으로 원림군이 조성된 것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하다. 당시에 양주에 모여있던 소금장수들은 건률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많은 물량을 투자하여 원림을 조성하였던 것이다.강남지역의 염상들은 원림을 경영하여 아집을 개최하고 화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들은 경제적 능력, 생원 이상의 정치적 자격, 그리고 시서화를 향유할 수 있는 지적 능력까지 갖추었다. 그들은 원림을 경영하여 빈한한 문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장기간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청대 양주 지역의 염상 중 휘상 출신인 마왈관과 마왈로 형제의 소영롱상관은 문인 당건중, 려악, 전조망, 요세옥, 루기, 정몽성, 호기항, 왕옥추, 방사서, 진장, 민화, 요이전, 항세준, 장사과, 고상, 금용, 육석주, 정경, 조일청, 유사서 등 40여 명과 자주 아집을 개최하였다. 소영롱산관은 본래 일종의 장서루(장서루)로서 마씨 형제는 사방의 명사들을 소영롱산관으로 불러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독서하고 시회를 즐겼다.마왈관 형제는 양포(讓圃)에서 한강아집을 개최하였다. 이 아집은 마왈관이 문인 호기항과 함께 중양절을 맞이하여 기획한 것이었다. 아회 후에는 한강아집 12권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아집에서는 특별히 호호 제채 근채 기묘 호아 채태 등의 진귀한 봄나물을 맛보도록 제공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집을 위한 원림의 물질적 제공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풍성했는가를 보여주고